瑞興金氏 惕若齋公派 略史
서흥김씨 척약재공파 약사
고려 명종13년(1183)에 탄생하신 휘(諱) 보(寶) 시조 이래 28세손 경기안성 기환(基煥) 종손(宗孫)까지 831년을 이어 온 서흥김문(瑞興金門) 종원 총 수가 아직도 인구 3만이 채 안 된다. 우리 김문의 종원 수가 작다는 것은 다소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5월 대종회에서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등 전국 각지의 종원들이 어우러져서 다양한 목소리로 화목을 다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우리 문중의 자랑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 서흥 김문이 호남지방 영암(靈岩)에 세거(世居)한 때는 한훤당(寒暄堂) 선생이 순천(順天)에서 돌아가신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 이후다. 한훤당의 숙부 9世 익재공益齋公 휘 총(總) 선조님이 호남의 파조(派祖)다. 익재공은 선생의 사화로 말미암아 가문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상황에서 한훤당의 권유로 영암의 명문가 전주 최씨 연촌(烟村) 덕지德之선생의 데릴사위가 되어 위기를 모면한다. 익재공의 손자 11세 죽오당(竹梧堂) 휘 건(鍵)은 학문이 높아 27세에 중종(中宗)의 아들을 가르치는 일, 즉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냈으며 나주군 다시면에 선영이 있다.
영산강 하역의 풍부한 물산을 바탕으로 나주(羅州)는 선사시대 이래로 호남을 대표하는 큰 고을이다. 금성산 자락의 김안동(金安洞)은 고려 충열왕 때 재상을 지내던 때 정가신(鄭可臣), 조선 초기 명신 신숙주(申叔舟)를 배출한 호남3대 반촌(班村) 중 한 곳이다. 익재공의 증손(曾孫)인 척약재공(惕若齋公) 휘 응전(應筌 12世)께서 여산 송씨 처가와의 인연으로 이곳에 터를 내리셨다. 족보에 따르면 척약재공의 삼촌인 죽오당이 1513년, 척약재공의 손자 휘 우건(宇建)이 1575년에 태어났으므로 척약재공의 김안동 이거(移居) 시기는 1550년 무렵 명종(明宗) 시대로 추정된다.
척약재공파 묘역은 척약재공과 두 아드님, 손자 1분(進士公)과 증손 두분 도합 6기의 묘소에 한정하여 시제(時祭)를 모시고 있다. 척약재공 휘하 16世 아래 28世孫까지 대를 이어 오는 동안 13世 덕의공(德儀公) 휘 봉기(奉紀)<하촌문중(下村門中)>, 16세 문숙공(文叔公) 휘 성주(聲周)<만연동門中>, 16세 성재공(誠齋公) 휘 성우(聲羽)<원당문중(元堂門中)>으로 분화되었다. 누대에 걸쳐 원당문중과 하촌문중이 척약재공파 문중사를 공동 관리해 오던 중 근년에 만연동 문중에서 합류하였다.
씨족별 집성촌(集姓村)이 권력구조의 기반이었던 향촌(鄕村) 사회에서 처가살이로 터를 내리려고 했던 서흥김문이 기존 토착 세력(羅州 鄭氏, 河東 鄭氏, 豊山 洪氏)과 맞서 명문 사족(士族)으로서의 존재감과 위엄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은 매우 치열했었다. 그 싸움의 흔적이 여러 형태로 전해져 온다. 조선조 고종때 나주 정씨들과의 토지 소유권을 두고 다투는 송사를 통해 얻어낸 판결문(완문; 完文)이 남아 있고, 또 기우(基禹) 대부께서 선산 묘역을 침범하려는 타 성씨들과 대차게 싸워나갔던 비화는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전해져 온다.
우리 서흥김문은 타 성받이 3개 문중과 함께 향약[鄕約 : 지역 문벌들이 지방자치를 위해 만든 규약]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김안동 지배 문벌로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였다. 500년의 내력을 가진 나주 김안동 향약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는 뿌리 깊은 문화유산이다. 한석봉(韓石峯)이 쓴 현판글씨로 유명한 쌍계정雙溪亭은 나주 일대의 시인 묵객들이 노닐던 정자로서 시회와 계회契會를 치르던 곳이었다. 지금 우리 문중을 대표하여 대식(大埴) 호남 종친회장과 함께 棟埴 종원이 이사로서 활동하고 있다.
광해군 2년(1610년) 한훤당께서 5현중 수현(首賢)으로 문묘에 배향된 이래 서흥김문은 전국 어디에서나 최고의 명문가 대우를 받았다. 나주 향교(鄕校)에서 봄가을 석전제(釋奠祭)를 모실 때는 늘 서흥김문에 헌관(獻官) 망장(望狀)을 보내 왔다. 1962년경 향교 노복(奴僕)이 선친께 망장을 전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리 성재공파 문중의 자랑이며 보물은 1731년 신해년(辛亥年)에 발간된 족보(族譜)다. 신해보(辛亥譜)는 현재 성재공파(誠齋公派) 문중에 1질, 영남 장파에 1질만이 전해져 오고 있다고 한다. 우리 문중에는 인쇄본을 만들기 위해서 붓으로 쓴 초본(草本)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족보를 펼쳐 들 때마다 조상의 혼백(魂魄)을 뵌 듯 경건한 마음이 저절로 인다. 그 소중한 보물을 영남 문중에서 보사(譜事)하는 데 참조하도록 몇 년간 한훤당 종택에 위탁 보관하였던 적이 있었다.
1987년 여름, 선친[先親, 호 금사錦思 휘 윤식允埴]의 지시를 받아 본인이 직접 현풍에 거주하시는 한훤당 종택 병의(秉義) 종손을 찾아뵙고 신해보를 되돌려 받아 온 후, 성재공파(誠齋公派) 문중에서 보관 중이다.
2014년 12월 5일
태룡(兌龍 27世 호남 나주)
첫댓글 전라남도 나주 일대에서
서흥김문이 명문가로 자리잡기 까지의 내력 잘 읽었습니다.
선친 윤식(允埴) 고문의 유지를 받들어
조상님의 유덕을 기리고 빛내는 일을 맡아 애써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주 한옥마을에 세워지는
조상님을 모시는 추모관 관련 소식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서흥김씨 척약제공파 약사를 읽으니 문득 錦思 윤식 어른이 생각나네요.
정말 서흥문중의 주춧돌이셨습니다.
잘 읽었읍니다 신해보 영인본이 있는지요? 종원의 한사람으로 기회되면 한번 보고 싶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