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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26일, 화요일. 맑음, 온화.
비 내리고 춥던 어제와는 달리 따뜻한 날이다. 걷는길 탐사에 이보다 더 좋은 날은 없다.
오늘은 장수구간 탐사활동 세 번째… 라기보다, 지금까지 했던 탐사경로를 조금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대체노선은 없는지, 걷는길 경로로 채택하려면 어떤 점이 해결되어야 할지 등을 보러 나가는 것이다.
1. 마령재.
지난번에는 장수군 쪽에서 대성리 ‘꼭대기(必德)마을’을 출발하여 팔공산 마령재를 올랐었는데, 오늘은 진안군 쪽에서 마령재를 올라가 본다.
백운면 신암리에서 장수읍 송천리로 넘어가는 큰 고갯길로는 이미 차도로 바뀐 ‘서구이재’길(백장로, 742번 지방도)이 있지만 이 고갯길의 옛 버전은 또 다른 기회에 찾기로 하고, 오늘은 마령재 길을 선택한다.
신암리 신암제(어떤 지도에는 ‘화암제’) 저수지 옆을 지나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옛길로 접어들면, 그곳은 산그늘로 어두운 골짜기다.
늦은 봄, 벚꽃이 만개하는 저수지 둑길은 잠깐이지만 또 산책과 사진찍기의 명소가 되기도 하는 곳.
이 일대에는 중대산의 이름을 딴 '고중대'라는 마을이 있었고, 저수지에 수몰된 ‘임하’라는 마을도 있었고 - 임하마을은 신암리의 으뜸이던 마을(원신암)과 합하여 ‘임신’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살아남았다 - 이밖에도 고중대와 임하를 합한 '고림하', 또 어떤 연유에선지 ‘고을림’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도 있었다고 지명사전은 전한다.
지금은 비어가는 산촌의 한적함만 남았다.
‘천상데미’ 펜션 옆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고갯길이 시작된다. 편의상 이 펜션을 기점으로 거리를 재기로 했다.
5백여 미터를 올라가면 옛 ‘고중대’마을로 들어가는 좁은 산길이 왼쪽에 보인다.
2백여 미터를 더 올라가면 왼쪽으로 임도 입구(‘A지점’으로 기억해 두자). 우선 이 임도는 잠깐 접어두고 마령재 올라가는 주도로를 계속 따라 오른다.
길은 이미 사용하지 않게 된 고갯길 초입답게 북쪽 길 특유의 음습함과 초록색 이끼류 식물들로 덮여 있다. 숨어있는 길이 늘 그렇듯, “아, 좋다!” 하는 작은 탄성을 올리기에 충분하다.
구불구불 구불구불… 자동차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어서 비교적 편하게 올라간다. 고도 720미터 정도까지 올라간 곳에 자작나무 숲이 있어 그 흰 수피가 멀리서도 금방 눈에 띈다.
출발점에서 2.6킬로미터, 마령재 정상에 다다른다. 지난 번 반대편에서 올라왔던 바로 그 지점에 다시 선 것. 고도는 814미터. 출발점과의 고도차는 약 280미터니까 경사율이 10퍼센트를 조금 넘는다. 그냥저냥 걸을 만하기는 하다.
다만 대성리 필덕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오래 쓰이지 않아 정글이 되어 있는 것과, 도처에 사유지(축사·목장)가 걸쳐져 있는 것이 문제로 남는다.
마령재 정상에서는 먼저도 언급한 것처럼 길이 여섯 갈래로 나뉜다.
①성수산으로 향하는 능선길, ②팔공산 정상으로 향하는 능선길, ③신암리를 출발하여 올라온 길, ④짧은 순환형 임도(이 임도는 앞의 길③과 만난다), ⑤대성리 필덕마을로 내려가는 거의 묻힌 길, 그리고 ⑥대성리로 내려가는 또 다른 임도.
내친 김에 마지막의 임도⑥을 조금 더 따라가 보기로 했다. 길의 폭은 자동차가 다닐 만한 정도로 넓은데 노면은 돼지가 파놓아 울퉁불퉁하고 낙엽과 습기가 많아 얼마 가지 못하고 차를 세웠다.
차를 내려 걸어간다. 무슨 목적에서인지 이 높은 잿마루의 능선길을 최근에 산림담당 관서에서 손을 보아 놓은 듯, 잡목을 정리한 흔적이 역력하다.
마령재 정상에서 약 5백 미터, 드디어 장수 땅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능선 마루에 도착.환호가 절로 터져 나온다.
발 아래 대성리가 있는 ‘대성고원’ 지역은 물론이고 오른쪽으로 산서면, 더 오른 쪽으로는 임실 오수면 지역까지 한 눈에 다 보이는 엄청난 조망지점이었던 것.
하늘도 지금까지의 북쪽 하늘과는 매우 다르다. 멀리는 구름을 허리에 두른 지리산 천왕봉까지 보인다!
뒤돌아(북쪽) 보면 진안 백운면의 선각산과 삿갓봉의 윤곽이 뚜렷하다.
산의 정상을 꼭 오르려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 만하다.
‘마령(馬靈)재’의 이름에 대해서는 “백제시대 어느 장군이 애마의 시체를 이 재에 묻었더니 3년간 밤마다 말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는 것이 거의 정설에 가깝게 통용되고 있는 듯하나,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말의 시체를 왜 힘들게 이 잿마루까지 싣고 와 묻었으랴.
“장수·임실에서 마령현(마령면·백운면·성수면 등 현 진안군의 남쪽 구역의 옛 이름)으로 넘어가는 재”라는 단순한 뜻이었을 것이다.
물론 “마령현은 왜 마령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지겠지만 이는 백제 때의 이름 ‘마돌(馬突)현’을 신라시대에 마령으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돌(突)의 한자가 ‘돌격·충돌’ 등에서처럼 ‘사납고 급작스러운’ 뜻을 가진 것이어서 순화시킨 것이라고 추측.
어디까지나 사설(私說)입니다만.
2. 팔공산 허리를 감아 도는 임도.
마령재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로서 우선 짧은 환형 임도를 택했다. 위에서 말한 여섯 갈래 길 중 ④.
이 임도는… 높낮이 차이가 거의 없는 등고선을 따라 편안하게 한 바퀴 도는데 어떤 이의 목장이 있던 땅을 두르고 있는 것이라 한다. 지금은 목장이 운영되지 않고 있다. 잠깐만에 환형 임도는 끝나고 다시 ③번 길로 합류하여 되내려간다.
이윽고 A지점에 다다른다. A지점에서는 다른 임도가 시작된다. 이 팔공산에는 임도가 여러 갈래로 많이 나 있어서 지도를 놓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을 글로 쓰려니까 이렇게 번잡하다.
지도를 그림으로 만들어낼 재간이 없는 것도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
이 임도도 로맨틱하다. 거의 사람이 다니지 않는다. 역시 훨씬 낮은 고도에서 비슷한 등고선을 따라 거의 수평이다시피 높낮이 차이가 없는 산허리를 감아 돈다.
진안고원길 회원들이 이 임도를 한 번 걸은 적이 있다. 출구 쪽에서 ‘서구이재’ 길과 만나게 되는 그 길 말이다. 또, 만륙 최양(萬六崔瀁) 선생의 돈적소(숨어살던 곳)가 숨어있는 그 길이기도 하다.
이 길을 자동차로 달리는 데에는 한 가지 불안요소가 따르는데 그것은 출구 쪽에 차단기가 내려져 있는 경우이다. 꼼짝없이 되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불안이나 위험은 항상 우려하는 대로 현실로 나타난다.
3킬로미터 남짓을 달려 간 자리에 역시 차단기는 내려져 있었다. A지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느슨하고 한적한 임도를 왕복하면서 마음은 느긋했고, 만륙선생의 돈적소로 들어가는 길 입구를 확실히 알게 된 것만도 소득이었으므로 크게 시간 낭비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만륙선생은 고려말의 충신으로 이성계 장군과는 친구 사이였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새 나라 임금으로 등극한 후에 벼슬을 줄테니 새 정부에 협조하라고 여러 번 간청했으나 뿌리치고 진안으로 내려와 숨어 산 곳이 이곳 팔공산 기슭의 험한 바위 아래.
이곳을 돈적소라 부른다. 임도에서 돈적소로 향하는 들머리를 찾기가 쉽지 않은데, 오늘은 같은 길을 왕복한 덕분에 확실히 그 입구를 알게 된 것이다.
최양의 망국에 대한 충절은 세종대에 이르러서야 세종이 직접 쓴 간찰 한 통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끝내 충의를 배반하지 않은 절개를 찬양하며 “최양의 후손에게는 병역을 면제하고 과거에 합격만 한다면 가장 높은 벼슬을 주라”는 왕명까지 포함된 내용이다.
‘아버지 찬스’ 같은 것을 아무 때나 휘두르는 요즘의 세태에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 절개요, 또 끝내 머리 숙이지 않은 '새로운 불충'에 대한 관용이라 할 것이다.
되돌아와 원래 올라왔던 길로 되짚어 신암 저수지 아래까지 내려오느라 시간을 꽤 허비하긴 했다. 이번에는 서구이재 길을 타고 장수 땅으로 넘어간다.
3. 서구이재.
매우 높고 가파르고 꼬불거리고 길다. 옛 지도에도 험난하고 긴 재라고 소개되어 있을 정도다.
‘서구이재, 서구리재’.
부르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고 뜻조차 모호하다.
심한 경우 어떤 사람들은 ‘鼠求餌(쥐가 먹이를 구하는) 형국의 풍수’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딱 들어도 이상한 해석을 하기도 하는, 이 수수께끼 같은 이름의 고개.
최근에 옛 지도를 통해 드디어 그 비밀을 풀었다.
구구한 설명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답만 먼저 말하면 원래는 ‘호미(鋤)재’ 또는 ‘호미고개’였다. 애당초 왜 호미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는 아직 조사하지 못했고, 이두식 한자표기의 결과 ‘서구이재’로까지 변천했다는 확신은 가지고 있다.
서구이재 정상 옛 휴게소·식당 자리에 최근 새로 지은 집이 깔끔하다. 하지만 사유지라 들어가지 못한다. 이곳에서도 팔공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 입구를 만날 수 있다. 잠시 장수읍 송천리 땅을 내려다보며 쉰 다음, 길을 재촉.
4. 자고개 ~ 장남저수지 사이. 신무산 허리를 감는 임도.
장수읍에서 13번 국도(비행로)를 타고 남하, 신무산과 팔공산을 잇는 금남호남정맥의 요충인 ‘자고개’에 도착한다.
이 고개는 옛 지도에 척치(尺峙)로 표기된 곳이므로 ‘자고개’가 옳을텐데, 사이시옷(ㅅ)을 무분별하게 쓰는 이 지방 언어관습 탓에 ‘잣고개’, ‘작고개’ 등 구구각색 표기된 지도나 안내판 등이 많다.
행여나 하고 살펴보았으나 잣(栢)나무가 많았을 것 같지는 않은 지형이다.
이번에는 팔공산 쪽이 아닌, 신무산의 임도를 타고 남하한다.
첫 얼마동안은 거의 높낮이가 느껴지지 않는 느슨한 임도다. 시멘트 포장도 잘 되어 있는 비교적 넓은.
한 굽이를 크게 돌자 성벽 같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지은 누군가의 집이 어마어마한 위세를 자랑하고 있다. 조경용으로 심은 주목이며 소나무들이 돈 꽤나 들였을 법하다.
어지간한 재산가여서는 꿈도 못 꿀 호화로움. 대기업 총수의 별장일까? 싶기도 하다가, 그런 사람이라면 경기도·강원도 가깝고 풍광 좋은 곳 다 놔두고 왜 이런 산간오지에? 싶기도 하다.
점점 한적해지고, 약간의 오르막 내리막이 이어질 뿐 매우 가파르거나 하지는 않은 임도였다. 이곳 임도 역시 지나가는 자동차 한 대, 사람 하나 볼 수 없다. 시멘트 포장길이 끊겼다 이어졌다 하는 위로 갈색 낙엽은 하염없이 쌓여 썩어간다.
도중에 채석광산이 있던 봉우리로 가파르게 치고 올라가는 길 입구가 보이는데 이미 채석사업은 그만 둔 지 오래여서 길은 잡목 숲이 되었다.
2.6킬로미터쯤의 곳에 햇살 좋은 곳이 있어 차를 세우고 잠깐 내렸다. 뒤 돌아보니 팔공산의 수려한 정상이 깨끗한 윤곽을 하늘에 던져주고 있다.
오른쪽 발아래는 식천(食川)리. 꽤 넓은 들이 있는 골짜기인데 잡목숲이 눈앞을 가로막아 마을이 잘 보이지는 않는다.
좀 더 달리면 장남 저수지의 둑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높은 데서 보면 하얀 둑이 두 줄로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고 그것이 하나는 둑이고 다른 하나는 둑 바로 아래에 둑과 나란히 낸 도로라는 것을 알게 된다. 특이한 설계다.
여기까지는 전체적으로 대강 5백 미터 내외의 느슨한 능선을 따라 나 있는 약 7킬로미터의 긴 임도구간이었다.
마지막(5.5킬로미터 지점) 내리막에서 꽤 가파른 모퉁이를 만나면서 두 채의 집이 좁은 임도를 끼고 좌우로 있어 매우 조심스러웠던 것을 빼면.
(그런데 이 집이 오봉기님의 집인 줄 나중에 알게 된다. 탐사를 끝낸 오후에 김경선님을 만났더니 ‘장수 탐사팀’으로 서슴없이 그를 추천하는데, 그의 집이 식천리라 하여 깜짝 놀라며 그 우연에 무릎을 친 것.)
임도를 벗어나 나타난 곳은 장남마을과 장남 저수지.
또 한 번 깜짝 놀란다.
장남호 둑의 공법이다. 그 중에도 남아넘치는 물을 흘려보내는 구멍과 홈통, 이른바 ‘여수토(餘水吐)’를 설계한 방법이 놀라웠다. 바위투성이 암벽을 그대로 도랑 삼아 물을 쏟아내 보내고 있는 것. 물은 허연 물거품을 일으키며 바위 홈통을 따라 떨어지면서 자연계곡의 폭포를 연상시키는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시멘트로 각진 구조물을 만들지 않은 것이 얼마나 반가운지. 이 물이 요천의 발원지(?)가 됨을 나중에 알았다.
(그런데, ‘여수토’는 일본말의 단어입니다. 혹시 우리말로는 뭐라고 하는지 아시는 분?)
여기까지 답사하고 우선 점심을 먹기로 했다. 다소 멀지만 차를 달려 번암면 소재지까지 나간다. 번암면 중심지는 많이 달라져 있었으나, 근대화시기의 정취를 풍기는 옛 장터거리의 식당이며 도로를 따라 지은 긴 한옥 상가건물 등은 여전히 그대로 있다. 장터였던 자리는 주차장으로 변했고 최근에 너무나 유행인 농촌중심지 활성화사업 등의 영향으로 새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지만 주거구역의 모습은 꽤 규모 있던 옛 마을의 면모를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긴 돌담으로 둘러쳐진 마을안길, 반갑다.
5. 장남저수지 ~ 비행기재 사이, 개동산 능선 임도.
점심 후 다시 장남저수지 둑 아래로 돌아와 나머지 임도구간을 달린다.
요즘은 농사철이 아니어서 농업용수를 많이 내려 보내지 않는 듯 저수지에는 물이 거의 가득 차있고, 그 때문에 지금은 쓰이지 않는 옛 개울을 건너던 다리가 물에 잠겨 난간 부위만 드러나 보이고 있는 장면도 이채롭다.
이제부터는 장남 저수지 반대쪽 서안(西岸)을 끼고 돌아 북쪽을 향해 임도를 달릴 차례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정이 다르다. 느슨했던 임도는 1.5킬로미터를 지나자 가파른 경사를 보이며 저수지 상류쪽으로 올라간다.
저수지 수면이 점점 발아래로 멀어져 보이고, 급기야 승천(昇天)이라도 하는 느낌으로 산 능선을 향해 치고 올라간다. 한 굽이 한 굽이 돌 때마다 아찔아찔하다…
정국장의 차는 이런 길을 수도 없이 다녔다고 한다. 그 역전의 애마가 벌써 10년을 험한 길을 달렸으니 비명을 지를 법도 하다. 그냥 얻어 타고 다니는 나로서는 불만이 있을 수 없다.
무시무시한 고도와 덜덜거리는 속도에 압도되어 사진도 몇 장 찍지 못했다.
순식간에 710미터 높이까지 올라간 우리, 잠시 차를 세우고 숨 돌리며 주변을 돌아본다. 장남제 둑에서 약 5.6킬로미터.
멀리 팔공산 마령재 아래 필덕마을·원대성마을·금평마을, 그 아래 갑자기 툭 떨어지는 느낌으로 낮게 내려와 있는 식천리…
우리는 두 차례의 탐사를 통해 팔공산과 신무산 사이의 고원분지를 한 바퀴 휘돌아 오고 있는 것이다. 두 산의 맥을 잇는 지점은 비행기재와 자고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비교적 낮은’(그래도 750미터) 개동산의 9부 능선. 과연 무진장고원이라는 말을 실제로 증명해본 투어였던 셈.
3킬로미터를 더 달려 비행기재로 나오니 국도 13호선(비행로)과 만난다. 이 도로를 자동차로달리면 자고개에서 이곳까지 순식간이었을 것이로되…
길게 한숨이 나온다.
고개입구에 누가 세웠는지 ‘대성고원(大成高原)’이라 새긴 돌덩이가 서 있다.
6. 내친 김에 대성리 마을 돌아보기.
큰길로 나가지 않고 다시 마을로 들어간다.
구암·구평·오동·대덕 마을들이 대성고원의 비교적 낮은 지대에 모여 산다. 멋진 둥구나무와 그 옆의 정자, 우물터, 동네 교회, 선돌 따위의 풍경이 고향에 온 듯 푸근하다.
애당초 이 고원에까지 들어와 마을을 이룰 생각을 낸 사람들은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정국장은 그들의 사연을 듣기 위해 마을회관에 들러 할머니들과 잡담 나누기를 매우 잘 하는 타고난 답사가다.
7. 에필로그 - 장수 탐사팀 결성.
장수군 지속가능발전협의회 김경선님이 자기에게 들러 차 한 잔 마시고 가라고 연락 왔다.
약속장소로 가자 마침 길동섭 선생과 함께 문화관광해설가 교육을 받고 있다가 달려 나왔다.
그 자리에서 무주 시민들의 활동상을 전한 즉, 장수팀의 결성을 순식간에 이루어 낸다.
이 여성은 이런 일을 매우 매끄럽게 잘 해내는 특별한 재능의 소유자다.
고맙기만 하다.
차를 타고 다니는 것도 걸으면서 애쓰는 것 못지않게 피곤한 일인 것을 알았다.
종일 길 찾으며 운전까지 한 정국장은 더 힘들어 한다.
귀가 즉시 나가떨어짐.
(최태영)
첫댓글 많은 곳을 다니시고 옛길 찾아 지명의 유래를 밝히시고자 노고가 많으시겠습니다
경선샘 왜 저한테는 말씀을 안해주셨는지 ㅎ
제가 관심있는거 잘 아실텐데요, 길동섭 선생님도 엊그제 뵈었었는데요
생각해보니 지난 12월 장수 포럼에서 뵈었던
아 이제 알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