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추관,기사관,사과일록(春秋官,記事官,司果日錄)
【 8월 】
〖초1일 을해〗맑음. 서늘한 바람이 분다.
임금의 비망기(備忘記)에 이르기를 윤8월 15일경에서 20일 사이[望念間]에 알성(謁聖:임금이 문묘에 참배함)할 날짜를
택일(擇日)해서 아뢰라고 했더니 알성(謁聖)은 윤8월19일,증광감시(增廣監試: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보이는 과거)는
9월24일, 동당시(東堂試:式年試)는 10월22일로 택일해서 정했다고 한다.
〖초2일 병자〗맑음.
인사이동이 있었다.
내가 정언(正言)의 부망(副望)에 올랐었다니 참 괴이하다.
금언강(琴彦康=琴愷12)이 산소에 벌초(伐草)하러 나간다기에 나도 같이 가 보았다.
수지(守之=權泰一97)공 역시 근친하고 돌아왔다. 왕십리(往十里)의 일세(一世)의 집에서 잤다.
나와 박경정(朴景靜=朴守謙102)이 함께 추전(追餞:떠난 사람을 뒤쫓아 가서 송별연을 베푸는 일)함은
지제교(知製敎182)에 임명한다는 교지[官敎]가 오늘 왔기 때문이다.
〖초3일 정축〗맑음.
아침에 왕십리에서 돌아오면서 유원숙(柳源叔=柳活43)삼형제를 차례로 찾아보았다.
그의 부친의 허리 뒤에 난 큰 사접시만한 종기의 처방에 대해 얘기했다.
이운근(李雲根),김정익(金廷益92)과 보은현감 이양휴(李楊休)도 만나러 왔다.
〖초4일 무인〗맑음.
실록국(實錄廳)에 가서 7판(板)을 썼다.
서당(書堂)에서 이중인(李仲仁)을 만나서 들으니 여첨(汝瞻=李埁15)이 어버이를 뵈러 간다고 사장(辭狀)을 냈다기에
보러 갔으나 밖에 나가서 만나지 못했다.
윤선(尹詵),곽천지(郭天祗),곽창도(郭昌道),이명연(李明然)등이 역시 와 있었다.
조경관(趙景觀)과 김사겸(金士謙=金廷益93)을 가서 만났다.
저녁에야 여첨(汝瞻=李埁15)이 사성(師聖=李蒧56)에게 묵으려고 왔다.
나와 박경행(朴景行)과 경정(景靜=朴守謙102)과 함께 제용감(濟用監176)에서 같이 잤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年 8月1日
안늑·방사호 변윤등이 호종한 날짜를 아뢰도록 도감에 전교하다.
光海君 7年 8月2日
소명국을 정배시켜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다.
주인이 있는 집을 빼앗는 사대부를 엄중히 다스리게 하다.
유인길(柳寅吉)을 대사간으로,강린(姜繗)황익중(黃益中)을 정언으로,유희량(柳希亮)을 사복시 정으로,
이위경(李偉卿)김시주(金是柱)를 주서로,유숙(柳潚)을 형조 참판으로,윤선(尹銑)을 분승지(分承旨)로,
윤숙(尹璛)을 백령첨사(白翎僉使)로 삼았다.
--------------------------------------------------------------------------
〖초5일 기묘〗맑음.
(공성왕후)추숭(追崇)시에 봉책관(奉冊官)이라서 남별궁(南別宮:현 소공동의 조선호텔에 있던 별궁)에 가서
의식을 연습을 하러 한명욱(韓明勗26),유약(柳瀹114), 고용후(高用厚110)와 같이 갔다.
조국빈(趙國賓108)과 한옥(韓玉7)이 예차관(預差官:시관(試官)중 예정된 차비관)이 되었다며
승지(承旨)이정겸(李廷謙)에게 사례의 뜻을 표한다. 자릉(子陵=李景嚴107)을 만나보고 돌아왔다.
최업(崔業)이 와서 만났다.
〖초6일 경진〗맑음.
남별궁(南別宮:현 소공동 조선호텔 자리에 있던 별궁)에서 의식(儀式) 연습을 했다.
어제 저녁에 금부도사(禁莩事)안전(安佺183)과 선전관(宣傳官)이 비밀 전교를 듣고 성주(星州)로 내려갔다.
이창록(李昌祿)라 하는 사람이 ‘형을 죽이고 동생을 죽였으니, 착하지 못한 사람이 우리 임금이 되었도다.’는
말을 여러 글에 썼기에 그 말을 그대로 적어서 상소(上疏)한 때문이다.
이조참의와 박자수(朴子修=朴弘道14)를 만나러 갔다. 군(郡)을 가렸지만 경관(趙景觀)의 이름이 이미 실려 있었다.
오경홍(吳景泓)이 왔다.
〖초7일 신사〗맑음.
박경행(朴景行)이 찾아 왔고 이사맹(李師孟179)도 왔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年 8月4日
사헌부의 청에 따라 신천 군수 백대형을 파직하다.
정배한 죄인에게 활보를 허용한 거제 현령 김준민을 파직하다.
光海君 7年 8月5日
종실의 위반 사항을 검찰하지 않은 종부시 낭청을 추고하게 하다. 남이공을 중도에 부처하다.
양사에서 전 참판 박이서의 징계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사헌부의 청에 따라 소명국을 엄히 국문하게 하다.
사간원에서 전 병사 이응해의 치죄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홍유의(洪有義)를 종성 부사(鍾城府使)로,김질간(金質幹)을 부교리로,홍준(洪遵)을 신천 군수(信川郡守)로 삼았다.
상소장에 부도한 말을 한 이창록을 잡아오게 하다.
光海君 7年 8月6日
소명국을 잡아 가두고 삼성(三省)이 교대로 추국하게 하다.
光海君 7年 8月7日
영의정 기자헌이 소명국 추문에 대해 차자를 올리다. 대비전에 약방·2품 이상 육조·양사 장관이 문안하다.
삼사가 남이공을 위리 안치시키는 일에 대해 정계하다. 도망친 중국인의 압송을 수행하지 못한 사신을 추고하게 하다.
평안 감사 김신국이 변방의 방비에 대해 아뢰다
光海君 7年 8月8日
의금부에서 소명국의 추국에 대해 아뢰다. 영의정 기자헌이 국문할 때 피혐하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이덕형·오환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창경궁을 세울 때의 풍수 논의를 《태조실록》으로써 고찰하게 하다.
光海君 7年 8月9日
주문사 통사 임예룡·선득리·신응융을 잡아가두다. 인근 고을의 수령으로써 서로 바꾸어 부임하게 하다.
김덕룡·김언춘을 제주에 정배하다. 김제남의 집안을 적간하다.
--------------------------------------------------------------------------
〖초8일 임오〗맑음.
박정길(朴鼎吉4)이 다녀갔고, 갑자기 김봉조(金奉祖145)와 박경정(朴景靜=朴守謙102)이 왔다.
경홍(吳景泓)에게 들으니 박자정(朴子挺)이 말하길 요즘에 한강(寒岡=鄭逑184)을 반박하는 논의가 있다고 했다.
대비(大妃)가 병이 깊어서 부묘례(祔廟禮)는 이번 27일에 하도록 진언(進言:의견을 여쭘) 드렸단다.
〖초9일 계미〗맑음.
실록국(實錄廳)에 가서 7판(板)을 썼다.
내가 또 찬집청(撰集廳185) 낭청(郎廳285)을 겸하게 되었다.
〖10일 갑신〗흐리고 간혹 비.
임금께서 “창경궁을 처음 세울 때(創建) 술관(術官)들 논의한 바를 모든 실록들을 고찰하여 아뢰라.”고 해서
영상(領相=奇自獻5),호조판서(戶曹判書)송순(宋諄19),박사재(朴四宰120),정영국(鄭榮國186),조국빈(趙國賓108),
나인(羅訒168)과 나와 모두 춘추관(春秋館)에 들어왔다.
한림(翰林:예문관 검교의 별칭) 유화(柳鞾)와 더불어 앉아서 고찰하여 뽑아보니
(그 당시) 술관(術官)들의 논의는 별로 없었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年 8月10日
남이공을 평산현에 부처하다. 홍문록을 작성하여 홍문관의 결원이 생기지 않게 하다.
안치된 죄인에게 집을 지어준 남해 현령을 치죄하게 하다.
영의정 기자헌이 소명국 추국에 피혐하기를 청하니 윤허하다.
光海君 7年 8月11日
우의정으로 하여금 영의정(기자헌)이 사양한 위관을 삼다. 남이공의 정배지를 평산에서 해주로 옮기다
--------------------------------------------------------------------------
〖11일 을유〗맑다가 가끔 비.
신자방(辛子方=辛義立115)과 함께 찬집청(撰集廳186)에 앉아 있다가 남별궁(南別宮)에 가서 의식(儀式) 연습을 했다.
내 혼자서 연습을 하니까 마치 아이들 놀이 같아서 우습다.
〖12일 병술〗맑음. 낮에 천둥치고 굵은 소낙비가 오다.
남별궁(南別宮)에 가서 의식(儀式)을 연습하다. 중화(仲和) 최산립(崔山立)이 방문하러 왔다.
〖13일 정해〗맑음.
경정(景靜=朴守謙102)이 왔다. 종일 온편하게 애기했다.
〖14일 무자〗맑음.
실록국(實錄廳)에 가서 7판(板)을 썼다. 또 3판을 더 써서 다음 날 사용하도록 했다.
임금이 (실록청과 찬집청의 일이) “언제나 끝낼 수 있느냐?”는
물음에 내년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는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또 비망기(備忘記)에 이르기를 잘못되고 풀어진 것은 문관(文官) 중에서 부정이 있나 없나를 가려서 무(武)를
겸비한 사람을 골라서 백성의 어려움[民瘼]에 자문하라고 했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年 8月12日
중죄자에게는 국가에 경사가 있어도 사면하지 않게 하다. 소명국을 국문할 때 우의정을 위관으로 삼다.
光海君 7年 8月13日
민형남을 동지진하사 겸 진주사로 삼다. 실록청과 찬집청의 일을 속히 끝내도록 전교하다.
전 참찬 남이공을 삭탈 관작하고 중도 부처하게 하다.
김상헌·이민성 등을 삭탈 관작하다.
“사과(司果)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공성 왕후(恭聖王后)의 책봉 고명(誥命)에 대한 사은 전문(謝恩箋文)에
‘어머니가 자식으로 말미암아 귀해짐을 생각한다.‘삼가 허물을 보면 어진지의 여부를 알 수 있다는 데 관계된다.’는
등의 말이 있는데, ‘허물을 보면’이라는 뜻의 ‘관과(觀過)’ 두 자는 신하가 감히 말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런데 김상헌은 기롱하고 풍자하는 말을 감히 사은 전문에다 써넣었으니,
그가 임금을 무시하고 도리를 어긴 정상이 몹시 통분스럽습니다.
전에 이민성(李民宬)이 지은 것에도 성풍(成風)註) 에 비교한 말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적발하여 치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따위의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징계되지 않아 일종의 사론(邪論)이 잇달아 일어나게 된 것이니,
법으로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상헌과 이민성 등을 삭탈 관작하소서.” 하니, 왕이 따랐다.
([註]성풍(成風):성풍은 노문공(魯文公)의 생모인 풍씨(風氏)로,정실 부인이 아니었음.
그런데도 부인(夫人)이라고 쓰고 수의(襚衣)를 준 것은 잘못이라고 ‘춘추’에서 기롱하였음.
여기서는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 김씨(恭嬪金氏)가 정실 부인이 아니라는 비유로 쓰이었음.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권8 문공(文公) 4년.) 김상헌이 지은 축하문을 사용하지 말게 하다,
光海君 7年 8月14日
죄인 이창록의 추국을 다음날 하게 하다. 의금부가 성변규 등 9명을 잡아가두다. 이창록을 추문하여 자백을 받다.
李昌祿者, 星州人也。爲人愚妄, 酗酒失性。嘗作一文,謂之疏草,袖以示人,
이창록자, 성주인야。위인우망, 후주실성。상작일문,위지소초,수이시인,
有曰:“春秋風雨,楚、漢乾坤。干戈爲事,殺人爲法。衣帛食肉,心不足耶? 奸黨滿朝,國家難保。
유왈:“춘추풍우,초、한건곤。간과위사,살인위법。의백식육,심부족야? 간당만조,국가난보。
君子何歸? (山)〔小〕人揚揚。弑兄殺弟,嗚呼,異哉!人之無良,我以爲君。”等語。
군자하귀? (산)〔소〕인양양。시형살제,오호,이재!인지무량,아이위군。”등어。
鄕中人成辨奎,宋周賓,李揚得,李蘭,洪祉,李汝賓,呂惟謹,兪遠,李慶元等,見而驚駭,遍諭一州,毁家黜鄕。
향중인성변규,송주빈,이양득,이란,홍지,이여빈,여유근,유원,이경원등,견이경해,편유일주,훼가출향。
學諭宋元器等三十六人,聯名呈狀于本州,牧使閔頀報于監司沈惇,監司啓聞于朝廷,拿來推鞫。
학유송원기등삼십육인,연명정상우본주,목사민호보우감사침돈,감사계문우조정,나래추국。
昌祿供曰:“早失父母,不學無知,亂離飢餓,仍爲失性,又喜飮酒,不省人事。愚妄之念,忠君愛國,
창록공왈:“조실부모,부학무지,난리기아,잉위실성,우희음주,부성인사。우망지념,충군애국,
慷慨作句,語意荒雜。‘楚、漢乾坤。’指國家紛亂之事也,‘衣帛食肉,心不足耶?’者,指珒,㼁而言也。
강개작구,어의황잡。‘초、한건곤。’지국가분란지사야,‘의백식육,심부족야?’자,지진,의이언야。
弑兄,指珒也,殺弟,指㼁也,奸黨滿朝,指柳永慶也。‘人之無良,我以爲君。’者, 古語有之,故指逆珒而言也。
시형,지진야,살제,지의야,간당만조,지류영경야。‘인지무량,아이위군。’자, 고어유지,고지역진이언야。
此文製作,在己酉年間,聞金悌男有兇謀,故以所聞所見自作之。豈有指嗾同議之人乎? 醉中作之,前年九月,果示成辨奎,
차문제작,재기유년간,문김제남유흉모,고이소문소견자작지。기유지주동의지인호? 취중작지,전년구월,과시성변규,
厥後其文無去處。此後更無所言。”云云。推鞫廳【領議政奇自獻,判中樞沈喜壽,右議政鄭昌衍,判義禁朴承宗、
궐후기문무거처。차후경무소언。”운운。추국청【영의정기자헌,판중추침희수,우의정정창연,판의금박승종、
知義禁朴楗、同知李慶涵、大司憲李覮、大司諫柳寅吉、承旨韓纉男。】
지의금박건、동지이경함、대사헌이영、대사간류인길、승지한찬남。】
(이창록이란 자는 성주(星州) 사람이었다. 사람됨이 어리석고 망령스러우며 술에 취하면 실성하였다.
일찍이 글 하나를 지어서는 소초(疏草)라고 하면서 옷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는데,
거기에 ‘춘추(春秋)의 풍우(風雨)요, 초한(楚漢)의 건곤(乾坤)이로다. 싸움으로 일을 삼고 살인으로 법을 삼았도다.
비단옷 입고 고기를 먹으면서도 마음에 부족한가. 간당(奸黨)이 조정에 가득하니 나라를 보전하기 어렵도다.
군자는 어디로 돌아갔나, 소인이 의기양양하도다. 형을 죽이고 동생을 죽였으니, 아, 이상도 하다.
착하지 못한 사람이 우리 임금이 되었도다.’ 하는 등의 말이 있었다.
이에 그 마을 사람인 성변규,송주빈(宋周賓)이양득(李揚得)이란(李蘭)홍지(洪祉)이여빈(李汝賓)여유근(呂惟謹)
유원(兪遠)이경원(李慶元)등이 보고는 놀라워하면서 온 주(州)에 알리고는 이창록의 집을 헐고 마을에서 내쫓았으며,
학유(學諭)송원기(宋遠器) 등 36명이 연명(聯名)으로 본주에 정장(呈狀)하자,
목사 민호(閔頀)가 감사 심돈(沈惇)에게 보고하였고, 감사가 조정에 계문하였다. 이에 드디어 잡아다가 국문하였다.
이창록이 공초하기를, “일찍 부모를 여의어 불학무식하며,
난리통에 굶주린 탓에 실성하였는데다가 또 술을 좋아하여 인사를 살피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생각에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한답시고 강개하여 시를 지었는데, 말뜻이 황잡스러웠습니다.
초한의 건곤’이란 것은 국가에 분란이 있는 것을 가리킨 것이며,‘비단 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면서도 마음에 부족한가.
라고 한 것은 진(珒)과 의(㼁)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형을 죽였다.’는 것은 진(珒)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동생을 죽였다.’는 것은 의(㼁)를 가리켜 말한 것이며, ‘간당이 조정에 가득하다.’고
한 것은 유영경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착하지 못한 사람이 우리 임금이 되었도다.’라고
한 것은 고어(古語)에 있는 말로 역적 진(珒)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이 글은 기유년간에 지었는데,
김제남(金悌男)의 흉모가 있었다고 들었으므로 듣고 본 바에 따라 스스로 지은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같이 의논하며 사주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술취한 김에 지어서 전년 9월에 성변규에게 보여주었는데,
그 뒤에는 그 글이 간 곳이 없었습니다. 이 뒤로는 다시 더 할 말이 없습니다.” 하였다.
추국청이【영의정 기자헌, 판중추부사 심희수, 우의정 정창연, 판의금부사 박승종, 지의금부사 박건,
동지의금부사 이경함, 대사헌 이병, 대사간 유인길, 승지 한찬남이었다.】
--------------------------------------------------------------------------
〖15일 기축〗맑음.
한정국(韓正國109)이 술을 가지고 와서 이야기했다. 저녁에 박경행(朴景行)형제와 권경섭(權景涉)이 찾아왔다.
사헌부는 허균(許筠)의 전도(顚倒)되고 망령스런 처사가 한 역관(譯官)의 일로 우의정이 듣고 동요되었다고 엄중한
추고를 종용하다니 가소롭다.
〖16일 경인〗가끔 비가 오다가 그침.
유여각(柳汝恪57)이 방물(方物)을 봉한 후에 가는 것을 보았다.
〖17일 신묘〗맑다가 가끔 비.
찬집청(撰集廳)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허균(許筠86), 이지완(李志完187)을 방문했다.
허공(許筠)이 난설헌(蘭雪軒188)의 책 1권을 내게 준다. 또 당화(唐畵) 1폭을 추가로 보내준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년 8월15일
사헌부에서 허균의 추고·남이공 유배지 등에 관해 아뢰다. 사간원에서 역시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다.
남이공을 송화에 옮겨 유배하다
光海君 7년 8월16일
좌승지 허균이 사직을 청하다. 전라 감사 이경전을 체직하게 하다. 심돈으로 하여금 선수 도감 제조를 삼다.
光海君 7년 8월17일
도적을 체포한 죽산 부사 윤경 등에게 가자하다. 함토를 파내지 못하게 한 전 감찰 권진기를 치죄하다.
사헌부에서 함안 군수 엄황의 사판 삭제 등을 아뢰다. 이창록에게 형신을 가하여 국문하다.
光海君 7년 8월18일 황해 감사가 전 군수 권엽이 방죽 쌓은 일을 조사하여 아뢰다.
예조에서 대원군의 사묘에 다례 행하는 일을 아뢰다. 사은사 김권·부사 이형욱·서장관 유여각을 전송하다.
진시에 왕이 인정전에서 배표(拜表)하고는〈뜰에 내려가서 전송하였다.〉
사은사 김권(金權),부사 이형욱(李馨郁), 서장관 유여각(柳汝恪)이 떠나갔다.
--------------------------------------------------------------------------
〖18일 임진〗맑음.
사은사(謝恩使) 김권(金權189),김형욱(金馨郁),서장관(書狀官)유여각(柳汝恪57)이 출발해서 갔다.
〖19일 계사〗맑음.
찬집청(撰集廳)의 일로 영상(領相)을 만나서 군현(郡縣)을 부탁했다.
밥을 먹은 뒤에 광창(廣昌=李爾瞻49)가로 가니까 부자(父子)가 모두 병을 칭탁하여 만나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에 황중윤(黃中允84), 김봉조(金奉祖145)을 만나고,
지평(持平)임성지(任聖之111)가 사성(師聖=李蒧56)을 만나러 간다기에 나도 같이 갔다. 한욱재(韓勗哉)가 방문했다.
〖20일 갑오〗맑음. 실록국(實錄廳)에 가서 7판(板)을 썼다. 이창록(李昌祿)이 죄를 스스로 고백[承服]했다.
이날 임금이 박홍구(朴弘耈65)와 이지완(李志完187)을 접견했다. 저녁에 권경섭(權景涉)이 찾아왔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년 8월19일
책보(冊寶) 출납을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다. 안면곶·장산곶 이외의 나무를 베어 쓸 것을 의논하게 하다.
光海君 7년 8월20일
이창록을 당고개에서 참하다.
是日斬李昌祿。傳旨曰:“罪人李昌祿擬上疏章,其搆草中,多有犯上之言,語極兇慘。有曰:春秋風雨,楚、漢乾坤。
시일참이창록。전지왈:“죄인이창록의상소장,기구초중,다유범상지언,어극흉참。유왈:춘추풍우,초、한건곤。
干戈爲事,殺人爲法。衣帛食肉,心不足耶?’又‘弑兄殺弟,嗚呼, 異哉! 君子何歸,小人揚揚。奸黨滿朝,國家難保’
간과위사,살인위법。의백식육,심부족야?’우‘시형살제,오호, 이재! 군자하귀,소인양양。간당만조,국가난보’
又‘人之無良,我以爲君。,等語,極爲悖惡。學諭宋遠器等三十六人,連名呈狀于所居星州,轉報監司,因狀啓拿鞫,
우‘인지무량,아이위군。,등어,극위패악。학유송원기등삼십육인,연명정상우소거성주,전보감사,인상계나국,
則一一承服。悖惡不道,干犯於上,情理切害,莫此爲甚。斬不待時,籍沒家産。”
칙일일승복。패악부도,간범어상,정리절해,막차위심。참부대시,적몰가산。”
--------------------------------------------------------------------------
〖21일 을미〗맑음.
들으니 경승(敬承=朴守緖16)이 돌아왔다고 해서 조경관(趙景觀)을 만나러 찾아가니
김기원(金期遠:백인걸의 사위, 첨정),김치원(金致遠190)등이 다 모여 있다.
저녁에 민윤보(閔閏甫=潤夫=閔馨男98)공을 방문했다. 오늘은 찬집청(撰集廳185)에 갔었다.
〖22일 병신〗맑음.
김사겸(金士謙=金廷益93)과 오융보(吳隆甫=吳汝穩61)를 만나러 갔다.
승지(承旨) 찬남(韓纘男44)이 나보고 경상도(慶尙道)의 효자 열녀[孝烈] 54명을 골라서 뽑아 달라고 부탁을 한다.
〖23일 정유〗맑음. 금언강(琴彦康=琴愷12)과 신광업(辛光業22)이 들어왔다.
윤성임(尹聖任91)은 병이 나서 안 들어왔는데, 임금이 체차(遞差:관리를 바꿈)를 명했다.
〖24일 무술〗맑음.
오융보(吳隆甫=吳汝穩61)를 찾아갔다. 밥을 먹고 남별궁(南別宮)에 가서 의식(儀式) 연습을 했다.
이익엽(李益燁256)이 상처(喪妻)한지 3일이 되었다기에 저녁에 조문(弔問)을 갔다. 거기서 박자흥(朴自興75), 정준(鄭遵90), 박정길(朴鼎吉4),최래길(崔來吉),이경여(李敬輿28),한홍(韓泓),최발(崔潑)등을 만났다.
오다가 금언강(琴彦康=琴愷12)과 박경정(朴景靜=朴守謙102)을 만났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년 8월21일
사간 윤인이 이창록 추국의 일로 인피하여 물러가다. 대사헌 이병이 이창록 추국의 일로 인피하여 물러가다.
사간원에서 윤인의 체찰로 청하여 윤허하다. 이창록을 성문 밖 당고개에서 형 집행함을 책하다.
이창록을 서소문 밖에서 유생이 보는 가운데 추가로 형을 집행하게 하다.
光海君 7년 8월22일
이창록 체포시 공로자를 아뢰게 하다. 이창록의 가산을 적몰하고 고을을 혁파하는 일을 의논하게 하다.
전라도 동복현에서 오언복 등이 난을 일으키다.
--------------------------------------------------------------------------
〖25일 기해〗맑음.
나 혼자 의식(儀式)연습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모든 의식(儀式) 요원들을 인솔하고 가는 오봉(五峯=李好閔99)과
자릉(子陵=李景嚴107)을 만나서 식장(式場)으로 가서 술 2잔씩을 마시고 헤어졌다.
〖26일 경자〗맑음.
날이 샐 무렵에 남별궁(南別宮)에 가서 책봉서(冊封書)를 받들어 가마에 싣고 대궐로 나아가서
인정전(仁政殿:창덕궁의 정전)에 책궤(冊軌)에 안치했다가 바로 차비문(差備門)으로 받들고 들어가니
내시(宦者)가 받아서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춘추관(春秋館)에서 기다리라는 명(命)이 있었다.
미시(未時:오후1~3시)에 인정전(仁政殿)에서 다시 받아 두었다가 신시(申時:오후3~5시)에
봉여(奉輿:책봉서를 실은 가마)가 앞에 서고 임금이 탄 가마[大駕]가 뒤따르면서 봉자전(奉慈殿)으로 나아가서
사당 밖 계단 위의 막차(幕次:막을 쳐서 임금이나 고관들이 머무는 곳)에 받들어 안치했다.
휘장을 묶고 담장에 기대어 옷을 입은 채로 선잠[假寐]을 자고 2경(更:밤 10~12시경)에 일어나 행사를 진행한다.
〖27일 신축〗맑음.
제사를 마칠 무렵이 되자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임금은 묘시(卯時:오전 5~7시)에 환궁(還宮)하는데,
시종(侍從)하는 사람들이 대신[臣班]들 보다 앞서서 연(輦:임금의 수레) 앞에서 간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년 8월23일
사헌부에서 이창록 집행의 일로 의금부 낭청의 추고를 청하다. 사간원에서 의금부 낭청의 추고를 청하다.
유인길(柳寅吉)을 대사헌으로,정조(鄭造)를 사간으로,박건(朴楗)을 형조 판서로,유숙(柳潚)을 부제학으로,
유희량(柳希亮)을 전한으로,유여항(柳汝恒)을 수찬으로,윤인(尹訒)을 대사간으로,임성지(任性之)를 부수찬으로,
임건(林健)을 지평으로 삼았다. 향후 호남의 수령은 재략이 있는 자로 추천하게 하다
光海君 7년 8월24일
공주·옹주의 봉사손에게 관직을 제수하게 하다. 사대부 부인의 비행에 대해 영의정에게도 수의하게 하다.
光海君 7년 8월25일
호남의 죄인을 굳이 서울 감옥에서 국문하지 않게 하다.
光海君 7년 8월26일
주소를 쓰지 않고 입격한 김기종의 서용 여부를 의논하게 하다. 임금이 봉자전에 나아가다.
光海君 7년 8월27일
친제를 지내는 날 곳곳에서 재변이 생기다 <자시에【공성 왕후(恭聖王后)의.】신주(神主)를 고쳐 썼다.
〈축시에〉친제를 행한 후 환궁하였다. 이날 한밤중에 장단(長湍)에 큰 비가 오고 벼락이 쳤다.
--------------------------------------------------------------------------
〖28일 임인〗맑음.
진하(陳賀:궁중에서 잔치를 베풀며, 지방 관원들도 서면으로 하례를 함)를 했다.
실록국(實錄廳)에 가서 7판(板)을 썼다.
사면령(赦免令)이 반포되고 백관(百官)들을 가자(加資: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올림)했다.
〖29일 계묘〗맑음.
융보(吳隆甫=吳汝穩61)를 만나러 갔다. 그는 내일 어버이(吳澐)를 뵈러 둘아 갈 것이기 때문이다.
배자장(裵子張=裵大維36),강극소(姜克紹),이상항(李尙恒191),유여항(柳汝恒13)등이 모두 모였다.
들으니까 황해감사 유대정(兪大楨192)이 한 유생(儒生)이 올린 정문(呈文)을 치계(馳啓)하기를
“이번의 과거는 공정하지 못했습니다.
식년시(式年試: 子午卯酉年에 보이는 과거)에서는 단지 경서(經書)를 7개의 큰 문장으로 나눠
이 부분만 잘 암송한 자를 급제시켰다고 합니다.”라고 했다.
이를 대관(臺官:사간원, 사헌부의 관원)들이 바루려고 크게 논박(論駁)하려 한다고 했다.
〖말일 갑진〗맑음.
융보(吳隆甫=吳汝穩61)를 남관묘(南關廟193)에서 전송했다.
양자승(楊子昇=楊時晋21) 안군소(安君邵243),이여첨(李汝瞻=李埁15)및 사성(師聖=李蒧56)과 같이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한욱재(韓勗哉)를 만나 온편하게 얘기했으며,
또 이자릉(李子陵=李景嚴107)을 만나고 돌아왔다.
이경현(李景賢194),이경의(李景義195)도 왔다. 상노(尙奴)를 보냈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년 8월28일
사간원에서 대원군에 친제하는 것과 하삼도에 점마관 파견 정지를 아뢰다. 점마관을 파견하게 하다.
光海君 7년 8월29일
나례 때 쓰는 물품을 보관해 두었다가 뒷날 다시 쓰게 하다.
--------------------------------------------------------------------------
【 윤 8월 】
〖초1일 을사〗맑음.
신자방(辛子方=辛義立105)윤정평(尹正平)이 찾아왔다.
정평(尹正平)이 말하기를 이형보(李馨甫=李茳53)가 제천(堤川)에서 올라와 지금 보은사(報恩寺)에 있는데
내일 모레 쯤 도성(都城)으로 들어올 예정이라고 했다. 찬집청(撰集廳)에 가서 80여장(丈)을 교정(校正) 보았다.
〖초2일 병오〗 맑음.
실록국(實錄廳)에 가서 7판(板)을 썼다.
사성(師聖=李蒧56)과 안군소(安君邵243)와 모두들 한강 밖에서 참군(參軍)을 전송했다.
들으니 문경천(文敬天)이란 사람이 말 도둑으로 전옥서(典獄署)에 잡혀 와서는 자칭 역적(逆賊)이라고 말하여서
임금이 대신(大臣)과 금부(義禁府) 당상(堂上)들을 명초(命招:왕명으로 불러 들임)했다고 한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년 윤8월1일
병조 판서 박승종의 차자에 답하여 사직하지 말기를 당부하다.
죄수 문경천의 일로 대신·의금부 당상과 윤방·윤초를 부르다. 승문원 관원을 보내어 좌의정을 올라오게 하다.
영의정 기자헌이 병환으로 사직하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영의정이 재차 병환으로 사직하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光海君 7년 윤8월2일
죄인 문경천을 잡아가두다. 죄인 문경천을 군기시에서 국문하게 하다.
선수 도감에서 경복궁 옛터에 쇠를 띄워 본 견해를 아뢰다.
윤선(尹銑)을 승지로,오익(吳翊)을 분승지(分承旨)로 삼았다.국청을 설치하고 체포해 오다.
역변을 고한 죄인 문경천,김경남,윤기,황난수,김입신,정호의,이성남의 공초 내용 문경천과 김경남을 대질 심문하다.
국청에서 김경남을 당일로 형 집행할 것을 청하다. 고변한 김경남의 처치를 의논하여 아뢰게 하다.
김경남을 신문하지 않고 사형 집행할 것인지 의논하게 하다.김경남을 형장을 가하여 국문하게 하다.
--------------------------------------------------------------------------
〖초3일 정미〗 흐리다가 갬.
송상빈(宋尙賓)과 한정국(韓定國9)이 지나다가 만났고, 저녁에는 형보(馨甫=李茳53)가 지나다가 들렸다.
금장령(琴掌令=琴愷21)이 집에 잘 도착했다고 사람을 보내어 알리기에 나와 박경행(朴景行)이 함께 가서 만나보고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초4일 무신〗비.
김시주(金是柱196)가 방문하러 들렸고, 이잠(李埁15)도 역시 다녀갔다. 나는 형보(馨甫=李茳53)를 만나러 갔다.
들으니 오(吳)영천(永川)군수가 (도성에) 들어와서 도적(盜賊)들을 문초하고 있고,
이음(李音)형제도 역시 들어왔다고 한다. 저녁에 형보(馨甫=李茳53)가 새로 이사 갈 집을 둘러보았다.
〖초5일 기유〗맑음.
안모(安모),박경승(朴敬承=朴守緖16) 조경관(趙景觀)이 만나러 왔다.
〖초6일 경술〗맑음.
실록국(實錄廳)에 가서 7판(板)을 썼다. 임금이 친국(親鞫)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형보(馨甫=李茳53)와 조용히 이야기했다.
〖초7일 신해〗맑음.
임금이 정국(庭鞫)을 벌였다. 유진(柳袗197)이 와서 만났고, 조성량(趙成兩)공도 내방을 했다.
오늘 아침에 민윤보(閔閏甫=閔馨男98)공을 가서 뵈니 정광경(鄭廣敬198)도 역시 와 있었다.
저녁에는 허단보(許端甫=許筠86)를 찾아가서 만났다.
〖초8일 임자〗맑음.
찬집청(撰集廳)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조판서(韓孝純68)에게 인사하고 겸해서 조국이(趙國耳)를 만났다.
저녁에 또 김사정(金士精=金緻140)공을 찾아가서 뵈었다.
조유도(趙有道116),김질간(金質幹72),임성지(任性之111),박문준(朴文俊)등이 역시 그 집에 있었다.
내가 또 박홍도(朴弘道14)를 만나러 갔더니 양사행(梁士行)이 거기 있었다.
박정길(朴鼎吉4)을 만나러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명함[刺]만 두고 왔다.
형보(馨甫=李茳53)를 만났더니 김탁(金鐸)도 와 있었다.
〖초9일 계축〗맑음.
박문준(朴文俊)이 방문하러 왔다. 꿈에 이를 빼려고 하는데 도로 굳는 걸 보았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년 윤8월5일
문신정시에서 우등한 허균 등에게 포상하다.
“문신정시(文臣庭試)에서 1등을 한 허균(許筠)에게 가자하고,
그 다음 이안눌(李安訥)과 박정길(朴鼎吉)에게는 각각 숙마(熟馬) 1필 씩을,유숙(柳潚)에게는 반숙마(半熟馬)1필,
심즙(沈諿)에게는 아마(兒馬)1필,김개(金闓)와 정인윤(鄭寅允)에게는 표피(豹皮)1장을 하사하라.”
윤방·이정신을 인견하고 중국의 정세를 묻다. 대사헌이 나오지 않아 아장을 국문에 참석하게 하다.
이대엽(李大燁)을 교리로,이덕형(李德泂)을 전라 감사로 삼았다.
光海君 7년 윤8월 6일
동복현에서 난을 일으킨 정순기를 처형하다.
대원군 사묘의 친제를 21일에 하라고 전교하다.
이병이 죄인 여대규의 친척이므로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 죄인을 친국하다.
김경남의 형집행을 양사에서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다. 옥사 관리에 소홀한 의금부 도사를 파직하다.
외부인을 공공연히 출입시킨 전옥서의 관원을 추고하게 하다.
역적 체포에 필요한 말이 모자라 삼도에서 올려 보내게 하다.
光海君 7년 윤8월7일
김덕룡·김언춘을 압송할 때 칼을 씌우고 배소에서는 위리 안치하게 하다.
흉년이 들어 백성 구호할 계책을 의논하여 선처하도록 하다.
공홍 수사가 안흥 첨사 이은종의 근면성실함에 대해 장계하다.
공홍 수사가 강굉립의 해적과의 전과를 아뢰고 장물 등을 바치다.
역관으로 공로가 있는 표정노에게 가자하고 실직을 제수하게 하다.
역적 토죄에 관한 관학 유생 유창길 등의 상소문 유창길 등의 상소에 대해 대신들이 헌의하기를 꺼리다.
--------------------------------------------------------------------------
〖10일 갑인〗맑음.
동지(冬至使) 겸 진주사(陳奏使)민형남(閔馨男98),허균(許筠86),서장관(書狀官) 최응허(崔應虛35)가 떠나가기에
나와 박경승(朴敬承=朴守緖16)이 성문 밖까지 나가서 전송하려고 갔다.
백대형(白大珩199),박홍도(朴弘道14),이함일(李涵一130),조국빈(趙國賓108),조과(趙鍋),안경심(安景深200),유일(柳溢),
박찬(朴璨201),박수의(朴守誼202)와 한 장막에 있었다.돌아오는 길에 이잠(李埁15)과 손척(孫倜1)을 찾아갔었다.
익산(益山)군수 윤(尹)은 입직(入直)하러 들어갔고, 지례(知禮)군수 윤찬원(尹贊元)은 외출했다.
하우식(河遇式)이 풍기(豊基) 재익(在益)의 집에서 왔다. 오경홍(吳景泓)이 와서 잔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년 윤8월8일
임금이 선정전에서 동지 겸 진주사 민형남과 부사 허균을 인견하다.
王引見冬至兼陳奏使閔馨男、副使許筠于宣政殿。
왕인견동지겸진주사민형남、부사허균우선정전。
許筠曰:“林居漫錄,則小臣赴京時,與金中淸觀之,非刊本也。大臣之意,非刊本,故不欲刊改矣。
허균왈:“임거만록,칙소신부경시,여김중청관지,비간본야。대신지의,비간본,고부욕간개의。
非小臣所可專爲也,未知何以爲之也。”閔馨男曰:“其書中事,臣未嘗見之,聞其曲折。
비소신소가전위야,미지하이위지야。”민형남왈:“기서중사,신미상견지,문기곡절。
臣子之心,豈可一刻安心,以緩其奉命之意乎?”
신자지심,기가일각안심,이완기봉명지의호?”
王曰:“劉氏‘鴻書’,何鴻字,何書耶? 其書期於必得。 如不可得,‘林居漫錄,覓來可也。”
왕왈:“류씨‘홍서’,하홍자,하서야? 기서기어필득。 여부가득,‘임거만록,멱래가야。”
(왕이 선정전에서 동지 겸 진주사 민형남(閔馨男)과 부사 허균(許筠)을 인견하였다.
허균이 아뢰기를, “‘임거만록(林居漫錄)’은 소신이 중국에 갔을 적에 김중청(金中淸)과 같이 보았는데,
간본(刊本)이 아니었습니다. 대신의 뜻은 간본이 아니기 때문에 개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소신이 마음대로 할 일이 아니니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민형남이 아뢰기를,
“그 글의 내용을 신이 보지는 못했지만 그 곡절에 대해 들어보기는 했습니다.
신하의 마음에 어찌 일각이라도 안심하여 명을 봉행하기를 태만히 하겠습니까.” 왕이 이르기를,
“유씨(劉氏)의 ‘홍서(鴻書)’는 무슨 홍자의 무슨 책인가? 꼭 얻어오도록 하라.
만일 얻지 못하면 ‘임거만록’을 사 오도록 하라.”)
光海君 7년 윤8월9일
사은사 윤방 등에게 가자하고 역관 등에게 관직 제수할 것을 전교하다.
주문사 윤선에게 가자하고 역관 등에게 관직 제수할 것을 전교하다.
심희수(沈喜壽)를 영돈녕부사로,정준(鄭遵)을 예조 정랑으로,김홍원(金弘遠)을 나주 목사로 삼았다.
光海君 7년 윤8월10일
왕이〈 인정전에서 친히〉동지 겸 진주사의 배표례(拜表禮)를 거행하였는데 왕세자도 시종하였다.
동지사·변무 주청문서 사대하는 일로 추국은 내일 하게 하다.
김덕룡·김언춘 치죄와 관련하여 장령 윤인, 사간 정조, 집의 박재가 체차되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사신에게 백선·유선·화석 등을 마련해 주게 하다.
선수 도감에서 문정전·명정전의 터를 변경하는 것에 대해 아뢰다.
김덕룡·김언춘 치죄와 관련하여 대사헌 유인길, 대사간 윤수민이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光海君 7년 윤8월11일
유생 정시에서 우등한 자에게 차등있게 포상하다. 생원 민정이 상소하여 진사 정옥을 국문하기를 청하다.
김덕룡·김언춘 치죄와 관련하여 지평 인건이 체차되기를, 정언 황익중이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
〖11일 을묘〗맑음. 오경홍(吳景泓)이 오경허(吳景虛)를 마중하러 나갔다.
형보(馨甫=李茳53)를 만나러 갔다가 못 만났다.
사성(師聖=李蒧56)은 아침에 다녀갔다.
들으니(대사간 한찬남의 아들인)한희(韓暿117)가 직부(直赴:복시나 전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음)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년 윤8월12일
김경남·문경천 등 국문할 일이 있는 죄인은 병들어 죽지 않게 보살피게 하다.
김덕룡·김언춘 치죄와 관련하여 지평 양시진이 사직을, 정언 강린이 체차되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경상 감사가 대마도에서 통지한 내용을 올리다.
--------------------------------------------------------------------------
〖12일 병진〗맑음.
찬국(撰集廳)에 갔다.
그리고 공무(公務)로 영의정[領台:奇自獻5]의 집에 갔었으나 제사지내는 일 때문에 만나지 못했다.
형보(馨甫=李茳53)을 따라 광창(廣昌=李爾瞻49)에게 가서 남명(南冥=曺植153)선생의 서원 터를 물어보려고 갔다.
경허(吳景虛)가 금부(義禁府)에 들어갔다.
〖13일 정사〗맑음.
실록국(實錄廳)에 가서 7판(板)을 썼다.박양이(朴養而=朴鼎吉4)와 조용히 이야기했다.
유약(柳瀹114)도 교정(校正)낭관(郎官)으로 왔다.오융보(吳隆甫=吳汝穩61)가 왔다가 가면서 만났다.
들으니 사성(師聖=李蒧56)이 융보(吳隆甫)를 만나러 갔었지만 못 만났다고 한다.
〖14일 무오〗맑음.
저녁에 박경승(朴敬承=朴守緖16)과 박경행(朴景行),금언강(琴彦康=琴愷12)과 조탁(趙鐸)의 집에서 얘기하자고 해서
박양이(朴養而=朴鼎吉4)와 이여첨(李汝瞻=李埁15),이형보(李馨甫=李茳53)가 와서 밤이 깊어서야 파(罷)했다.
들으니 의금부(義禁府)의 죄인의 급변을 위에 알렸다[上變]고 한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년 윤8월13일
박상의를 시켜 궁터의 맥을 살펴서 아뢰게 하다.
부제학 유숙(柳潚),교리 이정원(李挺元),부교리 김질간(金質幹),부수찬 임성지(任性之)등이 아뢰기를,
장령 윤인,사간 정조,집의 박재,지평 임건(林健)은 모두 출사를 명하시고,
대사헌 유인길,대사간 윤수민,정언 황익중,지평 양시진,정언 강린은 체차시키소서.”하니,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光海君 7년 윤8월14일
동생이 역모에 연루된 관계로 헌납 오여온이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장령 윤인,집의 박재,사간 정조,지평 임건이 역적을 비호한다고 논척을 받아 체차되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신경희·양시우·김정익 등을 잡아가두게 하다
傳曰:“申景禧、楊時遇、金廷益、蘇文震,金以剛吳忠甲, 急速拿囚。尹趌拿囚,申景禧奴春京,令捕盜廳急速跟捕。
전왈:“신경희、양시우、김정익、소문진,김이강오충갑, 급속나수。윤길나수,신경희노춘경,영포도청급속근포。
蘇鳴國各別着實救療,申景禧別間堅囚,雜人嚴禁,使不得相通言語。今後如有不謹之事, 禁府當該郞廳拿鞫。”
소명국각별착실구료,신경희별간견수,잡인엄금,사부득상통언어。금후여유부근지사, 금부당해랑청나국。”
(전교하기를,“신경희(申景禧)양시우(楊時遇)김정익(金廷益)소문진(蘇文震)김이강(金以剛)오충갑(吳忠甲)을 속히
잡아가두라.윤길(尹趌)을 잡아가두고,신경희의 종 춘경(春景)을 포도청으로 하여금 속히 체포하게 하라.
소명국(蘇鳴國)을 각별히 치료하고,신경희는 다른 옥사에다 단단히 수금하고 잡인을 엄금하여 서로 말을 주고받지
못하게 하라.이후로 만일 삼가지 못한 일이 발생하면 금부의 당해 낭청을 잡아다 국문할 것이다.”
【신경희는 신잡(申磼)의 아들로서 음직(蔭職)으로 벼슬하였는데,당론(黨論) 만들기를 좋아하였다.
부형의 세력을 이용하여 정인홍·이이첨의 무리와 친하게 지냈고,
또 그의 숙부 신입(申砬)의 장녀가 왕자 신성군(信城君)의 부인이 되었고,차녀가 이대엽(李大燁)의 처가 되었는데,
경희가 이로 인하여 궁액(宮掖)과 왕래하면서 당시의 무리와 결탁하여 기염이 대단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의 어리석고 음험함을 겁내었다.
명국(鳴國)은 익산(益山) 사람으로 나덕윤(羅德潤)김우성(金佑成) 등과 결당하여 사류를 배척하고 모함하였는데
위인이 흉패하고 불측하였다.처음에는 유영경(柳永慶)김대래(金大來)등을 섬겨 극력 인홍을 공격하다가,
영경이 실패하자 다시 경희와 함께 이첨의 복심(腹心)이 되어 영경의 무리를 다시 공격하였다.
황덕부(黃德符)와 함께 이첨을 아첨하여 섬기니 사람들이 소황(蘇黃)이라고들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경희와 명국이 무슨 일로 인하여 혐원(嫌怨)을 맺게 되었다.
윤길(尹趌)과 양시진(楊時晉)은 모두 호남 사람으로 본래부터 명국의 사람됨을 미워해 왔는데 모두 이 당시
당인(黨人)으로서 함께 경희의 문객(門客)이 되었다.
윤길은 또 경희의 숙부 신할(申硈)의 사위였는데 이런 관계로 인하여 경희와 함께 명국을 죽일 것을 모의하고
그의 음행(淫行)을 들추어내 아뢰어 가두게 하였는데, 명국이 마침내 옥중에서 역모를 상변(上變)하였다.
그 내용의 줄거리는,“경희가 일찍이 신에게 말하기를‘신성군의 부인은 천성이 호걸스러워 여중남자(女中男子)이다.
그의 계사(繼嗣)는 정원군(定遠君) 세째 아들 능창군 이전(綾昌君李佺)인데 활솜씨 말타는 솜씨가 뛰어나고,
배우지 않고서도 글을 잘한다.
윤길이 명운(命運)을 잘 점치는데 일찍이 전(佺)의 녹명(祿命)은 40년간 치평의 군주가 될 명운이라고 하였다.
지금 동궁이 아들이 없고 척리(戚里)의 운이 다하였으므로, 운수가 당연히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지금이 바로 영웅이 부귀를 도모할 때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 말을 들은 뒤부터는 경희가 불궤(不軌)의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서 발길을 끊고 만나지 않으면서
상변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경희가 신을 죽여 입을 막고자 하여 부첩(父妾)을 간음하였다는 말을 만들어내어
그의 문객인 지평 양시진과 사촌인 장령 윤길을 시켜 군상을 속이고 무함하여 논척한 것입니다.” 하였다.
왕은 평소 능창군 전의 모습이 범상치 않다는 말을 들어온데다 또 정원군의 새문동(塞門洞) 사제(私第)와
인빈(仁嬪)의 선영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으로 항상 의심해 왔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크게 놀라 밤중에 옥사를 일으켰다.
경희는 창황하여 이첨에게로 가서 의논하니 이첨이 서로 구원해줄 것을 허락하였는데,
금군(禁軍)이 이첨의 집으로 가서 경희를 체포하였다.
경희가 공초하였는데, 그 대개에 “신의 아비는 이산해(李山海)와 계책을 정하여 주상을 옹립한 공이 있고,
신은 또 정인홍의 고제(高弟)이자 이이첨과 마음을 통하는 벗입니다.
항상 역적을 토죄하는 것으로 충성을 다하는 계책을 삼아왔는데, 어찌 스스로 모역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명국과 대질을 시키도록 하였는데, 명국은 교활하고 구변이 있어서 그가 일찍이 경희와 친밀하게 지낸
정상을 다 말하고, 함께 논했던 시사와 들었던 말들을 방증으로 낱낱이 거론하고, 또 말하기를
“경희가 신과 이토록 친하게 지냈는데 만일 신이 그의 역변을 발설하려 하지 않았다면 그가 무엇 때문에 갑자기
이토록 신을 죽이려 했겠습니까?” 하였다. 경희는 대질하여 변명하면서 여러 번 궁색함을 당하였다.
대체로 경희는 이미 명국과 친밀하였고 또 권세를 크게 과시하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전(佺)의 위인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명국이 주워 맞추어 가지고서 겁박하고 또 평소 시사를 비방한 말을 들어서 증거를 삼았다.
왕이 더욱 노하여 명국의 말을 믿고서 마침내 엄히 신문할 것을 명하였다.
이첨의 무리는 평소 역적 토죄로써 일을 삼아 유(柳)·박(朴)의 무리가 제대로 대항치 못하였는데,
경희의 옥사가 일어나자 박승종(朴承宗)이 추관이 되어 큰소리로 말하기를,
“역적이 과연 가까이에[邇]848) 있었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첨과 알력이 생기고 그들 당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윤길을 체포하기 위해 도사를 전라도 무안에 출발하게 하다. 신경희를 체포하다.
의금부에서 소문진·김이강·오충갑의 체포를 청하다. 신경희 사건과 관련된 춘경을 체포하게 하다.
이병(李覮)을 대사헌으로,한찬남(韓纘男)을 대사간으로,김개(金闓)를 우부승지로,황근중(黃謹中)을 동부승지로,
한영(韓詠)을 지평으로,한영(韓詠)을 정언으로 삼았다.
--------------------------------------------------------------------------
〖15일 기미〗맑음.
소명국(蘇鳴國)이 상소로 고변(告變)하여 신경희(申景禧181),김정익(金廷益93)과 그의 아들 이강(金以剛),
양시우(楊時遇203),소문진(蘇文震)등을 잡아들여서 가두었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신경희(申景禧161)는 별도의 칸에 엄히 가둬서 외부인과의 면회나 편지연락을 못하도록 하라.”고 했다.
오늘 실록국(實錄廳)에서 일하는 낭청(郎廳) 12명이 장원서(掌苑署204)에 모여서 이야기했다.
정영국(鄭榮國186),양극선(梁克選171),변응원(邊應垣),조국빈(趙國賓108),나인(羅訒168),정유번(鄭維藩205),
박수서(朴守緖16)한명욱(韓明勗),유응원(柳應元),황중윤(黃中允84)등이 다 모였다.
완아(婉兒)가 기절했다가 간신히 소생했다.
〖16일 경신〗맑음.
임금이 소명국(蘇鳴國)과 신경희(申景禧)를 친히 국문(鞠問)했다. 저녁에 오융보(吳隆甫=吳汝穩61)를 만나러 갔다.
경희(申景禧181)는 매우 겁나(怯懦:겁이 많고 마음이 약함)해서 말도 잘 못한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년 윤8월15일
북병사 김경서가 치계하여 오랑캐의 정세에 대해 아뢰다. 대사간 한찬남, 대사헌 이병이 사직을 청했으나 불윤하다.
궁밖 둔군이 있는 곳에도 훈련 도감의 임시가옥을 짓게 하다.
대간을 속히 처치하고, 양사 장관을 불러 국문에 참여하게 하다.
전옥으로 옮길 만한 죄수는 옮겨 수감하고 엄히 지키게 하고, 체포하지 못한 죄인을 속히 체포하도록 전교하다.
부제학 유숙·부교리 김질간 등이 지척을 받아 대죄를 청했으나 불윤하다.
장령 윤인 등은 출사하도록 명하고, 헌납 오여온·대사간 한찬남은 체차하다.
영의정 기자헌이 소명국 국문시에 피혐하기를 청했으나 불윤하다.
강진의 유학 윤유겸이 상소하여 김선을 역적 비호의 죄로 다스릴 것을 청하다
光海君 7년 윤8월16일
좌의정이 발병이 호전되는 대로 상경할 것을 아뢰다. 친국할 것을 전교하다.
대사헌 이병, 사간 정조가 소명국 국문시에 피혐하기를 청했으나 불윤하다.
새로 제수한 대사간을 불러 국문에 참여케 하다.
양사가 합계하여 김덕룡·김언춘, 동지의금 장만등의 중징계를 청했으나 불윤하다.
유인길(柳寅吉)을 대사간으로,이명남(李命男)을 장령으로,이위경(李偉卿)을 정언으로,오정(吳靖)을 봉상시 정으로,
장만(張晩)을 동지의금으로,이홍엽(李弘燁)을 헌납으로 삼다.
--------------------------------------------------------------------------
〖17일 신유〗맑음.
내가 양시진(楊時晋21)을 만나러 갔다가 안숙(安숙)을 만나 태평관(太平館)에 앉아서 의식(儀式)을 연습했다.
돌아오는 길에 안군소(安君邵243)를 만나고 또 연릉(延陵=李好閔99)군께 인사했다.
경홍(吳景泓)이 와서 잔다. 사성(師聖=李蒧56)이 지나다가 보고, 저녁에 양시진(楊時晋21)이 잡혀서 지나갔다.
〖18일 임술〗맑음.
박양이(朴養而=朴鼎吉4)가 사람을 보내와서 오늘 임금이 친국(親鞫)을 하므로
전(前)에 한 약속은 지키지 못하겠다고 한다. 형보(馨甫=李茳53)로 바꾸어 넣었다.
저녁에 박경행(朴景行)이 술병을 들고 왔기에 금언강(琴彦康=琴愷12),조자백(趙子百=趙錫朋50),오경홍(吳景泓)과
같이 마시고 파(罷)했다.
〖19일 계해〗맑음.
실록국(實錄廳)에 가서 7판(板)을 썼다. 임금이 친국(親鞫)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한안국(韓安國54)과 김탁(金鐸) 및 사성(師聖=李蒧56)등을 만났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년 윤8월18일
양시진을 의금부에 가두다. 친국할 것을 전교하다.
장령 윤인, 정언 이위경이 김효성 등의 비방을 받아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사간 정조가 홍무적 등의 비방을 받아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좌의정이 상경하도록 하유할 것을 전교하다.
죄인 김효성을 유배시키고 홍무적·정택뢰는 금고시키게 하다.
인피한 사간 정조·정언 이위경·장령 윤인의 출사를 명하다.
양사에서 역적이 추대하기로 한 능창군의 국문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光海君 7년 윤8월19일
친국할 것을 전교하다. 국문을 받고 있는 신경희의 관직을 삭탈하다.
대사헌 등이 신경희의 삭직을 논하지 않은 것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양사가 능창군을 국문하기를 청하다.
【 18일 친국할 때 양사의 장관이 탑전에서 소명국의 소에 이름이 나온 자들을 잡아 가둘 것을 청하였다. 】
따르지 않았다. 이후로 연계하였는데, 22일에 가서야 비로소 윤허하였다.
--------------------------------------------------------------------------
〖20일 갑자〗맑음.
아침에 오융보(吳隆甫=吳汝穩61)를 만나러 갔다. 들으니
임금이 하교하기를“문,김(文敬天,金慶男)두 역적의 사건을 다루는 사람들은 속히 의논하여 처리토록 하라.”고
했으므로 오경허(吳景虛)는 당연히 석방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금언강(琴彦康=琴愷12)장령(掌令)도 동참(同參)할 것을 촉구했지만 명국(蘇鳴國)이 잡혀 있어
초사(招辭:죄인이 자신의 범죄사실을 자백하는 일)하는 일에 자주 나와야 하므로 상소(上疏)를 해서 밝히려고 해도
내 뜻대로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영공께 (사직을)귄(勸)해서 정원(承政院)에 올렸지만 되돌려 나왔다. 완아(婉兒)가 기절했다가 깨어났다.
유응원(柳應元)이 잡혀서 수감됐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윤길(尹趌)을 잡으러 갔던 도사(都事)를 잡아다 국문하라.고 했다.
〖21일 을축〗맑음.
저녁에 박경행(朴景行)이 불러서, 나와 오경홍(吳景泓)이 술을 마시고 나는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22일 병인〗맑음.
오시(午時:낮12경)에 완아(婉兒)가 죽었다. 김덕상(金德祥)이 염습(斂襲)을 했다.
정랑(正郞) 이자릉(李子陵=李景嚴107)과 박경행(朴景行)이 와서 보았다.
윤길(尹趌96)이 잡혀 들어왔다. 오(吳)영천(永川)군수는 방면되었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년 윤8월20일
친국할 것을 전교하다. 대사헌 이병이 소명국의 일로 피혐하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대사헌·집의가 피혐하므로 차관에게 국문에 참여하게 하다.
副提學柳潚、典翰柳希發、校埋李大燁、副校浬金質幹、修撰任性之、修撰辛光業等
부제학류숙、전한류희발、교매이대엽、부교리김질간、수찬임성지、수찬신광업등
이 능창군을 국문하기를 청하다
光海君 7년 윤8월21일
친국할 것을 전교하다. 양사 장관은 피혐을 했더라도 국문에 참여하게 하다. 남궁명을 잡아가두다.
光海君 7년 윤8월 22일
윤길을 잡아온 뒤에 친국할 것을 전교하다. 의금부가 윤길의 미체포 등의 이유로 대죄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공홍도 생원 이간이 상소하여 조식을 문묘에 종사하기를 청하다.
대사헌 이병 등이 윤길의 미체포 등의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홍문관의 청에 따라 모두 출사하게 하다. 의금부 죄인 이전과 윤길을 잡아가두다.
대신이 능창군 이전에 관한 일을 임금이 재결할 것을 청하다
--------------------------------------------------------------------------
〖23일 정묘〗맑음.
바루(罷漏:5경3점에 큰 쇠북을 33번 쳐서 통금해제를 알림)가 친 후에 완아(婉兒)의 상여가 나갔다.
다 매장을 하고 나니 날이 밝아온다.
가련한 정이 측량할 길이 없다. 윤길(尹趌96)을 불러 들여 임금이 형신(刑訊:형구로 고문하여 자백시킴)을 명했다.
윤길(尹趌)을 옮겨 인도한 사람이 금개(琴愷12)라고 한다. 경홍(吳景泓)이 와서 잔다.
풍릉(豊陵)군수 김감(金鑑207)이 와서 만났고,사성(師聖=李蒧56),김택지(金擇之=金友益94),권경섭(權景涉)을 만났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년 윤8월23일
사직 양시진·의금부 도사 등을 파직하다. 박이서·이응해를 삭직하고, 이조 당상·낭청은 추고하지 말게 하다.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 친국하다.
王御仁政門親鞫。傳曰:“尹趌與申景禧,合爲一身,凡兇謀秘計,潛相密議。君上冒、國運吉凶,私相推卜,
왕어인정문친국。전왈:“윤길여신경희,합위일신,범흉모비계,잠상밀의。군상명도、국운길흉,사상추복,
而以佺爲四十年治平之主,以柳希奮、朴承宗爲運盡。欲殺鳴國,只與楊時晋,臺廳接狀,且以風聞,捉囚鳴國,
이이전위사십년치평지주,이류희분、박승종위운진。욕살명국,지여양시진,대청접상,차이풍문,착수명국,
發府吏,逐日監禁,情迹綢繆。且與景禧,圖滅鳴國之口,昭著無疑。詳悉鞫問。”
발부리,축일감금,정적주무。차여경희,도멸명국지구,소저무의。상실국문。”
(상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전교하였다.
“윤길은 신경희와 한동아리가 되어서 모든 흉모와 은밀한 계책을 몰래 서로 의논하였고,
임금의 관상과 명운, 국운의 길흉을 사사로이 멋대로 점을 치고, 이전(李佺)을 40년 간 치평할 임금이라 하였으며,
유희분(柳希奮)과 박승종(朴承宗)의 운이 다했다고 하였다.
소명국을 죽이자고 하여 양시진(楊時晉)과만 대청(臺廳)에서 접장(接狀)하고 또 풍문만으로 소명국을 체포해
수금하고 부리(府吏)를 보내 날마다 감시하여 금하게 하는 등 자취가 매우 주도면밀하였다.
또 경희와 함께 명국의 입을 막으려고 기도한 것이 분명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자세히 국문하도록 하라.”)
오여온(吳汝穩)을 이조좌랑으로,이경직(李景稷)을 분병조정랑으로,김성발(金聲發)을 강계판관으로,
박자응을 삼화현령으로,이홍엽(李弘燁)을 사서로,이경전(李慶全)을 우참찬으로,이위경(李偉卿)을 헌납으로,
황중윤(黃中允)을 정언으로,신득연(申得淵)을 형조정랑으로,정호관(丁好寬)을 여산군수로,유석증(兪昔曾)을 영광군수로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올랐는데, 선정(善政)을 하였기 때문이다.】 삼았다.
光海君 7년 윤8월 24일
임금이 친국하겠다고 하다. 대궐에 아직 나오지 않은 추관을 부르게 하다.
사헌부의 전계가 사간원과 같다. 죄인 김경남(金慶男)을 금일 군기시 앞길에서 형 집행했음을 아뢰다.
병조 판서 박승종이 심장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進士閔澈上疏曰)國家不幸,逆變繼起,羊甲等亂賊之徒,纔伏常刑,景禧兇逆之謀,又發於今。宗社之憂,臣民之痛,庸有極乎?
(진사민철상소왈)국가부행 역변계기,양갑등난적지도,재복상형,경희흉역지모,우발어금。종사지우,신민지통,용유극호?
景禧之於蘇鳴國,糾結親比,合爲腹心之狀,國人知之,萬目難掩。而朝爲兄弟,暮作仇讐,撲殺之計,猶恐不及,其欲滅口之情跡,
경희지어소명국,규결친비,합위복심지상,국인지지,만목난엄。이조위형제,모작구수,박살지계,유공부급,기욕멸구지정적,
敗露無餘。且尹趌以景禧一家之親,鼓唱妖說,助成兇謀,其間問答之語,有人臣不忍聞,不忍道者。
패로무여。차윤길이경희일가지친,고창요설,조성흉모,기간문답지어,유인신부인문,부인도자。
凡有血氣,孰不欲食肉而寢皮乎? 至於兇賊拿致之際,禁府郞廳使之偃然乘馬,緩緩就囚。尹趌拿命之下,已過九箇日,
범유혈기,숙부욕식육이침피호? 지어흉적나치지제,금부낭청사지언연승마,완완취수。윤길나명지하,이과구개일,
至再發都事,不卽拿到,循私曲護,莫此爲甚,而臺諫無一人糾正者。雖尋常拿問之人,猶不敢如此,況以大逆被鞫者乎?
지재발도사,부즉나도,순사곡호,막차위심,이대간무일인규정자。수심상나문지인,유부감여차,황이대역피국자호?
誣告之言,至發於按獄之臣,顯有營護之迹,供招之語或漏於問事之筆,多有掩蓋之迹,而論思言責之臣,亦莫敢矯其非,討逆之義,
무고지언,지발어안옥지신,현유영호지적,공초지어혹루어문사지필,다유엄개지적,이론사언책지신,역막감교기비,토역지의,
果如是乎? 嗚呼! 三年鞫逆,丙枕不安,中外遑遑,稅駕無所,此正臣子奮不顧身,徇國忘私之日,而遲回顧望,
과여시호? 오호! 삼년국역,병침부안,중외황황,세가무소,차정신자분부고신,순국망사지일,이지회고망,
未聞有一人抗義討賊者,猶爲國有人乎? 伏願聖明,快加雷斷,以嚴討逆之典。答曰:“當留念以處。”
미문유일인항의토적자,유위국유인호? 복원성명,쾌가뢰단,이엄토역지전。답왈:“당류념이처。”
임금이 친국하다. 신경희를 반복하여 캐묻게 하다.
申景禧方刑推捧招之際,袖中出獄中疏以“鳴國於七月二十一日,先言柳孝立以定遠第二子爲壻,有不測之意。”云,
신경희방형추봉초지제,수중출옥중소이“명국어칠월이십일일,선언류효립이정원제이자위서,유부측지의。”운,
“李爾瞻處,亦有蘇鳴國之書。”云 王曰:“景禧事議啓。”
“이이첨처,역유소명국지서。”운 왕왈:“경희사의계。”
(신경희가 형추(刑推)하여 공초를 받는 즈음에 소매에서 옥중소(獄中疏)를 제출했는데,
“소명국이7월21일에 먼저 유효립(柳孝立)에게 정원군 둘째 아들을 사위로 삼을 것을 말하였는데 불측한 뜻이 있었다.”
하고,“이이첨에게도 명국의 서신이 있다.”고 했다. 왕이 “경희의 일을 의논하여 아뢰라.”)
--------------------------------------------------------------------------
〖24일 무진〗맑음.
한안국(韓安國:韓定國109의 형)이 왔다.
들으니 신경희(申景禧181 원전(原典)에는 신(辛)이라 기록되어있다.)가 작은 종이쪽지[小紙]를 올렸다고 한다.
〖25일 기사〗맑음.
실록국(實錄廳)에 가서 7판(板)을 썼다. 민철(閔澈)의 상소로 인해 양사(兩司)가 모두 피혐(避嫌)했다고 한다.
박자수(朴子修)와 유약(柳瀹114)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조경관(趙景觀)을 만났다.
주우(金柱宇33)의 기색(氣色)이 편치가 않다.
〖26일 경오〗맑음.
이원량(李元樑)을 만났다. 임금이 친국(親鞫)을 했다. 윤길(尹趌)에게 형신(刑訊)을 가했다.
신경희(申景禧181)에게는 처음으로 형신(刑訊)을 가했다.
〖27일 신미〗흐렸다가 갬.
조경관(趙景觀)이 와서 만났다. 찬국(撰集廳)에 가서 교정을 보았다.
셋째 아들인 주우(金柱宇33: 이 당시 18세임) 댁[婦]이 병 구료(病救療)하려고 왔다.
〖28일 임신〗비.
경홍(吳景泓)이 머물고 있고,자릉(子陵=李景嚴107)이 주우(金柱宇33)의 병(病)을 보러 왔다.
〖29일 계유〗 .
인사발령이 있었다.
(내가)영남(嶺南:경상도)좌도(左道208)의 고관(考試官209)이 되었다.
정유번(鄭維藩205)이 부의(副擬:3망(三望)의 후보자 중 두 번째로 추천된 사람)였었다.
실록국(實錄廳)에 가서 7판(板)을 썼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년 윤8월25일
대사간 유인길, 대사헌·집의, 부제학 유숙, 등이 배척을 받았다 하여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大司諫柳寅吉,司諫鄭造、正言韓玉啓曰:“雖尋常鞫獄,所當十分明愼,不敢少有私意於其間。
대사간류인길,사간정조、정언한옥계왈:“수심상국옥,소당십분명신,부감소유사의어기간。
而況今此獄事,係干鞫逆,凡有血氣,孰不齊憤嚴討,以盡臣子之職乎?
이황금차옥사,계간국역,범유혈기,숙부제분엄토,이진신자지직호?
伏見儒生閔澈上疏,大槪以循私曲庇,顯加詆斥。臣等待罪言地,旣不能嚴討逆之義,反被營護之斥,決不可一日冒居。
복견유생민철상소,대개이순사곡비,현가저척。신등대죄언지,기부능엄토역지의,반피영호지척,결부가일일모거。
而昨仍入侍之敎,且慮瀆擾,未卽引避,所失尤大。請命罷斥臣等之職。”答曰:“勿辟”退待。
이작잉입시지교,차려독요,미즉인피,소실우대。청명파척신등지직。”답왈:“물피”퇴대。
헌납 이위경이 피혐하였으나 사직하지 말라고 하다. 유인길·정조·한옥·이병 등에게 출사하도록 명하다.
.光海君 7년 윤8월26일
임금이 인정문에 나가 친국하다. 이이첨을 불러 신경희가 끌어들인 일에 대해 묻다.
신경희를 형추하였는데, 옥중소를 올리다
光海君 7년 윤8월27일
날이 저물어 내일 추국할 것을 전교하다. 사간원이 복이에게 형장을 가하지 말 것을 청한 일을 그만두다.
光海君 7년 윤8월28일
유학 이일로가 상소하여 속히 신경희를 죽일 것을 청하다. 영부사에게 병을 참고 국문에 참여할 것을 당부하다.
사헌부가 복기의 일을 정계하다. 이조 판서 韓孝純이 신경희의 친척(妹壻)이므로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光海君 7년 윤8월29일
죄인 문경천이 탈옥하자 의금부 당직자 등을 추고하게 하다.
도승지 권진이 문경천 탈옥의 일 등으로 의금부 대장과 종사관을 추고를 청하다.
문경천 탈옥의 일로 의금부 당상이 대죄를 청하다.
사간원에서 문경천 탈옥의 일로 의금부 당상·포도대장 등의 파직을 청하다.
임성지(任性之)를 헌납으로,이홍엽(李弘燁)을 부교리로,안응형(安應亨)을 황해 감사로,
조명욱(曺明勖)을 남양 부사로,정준(鄭遵)을 사서로,오여온(吳汝穩)을 겸사서로,최관(崔瓘)을 분병조 참판으로,
유몽인(柳夢寅)을 동지성균으로 삼았다. 이경원(李敬元)·심경(沈憬)·이극해(李克諧) 등을 수금하였다.
【신경희의 옷소매에서 나온 조그만 서찰은 바로 심경의 편지였는데, 말이〈 좌상과〉대비(大妃)의 일을 범하였다.
【심경은 이명(李溟)의 무리였다. 평민으로서 당을 결성하고 정인홍을 사사하였다. 이이첨 등이 대군(大君)을 논하여
살해하고 대비(大妃)를 동요시킴에 이르러서는 심경은 스스로 학자로서 흉당(兇黨)이 된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자못 스스로를 사대부간에 변명하였다.
그러자 이첨 등이 크게 노하여 심경이 모후를 폐하자는 설을 모함하여 지어내어 조정을 속였다고 하니,
심경이 두려워서 또 대간에서 스스로 변명하고, 신경희에게도 서찰을 보냈다고 하였다.
어제 도헌(都憲)의 자리에서 소명국의 말을 들어보니, 운운한 말들은 심경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로
직장(直長)이경원이 이극해에게 말한 것이라 하였다.
당시 이원익을 축출한 때이므로 대론(大論)을 말하기 꺼렸는데 경희가 이로써 명국을 모함하려고
그 서찰을 소매 속에다 감추고 국문에 응하여 발견되게 하였다.
이에 3인을 아울러 국문하고 명국은 국문하지 않았다.
심경이 공초한 말은 앞뒤가 안 맞았는데, 알고 있는 유명인사를 많이 끌어대어
“이들도 모두 장차 대론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이에 별도의 큰 옥사가 일어났는데 경희도 이로써 자신을 구원하지는 못하였다.】
윤기(尹錡)에게 형신을 가하니 무복(誣服) 하다.
《구전공13세손 김 태동 옮겨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