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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에 관한 학설
1> 성선설(性善說)
인간의 타고난 본성을 착하다.
다만 육체적 정욕(情欲)이나 환경에 의하여 악행을 자행할 가능성이 있다.
동양의 맹자(孟子) - 4단(인의예지) / 서양의 루소(Rousseau,J.J.) - 선한 자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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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설 性善說
맹자(孟子)가 주장한 중국철학의 전통적 주제인 성론(性論). 사람의 본성은 선(善)이라는 학설이다. 성론을 인간의 본질로서의 인성(人性)에 대하여 사회적·도덕적인 품성이나 의학적·생리학적인 성향을 선악(善惡)·지우(知愚)라는 추상적인 기준에 따라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현실의 사람을 언제나 이념적인 모습으로 파악하게 된다. 맹자에 따르면 사람의 본성은 의지적인 확충(擴充)작용에 의하여 덕성(德性)으로 높일 수 있는 단서(端緖)를 천부의 것으로 갖추고 있다.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 등의 마음이 4단(四端)이며 그것은 각각 인(仁)·의(義)·예(禮)·지(智)의 근원을 이룬다. 이런 뜻에서 성(性)은 선(善)이며, 공자(孔子)의 인도덕(仁道德)은 선한 성에 기반을 둠으로써 뒤에 예질서(禮秩序)의 보편성을 증명하는 정치사상으로 바뀌었다. 당나라의 유학자 이고(李)는 도가(道家)와 불교사상의 영향을 받아 《복성서(復性書)》에서 성의 본연인 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성선사상(性善思想)은 선악(善惡)은 어느 쪽으로도 기를 수 있다는 세석(世碩)이나 후한(後漢)의 혁신적 사상가 왕충(王充)의 성론과 대립되고, 선악의 상대적 전환가능성이 있는 순자(荀子)의 이른바 성악설(性惡說)과도 크게 다르다. 그 후 유교는 성선설을 도덕실천의 근거로 하여 계승되고 발전하였다.
서양에서는 성선설이 소수의 철학자와 교육자 사이에 유행되었을 뿐이다. 스토아 학파는 인성(人性), 물성(物性)의 자연에 근거하여 공동의 이성 법칙을 찾았는데 인간은 단지 자연의 이성 법칙에 따라서 행하기만 하면 이것이 바로 지선(至善)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관점은 시세로(Ciecero, B.C. 106∼43)와 세네카(Ceneca, B.C. 4∼A.D.65)에서부터 루소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쳤다.
루소는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한 것인데, 문명과 사회 제도의 영향을 받아 악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연이 만든 사물은 모두가 선하지만 일단 인위(人爲)를 거치면 악으로 변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선은 천성에 속하고 악은 인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피히테(Fichte, 1762∼1814), 프뢰벨(Fr bel, 1782∼1852)등도 이러한 성선의 관점을 주장했다.
맹자,孟子
중국 전국 시대의 사상가 맹가(孟軻)의 저술. 그의 문인들이 스승이 죽은 후에 정리한 것이라는 견해들도 있으나, 수미 일관된 체제 등을 들어 일반적으로 맹자의 직접 저술로 인정하고 있다. 송대의 유학자인 주희(朱熹) 등에 의해 유학의 기본 경전인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흔들리지 않는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후한(後漢) 말기의 조기(趙岐)와 주희가 붙인 주석이 가장 수준 높은 해설서로 통용된다. 양혜왕(梁惠王)·공손추(公孫丑)·등문공(文公)·이루(離婁)·만장(萬章)·고자(告子)·진심(盡心)의 7편으로 구성되었다. 양(梁)의 혜왕에게 ‘이(利)’를 구하는 잘못을 지적하고 “왕께서는 오직 인의(仁義)를 말씀함에 그칠 것이지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라는 어구로 쐐기를 박은 첫머리의 기사가 전체 저술의 개요를 이루는데, 공자의 인(仁)에 대해 의(義)를 더하여 왕도정치의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그것은 다시 본성이 선하다고 전제하여 인간을 적극적으로 신뢰하는 성선설(性善說)과 민의(民意)에 의한 폭군의 교체를 합리화한 혁명론(革命論)을 중심 기둥으로 삼고 있다. 정의에 따른 사회 생활을 강조하고 그 물질적 기반을 매우 중시하였으나, 대인(大人)의 일과 소인(小人)의 일을 구분하여 육체 노동자에 대한 정신 노동자의 지배를 합리화하였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현대사회에서는 그 전체적인 사회·정치 이론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지만, 크게는 ‘성선설’로부터 구체적으로 ‘호연지기론(浩然之氣論)’에 이르는 견해들은 시대를 뛰어 넘어 인간 생활의 한 지침이 되고 있다. 빈틈없는 구성과 논리, 박력 있는 논변으로 인해 《장자(莊子)》 및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더불어 중국 진(秦) 이전의 3대 문장으로 꼽히는 등 문장 교범으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왔으며 한문 수련의 필수적인 교재이다. 또 ‘오십보백보’ ‘알묘조장(苗助長)’ 등의 절묘한 비유를 통해 독자의 흥미를 돋우고 논지를 철저히 이해시켜 준다.
루소 <Jean-Jacques Rousseau>(1712.6.28~1778.7.2)
프랑스의 사상가·소설가. 스위스 제네바 출생. 가난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루소를 낳다가 죽자 아버지에 의해 양육되었다. 10세 때는 아버지마저 집을 나가 숙부에게 맡겨졌으며, 공장(工匠)의 심부름 따위를 하면서 소년기를 보냈다. 16세 때 제네바를 떠나 청년기를 방랑생활로 보냈는데, 이 기간에 바랑 남작부인을 만나 모자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사랑이 기묘하게 뒤섞인 것 같은 관계를 맺고, 집사로 일하면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1742년 파리로 나와 디드로 등과 친교를 맺고, 진행 중인 《백과전서》의 간행에도 협력하였다. 49년 디종의 아카데미 현상 논문에 당선한 《학문과 예술론: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을 출판하여 사상가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그 뒤 《인간불평등기원론》(1755) 《정치 경제론》(55) 《언어기원론: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사후 간행) 등을 쓰면서 디드로를 비롯하여 진보를 기치로 내세우는 백과전서파 철학자나 볼테르 등과의 견해 차이를 분명히 하였다.
특히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연극에 관한 편지》(58) 이후 디드로와의 사이는 절교상태가 되었고, 두 사람은 극한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독자적 입장에 선 루소는 다시 서간체 연애소설 《신(新) 엘로이즈》(61),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논한 《민약론(民約論):Du Contrat social》(62), 소설 형식의 교육론 《에밀:Emile》(62) 등의 대작을 차례로 출판하였는데, 특히 《신 엘로이즈》의 성공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에밀》이 출판되자 파리대학 신학부가 이를 고발, 파리 고등법원은 루소에 대하여 유죄를 논고함과 동시에 체포령을 내려 스위스·영국 등으로 도피하였다. 영국에서 흄과 격렬한 논쟁을 일으킨 후, 프랑스로 돌아와 각지를 전전하면서 자전적 작품인 《고백록:Les Confessions》을 집필하였다. 68년 45년 이래 함께 지내온 테레즈 르바쇠르와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그 후 파리에 정착한 루소는 피해망상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자기변호의 작품 《루소, 장자크를 재판한다:Rousseau juge de Jean-Jacques》를 쓰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쓰기 시작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파리 북쪽 에르므농빌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지 11년 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는데, 그의 자유민권 사상은 혁명지도자들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94년 유해를 팡테옹(위인들을 合祀하는 파리의 성당)으로 옮겨 볼테르와 나란히 묻었다.
평생 동안 많은 저서를 통하여 지극히 광범위한 문제를 논하였으나, 그의 일관된 주장은 ‘인간 회복’으로, 인간의 본성을 자연상태에서 파악하고자 하였다. 인간은 자연상태에서는 자유롭고 행복하고 선량하였으나, 자신의 손으로 만든 사회제도나 문화에 의하여 부자유스럽고 불행한 상태에 빠졌으며, 사악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다시 참된 인간의 모습(자연)을 발견하여 인간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인간 본래의 모습을 손상시키고 있는 당대의 사회나 문화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을 가하였으며, 그 문제의 제기 방법도 매우 현대적이었다. 한편,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자아의 고백이나 아름다운 자연묘사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2> 성악설(性惡說)
인간의 타고난 본성을 악하다.
인간은 충동과 욕망, 공격성과 이기성을 지닌 존재이다.
후천적, 인위적 교육과 환경에 의해 선해진다.
동양의 순자(筍子) - 인위적 예(禮)를 강조 / 서양의 홉스(Hobbes) - 사회 계약 상태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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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 荀子 300?~230? / BC 298?~BC 238?)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 성 순(荀). 이름 황(況). 조(趙)나라 사람. 순경(荀卿)·손경자(孫卿子) 등으로 존칭된다. 《사기(史記)》에 전하는 그의 전기는 정확성이 없으나, 50세(일설에는 15세) 무렵에 제(齊)나라에 유학(遊學)하고, 진(秦)나라와 조나라에 유세(遊說)하였다. 제나라의 왕건(王建:재위 BC 264∼BC 221) 때 다시 제나라로 돌아가 직하(稷下)의 학사(學士) 중 최장로(最長老)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훗날, 그곳을 떠나 초(楚)나라의 재상 춘신군(春申君)의 천거로 난릉(蘭陵:山東省)의 수령이 되었다. 춘신군이 암살되자(BC 238),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 그 고장에서 문인교육과 저술에 전념하며 여생을 마쳤다.
【사상】 순자의 사상은 공자(孔子)·자궁(子弓)을 스승으로 하고 유가(儒家)의 실천 도덕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들보다 한층 합리적이며, 더욱이 전국사상(戰國思想)의 여러 유형을 지양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것이었으므로 그의 사상사적(思想史的) 위치는 서양 철학사(哲學史)상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비교된다. 순자는 인간을 공동체 ‘군(D)’ 안에서의 존재로 규정하고, 인간 궁극의 실천목적을 묵가(墨家)의 사상을 취하여 그 공동체, 즉 윤리적 질서체(秩序體)의 이념에 둔다. 그 질서는 법가적(法家的)으로, 개인의 ‘분수’ 를 타율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보나, 다시 그것을 초월하여 유기적·합목적적 격률(合目的的 格律) ‘성왕(聖王)의 제(制)와 예의’의 존재를 인정한다. 이리하여 객관적 규범에 의한 실천적 합리론(合理論)이 형성된다. 전통적인 종교 관념 ‘하늘[天]’에 대하여서도 비판적이고 현실적이며, 유명론적(唯名論的)인 명가사상(名家思想)에 대하여서 역시 비판적이다. 그리하여 실념론적(實念論的) 입장에서 개념 종속 관계와 범주론(範疇論)을 거론하는 진보된 논리적 사고를 나타내며, 오직 명사(名辭)의 타당성은 합목적사회관습(合目的社會慣習) ‘왕제(王制)’에 의하여 정해지는 것이 특징적이다. 노장(老莊)의 변증적(辨證的) 사변(思辨)의 영향을 받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사상과는 가장 대조적이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욕(欲)과 지(知)가 있는 자주적 목적체(自主的目的體)로 보는 유가(儒家) 부동(不動)의 바탕에 선다. 동시에 원존재(原存在)와 의의활동(意義活動)을 구별하고, 특히 후자의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합리적 인위(人爲)인 ‘위(僞)’ 주의를 주장하였다.
종래 한동안 순자는 ‘성(性)은 악(惡)이고, 선(善)한 것은 위(僞)’라는 성악론자(性惡論者)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맹자처럼 인간성의 직접 확충(擴充)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생득적(生得的)인 의욕을 악한 것이라 부정함으로써 선한 의의활동이 있다(이 점은 제나라의 유심론적 영향이라 하겠다)는, 즉 인간의 정신은 주관적으로는 다면(多面)으로 작용하나 그것을 부정하여 객관적 규범에 귀일(歸一)함으로써 후자의 목적으로 전환하고, 더구나 자주적인 자율과 타율, 개인과 공동체와의 일치된 합리적 실천이 완수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예의의 ‘학(學)’적 수련과 정신의 심화(深化)에 의하여 규범목적의 터득과 인륜의의(人倫意義)의 충족 정도에 따라 사(士)와 군자(君子)의 인격의 진보가 있고, 실천 목적과 질서 이념의 완전 일치는 마침내 성인(聖人), 왕자로서 인륜의 완전체(完全體)를 영위한다고 한다. 그의 정치 사상은 강력한 예치주의(禮治主義)를 취한다. 순자의 사상은 하나의 유가사상(儒家思想)의 완전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후대에 끼친 영향이 크다. 송대(宋代) 학자들의 비난은 순자의 맹자 비판과 성악설(性惡說)의 오해에 의한 것일 뿐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또 순자의 유가경전(儒家經典)을 전한 공적이 인정된다. 한비(韓非)·이사(李斯)가 순자의 제자였다는 설은 의심스럽다. 그 사상의 획일성과 현실적 요구에서 진(秦)·한(漢)의 제국주의가 편승하기 쉬운 점이 있었음은 사실이지만, 진·한초(秦漢初)에 그의 학파가 활동한 것을 보아도 오히려 전제주의에 대한 비판이 되는 것이었다. 한갓 순자의 사상은 전국시대의 주관적 실천설에서, 《여씨 춘추(呂氏春秋)》가 미숙하기는 하나 계승을 나타내고 있듯이 합리적 윤리 사상으로의 전환의 거보(巨步)를 내딛고 있는 것인데, 아직 전통에의 의존과 실천합목적관(實踐合目的觀)의 제한에 불철저함이 있었던 것이다. 순자의 저술은 당시 이미 성문(成文) 부분이 있었으나, 현존의 《순자》 20권 32편은 한나라의 유향(劉向)이 당시 있었던 322편을 편집하여 《손경신서(孫卿新書)》 32편으로 편찬한 것을, 당(唐)나라의 양량(楊倞)이 편(編)의 순서를 바꾸고 주(註)를 붙여 《손경자(孫卿子)》라 하였고, 후에 간단히 《순자》라 불리게 된 것이다. 한 부분은 순자의 문인(門人)의 설(說)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또 《순자》에는 부(賦) 10편의 저작이 있으며 지금은 2편으로 줄여서 수록되어 있다.
성악설 性惡說
<고등학교 윤리 교사용지도서 색인>:순자는 성악설을 제창하여 "인간의 성품은 악하다. 선한 것은 人爲다."고 하였다. 이것은 선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임을 지적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은 타고나면서부터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결과인 것이다. 순자의 성(性)은 인간의 감성적 욕구의 측면을 지칭한 것인 만큼, 맹자가 비감성적이고 순수한 인간 본성을 일컬었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그 지칭하는 대상이 다르다. 맹자는 심선(心善)을, 순자는 정악(情惡)을 주장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므로 순자의 선은 인위(人爲)로써 인간이 노력하면 성취되는 것이다. 이를 일러 '화성기위(化成起僞)'라 하였다. 이것은 후천적인 작위에 의하여 기질을 변화시킴으로써 선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순자의 관점은 행위 규범으로써의 예(禮)의 준행을 강조한 점에 잘 나타나 있다. 맹자는 인간의 내심을 성찰을 위주로 후세의 이기 심성 철학(理氣心性哲學)의 소지를 마련한 반면에, 순자는 예의법정(禮儀法正)을 강조하여 형명법술(刑名法術)을 주로 하는 법가(法家)가 나오게 될 계기를 주었던 것이라 하겠다.
중국의 성악설은 성선설 다음에 건립되었지만 서양에서는 성악설이 생기고 난 뒤에 성선의 관점이 대두되었다. 기독교의 원죄는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관점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 이래의 논자들은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마키아벨리(Marchiavelli, 1447∼1527)는 당시 이탈리아 사회의 부패를 직접 보고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단정하였고, 홉스(Hobbes, T., 1588∼1679)는 자연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라 가상하여 인간의 본성이 악함을 추론하였으며, 그리고 쇼펜하우어(Schopenhauer, 1788∼1860)도 죄악이 인간 본성 가운데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에 제거할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백과사전>: 고대 중국의 유학자 순자(荀子)가 주창한 학설로서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악이라고 생각하는 윤리사상. 인간의 도덕적 수양(修養)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던 유가에서는 그 수양의 가능성이나 수단과 관계되는 문제를 놓고 본성론(本性論)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순자는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에 반대하고 나섰으나 그 목적은 맹자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수양을 권하여 도덕적 완성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순자의 사상은 전국시대의 혼란한 사회상에 바탕을 두었다. 성악설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감성적(感性的)인 욕망에 주목하고, 그것을 방임해 두면 사회적인 혼란이 일어나기 때문에 악이라는 것이며, 따라서 수양은 사람에게 잠재해 있는 것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가르침이나 예의에 의하여 후천적으로 쌓아올려야 한다고 하였다. 이 사상은 백성을 정치적 권력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규제하려고 한 이사(李斯)·한비자(韓非子) 등 법가에 계승되었으나 유가의 정통사상으로서는 성선설(性善說)에 압도되었다.
예 禮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뜻하는 유교개념. 고대 중국에서 그 장소에 알맞는 가장 이상적인 개념으로 만들어진 예는 훗날 규범으로서 자유로운 행동을 구속하게 되었고, 상대의 자기에 대한 존경의 정도를 재는 규준이 되었다. 특히 유교에서는 예를 지키는 일을 중시하여 군신· 부자· 형제· 부부· 붕우 등의 예에는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였다. 또 태평세(太平世)를 실현하는 수단의 하나로 군신간의 예를 확대, 작위(爵位)를 규정하여 존비의 구별을 엄격히 하고, 계층에 따른 담당 직무의 범위를 구분하여 360관(官)으로 나눈 정연한 정치기구를 만들었다.
◆ (禮) 넓은 의미로는 풍속이나 습관으로 형성된 행위 준칙, 도덕 규범, 등 각종 예절. 사회의 질서를 위해 만들어진 유교적 윤리규범을 지칭한다. 예(禮)는 본시 고대 사회에서 복을 받기 위해 귀신을 섬기는 일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예(禮)’자의 ‘示’는 ‘神’자에서, ‘豊’은 그릇에 곡식을 담은 모양이라고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풀이한다. 유가에서 예를 매우 중요시하여 《시경(詩經)》에는 ‘사람이면서 예가 없다니 어찌하여 빨리 죽지 않는가(人而無禮胡不死)라고 하였고 심지어 예로써 짐승과 구분 기준을 삼았다. 예의 종류로 오례(五禮)라 하여 길례·흉례·군례·빈례·가례(吉禮·凶禮·軍禮·賓禮·嘉禮)를, 구례(九禮)라 하여 관례(冠禮)·혼례(婚禮)·조례(朝禮)·빙례(聘禮)·상례(喪禮)·제례(祭禮)·빈주례(賓主禮)·향음례(鄕飮禮)·군여례(軍旅禮)를 말하여 한국에도 전래되었지만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일상 생활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례(四禮), 곧 관례, 혼례, 상례, 제례이다. 이 사례를 일컬어 가례(家禮)라 하며 주자의 예설을 모아 편한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조선시대의 모든 가례의 표준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항간에서 많이 쓰이는 《사례편람(四禮便覽)》을 비롯하여 《사례찬설》 《사례촬요》 《사례훈몽》 등 예절에 관한 많은 책들이 한결같이 《주자가례》를 모범으로 삼았을 정도로 주자의 예설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그런데 이런 예법은 주로 양반 계층에서 지켜졌으며 이른바 상민계급에게는 별로 통용되지 않았다. 중국은 양반계급에서조차 한국만큼 예가 철저하게 준용되지 않았다. 한국의 지나친 예의 준용은 당쟁이나 사화를 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하여 사회에 끼친 부정적 영향이 매우 컸다. 이는 공자가 강조한 예의 본질은 차츰 퇴색하고 예의 형식이 위세를 떨쳤기 때문이다.
홉스<Thomas Hobbes>(1588.4.5~1679.12.4)
영국의 철학자. 맘즈베리 출생. 무명의 목사 아들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에서 스콜라철학을 전공하였다. 스튜어트왕조를 지지하는 정치가로 지목되자, 퓨리턴혁명 직전에 프랑스로 망명하여 유물론자 R.가생디와 철학자인 R.데카르트 등과 알게 되었다. 그 후 크롬웰의 정권하에서는 런던으로 돌아와 정쟁(政爭)에 개입하지 않고, 오직 학문연구에 힘썼다. 왕정복고(王政復古) 후에도 찰스 2세 통치하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F.베이컨과는 달리 귀납법(歸納法)만이 아닌 연역법(演繹法)도 중시하여, 양자의 상즉적(相卽的) 관계에 의하여 이성(理性)의 올바른 추리인 철학이 성립된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주요저서인 《철학원리》는 제1부 <물체론>(1655), 제2부 <인간론>(58), 제3부 <시민론(市民論)>(42, 47) 등 3부로 나누어졌는데 베이컨 학설보다 더 체계적으로 구축되었다. 제1부 <물체론>에서 그는 자연학(自然學)을 철학의 기초에 두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인(形相因)·목적인(目的因)을 버리고 전실재(全實在)를 물체와 그 운동이라는 동력인(動力因)만으로 설명하려는 유물론, 즉 자연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자연적 물체에 대한 이와 같은 생각을 인위적 물체인 ‘인간’이나 ‘국가’에도 미치게 하여, 감각·감성(感性) 등의 인식의 이론이나 정념론(情念論), 윤리학, 법·사회의 이론에도 적용하였다. 정신은 미세한 물체이고, 인식은 외계의 운동이 감관(感官)에 주는 인상에서 생기며 실재의 모사(模寫)가 아니고 주관적이라 하였다. 이는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으며, 지적인 판단이나 추리는 그 표현수단으로서 언어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후자도 실재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개개의 물체만이 실재하는 것이며, 추상적·보편적 개념은 기호(記號)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견해는 중세(中世)의 W.오컴 등에서 현저했고, 또 후일의 영국 경험론에서 보는 고유한 유명론(唯名論)의 전형적인 예이다. 수학(數學)은 앞에서 말한 기호로서의 보편자(普遍者)에 관계되는 지식의 모범이라 하였다. 감정이나 정서에 대해서도 똑같은 원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외적 자극에 대한 이론적 반응이 감각인 데 반하여, 실천적 반응은 쾌(快)·불쾌(不快)의 감정이다. 선(善)이란 쾌이므로 인간이 바라는 것이고, 악(惡)이란 불쾌이므로 인간이 싫어하는 것이다. 의지(意志)는 외적으로 결정되며 결정론(決定論)은 필연이다. 본질적으로 선한 것은 없고, 선악(善惡)·정사(正邪)는 상대적인 것이어서 국가와 법이 성립되었을 때에 그 판정의 기준이 생긴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어서 ‘자연상태’에서는 아무것도 금할 수 없고, 개인의 힘이 권리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을 끝까지 추구하는 자연상태에서는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있고, ‘사람은 사람에 대하여 이리[狼]’이기 때문에 자기 보존(自己保存)의 보증마저 없다. 그러므로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은 계약으로써 국가를 만들어 ‘자연권(自然權)’을 제한하고, 국가를 대표하는 의지에 그것을 양도하여 복종한다. 홉스는 《리바이어던:Leviathan》(1651)에서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를 이상적인 국가형태라고 생각하였다. 그 밖의 저서로 《자연법과 국가의 원리》(40) 등이 있다.
3>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 백지설(白紙說)
인간의 타고난 본성을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인간 자신의 후천적, 경험적 선택과 판단이나 환경에 달려 있다.
동양의 고자(告子) - '물(水)' / 로크(Locke, J.) -백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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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告子/?~?)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사상가. 맹자(孟子:BC 372∼BC 289)와 같은 시대의 사람. 성 고(告). 이름 불해(不害). 인성(人性)에 관하여 맹자와 논쟁을 벌여, “사람의 본성은 본래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다만 교육하기 나름으로 그 어느 것으로도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맹자와의 논의는 《맹자》 <고자(告子) 상편(上篇)>에 수록되어 있다.
존 로크 <John Locke>(1632.8.29~1704.10.28)
영국의 철학자·정치사상가. 브리스틀 근교의 링턴 출생. 계몽철학 및 경험론철학의 원조라 일컬어진다. 아버지는 소지주·법률가로서 내란 때는 의회군에 참가하여 왕당군과 싸웠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자연과학·의학 등을 배웠고, 한때 공사(公使)의 비서관이 되어 독일 체류 중에 애슐리경(뒤의 샤프츠베리 백작)을 알게 되어 그의 시의(侍醫) 및 아들의 교사 그리고 고문이 되었다. 백작이 실각되자 반역죄로 몰려, 1683년 네덜란드로 망명했다가, 89년 사면되어 귀국하였다. 망명생활 동안 각지를 전전하면서 여러 학자들과 친교를 맺고, 귀국 후 《종교 관용에 관한 서한》(1689) 《제2서한》(90) 《제3서한》(92) 《통치이론》(90) 《인간오성론(人間悟性論)》(90) 등을 간행하여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 후 관직에 있었으나 1700년 이후 은퇴하여 에식스의 오츠에서 사망하였다. 데카르트 철학과 I.뉴턴에 의해 완성된 당시의 자연과학에 관심을 가졌고 반(反)스콜라적이었다. 《인간오성론》은 그의 영향을 바탕으로 G.버클리, D.흄에게로 계승되었던 경험론과 내재적 현상론(內在的現象論)의 입장에서, I.칸트에 이르러 결실을 보게 되는 인식을 근본 과제로 제기하여 논술한 저서이다. 제1권에서는, 먼저 R.데카르트나 케임브리지 플라톤파(派)의 본유관념(本有觀念)과 원리를 부정하고, 그 위에 제2권에서는, 인지(人智)는 모두 감각과 반성이라는 경험을 통하여 얻어지는 단순관념에 유래하며, 그로부터의 복합관념으로 설명된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전통적인 ‘실체(實體)’ 개념도 단순관념의 복합이며, 기체(基體)는 그 배후에 상정되는 불가지(不可知)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단, 색(色)·향(香)·음(音)과 같이 감각에 대하여 상대적인 제2성질과, 연장(延長)·운동·고체성(固體性)과 같이 물(物) 자체에 구비된 제1성질과 구별하여, 전자(前者)는 후자가 감각기관에 자극을 줌으로써 생긴다고 생각하여, 당시의 과학적 실재론을 전제로 삼았다. 또, 불가지인 물적 실체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정신에 대해서도 반성의 관념과 기능적 인격에 의한 설명을 하고 있지만, 정신실체나 신의 존재를 인정한 점에서, 그 문제를 다음의 버클리와 흄에게 남겨 놓았다.
제3권의 언어론은, 스콜라적 실체형상(實體形相)의 비판, 개념론 또는 유명론적(唯名論的)인 보편개념의 설명·정의에 대해서의 견해 등 현대 의미론(意味論)에 통하는 중요한 고찰을 포함시켰다. 제4권은 제3권까지 논술한 것들을 바탕으로 하여 지식의 확실성·가능성·종류 등을 논했다. 제4권에서 자아의 직각지(直覺知)를 지식의 근원으로 하는 것 등 이성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으나, 지식을 관념과 대상 간이 아니라 관념간의 일치 또는 불일치의 지각(知覺)이라는, 관념간의 관계라고 한 것은 후의 경험론의 방향을 보인 것이다. 그에게는 《인간오성론》에서 단편적으로 취급된 이외에는 정리된 윤리서(倫理書)는 없다. 그러나 도덕의 심리적 해명 방법이나 쾌락주의·행복주의의 경향과, 도덕을 신(神)의 법, 자연법, 국법과의 일치에서 구하려고 한 방향 등은 영국 고유의 윤리와 공통된 성격을 보인다. 또, 계시(啓示)의 뜻을 인정하면서도 이성적 논증(理性的論證)의 한계를 넘는 것을 개연적(蓋然的)이라 생각하는 점에서 종교상 이신론(理神論)을 조장하는 입장에 섰다. 법·정치 사상에서는 계약설을 취하지만, 홉스의 전제주의(專制主義)를 자연상태보다도 더 나쁘다고 생각하여 주권재민(主權在民)과 국민의 반항권을 인정하여 대표제에 의한 민주주의, 3권분립, 이성적인 법에 따른 통치와 개인의 자유·인권과의 양립 등을 강조하여 종교적 관용을 역설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명예혁명을 대변하고 프랑스혁명이나 아메리카 독립 등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서유럽 민주주의의 근본 사상이 되었다. 또 교육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당시의 교육법을 통렬히 비판하여 그리스·라틴어 집중주의, 암기식 주입주의를 반대하고 수학적 추리와 유용한 실제적 지식, 신체·덕성의 단련을 중시하였다. 따라서 그 사람의 소질을 본성에 따라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역설하여 가정교사에 의한 교육을 주장했다. 저서로 《금리저하와 화폐가치와 화폐가치 앙등의 결과에 관한 고찰》(91) 《교육론》(93) 등이 있다.
4> 성선악혼재설
'인간의 성은 선하기도하며 악하기도 하다.'
왕충(王充)의 [논형(論衡)] '본성론' : 인간의 착한 성품을 길러서 돋우면 선이 자라고 악
한 성품을 길러 돋우면 악이 자란다.
플라톤의 [국가론] : 인간의 영혼을 머리속의 이성(理性), 가슴 속의 의성(意性), 배와 사지에 속한 욕성(欲性)으로 분석하였으며, 이성은 합리적이고 욕성과 의성은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이다. 이성이 잘 조절되면 욕성도 선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 영혼을 이성과 비이성으로 나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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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악혼재설
인간의 성은 선하기도하며 악하기도 하다는 관점이다. 이것의 최초 주장자는 왕충(王充)이다. 그의 [논형(論衡)]의 '본성론'에서는 인간의 착한 성품을 길러서 돋우면 선이 자라고 악한 성품을 길러 돋우면 악이 자란다고 하였다.
서양에서 이러한 인성을 주장한 사람은 플라톤이다. 그는 인간의 영혼을 머리속의 이성(理性), 가슴 속의 의성(意性), 배와 사지에 속한 욕성(欲性)으로 분석했다. 이성은 합리적이고 욕성과 의성은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이다. 이성이 잘 조절되면 욕성도 선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영혼을 이성과 비이성으로 나눈 것도 이러한 견해라 할 수 있다.
5> 기타 : 성삼품설
성삼품설(性三品說)
중국 철학의 성론 중 인간의 본성에는 상·중·하의 3등급이 있다는 설. 상은 가르치지 않아도 선한 것, 하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못하는 악이며, 중은 교도(敎導)에 따라 선도 되고, 악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춘추시대 공자(孔子)의 사상에서도 엿볼 수 있으나, 이것이 성론(性論)으로서 확립된 것은 후한(後漢) 이후이다. 당(唐)나라의 한유(韓愈)가 그의 저서 《원성(原性)》에서 이 설을 강조하였고, 후한의 순열(荀悅)도 그의 저서 《신감(申鑒)》의 잡언(雜言) 하편에서 거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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