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 자신의 지휘에 의해서 초연 당시에 오케스트라와 성악진, 합창단이 1000명이 넘었다고 해서 불리우는 별명인 ‘천인교향곡’. 절반만 나와도 연주로는 충분하고 남지만 실제로 1000명이 넘게 나온다면 그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제대로 조화를 이루어 나올 수나 있을까.
기대감과 호기심 그리고 약간의 우려 속에 국내외 통틀어 몇 번 되지 않았을 진짜 천인교향곡을 감상했다. 공연 인원이 많다고 해서 작품의 위대함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소리가 크다고 감동의 높이가 올라가는 건 아니다. 그러나 말러 8번은 자기과시적인 측면을 이미 넘어선 작품인만큼 1000명이 들려주는 조화와 완성도의 입체그림을 보여줄 수 있다면 지휘자로서 꿈에서라도 그려볼 만한 모험이다.
관현악뿐만 아니라 오페라 등에서도 갈고 닦은 코리안심포니는 부천필 재임당시 말러 교향곡 전곡 시리즈로 위업을 이룬 임헌정 지휘자의 손끝에서 정제되고 당찬 소리를 들려줬다.
기쁨의 교부역을 맡은 바리톤 김동섭은 거룩한 은자들의 합창에 이어서 성악진 중에서 단연코 무게중심을 잡으며 ‘영원한 기쁨의 불길’ 구절을 노래했다. 명상하는 교부역을 맡은 베이스 전승현은 김동섭과 더불어 ‘바위절벽이 내 발 아래’의 구절을 통해 이날 성악진의 쌍두마차임을 알려준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날의 주인공은 850명이 함께 한 연합 합창단의 소리였다. 1부의 첫소절인 ‘오소서 창조주의 성령이여’로부터 1부의 마지막 후반인 ‘아버지께 영광’ 구절까지의 박력과 기백은 이 인원이 아니라면 느끼기 힘든 기세였을 것이다. 특히 리허설 154번 부분(1141마디)의 승천한 소년들이 부르는 ‘이분은 우리보다 훨씬 어른이라(Er uberwachst uns schon)’ 구절의 아동합창은 마치 처음 들어보는 듯한 소리처럼 명징하고 감격적이었다. 이렇게 깨끗한 아동합창은 실연으로 들어본 기억이 달리 없다. 또한 이 구절은 롯데홀의 소리 특성을 가장 정확히 보여주는 부분 중의 하나였다.
2부의 전반부인 첼로와 더블베이스의 낮은 현악 파트를 통해서 오케스트라의 특징이 나타나는데 연주는 유연하고 템포가 느린 것보다는 확실한 소리와 다소 빠른 템포를 통해서 이날 곡의 전체 표현의 한 특징을 보여주었다. 롯데홀의 소리 특성으로 인한 것도 있겠지만 현악은 정확한 소리를 들려주는 편이었으나 다소 윤기가 없었다. 이는 후반부의 트럼펫, 트럼본 파트에서 나타나듯이 약간 건조한 소리를 들려주었다. 이런 부분은 성모의 파트에서도 충분한 음의 여운을 주지 않음으로써 음정의 충분한 전달에도 불구하고 그런 건조함을 지울 수는 없었다.
롯데콘서트홀의 소리 특징을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2층끝까지(롯데홀은 3층 구조가 아닌 2층 구조이다) 정확한 소리를 전달해 주는 잔향의 공간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좌석의 위치에 따라서도 왜곡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이점은 다른 연주장에 비해 롯데홀이 독주곡이나 실내악을 하더라도 그 매력을 그대로 줄려줄 훌륭한 공간의 장점을 보여준다. 다만 1층 맨앞줄에 가까운 자리는 무대의 소리가 위층까지 전달되면서 일부의 소리가 앞자리를 지나쳐 버리는 부분이 있는 듯 하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의 경우는 소리의 과하다고 할만한 긴 잔향에다가 층별로, 좌우 자리에 따라 왜곡이 일어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좌석에 따른 감상의 호불호가 큰 편이라 볼 수 있다. 롯데홀은 그런 점에서 아쉬웠던 여러 부분들을 넘어선 것 같다. 다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롯데홀에서 연주하는 이들은 적어도 레가토나 소스테누토 기법처럼 음을 충분한 시간을 두고 들려주는 것이 청중들에게 건조하게 들리거나 짧게 끊어치는 느낌을 덜 줄 수 있을 것이다. 공연장 특성을 세세히 살핀 점 보다는 1000명을 통솔하기 바쁘느라 임헌정 지휘자는 이런 부분에 소홀했던 것 같다. 또다른 비유를 들자면 소스테누토에 별 관심이 없는 사이먼 래틀의 지휘의 경우라면 롯데홀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을 것이고,레가토를 밥먹듯이 즐겨하는 카라얀이 살아 돌아온다면 즉시 롯데홀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어찌됬든 여러 특성의 장단점을 감안하더라도 우리에겐 암스테르담의 콘세르트헤보우 홀이나 도쿄의 산토리홀 부럽지 않은 공연장을 갖게 되었다. 중요한 점은 이 뛰어난 하드웨어가 시간을 거치며 더 성숙한 소리로 익어가는 것이며 더 중요한 점은 공연기획과 운영을 통해 진정한 세계의 공연장으로 발전시킬 소프트웨어를 발전시키는 일이다.
2부 마지막 구절인 신비의 합창에서 ‘모든 허무한 것은 그저 비유이니’ 구절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그런 레가토적인 측면이 좀 더 살아났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연이어 관현악과 대규모 합창단이 크레센도로 향해 가서 ‘영원한 여성성이 우리를 끌어 올린다’ 구절에서는 그런 틈을 느낄 틈도 없이 큰 울림과 감동을 전해 주었다.
수많은 관현악 연주와 오페라 공연 등을 통해 코리안심포니는 호흡이라는 면에서는 서울시향과 부천필을 잇는 악단이라 볼 수 있다. 이날의 공연이 이 세 악단 중의 하나가 아니었다면 매우 힘든 공연이 되었을 것이다. 개개 악기 파트의 기량차이나 음색의 윤기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들법 하지만 전체적인 면에서 볼 때 소소한 면에 속할 것이다. 앞서 바리톤 김동섭과 베이스 전승현의 빛남을 언급하기도 했지만 다른 6명의 성악진도 각 역할의 매력을 나름 잘 들려주었다. 그러나 역시 이날의 눈부신 부분은 850여명의 합창단이다. 한국은 노래잘하는 이들이 많은 나라임을 새삼스럽게 확인한 하루였다.
임헌정 지휘자는 이날의 특별한 공연을 위한 주제로 ‘통솔과 정확함’을 주제로 잡았던 것 같다. 1000명이나 되는 이들의 악기와 목소리를 하나로 제어하고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유연하고 섬세하고 우아한 표현이나 해석을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거나 매우 많은 시간을 요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의 씩씩하고도 당찬 지휘는 흥미롭게도 이전 부천필의 말러 8번 연주에서도 나타난 부분이었는데 이날 롯데홀에서의 표현과 해석은 그것을 확인한 날이기도 했지만 연주규모에도 어울리는 것이었으므로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다른 연주자에 비해 지휘자는 비할 바 없는 음악적 소신과 원칙이 내재된 점이 음악적 표현과 해석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공연장과 당일의 특성에 따른 유연함의 덕목이 요구될 수 밖에 없다. 좌우로 넓게 그리고 높이 펴진 합창단과 2층 끝부분 중앙의 관악파트까지 챙기느라 임헌정 지휘자는 아크로바틱 선수를 방불케하는 큰 몸짓과 비팅을 보여주었다.
이런 통제와 선굵은 비팅으로 인해 유연하고 드라마틱한 2부보다는 강렬한 찬양가인 1부에서 그 강점이 확실히 드러났다. 이런 점이 말러가 8번을 확신에 찬 마음으로 작곡한 배경을 들려주는 듯 했다.
합창지휘를 총괄한 이상훈 지휘자의 노력도 컸음에 분명하지만 1000명을 총괄하여 길지 않은 시간동안 준비하여 분란보다는 조화 속에서 찬양가와 드라마를 이루어낸 이날의 공연은 새삼스런 소리의 발견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감격적이었고 우리의 장점을 잘 살렸다는 점에서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이보다 나은 기량, 이보다 나은 조화, 이보다 나은 유연함이 나올 수는 있겠지만 그때 더 월등한 감동이 나올지는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다. 공연이란 결국 반복되지 않는 유일한 하나의 연주라고 이해하는 이에게는. 특히 이날, 1000명의 음악인이 들려준 조화의 세계를 체험한 1000명의 관객에게는.
첫댓글 롯데홀만큼이나 입체적인 리뷰 잘 읽었습니다. 여러 측면에서 그날 공연이 무척이나 궁금했던 저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리뷰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날 공연은 임헌정과 부천필의 성공을 넘어 한국 클래식을 한단계 높여주는 대단한 공연이었군요. 천인교향곡에 참여한 모든 연주자와 합창단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어서 빠른 시일안에 롯데홀의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홀과 합창단의 위용이 대단합니다. 다만 홀과 조화가 부족한 파이프 올갠이 아쉽군요.
음량의 크기가 연주인원과 비례되어 커지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 연주를 들었을때 감동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지난 8월 12일 루체른 음악제에서도 샤이의 첫 취임 공연으로 말러 8번을 연주했는대
어렵게 표를 구해서 보았지만 평을 쓸 마음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최악의 공연이었습니다.
베토벤 9번 교향곡이 그 어떠한 오케스트라와 솔리스트,합창이 일치를 이루어 좋은 연주를 들려주지 못한 것처럼
말러 8번도 마찬가지로 합치된 앙상블을 이루어 내기가 힘든 곡인 것 같습니다.
좋은 홀에 상주 오케스트라는 정해 졌는지 궁금합니다.
http://naver.me/FHNbpg3N
상주는 모르겠고 KBS교향악단과 우선대관 MOU를 체결했다는 기사가 있어요. 실연은 딱 한 번 들어 봤지만 많이 실망했던지라...
저런ㅠㅠ 샤이가 웬일이래요? 그 공연 궁금했어요. 루체른 음악감독 취임 공연곡으로 딱이다 싶었는데...지금도 가끔 샤이의 말러8번을 들으면 진한 감동을 받곤 해서 그저 안타까울뿐입니다.
롯데홀의 파이프오르간은 지금의 쇠소리(!)가 나쁜건 아니지만 좀더 부드럽고 익은 소리로 정착하려면 시간이 걸릴듯 합니다. 맑고 정갈한 소리가 될수 있을 겁니다. 말러 8번은 웬만한 오케스트라는 시도조차 쉽지 않은 곡이고 하더라도 당일의 조건이나 상황에 따라 평균이하의 연주결과로 나올수도 있는 대곡이자 난곡이라 생각합니다. 샤이의 연주는 그의 기존 연주에 비해 기대치가 높아서 그렇게 보실수도 있지만 이 역시 이 곡의 통솔의 지난함을 보여주는듯 합니다. 롯데홀의 말러 8번은 실연으로 본다는 천인교향곡에 의의를 두었는데 몇가지 기술적인,기교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제약조건을 넘은 감격을 들려주어 기뻤습니다.
@pure 역시 급조된 오케스트라에게 좋은 연주를 기대하는 것이 무리였습니다.
오케스트라는 물론이고 솔리스트 합창단 모두가 제각각으로 암담한 연주였습니다.
냉정한 샤이도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지 당황하는 모습이었지요. 아마도 리허설을
많이 하지는 못했을 것이라 그런 이유였겠지요. 첫 공연이라 기대를 많이 했었는대.....
@sangyoung 리허설이 충분하지 못했나보군요. 옛날의 지휘자처럼 한 악단에서 20~30년간 함께 하면서 눈빛만 봐도 호흡이 맞는 시대가 아니라는 점은 있지만 말러 8번이라면 사전에 충분한 시간을 주었어야 했을텐데요. 페스티발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하더라도 현대악단과 지휘자의 한정된 시간으로 인해 떨어지는 기교는 아니라도 투렷한 색깔의 해석이나 표현을 만나기는 쉽지 않은 시대인것 같습니다.
@율리시즈 사진을 보니 합창단의 배치며 그 위용이 대단합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만이 할 수 있는
그림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저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요. 한치에 틈도없이
많은 개신교 교회들이 주일마다 통일된 옷을 입고 수 백명의 합창단으로 예배를 드리는 노하우에서
저런 그림을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유럽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인것 같습니다. 오랜기간 공들인 것을 느끼게 해 주는군요.
@율리시즈 율리시즈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이 됩니다.아마도 많아야 세번 리허설을 했을 것입니다.
음악제 개막 연주라 각국에서 모인 연주인들이 함께 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전 아바도때는 자발적으로 참여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는대 이번에 개편된
오케스트라는 처음이라 아직 낯설은 느낌을 받는군요. 해가 갈수록 나아지겠지요.
@sangyoung 아. 이번 오케스트라의 멤버가 거의 그대로가 아니었나 보군요. 그럴수록 더 준비했어야 했을텐데. 롯데홀은 무대를 빼고는 관객석을 둘러싸듯이 배치해서 절반은 합창석과 연주공간으로 활용할수 있는 상당한 매력이 있습니다. 1000명을 연주할수 있는 실내공간은 사실상 롯데홀뿐이죠. 무리한 기획에 가까웠으나 한정된 시간과 제약조건에서 오히려 이루고야 마는 한국인들의 장점이 여기에서도 발휘된 것 같습니다^.^
모든 공연은 유일한 연주이지요.
그날의 감동을 두고두고 기억합니다.
율리시즈님, 앞으로 공연 리뷰 꾸준히 올려주시죠. 이런 필력을 갖고 계시면서 왜 여태 감추신 겁니까? ㅎ
어허, 이거 왜 이러시나요? 도리안님에게 그대로 반사하고픈 문장인데 ㅎㅎ 나도 자주 쓰고싶소. 시간이 항상 문제이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