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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 議 資 料
2006. 4. 15.
延安宋氏 安東宗親會
차 례
1 . 족보편찬
2 . 승지공파 세전유록
3 . 연안송씨안동종친회 정관
4 . 2004년 결산서
5 . 2005년 결산서
6 . 재사 공사비 내역
7 . 재사 신축기금납부내역
8 . 족보간행추진내역
Ⅰ. 족 보 편 찬
1.족보의 역사
족보는 옛날 중국에서 제왕년표(帝王年表)를 기술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며 사가(私家)에서 족보를 갖게 된 것은 그 훨씬 뒤인 한(漢)나라에 관직등용을 위한 현량과(賢良科)제도를 설치하면서 응시자의 내력과 선대의 업적 등을 기록하여 비치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11세기 북송(北宋)의 정명도(程明道 名:顥)선생은 그의 종계지훈(宗系之訓)에서 계통을 적어서 밝히고(明譜系) 종파의 차례를 정해서(敍昭穆) 효제지성(孝悌之誠)과 충의지심(忠義之心)을 고취하여 그 근본을 잊지 않고(不忘其本) 혈통을 순화하며 나아가 사회정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족보 편찬의 방법과 목적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귀중한 지침입니다.
우리나라의 족보제도는 고려 11대 문종조(1047~1082)에 이르러 과거응시에 증조까지 기록하는 제도를 시행되면서 도입되었는데 초기에는 각 씨족별로 가승(家乘) 또는 세계도(世系圖) 형태로 기록되어 내려오다가 최초로 편찬된 족보는 조선조 세종5년(1423년)의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영락보(永樂譜)인데 서문(序文)만이 전해질 뿐 본문은 현존하지 않고, 그 다음으로 성종7년(1476년)에 발간된 안동권씨(安東權氏) 성화보(成化譜)로서 서울대학교 도서관 규장각에 희귀본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1500년대에는 몇몇 명문씨족들이 시작하였고 1600년대에는 많은 씨족들의 족보편찬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연안송씨의 창간보(創刊譜)는 현종10년(1669년 己酉)에 1권으로 된 족보가 발간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그 이후 1725년(乙巳年)에 족보가 2권으로 발간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고 있어 안타까운 일입니다. 1784년(甲辰年) 1807년(丁卯年:대사간공파와 승지공파 파보<延安宋氏世譜 乾坤2권>) 1850년(庚戌年:대동보<延安宋氏世譜 仁義禮智4권>) 1910년(庚戌年:대사간공파와 승지공파 파보<延安宋氏世譜 乾坤2권>) 1938년(戊寅年:대동보<승지공파 미참여>) 1977년(丁巳年:서울 대사간공파 파보) 1987년(丁卯年:대동보<延安宋氏大同譜 상하 2권>)등 9간보(九刊譜)의 기록을 찾을 수가 있는데 최근 발견된 1807년(丁卯年:대사간공파와 승지공파 파보<延安宋氏世譜 乾坤2권>)의 연안송씨세보(延安宋氏世譜) 1권인 乾(乾)의 보록(譜錄:자손록)에보면 광주보(廣州譜), 용인보(龍仁譜), 용인별첩(龍仁別牒), 만성보(萬姓譜)의 일부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우리 종인(宗人)들이 모르는 더 많은 족보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에 1850년의 경술보(庚戌譜), 1938년의 무인보(戊寅譜), 1987년의 정묘보(丁卯譜)가 모두 참여한 대동보이고 그 나머지는 몇몇 파만 참여한 일종의 파보입니다. 이외에도 우리 승지공파에서도 1967년(丁未年:승지공파보<延安宋氏派譜 1권>)에 파보를 편찬하였으며 그리고 몇몇 파의 파보가 편찬된 것으로 압니다.
정묘대동보(1987년) 이후 20년도 되지 않아 또 대동보를 하게 됐는데 지난번 정묘대동보(1987년)때 울산시 서생면의 수 백세대가 누락됐었는데 작년에 이쪽의 현감공파에서 파보를 편찬할 계획이 있다고 하여 그럴 바에는 20여년 앞당겨서 전체가 참여하는 대동보를 하자는 의견이 대다수여서 대동보를 편찬하게 된 것입니다.
2. 편찬목적과 방법
족보편찬의 체계를 1987년 정묘대동보를 기준해서 보면 우리 연안송씨의 관향인 황해도 연안의 연혁(沿革), 동성각관(同姓各貫), 범례(凡例), 항렬도(行列圖), 서문(序文), 선조님들의 행록(行錄), 묘갈명(墓碣銘) 또는 묘표문(墓表文), 고유문(告由文) 및 봉안문(奉安文), 상향문(常享文), 상량문(上樑文), 비문(碑文), 기문(記文), 세계도(世系圖), 보록(譜錄:자손록<子孫錄>), 발문(跋文), 임원록(任員錄)으로 편제되어 있는데 우리 자손들이 자주 보는 보록(譜錄:자손록<子孫錄>)은 명휘자(名諱字)와 방주(傍註)로 구성됩니다. 족보에서 명(名)은 살아있는 이의 이름이고 휘(諱)는 돌아가신 분의 이름을 말하는데 큰글자로 인쇄하며 부(父)는 상단에 자녀(子女)는 하단에 배치하며 방주(傍註)는 작은 글자로 써나가는데 자(字), 호(號), 생년월일, 관작(官爵), 졸(卒)년월일과 묘(墓)의 위치를 쓰며 그 다음 배(配)의 본관(本貫), 성명 및 부(父)의 명 또는 휘를 쓰고 배의 생년월일, 졸년월일 및 묘의 위치로 순서로 인쇄합니다. 앞에서 부자(父子)는 상 하단에 배치한다고 하였고 형제자매(兄弟姉妹)는 좌측으로 배치하되 아들을 먼저 쓰고 딸은 다음에 쓰되 딸의 경우 예전에는 사위의 이름을 썼으나 현대에는 딸의 이름을 쓰고 사위는 방주로 성명을 쓰고 그 밑에 본관을 씁니다. 그리고 현재 거주하고 있는 위치는 해당면(面:페이지) 상단에 시군(市郡)을 해당 줄 위에 쓰도록 되어 있습니다.
1850년 경술대동보의 서문에서 홍경모(洪敬模)판서는 “그 출생한 날을 명확히 기재하는 것은 어른과 아이의 구별을 정확히 함이요, 죽은 날을 소상히 기록하는 것은 오래 살고 일찍 죽은 것을 알고자 함이요, 관작을 기재하는 것은 자손이 잘된 것을 알림이요, 또 묘소를 기입하는 것은 조상의 유해를 잃어버릴까 염려함이요, 일가들의 사는 곳을 기입하는 것은 종족간에 흐트러질까 염려함이요, 이름을 기입할 적에 부자(父子)는 상하로 형제는 좌우로 기재하는 것은 세대가 문란할까 두려워함이다. 이와 같이 소상히 족보가 이루어지니 실(絲)이 엉킨 것 같으나 연맥(連脈)이 닿고 그물같이 망라됐으나 다 벼리가 있고 또한 번잡한 것 같으나 질서가 있고 복잡한 것 같으나 질서가 있고 복잡한 것 같으나 계통이 요연하다. 그런즉 문호(門戶)의 성쇠와 자손의 번창하고 침체됨을 다 이 족보를 보면 알 수 있다.”라고 족보편찬의 목적과 방법을 상세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족보편찬의 대원칙은 먼저 편찬된 족보내용에 커다란 결정적인 하자가 발견되지 않은 한 그대로 옮겨 인쇄하고 새로 발생한 사항만을 추가로 인쇄하는 것이 원칙이다.
3. 족보편찬의 의와 우리의 자세
혹자는 호주제(戶主制)가 폐지되는 마당에 족보는 해서 무슨 필요가 있느냐 하는 이도 있습니다만 이러한 생각은 안되며 호주제가 없어지기 때문에 더더욱 족보를 잘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한국의 부계혈통계승(父系血統繼承)의 성본제도(姓本制度)와 족보문화는 세계의 인류학자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우리의 전통문화입니다. 호주제는 불원한 장래에 부활이 될 것입니다. 성균관, 유도회, 성씨연합회, 법률소비자연맹 등 사회의 여러 단체에서는 조선조실록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족보는 유전학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자료의 보고(寶庫)라고 하는데 남녀의 성(姓)을 결정은 XY염색체중 Y염색체는 시조로부터 자자손손 몇 백대를 내려가든 남자 자손에게는 똑같은 유전자가 계승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성씨가 가정의 자손이 우수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가설을 도출해 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 백년씩 계속되어온 가문의 족보는 유전학의 보고라고 합니다.
족보의 편찬은 자주 하는 사업이 아닙니다. 30년 내지 50년 또는 그 이상의 간격을 두고 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물심양면으로 흔쾌히 참여함으로서 조상님께 추원보본(追遠報本)하고 숭조돈목(崇祖敦睦)하는 가풍(家風)과 종족사(宗族史)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연안송씨대종회 송종익(27세 대사간공파)회장의 청년회원 교육용자료 참조
Ⅱ.승지공파세전유록(承旨公派世傳遺錄)
一世(始祖) 휘(諱) 경(卿)-숙의공(肅毅公)
시조 휘(諱) 경(卿)이고 자는 구보(舊譜)에는 경(璟)이니 천성이 심심(沈深)하고 재주가 빼어나서 감화백채(甘和白采)의 자질이 어느 사람도 감히 추종하지 못할만 하였다. 또한 효도가 지극하고 배움이 돈독(敦篤)하여 깊히 성리(性理)의 오묘처(奧妙處)를 탐구하였고 기타 백가지류(百家支流)의 학설까지도 곡진(曲盡)히 통달하여 언제 어디서든지 본보기가 되었다. 나아가서는 고려 공민왕(高麗 恭愍王)때 정포은선생(鄭圃隱先生)과 동방급제(同榜及弟)했다. 벼슬은 추성익재보리동덕 좌명공신 광정대부 도첨사사중찬겸판전리사사 상호군(推誠翼載輔理同德 佐命功臣 匡靖大夫 都僉使司 中贊兼判典理司事 上護軍)에 이르렀고 연안군(延安君)에 봉(封)해졌다.
추증(追贈)된 익호(謚號)는 숙의공(肅毅公)이다. 공민왕 임인년(서기1362년)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이르럿으며 찬성사(贊成事)를 겸임하였다. 이때에 홍건적(紅巾賊)이 고려를 유린(蹂躪)하였는데 공(公)이 홍언박(洪彦博)에게 책망하기를 “모든 백성들이 공을 재상(宰相)에 복직되기를 원하여 현재 존귀(尊貴)한 수상(首相)이 되었으니 당연히 중인(衆人)의 소망에 적절해야 될 것이거늘 방금 종사(宗社)가 난적(亂敵)에게 함몰(陷沒)되고 성상(聖上)께서 몽진(蒙塵)하심은 곧 공이 미리 도모하지 아니한 소치라고 하겠으며 공의 아들은 부병(府兵)의 대권(大權)을 장악(掌握)하고 있으며 사위는 헌사(憲司)의 장(長)으로 중직(重職)에 있으니 인신(人臣)으로써 이보다 더한 구(貴)를 누리기 어려운 성총(聖寵)을 입고서도 왜 지성으로 국사(國事)를 근심치 아니하느고.”라고 하였다. 공(公)의 충고가 경직(勁直)하고 과감(果敢)함으로 홍언박(洪彦博)이 꺼려하여 결국 이 일로 인하여 파직(罷職)당하였다.(여사고<麗史攷>: 공민왕팔월판밀직사사송경파 열전운송경언어홍언박왈창생망공복상구의금위수상하무일언협여망호거세파천종사함적주상몽진천하소공지불조도야금공자악부병서장헌사부귀사극하불우국가언박탄지파경작<恭愍王八月判密直司事宋卿罷 列傳云宋卿言於洪彦博曰蒼生望公復相久矣今爲首相何無一言協輿望乎去歲播遷宗社陷賊主上蒙塵天下笑公之不早圖也今公子握府兵婿長憲司富貴巳極何不憂國家彦博憚之罷卿爵>) 공민왕31년(서기1362년) 8월에 파직(罷職)당하게 되었는데 흔도금대(忻都金帶)와 채의(彩衣)․저마(苧麻)․섬포(纖布) 등을 사사(謝賜)했으나 받지 아니했다. 공(公)은 계묘년(공민왕32년:서기1363년) 윤삼월에 연안군(延安君)송경(宋卿)은 이등훈(二等勳)에 책봉되었으며 11월의 임신록(壬申錄)에 찬성사(贊成事) 송경(宋卿)이 일등공도형벽상(一等功圖形壁上)이라고 기록이 되었는데 계묘년(공민왕32년:서기1363년)에 개경(開京:고려의 수도)을 수복하고 일등공신(一等功臣)의 홍예(弘譽)를 받들어 연안군(延安君)에 봉(封)해지고 관직(官職)이 도형벽상(圖形壁上)에 이르렀으며 부모처자(父母妻子)까지도 모두 삼등(三等)이 넘는 훈작(勳爵)에 봉(封)해진 것은 기해년(공민왕8년:서기1359)의 홍건적 모거경(紅巾賊 毛居敬)을 격파(擊破)하여 쫓아보냈으며 김용(金鏞)의 난을 평정했기 때문이다. 그 후 갑진년(서기1364년) 정월(正月)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었으며 그 다음해인 을사년(서기1365년) 6월에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에 봉(封)해졌으며 시호(諡號)가 숙의(肅毅)로 추증(追贈)되었다. 묘역(墓域)은 원래 장단 토란(長湍 土亂)에 위치하였는데 오래되어서 봉분(封墳)이 거의 능이(陵夷)되고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어 막연(漠然)히 수호(守護)를 받지 못했기에 후손(後孫)으로써 한(恨)을 가지게 되어 제단(祭壇)을 마련하였는데 전북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구산서원(龜山書院) 후편(後便)에 설단(設壇)을 하였다.
二世 휘(諱) 훈(勛)-판서공(判書公)
공(公)은 벼슬이 이의판서(吏儀判書)에 이르렀고 증직(贈職)이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이다. 이자(二子)가 있는데 장자(長子)는 연안군(延安君) 광언(光彦)이고 차자(次子)는 운룡(雲龍)이다. 묘역(墓域)이 전해지지 않아 후손(後孫)으로써 한(恨)을 가지게 되어 제단(祭壇)을 마련하였는데 전북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구산서원(龜山書院) 후편(後便)에 설단(設壇)을 하였으며 매년 음력 3월 첫째 일요일에 제사(祭祀)를 올린다.
三世 휘(諱) 운용(雲龍)-중랑장공(中郞將公)
공(公)은 벼슬이 내시신호위보승(內侍神虎衛保勝) 중랑장(中郞將)이시며, 득관지(得貫地)인 연안(延安)으로 입향하시어 그 자손들에 의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600년간 연안송씨(延安宋氏) 집성촌(集姓村)을 형성하고 있다. 묘역(墓域)은 연안 북면 삼둔산(延安 北面 三屯山)으로 보첩(譜牒)과 연안지(延安誌)에 기록으로 전해지나 남북이 나누어진 관계로 후손(後孫)으로써 한(恨)을 가지게 되어 제단(祭壇)을 마련하였는데 전북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구산서원(龜山書院) 후편(後便)에 설단(設壇)을 하였으며 매년 음력 3월 첫째 일요일에 제사(祭祀)를 올린다.
주) 이곳 집성촌은 현 연안읍(延安邑)에서 서북으로 약 8km되는 곳으로서 1413년경부터 면.방.사제(面.坊.社制)가 실시된 후 1906년까지는 삼둔방(三屯坊), 마돈방(麻墩坊), 영달방(永達坊)등으로 불리었으며, 현재는 명천리(鳴川里), 월파리(月波里), 소아리(小雅里), 반계리(磻溪里)가 이에 해당된다.
四世 휘(諱) 복융(復隆)-상서공(尙書公)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 지도첨의사사사(知都僉議使司事)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셨다. 자(子)는 근(根)이다. 묘역(墓域)은 보첩(譜牒)의 기록으로 전해지나 남북이 나누어진 관계로 후손(後孫)으로써 한(恨)을 가지게 되어 제단(祭壇)을 마련하였는데 전북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구산서원(龜山書院) 후편(後便)에 설단(設壇)을 하였으며 매년 음력 3월 첫째 일요일에 제사(祭祀)를 올린다.
五世 휘(諱) 근(根)-찬성공(贊成公)
공(公)은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판호부사(判戶部事)를 역임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찬성사(贊成事)에 오르셨다. 묘역(墓域)이 전해지지 않아 후손(後孫)으로써 한(恨)을 가지게 되어 제단(祭壇)을 마련하였는데 전북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구산서원(龜山書院) 후편(後便)에 설단(設壇)을 하였으며 매년 음력 3월 첫째 일요일에 제사(祭祀)를 올린다.
六世 휘(諱) 유량(有良)-판서공(判書公)
공은 일찌기 진사(進士)에 합격했고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벼슬은 자헌대부(資憲大夫) 예조판서겸오위도총부 도총관(禮曹判書兼五衛都摠府 都摠官)에 이르렀다.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문질(門疾)이 돌아 장자인 휘(諱) 보은(保殷)-성균진사(成均進士)은 평안도 성천으로, 둘째인 휘(諱) 사은(嗣殷)-대사간(大司諫)은 슬하에서 효도케 하고, 셋째 아들인 휘(諱) 수은(守殷)-우승지(右承旨)은 총각의 몸으로 경상도 안동으로 피문질(避門疾)을 시켰다. 묘역(墓域)은 묘역(墓域)은 연백군 봉서면 반계리 빙동 옥굴산 (延白郡 鳳西面 磻溪里 氷洞 玉窟山)에 건좌(乾坐)로 정석(貞石)도 있으며 해마다 음력 10월 초2일이 되면 수백이 넘는 후손들이 원근에서 운집하여 성묘하고 제사(祭祀)를 올리었거늘 국경 아닌 국경이 강토(疆土)를 남북으로 양분하여 공의 묘소를 지척지간(咫尺之間)에 모시고도 성묘하지 못하였으며 앞날을 기약하기 어려운 실정으로 후손(後孫)으로써 한(恨)을 가지게 되어 제단(祭壇)을 마련하였는데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유현리 종산(京畿道 坡州郡 炭縣面 杻峴里 宗山)에 설단(設壇)을 하였으며 매년 음력 10월 초2일에 성묘(省墓)하고 제사(祭祀)를 올린다.
七世 휘(諱) 수은(守殷-)-승지공(承旨公)
자(字)가 국보(國輔)이고 호(號)는 망서(望西)이다. 벼슬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우승지겸 경연참찬관(右承旨兼 經筵參贊官)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에 이르렀다. 본래 연안(延安)에 세거(世居)했으나 문질(門疾)을 피하기 위해 총각의 몸으로 두 형과 헤어저 반궁(泮宮-成均館)에 유학(遊學)했다. 쓰라린 여식(旅食)생활속에서도 오직 학업에만 정진하여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니 성명(盛名)이 자자 했다. 정랑(正郞) 목치공(睦致公)이 공(公)을 초치(招致)해서 보시고는 범상(凡常)치 않다고 여기시고 사위로 삼았다. 이로 인하여 목정랑(睦正郞)의 고향인 안동부 풍산현 두수전리(安東府 豊山縣 斗水田里) 즉 지금의 만운에 이거(移居) 하셨다. 세조3년 무인년(戊寅-서기1458)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교도도하진사(敎導都夏進士) 이수남(李壽男), 직장(直長) 박미(朴楣), 생원(生員) 정효종(鄭孝終)과 함께 동방급제(同榜及第)하니 당대(當代)의 선사(選士)이었다. 세조11년 병술년(서기1466)에 용궁현감(龍宮縣監)에 부임했는데 국조등과록(國朝登科錄)을 보면 이때 이미 6품을 지냈다고 기록되었고 연산(燕山)4년(서기1498년) 公의 세째 아들 교리공(校理公) 휘(諱) 희문(希文)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중종1년 병인년(서기1506년)에 별시 병과(別試 丙科)에 급제(及第)했다.
그 진사시(進士試)의 방서(榜書)에도 父는 통훈대부 진주교수(通訓大夫 晉州敎授)로 기록되었고 병인년 문과방서(文科榜書)에도 안동부 교수(安東府敎授)라고 기록되었으니 삼품직(三品職)을 지내신후 6품직을 역임하심이 분명하나 또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소장하고 있는 풍산현 경노안(豊山懸敬老案)에는 승지(承旨)라고 기록되었으니 승지(承旨)는 당상관(堂上官)인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階)이니 정3품(正三品)의 당상관(堂上官)을 역임(歷任)하신 후 향거(鄕居)하셨음을 알 수 있다.
망서정기(望西亭記)에 이르기를 공(公)은 평소 좌정할 때는 반드시 서향(西向)을 하므로 그 이유를 물은즉, 공(公)이 대답하시기를 군친(君親)이 서쪽에 계시나 가깝지 않아서 섬김을 얻지 못하니 서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지 않는가라고 하시니 목공위지(睦公偉之)께서 공(公)의 거실(居室) 편액(扁額)을 망서(望西)라고 이름하였다고 하여 지금의 정자(亭子) 이름도 이에 연유한 것이다.
5남2여를 두셨는데 장자(長子)는 참봉공 희경(參奉公 希景)이고, 차자(次子)는 훈도공 희평(訓導公 希平)이고, 삼자(三子)는 교리공 희문(敎里公 希文)이고, 사자(四子)는 수의부의공 희옥(修義副尉公 希玉)이고, 오자(五子)는 희석(希石)이다. 졸일(卒日)은 3월 17일이고 묘역(墓域)은 안동시 풍산읍 만운리 안산 궐전령(安東市 豊山邑 晩雲里 案山 蕨田嶺 : 고사리밭) 곤좌(坤坐)이고 배위(配位) 숙부인 사천목씨(淑夫人 泗川睦氏)의 졸일(卒日)은 1월 14일이 묘역(墓域)은 만운 세현 가곡 서록(晩雲 細峴 加谷 西麓) 축좌(丑坐)이다.
八世 휘(諱) 희경(希景)-참봉공(參奉公)
자(字)는 경옥(景玉)이고 승지공(承旨公) 장자(長子)이며 벼슬은 참봉(參奉)이다. 공(公)이 성종(成宗) 때에 태어났으며 연대미상(年代未詳)이나 교리공(校理公)과 부위공(副尉公) 양공(兩公)의 묘갈명(墓碣銘)을 미루어 상고하면 즉 승지공(承旨公)의 낙유(樂有)의 뜰에서 태어나서 효도(孝道)하고 우애(友愛)로움은 천성(天性)이었고 문학(文學)을 하며 일찍이 과거(科擧)보는걸 사절하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초야(草野)에 묻혀 천성(天性)을 길러서 늦게 참봉(參奉)의 직함을 받았으나 미족위영(未足爲榮)인 즉 외부(外部)의 모앙(慕仰)을 사절하고 천석(泉石)에 어슬렁거리다가 천명(天命)대로 살다가 죽었으며 보첩(譜牒)을 살펴보면 졸년(卒年)은 미상(未詳)이나 다만 졸일(卒日)3월 2일로 실려 있다. 묘역(墓域)은 만운리 세현 가곡 축좌(晩雲里 細峴 可谷 丑坐)이다. 배(配)는 단인(端人) 안동김씨(安東金氏)니 노(櫓)의 따님이며 졸일(卒日)은 4월 27일이다. 일남일녀(一男一女)를 두니 남(男)은 방주(邦柱)요 윤근(尹瑾)이 사위이다.
八世 휘(諱) 희평(希平)-훈도공(訓導公)
자(字)는 이오(履吾)이고 승지공(承旨公)의 차자(次子)이다. 벼슬이 훈도(訓導)이다. 일남일녀(一男一女)를 두니 남(男)은 팔주(八柱)이고 권잠(權箴)이 사위이다. 묘역(墓域)은 만운 종산동(晩雲 宗山洞 : 종미골) 자좌(子坐)이다.
八世 휘(諱) 희문(希文)-교리공(校理公)
자(字)는 중창(仲昌)이고 승지공(承旨公)의 삼자(三子)이다.
벼슬은 종사랑(從仕郞) 통사랑(通仕郞) 승정원 저작랑 교리(承政院 著作郞 校理)를 역임했다. 어릴 때부터 범아(凡兒)와 달랐고 독서(讀書)를 하고 제술(制述)하였는데 과거(科擧)보는데 힘쓰지 아니하고 경서(經書)의 훈사(訓辭)에 윤역(玧繹)해서 행치(行治)에 힘을 써서 유가(儒家)의 궤범(軌範)에 따라서 명조(名祖)에 유서(遺緖)에 더럽힘이 없는 즉 진실로 당세(當世)에 추중(推重)을 받으며 후인(後人)들이 칭송사모(稱頌思慕)하였다. 홍치무오(弘治戊午:연산4년 서기 1498년)에 진사시(進士試) 1등 제5인(一等 第五人)으로 합격(合格)했고 정덕병인(正德丙寅:중종1년 서기 1506년)에 문과 별시(文科 別試)에서도 병과(丙科) 제2인(第二人)으로 급제(及第)를 해서 통사랑홍문관교리(通仕郞弘文館校理)를 했는 즉 전도(前道)에 장진(將進)의 방향(方向)이 미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연로(年老)해서 침소(寢所)에서 졸년(卒年)은 미상(未詳)이나 8월 4일에 고종(考終)을 하시니 만운동(晩雲洞) 세현(細峴) 자좌(子坐)에 장사(葬事)했다. 배(配)는 숙인(淑人) 성산배씨(星山裵氏)니 부장(祔葬)했고 이자(二子)가 있으니 장남(長男)은 천주(天柱)니 진사(進士)하고 차남(次男)는 국주(國柱)도 진사(進士)이다.
八世 휘(諱) 희옥(希玉)-수의공(修義公)
자(字)는 수오(守吾)이고. 승지공(承旨公)의 사자(四子)이며 수의부위(修義副尉)이다.
가정년간(嘉靖年間)에 태어나서 천년(天年)을 마치니 묘역(墓域)은 만운(晩雲) 참봉공묘소(參奉公墓所) 백호(白虎) 간좌(艮坐)에 있었으나 국책사업 관계로 만운리 세현(晩雲里 細峴) 교리공(校理公) 묘후 동편(墓後 東便)으로 이장(移葬)이다. 배(配)는 단인(端人) 안동권씨(安東權氏)니 창의(昌義)의 따님으로 묘역(墓域)은 쌍분(雙墳)이다. 아들은 환주(桓柱)요
九世 휘(諱) 천주(天柱)
자(字)는 지목(持木)이고 부(父)는 교리공(校理公) 희문(希文)이다. 가정(嘉靖) 병오(丙午) 명종원년(明宗元年-서기1546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은덕불사(隱德不仕)했다. 무사(無嗣)해서 동생 국주(國柱)의 차자(次子) 연경(連慶)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공(公)이 처음으로 성주 작촌(星州 鵲村)에 이거했다. 묘역(墓域)은 성주(星州) 태종암(太宗岩 ) 축좌(丑坐)이며 배위(配位) 의인(宜人) 성산이씨(星山李氏)는 개동동()介同洞 계좌(癸坐)이다.
九世 휘(諱) 국주(國柱)-진사공(進士公)
자(字)는 임경(任卿)이고 교리공(校理公) 희문(希文)의 차자(次子)이다. 가정(嘉靖) 신묘(辛卯) 중종26년(中宗26年-서기1531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공(公)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을 가르치고 농사일을 돌보는 것으로 일을 삼으며 손님이나 벗이 오면 곧 술 마시며 시(詩)을 읊으며 즐거움을 다했다. 기일(忌日)은 2월 9일이다.
배(配)는 의인(宜人) 흥해배씨(興海裵氏)며 중손(仲孫)의 따님이며 증조(曾祖)는 옥과현감(玉果縣監) 효건(孝騫)이고 관찰사(觀察使) 환(桓)의 현손(玄孫)이며 기일(忌日)은 4월 27일이다. 삼남(三男) 이녀(二女)를 두니 장남(長男) 유경(遺慶)은 장사랑참봉(將仕郞參奉)이고 차남(次男)은 연경(連慶)이며 출계(出系)하였고 삼남(三男)은 원경(遠慶)이다. 배언필(裵彦弼)과 곡강인참봉(曲江人參奉) 류성춘(柳成春)이 사위이다. 묘역(墓域)은 만운 세현 이목곡(晩雲 細峴 梨木谷:배나무골) 묘좌(卯坐)에 쌍분(雙墳)이다.
十世 휘(諱) 충경(忠慶)
초휘(初諱)는 설(說)이고 자(字)는 순가(順可)이다. 벼슬은 참봉(參奉)이고 부(父)는 방주(邦柱), 조(祖)는 참봉 희경(參奉 希景)이다. 졸일(卒日)은 9월 2일이며 배위(配位) 단인 거제반씨(端人 巨濟潘氏)의 졸일(卒日)은 9월 15일이고 묘역(墓域)은 만운 세현산 회룡(晩雲 細峴山 回龍) 유좌(酉坐)에 합폄(合窆)이다.
十世 휘(諱) 연경(連慶)
생부(生父)는 국주(國柱)이고 자(字)는 응길(應吉)이며 교리공(校理公)의 손자(孫子)이다. 벼슬은 봉헌랑사복사 판관 (奉獻郞司僕寺 判官)이다.
十世 휘(諱) 유경(遺慶)-참봉공(參奉公)
자(字)는 자유(子遺)이고 진사(進士) 국주(國柱)의 장자(長子)이며 교리공(校理公)의 손자(孫子)이다. 벼슬은 장사랑 참봉(將仕郞 參奉)이다. 공(公)은 퇴계(退溪)선생의 질서(姪壻)이고 문인(門人)이다. 공(公)은 퇴계(退溪)의 가르침을 받아 문행(文行)이 훌륭했다. 그 논저(論著)와 행적(行蹟)이 후학에게 혜택(惠澤)을 줌이 있었을 터인데 가난(家難)으로 문헌이 소실되었다. 가정년간(嘉靖年間)에 퇴도이선생(退陶李先生)의 문하(門下)에서 유학(遊學)하였으며 배(配)는 진성이씨(眞城李氏)는 훈도(訓導) 하(河)의 따님이며 곧 퇴계선생(退溪先生)의 백씨(伯氏)이다. 참봉공(參奉公)이 배위(配位)와 더불어 묘소(墓所)의 소재(所在)를 잃어버려서 지금 십사오세(十四五世)동안 공(公)의 자손(子孫)이 한(恨)을 가진 일이다. 두 아들을 두셨는데 장자(長子)은 여원(汝源-初諱 汝能)이고 차자(次子)는 여옥(汝沃)인데 형제(兄弟)가 모두 퇴계문(退溪門)에서 수학했다. 제단(祭壇)을 마련하였는데 만운동(晩雲洞) 세현(細峴) 승지공배위 묘소(承旨公配位 墓所) 남향 임좌(南向 壬坐)에 설단(設壇)을 하였다.
十一世 휘 여윤(諱 汝潤)
자(字)는 덕중(德重)이고 호(號)는 은재처사(隱齋處士)이 교리공(校理公)의 증손(曾孫)이다. 부(父)는 판관(判官) 연경(連慶)이다. 졸일(卒日)은 2월27일이고 묘(墓)는 성주 신촌 정상 상령(星州 新村 亭上 上嶺) 유좌(酉坐)이고 배위 성산여씨(配位 星山呂氏)의 졸일(卒日)은 8월3일이며 묘(墓)는 성주 신촌 정상 좌변(星州 新村 亭上 左邊)이다.
十一世 휘(諱) 여원(汝源)
초휘(初諱)는 여능(汝能)이며 교리공(校理公)의 증손(曾孫)이다. 동생 여옥(汝沃)과 함께 퇴계선생문하(退溪先生門下)에 유학(遊學)했다. 졸일(卒日)은 10월 20일이며 묘는 만운 궐전령(晩雲 蕨田嶺) 승지공묘소 동남향(承旨公墓所 東南向) 신좌(辛坐)이다..
十一世 휘(諱) 여옥-만오제공(汝沃-晩悟齌公)
자(字)는 계숙(啓叔)이고 호(號)는 만오제(晩悟齌)이며 교리공(校理公)의 증손(曾孫)이다. 퇴계선생문(退溪先生門)과 권송암문하(權松巖門下)에서 수학(受學)하여 문장 학행(文章 學行)이 당시에는 칭찬이 자자했다. 향해(鄕解)에는 13차나 합격했으나 남성(南省)에는 불리(不利)해서 과거를 볼 뜻을 폐하고 드디어 살던 두수전리(斗水田里)를 만오리(晩悟里)라고 이름을 고치고 이로 인하여 기당(其堂)을 만오제(晩悟齌)라 이름하니 권선생(權先生)께서 일찍이 야경시를 보냈는데 시에 안파한운점점비만계상월야생휘붕승수영암도로보극여반화장귀(鴈破寒雲點點飛滿溪霜月夜生輝鬅鬙樹影巖頭路步屐如攀畵障歸:기러기가 한가로운 구름을 뚫고 점점이 날고 시내에 가득한 차가운 달 달밤에 빛이 나도다 더부룩한 나무그늘 바위머리 길에 그림이 화첩에 잡힐 듯이 나막신 걸음으로 돌아오네)라 하였다.
송암권선생(松巖權先生)의 문하(門下)의 동문(同門) 하연(河淵) 권송간임(權松澗任) 권용만기(權龍巒紀), 신경립(辛敬立)등과 시주(試酒)로 자오(自娛)했다. 상란(喪亂)으로 유문(遺文)은 거의 산일(散逸)되었다. 다만 소백산행시(小白山行詩) 50여수만이 집에 보관하고 있다. 이자(二子)를 두셨는데 장자(長子)는 만운(晩雲) 상빈(尙賓)이고 차자(次子)는 주빈(周賓)이다. 만력갑오(萬曆甲午 선조<宣祖>:서기1594년) 3월 23일에 세상을 뜨셨으며 배위(配位) 공주이씨(公州李氏)의 졸일(卒日)은 4월 24일이며 묘역(墓域)은 예천군 감천면 관현리 홍현 진장동(醴泉郡 甘泉面 官峴里 紅縣 珎藏洞) 해좌(亥坐)에 합폄(合窆)이다.
十二世 휘(諱) 주빈(周賓)
자(字)는 자경(子敬)이다. 부(父)는 은제 여윤(隱齌 汝潤)이고 본생부(本生父)는 만오제 (晩悟齌)여옥(汝沃)이고 상빈(尙賓)의 동생이며 교리공(校理公)의 현손(玄孫)이다. 만력(萬曆) 40년 임자(壬子) 광해(光海)4년(서기1612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으나 과거(科擧)를 폐하고 학문에만 힘썼다. 졸일(卒日)은 8월 9일 이며 배위(配位)는 창녕성씨(昌寧成氏)와 죽산박씨(竹山朴氏)이고 묘역(墓域)은 성주 하산(星州 下山) 임좌(壬坐)에 합폄(合窆)이다.
十二世 휘(諱) 업수(業壽)
자(字)는 경구(景久)이고 부(父)는 여원(汝源)이며 자(子)는 기(椅)이며 교리공(校理公)의 현손(玄孫)이다. 일생을 오직 문학(文學)에만 힘쓰고 예제(禮制)를 행함에 매우 두터웠고 봉선(奉先)에 정성(精誠)을 다했다. 만년(晩年)에 우지(優志)의 특전(特典)을 받아 첨추(僉樞)에 오르셨다. 1807년(丁卯年:대사간공파와 승지공파 파보<延安宋氏世譜 乾坤2권>)메 발간된 세보(世譜)에 향년 81로 된 것으로 보아 81세를 사신 것으로 생각이 되며 묘역(墓域)은 세현(細峴)에 있고 배위(配位)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十二世 휘(諱) 상빈(尙賓)
초휘(初諱)는 니수(尼壽)이다. 자(字)는 경관(景觀)이고 호(號)는 만운(晩雲)이다. 세칭 수졸당거사(守拙堂居士)이며 교리공(校理公)의 현손(玄孫)이다. 일찍이 매포 송복기선생(梅圃 宋福基先生) 문하(門下)에서 수학하니 문행(文行)이 견중(見重)했다. 방담 권강(方潭 權강), 권암,(權岩) 정유지(鄭維地) 부훤당 배익겸(負暄堂 裵益謙)과 더불어 도의(道義)를 교감하고 경학(經學)과 이학(理學)을 강론(講論)하고 시문(詩文)을 서로 주고받은 것이 많았으나 후에 가화(家禍)로 잃었다. 일찍이 문과 갑과(文科 甲科)에 급제하여 중용되었으나 장계(狀啓)로 파직을 당하여 모든 사람이 公을 아까워하고 탄식했다. 그러나 公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담박(澹泊)하고 망혜(芒鞋)와 단장(短杖)으로 산천을 돌며 음소(吟嘯)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만력 12년 임진 선조 25년 왜란(倭亂)을 당하자 망우 곽재우선생(忘憂 郭再祐先生)이 창령(昌寧)에서 창의(倡義)하니 公은 마침내 가족과 결별(訣別)하고 동지들을 데리고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들어갔다. 마침내 대군을 이끈 적장 청정(賊將 淸政)과 대치(對峙)했다. 公은 땔나무를 쌓고 불을 질러두고 동지들과 城을 사수(死守)할 것을 맹서하고 굳게 城을 지키니 적장 청정(賊將 淸政)은 그 기세에 눌러 싸움을 포기하고 물러갔다. 이때 公의 나이 22세라고 이참봉 창운(李參奉 昌運) 화경기언(花坰記言)에 실려 있다. 만력병자(萬曆丙子<宣祖>: 서기1576년)에 태어나 숭정임오(崇禎壬午:서기1642년) 2월 9일에 세상을 뜨고 배위(配位) 옥천전씨(沃川全氏)는 임오(壬午:서기1642년) 10월 29일에 뜨셨으며 묘역(墓域)은 만운 도덕동(晩雲 道德洞) 자좌(子坐) 합봉(合封)을 하였다.
十二世 휘(諱) 익한(翊漢)
미희(美熙)의 장남(長男)이고 자(子)는 준기(俊紀)이며 수의부위(修義副尉) 희옥(希玉)의 현손(玄孫)이다. 통훈대부(通訓大夫)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지내셨다. 졸일(卒日)은 10월 4일이고 배위(配位)는 상산김씨(商山金氏)이며 묘역(墓域)은말지동(末池洞) 유좌(酉坐)이다.
十三世 휘(諱) 시영(時英)
은후(殷後)의 아들이고 훈도(訓導) 희평(希平)의 5대손이다. 우지(優志)의 의 특전(特典)을 받아 호군(護軍)에 되셨다. 졸년월일(卒年月日)은 알 수 없으나 배위(配位)는 안동김씨(安東金氏)이고 묘역(墓域)은 양광산(良光山) 해좌(亥坐)에 쌍봉(雙封)이다.
十三世 휘(諱) 적(樀)-만은공(晩隱公)
자(字)는 융길(隆吉)이고 호(號)는 만은(晩隱)이며 교리공 희문(校理公 希文)의 5대손이다. 조(祖)의 휘(諱)는 여옥(汝沃)이니 송암권선생문하(松巖權先生門下)에 유학(遊學)하셨으며 고(考)의 휘(諱)는 상빈(尙賓)이니 일찍 급제(及第)를 했으니 장문(莊文)으로 파방(罷榜)이 되었다. 비(妣)는 옥천전씨(沃川全氏) 사인홍조(士人洪祖)의 따님이다. 만력임인(萬曆壬寅:서기1602년) 이월(二月) 구일(九日)에 공(公)이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효우(孝友)가 지극(至極)했고 커서는 문장(文章)이 사우중(士友中)에 소중(所重)히 여겼다. 아우가 여종의 남편(男便)을 장형(杖刑)으로 죽게 되었는지라 그때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금방 겪고 살인(殺人)하는 옥사(獄事)가 지극(至極)히 엄(嚴)했는지라 공(公)이 아우를 성산(星山:성주)에 있는 양가(養家)로 보내고 또 서찰(書札)로 양가부형(養家父兄)에게 부탁하며 만방(萬方)으로 근피(謹避)의 도리(道理)를 깨우쳐주니 아우가 가기를 즐겨아니하는지라 공(公)이 꾸짖어 보내고 가인(家人)들도 모르게 했다. 원수(怨讐)가 관(官)에 고(告)하게 됨에 공(公)이 기연(夷然)하게 옥(獄)에 나아가니 사람들이 모두 이는 의옥(疑獄)이라고 하며 일언(一言)으로 자명(自明)을 해서 죽음으로 면(免)할 것 같다고 친붕(親朋)들과 위문(慰問) 온 사람들이 말을 했으나 공(公)이 마침내 즐겨하지 아니하고 내게는 사자(四子)가 있으나 아우는 일식(一息)도 없으니 내가 차마 아우를 무사(無嗣)하게 할 수 없다고 하고 곧 자복(自伏)을 하며 말하기를 “형제(兄弟)는 일신(一身)과 같거늘 저와 나를 논(論)할 필요가 없으며 유죄(有罪)건 무죄(無罪)건 오직 속히 죽는 걸 원한다”고 하니 추관(推官)이 놀랍게 여겼으니 그러나 마침 고문(고문)대로 옥사(獄事)가 이루어지니 실은 정해(丁亥:서기1647년) 正月 초구일(初九日)이니 향년(享年) 사십육세(四十六世)이다.
그때 사자(四子)가 모두 어리거늘 돌아보고 일러 말하기를 “너희들은 내가 죽었다고 해서 아우의 집과 서로 화목(和睦)하지 못한다면 내가 지하(地下)에서라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하였다 한다. 감천만장오향(甘泉晩場午向:예천군 감천면 덕율리)등에 장사(葬事) 지냈다.
배(配)는 공인(恭人)야성송씨(冶城宋氏)이며 효자 증참의(孝子 贈參議) 상엄(尙淹)의 따님이요, 매포선생(梅圃先生) 복기(福基)의 손녀(孫女)였다. 시예(試藝)의 가정(家庭)에서 성장(成長)하여 규문(閨門)의 법도(法道)가 심히 엄숙(嚴肅)하여 부자(夫子)가 비명(非命)임을 통달(痛怛)하면서 그 자신을 마칠 때까지 초상(初喪)때와 같이 휼휼(恤恤)하였다. 경자년(更子年:서기1600년) 십이월(十二月) 이십이일(二十二日)에 나서 갑년(甲年:1660년)인 십일월(十一月) 십구일(十九日)에 생(生)을 마치고 마침내 공(公)의 묘소(墓所)에 쌍분(雙墳)으로 장사(葬事)를 지냈다.
공(公)이 과관(科官)을 하지 아니했으면서 주면(主面)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라 썻으니 생각건대 진정(賑政)에 효노(效勞)를 해서 조가(朝家)에서 살펴서 은전(恩典)으로 기록(記錄)하였는가 아니면 별달리 천행(薦行)이 있었으니 집에서 기록(記錄)을 전하지 아니 했는가. 사자(四子)는 인여(仁輿), 영여(令輿), 예여(禮輿), 지여(智輿)며 이녀(二女)는 장현(張琄) 임지구(林之久)가 그 사위이다. 어린 아이들로 하여금 상은(傷恩)을 아니하고 공(公)이 죽은 후에라도 수삼대(數三代)를 이러한 괴화(乖和)한 일을 듣지 못하게 하였으니 공(公)은 진실(眞實)로 어질었으며 공(公)의 자손(子孫)들도 또한 어질었도다. 죽음에 다달아서도 수립(樹立)한바가 이와 같았거늘 그의 평일(平日) 인륜골육지간(人倫骨肉之間)에도 반드시 가전어후(可傳於後) 할 일이 많았을 것이며 약관(弱冠)시절부터 문헌대방(文獻大方)에 주유(周遊)했으니 어찌 창수(唱酬)한 왕복(往復)의 편지(便紙)가 없었으리오만은 모두 민몰(泯沒)해서 전(傳)하지 아니하고 상자 속에 다만 정제 류세정(靜齌 柳世禎) 선생(先生)과 더불어 왕환시문(往還詩文)이 수삼편(數三編) 있을 뿐이며 정제(靜齌)선생(先生) 노성(老成)이면서 박아(博雅)이시며 예학(禮學)으로 세상(世上)에 이름이 있었으니 벗을 취(取)하시는데도 반드시 단정(端正)하셨으리라. 지금 일율(一律)이 행장(行狀)중에 기록(記錄)되었으니 그 기록(記錄)하지 아니한 것도 가히 유추(類推)할 것이다. 그 시(詩)에 이르기를 만학장옹약명안 제령하용멱환단 력완기보장신온 구졸휴혐섭세난 인득고제명이정 직록쇠병양어한 요장대자서중의 경향생양동처간(晩學莊翁若命安 制齡何用覓還丹 櫟完己保將身穩 鳩拙休嫌涉世難, 認得高齌名以靜, 直祿衰病養於閑, 要將大字書中意 更向生陽動處看 : 만학[晩學]을 한 장옹[莊翁]이 운명[運命]과 같이 편안히 여겨 제한[制限]된 연령[年齡]인데 무엇 때문에 도리어 단약[丹藥]을 찾았을꼬 상수리나무처럼 완전하니 장차 온전한 몸을 보존[保存]하며 간졸[迀拙]함을 구하여 섭세[涉世]에 어려움을 싫어하고 고제[高齌]를 얻어 정[靜]으로서 함을 알 것이고 쇠병[衰病]에 곧바로 인연하여 한가롭게 안양[安養]하도다 장차 큰글자로 서중[書中]의 뜻을 나타내니 다시 양지[陽地]의 기[氣]를 움직이는 곳에 나타내네)이라고 하였다. 신당이처사성전(新堂李處士成全)이 앞에 전(傳)을 하고 제산김선생성탁(霽山金先生聖鐸)이 또 후서(後敍)를 해서 한 시대(時代)에 사문종장(斯文宗匠)이 서로 이어서 서술(敍述)을 했으니 문자(文字)가 모두 개한(慨恨)을 이루었으며 저 조가(朝家)에서 포상(褒賞)을 했으나 제산(霽山)의 글은 미치지 못했으며 또 공(公)의 증손(曾孫) 집(鏶)이 성품(性稟)이 순후(淳厚)하고 삼가서 김기산문하(金箕山門下)께 함께 배워서 아마도 공(公)의 유풍기술(遺風記述)했을 것이니 공(公)이 연세교유(連世交遊)를 또 가히 알만하다. 현재 유고(遺稿)집 1책과 문집(文集) 1책 그리고 증직(贈職) 교지(敎旨)와 정장문(呈狀文) 십여 장이 남아 있다.
十三世 휘(諱) 견(木絹)
자(字)는 이길(而吉)이고 만운(晩雲) 상빈(尙賓)의 삼자(三子)중 셋째이며 교리공(校理公)의 5대손이다. 선조 무신(宣祖 戊申 : 서기1608년)에 태어나 백형(伯兄) 만은공(晩隱公)과 함께 방담권선생(方潭權先生) 문하(門下)에서 유학(遊學)하였으며 을유년 생원시(生員試)에서 일등(一等)을 하고 진사시(進士試)에 삼등(三等)을 하여 생진(生進) 양시(兩試)에 합격했다. 만력무신(萬曆戊申<宣祖>:서기1608년)에 태어나 갑신년(甲申年)에 세상을 뜨셨으며 배위(配位)는 의인 영양남씨이고 묘역(墓域)은 만운 세현 이목곡(晩雲 細峴 梨木谷:배나무골) 묘좌(卯坐)에 쌍분(雙墳)이다.
十三世 휘(諱) 진기(震紀)
부(父)는 익택(翊澤)이고 조(祖)는 미희(美熙)이며 수의부위(修義副尉) 희옥(希玉)의 후(后)이다. 만년(晩年)에 우지(優志)의 특전(特典)을 받아 통정(通政)에 오르셨다. 6월18일에 태어나 졸일(卒日)은 12월 11일이며 묘역(墓域)은말지동안산(末池洞案山) 자좌(子坐)이다. 배위(配位)는 여산송씨(礪山宋氏)로 졸일(卒日)은 4월 3일이고 묘역(墓域)은동강 점곡(同岡 店谷) 묘좌(卯坐)이다.
十四世 휘(諱) 승길(承吉)
자(字)는 성여(成汝)이고 부(父)는 인선(仁善)이며 참봉(參奉) 희경(希景)의 후(后)이다. 우지(優志)의 특전(特典)을 받아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에 오르셨다. 졸일(卒日)은 12월 8일이며 배위(配位)는 숙부인 김해김씨(淑夫人 金海金氏)이고 졸일(卒日)은 10월 8일이다. 묘역(墓域)는 만운동(晩雲洞) 세현(細峴) 자좌(子坐)에 합폄(合窆)이다.
十四世 휘(諱) 인여(仁輿)
자(字)는 문서(文瑞)이고 만은공(晩隱公) 적(樀)의 장자(長子)이며 교리공(校理公)의 후(后)이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였으며 일찍이 대부인(大夫人) 공인(恭人) 송씨(宋氏<관(貫)은 야성(冶城)이고 부(父)는 효자 증참의(孝子 贈參議) 상엄(尙淹)이고 祖는 매포선생(梅圃先生) 송복기(宋福基)>)의 명으로 종구(從舅)이신 산수당송천추선생(山水堂宋天樞先生) 문하(門下)에서 유학(遊學)하여 유업(儒業)을 떨어트리지 않았으며 칭송이 자자했다. 인조 무진(仁祖 戊辰 : 서기1628년)에 태어나 숙종 병진(肅宗 丙辰 :서기1676년) 1월 17일에 세상을 뜨셨다. 배위(配位)는 선성이씨(宣城李氏)이며 졸일(卒日)은 2월 20일이다. 묘역(墓域)은예천군 감천면 상관현리<현:덕율리> 제궁동(醴泉郡 甘泉面 上官峴里 <德栗里> 齌宮洞) 만은공묘소(晩隱公墓소) 후서(後西) 자좌(子坐)에 쌍분(雙墳)이다.
十四世 휘(諱) 예여(禮輿)
자(字)는 화보(和甫)이고 만은공(晩隱公) 적(樀)의 제삼자(第三子)이며 교리공(校理公)의 후(后)이다. 공(公) 역시 대부인(大夫人) 공인(恭人) 송씨(宋氏)의 명으로 숙구(叔舅) 쌍취당송천기선생(雙翠堂宋天機先生) 문하(門下)에서 유학(遊學)하였다. 숭정 정축(崇禎 丁丑 : 서기1637년) 11월 2일에 태어나 계유(癸酉:서기 1693년) 9월 6일에 세상을 뜨셨으며 묘역(墓域)은 만운 도덕동 동록(晩雲 道德洞 東麓) 임좌(壬坐)이다. 배위(配位) 태산박씨(泰山朴氏)로 생년(生年)은 알 수 없으나 9월 22일에 태어나 정축(丁丑:서기1697년) 6월 19일 세상을 뜨셨으며 묘역(墓域)은 만운 흥산동(晩雲 興山洞) 2묘(二墓)중에 계하(階下)로 유좌(酉坐)이다.
十四世 휘(諱) 지여(智輿)
자(字)는 원경(遠卿)이고 만은공(晩隱公) 적(樀)의 제사자(第四子)이며 교리공(校理公)의 후(后)이다. 공(公) 역시 대부인(大夫人) 공인(恭人) 송씨(宋氏)의 명으로 중형(仲兄) 예여(禮輿)와 함께숙구(叔舅) 쌍취당송천기선생(雙翠堂宋天機先生) 문하(門下)에서 유학(遊學)하였다. 졸년월일(卒年月日)은 알 수 없으나 묘역(墓域)은예천군 감천면 상관현리<현:덕율리> 제궁동(醴泉郡 甘泉面 上官峴里 <德栗里> 齌宮洞) 만은공묘소(晩隱公墓소) 후서(後西) 자좌(子坐)에 쌍분(雙墳)이다.
十四世 휘(諱) 영여(令輿)
자(字)는 운서(雲瑞)이고 호(號)는 고차(高次)이며 교리공(校理公)의 후(后)이다. 계숙(季叔)인 견공( 絹公)이 후사(後嗣)가 없어 출계(出系)했으며 본생(本生)의 부(父)는 만은공(晩隱公) 적(樀)이다. 공도 역시 백형 인여(仁輿)과 함께 종구(從舅)이신 산수당송천추선생(山水堂宋天樞先生) 문하(門下)에서 유학(遊學)하였다. 인조 임신(仁祖 壬申 : 서기 1632년)에 태어나 무신(戊申 : 서기1668년)에 세상을 뜨셨으며 배위(配位)는 영월신씨(寧越辛氏)이고 묘역(墓域)은 예천군 감천면 관현리 홍현 진장동(醴泉郡 甘泉面 官峴里 紅縣 珎藏洞) 해좌(亥坐)에 합폄(合窆)이다.
十五世 휘(諱) 천삼(天參)
자(字)는 여일(汝一)이고 부(父)는 연광(延光)이며 여원(汝源)의 현손(玄孫)이며 교리공(校理公)의 후(后)이다. 우지(優志)의 특전(特典)을 의(依)하여 첨지중추(僉知中樞)에 오르셨다. 병인년(丙寅年)에 태어나 병술년(丙戌年)에 세상을 뜨셨으며 묘역(墓域)은 만운동(晩雲洞) 세현(細峴) 손좌(巽坐)이고 배위(配位)는 상락김씨(上洛金氏)이고 묘역(墓域)은만운리 안산 궐전령(晩雲里 案山 蕨田嶺 : 고사리밭) 승지공묘소(承旨公墓所) 계하(階下)이다.
十五世 휘(諱) 세성(世盛)
자(字)는 철부(哲夫)이고 부(父)는 도명(道明)이고 수의부위(修義副尉) 희옥(希玉)의 후(后)이다. 벼슬은 통훈대부군자감정(通訓大夫軍資監正)이다. 경진(庚辰) 10월 1일에 세상을 뜨셨다. 배위(配位)는 경주손씨(慶州孫氏)이며 묘역(墓域)는 예천남면개야후평(醴泉南面開野後坪) 오좌(午坐)이다.
十六世 휘(諱) 집(鏶)
초휘(初諱)는 집(潗)이고 자(字)는 현기(玄紀)이다. 부(父)는 연조(延祚)이고 만은공(晩隱公) 적(樀)의 증손(曾孫)이며 교리공(校理公)의 후(后)이다. 성품(性稟)이 순후(淳厚)하였으며 기산김여만선생(箕山金如萬先生) 문하(門下)에서 유학(遊學)을 하니 모두 그의 행의(行義)를 칭송(稱頌)했다. 숙종 신묘(肅宗 辛卯 :서기1686년)8월25일에 태어나 임자(壬子:서기1752년)에 세상을 뜨셨으며 묘역(墓域)은 만운 세현 (晩雲 細峴) 승지공배위묘소(承旨公配位墓所) 계하(階下) 쌍분(雙墳) 중 동변(東邊) 인좌(寅坐)이다. 배위(配位)는 아주신씨(鵝州申氏)로 1684년 12월28일에 태어나 1723년 2월 8일에 세상을 뜨셨으며 묘역(墓域)은 만운 흥산곡 북변(晩雲 興山谷 北邊) 유좌(酉坐)이다.
十六世 휘(諱) 명대(命大)
자(字)는 천흥(天興)이고 부(父)는 군자감정(軍資監正) 세성(世盛)이며 수의부위(修義副尉) 희옥(希玉)의 후(后)이다. 손자(孫子) 사문(思文)의 귀(貴)로 통훈대부공조참의(通訓大夫工曹參議)를 증직(贈職)을 받았다. 경술년(庚戌年)에 태어나 기축년(己丑年) 11월 5일에 세상을 뜨셨으며 묘역(墓域)은 예천남면개야월평(醴泉南面開野越坪) 자좌(子坐)이다. 배위(配位)는 숙부인 풍천임씨(淑夫人 豊川任氏)이고 갑인년(甲寅年)에 태어나 병자년(丙子年) 7월 8일에 세상을 뜨고 묘역(墓域)은 안동부 동물야동(安東府 東勿野洞) 해좌(亥坐)이다.
十七世 휘(諱) 흥렴(興濂)
자(字)는 회원(會源)이고 부(父)는 현(鉉)이며 본생(本生)의 부(父)는 탁(鐸)이요 만은공(晩隱公) 적(樀)의 현손(玄孫)이며 교리공(校理公)의 후(后)이다. 행적(行蹟)이 전해지는 것이 없었으나 지금에 와서 1807년(丁卯年:대사간공파와 승지공파 파보<延安宋氏世譜 乾坤2권>)의 세보(世譜)에 모선제(慕先齌) 사근(思近)과 같이 발문(跋文)이 기록되어 있다. 영조 무진(英祖 戊辰:서기1748년) 4월 6일에 태어났으나 졸년월일(卒年月日)과 묘소, 배위(配位)에 관한 기록이 없다.
十七世 휘(諱) 인렴(寅濂)
초휘(初諱)는 정렴(挺濂)이고 자(字) 호중(豪仲)이며 호(號)는 경운제(耕雲齌)이다. 부(父)는 집(鏶)이고 만은공(晩隱公) 적(樀)의 현손(玄孫)이며 교리공(校理公)의 후(后)이다. 우아한 문장의 운치가 사우(士友)들의 추복(推服)하는 바가 됐으나 마침내 장옥(場屋: 과거)에는 굴복하였으나 강개(慷慨)하여 선조의 일을 빛나게 해서 조상의 발자취는 계승해서 뜻을 구해서 글을 청해서 도사공사적(都事公事蹟:만은공<晩隱公>)을 일책(一冊)을 만들었으며 널리 참고하고 널리 물어서 세보규례(世譜規例) 일질(一帙)을 만들어서 후세(後世)에 전하게 하였으며 1807년(丁卯年:대사간공파와 승지공파 파보<延安宋氏世譜 乾坤2권>)의 세보(世譜)에 구서문(舊序文)이 기록되어 있다. 경종 갑인(景宗 甲寅:서기1724년) 5월 21일에 태어나 신해(辛亥:서기1791년) 8월 3일 돌아가셨으며 배위(配位)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1729년 4월 15일에 태어나 1789년 11월 3일에 세상을 뜨셨으며 묘역(墓域)은 만운 장심혈(晩雲 掌心穴) 경좌(庚坐)에 쌍봉(雙封)이다.
十七世 휘(諱) 치렴(致濂)
자(字)는 추민(穉閩)이고 부(父)는 공조참의(工曹參議) 명대(命大)의 차남(次男)이며 군자감정(軍資監正) 세성(世盛)의 손자(孫子)이고 수의부위(修義副尉) 희옥(希玉)의 후(后)이다. 아들 사문(思文)의 귀(貴)로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를 증직(贈職)을 받았다. 임오년(壬午年)에 태어나 정유년(丁酉年) 1월 24일에 세상을 뜨셨으며 묘역(墓域)은 수심리 원곡(水沈里 院谷) 병좌(丙坐)이다. 배위(配位)는 정부인 분성김씨(貞夫人 盆城金氏)이고 묘역(墓域)은 임서 녹항(臨西 鹿項) 곤좌(坤坐)이다.
十八世 휘(諱) 은립(溵立)
부(父)는 광만(光萬)이고 훈도공(訓導公) 희평(希平)의 후(后)이다. 벼슬은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 僉知中樞府事)이다. 무자(戊子) 2월 1일에 세상을 뜨셨으며 배위(配位)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고 묘역(墓域)은 풍산 구암(豊山 九岩) 해좌(亥坐) 연봉(連封)이다.
十八世 휘(諱) 사원(思遠)
자(字)는 계지(啓之)이고 부(父)는 인렴(寅濂)이고 모는 전의이씨(全義李氏)니 사인창의(士人昌義)의 따님이다. 조는 집(鏶)이며 만은공(晩隱公) 적(樀)의 오대손(五代孫)이며 교리공(校理公)의 후(后)이다. 동생인 모선제(慕先齌) 사근(思近)과 함께 내외우(內外憂)를 만나서 묘소(墓所)에 여막(廬幕)을 하고 몸소 밥을 짓고 조석궤전(朝夕饋奠)을 하였으며 만은공행장(晩隱公行狀)과 묘갈명(墓碣銘) 그리고 1807년(丁卯年:대사간공파와 승지공파 파보<延安宋氏世譜 乾坤2권>)의 세보(世譜)를 발간하는데 상당한 역활한 것으로 당시 문헌이나 행장과 묘갈명에 나타나고 있다. 영조 경오(英祖 庚午:서기1750년) 4월 26일에 태어나 1815년 4월 17일에 세상을 뜨고 묘역(墓域)은 응봉산(鷹峰山:매봉산) 간좌(艮坐)이다. 배위(配位)는 풍산류씨()로 1751년 2월28일에 태어나 1784년 7월 13일에 세상을 뜨고 묘역(墓域)은 장심혈(掌心穴)아래 유좌(酉坐)이다.
十八世 휘(諱) 사근(思近)
자(字)는 이보(彛甫)이며 호(號)는 모선제(慕先齌)이다. 여조연성군경(麗朝延成君卿)의 후손(後孫)이다. 부(부)는 진렴(振濂)이며 본생(本生)의 부(부)는 인렴(寅濂)이고 조는 집(鏶)이며 만은공(晩隱公) 적(樀)의 오대손(五代孫)이며 교리공(校理公)의 후(后)이다. 비(妣)는 전의이씨(全義李氏)니 사인창의(士人昌義)의 따님이다. 영조 계유(英祖 癸酉 :서기1753년) 삼월(三月) 초육일(初六日)에 공(公)을 낳으니 어려서부터 밝은 바탕이었고 조금 커서는 더욱 고대(古代)의 전적(典籍)에 독지(篤志)하여 일찍이 맹자(孟子)를 읽을 때 솔잎을 한 잎씩 계산(計算)하여 상자에 솔잎이 가득했고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아니했다. 중년(中年)에 봉친(奉親)하려고 신양리(新陽里)로 이사(移徙)를 해서 산수(山水)에 어초(魚樵)하는 외에는 발자취가 호정(戶庭)을 벗어나지 아니했다. 이미 내외우(內外憂)를 만나서 묘소(墓所)에 여막(廬幕)을 하고 백씨사원(伯氏思遠)과 몸소 밥을 짓고 조석궤전(朝夕饋奠)을 하는데 피눈물을 흘려 애호(哀號)하면서 모진 바람, 눈보라가 쳐도 일찍이 하루도 거르지 아니하니 비둘기 한 쌍이 날아와서 횃대 위에 앉아 쫓아도 가지 아니하고 삼년(三年)을 마치고 날아갔으며 또 대호(大虎)가 부복(俯伏)해서 신혼곡(晨昏哭)을 하는 자리에 저녁마다 같이 했고 마치 자제(子弟)가 부형(父兄)을 호위(護衛)하듯 하였으며 뻐꾸기와 자고새의 자비(慈悲)의 성품(性稟)이며 호랑이가 부자(父子)간의 정(情)과 공(公)의 성효(誠孝)에 감동(感動)하여 그러했던가?경신년(庚申년) 국휼(国恤)에 페리를 쓰고 거친 베옷을 입고 삼상(三霜)을 지내고 고기를 먹지 아니하고 구개월(九個月)동안 소식(素食)을 하는데 부인이씨(婦人李氏)도 역시 소식(素食)을 하면서 말하기를 가장(家長)이 소식(素食)을 하니 어찌 고기를 먹을고 하니 남들이 공가(公家)의 덕요(徳耀)에 부끄러움이 없다 하였다. 선기(先忌)를 만나면 전기삼일(前期三日)에 도포(道袍)를 입고 향기(香気)나는 물을 먹지 아니하고 정제(正齌) 날 밤에 촛불을 밝히고 밤을 새우며 평소 거처(居處)할 때 비록 조이과소(棗梨瓜蔬)의 류(類)도 제사(祭祀)를 받들지 아니하고는 감히 맛보지 아니 했으며 백씨(伯氏)도 더불어 공(公)은 기거(起居)한 집안에서 하며 한 접시 떡과 한번 덮는 이불이라 상(床)을 함께 하며 벼개를 나란히 비고 누우며 즐기고 화락하며 그 조석(朝夕)을 보내더니 백씨(伯氏)가 이미 죽으니 외로움이 날로 더하여 말하기를 나의 골육(骨肉)과 지정(至情)이 다 천하(泉下)로 돌아가고 외롭게 인세(人世)에 남아서 어찌 보고 사는 자황(滋况)이 있겠는가 하시다. 한 조그마한 정자(亭子)를 소나무와 전나무 사이에 짓고 모선제(慕先齌)라고 편액(扁額)을 하고 날마다 고요한 가운데 거처하시며 때로는 마을 아이들을 가르치고 야노(野老)들과 시(詩)도 읊으며 수석(樹石)사이에 바람을 쏘이며 경영(経営)하는 일이나 생각도 없으며 듣기 싫어하다가 신묘(辛卯 : 서기1832년) 1월 4일에 세상(世上)을 뜨셨으며 만운 응봉(晩雲 鷹峯) 자좌(子坐)에 장사(葬事)했다.
공(公)은 효우지행(孝友之行)이 있으면서 겸(兼)하여 학하(學河)에 맛을 들여 금회(襟懷)가 조용하고 한가하며 한자의 경계(境界)에도 분명(分明)하며 겸손하고 자신(自身)을 낮추며 항상(恒常) 공손(恭遜)해서 표이(表裏)가 여러 사람 중에 뛰어난 듯 혹시라도 견개(狷介)하게 자수(自守)할 곳을 발견(發見)하며 고고(枯槁)하게 깨끗하면서 효효(囂囂)하게 혼자만이 얻어지는 뜻이 매양 궁벽(窮僻)하게 거처(居處)할 때에 감추고 길러갔으며 집이 본시 청한(淸閑)해서 조석(朝夕)도 이어가지 못하면서 규문(閨門)안에 성내는 말이 없이 성질(性質)이 본시 방탕(放宕)한데 소박(素薄)해서 겨울철에 입을 옷이 완전(完全)함이 없어도 주파(周波)중에 껄끄러운 모습이 없으며 보이(步履)가 안상(安詳)하여 스스로 일정(一定)한 법구(法矩)를 밟아서 급거(急遽)하고 창졸(倉卒)간에라도 한 치의 실수(失手)가 없었다. 한마을에 사는 이과제옹(李寡齌翁)이 일찍이 폭우(暴雨)중에 그가 양팔을 저으며 조용히 오는 것을 보니 이에 공(公)이였다. 이공(李公)의 천성(天性)이 자존심(自尊心)이 있어서 남에게 그렇다고 잘 안 하는 사람인데 홀로 공(公)에게는 항상 그의 말을 듣고 그의 행실(行實)을 아니하고는 일찍이 고인(古人) 같다고 칭(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부(本府) 공조(工曹)가 되어서는 읍(邑)의 천사(薦士)의 제목(題目)이 있어서 특별히 공(公)으로 응선(應選)하게 되니 그의 애지중지(愛之重之)함이 이와 같았다. 선대(先代) 발문(跋文)을 받으려고 홍장거공(鴻匠鉅公)의 문(門)을 두루 다녔으며 대산이공(大山李公)이 상린서봉(祥麟瑞鳳)으로 비유(比喩)하시고 구와김공(龜窩金公)이 유지(有志)의 선비로 지목(指目)하시고 서사정공(西思鄭公)이 가히 아낌 즉 한 사람이라고 하시고 두동황공(杜洞黃公)은 외우(畏友)로 칭(稱)하시고 강고유공(江皐柳公)은 심교(心交)로 허여(許與)하시니 공(公)이 이와 같이 수군자(數君子)에게 얻어졌으니 어찌 일시(一時)에 한말로 우연(偶然)히 추장(推獎)할 뿐이리요. 공(公)의 평생사적(平生事蹟)을 찝어서 말하면 짚신을 신고 폐양립(蔽陽笠)을 쓰고 팔순(八旬)동안 규두(閨竇)의 밑에서 별달리 이력(履歷)을 칭(稱)할만 것도 없으나 일상생활(日常生活)이 법도(法度)에 맞게 해서 혹시(或是) 한가지라도 우리 유가(儒家)의 법문(法門)에 어그러짐이 없었다. 또한 1807년(丁卯年:대사간공파와 승지공파 파보<延安宋氏世譜 乾坤2권>)의 세보(世譜)를 도청(都廳)하시었고 발문(跋文)이 기록되어 있고 소백산(小白山) 산행시첩(山行詩帖)과 모선암시첩(慕先庵詩帖)이 있다. 배위(配位)는 영천이씨(永川李氏)로 1755년에 태어나 1822년 1월 25일에 세상을 뜨고 묘역(墓域)은 만운 장심혈후 연주(晩雲 掌心穴後 聯珠) 임좌(壬坐)이다.
十八世 휘(諱) 사문(思文)
자(字)는 여직(汝稷)이다. 부(父)는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치렴(致濂)이고 공조참의(工曹參議) 명대(命大)의 손자(孫子)이며 군자감정(軍資監正) 세성(世盛)의 증손(曾孫)이고 수의부위(修義副尉) 희옥(希玉)의 후(后)이다. 벼슬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겸오위장(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을 하셨다. 을축(乙丑) 2월19일에 태어나 계유(癸酉) 1월 28일에 세상(世上)을 뜨셨으며 묘역(墓域)은 안동시 길안면 만음리 서당마을(安東市 吉安面 晩陰里 書堂마을) 오좌(午坐)이다. 배위(配位)는 정부인 담양전씨(貞夫人 潭陽田氏)이고 기미년(己未年) 9월 10일에 태어나고 졸일(卒日)은 10월 10일이며 묘역(墓域)은 안동시 길안면 용계은행리 후곡(安東市 吉安面 龍溪銀杏里 後谷) 곤좌(坤坐)이다.
十九世 휘(諱) 의공(宜恭)
자(字)는 계지(啓之)이고 부(父)는 사원(思遠)이며 조(祖)는 인렴(寅濂)이다. 증조(曾祖)는 집(鏶)이며 만은공(晩隱公) 적(樀)의 육대손(六代孫)이며 모선제(慕先齌) 사근(思近)의 조카이기도 하며 교리공(校理公)의 후(后)이다. 1850년(庚戌年:대동보<延安宋氏世譜 仁義禮智4권>) 대동보(大同譜)를 도청(都廳)을 맡아서 발간하는데 상당한 역활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고 하시었고 발문(跋文)이 기록되어 있다. 영조 갑오() 7월11일에 태어나 계묘(癸卯:1853년) 4월 18일에 세상을 뜨시고 묘역(墓域)은 만운 흥산동(晩雲 興山洞) 곤좌(坤坐)이다. 배위(配位)는 병신(丙申:1776년) 3월 2일에 태어나 임신(壬申:1812년) 7월 26일에 세상을 뜨시고 묘역(墓域)은 만운 흥산동(晩雲 興山洞) 곤좌(坤坐)이고 상분(上墳)이다.
二十世 휘(諱) 기명(蘷命)
자(字)는 여관(汝寬)이며 부(父)는 의겸(宜謙)이고 자는 지옥(之鈺)이며 만오제공(晩悟齌公)의 후손(後孫)이다. 효도롭고 우애로움이 순수하며 지극하였고 문장과 예능이 일찍이 이루어졌으나 불행하게도 일찍이 세상을 떠나 모든 사람들이 애석해 했다. 정종 정미(正宗 丁未 : 서기1788년) 11월 15일에 태어나 경오(庚午 : 서기1810년) 5월 25일에 돌아가셨으며 묘역(墓域)은 묘역(墓域)은 만운 흥산곡 남록(晩雲 興山谷 南麓) 건좌(乾坐)이다. 배위(配位)는 진주유씨(晋州柳氏)로 1786년 2월 12일에 태어나 1826년 12월 23일에 세상을 뜨고 묘역(墓域)은 승지공묘소 후합곡(承旨公墓所 後合谷) 병좌(丙坐)이다.
二十一世 휘(諱) 지동(諱 之東)
수의공(修義公) 휘(諱) 희옥(希玉)의 후손(後孫)이며 휘(諱) 영명(榮命)의 아들이고 1884년 2월 24일에 이상(異常)한 자질(資質)을 타고났다. 어릴 때부터 능(能)히 사친(事親)의 도리(道理)를 알았으며 오세(五世)에 이르러 자모상(慈母喪)을 당하여 비록 어려서 곡읍(哭泣)의 슬픔을 알지 못할 나이지만 장성(長成)과 다름이 없었고 구세(九世)에 이르러 다행(多幸)히 계모(繼母)를 받들게 되어 혼정신(昏定晨)하고 감지(甘旨)의 공궤(供饋)하는 절차(節次)와 집나갈 때 고(告)하고 돌아와서 얼굴을 보이는 성심(誠心)이 시종(始終) 게을리 하지 아니하며 부모(父母)가 좋아하는 바를 뜻에 따라 진행(進行)해서 한번도 거역하고 거스름이 없으며 낮에는 나무하고 밤에는 글을 읽으며 치가(治家)를 근검(勤儉)하였다. 삼십일세(三十一世) 이르러 계모상(繼母상)을 당(當)해서도 초종범절(初終凡節)을 한결 가례(家禮)대로 유감(遺憾)이 없게 애통(哀慟)해 하며 예제(禮制)를 넘기는데 친모상(親母喪)보다 못지아니하게 예제(禮制)대로 상(祥)을 마쳤다. 무오년(戊午年) 엄부(嚴父)께서 병석(病席)에 누웠는데 시탕(侍湯)을 극진(極盡)하지 않을 수 없으니 숙증(宿症)이라 이와 같이 해도 어쩔 수 없이 천년(天年)을 마치게 되어 효자(孝子)와 그 아내 황씨(황씨)가 애통망극(哀慟罔極)해 하며 삼월(三月)을 시신(屍身)을 모시고 예월(禮月)에 안폄하고 겨울인즉 눈을 쓸고 여름이면 풀을 뽑았으며 후(後)에 기진(忌辰)을 당(當)해서도 쇠복(衰服)을 벗던 날과 같이 평생(平生)을 한결 같으니 이는 종신(終身)토록 상주(喪主)라고 할 것이며 1941년 9월 10일에 세상을 뜨셨으며 영덕군 지품면 복곡리 직곡(盈德郡 知品面 伏谷里 直谷)에 장사(葬事)했다. 그 처(妻) 황씨(黃氏)는 평해(平海)를 관향(貫鄕)한 황상관(黃相官)의 따님이며 1996년 5월 23일에 태어나 1948년 12월 27일에 세상을 뜨니 영덕군 지품면 복곡리 삼지산(盈德郡 知品面 谷里 彬知山)에 장사(葬事)했다. 공부자(孔夫子) 탄강(誕降) 2477년에 성균관(成均館) 공부자성적도속수오륜행실중간연원유림향약본소(孔夫子聖蹟圖續修五倫行實重刊淵源儒林鄕約本所)에서 효자(孝子)로 표창(表彰)을 받았다.
二十二世 휘(諱) 덕조(德祖)
자(字)는 준언(俊彦)이고 호(號)는 운양(雲陽)이다. 부(父)는 지옥(之鈺)이고 기명(蘷命)의 손자(孫子)이며 교리공(校理公)의 후(后)이다. 병산서원원장(屛山書院院長)을 역임(歷任)하였으며 후학들을 위해 많은 힘을 쏟았으며 승지공(承旨公) 묘소(墓所)의 묘갈명(墓碣銘)을 찬(撰)하셨다. 또한 1910년(庚戌年:대사간공파와 승지공파 파보<延安宋氏世譜 乾坤2권>) 편찬된 세보(世譜)에 지호(之浩)와 같이 발문(발문)이 기록 되어 있다. 서기1851년 5월26일에 태어나 서기1924년 11월 5일에 세상(世上)을 뜨셨다. 묘역(墓域)은 풍산읍 만운리 안산 궐전령(豊山邑 晩雲里 案山 蕨田嶺 : 고사리밭) 승지공묘소(承旨公墓所) 말록(末麓) 갑좌(甲坐)이다. 배위(配位)는 기성반씨(岐城潘氏)로 1852년 4월 28일에 태어나 1901년 12월 5일 세상을 뜨고 묘역(墓域)은 만운 정동(晩雲 井洞:일명 팥밭골) 임좌(壬坐)이다.
二十三世 휘(諱) 낙상(洛祥)
자(字)는 이정(履廷)이고 호는 만포(晩圃)이다. 부(父)는 덕조(德祖)이며 지옥(之鈺)의 손자(孫子)이고 기명(蘷命)의 증손(曾孫)이며 교리공(校理公)의 후(后)이다. 병산서원원장(屛山書院院長)을 역임(歷任)하셨고 후학들을 위해 많은 힘을 쏟았으며 아직도 생존해 있는 제자들이 여러분 계신다. 서기1896년 11월6일에 태어나 서기 1951년 2월 20일에 세상(世上)을 뜨셨으며 묘역(墓域)은 풍산읍 만운리(豊山邑 晩雲里) 여막들 장심혈(掌心穴) 중봉(中峰) 건좌(乾坐)이다. 배위(配位)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1870년 9월 5일에 태어나 1952년 12월 29일에 세상 뜨시고 묘역(墓域)은 만운 세현(晩雲 細峴) 장고개 을좌(乙坐)이다.
二十三世 휘(諱) 낙구(洛九)
자(字)는 중극(中極)이며 호(號)는 만농(晩儂)이다. 조(祖)의 휘(諱)는 지만(之萬)이요 고(考)의 휘(諱)는 영조(英祖)이고 비(妣)는 안동장씨(安東張氏)니 경우(景虞)의 따님이며 경당흥효(敬堂興孝)의 후(後)이다 계비(繼妣) 함양박씨(咸陽朴氏)이니 래응(來應)의 따님이다. 경진(庚辰서기1880년) 4월 25일에 태어나니 나면서부터 세상(世上)에 수요(需要)될 기량국량(器量局量)있었으며 시기적(時期的)으로 일제시대(日帝時代)였다. 육영사업(育英事業)에 유심(留心)을 해서 풍북오능강습소사립보통학교(豊北五陵講習所私立普通學校)와 병산중학교(屛山中學校)를 설립(設立)해서 모두 후생(後生) 이끄러 깨우쳤다. 신묘(辛卯:서기1951년) 11월 28일에 졸(卒)하였다. 배(配)는 예안이씨(禮安李氏)이니 수삼(洙參)의 따님으로 무인년(戊寅年:서기1878년)에 태어나 병신(丙申서기1956년)4월2일에 졸(卒)하다. 삼남(三男)을 기르니 원식(元植) 희식(熙植) 인식(寅植)이요 정휘동(鄭輝東) 이한조(李翰朝)는 그 사위이다. 묘역(墓域)은 만운(晩雲) 양촌(陽村) 임좌(壬坐)에 장사(葬事)하였지만 국책사업(國策事業)으로 인해 만운 함백산 내곡(晩雲 咸白山 內谷) 갑좌(甲坐)에 쌍분(雙墳)으로 이장(移葬)을 하였다..
二十四世 휘(諱) 원식(元植)
자(字)는 주현(周顯)이고 호(號)는 운강(雲崗)조(祖)의 휘(諱)는 영조(英祖)이며 고(考)의 휘(諱)는 낙구(洛九)요 비(妣)는 예안이씨(禮安李氏) 수삼(洙參)의 따님이다 무술(戊戌:서기1898년)에 태어나서 무오(戊午:서기1978년)8월18일에 졸(卒)하니 만운안산(晩雲案山) 임좌(壬坐)등에 장사(葬事)했다. 풍산면장(豊山面長) 초대경상북도의회의원(初代慶尙北道議會議員)에 피선(被選)되다 배(配) 진성이씨(眞城李氏) 우락(禹洛)의 따님이요 근인당의태(近仁堂宜泰)의 후(後)이며 1895년 5월 16일에 태어나 1983년 2월 5일에 졸(卒)하여 공위쌍분(公位雙墳)하였다. 삼남(三男)을 두니 세열(世烈) 동열(東烈) 보열(寶烈)이요 류시범(柳時範) 이상우(李尙雨)는 그 사위이다.
二十五世 휘(諱) 세열(世烈)
자(字)는 천보(天甫)이며 자호(自號)는 석정(石靜)이고 조부(祖父)는 만농(晩儂) 낙구(洛九) 부(父)는 경상북도의회의원(慶尙北道議會議員) 운강(雲崗) 원식(元植)이요 비(妣)는 진성이씨(眞城李氏) 우락(禹洛)의 따님이요 근인당의태(近仁堂宜泰)의 후(後)이다. 정사(丁巳:서기1917년) 1월 3일에 태어나서 기미(己未:서기1979년) 1월 26일에 졸(卒)하였으며 만운안산(晩雲案山) 임좌(壬坐)등에 장사(葬事)했다. 배(配)는 풍산류씨(豊山柳氏)이며 도흥(道興)의 따님이며 1916년 6월 3일에 태어나 2004년 윤2월 28일에 졸(卒)하였으며 공위쌍분(公位雙墳)하였다. 육이남사녀(育二男四女)하니 장남(長男)은 재상(在商)이며 차남(次男)은 재욱(在煜)이며 신재형(申載衡) 이은철(李垠撤) 김일태(金日泰) 홍명화(洪銘和)가 사위이다. 공(公)의 기(氣)는 영특(穎特)하게 태어나서 재예(才藝)가 절륜(絶倫)하여 외국(外國)의 명치대학(明治大學[일본 와세다대학])을 다녀 법학부법학사(法學部法學士)로 제일은행(第一銀行) 상무이사(常務理事)를 지내고 해방(解放) 후에 교통부공로과장(交通部公路課長)과 충남관재청장(忠南管財廳長)과 관재청소청과장(管財廳訴請課長)을 역임(歷任)하면서 기마(驥馬)의 장도(長途)를 펴서 특별(特別)히 뛰어난 재능(才能)이 상호사방(桑弧四方)의 완전(完全)함을 등지지 아니하였다
二十五世 휘(諱) 보열(寶烈)
자(字)는 명보(明甫)이며 호(號)는 하산(霞山)이고 조부(祖父)는 만농(晩儂) 낙구(洛九) 부(父)는 경상북도의회의원(慶尙北道議會議員) 운강(雲崗) 원식(元植)이요 비(妣)는 진성이씨(眞城李氏) 우락(禹洛)의 따님이요 근인당의태(近仁堂宜泰)의 후(後)이다. 평생 존경받는 언행과 생활로 타에 귀감이 되셨다. 특히 금융계에서 삼십년 간 봉직하면서, 1988 년 2 월 제일은행 은행장으로 취임하여 많은 업적을 이루시어 제일은행의 도약 뿐 아니라 우리나라 금융계에 큰 업적을 남기셨다. 은행장 재임 중에는 꼿꼿한 자세로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항상 원칙을 중시하는 경영 철학을 고수하시었다. 1931년 11월 22일에 태어났고 1979년에는 대통령표창을 수상하였으며 200510월 9일에 세상을 뜨시고 묘역(墓域)은 포천 서능공원묘지에 장사(葬事)했다. 배(配)는 안동김정묵(安東金貞黙)이며 자호가 송하이고 1934년 9월 24일에 태어나 1989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우수상을 수상하였고 한국미술협회 및 서울시 초대작가이며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이고 사단법인 갈물서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2. 연안송씨 안동종친회 정관
1. 총 칙
제1조(명칭) 본 회의의 명칭은 연안송씨 안동종친회(이하 본회)라 칭한다.
제2조(목적) 본 회는 선조의 애국충절의 정신과 위대한 유업을 본받아 경조애 친과 상경하애의 미풍양속을 계승하고, 종친상호간 화목단결 강화하여 후손 들의 무궁한 발전을 기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3조(사업) 보책편찬사업, 공유재산의 이건, 보수 및 관리, 묘지의 관리보수, 경 조사시 상부상조 등 본회 발전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사업.
제4조(사무소) 본 회의 사무실은 안동시 풍산읍 안교리 수창약국내에 둔다.
2. 조 직
제5조(자격) 본 회의 자격은 연안송씨 승지공파 자손으로서 국내외 거주자를 포 함한 성인남자로 한다. 단 성인이 없는 가정과 출가한 여자는 준회원으로 한다.
제6조(권리) 회원은 누구나 본 정관이 정하는 규정에 따라 본회에 참여할 권리를 갖는다.
제7조(의무) 회원은 본회 사업의 목적달성을 위하여 최선의 봉사와 협조를 할 의무를 진다.
제8조(청년회) 본회 운영의 활성화를 위하여 본회산하 청년회를 둘 수 있고, 그 자격과 운영에 관한 규정은 별도 정한다.
제9조(임원) 본회에 다음의 임원을 둔다.
㉮ 회 장 1 명
㉯ 부회장 4 명이내
㉰ 이 사 20 명이내
㉱ 총무이사 1 명
㉲ 재무이사 1 명
㉳ 감 사 2 명
㉴ 청년회장 1 명
㉵ 고 문 약간명
제10조(임기 및 직무)
가. 임원의 임기는 2년으로 하되, 연임 할 수 있으며 2년이 경과 후는 차 기정기총회일까지로 한다.(보궐선출시에 한함.)
나. 회장은 회를 대표하고, 회무를 관장하며 회의시 의장이 된다.
다. 부회장은 회장을 보좌하며 회장 부재시 그 직무를 공동대행을 한다.
라. 총무는 본회의 사무일체를 전담한다.
마. 재무는 본회의 세입세출을 취급하며, 총무의 통보없이는 지출을 할 수 없으며, 긴급을 요할 시는 우선 집행하고, 총무에 연락하여야 한다.
사. 감사는 본회 업무전반에 대하여 년1회이상 감사를 하여 차기총회 또는 이사회(총회 미개최시)에 보고 하여야한다.
3. 회 의
제11조(회의) 본회에 정기총회와 임시총회및 임원회를 개최 할수있다.
가. 정기총회는 매년 4월중에 개최하되, 필요시는 격년제로 개최하고, 그 시기는 임원회에 위임하며 정기총회 미 개최 년도에는 임원회로 대신한 다.
나. 임시총회는 임원회의에서 요구가 있거나 회원 20명 이상의 요구가 있 으면 회장이 소집한다.
다. 임원회의는 총회의 의결에 의한 수임시항을 의결하고 집행한다.
제12조(의결사항) 총회는 다음사항을 의결한다.
가. 정관개정에 관한 사항
나. 임원 선임에 관한 사항
다. 예산및 결산에 관한 사항
라. 본회의 각종 사업에 계획에 관한 사항
마. 기타 필요한 사항
제13조(의결정족수) 총회및 임원회의 의결은 참석인원 과반수 이상 찬성으로
의결한다.
4. 재 정
제14조(예산) 본회의 재정은 문중전답 임대수입, 대지임대료 수입, 기증금품 및 기타 수입으로 충당하고, 수입금 전액을 금융기관에 예탁하고, 필요한 서 류를 비취한다.
제15조(목적외 사용금지) 본 회의 재산은 본회의 목적달성이외는 일체 사 용하지 못하고 임대행위도 못한다.
5. 부 칙
제1조 본 정관에 없는 사항은 관례에 따라 시행한다.
제2조 전북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구산서원 뒤에 시조님 단비가 건립되여 있으며 시제일은 음력 3월3일 정오에 거행하오니 꼭 참석하여야 한다.
제3조 본 정관은 창립총회의 인준을 얻어 서기 1987년10월30일부터 시행 한다.
1987년 10월 30일
연안송씨 안동종친회 발기인 일동대표
대표 송락창 송락용 송재열 송영조 송진열
송재상 송윤조 송보열 송재영
족보 간행 추진내역
2005년 11월 전주에서 열린 대종회 임원회의에서 전대종회장인 송갑종씨를 편찬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신임대종회장(당시 대종회 총무이사) 송재영씨를 총무로 지명하여 각 지역 파별로 편찬위원들이 지정되었습니다. 12월에 대구에서 족보수단을 위한 편찬위원회를 개최하여 수단방법과 수단비 및 보책대를 결정하여 현재 수단을 모으는 중인데 원래 3월말까지 수단을 정리하기로 하였으나 일부종친들은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일부 종인들의 미협조로 지연이 되어 5월말까지 수단을 종료하여 대종회에 제출하여 대구 대보사(大譜社)에서 작업을 하여 각 편찬위원들의 교정을 보아 편집하고 인쇄하여 년말까지 간행을 완료를 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단이 안된 종인들은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협조를 하여주시고 수단비와 보책대 이외에 특별히 찬조를 하여주신 종친들게 감사드리며 아래와 같이 수단비와 보책대 4월 7일까지의 출납현황을 알려드립니다.
수단비와 보책대 출납현황
구 분 |
수 단 비 |
보 책 대 |
찬 조 |
계 | |
관 |
동 | ||||
인원 및 질수 |
124명 |
236명 |
122질 |
790,000원 |
14,130,000원 |
금 액 |
2,480,000원 |
3,540,000원 |
7,320,000원 |
※ 현재까지 족보문헌 번역료(900,000원)을 포함하여 1,374,620원이
지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