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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友會 한국 아이거 북벽 원정대
('79 KOREA EIGER NORTH FACE EXPEDITION)
岳友會 회장 인사
1977년 9월 15일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는 마침내 세계의 정상 에베레스트 위에 섰다. 그리고 1979년 7월 25일에는
한국 아이거 북벽 원정대가 '마의 북벽 아이거'등반에 성공하였다. 이것은 한국의 60년 산악사에 있어서 가장 의미있
는 두 개의 사건이며, 한국 산악사에 길이 기록될 일이다.
나는 아이거 북벽 등반의 성공 소식을 국제 전화로 들은 벅찬 감격의 순간에 문득 한가지의 생각을 떠올렸다. 이것은
77년도 에베레스트 등반대의 성공 소식을 들었을 때도 떠올랐던 생각이다.
1963년 미국의 에베레스트 등반대장이었던 놀만 D. 다이렌 펄스씨가 내한했을 때의 일이다. 나는 그때 '로체 샬'의 원
정준비를 하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그의 내한을 무척 반기었다. 그의 조언을 듣기 위해, 나는 그를 만찬에 초대하였다.
이 자리에는 이효상, 홍종인, 이숭녕, 이기섭씨 등 산악계의 원로이신 여러분이 참석하셨다. 이효상씨는 당시 국회의장
이었고 나는 그의 비서관이었으며, 로체 샬 원정 준비를 하고 있던 경북산악연맹 회장이 이효상 의장이었으므로, 나는
내심으로 다이렌 펄스씨가 원정대의 출발에 대해 회의적이던 이효상 의장을 설득시켜 주리라는 기대가 컸었다. 만찬의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나는 다이렌 펄스씨에게 우리의 로체 샬 등반계획서와 사진, 지도 등을 펼쳐 보이며 조언을
부탁하였다. 그러자 그는 대뜸 물었다.
'당신네들이 올라본 최고봉은 어딥니까?'
'3,000미터급의 일본 알프스입니다'.
'국내 산의 최고봉은 얼마나 되오?'
'남한에는 1950미터 한라산이 있습니다.'
나의 대답에 그는,
'그럼, 아일랜드 피크(6,000미터급) 정도나 해보시지요. 로체 샬은 안됩니다.'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효상 의장은 그것보라는 듯
'암, 무리고 말고.'
하고 응수하셨다. 이리하여 우리의 로체 샬 등반계획은 무너지게 되었다.
나는 다이렌 펄스씨에게 미국의 산악사와 우리의 산악사에 대한 비교 등을 열심히 설명하면서 우리의 계획을 관철시켜
보려 했지만, 원정대 파견의 열쇠를 소유하고 계시는 이효상 의장의 생각을 돌이킬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일랜드 피크나 해보시지.'
그것도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그 냉소가, 그 뒤 15년을 흐른 지금까지도 내 가슴에 못이 되어 박혀 있는데, 오늘 우
리의 악우들은 히말라야로, 알프스로, 맥킨리로 큰 발자국을 찍고 있지 않느냐. 그 보고서를 모두 모아서 동양의 한 작
은나라의 빛나는 성과를 그에게 자랑하고 싶어졌다.
우리는 77년도의 에베레스트 등정이 이루어지고 난 뒤 한국 산악인의 능력이 기술적인 곤란함이 집약되고 연속된 알파
인 페이스에서 어떻게, 얼마만큼 발휘될 수 있을까에 대한 시도에 우리의 모든 정열을 기울이고 정성을 쏟을 것을 결심
하게 되었다. 우리의 정열과 열성을 다해 도전할 만한 알파인 페이스는 아이거 북벽이 가장 좋았다. 저 무서운 거대한
암벽과 빙벽에 도전해 보자고 결심한 지 21년여. 마침내 도전은 이루어졌던 것이다.
3개월간의 피눈물나는 훈련은 지난 4년간 서울 근교의 여러 암벽과 얼음폭포, 설악산의 여러 암벽과 빙벽을 경략한 이
후 있게된 최종적 마무리 작업이었다. 남산 기슭에 트레이닝 캠프를 마련하고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하였다.
훈련의 내용은 주로 지구력 및 심폐 기능을 기르는 것과 근력과 밸런스를 증대시키는 것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장기
간 계속되는 훈련도중 때로는 부식이 달릴 때도 있었고 긴장의 누적으로 훈련이 혹시 역효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주위사람들의 근심을 산 적도 있었다. 훈련의 한 과정으로서 북벽 등반에 가장 공헌한 것 중의 하나는 토론을 겸한
인도어 클라이밍이라고 볼 수 있다.
대원들은 하오 9시, 취침 한 시간전에 북벽의 사진 및 루트의 도해를 들여다보며 대원 각자가 구상한 나름대로의 완벽
한 등반을 위한 계획을 토의했다. 원정 대원중에 북벽에 오르지 않았던 사람들도 등반자 못지않게 북벽에 관한 세밀한
사항 하나 하나를 꿰뚫듯이 알고 있음에 대해서 원정대의 베이스 캠프를 찾아왔었던 어떤 우리나라의 산악인은 감탄을
금치 못했을 정도이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침내 북벽의 등반에 성공했다. 2년여의 계획과 3개월의 합숙훈련, 그 동안 전 회원의 힘을 모아
이루어진 등반의 성공이다. 등반에는 천사백여 만원의 경비가 소요되었다. 결코 모자라는 것은 아니지만 등반의 성공
을 위해서 꼭 조달되어야 하는 금액이다. 나 자신은 물론 등반대원 자신들이 얼마간씩의 회비를 마련하고 그 밖의 회원
들은 적은 금액이나마 갹출해서 촌지를 전할 때는 우정과 따뜻함으로 가슴이 꽉 차옴을 느꼈다. 우리는 전혀 누구로부
터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로지 우리의 힘만으로 북벽의 등반을 이룩했다.
이미 오륙년 전부터 한국의 클라이머들이 극소수이나마 서부알프스를 중심으로 알프스에 진출했었다. 그들 중에는 상
당한 업적을 남기고 애석하게 타계한 사람도 있으나 한국의 클라이밍을 등산의 본고장인 알프스에서 실험하고 뿌리 박
으려는 본격적인 시도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아이거 북격 원정대의 아이거 북벽 등반은 한국 초유의 쾌
거이며, 산악사적인 의미에서 한국의 암벽등반을 높고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키려고 진취적인 일보를 커다랗게 내디
딘 것이었다고 여러 사람들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보다 어렵고 심각한 과제를 해결하는
자세로 다시금 우리 자신을 채찍질하고 매진할 것이다.
끝으로 우리들이 아이거 북벽 등반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게 되기까지 여러가지 배려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여러
분들게 깊고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아울러 대한산악연맹과 서울시연맹의 뜨거운 성원에 감사드리고, 이 책이 나오
기까지 힘써 주신 삼일당 박도일 사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岳友會 회장 김기문
인수봉에서 아이거북벽 등반까지
'클라이머'라면 누구나가 한번쯤 오르고 싶어하는 산이 '아이거'북벽이다.
해발 3천9백7십m의 높이에 수직에 가까운 1천8백m. 등반거리 2천5백m의 등반코스를 지닌 이 벽은 자연의 어려움을
골고루 갖춘 산이기에 더욱더 '클라이머'들의 도전의 시험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아이거'북벽을 오르기 위
해 4년전부터 계획에 착수 점진적으로 국내산행에서부터 충실을 기했으며 '79년에 '아이거'정상에서 서자'라는 캐치프
레이스 밑에 회원전체가 뭉쳤다.
아이거 북벽에 도전키 위해선 우리가 평소에 하던 등반방식에서 탈피하여 지구력을 기르고 장기간 등반에 적응키 위한
등반위주로 산행을 했으며 6박7일에 해당하는 인수봉, 선인봉, 설악산 등지에서 연장등반으로 체력과 정신력을 키워나
갔다. 다시 말해서 행사위주의 산행보다는 성과 위주의 등반에 심혈을 기울였다. 악우회는 10년이 채 못되는 산력을 가
진 산악회이지만 회원들의 협동정신만큼은 극성스러울 정도였다.
이러한 마음가짐속에 우리의 계획을 하나 하나 구체화 해갔다. 79년 2월 한국암벽이라는 한국 암벽등급 책자 출판기념
식장에서부터 김기문 회장으로부터 '아이거' 북벽 등반계획을 발표함으로서 보다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아이거'북벽 원정훈련대원은 11명이 선발됐으며 4월부터 6월까지 3개월간 합숙훈련을 마치기까지는 개인시간을 통제
당하면서 성의껏 훈련에 참여했다. 3명을 제외하고는 8명은 직장을 가진 생활인으로 하오 9시까지 합숙소에 무조건 입
소하여 10시 취침 새벽 4시 기상하여 준비운동을 마치고 6㎞에 해당하는 거리를 20㎏의 륙색을 짊어진채 비지땀을 흘려
가며 로드웍하고 남산야외 음악당 축대 횡단등반, 어린이회관 제단 뛰어오르기, 남산팔각정 철봉 턱걸이 매달리기등 지
구력을 기르고 순발력을 양서아는 훈련에 치중했다. 그리고 주말이면 '비박'을 원칙으로 하는 산행을 계속해 나갔다.
이러한 강훈련속에서도 전대원은 불평없이 '아이거'북벽에 꼭 오르고야 말겠다는 불타는 집념으로 열심히 고된 훈련을
참고 견디어 나갔다. 서로를 위로하며 또는 격려하면서 일사불란한 팀웍을 구성해 나갔다.
오직 '아이거'를 오를 그날을 위해서 최종 훈련은 25㎏의 륙색을 짊어진채 서울, 춘천, 홍천에 걸친 3박 4일 강행군으로
정신력을 무장했다. 장기간에 걸친 훈련에 열중하다보니 대원들의 체력은 쇠잔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등반계획이 빠른 시간안에 이룩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본격적인 출발준비에 바
빴다. 장비 식량 수송 등반에 이르기까지 만전을 기하기 위해 불철주야 대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
여 계획을 완결시켰다. 우리가 수집한 자료와 현지 사정의 차이점을 어떻게 좁혀 나가야 하느냐에 문제가 생겼다.
현지에 가서 보충 정보수집을 하기로 하고 7월3일 김포공항을 뒤로하고 장도에 올랐다.
현지에 도착하여 보니 우린 예상했던대로 '아이거'북벽을 오르기전 이벽에 대한 기후 및 고도에 대한 심리적, 신체적인
적응훈련 시간이 필요했고 둘째 한국에서 수집한 자료와 상이한 차이점을 좁히기 위해 현지 산악인을 통해 '아이거'북벽
의 정보를 자세히 수집하기로 하고 이 두가지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초조하고 무료한 나날을 보내면서 이 두가지 계획
수행에 최선을 다했다.
미텔레기 능선등반을 해봄으로서 알프스 산의 규모 및 등반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고 스위스 산악인들의 기우에 찬
조언이 우리의 등반의욕을 자극했음에도 우린 이에 굴복하지 않고 '아이거'북벽을 오르기로 했다.
드디어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날로부터 12일만에 등반키로된 것도 조급히 서두름없이 계획대로 했기 때문에 우리등반
이 성공하게 된 것이다.
16일동안 맑은 날씨라곤 3일에 불가할 만치 이 곳의 일기는 연일 불순하여 마치 장마계절을 맞이한 듯한 기분속에 대원
들의 사기는 의기소침하기도 했다. '아이거'북벽의 등반이 어려운 조건의 하나로 나쁜 일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비만 내리면 '아이거'북벽 전면을 수백개의 폭포가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또한 안개마저 시야를 가려 뚜렷한 '아이거'
북벽을 정찰하기 조차 힘들어 더욱 곤란을 겪었다.
우렁찬 폭음을 동반한 낙석은 이방인의 심금을 울려주었고 이렇듯 생소한 모든 것들이 한국산행에서 겪어보지 못한 일
들을 닥치고 보니 우린 더욱더 세심한 계획 속에 오르고야 말겠다는 집념을 불태우고 있었다. 또한 시각에서 오는 오차
도 적응훈련기간을 통해 조금씩 수정되어 갔다.
국내에서 기본 식량 및 부식을 어느정도 준비해간 관계로 어려움은 없었으나 식수조차 정화기로 여과해 먹는 불편이
뒤따랐다. 등반이 강행되고 부터는 '트랜시버'를 통해 공격대원들의 행동이 거울을 보듯이 확인되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부터 오늘 불안은 감소될 수 있었다.
2명 이상의 대원을 공격조로 선발할려고 했으나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현격한 현지 사정 때문에 많은 대원이 장시간
등반해서는 안되며 단시간내에 소수 인원으로만 공격이 가능하다는 판단아래 2명의 대원을 선발 등반을 강행했던 것이
우리의 계획에 적중했다는 사실을 등반이 끝나고서야 느낄 수 있었다.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우린 '아이거'북벽에 대한 정보가 너무 미비했었기 때문에 등반 강행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
었다. 성급한 마음에서 등반을 강행했던들 실패의 확률이 많았을 것은 당연할뿐더러 장기간 체류로 인하여 체력의 소모
가 있어도 정신력으로 이를 극복하여 '아이거'북벽을 파악할 수 있었다는 문제도 등반 성공의 하나의 이유라 하겠다.
우리가 '아이거'북벽등반을 통해 느낀점은 한국적 등반방식이 알프스에 쉽게 적응되기 위해선 평소보다 적극적이고 체
계적인 훈련방법으로 등반에 임해야 할 것이며 우리들과 비교할 때 유럽 '클라이머'들과 체력에서 오는 차이점도 평소
기초 체력훈련으로 보강해야 할 것이다.
이번 '아이거'북벽 등반성공을 계기로 한국의 유능한 산악인들이 유럽 알프스나 '히말라야'에 보다 많이 진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등반대장 심의섭
개 요
원정기간: 1979. 7. 3 ∼ 8. 5
대 상: 아이거 북벽 (Eiger North Face·3970m)
경 로: 서울(공로) 도꾜(3박 4일)(공로) 츄리히(열차)베른(열차)인터라켄(열차)
그린덴발트(등산전차) 클라이네샤이데크
베이스캠프: 아이거 북벽 하단부(해발 1950m)
대 원: 대장 : 심의섭 (39)
기록 : 이훈태 (39)
회계 : 조윤희 (28)
장비 : 윤대표 (27)
식량 : 허 욱 (26)
의무 : 한윤근 (26)
1979년 여름은 한국 산악사에 최다등정의 해로 역사에 길이 남을 뜻깊은 해가 될 것이다. 세 번에 걸친 북미주 알라스
카의 맥킨리 등정과 유럽 알프스 3대북벽중 제일로 손꼽는 아이거 정상에 태극기를 날린 우리 산악인들의 해가 된 것
이다. 일찍이 스포츠 알피니즘의 역사가 꽃핀 유럽 알프스, 유명한 등산가들이 많이 탄생한 고장, 세계도처의 거봉에
오르려는 모든 산악인들이 그들 능력을 시험받았던 등산의 본고장, 특히 아이거는 유럽 알프스 중에서도 가장 힘들고
그나름대로의 특징을 지닌 암벽, 빙벽, 설벽, 폭포가 혼합되어 그들도 감히 두려움을 갖고 오르던 벽, 아이거만이 가진
빛나는 등반사가 말해주듯 등정자들의 삼분의 일이 희생된 거벽, 초등된지 40년이 지난 현재에도 아무도 감히 자신을
갖지 못하는 이 벽을 오르기 위하여 3년전부터 악우회에서는 꾸준한 훈련으로 준비하였고 모든 회원들이 큰 뜻을 위하
여 노력한 결과로서 오늘 이 자랑스러운 한국 산악인의 의지를 세계에 떨친 것이다.
한국의 암장이라고 해야 겨우 200∼300m에 불과한 우리의 처지로서 2500m의 대암벽에 오르겠다는 우리의 의지는 너무
미약하기에 지난 3년간을 피나는 노력으로 훈련을 쌓아왔고 특히 겨울이 짧은 우리의 기후로서는 빙벽과 설벽에 대한
훈련이 부족하였고 한국적인 식생활방식과 체질로서는 며칠이 걸리는 아이거 등반에서는 통할 수 없는 수 많은 난제들
이 우리 앞을 가로 막았지만 우리 산악인들만이 해낼 수 있는 인내와 끈기와 노력으로 모두를 극복할 것이다. 77 에베레
스트, 78 안나푸르나, 79 맥킨리 3회 등반 등 세계적인 거봉에 올랐던 한국 산악인들이었지만 테크니컬 클라이밍이 요구
되는 현대등반사조에 부응하기 위한 한국 산악인의 또다른 면을 세계에 펼쳐 보이려 할 것이다.
금년 2월 「한국의 암벽」이란 그레이드 책자를 발간한 우리의 목적과도 부합되는 이번 아이거 북벽의 등반은 한국 산
인의 테크니컬 클라이밍 수준을 세계 산악인과 어깨를 겨뤄보려한 것이다. 언제인가 누구라도 해야만 했던 것. 이제 우
리도 더 높은 곳을, 더 넓은 곳을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거 북벽 등반사
아이거 북벽의 초등반은 1938년 7월 21일에서 24일에 걸친 4일 동안에 이루어졌고 지금으로부터 무려 41년전의 일이
었다. 그러나 아이거북벽 등반의 영광과 고난의 과정은 1세대가 넘은 지금에도 쉽사리 잊혀지지 않을 뿐 아니라 보다
어려운 것을 추구하려는 클라이머들에게는 아직도 놀라움의 대상으로서 언제나 신선한 모습을 늠름하게 드러내어 보이
고 있는 것이다. 북벽의 등반에 얽히고 섥힌 비화는 이루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으며, 북벽을 오른 클라이머의 이름조차
헤아릴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북벽의 등반사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착란일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북벽
을 오르려는 우리나라의 클라이머들에게 다소간의 보탬이라도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펼쳐보는 작은 노력에 불과하다
고 하겠다.
1. 전전의 등반
아이거 북벽의 초등반 루트인 오리지날 루트는 마치 오목거울처럼 생긴 북벽의 가장 자연스러운 선을 따른 가장 완벽한
빅월 클라이밍이다. 북벽 초등반의 영광은 초등반 당사자인 헤크마이르, 훼르크, 카스파레크, 하러 등은 물론 그 이전에
북벽을 등반하려다 사라져간 클라이머들에게도 골고루 나뉘어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이거 북벽의 루트화인딩이야
말로 당시까지는 사상 최고의 루트화인딩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1m, 1m를 자신의 생명과 바꾸어 가며 루트가 올바름
을 확인했던 것이다.
각설하고, 1937년 8월 22일에서 25일 사이에 막스 세들마이어와 칼 메링거는 지금도 가장 이상적인 직등루트가 된다는
선을 따라, '죽음의 비브액'까지 올랐으나 얼어죽고 말았다. 그들이 택한 루트는 우묵한 북벽의 한가운데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제1직벽을 우회하지 않음으로써 극심한 체력소모와 피로의 누적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을 것으로 생각되
고 있다. 이 루트는 당시의 클라이머들에게 불가능하다는 인상을 깊게 했으므로 오리지날 루트의 등반은 제1직벽의 오
른쪽 모서리에서 출발점을 택하게 되었다.
1936년 여름, 힌토슈테이셔, 쿠르츠, 앙거러, 라이너 등 4인은 훼르크와 레비쉬가 '힌토슈테이셔 퀘르강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트레버스를 역으로 되짚어 넘어갈 수 없음을 알았고 한사람, 한사람 폭풍과 추위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1937년
8월 루드빅 훼르크와 마티아스 레비쉬는 '힌토슈테이셔 트레버스'에 자일을 고정시키고 '죽음의 비브액'까지 갔다가 무
사히 돌아왔다. 이 사건은 초등반을 계획하는 클라이머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는 것이 되었다. 1938년 7월 21일에서
24일에 걸쳐 마침내 북벽의 등반이 이루어졌다.
이 등반은 새로운 세계로의 이정표이며, 새로운 등반의 전형이 되었다. 전후에 있게 될 모든 등반의 개념적 토대를 마련
해 주는 등반이었던 것이다.
2. 전후의 등반
전후에는 수많은 클라이머들이 북벽을 올랐으며, 북벽은 이제 보다 큰 대상을 공략하기 위한 수습과정으로 전략되는 듯
이 생각되기도 했으나 북벽은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여러 가지의 문제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강력하기 이를데없는
클라이머들로 구성된 등반대가 북벽의 직등을 위해 몰려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이거북벽 직등의 시발점은 1961년 3월에 있었던 북벽의 독일 초등반에 의한 자극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당시
27세의 토니 킨쇼퍼를 리더로 토니 히벨러, 안데를 만하르트, 발터 알름버거등을 대원으로 하는 독일대가 1961년 3월
6일에서 12일 사이에 얼음으로 뒤덮인 북벽의 오리지날 루트를 겨울에는 처음으로 올랐던 것이다. 그들은 9일분 식량
으로 1인당 단지 2.5㎏의 식량만을 지참했을 뿐이었다. 등반의 성공은 세심한 준비와 훌륭한 날씨 덕분이었다. 이와 더
불어 등반의 성공에는 완벽하게 컨디션을 조정하고 경험을 쌓은 등반대가 필수의 조건임은 두말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 등반에 대해서 구태여 비난할 점을 꼬집는다면 이들이 처음에 '갱도창구'에까지 도달하자 황천이 되어 모든 장비를
놓아두고 내려갔다가 호텔에서 닷새간 휴식을 취하고 다시 등반을 시작했다는 사실뿐일 것이다. 이 등반은 동계등반의
발전에 상당한 중대성을 부여한다.
이 등반으로 인해 겨울등반의 불명확한 한계가 보다 명백해지므로써 심리적인 장벽이 한층 낮아지게 된 것이다.
초등반이후 28년동안 유럽의 클라이머들은 유럽에서도 가장 큰 빅월 클라이밍의 대상지인 아이거 북벽에서 자신들을
실험해 보기 위해 수많은 등반을 해왔다. 이제는 북벽에도 직등루트가 필히 있어야만 했다. 직등은 1966년 겨울에 계획
되었다. 겨울에는 동결로 낙석이 적었으며 좋은 날씨가 장기간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영미합동대와 대규모의 독일대가 1966년 2월 제각기 북벽에 모여 들었다. 영미합동대를 이끄는 죤 할린은 한번 붙어서
다시는 내려오지 않고 보급을 받거나 내려가서 휴식을 취함이 없이 계속해서 직등루트를 끝내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패터하아크가 이끄는 독일대는 처음부터 시지택틱스를 취하려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실제로 등반이 시작되
자 양팀은 모두 전통적인 시지택틱스를 등반방식으로 택해서 계속 고정자일을 치고 오르게끔 되었다.
마치 어려운 히말라야 등반처럼 식량과 장비가 고정자일을 통해 운반되고 클라이머는 내려와서 북벽밑의 호텔에서 휴식
을 취했다. 겨울의 강풍에 휘말리게 되자, 두팀은 마침내 한데 뭉쳤다.
죤 할린이 푸르직킹을 하다가 자일의 절단으로 추락사한 것도 등반대가 한데 뭉친 직후의 일이었다. 이후 한달간의 노력
끝에 외르크 레네, 귄터 스트로벨, 시기 훕파이어, 롤란드 보텔러 등의 독일대원과 드갈 하스튼이 레이튼 코어, 크리스
보닝턴, 단 윌런스, 믹 버크, 귄터 슈나이트, 칼 골리코프, 롤프 로젠조프 등의 지원을 받으면서 마침내 정상에 도달했다.
직등은 당시로서는 북벽의 가장 가파른 바위와 얼음과 악천후에 대한 끔찍한 투쟁으로서 인정되었다. 고정자일을 사용
했으며 수많은 피톤을 사용했고 확보를 위해 볼트도 사용했다. 게다가 한사람이 목숨을 잃었으며 많은 대원이 손가락과
발가락에 심한 동상을 입었다. 이러한 것들로 고정자일을 사용하는 방식의 타당성이 주장될 수 있겠는가? 많은 클라이
머들은, 구태여 하스튼의 견해를 빌리지 않더라도, 감히 해보려고 하지도 않던 사람들이 이제는 비판을 퍼붓기 위해 웅
크리고 있던 구멍에서 기어나와 떠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비판은 과연 질시인가, 아니면 불안감인가? 하나의 루트가 완성되면 일단 그것은 돌이켜질 수 없는 것이다. 그것
은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이며 그 루트의 하나 하나의 비밀은 기록으로 알려질 것이다. 등반의 스타일이 좋던 나쁘던 다
음번 오르는 클라이머는 먼저보다 덜 모험을 하게 될 것이다. 아이거의 직등은 경쟁으로 시작하여 화합으로 끝마쳤다.
바로 여기에 이 등반의 참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오리지날 루트와 직등 루트가 벽의 중앙과 오른쪽에 치우친 반면 북동벽의 한스 라우퍼 푸트 근처에서 몇 개의 등반이
이루어졌다. 할린 루트와 라우퍼 루트 사이에는 1968년에 두 개의 루트가 만들어졌다. 1968년 7월 28∼31일간에 폴란
드의 K 키엘키, T 라우카이티스, R 자피르스키, A 지작 등이 새로운 루트를 개척했다. 이 루트는 북(北) 필라의 오른쪽
을 트레버스하며 올라가 정상에서 500m 아래쯤에서 라우퍼 루트와 합류한다. 비교적 낙석의 위험이 적다. 등급은 Ⅳ∼
Ⅴ급 정도이다. 7월 31일과 8월 1일에는 독일대가 라우퍼 루트보다 더욱 근접되게 北필라의 가장자리를 따라 오른 루트
가 있다. 독일대의 대원은 라인홀트 메스너, 귄터 메스너, 토니 히벨러와 F 마슈케였다.
1969년 여름 굳은 결의를 품고 일본대가 아이거 북벽에 쇄도했다. 그리고는 직등을 완료했는데 루트는 중심에서 약간
바른쪽으로 벗어난 것으로 매우 가파른 부분을 취하므로써 낙석의 위험을 회피하려고 했다. 그들은 4주일이 넘는 동안
에 거의 일톤의 장비를 사용했다. 실제로 벽에 붙었던 시간은 모두 16일이었고 250개의 볼트와 200개의 하켄, 2,400m
의 고정자일 등으로 무장했었는데 등반시 사용한 장비의 대부분은 북벽에 그대로 남겨두고 있다.
1970년에는 北필라를 직등하려는 시도가 성공을 거두었다. 몇 주간에 걸친 일련의 시도로써 아이언 멕키처런, 버그스
멕케이드, 케니 스펜스 등이 北필라 2,000m를 곧바로 올랐다. 그들은 폭설과 변덕스러운 날씨로 커다란 장애를 받았다.
그들은 세 번째 필라까지의 등반에서 반쯤 고정자일을 설치했다. 이 세 번째 필라에서 눈과 얼음의 루트를 1,200m 오르
면 다음에는 가우퍼 루트로 정상에 오른다. 하단부 암벽에서 중요한 어려운 부분은 어려운 인공등반 핏치와 자유등반과
인공등반이 혼합된 핏치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에는 1978년에 체코대가 할린 루트의 왼쪽으로 등반해서 상부에 가서는 라우퍼 루트와 만나는 새로운 루트를 개척
하였고가장 이상적 직등루트라고 알려진 세들마이어-메링거 루트를 역시 1978년에 체코대가 끝까지 연결시키려고 애
썼지만 상부 암벽에서의 조난으로 끝났다. 새로운 루트의 출현은 거의 없었으나 기존의 직등루트를 재차 등반하려는 시
도와 오리지날 루트를 되풀이하여 등반하려는 클라이머들이 계속 줄을 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예상된다.
3. 1970년대의 북벽등반
1969년 겨울, 한스 뮐러를 비롯한 5인은 일본대의 직등루트 제2등을 기록했다. 그들은 20일에 걸쳐 시지 클라이밍을 했
는데 제2설전까지만 고정자일을 설치했다. 그러나 다음해 한스 뮐러는 한스 버거와 함께 북벽에 되돌아와 7월 28일에서
30일에 걸친 3일만에 제3등을 완료했다. 물론 지난 겨울 남겨둔 고정자일을 사용했지만 스피드는 놀라운 것이었다.
1969년에는 다섯명으로 구성된 일본대가 1톤반의 장비와 2,000m의 고정자일을 사용하여 6주간에 걸쳐 할린루트 제2등
을 기록했다. 최근에는 프랑스 육군등산학교의 장 클로드 마르미에 대장이 이끄는 8명으로 구성된 등반대가 3,000m의
자일과 500개의 피톤, 아이스피톤 100개, 카라비너 300개, 8인의 25일치식량을 가지고 1979년 2월 23일에서 3월 11일
까지 할린루트를 성공적으로 등반했다. 이를 비롯하여 북벽의 각 직등루트에 대규모의 시지 클라이밍이 계속되고 있다.
북벽에서의 단독등반 역시 뚜렷하고 독자적인 경향을 가지고 이루어진 적은 없다고 보겠으나 최근에는 단독등반의 개념
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대두로 말미암아 상당한 진보를 보이고 있다.
북벽의 단독등반을 1963년에 오리지날 루트를 미쉘 다르벨레가 오른 것이 처음이다. 이 등반은 보나티가 아이거 북벽
에서 패퇴하고난 다음날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북벽에서의 단독등반은 점점 일반화 되어가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1970년대의 북벽 단독등반은 모두 동계의 오리지날 루트에서 이루어졌다. 동계의 오리지날 루트 단독등반은
1978년 3월 일본의 알파인가이드 협회소속 하세가와 쯔네오가 3월 3일에서 9일까지 7일간에 걸쳐 처음으로 이룩한 업
적이다. 하세가와가 출발한지 3일 뒤인 3월 6일에는 그랑죠라스 북벽의 센트랄 버트레스 동기 단독초등을 마치고 바로
이 곳으로 온 이태리 태생의 제랄디니가 등반을 시작하였다. 그는 3월 12일에 등정을 완료하고 서벽을 내려왔다.
지금까지 고찰한 바에 의하면 아이거북벽의 등반은 1970년대에 들어와 크게 3가지의 유형에 따라 등반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의 유형은 직등루트를 새로이 만들거나 기존의 직등루트에서 대규모의 시지 클라이밍을 실시
하는 등반이다. 이것은 근래 히말라야 고산지역에서의 벽등반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을 거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둘째, 오리지날 루트 및 北필라 근처의 루트에서 전격적인 스피드로 등반하는 유형이 있다. 이러한 유형은 히말라야의
준자이언트급(7,500m급) 봉우리를 알파인 스타일로 등반하는데서 반영되는 것이다.
셋째의 유형은 단독등반이다. 어떠한 방식의 등반이던지 그 등반의 동기라는 것은 단순히 밝혀지기 힘든 것이며 심리학
적인 분석마저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단독등반은 가장 명확한 몇 개의 동기가 있다. '습관적으로
혼자서 등반하는 클라이머는 무모하다고 여기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보다 더 진실과 유리된 생각은 없다.
단독등반가가 안전하지 않은 경우 그는 죽기가 쉽기 때문에 그런 말들을 하는 것 같다.'라고 탐 페티는 말한다. 실제로
단독등반이나 파티등반이나 안전하지 않은 경우에 조우하는 것은 거의 같음을 알 수 있다. 단독등반의 동기는 지극히
이기적인데서 출발하여 정적과 고요를 즐기려는 본능과 자유를 갈구하는 본능과 더불어 보다 고차원적인 것으로 승화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북벽에서의 단독등반은, 지금은 특정 인물에 의해서만 히말라야의 단독등반이 실행되고 있지만, 미래의 등반양식의 투
영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아이거 북벽에서 다양하게 전개되는 등반이 등산가만이 도달할 수 있는 오지 및 극지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겠는
가?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의문일 것이다. 그러한 오지 및 극지의 등반도 아이거 북벽의 등반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 지도
적인 역할을 하는 클라이머들의 견해이다. 크리스보닝턴은 이렇게 말한다. '아이거 북벽은 알피글렌과 클라이네 샤이덱
크에 있는, 쉽사리 출입할 수 있고 거대한 강당에 일등석을 완비한, 위대한 멜러드라마를 연출하기 위한 완벽한 무대이
다.
후리츠 폰알멘이 경영하는 클라이네 샤이데크 호텔의 옥상에는 로얄박스가 마련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고성능 망원렌즈
를 통해 아이거 북벽이 희생시키는 클라이머의 비통한 죽음을 지켜본다. 오늘날 통신위성과 텔레비젼을 통해 전세계가
비통스런 연극의 진행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아이거 북벽이 그토록 많은 클라이머를 끌어들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이거 북벽은 유럽에서 가장 큰 암벽이며 극상의 도전거리를 제공해 준다. 이러한 극상의 도전거리야말로 최상의 클라
이머들이 항상 눈이 벌겋게 되어 찾는 것이 아닌가!
아이거 북벽 등반의 참뜻
첫째:
한국 등반사 반세기 만에 최초로 이루어진 아이거 북벽의 등반이다. 세계 각국의 우수한 클라이머들이 그들의 능력을
시험하고 평가받았던 아이거 북벽의 등반을 우리 젊은 산악인들은 항상 동경해 왔고 또한 한국 산악계의 무궁한 발전
과정상의 한 과제로서 언제이건 해결해야 할 문제로서 남아 있었던 아이거 북벽의 등반이었다. 이제 우리도 북벽을 마
침내 완등하므로써 한국 산악인들의 실력을 해외에 널리 알리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우리
도 세계 산악인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보다 높고 새롭게 어려운 세계를 개척하는 발걸음을 새롭게 내딛을 수 있
게 된 것이다.
둘째:
우리로서는 현재까지의 수준으로 볼 때 최고, 최난의 벽반을 이룩한 것이다. 현대의 극소수의 최우수 등반가들이 추구
하는 목표 및 등반방식에 견주어 볼 때 우리의 북벽 등정이 커다란 경이적인 성과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우리와 같은
짧은 등반사와 불리한 조건속에서 북벽 등반이 이룩되었다는 사실은 세계 산악사에서 그 예를 찾기 힘들 것이다. 암벽
의 고차가 200∼300m 정도가 고작인 국내의 여건속에서는 감히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이 엄청난 암벽을 미약하기 이를데
없는 단위 산악회가 체력과 기술 및 경제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끝내 올랐다는데 큰 의의가 있을 것이라고는 믿는다.
1,800m의 대암벽에서 생과 사의 순간을 시시각각으로 엇갈리며, 폭풍과 뇌성번개가 몰아치는 가운데 끊임없이 쏟아지
는 낙석을 피하고 만년설이 녹아서 흐르게 된 폭포의 얼음물을 거슬러 오르며 번들거리는 빙벽과 부서져서 떨어지는 수
직벽에서 추위와 공포, 허기를 인내와 끈기로 버티며 고독한 오름의 길을 말없이 올랐던 것이다.
3박 4일에 걸쳐서 연속적으로 2,500m를 등반해야 했으며 최고의 등반기술이 요구되는 암벽, 빙벽, 설벽과 고독감에서
오는 공포의 벽을 넘어서서 등반을 이룩함으로써 우리가 지닌 문제점들을 발견하는 동시에 문제를 해결할 구체적인 방
도를 절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고 더 높고 새롭게 험난한 세계를 개척하기 위한 자신감을 우리들 마음속에 키울 수 있었
다.
셋째:
한국의 알피니즘 운동도 북벽 등반을 계기로 마침내 전환기에 들어서고 대암벽 등반의 개화기에 들어선 것이다. 우리는
다행히도 역사적인 등반을 우리의 손으로 이룩하게 된 것을 커다란 행운으로 생각하며 알프스에서의 벽등반이 줄곧 여
러 산악인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더 나아가서 히말라야 거봉의 벽등반도
온 산악인이 힘을 합쳐 시도한다면 선진 산악국의 수퍼 클라이머들이 이룩한 쾌거에 못지 않은 훌륭한 등반을 이룩해
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하나님의 신앙처럼 우리의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
기후 및 바위의 생김새
암질:
거무스름한 암회색의 석회암질로서 밑으로 흐른 경사면의 계단식 역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물이 흘러도 기후의 변화
가 심하여 이끼가 끼지 못한다. 스탠스는 역시 밑으로 흐른 경사면으로 되어 있으며 미세한 스탠스는 넓이 3mm단층 두
께 4mm 정도의 계단식 역층들이 몇십미터씩 벽을 이룬 곳도 있다. 하단부에는 작은 낙석들이 쌓여있어 수평으로된 스
탠스들이 많으며 언더홀드로 사용될 수 있다.
설질:
기온이 낮은 새벽이나 이른아침에는 완전 크러스트가 되어 아이젠의 앞발톱 정도만 들어가나 기온이 올라가는 정오경
부터는 눈이 녹아 겉면은 푸석푸석 녹아 있지만, 속은 계속 크러스트된 상태이므로 픽켈로 찍으면 2인치 정도가 들어
간다. 설사면에는 낙석이 떨어져서 군데군데 박혀 있기도 하다.
빙질:
기온이 낮은 새벽에는 매우 단단하지만 얼음 위에 덮인 눈이 얼어 붙어서 얇게 덮여 있으므로 등반하는데 주의
가 필요하다. 기온이 올라가는 정오경부터는 좀 녹아서 후론트 포인팅하는데 적당하다.
고소순응:
4,000m이하 지역이지만, 평상시 높은 고지대에서의 습관이 되어 있지 않고, 전혀 생소한 3,000m 이상의 지역에서 심한
기온 변화로 인하여 한 핏치를 등반하는데 2∼3번씩 쉬면서 심호흡을 해야만 한다.
기후, 기온, 일기상황
아이거북벽 바로 밑 초원지대에 B.C를 설치, 햇볕이 날 때는 웃옷을 벗어도 더울정도지만 아침 저녁은 쌀쌀해서 우모복
이나 털스웨터를 입어야 한다. 날씨가 나쁜날은 하루에도 몇번씩 폭우가 쏟아졌다 개였다 하며, 안개가 수시로 끼며 아
이거 상단부는 개인날 보다 가스가 끼어있는 날이 더 많다. 지면으로부터 1,800m의 수직벽으로 이루어진 특수지형이므
로, 상단부는 맑게 개여 있어도 하단부는 가스로 덮여 있을 때가 많다. 폭우가 쏟아진 직후 북벽을 바라보면 온통 북벽
전면이 크고, 작은 폭포의 벽으로 돌변한다. 만일 등반중 폭우가 쏟아진다면 폭포로 인하여 등반에 극히 곤란을 받을 것
이다. 등반중의 일기변화는 전혀 예측할 수 없으며 하절기 등반중에도 동상이 걸릴 정도로 기온이 내려 간다. 등반자는
완전한 동계장비를 휴대하여야만 한다.
먼저 익히고 나중에 오르자
아이거 북벽을 오르기 위해 우리는 현지 등산 안내인에게 기후와 코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 사람들의 말은 우리나
라(한국)의 산이 너무 낮고, 또 석회암 바위질에서는 생소할 것이니 처음부터 북벽에 매달리지말고 쉬운 곳 몇 곳을 가
보면서 아이거의 바위질과 기후 그리고 클라이밍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거 서
측능선과 미텔레기 능선을 종주하기로 했다.
7月 12日
12時 윤대표 허욱 두 대원은 서측릿지를 오르기 위해 Base camp를 출발하여 2時間만에 바위 밑에 도달할 수 있었다.
거리와 높이를 측정할 수 있는 나무와 계곡 및 능선이 뚜렷하지 않아 출발 당시 30分정도면 올라가리라 생각했던 길이
2시간이나 걸린 것이다.
우리가 올라갈 바위코스는 일반 등산객들도 올라갈 수 있게 사다리와 휙스자일이 몇 군데 설치되어 있었으나, 생소한
바위와 빠져 나오는 홀드로 가끔 당황했었다. 클라이밍 방법은 옆으로 당기고 언더홀드를 주로 이용하여야만 했다.
신발이 투박하여 크레타슈즈를 신고 인수봉을 오를 때처럼 몸이 자유롭지 못하다. 300m를 3시간에 올라 아이거 글레처
역이 보이는 능선상(2,800m, 6:00)에서 비박을 하기로 했다. 폭포에서 물을 받아 α-미를 끓이는데, 갑자기 번개가 치기
시작한다.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것같다. 장비와 쇠붙이를 몰아 멀찌감치 갔다 놓는다. 이젠 천둥, 번개, 비가 와도 걱정이 없다.
우리는 고어텍스 슬리핑백 카바를 갖고 있으니까, 저녁을 먹고 9:00 잠자리에 든다. 천둥번개는 계속이다.
어제와 오늘의 경험이 내일에 도움을 줄 것이다
7月 13日
5:00 아침에 일어나니 비는 그치고 안개가 짙게 끼어 있다. 오늘은 서측능선을 올라 정상을 돌아올 계획이다.
6時 비박장소를 뒤로하고 정상을 향해 오른다. 이 길은 북벽을 올랐다 하산할 길이다. 꼭 알아둬야 할 길이다. 45°
정도의 낙석이 쌓인 지대를 계속오른다. 12時 시계가 전혀 없어 10m앞이 안보인다.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며 비스켓,
육포, 오렌지쥬스, 쵸코렛 으로 중식을 한다. 상태는 더욱 나빠지고 우리는 하산을 결정할 수 밖에 없었다.
가이드책에서 보면 4時간 정도면 오를 수 있는 길인데, 우린 6시간을 올라오고서도 ⅔지점인 쎈츄럴픽크 바로 밑에 와
있으니 우리의 능력에 회의가 생긴다. 물론 안개가 많이 끼고, 초행길이고, 바위에도 익숙하지 못하니 그럴 수 밖에 2時
쎈츄럴픽크 바로 밑에서 하산한다. 어제와 오늘의 경험이 북벽등반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6시 아이거 글레쳐에 오니
마중나온 대원들이 우리를 반긴다.
어제와 오늘의 등반결과 많은 것을 익혔다. 가이드북에 표시된 시간, 거리와 실제의 행동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으나 일
기가 매우 나빳고 초행길에다 체력면에서도 약함을 느꼈다. 아이거 등반을 위해서는 절대적인 완전방수 복장이 필요하
기에 추후 구입하기로 하였다.
경험을 살려 미텔레기 능선으로…
7月 15日
먼저번 서측능선을 오른 경험으로 대원 6명은 미텔레기 능선을 오르기로 했다. 8시 등
산전차를 타고 알피글렌역을 출발하여 클라이데 샤이넥에 도착 여기서 전차를 갈아타고
융프라우 욧호까지 올라간다. 기차는 아이거 중심부를 뚫은 터널 속으로 횡단하여 남벽
쪽으로 잠깐 나왔다. 다시 뮌혜봉 속 터널을 통과하여 융프라우 욧호에 오른다.
남서쪽으로 웅자를 자랑하는 융프라우를 구경하고 미텔레기 산장으로 가기 위해 아이거
남벽중앙부의 아이스메어로 가는 전차를 탔으나 아이스메어에는 전차가 서질 않는다.
올라갈 때만 내릴 수 있는 곳이다.
클라이데 샤이덱에 돌아와서 안통하는 말로 손짓 발짓을 섞어서 우리의 계획을 얘기하니
역장이 다시 타라는 손짓을 한다. 다음 전차를 갈아타고 아이스메어에서 하차한다.
역원의 안내로 지하동굴을 통하여 터널밖으로 나왔다. 앞에 펼쳐지는 설원이 아름답다. 멀리 빙하가 보이고 빙하 위로
떨어지는 눈사태가 규칙적으로 보인다. 터널밖에 나오니 바로 아래 20m의 낭떠러지다. 안자일렌을 하고서 설원에 내려
선다. 여기서 미텔레기산장 동쪽으로 아이거 남벽설원을 통과하여 3시간. 현재시간 2시. 빨리 서둘러야 한다.
눈이 부시다. 미텔레기능에서 눈사태와 낙석이 간간히 쏟아진다. 6명은 2개조로 나뉘어 100m 간격을 두고 행동한다.
빙탑과 크레바스가 간간히 우리를 맞는다. 빙탑과 크레바스를 피해 설원을 올라가니 미텔레기 산장이다.
미텔레기 산장은 무인산장으로 그안의 시설을 보니 유인산장이나 다름없게 모든 것이 다 정돈되고 준비되어 있었다.
10명정도 잘 수 있는 모포와 매트리스, 식탁과 베치카. 먹을 수 있는 빵, 치즈, 햄, 설탕, 커피등이 베치카에는 장작이,
천장에 매달린 석유등에는 석유가 가득 들어있고 구조를 요할시 필요한 구조용구가 천장에 매달려 있었고 변소에는 휴
지가 찬장에는 그릇들이 나란히 정렬되어 있어 불편함을 모르겠다.
출발부터 눈, 얼음,
바위의 절벽
책상위에는 방명록이 있어 기록을 보니 1년에 약 100명정도가 미텔레기 산장에서 묵어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무인
산장의 숙박비 해결을 위해 책상 위에 걸려 있는 봉투에 1인당 10프랑(한화 2500)이란 글과 함께 방과 나무를 사용했을
경우의 사용비도 적혀 있어 누구나 사용을 하고 사용비를 지불할 수 있게 되어 있고 돈이 없는 사람일 경우 하산해서 지
급할 수 있게 편지봉투도 준비되어 있었다. 깨끗한 산장환경과 그것을 사용 관리하는 사람들의 세심함을 알 수 있었으
며, 산악국가에서 모범적인 산장관리를 배울 수 있었다. 또 미텔레기능선을 초등반한 일본의 마께유꼬사진과 함께 쓰던
장비를 전시해 놓아서 초등당시의 어려움을 알 수 있었다.
7:00 α-미로 저녁을 먹고 베치카를 피워 눈 속에서 젖은 양말과 신발을 말린다. 연기가 산장안을 가스실로 만들어 불을
끄고 10:00 잠을 청한다.
7月 16日
5:00 기상 하늘은 맑고 구름 한점없다.
6시 출발을 서두른다. 가이드 책에서는 6시간 정도면 오를 것이라 했으나 먼저번에 경험으로 보아 10시간 이상 걸릴 것
이다. 등반의 안전과 성공을 위해 2개조로 나눈다. 1개조는 어제 온 길을 되돌아 아이스메어로 돌아가고 윤대표 허욱 두
대원이 미텔레기능을 통해 정상으로 가기 위해 길을 떠난다. 출발부터 눈과 얼음 바위가 섞여있어 발이 매우 조심스럽
다. 9시 계속 올라가도 정상은 보이지 않는다. 안개가 북벽쪽에서 몰려온다.
이 곳은 등산객들의 안전을 위해서 위험한 곳 200m정도는 50㎜정도의 Seil로 윅스되어 있으나 발이 익숙치 않고 너무
가파른 Knif 능선이기 때문에 정신을 바싹 차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북벽 밑으로 사라질 것이다.
'가자' 가야만 살 수 있다
계속 전진이다. 발아래 아이스메어로 향하는 대원들의 행렬이 점으로 보인다. 가스가 시야를 가린다. 12時 중식을 마치
고 계속 올라간다. 능선이 상당히 길고 가파르다. 4時 날씨의 악화로 전진을 할 수가 없다. 앞에 보이는 설원 너머에 정상
이 있을 것이다. 내일은 개이겠지. 설동을 파고 잠을 청한다.
7月 17日
5시 계속 비가 내린다. 어제보다 더욱 악화된 날씨다. '기다려보자'.
7시 기상은 더욱 악화다. 몸이 젖어 들어온다. '가자' 가야만 살 수가 있다.
여기는 정상부근 해발 3800m 정도다. 올라온 길을 생각해 볼 때, Back은 전혀 불가능이다. 9時 정상에 도착 기념촬영을
한다. 바람으로 인해 기온이 내려간다. 카라비나 픽켈 머리카락에 고드름이 맺힌다. 머리전체가 얼음이다. 10시에 내려
가는 길을 잘못 택했다. 뮌혜봉 쪽으로 200m 가량 가다. 나침반을 본다. 서쪽으로 가야 하는데, 우리 방향은 남쪽이다.
우측으로 60도 경사의 트레버스를 한다. 눈이 굳어 이제는 얼음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서측능선상
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이제 무조건 내려가면 되는 것이다. 선등자들의 흔적이 보인다. 하산객을 위해서 하강용 고정
Piton이 박혀 있다. 20m를 3번 하강하고 설사면을 내려온다. 쎈츄럴픽크를 좌측으로 돌아 내려오니 설사면이 끝나고
암부가 노출된다.
12時 여기서부터는 초행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눈에 익숙한 길을 걸을 것이다. 안개가 걷히고 저아래 아이거 글레쳐역
이 보인다. Tent로 가자 대원들이 우리를 반겨줄 것이다.
한국 최초로 작성한 아이거 북벽의 그레이드
아이거 북벽에 대한 그레이드는 악우회 등반조가 실제경험을 토대로 하여 작성한 것이다. 표시된 등급은 자연조건(비,
눈, 안개, 기본 날씨, 낙석등)의 변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바위의 상태나 눈과 얼음이 붕괴되거나 사태가 나지 않는
정상적인 상태로 보아 TDmf 때의 그레이드를 말하며, 체력면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상적인 컨디션을 유지했
을 때와 또한 짐을 휴대하지 않은 상태로서의 그레이드를 말한다.
그러나 실제등반에 있어서는 자연조건의 변화를 예상해야 되고, 하절기 등반시 최소한 2박3일 내지 3박4일의 장비와
식량, 등반장비 등을 휴대하므로서 오는 중량감과의(20∼30㎏) 어려움과, 3일 내지 4일에 걸친 계속적인 등반행동에서
오는 체력소모나, 비박 밖에 할 수 없는 암장에서의 매달려 잠자기에서 오는 피로감 등, 어려운 문제점이 많게 되므로
실제등반에 있어서는 보고서에 표시된 등급보다 훨씬 더 어렵게 높은 등급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된다.
고정자일이 설치되어 있는 8곳의 핏치에 대한 등급은, 고정자일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평가된 것이다. 위에서
말한 고정자일이란 스위스 산악회나 기관에서 설치한 것이 아니고 다만 선등자들이 설치한 후 방치된 상태이므로 오랜
동안 자연에 노출된 상태로서 심한 기온차에서 오는 노후감, 바람에 날려 바위 모서리에 긁혀 손상된 부분이나 낙석에
의한 부분절단등 안전도에 대해서는 전혀 믿을 수 없으므로 가급적 사용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등반 첫째날
이 길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7月 21日
12時30分 Base camp를 출발
어제의 첫 번째 공격 중 제1직벽에서의 폭우로 밤새 비를 맞어 장비와 의복이 모두 젖어 퇴각했었다. 출발에 앞서 대장과
대원들의 격려를 받으며, 굳은 악수와 함께 camp를 떠났다.
아이거는 제1직벽만 보인다. 15일간 있으면서 계속 일기가 나빠 안개로 인하여 전면을 관찰할 수 있었던 날은 불과 3일
뿐이었다. Base camp를 뒤로 하면서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을 통하여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지금가는 이 길은 마지
막으로 밟는 길인 것이다. 다시 되돌아 오지 않으리라. 1時 생각하고 오는 사이 아이거 북벽의 제1관문인 설사면에 도착
했다. 둘은 말없이 아이젠을 신는다. 이제 등반의 시작인 것이다.
출발에 앞서 '무사히 돌아오자' '우리는 오를 수 있을 것이다'
1時30分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설원에 첫발을 던졌다. 별로 어렵지 않은 경사를 250m 정도 오르니 제1직벽의 좌측 하벽
인 암벽이 나타난다. 암벽의 전체 경사도는 60°정도지만 계단식으로 크게 층이 되어 있어 지그재그로 트레버스하
여 오르니 경사가 거의 없는 상태이다. 반면 낙석이 심하고 하켄의 적응 및 설치장소가 적당하지 않아 안자일렌을 하면
서도 누군가의 Slip이 있을 경우 확보장소 및 시간을 가질 수 없는 상태이다.
낙석을 조심하고 신중한 등반을 계속하니 2시30분 제1직벽에 올라와 있었다. 제1직벽 정상에서 전날에 저장해 두었던
15㎏ 정도의 장비와 식량을 정리하고 우리의 등반루트를 관찰하려 했으나 400m 상부의 갱도입구 이상은 안개로 인하
여 보이지 않았다. 2시45분 제1직벽을 출발하여 제2직벽 밑으로 방향을 잡아 오르기 시작했다.
간간히 떨어지는 낙석소리가 귓가를 스칠 때면 소름이 온몸에 끼친다.
하단부의 루트
'T설계'에서 갱도입구로 직접 오르는 것보다는 '제1직벽' 왼쪽하단 설원에서 '제1직벽'정상을 거친후 갱도입구로 오르
는 것이 좀 쉽다.
설원 - 광활한 눈사면이므로 킥스텝 보다는 사이드 스텝을 주로 이용해서 오르는 것이 체력소모를 줄일 수 있다.
폭포∼제1직벽 - 폭포를 건넌 다음 제1직벽을 오른쪽에 두고 좌측 경사면을 오른다. '제1직벽'정상은 2인용 텐트를 설
치할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평탄하다.
제1직벽 정상∼갱도입구 - 제1직벽 정상에서 우측으로 트레버스하여 '틈새많은 버트레스'로 오른다음 다시 우측으로
트레버스하다 '갱도입구'를 향하여 위로 오른다. 비박지점은 '갱도입구'를 이용하거나 또는 좌측 40m 지점에도 있다.
낙석과 눈과 얼음과 바위와 싸우며
멀리 떨어지는 낙석의 굉음은 전장의 유탄 날으는 소리를 방불케 한다. 어제 등반중 낙석이 어깨와 무릎에 떨어져 경험
이 생겨서인지 이제는 낙석소리로 방향과 크기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낙석을 피하기 보다는 낙석이 우리를
피해가기를 바랄 뿐이다. 다행히도 우리는 오늘 낙석을 맞지 않았다. 이제 낙석의 공포는 사라진 것이다.
전쟁터의 노병들이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도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낙석과 눈과 얼음과 바위와 싸우며 오르는 중 3시30분 우리는 갱도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갱도입구란 아이거북벽을 뚫고 융프라우의 욧호까지 올라가는 등산전차의 창문인 것이다. 이 곳은 아이거 북벽을 오르
는 등산가들의 대피처도 되고 또한 탈출로도 되는 곳이다.
아직 시간이 일러 기차소리가 계속 들려와 우리는 갱도입구에서 자는 계획을 취소하고 좌측 60m지점에 있는 비박장소
로 짐을 운반해야만 했다. 오늘의 계획은 가까운 곳에서 내일 오를 힘든 크랙과 힌토슈테이셔 트레버스를 관찰하려 했
으나 시계불량으로 불가능했다. 오늘은 줄곧 안개속에 있었던 것이다.
3시30분 저녁을 준비. 북벽등반중에서 가장 여유있는 시간과 안락한 곳에서 잠을 청할 수 있었으나 계속 끼어있는 안개
와 내일 날씨에 대한 불안으로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북벽 등반중 해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아침 해뜰때와 해질 때 1시간
뿐이다.
8시 지금 우리 위로는 구름이 또 아래로도 구름이, 해가 우리를 안심시키려는지 갈라진 구름사이로 석양이 깃든다.
자 - 자자 오늘의 푸근한 잠은 내일의 행동을 원활하게 해줄 것이다.
Base로부터 교신이다. '내일을 위해 잠 잘자고 날씨가 좋아지기를 신에 기도하자' 그렇다. 우리는 자연에 대해 너무
미약한 존재인 것이다. 자연이 우리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결코 북벽을 오르지 못할 것이다.
등반 둘째날
단층 100m,80m직벽,40m침니,80m트레버스,
50m의 힌토슈테이셔… 오르고 올라서 또 오르고.
7月 22日
4時 어제의 긴수면과 낙수소리에 잠이 깨었다.
하늘이 뿌옇다. 별하나 볼 수 없다. 오늘도 역시 구름 속에 있는 것이다. 어제의 짧은 운행과 충분한 수면으로 몸의 컨디
션은 만점이다. 기상과 동시 물을 끓인다. 오늘의 조식은 크래커 육포 치즈 슾 그리고 간식으로 건과일이 준비되어 있다.
우리는 오늘 일찍 힘든 크랙과 힌토슈테이셔 트레버스를 지나야 한다. 어제 우리의 운행이 짧았던 것은 힘든 크랙과 힌
토슈테이셔 트레버스에서 폭포를 만나지 않기 위해서다. 오전 10시이전에 통과해야만 폭포가 얼은 상태에서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6시 식사와 출발준비가 끝났다. 짙은 안개로 인하여 루트화인딩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우리는 선등자들의 흔적을 찾아
야 했다. 아이젠을 신고 바위를 오르기 때문에 검은 석회암에 지렁이 기어간 자국같은 하얀 흔적이 생겨 있어서 길을 찾
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한층 넓이 3㎜ 높이 4㎜ 정도의 미세한 60°정도의 계단층을 100m정도 올라가니 점점 가파라지며 거의 수직상태의
크랙이 나타나다. 무척이나 힘이 든다. 여태까지의 루트중 가장 힘들고 어려운 곳에 도달했다. 바로 여기가 힘든 크랙인
것이다. 80m의 직벽. 우리가 갖고 있는 록클라이밍의 상식으로는 침니, 크랙, 슬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손과 발을 바
위틈에 틀어박고 또 비트는 식의 클라이밍 방식으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그러한 크랙과 침니인 것이다.
즉, 크랙과 침니는 그대로 있고 한쪽 벽면의 홀드와 스탠스를 이용하여 슬랩을 오르는 형태가 되는 것이다. 힘든 크랙의
하단부 침니, 크랙, 슬랩의 혼합형태인 40m를 오르니 작은 굴, 즉 비박을 할 수 있는 곳이 보인다. 높이 50㎝, 깊이 2m,
넓이 30㎝ 정도의 직벽상에 뚫린 구멍이다. 이 곳이 헬만불이 등정 당시 비박을 했던 장소이다.
힘든 크랙을 올라가면서 초등 당시의 헥크마이어, 하인리하러등의 능력을 가름할 수 있었다. 우리의 길에는 선
등자들
이 남겨놓은 하켄과 길을 표시해 주는 아이젠자국 또 낡아버린 자일이 우리의 등반을 순조롭게
해 주었으나 만일 초등자들이 이곳으로 올랐다면 그들의 능력은 거의 완벽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8시30분 힘든 크랙에서 우리는 1시간 30분을 소비했다. 힘든 크랙을 지나 크랙과 슬랩이 섞인 60
°정도의 암벽을 좌측으로 80m정도 트레버스하니 힌토슈테이셔 트레버스 출발점에 도달했
다. 우측으로 붉은벽 중단에 69년 일본대의 직등 흔적이 오버행상의 자일이 늘어진 것으로 알 수
있었다.
힌토슈테이셔 트레버스, 한번 건너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장소. 1936년 힌토슈테이셔가 최초
로 돌파했으나 대원의 부상으로 되돌아 올 때 건너오지 못하고 4명 전원이 추락사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걱정을 안해도 되지만 이제는 되돌아 온다는 생각은 가지면 안된다. 벌써 우리는 북
벽의 반을 오르고 또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을 극복하러 오지 않았는가. 70도 경사
의 크랙, 팬듀럼 등반등으로 50m의 힌토슈테이셔 트레버스를 건너가니 10m정도의 좁은 침니가
우리를 맞았으나 우리의 사기는 왕성하여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힌토슈테이셔 트레버스에서도 우리는 1시간 30분이
걸렸다.
1∼3핏치 -
왼쪽으로 트레버스하여 '힘든 크랙'을 향하여 오른다.
4핏치 -
힘든크랙 출발지점에 작은 비박장소가 있으며, 이 핏치를 고정자일없이 등반할 경우 인공등반이 가미되는 매우
어려운 핏치가 된다.
5∼7핏치 -
'붉은벽'기슭을 향하여 오르다 '힌토슈테이셔'를 트레버스한다. 고정자일과 하켄의 견고성을 확인하여야 한다.
8∼9핏치 -
'제비의집' 출발지점에 비박을 할 수 있는 작은 테라스가 있다. 이 핏치는 북벽 중에서 낙석이 가장 심했던 곳이다.
10핏치 -
오른쪽 루트는 인공등반을 해야 되고, 왼쪽으로 올라가면 아이스 클라이밍을 계속해야 된다.
11핏치 -
종료지점은 '제2밴드'의 암벽과 '제1설원'의 경계가 된다.
12핏치 -
오른쪽 凹부는 물이 많이 흘러 등반 중 옷이 젖게 된다. 대신 왼쪽벽으로 오르면 물을 피할 수 있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추위와 낙석추락의 위험을 맞아야 하나.
책으로만 보아서 알고 있던 제비집은 ½평 정도의 경사진 테라스로 2명 정도의 비박은 가능하나 기온이 올라가
제2설원의 눈이 녹으면 폭포가 되어 지내기가 힘든 곳이다. 우리보다 먼저 시등하여 여기까지 올라온 아일랜드의 두 클
라이머가 물에 못이겨 되돌아 간 장소이기도 하다. 낙석과 바람에는 보호를 받을 수 있으나 물에는 약한 곳이다.
아이거 북벽을 등반하면서 우리는 줄곧 추워지기만을 기대했었고 추운 새벽에 등반을 시작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기온
이 올라가면 눈과 얼음이 녹아 폭포가 되기 때문이다. 지금 10시30분 제1설원은 얼어있다. 아직은 녹을 시간이 아닌 것
이다. 제2설원에서부터의 낙석소리가 들린다. 이제부터 낙석과 낙수에 근심할 때다. 제1설원을 출발하여 수정관 얼음통
로로 향해 설벽을 오른다. 잠시 휴식을 통하여 생각해 본다. 북벽을 오르는 일은 어렵고 위험한 일이다. 무엇때문에 우리
는 여기서 추위와 낙석, 추락의 위험을 맞아야 하나……. 결국 결론이 없는 이야기다.
우리는 오르기 위해서 왔고 또 오르고 있는 중 아닌가. 우리는 올라야만 한다. 날씨가 계속 나쁘다. 루트 관찰은 전혀 0.
제2설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수정관 얼음통로를 지나야만 한다. 암벽을 40m 올라가고 또 40m 60도 경사의 설벽을 오르
니 얼음통로가 보인다. 목표물이 나타났으니
우리의 길은 확인된 것이다. 좌측으로 간간히 제2설원이 보인다. 제2설
원은 눈이 많이 녹아 암벽의 돌출부분이 많이 보인다. 수정관 얼음통로는 얼음이 다 녹고 물만
흐른다. 15m 가량의 직벽으로된 데드르 상태로 홀드 스탠스가 양호하다.
12시30분 얼음통로를 지나 중식할 장소를 찾으니 20m 위에 볼트하켄 2개가 반짝 빛난다. 배낭을
풀고 웨하스를 꺼내 중식을 한다. 아직도 시계는 불량이다. 중식을 마치고 제2설원을 향하여 좌
측으로 트레버스를 하며 오른다. 안개속이라 바위 전체가 얇게 물이 흐른다. 이곳은 생물이 살 수
없는 환경이다. 바위에 이끼가 끼지 않는다. 물이 있어도 등반에는 지장이 없으나 손목을 통해
물이 겨드랑이로 스며든다. 기분나쁜 등반인 것이다.
한꺼번에 수백개씩 계속 3분간 쏟아져 내리는 낙석은 우리를 완전히 공포로 떨게 했다.
슬랩지대를 80m 통과하니 이제 구름이 발밑에 깔린다. 이틀동안 구름이 제1직벽과 제2설원 하단
부 사이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구름위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이제 광명을 찾은 것이다. 빛이 있
어 기분은 좋았으나 상단부 암벽의 위용이 우리를 짖누른다. 앞으로도 많이 남은 것이다.
여기까지는 안개와 물과의 싸움이었으나 이제부터는 고독감과 추위와의 싸움이 될 것이다. 제2설원을 하단부의 암벽으
로 트레버스하여 아이론으로 통하는 바로 밑에 왔다. 등반을 시작한지 처음으로 밝은빛 속에서 휴식을 취한다. 바람만
안불면 좋을텐데 바람이 불어오면 온몸이 얼어 버린다. 3시50분 80도 경사 40m의 바위를 오른다. 낙석이 시작되었다.
하얀거미로부터 쏟아지는 낙석은 한꺼번에 수백개씩 떨어진다. 조금만 참으면 제2설원을 통과할 수 있을텐데. 배낭을
머리 위로 올리고 몸을 움추린다. 약 3분간의 낙석은 우리를 공포에 떨게 했다. 제2설원을 80m 직상하니 아이론으로
통하는 암벽이 우리를 막는다. 지금부터 얼음이 녹을 시간이다. 암벽에 물이 폭포가 되어 쏟아진다. 온몸은 폭포에 휩
싸여 등반을 곤란하게 하고 상층부 상태를 관찰할 수가 없다. 40m의 직벽을 오르기 위해 온몸의 힘을 쏟는다.
이제 지칠 때가 된 것이다. 벌써 우리는 12시간이나 아이거와 씨름을 했으니까, 올라가려는 의지 즉 정신력은 육체를
채찍질했다. 40m를 오르는데 우리는 1시간을 물속에서 폭포를 거스러 오르며 싸워야 했다. 우리는 지쳐 있었던 것이다.
폭포를 오르니 이제는 주위가 어두워진다. 이제는 잠자리를 찾아야 할텐데 아직도 위로 80m의 설벽이 남아 있다.
바람이 분다. 장갑이 얼어 붙어 카라비나를 잡을 수가 없다. 기온이 많이 떨어진다. 자일이 얼어 철근을 잡는 것같이 뻣
뻣하다. 배낭에서 장갑을 꺼내 갈아 끼운다. 주먹이 쥐어지지 않는다. 이제는 이성이 몸을 제어하지 못한다. '본능' 목숨
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잠자리를 찾는다. 80m의 빙벽을 기계적으로 오른다.
우리의 희망은 빙벽이 끝나는 부분에 잠자리가 있으리라는 기대 뿐이다. 8시30분 다행히도 그곳에는 아주 작은 얼음관
이 있었다. 픽켈로 잠자리를 다듬는다. 주위의 얼음을 까서 밑을 고르고 눈을 퍼서 물을 끓인다. 석양이 우리를 비치고
300m 아래 구름이 운해를 펼친다. 그렇다. 여기가 바로 천국인 것이다. 붉은 노을이 구름 위에 펼쳐질 때 우리는 구름
위에서 석양을 본다. 오늘의 피로를 눈아래 펼쳐지는 환상적인 경치에 흘려 보낸다. 10時 저녁을 마치고 본부와 교신을
청한다. 11시30분 사진기의 Film을 갈아 끼우고 잠을 청한다. 오늘 우리는 20시간을 북벽에서 움직였던 것이다.
15핏치에서 직접 '제2설원'을 직상한 후 트레버스하는 루트는 예전에 많이 이용하던 것이었다.
그 보다는 왼쪽에 노출된 암부를 이용하여 비스듬하게 오르는 루트가 신속하고 안전하며 체력
소모를 많이 줄일 수 있다. 제1∼3설원은 얼음이 녹기전인 이른 아침에 통과하는 것이 낙석의 위
험이 적다.(낙석은 약간의 일정한 시간을 두고 떨어지므로 그 시간을 파악한 다음 오르면 어느 정
도 낙석의 위험을 피할 수 있다) 14∼18핏치 - 전체적인 방향을 크게 왼쪽으로 잡고 트레버스하
며 암벽을 오른다. 15핏치의 스탠스는 불량한 편으로 크랙이 없어 확보가 어려운 곳이다.
19∼20핏치 - 고정자일을 이용한 쥬마링을 하는데도 매우 어려웠다. 암벽에 물이 흘러 들어와
옷이 젖었다.
21핏치 - 종료지점이 되는 눈사면과 암벽의 경계에 얼음 웅덩이가 비박지로 이용된다. '죽음의
비박'지점.
등반 세째날
여지껏 먹은 것이라곤 크래커 5쪽과 웨하스 한쪽 뿐이다.
7月 23日
5시 어제의 피로로 기상이 1시간 늦었다. 조식을 마치고 7시 잠자리를 뒤로 하며 죽음의 비박으로 방향을 잡았다.
200m정도 좌측으로 트레버스하니 죽음의 비박이 나타난다. 말이 비박장소지 바람, 눈에 몸이 노출되고 앉을만한 장소
도 별로없는 아주 작은 테라스에 불과하다. 낙석과 눈사태만을 피할 수 있을 앉아서 죽음 그자체를 기다리는 죽음의 비
박장소인 것이다. 제3설원 건너 람페가 보인다. 오늘은 람페를 통과해야 한다. 제3설원 60m를 오르니 암과 설의 경계에
하켄이 보인다. 하켄에 확보를 하고 좌측으로 람페를 향하여 트레버스 하던 중 길을 잘못 들었다. 40m를 직상하여 좌측
으로 펜드럼 트레버스를 하려했으나, 람페는 30m 좌측이다. 별수없이 Back이다. 내려오던 중 허리에 찼던 픽켈이 지상
으로 빨려간다. 둘은 어이없이 멍청히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픽켈은 몇번 튀기더니, 구름속으로 사라진다. 둘이는 침묵
을 지킨다.
이제 람페다 60∼70도 경사로 300m 가량 낙석과 눈사태를 피할 수 있고 추락에서도 어느 정도 확보가 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제는 몸이 허공에 노출되지는 않는다. 등반중 心적으로 가장 안락한 장소이기도 하다. 배가 고프다. 여지껏 먹은
것이라곤 크래커 2쪽과 웨하스 한쪽뿐이다. 람페 침니 밑에서 중식을 한다. 저아래 Base camp가 간간히 보인다. 크래
커는 이제 맛이 없다. 목이 깔깔하다. 식욕을 잃은 것일까? 꼭 먹어야 하나, 물이 먹고 싶다. 물을 끓이려면 1시간이 소
요되어 시간이 아까워 고드름을 씹는다. 등반중 처음으로 배낭을 벗고 클라이밍을 한다. 침니이기 때문에. 침니를 벗어
나니 람페 설원이 나타난다.
300m를 4시간가량 걸렸다. 구름이 다시 올라와 우리는 안개속으로 들어갔다. 안개 속에만 들어가면 Top은 보이지 않는
다. 얼음이 쏟아진다. 꼼짝없이 맞아야 한다. 람페 끝이다. 지독한 안개로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20m의 립피치만 올라
가면 신들의 트레버스다.
20m의 직벽을 오른다. 몸이 허공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하다. 손에 힘이 안먹는다. 배낭이 무겁다. 미친 듯이 더듬는다.
람페가 끝났다. 신들의 트레버스 날씨만 개었다면 신들의 기분을 맛볼 수 있을텐데……. 4피치 정도 계속 트레버스다.
계속 우측으로 나간다. 이제 끝날 때도 됬을텐데.
뿌연 안개 속에 설원이 보인다. 그렇다. 저것이 하얀거미다. 5時 오늘 행동은 끝이다. 기록에 보면 좋은 비박장소가 있는
곳인데. 누울만한 자리가 보이질 않는다. 안개가 걷힌다. 날씨가 추워지겠지 어제와 마찬가지로 구름이 제2설원 밑에 깔
린다.
22∼27핏치 - 제3설원이 끝나는 '람페' 초입까지의 얼음사면과 암벽을 트레버스한다.
28∼31핏치 - 바위와 얼음이 혼합된 경사면을 아이젠을 착용하고 오른다.
상단부 루트 - 제일 어려운 핏치에는 오히려 고정자일이 없으므로 주의를 요한다. 루트를 찾는데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32핏치 - '침니핏치'로 침니에 얼음이 붙어 있어 등반이 매우 어렵다. 이 핏치는 '아이거' 북벽중 어려운 핏치에 속한다.
이 곳의 등반이 불가능할 때는 우측의 수직벽을 인공등반하여야 한다.
34∼35핏치 - '람페'설원 오른쪽을 한 핏치 오른후 고정자일이 있는 우측밴드로 트레버스 한다.
36핏치 - 경사는 심한 반면 홀드와 스탠스는 비교적 양호하다.
37핏치 - '신들의 트레버스' 고정자일을 따라 우측으로 계속 횡단한다. '하얀거미'초입에 비박장소가 있으나 몸이 밖으
로 완전히 노출되어 폭풍이 몰아치거나 낙석이 떨어지면 전혀 위험을 피할 수 없는 곳이다.
천길 절벽에 엉덩이만 걸치고 발은 허공에서 대롱거린다.
이제 잠시후면 석양이 질 것이다. 바람이 부니 소변방울이 얼어버린다. 장갑을 벗을 수가 없다.
저녁준비를 한다. 우리의 비박장소는 등판은 헤아릴 수 없는 높이의 직벽에 기대고 앉아 엉덩이만
겨우 붙인 방석만한 바위돌 2개뿐 발을 허공에서 대롱거릴 수 밖에 없다. 하나씩 걸터앉아 하켄을
박고 몸을 확보한다. 3일을 고생하며 올라온 우리에게 너무 잠자리가 불편하구나. 그나마 이것을
찾은것만이라도 다행으로 밖에는 생각이 안든다. 자리를 다지며 저녁을 끓인다. 바람이 회오리쳐
방향을 알수가 없다. 배낭과 장비를 총동원하여 버너 주위를 감싼다. 바람이 위에서 불어 내려오
니 막을 재간이 없다. 버너를 그대로 두고 잠자리를 준비한다. 신발을 벗어 가슴에 품는다. 신발이
얼면 행동을 못하기 때문이다. 얼음을 녹이는데 1시간반이 걸렸다. 차거운 물이지만 목구멍을 넘
어가는 기분은 만점이다. α-미 볶은밥을 만들어 김에 얹어 먹는 맛은 최고다. 3500m 고도에서 운
해위로 지는 석양을 보며 먹는 저녁은 아마도 지금 이시간 전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식사일 것이
다. 비록 샴페인도 없고, 성찬이 아닐지라도.
앉아 자는 자리가 불편하다. 엉덩이와 무릎이 시리고 자일로 묶은 허리가 결린다. 내일은 결전의 날 Base camp에서
대장과 대원들이 격령의 노래를 보낸다. 돌아와요 부산항 우리는 사우로 대답한다. Base에서는 우리가 무사히 돌아 오
기만을 기다리고 또 우리는 가장 생각나는 사람들을 위해 사우로 친구들을 생각한다. 우리가 오르고 못 오르는 것은 내
일의 일이다. 불안을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지금 가장 편안한 자세로 안락한 밤을 지내는 것이 과제인 것이다.
밤이 몹씨 춥다. 멀리 북쪽으로 비행기가 지나간다. 빨간 불빛을 쳐다보며,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른다. 세상은 고요하
고 주위의 적막이 우리를 감싼다. 내일은 맑아야 할텐데…….
9時 현재 취침 중
추위와 또 몸의 균형을 잃어 잠이 깬다. 한참 잔 것 같아도 30分 정도다. 앞으로 몇번을 더 깨고 잠을 청하기 위해 노력
할 것인가. 바람아 자다오, 추워 죽겠다. 태양아 솟아라. 어서 날이 밝아라. 아 하느님.
등반 네세째날
발가락에 통증이 온다. 이제는 감각이 없다.
뛰어도 뛰어도 감각이 없는데, 어떡하란 말이냐.
7月 24日
4時 새벽의 찬공기에 잠이 깨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배낭을 꾸리며 필요없는 장비를 추
린다. 아노락. 여벌바지 T셔츠 담배 휴지 젖은양말 모든 것을 허공으로 던져버린다. 이제 우리는
북벽에서 자면 안된다. 우리는 꼭 올라 가야만 한다. 오늘 기어이 정상에 서야한다. 조식을 준비
하던 중 1시간이나 버너에 올려놓아 끓인 슾을 부주의로 쏟아버렸다. 아! 이런 젠장, 아침도 굶게
생겼네. 이제부터 길에는 물도 없는데…… 어떻게 한다지 둘은 쓴웃음을 입가에 흘린다. 코펠에
묻은 슾을 크래커로 닦어 먹는다.
간밤에 얼마나 추웠던지 가슴에 품었던 신발이 얼어 발에 들어가지 않는다. 버너에 신발을 녹이니
쉽게 녹질 않아 그대로 신는다. 억지로 발을 밀어 넣으니 끈이 조여지질 않는다. 대충 잡어매고
시작이다. 120m의 50도 경사로 끝부분은 바로 저밑 초원이 내려다 보이는 하얀거미를 오르니 발
이 얼어 붙는다. 발가락에 통증이 온다. 이제는 감각이 없다. 발을 놀리는 템포가 빨라진다. 아프
리카 토속춤을 추는 것 같아 너무 뛰어 무릎에 통증이 온다. 그래도 발가락에는 감각이 없는데 어
떡하란 말이냐. 7시30분 발을 구르는 사이 하얀거미도 끝나고 말았다.
정상으로 통하는 크랙이 완전히 보인다. 암벽과 하늘의 경계에 하얗게 빛나는 부분이 정상 설원일 것이다. 한층 힘이
솟는다. 이제 250m만 오르면 정상 설원이다. 와이드침니 사이의 설벽 80m를 오르고 좁은 침니 한핏치를 통과하니 직
벽에 막혀 더 이상 똑바로 올라갈 수가 없다. 좌측으로 10m 정도 트레버스하여 7m를 하강하니 좌측으로 정상으로 통
하는 크랙이 80m 정도 뻗어있다. 침니 가운데는 얼음이 좌우벽에는 홀드가 아이젠으로 얼음을 찍고 손으로는 바위를
잡는다. 낙석과 낙빙이 소나기 쏟아지듯 들이 붓는다. 피할 수도 없는 침니 아래로 확보하고 있던 픽켈이 낙석에 맞아
튄다. 아차 하는 사이 발에 힘을 주어몸을 버틴다. 멍청이처럼 멀어져가는 픽켈을 바라볼 뿐이다. 이제 둘다 픽켈을 떨
어뜨려 버렸으니, 한심하구나. 정상 설원이 바로 앞에 있다. 이제 30分 정도면 정상에 설 것이다.
38∼40핏치 - 39, 40핏치는 오른편의 바위를 끼고 오르면 고정하켄을 이용할 수 있다.
41∼43핏치 - 얼음과 바위가 혼합된 핏치로 아이젠을 착용하고 등반하여야 된다.
44핏치 - 양쪽벽을 이용 팔과 다리를 벌리고 오르는 넓은 침니로 고정하켄의 견고성을 확인하여야 한다.
45핏치 - 고정자일을 따라 왼쪽으로 트레버스하다 테라스로 진입한다.
46∼48핏치 - 凹부를 이룬 좁은 골짜기로 아이스 클라이밍을 하고 오르면 북동능에서 뻗은 지능이 나타난다.
49핏치 -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핏치이지만 확보는 용이하지 않다.
50∼52핏치 - 직접 정상으로 오르는 것보다는 '미텔레기'능을 경유해서 오르는 것이 안전하다.
정상 - 나무와 알루미늄 자루로 만든 'M'자가 눈에 박혀 정상의 표시를 하고 있다
이제 아버님에게 편지를 쓸 수 있겠지.
칼날같은 능선을 조심스럽게 밟는다. 정상을 향한 양쪽은 모두 천길 절벽이다. 이제 마지막 핏치 한발한발 정신을 집중
하고 조심스럽게 걷는다. 12시30분 '여기는 정상 여기는 정상 본대 감잡았으면 응답하라'
이제 정상이다. 두 사람의 대원이 72시간동안 북벽을 통하여 정상에 선 것이다.
우리는 올랐다. 바람과 안개와 또 바위와 얼음도 우리를 북벽에서 팽개쳐 버리지 못했다. 우리는 그것들을 이긴 것이다.
촬영을 하고 본부에 교신을 한다. 우리는 우선 신에 감사한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를 오르게끔 하여준 대장님 또 같이
온 대원들 서울에 있는 회장님 이하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산악인이면 누구나가 다 올라보고 싶어했던 벽. 한국인 중의 누군가가 올랐겠지만…
우리는 행운이다. 너무 감상에 젖을때가 아니다. 내려가는 길도 6시간은 걸리니까 정상을
뒤로하고 내려온다. 이제 내려가면 대원들이 맞아 줄 것이다.
배불리 먹을 음식도 있을 것이다.
누워 잠잘 수 있는 Tent도 있겠고……
이제 아버님에게 편지를 쓸 수 있겠지.
모든 사람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북벽 등반에 사용된 장비
아이거북벽 등반을 하기 위하여 체류하는 동안 대원들의 평안과 건강을 위해서는 클라이데 샤이넥에 있는 호텔에 B.C
를 설치할 수도 있었으나, 경비문제, 현지 지형상 어프로치 문제, 지휘, 통신, 루트 관찰등 여러가지 점에서 북벽 직하
초원지대에 B.C를 설치하는 것이 더욱 유리할 것 같아, 처음 2일간만 호텔에 있었고, 그후로는 계속 막영생활을 하였다.
막영생활을 위한 기본장비는 일반적인 것이었고, 다만 특기할 사항은 급변하는 일기상황에 대처하여 몇시간씩 계속 쏟
아지는 폭우에도 견딜 수 있는 완전 방수 처리된 막영구의 필요는 절대적이었으며, 석회질의 함량이 많은 천연수를 식
수로 직접 사용하게 되면 설사를 하게 되므로 정수기와 여과기를 이용하여 식수를 해결하였다. 정수기는 현지 구입품
으로 그 지역의 수질에 가장 적합한 것이었으며, 여과기는 별로 사용치 못했다. 등반장비는 현지 가이드의 조언으로 그
린덴발트에서 일부 구입한 것도 있지만 국내에서 사용하던 장비가 대부분이고 일본에서 약간 보충된 장비도 있다.
15일간의 식량과 4일간의 등반식
식량의 대부분은 현지 구입품으로 충당하였고 입맛을 돋을 수 있는 한국음식은 캔으로 된 것을 휴대해 가지고 갔다.
등반식으로 가장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알파미는 일본에서 구입하였고, 기호품인 담배는 '거북선'을 직접 휴대하였다.
'거북선은 우수한 품질로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극히 좋아 바꾸어 피우기도 하였다. 체류도중 김치가 모자라서 양배추를
사다가 담구어 먹기도 했고, 음료수로서 포도주를 다량 소비한 일도 있었다. 가장 문제가 많았던 등반식, 다양한 식단을
마련할 수도 없고, 많은 량을 휴대할 수도 없으며, 입맛을 맞출수도 없고, 하루종일 등반을 위한 체력유지를 시킬 수 있
는 열량식품 연구와 실험과 등반자들이 원하는 식품을 맞추기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3박 4일의 등반후 실제경험은 결과적으로 만족하지 못해 문제점으로 남게 된 것이다. Base의 식사는, 조식과 중식은
간략하게 하고 매일 석식만은 한국에서 휴대하고 간 쌀로서 충당하였던 바 모든 대원이 만족하였고 원정기간 동안 체력
유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문제점
정신력 강화
투철한 정신력과 산에 대한 집념, 완등을 해야되겠다는 뚜렷한 목적의식, 강화된 팀웍등 나무랄데 없는 정신력의 소유
자들로 구성된 대원들이었지만 15일 가량의 막영생활로 현지 적응훈련후 실제등반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악천후와
계속되는 피로의 누적으로 등반 3일째의 정상직하에서 한가닥의 인내력으로 버틴 것이다. 이보다 더 어려운 조건에서의
등반활동을 위해서는 끝까지 참을 수 있는 인내력, 더욱 강화된 정신력이 요구될 것이다.
체력강화
몇 년에 걸친 훈련으로 암벽에서의 연장등반과 비박, 테크니컬 클라이밍을 시도하여 며칠씩 걸리는 대암장의 등반에
대비한 훈련을 쌓아온 경험으로 이번 아이거 북벽에서 가장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를 선발하여 등반에 임했지만 3박
4일에 걸친 연속적인 등반에서 체력의 미약함을 면치 못했다. 25∼30㎏의 장비를 휴대하고 앉아서 비박을 하여
1일 1000m 가량의 등반을 해야만 되는 대암벽에서는 겹쳐오는 피로감으로 지구력이 모자랐으며 암벽등반에서는 하켄
설치, 회수, 크랙등반과 빙설벽에서의 픽켈, 아이젠 사용으로 팔과 다리의 힘이 부족함을 절실히 느꼈다.
다양한 암질에서의 등반훈련
아이거 북벽 원정을 목표로 훈련한 악우회에서는 국내 여러 지방의 암장을 고루 찾아다니며, 훈련을 하였고, 출발전에
아이거의 암질에 대한 기록들도 찾아보고 사진도 여러 각도에서 검토하였지만 실제 등반에 있어서는 사전정보가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고 현지에 가서 근처 몇 곳을 실제경험을 통하여 암질을 익히고 등반에 임했으므로 약간의 어려운 문
제점들이 즉 적응력이 좀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일반적인 한국의 클라이머라면 동계 암벽등반에 대하여는 풍부한
경험을 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한국의 기후조건에 따라 겨울철이면 빙벽등반을 익힐 시간적 여유도 부족하므로 동계
암벽은 생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거 북벽에서 더욱 요구된 등반방식은 동계암벽등반 경험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등반기술도 중요하지만, 암질에 따라 화성암, 수성암, 석회암 등 여러 암질도 알아야 되며 각 암질에 따라 적절
히 소요되는 하켄의 종류도 연구해야 된다. 등반기술 적응력도 암벽, 빙벽, 설벽과 혼합상태의 벽에 대한 경험도 필요로
한다. 아울러 암장에서의 비박훈련 또한 철저히 해두지 않으면 곤란하다. 더구나 세찬 바람과 영하 20∼30°의 추위
속에서 비박으로 밤을 지새며 피로를 풀 수 있는 능력을 과연 어떠한 훈련으로 극복할 것인가.
장비
현대의 등반장비는 과학적으로 많이 개량되어 좋은 제품이 많지만 국내에서는 구입도 어렵고 고가품이 되어 문제가 많
다. 해외원정팀이면 모두가 겪은 경험이 있겠지만 도중 구입이나 현지 구입으로 사전에 써 보지도 못한 장비를 새로이
구입하여 실제 사용시 손에도 익지 않고 성능도 완전파악을 못한 상태로 제대로 100% 활용을 할 수 없었다. 특히 신발
종류는 사전에 신어서 발에 맞혀 놓아야 하는데도 현지에 가서 구입하여 신으니 발이 상하고, 그 상처로 등반활동에 지
장을 가져온 예도 있었다. 더구나 암벽에서의 비박시 급변하는 날씨에 대비할 완전 방수 처리된 장비의 필요는 절대적
이었으며(Gore tex) 우모복도 부피가 작으며 완전 방수에 보온이 완전히 될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
등반식
한국적인 식사방법을 등산에 적용하기란 매우 어려운 점이 많다. 해외 원정팀이 모두가 가장 신경을 많이 쓴 부분이었
겠지만 특히 고소등반이나, 며칠씩 걸리는 암벽등반에서는 많은 종류 다양한 메뉴는 할 수도 없고 휴대할 수도 없는 실
정, 국내에서는 입맛에 맞는 등반식으론 전혀 생산도 되지 않는다고 보아도 타당할 것 같다. 훈련 기간중 양식에 입맛을
맞추려고 많이 노력하였지만 잘 되지 않았고 현지 식품은 더욱 더 입맛에 맞지 않았다. 이번 원정대가 3일간 벽에 매달려
소비한 식품이란 거의 대부분 현지 구입품으로 입맛이 맞지 않아 거의 굶다시피 한 것이다. 앞으로 이의 대책이 가장
시급한 문제인 것이다.
자료정보
한국 산악계의 현 실정으로는 해외 정보를 입수하는데 있어서 자료부족으로 많은 애로점이 있다. 특히 과학적 분석 자료
로 암질이나 암장의 형태, 사용되어지는 하켄의 종류, 그레이드에 대한 자료, 설질이나 빙질등과 목적지 내지는 경유지
의 의, 식, 주 생활이나 교통 통신등 해외 원정팀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특정지역 이외의 정보를 입수하는데 많은 시간
과 노력을 필요로 한 것이다. 이번 아이거북벽 원정에서도 해묵은 자료를 토대로 연구 분석하여 준비를 하였었지만 현지
의 실제 등반에서는 너무도 틀린점이 많았고 최근의 정보는 전혀 입수하지 못한 결과로 애로점이 많이 있었다. 앞으로
해외정보 자료에 대해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졌으면 한다.
알프스를 다녀와서
이 훈 태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우리의 등반이 성공을 거두기까지는 몇가지 요인을 들 수 있다. 첫째 우리
는 국내에서 산악활동을 해오면서 최선을 다해 왔으며 언젠가는 고봉 또는 험난한 벽에 도전키 위
한 가상훈련을 꾸준히 쌓아왔으며 셋째 짧은 훈련기간을 통해 체계적이고 능률적인 훈련계획 아래
전대원이 일치단결하여 소기의 훈련 성과를 거둔 점, 넷째 국내에서 수집한 정보 및 자료를 비교해
볼 때, 현지 사정과는 너무나 판이한 상황이었으나 조급함 없이 적응기간을 통해 현지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이에 대처하여 적시에 등반을 강행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생각해 볼 때 하면 된다는 산악인의 의지와 신념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우리의 국내 산악활동에 있어서도 보다 적극적이고 체계적이며 보다 과학적인 등반양상으로 전환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유럽의 '클라이머'들과 우리들을 비교해 볼 때 체력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
로 우리는 자포자기 없이 꾸준히 기초체력에서부터 쌓아올려야 할 것이다. 등반 방법 또한 안이한
사고방식에서 탈피, 보다 어렵고 보다 높은 곳을 향하여 우리의 등반 기술을 꾸준히 연마해야 할
것이다. 해외산악 정보에 어두운 여건을 향상시키기 위해선 해외산악인과 유대 관계의 지속 및 서별 해외원정에 당국의
배려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된다. 원정대를 일사불란하게 통솔해 온 심의섭 대장의 탁월한 리더쉽과 공격조 윤대표, 허 욱
대원의 예리한 등반기술과 팀웍이 등반 성공의 결정적인 '에포크'가 되었다 생각된다.
또한 이번 '아이거' 북벽 등반을 성공으로 이끌기까지 본회 김기문 회장의 물심 양면으로 적극 지원해 주신데 대하여 진
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조 윤 희
원정추진위원 결성과 더불어 원정을 위한 훈련대원이 어느 정도 확정이 되어 후암동에 합숙소를 정하고 아침 저녁으로
체력단련에 열중하던 따가 또 자료가 없어 명동 뒷골목 서점들을 뒤지고 수차례 관계국 대사관으로 찾아가 겨우 구한
자료를 가지고 거기 대한 산행계획을 짜며 픽켈, 아이젠, 함마 등을 차례로 쓰며 수십 차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공상의
나래를 펴던 것이 바로 엊그제 같았는데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나 보다.
그 동안 훈련중이나 현지에서 또 출발 직전까지도 숨막히는 일들이 벌어져 앞이 캄캄한 적도 있었지만 그때 그때 침착
성을 잃지 않고 훈련대원은 물론 회원 모두가 단결된 모습으로 대처해 나아가 오늘의 결과가 있었다고 확신해 본다.
하여튼 모두 자질구레한 것들은 등반 성공이란 회오리 바람에 휘말리어 사라져 버렸으나 구태여 반성해 보자고 한다면
팀 운영에 너무 연관성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가능한 무한한 자연의 세계가 눈 앞에 있다. 그 무한한 자연의
세계를 대하기 앞서 남을 탓하기 전에 내 자신을 돌아보며 채찍을 가할 수 있는 겸소한 사람이 되고져 부단한 노력을 아
끼지 않아야 하겠다. 누구의 말인가? 산에서 찾는 참다운 즐거움이란 정상 등정 그 자체에 있는 것보다는 등반의 과정에
서 진정한 즐거움이 있다는 그 말을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해 보며 그동안 성심 성의껏 출발에서 도착까지 아니, 뒷마무리
까지 도맡아 해주신 여러 선배님들과 후배 여러분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리며, 오늘의 영광을 드리고 싶다.
윤 대 표
산을 안 언제부터인가 히말라야보다는 알피니즘의 발상지요 본 고장인 알프스를 나는 더 동경해 오고 있었다. 특히 우리
에게 잘 알려진 3개 북벽중의 하나인 '아이거' 북벽을…. 그런 오랜 동경 속에 그것은 몽상의 행위가 아니었음을 깨달았
을 때, 특별히 야간 등반훈련과 설악산 전지훈련, 홍천-서울간 도보행군 훈련, 새벽의 남산훈련 등을 하면서 '하얀 거미
'나 '별빛과 폭풍설', '알프스의 북벽', '아이거 디렛티시아'등을 탐독하며 그 속에서 북벽을 오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
하곤 했다.
꿈속에서나 그리던 '아이거!'
한걸음 속에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함을 곧 알았으며, 그것은 자신과의 투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어떤 고통스런 밤이
라도 언젠가는 끝장이 있게 마련이다'라는 하인리히 하러의 가르침이 무너지려는 의지를 일깨워 줘서 끝내는 초지일관
할 수있음을 알았다.
'아이거' 북벽 노르말 코스는 테크닉만을 구사하는 코스가 아니다. 물론 곳곳에 어려운 핏치가 도사리고 있지만 오히려
체력과 많은 경험이 요구되는 곳이다.
오늘의 이 기회를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허 욱
로드윅, 계단오르기, 철봉, 요가, 축대 횡단, 4개월간의 합숙훈련 등은 멀고도 험한 길의 시작이었다.
높고 험한 곳을 오르기 위해….
벽!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던 일들 그것은 하나의 역사였다.
막상 아이거에 도달하니 올라가는 그 자체는 준비하는 과정에 기울였던 노력에 비하여 훨씬 수월하였다.
苦盡甘來
정상에 올라서니 기쁨은 잠깐 다시 내려올 일을 걱정한다.
空虛와 虛無.
이제 아이거의 기억도 사라져 간다. 오르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와 또 오르는 과정이 진짜 중요한 것이다. 오른 후에는
그것은 벌써 관심의 대상이 되질 않는다. 더 높고 험한 곳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 다시 산행을 계획한다.
쟁취하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것을 올라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산악인 뿐만 아니라 인생의 숙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숙명!
곤란함을 사랑하는 것.
'제일 위험한 일에 부닥치고 그 위험을 극복했을 때 나는 참된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손쉽게 내 것이 되는 것에는 관심
이 없다'는 쟝 코스트의 말이 생각난다.
힘든 산행을 계획하면서 앞으로의 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이번 아이거북벽 등정의 기록이 높고 험한 것을 즐겨하는 산악인들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또 마음은 산악인들이
세계의 여러 곳을 견양하여 좋은 등반기록을 남겨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등반이 성사하도록 힘써 준 김기문 회장
님과 심의섭 등반대장님 이하 모든 악우회원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아울러 나의 최초의 산행을 만들어 준 친구 윤도영
군에게 감사드린다.
한 윤 근
참으로 귀찮고 불유쾌한 요소들만으로 가득차 있을 뿐만 아니라 어디 한구석 마음 놓고 있을 만한 안락함을 주지 못하
는 그러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장엄한 대자연의 위엄 속에서 내 자신이 미흡함으로서 대자연에 도전한다는 것이 무지요
객기일 뿐만 아니라, 성공 그것은 바로 자연의 포옹이라 믿어진다.
처음 베이스 캠프에서 북벽을 바라보았을 때의 정신자세는 흡사 군인이 전쟁터에서 서있는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반드시'라는 상염 속에 하루 이틀 사흘 북벽을 바라볼 때 자연의 섭리라고 하는 굴레 속에서 아이거 북벽을 바로 볼 수
있었음이 적이나 다행한 일이었다.
지난 몇 해 동안 이 곳을 오르려고 얼마나 고생했던가 또한 원대가 결성되고 부터의 훈련과 대원 모두가 겪어야 했던
일들이 하나의 결과를 놓고 생각하기 이전에 우리의 보람이요 노력의 산물이라 생각하고 싶다.
국내 알피니즘의 정립 과정에서 삼십여 년의 기간 동안 우리는 최고봉의 등정과 여러차례의 해외원정 경험으로 보아
현 세계 등반흐름에 발맞추어 가며, 좀더 기술적인 등반에 한 걸음 치중해야 되리라 보며, 우리의 보고서가 차기 등반대
의 진정한 안내서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