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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잔에 담긴 투명한 맥주
맥주를 마실 때 기대하는 즐거움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풍성한 거품과 함께 유리잔에 담긴 투명한 맥주와 스파클을 보는 재미가 가장 앞선다. 오늘날에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문명의 역사만큼이나 긴 맥주의 역사에서 유리잔에 담긴 투명한 맥주를 마신 건 아주 최근이다. 유리잔에 담긴 투명한 맥주를 맨 처음 감상할 수 있었던 곳은 영국이었다. 그리고 그 술은 페일 에일이었다.
포터와 스타우트를 통해 영국의 양조산업이 수공업에서 산업으로 발전했다면 페일 에일은 영국 양조산업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페일 에일은 과거 전통과의 절연을 의미했고,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대규모의 에일 양조는 현재 브리티쉬 제도에 국한되어있기 때문에 19세기의 대부분 페일 에일이 세계의 지배적인 스타일이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그것은 상업적인 라거 양조보다 앞서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수 십년간 라거보다 인상적인 것이었다. 필스너 맥주가 양조 방식에 또 다른 격변을 야기하기는 했지만 뮌헨, 비엔나, 필젠의 라거 혁명의 주역들은 영감을 얻기 위해 영국을 바라보았고 특히 버톤(Burton)을 주목했다.
산업혁명의 적자, 페일 에일
페일 에일의 탄생은 신기술 덕분에 가능했다. 과학자들은 몰트 효소의 신비와 이스트의 활동에 대해 설명했다. 온도계와 비중계가 사용되면서 맥아즙의 온도와 당의 비중을 측정했다. 철로 주조한 당화솥(Mash tun)은 나무로 만든 것보다 열을 잘 간직했고 대용량의 액체를 담을 수 있었다. 매쉬(Mash)는 손대신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갈퀴가 저었다. 자비(Boiling)에 사용되는 코퍼(Copper)는 석탄이나 코크스로 땠는데, 열 손실을 피하고 호프의 아로마를 간직하기 위해 개방형에서 돔이 있는 폐쇄형 용기로 바뀌었다. 스코티쉬 양조업자들은 스파징(Sparging)이라는 기술을 개발했다. 당화 과정의 마지막에 당화솥의 곡식이 뜨거운 물과 함께 분사되면서 남아 있는 당을 깨끗이 씻어내는 방법이었다. 이제 같은 매쉬에서 서너 번 맥주를 만들 필요가 없어졌다. 당화솥에 매 두시간마다 새로운 매쉬를 집어넣음으로써 보다 효율성과 수익성을 높이게 되었다. 개방형 냉각기는 열교환 방식으로 대체되었다. 그것은 찬물의 파이프를 돌면서 맥아즙의 온도를 낮춰주는 방식이었다. 열교환 방식으로 맥아즙은 더 이상 대기에 노출되지 않았고 야생 효모에 의해 공격받지도 않았다. 19세기 후반에 발명된 제빙기는 바바리아와 보헤미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열정적으로 수용되었다.
석탄을 대체한 코크스는 유해한 가스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러한 코크스의 사용으로 유해 가스를 염려하지 않게 되면서 페일 몰트 생산은 거대한 상업적 규모를 갖출 수 있었다. 페일 몰트는 나무로 건조한 브라운 몰트보다 효소와 발효성 당이 더 많은 이점을 제공했다. 유리에 대한 세금이 19세기 중반에 없어지고 대부분의 퍼브에서 사람들에게 퓨터 탱커드 대신 유리잔이 제공되었을 때 페일 에일의 투명함과 스파클은 새로운 스타일의 매력을 더해 주었다. 양조가들은 맥주에서 이스트를 제거하는 발효 방법을 개발했다. 그것은 병과 잔에 담긴 맥주에 크리스탈같이 투명한 모습을 부여했다.
버톤, 페일 에일의 고향
페일 에일의 발전은 이스트 미들랜드(East Middlelands)의 버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곳은 11세기이래 중요한 양조 중심지였다. 수도사들은 일찍부터 트렌트강 계곡의 셀 수 없이 많은 우물에서 부글부글 솟아오르는 물들이 뛰어난 맛과 보존성이 좋은 에일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세기 후 버튼의 물을 분석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물 속에 높은 수준의 소금이 들어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황산 칼슘(석고)과 마그네슘이 많았다. 소금은 강력한 발효를 촉진하고 호프 추출을 극대화하고 최종 맥주에 매력적인 스파클과 상쾌한 맛을 주었다. 반면 런던은 탄산 칼슘이 많아서 부드럽고 색이 짙은 맥주에 적합했다. 버튼 에일은 뛰어난 명성을 누렸는데, 미들랜드를 런던, 헐, 리버풀과 같은 큰 항구들과 연결하는 수로 확장도 도움이 되었다.
버톤에서 개발된 유니온 세트(Union Set) 시스템은 맥주에서 이스트를 제거하는 발효 방법으로 곧 그 자체가 페일 에일 양조를 의미하게 되었다. 아래에는 큰 캐스크들(Casks)이 있고 위에는 U자형의 트로프(Trouphs)가 있는 2층 구조로 되어 있다. 발효 과정은 맥아즙과 이스트를 캐스크 바깥으로 밀어내고 파이프를 따라 위로 올라가게 한다. 위쪽의 트로프에 액체와 이스트가 모이면 맥아즙만 캐스크로 돌아가고 이스트는 뒤에 남겨 놓는다. 유니온이라는 이름은 캐스크들이 파이프와 트로프를 이용해 서로 연결되어 있던 것에서 유래했다. 맥아즙과 이스트가 맨홀을 따라 올라가서 2층에 다다르면 그곳에서 이스트를 걸러냈다.
버톤 양조업자들은 훌륭한 무역가였다. 버튼 에일은 발틱 국가들과 러시아에서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낡은 기술과 양조의 계절적 한계 때문에 생산을 증가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발틱 무역이 붕괴하자 버톤은 경기 후퇴로 빠져 들었다. 영국과 프랑스간의 전쟁은 1793년부터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배한 1815년까지 계속되었는데, 프랑스인들은 영국에 대해 항구를 차례 차례 봉쇄했다. 버튼에 끼친 영향은 심각했다. 1780년과 1820년대 중반 사이에 마을 양조장의 수는 13개에서 5개로 줄어들었다. 벨자민 윌슨(그리고 그의 조카 올소프), 윌리엄 바스, 윌리엄 워딩톤 그리고 토마스 솔트를 포함한 살아남은 양조장들은 필사적으로 새로운 시장을 찾았다. 그리고 살아 남기 위해 영국 식민지로 방향을 전환했다. 영국은 1722년 처음으로 인디아를 식민화했고 영국 양조업자들은 초기부터 에일을 공급해 왔다. 그러나 브라운 에일과 포터는 혹독한 날씨에 어울릴만한 적당한 갈증해소 음료가 아니었다. 게다가 온도의 급격한 변동과 3∼5개월이 소요되는 긴 항해를 거쳐 도착한 맥주는 시고 김빠진 맥주가 되어 있기 일쑤였다.
마스톤스 페디그리 비터(Marston's Pedigree Bitter)는 페일 에일 양조의 완벽한 예이다. 그것은 인디아 페일 에일과 현재의 페일 에일 사이의 빈 공간을 채워준다. 어떤 맥주보다도 19세기 처음으로 나온 페일 에일과 가장 비슷하다.
마스톤은 1834년 버톤에서 양조를 시작했다. 그리고 1898년 현재의 자리인 앨비온 양조장(Albion Brewery)으로 이전했다. 버톤의 다른 양조장들과 마찬가지로 마스톤은 맥주에서 이스트를 제거하기 위해 유니온 세트를 채택했다. 그리고 1980년대 초 바스가 유니온 세트를 포기한 이래 이 시스템을 고수하고 있는 유일한 양조장이다.
페디그리 비터는 알코올 함량이 4.5%에 쓴맛은 26IBU이다. 놀랄만한 섬세함과 컴플렉서티(Complexity)를 갖고 있다. 아로마는 '버톤 스내치(도둑)'로 불리는데, '타는 성냥' 같은 황 냄새가 강렬하다. 이는 양조수의 석고에서 나온다. 맛은 비스킷 같은 몰트, 송진 같은 홉, 섬세한 과일이 느껴지는데, 과일은 사과 맛이 뚜렷하다. 과일 맛은 입안에서 그리고 끝맛에서 떠나지 않고 남고 강렬한 홉의 쓴맛과 균형을 이룬다. 신맛이 흥미롭다. 양조수 또는 하우스 이스트에서 나오는 듯 하다. 갈증을 풍어주는 성질을 더한다. 끝맛은 단맛이 적다. 버톤 이스트의 '난폭한' 활동 덕분이다.
몰팅 보리로 마리스 오터를 사용하고 호프는 푸글스, 골딩스, 휘트브레드 골딩스 종을 사용한다. 17%의 글루코스 당을 자비(Boiling)에 사용한다.
인디아 무역과 IPA의 등장
인디아 무역을 위한 특별한 맥주를 처음으로 개발한 건 버튼이 아니라 런던의 양조업자였다. 이스트 런던 보우 양조장(Bow Brewery)의 조지 호지슨은 수출용으로 맥주를 양조하기 시작했다. 호지슨이 인디아 수출을 생각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거대한 범선들이 인디아로 출항하는 부두와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선주로부터 인디아의 군인들과 시민들이 본국에서 보낸 에일에 불만이 많다는 얘기를 들은 호지슨은 인디아 시장에 좀더 가볍고 상쾌한 맥주를 제공하면 떼돈을 벌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보우 양조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당시 호지슨의 맥주가 어떠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매우 색이 옅은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버튼 양조업자들은 호지슨의 맥주를 앞다투어 모방했고 결국 그의 스타일을 기초로 페일 에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노련한 양조업자인 호지슨은 변질에 대한 최선의 방어책은 알코올과 호프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한 점을 고려하면 당시의 맥주는 최소한 6%의 알코올 함량에 호프는 일반 맥주보다 2배 이상 사용하고 드라이호핑(Dry-hopping)과 프라이밍(Priming)을 했을 것이다. 사업을 물려받은 마크 호지슨은 아버지의 사업을 확장했다.
호지슨은 인디아 무역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지만 식민지 인사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그는 봄베이와 캘커타의 대리인들에게 급여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가격을 마음대로 바꿨다. 그의 맥주를 취급하던 동인도 회사의 관리들은 호지슨의 독점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1821년 한 저녁 식사에서 동인도 회사의 관리인 마조리뱅크는 사무엘 올소프에게 말한다. 인도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거래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기후가 너무 더워서 양조를 할 수 없다. 우리는 현재 호지슨에게 의지하고 있지만 그는 인도의 상인들에게 무례하다. 우리는 현재 호지슨에게 의지하고 있지만 그는 인도의 상인들에게 무례하다. 하지만 당신네 버톤 에일은 너무 강하고 달아서 우리 시장에서 적당하지 않다." 마조리뱅크의 집사는 올소프에게 호지슨 맥주 1병을 주었다. 그는 버튼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수석 양조장이자 몰트스터(Moltster)인 존 굳헤드(John Goodhed)에게 건네 주었다. 굳헤드는 몰트를 낮은 온도에서 건조시키면 색깔이 똑같은 맥주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아주 적은 양의 페일 에일을 만들었는데, 당화솥으로 찻주전자를 이용했다고 한다.
버톤과 같은 작은 마을에서 올소프의 실험이 비밀로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곧 다른 양조장들이 그의 실험을 배워서 페일 에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 버톤 양조업자들은 인기에서 호지슨의 맥주를 대체하는데 고전했다. 그러나 10년 이내에 올소프와 바스는 캘커타로 나가는 물량의 반 이상을 장악했다. 1830년대를 통틀어 두 양조장은 약 6,000 배럴의 페일 에일을 인도로 보냈고 그들의 성공은 호지슨의 성공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호지슨의 회사는 기울기 시작했고 결국 문을 닫았다. 인디아 페일 에일(India Pale Ale, 이하 IPA)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것이다.
버톤 페일 에일의 성공은 단순한 모방이나 우연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유니온 세트에 의해 진화된 이스트 스트레인(Strain)과 버톤의 물 때문이었다. 버톤 이스트는 탐욕스럽다(greedy)고 표현된다. 그것은 맥아즙의 당을 매우 난폭하게 공격해서 단맛이 적고 완전히 묽은 맥주를 만든다. 양조당은 몰트당과는 달리 거의 완전히 발효되기 때문에 자비(Boiling)에 사용된 양조당은 최종 맥주를 단맛이 적고 알코올 함량이 높은 맥주로 만들었을 것이다. 캐스크 안에 남겨진 활동적인 이스트는 항해 동안 야생 이스트나 미생물에 의한 '감염'으로부터 맥주를 보호했다. 양조수는 맛과 보존성에서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스톤스(Marstons)의 수석 양조장인 폴 베일리에 의하면 "칼슘은 당을 줄여주고 더 많은 알코올을 생산하도록 돕는다. 그것은 이스트를 살아있게 하고 탁한 것을 제거해주고 맥주색을 죽인다. 그리고 홉의 활용도를 높인다. 결과물은 더 쓴 맥주이다. 마그네슘은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황산은 단맛을 더 적게 하고 쓴맛을 강화시킨다."
중산층의 맥주, 페일 에일
영국 양조의 특징을 바꾼 주용성에도 불구하고 IPA의 전성기는 짧았다. 불과 30여 년이 안되었다. 1880년경에는 수출량이 빠르게 격감하고 있었다. 영국 양조업자들은 독일 라거 양조업자들의 열정을 따를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식민지인 아프리카에 라거를 공급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 식민지와 정착지에도 교두보를 구축했다. 하지만 영국의 양조업자들은 그들의 방법을 바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자신의 양조장에 거액의 투자를 해놓은 상태였고 위대한 제국의 일원으로서 숙적인 독일이 개발한 방법인 하면 발효 방법을 사용할 생각 역시 없었다. 그리고 영국의 양조업자들에겐 이제 충족시켜야 할 내수 시장이 있었다.
새로운 중하위 계층은 노동자 계층이 좋아하는 다크 맥주를 원치 않았다. 그들은 페일 에일을 열렬히 환영했다. 특히 맥주가 병에 담겨 집까지 배달되는 게 가능해졌을 때 더욱 그러했다. 페일 에일의 전국적인 판매는 철도 시스템이 완비되면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버톤 양조업자들은 더비(Derby)를 통해 물자를 버밍햄 라인에 공급하고 거기서 다시 전국적인 철도망으로 전달되었다. 런던의 성 판크라스 역의 저장고는 버톤 맥주를 대규모로 수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1840년대 동안 버톤 양조업자의 생산량은 연간 70,000 배럴에서 300,000 배럴로 증가했다. 1851년 경에는 마을에 15개의 양조장이 있었는데, 올소프와 바스가 전체 생산량의 70%를 책임졌다. 1850년에서 1880년 사이 버튼 양조 산업은 매 10년마다 3배씩 규모가 커졌다. 바스는 1874년 올소프를 앞질렀는데, 연간 생산량이 900,000 배럴이었다. 바스는 이미 세계에서 가장 큰 양조장이 되어 있었다. 바스가 20세기를 맞이했을 때엔 연간 1,500,000 배럴 이상을 생산하고 있었다.
병에 담긴 페일 에일과 비터의 등장
바스와 경쟁자들이 만드는 맥주의 성질은 변화하고 있었다. 인디아 페일 에일은 수출을 위해 개발되었고 발틱에서 상실한 거래를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알코올이 높고 홉이 잔뜩 들어갔다. 1880년경에는 가정의 음주자들, 특히 페일 에일의 중산층 소비자들은 더 약하고 쓴맛이 적은 맥주를 요구했다. IPA를 어느 정도 수정한, 새로운 페일 에일은 알코올이 낮고 호프가 적게 들어갔으며 회전율을 빨리 하기 위해 빨리 주조되었다. 양조업자들은 비용을 들여가며 맥주를 수개월 동안 저장했다가 돈이 수중에 들어올 때까지 다시 수개월 또는 몇 년을 기다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많은 양조업자들은 이제 배당금에 민감한 주주를 갖고 있는 공개된 기업이었다. 양조업자들은 또한 퍼브에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었는데, 생산품들의 판매경로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지만 20세기로 접어들면서 IPA는 거의 사장되었다. 그 자리를 병에 담긴 페일 에일과 드래프트로 마시는 비터(Bitter)가 이어받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요즘 IPA로 라벨이 붙은 맥주들을 간혹 볼 수 있지만 주로 오리지널의 모방작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러한 용어의 부활은 페일 에일 스타일이 양조의 발전에 끼친 위대한 공헌과 영국 사람들의 에일에 대한 지속적인 헌신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댓글 맥주 축제때 받아 온 크리스탈 몰트 밥솥에 당화시켜 세종류의 호프 1t씩 프라이밍해서 IPA담았는데.. 발효가 안됩니다..T.T 효모에 이상이 생겼나해서 5일 후에 불린 효모 한봉 더 넣어주었으나 여전히 감감무소식... 보름이나 발효조에 반응이 없어 오늘은 걍 병입할려구요.. 첫 실패작이 될 듯합니다. 기대가 컸었는데..
헉... 이러시면 안됩니다.. 여리는 이차저차하여 아직 실시를 못하고 있는데.. 저에게 꿈과 희망을 주셔야죠~~ 아무래도 엔젤님의 시연을 보고 작업에 착수해야겠습니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