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간의 안양소년원(정심여자정보산업학교)에서의 경험은 진귀하고 또 새롭고, 내 고민에 긍정적으로 무게를 더함과 동시에 삶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사람 대 사람으로 소통할 수 있었던 따뜻한 시간이었다.
나와 형수가 다른 네 분의 선생님과 맡은 반은 ‘불교반’이었고 16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을 모두 다 기억한다. 얼굴은 물론이다.)
3일 내내, 그들을 계속 관찰했고 특히 나를 계속 쳐다보고 특별히 호의를 보여주는 아이들은 더욱 대화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려 애썼다. 내가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었고 칭찬도 계속 해주었다.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레 우리들은 서로에게 다가가고 소통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그들과 (모두는 아닐지라도) 정말 친해졌고 앞으로도 나는 그들을 쉽게 잊진 못할 것 같다.
그들도 우리를 그렇게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 아이들에게 받은 편지(한 아이는 자신이 오랫동안 소원을 담았다던 팔찌를 주었다.)는 나를 행복하게 했다. 매일 이렇게 살면 좋을텐데, 뭐하러 힘들게 고생하며 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소년원 아이들은 '인간적'이었다.
일부 아이들은 순전히 자기 안에 있는 내부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감정에 솔직했으며 (적어도 내게는)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켰다. 그들의 감정과 표현들은 내게 정말 따뜻하게 다가왔고 난 환희에 가득 차 크게 웃었다.
그 아이들은 정말로 인간적이었다. 순간의 감정에 충실했고 그것을 표현하려 했다. 그리고 그것에 적대적인 경향이 묻어나지 않을 때, 그것은 순수해보였고 예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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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심여자정보산업학교 활동을 한 후에 든 생각들
1. 사회공동체와 개인 간의 갈등을 어떻게 할 것인가?
소년원의 아이들은 사회공동체에서 제대로 된 생활을 하기 어려운 아이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사회공동체에서 살 수 있도록 교육을 받은 뒤 편입되는 것뿐인가? 사회공동체 밖에서 살 수도 있지 않을까. 인간이 반드시 사회공동체 안에서만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사회공동체가 자신과 맞지 않을 때는 밖에서 살 수도 있지 않을까.
2. 사회공동체 밖에서 개인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가?
사회공동체 내에서 살 수 없다면 그 밖에서 살 수도 있지 않을까. 불가능한가. 중요한 것은, 사회 밖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억압과 인권 침해를 당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소년원이라는 곳은 사회공동체와 격리된 곳이라고 볼 수 있는데(소년원 아이들은 사진을 찍을 때 전부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되고 소년원은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다.), 그 곳에 간다는 것, 그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무시와 냉대를 받는다.
3. 예의범절이란 무엇이며 솔직함의 가치는 충분히 존중받고 있는가?
소년원 아이들은 대체로, 흔히 하는 말로 '싸가지'가 없는 편이다. 그러나 동시에 솔직하기도 하다. 행동에서 ‘위선’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위선이란 사실 내 주변에서 손쉽게 관찰할 수 있는 고려대 학생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내 눈에 그들은 정말 위선적이다.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과 주변의 긍정적인 시선을 이용하여 사회적으로 바르지 않은 행위로 인식되는 일들을 서슴없이 한다(수업 시간에 대놓고 자거나, 핸드폰과 노트북을 하거나, 수업을 아예 빼먹거나 하는 일은 아주 흔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만 한해서(특히 수도권 상위 대학교 재학생들) 그러한 행동이 ‘그럴 수도 있지’로 치부된다는 것이다. (소년원 아이들이 같은 행동을 했을 때, 과연 같은 시선을 받을까? 소년원 아이들과 대학교 아이들의 비교를 하지 않는다 해도, 대학교 수업은 마음대로 빠져도 되고 중고등학교 수업을 빠지는 것은 크나큰 악행인가?)
그러면서 고려대 학생들은 겉으로는 ‘바른’ 척을 한다. 안으로는 반대 생각을 가진 채 교수님들에게 깎듯이 대하고 사회적인 예의를 차리는 경우가 흔하다.
또한 이러한 행동들은 삶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내가 대학교 1년 동안 관찰한 흥미로운 사실인데, 고려대 학생들 중 상당한 수가 중고등학교 때 ‘불량청소년’들이 놀던 것과 똑같이 논다. 즉 행동 자체는 다르지 않은 경우가 있다. 다만 차이는 그것을 중고등학교 때 하느냐, 대학교에 와서 하느냐이다. 즉 고려대 학생들 중 일부는 중고등학교 때 자신이 하고자 한 것들을 대학교로 유예시킨 뒤 대학교 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방식은 향후 삶에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즉 자신의 사회적인 미래를 고려하여 현재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유예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을 보고 인내심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명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즐거움을 유예시키는, ‘솔직하지 않은’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미래에 대한 불안과 주변으로부터의 공부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 동기로 작용했을 때 특히 그렇다.)
인내와 순간의 즐거움에 만족하는 것 사이의 줄타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인내의 가치만이 과대평가되고 순간의 즐거움에 만족하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가치가 ‘생각이 없다’라는 말로 지나치게 폄하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4. 법은 선악의 판단 잣대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법을 어기면 악이고 준수하면 선인가? 사회공동체 내에서 선악은 그렇게 나뉘어질 수 있는가? 단지 법은 가치 판단과는 별개로 존재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물음이 있다.
중고등학교 때의 흡연을 예로 들 수 있다. 활동 과정 중 겪게 된 놀라운 사실이 있다. (중고등학교 때의)흡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물음에 대해, 대다수의 아이들은 흡연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신의 자유라고 말했다. 이는 흥미로운 지점이다. 생각해보면 담배를 중고등학교 때 규제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한다. 여기서 자유란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는데, 건강할 자유는 이에 포함될 수 있다. 그렇다면 국가는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즉 아이들을 위해서) 담배를 규제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충분히 아이들에게 설명이 되는가? 충분한 배경 설명 없이 단순히 폭력적으로 규제되지 않는가? 그리고 아이들이 그러한 국가의 관심을 완전히 배제하고자 할 때, 그들의 선택지는 단순히 위법 행위를 하는 것 밖에 없는가?
사회적인 시선도 (어쩌면 가장 큰)문제이다.
법은 선악의 판단 잣대로 기능하는 경우가 크다. 그리고 그러한 잣대는 사람들에게 내면화된다. 다시 담배의 예를 들자면, 중고등학생 때 흡연을 하는 아이는 ‘나쁜 아이’라고 인식되는 경우가 흔하다. 교사들을 포함한 성인들이 그렇게 인식하며, 또래집단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심지어 흡연을 하는 본인도 그렇게 인식하는 경우도 있다.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특히 실제 아이들과 만난 뒤에 던진다는 점에서 정말 관심이 가는 물음들이다.
첫댓글 승환샘^^ 철학적인 성찰은 제게도 흥미롭고 답을 찾는 과정에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네요. 두 샘의 진지한 관심과 관찰, 노력으로 친구들과 소통한 아름다운 흔적으로 저도 깊은 울림을 가져갑니다. 함께 해서 고맙습니다. 뿌듯하기도 하고요^^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