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7일, 두 번째 지인여행으로 안면도 해변을 따라 노을길을 걸었다.
그리 많은 인원은 아니었지만 여행이 성사되어 모두에게 소개하고 싶은 멋진 길을 함께 걸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고 기뻤는지 모른다. 그러나 떠나기 며칠 전부터 들려오는 날씨예보에 신경이 쓰였다. 올 들어 제일 춥다는데 바닷가 바람은 얼마나 셀까 염려되는 상황. 한편으로 서해안 일대의 눈 예보가 있어, 화창하던지 아예 눈이 펑펑왔으면 좋겠다 욕심내며 여행을 기다린다.
여행을 떠나는 날, 집밖을 나서는데 날씨는 차갑지만 다행히 바람이 잔잔하다. 게다가 오후 들면서는 기온도 점점 올라 걷기에는 무리가 없는 날씨다. 소원대로 눈도 흩날리고 해님이 구름과 숨바꼭질하며 다채로운 구름의 향연을 펼쳐준 덕에 해넘이는 못 봤지만 여행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지 않았나 싶다.
추운 날씨 덕에 보너스도 챙겼다. 주말임에도 태안으로 내려가는 길이 전혀 지체되지 않아 예정에 없던 고암 이응노 화백의 생가기념관, ‘이응노의 집’을 방문한 것이다.
고암은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파리에 정착한 후 말년에는 그리던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파리에서 눈을 감은 비운의 미술가로, 동양화를 비롯해 문자추상, 인간군상 등 다채로운 화풍과 기법을 펼쳐낸 세계적인 화가이다. 그런 그의 고향인 홍성에 지난달 생가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기념관은 ‘풍경의 건축가’로 불리는 조룡상 씨가 맡았다. 고암이 생전에 바라보던 풍경을 회복하고자 했던 건축가는 기념관을 둘러싼 산과 연못, 밭이 어우러져 그 자체로 하나의 기념관으로 구성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주위의 경관과 어우러지는 기념관과 생가가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인다. 튀지 않으면서도 단아한 생가와 기념관건물이 멋스럽다. 기념관 내부 역시 통유리로 밖의 풍경이 하나의 화폭처럼 다가오도록 구성하고 지그재그로 구성된 전시실과 평평하지 않은 복도는 고암의 굴곡진 삶을 표현했다고 한다.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과 어우러진 복도의 그림자까지 멋지고 인상적인 기념관이다.
동양화 및 문자추상을 비롯해 조각 등 다양한 기법과 시도가 눈에 띄는 이응노 화백의 다채로운 작품들은 힘차고 역동성이 느껴졌다. 밖에 나서니 마당의 넓은 연못에는 연잎들이 얼어있는 모습이 쓸쓸하면서도 운치 있다. 여름에 연꽃이 만발할 때 다시 방문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암의 예술혼뿐 아니라 고암의 미술세계를 건축으로 표현해 낸 건축가의 작품세계까지 한꺼번에 만난 행복한 시간이었다.
점심은 안면도에 도착하기 직전에 있는 당암포구에서 싱싱한 영양굴밥으로 든든하게 먹고 노을길을 걷기 시작한다. 노을길은 굽이굽이 리아스식 해안이 아름다운 태안해안국립공원에서 조성한 해변길 6구간 중 올해 개통한 부분이다. 백사장항부터 일몰이 아름다운 꽃지해변까지 총 길이 12km를 걷는 길이다.
이날은 추운 겨울날씨를 감안해 삼봉해변부터 꽃지해변까지 10km를 걷기로 한다.
소나무숲 사이로 걷는 호젓한 사색의 숲을 지나니 그림같은 바다가 펼쳐진다. 짙게 드리운 구름사이로 쏟아지는 빛내림이 수평선 일부를 반짝반짝 빛낸다. 빛나는 수평선이 황홀하다. 어둠이 있어 빛이 드러난다더니 정말 흐린 날씨가 빛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내는 아름다운 광경을 맘껏 즐긴다.
삼봉해변부터 기지포 해변을 지나는 구간은 나무데크로 길이 잘 닦여있어서 휠체어나 유모차도 다닐 수 있도록 조성돼 있는 착한 바다길이다. 길의 길이가 마침 1004미터라 ‘천사길’이란 이름이 붙어있다.
겨울바다는 춥지만 그래서 한적하다. 그날만큼은 우리가 그 광활한 바다와 하늘의 주인이었다. 회색빛 도시에 갇혀있던 불쌍한 영혼들이 넓은 자연의 품에 안기며 그 넉넉함과 아름다움에 위로받고 즐거워하는 시간이었다.
진눈깨비가 흩날린다. 기대했던 만큼의 함박눈은 아니지만 눈이 날리는 바닷가를 걸어서 좋았다. 넓디넓은 안면해변을 걸어 두여전망대에 오른다. 누군가가 바닷가에 포크레인이 지나간거냐고 한다. 얼핏보면 그런 느낌이 들만큼 신기하게 패여있는 바닷가 바위가 장관이다. 물고기를 잡던 흔적인 독살도 보인다. 바위가 드러난 푸른 바다를 구경하며 아픈 다리도 쉬어주고, 마음의 답답함도 같이 내려놓는다.
완주하기가 벅찬 분들은 밧개해변까지만 걷고 차로 이동하기로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세 개의 고개를 넘어 꽃지해변으로 향한다. 꽃지해변 직전에 있는 방포해변을 걸을 때 쯤 하늘에 붉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고, 바닷물도 밀물 때라 조금씩 모래사장을 촉촉이 적신다. 어디가 하늘이고 바다인지, 그리고 모래사장인지 경계는 허물어지고 은은하게 빛나는 모습이 아름다워 눈을 뗄 수 없었다.
목적지인 꽃지해변에 도착하니 일찍 도착해 바닷가 간이 포장마차에서 해삼멍게에 한잔하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분들도 보이고, 하늘에 붉은 기운이 사라지기전에 한 장이라도 더 담고자 열심히 촬영에 열중하는 분들도 눈에 띈다. 그렇게 여행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짙게 낀 구름으로 할미 바위와 할애비 바위 사이로 떨어지는 꽃지해변 낙조는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걷는 내내 만났던 아름다웠던 바다와 하늘과 빛나던 수평선은 나의 아쉬움을 달래기 충분했다.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니 모두들 피로감이 역력하지만 홍조 띤 얼굴은 건강하고 밝은 기색이다. 함께 여행한 분들의 환한 표정에 내 마음까지 덩달아 행복해졌다.
첫댓글 태안 노을길 걷기에 함께 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떡과 귤, 막걸리 및 유익한 책 2권을 후원해 여행에 더 큰 재미와 활력을 불어넣어주신 분들 덕에 여행이 더 풍성하고 정겨웠습니다. 마음써주신 모든 분들께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이번 여행의 상쾌함과 즐거움이 다시 돌아온 일상에 작은 활력이 되길 바랍니다. 다음 지인여행도 기대해주세요^^
가장 춥다고 하던 날 ~멋진 여행에 초대해주서 감사~
한적하고 여유롭고..온통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던 해변길과 소나무숲과 작은 산등성과 ....
잊을 수 없는 멋진 추억이 될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벌써 다음 여행이 기다려집니다
강추위 덕에 호젓한 겨울바다와 이응노화백기념관을 덤으로 받는 걸 보면,
이런 게 여행의 맛이고 반전아닌가 싶어요. ㅋㅋ 저도 즐거웠어요..
내가 빠지고 이렇게 잘 다녀오다니.... 사진으로나마 함께 걸었습니다.
매림님 빼고 가서 정말 아쉬웠어요. 참 좋아하셨을텐데...
대신 1월 지인여행으로 겨울운치를 한껏 느낄 곳을 준비중이니, 그 땐 꼭 같이 가세요.... (아마도 1월14일쯤... 강원도 자작나무숲..)
초록별님, 전 1월에 러시아 자작나무 숲 보러 갈게예요.
춥다고 집에서 뒹굴며 토요일을 보냈는데 이렇게 멋진 곳을 다녀오셨군요. 꼭 가보고 싶은 길이네요. 다음 여행을 기약해봅니다.
정말 권해볼만한 길입니다.(한여름 피서철만 제외하고)
기지포해변을 걸으면서 보니까 사구식물이 많이 서식하던데... 5-6월 해당화필때도 참 좋을 것 같아요.
너무 멋진 해변길을 걷도록 인도해준 초록별님께 감사를 ^^**^^
멋진 해변 그리고 적당히 비취어준 햇볕 황홀한 빗내림
아직도 그곳에서 해매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