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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보 시인의 알기 쉬운 시 창작교실
당신도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연재 9회]
임 보 (시인 • 전 충북대 교수)
[제24신]
활유活喩와 의인擬人의 시법
로메다 님,
지난 몇 차례의 편지에서는 주로 시의 내용에 해당하는 ‘시정신’에 관해서 얘기했습니다. 이제는 다시 시의 형식, 시적 장치에 관한 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시적 장치의 특성을 감춤(은폐지향성), 불림(과장지향성), 꾸밈(심미지향성)이라고 지적한 것 기억하시지요? 시에서의 비유의 속성은 불림 곧 과장성이라고 했고, 비유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은유는 불림과 감춤의 두 특성을 아울러 지녔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시에서 즐겨 구사되고 있는 활유법과 의인법에 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활유와 의인도 수사법에서는 비유의 범주 안에서 다루어집니다. 두 가지 표현법이 유사하지만 같지 않습니다.
「활유活喩와 의인擬人」에 관한 다음의 내 글을 보면서 그 차이를 익히고, 의인법을 구사하는 방법도 터득하기 바랍니다.
생명이 없는 무생물에게 생명성을 부여하여 생물처럼 그리는 것이 활유법이고, 인간이 아닌 비인물체에게 인격을 부여하여 사람처럼 표현하는 것이 의인법이다. 활유와 의인도 수사법상 비유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가)
겨울 산은 눈 속에서/ 오소리처럼 웅크리고 잠들어 있다.//
산의 체온을 감싸고 돋아나 있는/ 빽빽한 빈 잡목의 모발毛髮들//
포르르르/ 장끼 한 마리/ 포탄처럼 솟았다 떨어지자//
산은 잠시 눈을 떴다/ 다시 감는다.
―임보「冬眠」전문
(나)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수녀修女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김동명「파초」부분
(다)
감옥 속에는 죄인들이 가득하다/ 머리통만 커다랗고/
몸들이 형편없이 야위었다//
세계를 불태우려고/ 기회를 엿보는 어릿광대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일생을 감옥에서 보낸다.
―이세룡「성냥」전문
글 (가)는 겨울 산을 한 마리 짐승이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무 생명체인 ‘산’이라는 사물에 생명을 부여하여 한 마리 짐승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무생물을 살아있는 생물처럼 다루는 기법을 두고 ‘활유活喩’라고 한다.
글 (나)에서의 화자는 ‘파초’라는 식물을 여인처럼 생각하고 있다. 사람이 아닌 비 인물을 인격화해서 사람인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데 이를 ‘의인擬人’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생명체인 파초를 의인화한 것이니까 활유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글 (다)는 성냥갑을 감옥으로, 성냥개비를 감옥 속에 갇혀 있는 죄수들로 다루고 있다. 생명이 없는 성냥개비를 죄수로 인격화해서 표현했으니 이는 활유이면서 또한 의인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활유와 의인은 유사하지만 같지 않다. (가)와 (나)에서처럼 확연히 구분되기도 하고 (다)에서처럼 두 기법으로 다 설명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수사법상의 기교로 본다면 활유보다는 의인이 한 단계 위인 상급의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의인법이 실현되는 경우를 다음의 몇 가지로 구분해 보기로 하자.
첫째, 비 인물에게 인간적인 동작動作이나 사고思考, 발언發言 등을 부여한다.
예를 들자면, ‘바다가 춤춘다(춤추는 바다)’는 표현은 인간적 동작인 춤추는 행위를 바다에 부여한 것이다. ‘산은 사람들을 미워한다(사람들을 미워하는 산)’라는 문장은 산으로 하여금 인간처럼 미워하는 사고를 하도록 의도한 것이다.
‘가까이 오지 말라/ 더구나 내 몸에 손대지는 말라/ 어기면 경고 없이 해치워버리겠다’(―이형기「고압선」부분)’라는 작품에서는 고압선에게 인간처럼 발언을 시켜 의인화하고 있다.
둘째, 비 인물에게 인체적 조건을 부여한다.
‘진달래 입술’ ‘산의 허리’ ‘바다의 가슴’ ‘달의 얼굴’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체의 부분을 끌어다 사물에 부여함으로 인격화를 꾀하는 것이다.
셋째, 비 인물에게 문화적인 속성을 부여한다.
‘파초의 치마가 푸르다’라는 표현에서 ‘치마’는 잎을 은유한 것이면서 한편 인간의 문화적 속성인 의상을 파초에게 부여한 것이므로 의인법이라고 할 수 있다. ‘고압선’을 ‘흉악범’이라고 했다면 이 역시 의인법적 은유다. 글 (다)에서 ‘성냥갑’을 ‘감옥’에 비유하고 ‘성냥개비’를 ‘어릿광대’와 ‘죄인’들에게 비유한 것 역시 문화적 속성을 사물에게 부여한 의인법적 은유인 것이다.
활유나 의인은 화자의 감정이 사물에 전이轉移된 표현이다. 예를 들어 엄동설한에 눈 속에 묻혀있는 바위를 보고 '얼마나 춥겠는가' 하고 생각하는 것은 바위가 아니라 화자다. 사실 생명체가 아닌 바위는 감각이 없으니 추위와 더위를 느낄 까닭이 없는데 이를 바라다본 인간이 자신의 감정으로 사물을 해석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사물에 대한 동류의식의 발동이며 세계에 대한 시인의 애정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그 정신은 휴머니즘에 자리한다. 그러나 그 표현의 기법―곧 무 생명체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활유나 비 인물에게 인격을 부여하는 의인은 과장 내지는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역시 ‘불림의 기법’인 시인의 엄살로 설명이 가능하다.
―『엄살의 시학』pp.36~39
로메다 님,
활유나 의인법은 정체된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기법이므로 활력을 느끼게 합니다. 다음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그 생동감을 맛보도록 하십시다.
흉악범 하나가 쫓기고 있다
인가人家를 피해 산 속으로 들어와선
혼자 등성이를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겁에 질린 모습은 아니다
뉘우치는 모습은 더욱 아니다
성큼성큼 앞만 보고 가는 거구장신巨軀長身
가까이 오지 말라
더구나 내 몸에 손대지는 말라
어기면 경고 없이 해치워 버리겠다
단숨에
그렇다 단숨에
쫓는 자가 모조리 숯검정이 되고 말
그것은 불이다
불꽃도 뜨거움도 없는
불꽃을 보기 전에
뜨거움을 느끼기 전에 이미
만사가 깨끗이 끝나 버리는
3상相3선식線式 33만 볼트의 고압 전류…
흉악범은 차라리 황제처럼 오만하다
그의 그 거절의 의지는
멀리 하늘 저쪽으로 뻗쳐 있다.
―이형기「고압선」전문
로메다 님,
호젓한 산 속에 세워져 있는 고압선의 철탑을 거구장신의 흉악범으로 보았습니다. 철탑은 생명이 없는 존재니까 활유면서 의인법이 되겠군요. 철탑 자체는 움직이지 않는 정물이지만 듬성듬성 연이어 있는 모습에서 성큼성큼 산을 넘어가고 있는 무법자로 묘사한 것이 실감나지 않습니까? 33만 볼트의 고압전류를 지니고 있는 가공의 철탑이므로 흉악범으로 설정한 것이지요. 얼마나 생동감이 넘친 작품입니까?
활유나 의인의 기법은 사물에 대한 친화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며 또한 사물을 자아화의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해석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 속에는 사물에 대한 화자의 따스한 체온이 담겨 있습니다. 이 역시 불림(과장)의 한 기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즐겨 사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25신]
상징, 그 감춤의 시법
로메다 님,
한가위가 지나자 이젠 아침저녁으로 스산한 기운이 감돌고, 성급한 담쟁이 잎새들은 벌써 고운 빛깔로 물들기 시작하는군요.
지난번엔 불림[과장]의 한 기법이라고 할 수 있는 활유와 의인에 관해서 얘기했지요. 오늘은 감춤[은폐]의 한 시법인 상징에 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의 내 글 「시의 은폐隱蔽 지향성․1」을 먼저 읽는 것이 좋겠군요.
모든 언술言述은 욕망의 기록이다. 언술 속에는 화자의 소망 곧 의도한 바가 담겨 있게 마련이다. 대개의 경우는 그 의도가 양성적으로 드러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시의 대표적인 표현기법 가운데 하나는 감춤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의도하는 바를 노골적으로 적나라하게 표현하기보다는 은근히 숨겨서 드러내고자 하는 은폐 지향적 경향이다. 직설보다는 암시가, 직유보다는 은유가 시에서 소중히 다루어지고 있는 것에서도 그러한 경향을 느낄 수 있지만 감춤의 대표적인 장치는 역시 상징象徵이라고 할 수 있다.
막강한 군사력과 일사불란한 통치체재를 자랑하던 당국도 속수무책이었다. 소리 없이 내습한 안개는 퇴치할 수도 없고, 해산시킬 수도 없고, 연행 구금할 수도 없었다. 교통이 일체 두절됨에 따라 생필품 공급이 중단되어 경제적 마비 상태가 발생했고, 불가시현상의 지속으로 인하여, 폭행․약탈․살상 등 사회적 혼란이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천문기상학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이 이상한 안개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서 나온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김광규 「마감 뉴스」 부분
이 작품은 안개의 내습 때문에 한 나라가 마비되어 극도의 혼란 속에 빠져들고 있는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안개는 현실적인 안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마지막 행에서 넌지시 암시한다. 여기서의 안개는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그 무엇을 대신하는 매체(vehicle)다. 그러나 말하고자 하는 주지(tenor)가 무엇인가를 추적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서 나온 것’으로 미루어보아 백성들의 ‘저항’ ‘불신’ ‘증오’ ‘태업怠業’ 등 다양하게 추정할 수 있다. 말하자면 주지가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미확정적인 개방성을 지닌다. 이것이 상징의 구조다.
은유는 비록 주지가 숨어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하나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추정이 비교적 용이하지만, 상징의 경우는 주지를 다양하게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모호성을 유발한다.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향기롭다. 香氣가滿開한다. 나는거기墓血을판다.묘혈도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속에내가들어앉는다. 나는눕는다. 또꽃이향기롭다. 꽃은보이지않는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잊어버리고再처거기묘혈을판다. 묘혈은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꽃을깜박잊어버리고들어간다. 나는정말눕는다. 아아. 꽃이또향기롭다. 보이지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李箱「절벽(絶壁)」전문
이 작품은 ‘꽃’과 ‘묘혈’에 대한 두 진술로 이루어져 있다. 꽃이 향기롭지만 보이지 않고 묘혈을 파지만 역시 보이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읽어보고 여기서 언술되고 있는 꽃과 묘혈이 사물 그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곧 현실적 정황이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꽃과 묘혈은 말하고자 하는 무엇인가를 숨기면서 그것을 대신하고 있다.
숨기고 있는 그것이 무엇일까? 이것을 풀어 보는 일이 곧 상징의 장치를 여는 재미이기도 하다. 묘혈이 죽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다. 묘혈을 파는 행위는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꽃은 무엇의 상징인가. 꽃은 생명체인 식물의 삶의 절정을 표상한다고 할 수 있다. 곧 꽃은 삶의 상징으로 추정할 수 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삶은 얼마나 매혹적[향기]으로 다가오겠는가. 그러나 불치의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때때로 삶의 매혹도 잊고 죽음의 유혹에 사로잡히기도 할 것이다. 삶과 죽음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도 없으면서[보이지 않는다] 상반된 두 세계에 반복적으로 경도(傾倒)되는 심리적 갈등을 표출하고 있다. 살고도 싶고 죽고도 싶은 이율배반의 모순 심리를 되풀이하여 맛보면서 화자는 진퇴양난의 절박함에 이른다. 그래서 ‘절벽’이라고 했으리라.
은유와 구별되는 상징구조의 또 다른 특징은 주지와 매체의 관계가 추상적인 것과 구상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정황을 구체적인 사물로 바꾸어 드러낸다. 그런 면에서 생각하면 상징구조는 감춤의 성질과 아울러 들춤(과장성)의 의도도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시인들은 자신이 의도한 바를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은근히 감추어 표현하려는 것인가. 그런 은폐 지향적 성향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S. 프로이트의 견해에 의하면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욕망(id)을 검열 통제하는 도덕적 자아(super ego)가 있어서 욕망이 분출하지 못하도록 억제한다고 한다. 그래서 욕망(id)은 감시자(super ego)의 눈을 피해 변장된(감추어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꿈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꿈은 욕망의 상징인 셈이다. 시인들의 꿈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가 상징의 구조를 갖게 된 것은 심층심리의 본능적 관습에서 연유된 자연스런 결과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감추고자 하는 성질을 선천적으로 강하게 타고난 것 같다. 인간의 사회에 고도의 거짓말이 횡행하고 의상과 화장술의 발달을 보게 된 것이 결코 우연의 소치만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상징은 고급 위장술이다. 그러니까 시인들은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수준 높은 위장술사인 셈이다.
―『엄살의 시학』pp.53~56
로메다 님,
수사학에서는 상징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즉 정신이나 사상, 관념 같은 불 가시不可視의 세계를 감각적인 사물 곧 물질과 같은 가시可視의 세계로 바꾸어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불 가시의 세계(A)-------------→가시의 세계(B)
idea (관념, 사상)---------------→image(감각적 사물)
정신--------------------------------→물질</ul>
예를 들자면 ‘평화’나 ‘구원’ 같은 손에 잡히지 않은 추상적인 정황을 구체적인 형상을 지닌 ‘비둘기’나 ‘십자가’ 같은 사물을 끌어다 표현하는 기법입니다. 주지인 (A)대신 매체인 (B)로 나타냅니다. 이미 비유의 구조를 설명할 때 주지(원관념, tenor)와 매체(보조관념, vehicle)를 거론한 바 있지요? 상징도 두 사물의 결합 양식이니까 넓게 보면 비유의 범주 속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상징에서는 주지는 숨고 매체만 드러납니다. 전에 ‘은유의 세 유형‘을 설명하면서 제시했던 ’생략의 구조‘를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상징은 바로 그 주지가 생략된 은유 구조와 흡사합니다. 이 두 구조에서 우리는 감춰진 주지를 암시에 의해 추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은유와 상징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은유에서의 주지는 하나로 고정되어 있는데 상징에서의 주지는 다양하게 상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① ‘밤하늘의 눈들이 지상을 지켜보고 있다.’
②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①에서의 ‘눈’은 ‘별’을 지칭하는 것임이 단순하게 드러납니다. 즉 주지와 매체의 관계가 1 : 1이므로 누구든 그 주지를 쉽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눈'은 '별'의 은유입니다. 그러나 ②의 글(한용운의「님의 침묵」)에서의 ‘님’의 주지는 단순하게 추정되지 않습니다. 보는 이에 따라 ‘조국, 불타, 애인, 진리, 自我…’ 등 다양한 상정이 가능합니다. 이처럼 상징은 하나의 매체를 통해 다양한 주지를 상기시키는 모호한 구조입니다.
로메다 님
상징과 은유의 구분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을 번거롭게 했나요? 그러나 너무 괘념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걸 잘 구분해야만 반드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글 쓰는 일을 논리적으로 따지다 보니까 그러한 이론들이 만들어졌는데, 그러한 이론을 알고 있는 것이 혹 도움이 될까 해서 얘기한 것뿐입니다.
로메다 님,
어떻습니까? 상징의 구조에 대해서 좀 이해가 가나요? 나는 앞에 인용한 내 글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에 의지하여 상징 구조의 배후를 설명해 보려고 시도했습니다만, 이해하기가 까다롭다면 그냥 쉽게 생각해도 상관없습니다.
상징은 숨기면서 말하는 것으로 상대방을 전복시키는 한 전략입니다. 숨기는 가운데 상대방을 사로잡는(혹은 골려주는) 인간만이 구사할 수 있는 고급 술수지요.
이 청명한 가을 밤 좋은 꿈꾸시고 환한 내일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제26신]
다시, 상징에 관해서
로메다 님,
지난번엔 시의 상징에 관해서 얘기했습니다.
관념이나 정신이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 표현된 형식이 상징의 구조라고 설명했지요? 시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만든 이 지상의 모든 문화들은 상징의 구조에 담겨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가 안 가지요?
생각해 보십시다.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상징이지요? 어떤 학교의 교표는 그 학교의 상징이고요. 횡단보도의 앞에 켜 있는 붉은 신호등은 ‘정지’ 하라는 의미의 상징이 아닙니까?
더 넓게 생각하면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음성으로 표현하는 ‘말’이나,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문자로 표현하는 ‘글’도 역시 상징입니다.
수사학에서는 집단이 규정해 놓은 것을 제도적 상징, 그리고 특정 민족의 규약인 언어를 언어적 상징이라고 구분하기도 합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하면 한 건축가가 그의 이상을 담아 어떤 건물을 설계했다면 그 건물은 그 이상의 상징입니다. 한 디자이너가 그의 생각을 담아 만든 의상은 그 생각의 상징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식을 가지고 만들어 낸 인간 활동의 결과물은 다 상징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만든 상징들의 숲에 갇혀 살아가는 복잡한 동물들입니다.
로메다 님,
지난 주말에는 지리산의 고운동孤雲洞을 찾아 나섰습니다. 신라의 최치원 선생이 머물던 길지吉地라는 곳이지요. 가는 길에 천은사泉隱寺라는 아늑한 절에 들렀습니다. 그 절에 걸려 있는 유명한 필적을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그 절에는 조선조 후대의 유명한 명필 이광사(李匡師, 1705~1777)라는 분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나는 그분의 유적을 보고 다음과 같은 글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는 글씨로 이름을 얻었던 분이다.
양명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인품 또한 대단했다고 전한다.
1755년 나주羅州에서 있었던 벽서壁書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의 백부伯父 이진유李眞儒가 처형되고
그에 연유된 원교는 함경도 회령會寧으로 유배되는데
그때 30여 명의 제자들이 그를 따랐다고 하니 그의 인품을 짐작할 만하다.
조정에서는 이를 문제삼아 그를 다시 남해의 신지도新智島로 이배시켰다.
원교는 그 섬에서 22년 간 갇혀 살다 끝내 헤어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만다.
전라도의 여러 사찰들은 그의 글씨를 다투어 간직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해남 대둔사와 지리산 천은사의 것이 유명하다.
얼핏보면 원교의 글씨는 멋이 없다.
한편으로 기울어 넘어질 것 같기도 하고
어떤 획은 힘이 빠져 구부러질 것 같기도 하다.
오죽했으면 제주도 귀양살이 가던 추사秋史가 초의艸衣를 만나러 대둔사에 들렀을 때
원교의 대웅전 현판을 떼고 자기의 것을 매달라 했겠는가?
그런데 그 추사가 8년의 유배 생활을 끝내고 돌아오던 길에 대둔사에 다시 들러
원교의 현판을 거듭 보고는 자기의 것을 떼고 원교의 것을 다시 걸라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남아 있다.
천은사 일주문엔 「智異山 泉隱寺」라는 유수체(流水體 : 흐르는 물처럼 자유롭게 쓴 글씨) 의 원교 현판이 걸려 있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 글씨로 하여
자주 일어났던 천은사의 화재火災가 멈췄다는 것이 아닌가.
로메다 님,
이 글을 여기에 끌어들인 것은 하나의 글씨 속에도 얼마나 무궁한 상징이 서려 있는가를 말하고자 해서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추사가 이광사의 현판을 다시 매달라고 했던 것은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그 글씨 속에 서려 있는 상징의 의미를 비로소 깨달은 것이지요. 천은사의 글씨가 화재火災를 막았다는 얘기는 그 글씨에 서린 주지主旨가 얼마나 강렬한 상징이었던가를 말하는 좋은 예라고 하겠습니다.
로메다 님,
시도 그 글씨처럼 강렬한 상징의 힘을 지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는 비유가 아니고는 말하지 않겠다고 비유의 기능을 역설했습니다만, 시인은 상징에 기대지 않고는 그의 장광설을 다 담을 수 없을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 쓴 「신발에 관한 동화」라는 내 졸시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아버지가 장에 가서/ 신발을 사 오셨다//
5남매의 신발/ 다섯 켤레 고무신이었다
성미 급한 형은/ 며칠 신다 굽이 터지자 엿 사 먹고 말았다//
마음 착한 누나는/ 매일 깨끗이 닦아 조심 조심 신었다//
개구쟁이 막내 동생은/ 개천이고 산이고 첨벙대며 신고 다녔다//
소심한 누이동생은/ 댓돌 위에 얹어 놓고 바라다만 보았다//
나도 돌밭길을 달릴 때는/ 두 손에 벗어 들고 맨발로 뛰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형제들을 불러 놓고/ 자신의 신발들을 가져 오라 이르셨다.
형은 없는 신발을 가져올 수 없었고/ 막내의 신발이 제일 엉망이었다//
가장 양호한 신발은/ 누이와 누님의 것//
새 신발이 필요한 자는 바꾸어 주리라/ 아버지가 이르셨다
그러자 손을 번쩍 든 놈은 오직/ 막내뿐이었다
―「신발에 관한 동화」전문(『우이시』 제194호)
로메다 님,
당신은 이 작품에 등장한 여러 형제자매들 가운데 어떤 유형에 가까운 인물인가요?
성경에 이러한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주고 간 달란트[돈]를 불리는 종들에겐 주인이 칭찬을 하고 불리지 못한 무능한 종을 꾸중한 이야기 말입니다.
이 글도 발상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신발을 둘러싼 한 가족의 얘기만을 한 것이 아닙니다. 신발은 하나의 상징물입니다. 신발은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일 수도 있고 ‘재산’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혹은 ‘환경’이나 ‘도구’가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여기에 등장한 형제자매들 역시 다양한 성품과 능력을 지닌 각계각층의 인물들을 상징합니다.
상징의 구조는 이처럼 숨기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포괄적으로 말합니다. 시에서의 상징의 매력과 기능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앞의 작품에 등장한 ‘고무신’은 내가 처음으로 설정한 개인 상징입니다. 개인 상징은 생소해서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적인 발언은 참신한 개인의 입을 통해서 성취됩니다. 이것이 시를 쓰는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로메다 님,
상징은 감추면서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말하는 기법입니다. 작품 속에 당신만의 상징법, 개인 상징을 끊임없이 모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환절기에 몸조심하십시오.
천은사 입구에서 내가 잡은 수홍교의 석양 풍경과 원교의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보내니 완상하시기 바랍니다.
-월간『우리詩』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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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많은 교훈을 얻었습니다 은유와 상징 그리고 비유 , ,남이 말 하지않은 새로운 언어 , 이제 시작한 시 공부가 너무 재미 있습니다 어떤땐 가슴이 터질것 같은데 ,, 그만 표현할 방법을 몰라 안타까워 할 때가 있습니다 더 많은공부를 통해 조흔시 남에게 쉽게 이해되고 감흥을 줄 수있는 글을 써버려고 노력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