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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강동문인협회 대마도 문화 탐방기
김상호
강동문인협회 출범 29년만에 처음으로 추진한 해외 문화탐방이 성황리에 끝났다. 비록 가장 가까운 대마도지만 회원만으로 총 32명이 참가하였으니 우리 협회의 결속력이 어찌 대단하지 않으랴. 대마도는 지리적으로 우리와 일본의 사이에서 완충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역사의 변곡점에서 언제나 일본편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정복의 기록도 몇 차례 있었지만 우리가 승자란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산재한 유적이 대부분 우리의 아픈 역사에 연결되어 있었다. 특히 일본이 한반도 침략의 논거로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의 혼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역사의 진실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서울에서 내려가 부산에서 일박하고 대마도에서는 1박 2일 동안 남에서 북으로 올라오는 총 2박3일간의 꽉찬 일정은 동선을 최소화한 가장 알찬 여행이었다. 이 멋진 여행을 기획한 이경주 회장님께 감사드리면서 추억 가득한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제1일 부산에서의 일박
부산에서의 일박은 아침 7시경에 탑승해야 하는 대마도행 쾌속선 시간에 맞추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여행단의 본진은 4.17 오후 2시 수서역에서 출발하는 SRT를 타지만 나는 업무출장을 겸하여 미리 도착하여 부산역에서 기다렸다. 오후 4시 반이 되자 부산역 2층으로 반가운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이번 여행에 동참하신 원로 선생님들의 모습이 오늘 따라 더욱 신선하게 느껴진다. 김중위 장관님을 비롯한 역대 회장님, 한국문협 이혜선 부이사장님 등 그 이름들이 눈부시다. 이밖에도 특별히 친숙한 여러 선생님들을 일일이 거명할 수 없음에 양해를 구한다.
부산의 약사
원래의 부산은 동래부(府)에 속한 부산면(面)이었고 부산진은 군대가 주둔하던 성이다. 부산진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 선봉이 처음 상륙한 곳으로 첨사 정발장군이 장병들과 함께 전사한 곳이다. 현재 초량 인근에 장군의 동상을 세워 기리고 있다. 한편 동래부사 송상헌은 백성들과 함께 순절하였는데 그가 남긴 마지막 글은 임금에 대한 충성심과 선비로서의 기개 그리고 뛰어난 문장력을 자랑한다. “달빛에 비추인 외로운 성은 줄지어 선 군진을 높은 베개로 삼았고 군신의 의리가 이토록 무거움에, 아버님에 대한 은혜는 오히려 가벼운 듯 하구나 (孤城月暉列陣高枕 君臣義重父子恩輕). 후일 광해군은 동래에 있던 그의 유해를 청주로 옮겨 묘역을 조성하고 충렬사를 지어 후세의 사표로 삼는다.
자갈치 횟집의 만찬
부산은 용두산 공원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남포동은 광복동, 중앙동과 함께 구도심 중심지역이다. 자갈치시장은 부산의 남쪽 포구라는 뜻의 남포동에 위치 해 있고 자갈치는 바닷가에 자갈이 많고 물고기 치자를 붙여 이름처럼 싱싱한 생선의 집산지가 되었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한 일정이 첫날 자갈치시장 횟집이었다. 평소 어울리기 힘든 여러 선생님들과 회식자리를 갖는 데 기대가 컸다. 오랜만에 와 본 생선회의 고향 자갈치에서의 회 맛이라 특별하다. 술이 한 순배 돌아가자 윤영남 명예회장의 순발력이 빛을 발한다. 얼마 전 국가보훈처장과 함께 독립투사 최재형 선생의 연해주에서의 발자취를 찾는 여행에서 가져 온 듯 보드카를 내어 놓는다. 더하여 언제나 듣는 순간에는 아하 하면서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 멎진 건배사룰 곁들인다. 보드카 이름이 룰렛이었던가 이름처럼 화끈하다. 어쨌든 문단으로 보면 건배사 차례가 아직 멀었지만 예총회장이라는 자리가 이른 건배사를 만든다.
야경 씨티투어
씨티투어는 도시의 명소를 한꺼번에 둘러 볼 수 있는 가장 편리한 관광수단이다. 부산역에서 출발하는데 3개 정도의 노선이 운행되고 특히 2층 오픈형 리무진를 타고 해운대와 송정, 용궁사를 답사하는 바닷길 코스는 환상적이다. 우리는 송도. 광안리. 오륙도의 야경을 즐기는 씨티투어버스를 타고 인근에 있는 송도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밤이라서 그런지 방향 감각이 없다. 영도의 끝자락이 보이고 송도 바다 위로 오색 케이블카가 밤하늘을 수 놓고 있었다. 이곳에는 바다 위로 여러 형태의 다리와 유리로 된 출렁다리를 체험할 수 있는 아기자기한 코스로 조성되어 있어 저마다 사진 찍기에 바쁘다. 밤이라 높이를 분간할 수 없지만 유리바닥 사이로 바닷물이 출렁이는 모습에는 움찔해진다. 오색 케이블카를 뒤로 하고 다시 버스에 올라 광안리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버스는 부산항대교를 지나 왔지만 육지의 접속도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어디쯤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광안리 해수욕장에서는 약 1km를 걸으면서 광안대교의 야경을 감상하였다. 수많은 인파로 발 디딜 틈 조차 없었고 모래 위에 쓰여지는 영상시만 기억된다. 광안리에서 나온 버스는 용호동 스카이 라인을 돌고 돌아 오륙도 바닷가 언덕에 내렸지만 어둠만이 반기고 있었다.
다리가 아름다운 부산
부산항대교는 영도 등 부산의 서남방향에서 동쪽의 남구나 해운대 방향으로 갈 때 복잡한 도심을 거치지 않도록 바다 위로 건설된 다리이다. 길이 약 3.4킬로미터로서 사장교 구간은 약 1.1킬로미터다. 내일 아침 부산항을 떠날 때 사장교 구간 아래를 지나게 되는데 야간에는 휘황찬란한 불빛이 매우 아름답다. 부산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다리는 2002년도에 개통한 광안대교다. 길이 약 8킬로미터 2층 사장교로서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곳에 건설되어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절경의 이기대 해안과 100층 고층건물이 있는 수영만을 연결한 것 같은 느낌이다. 이곳의 경관이 가장 돋 보이는 장소는 황령산이다. 특히 봄꽃이 지천으로 피는 날에 오른다면 “돌아오라 소렌토로” 노래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환상적 경관이다. 누가 내게 부산의 10경을 선정하라면 제1경으로 꼽고 싶다.
멋진 이름과 허무한 숙소
부산에서의 숙소는 부산역 앞에 위치한 파밀리에 게스트하우스다. 이름이 멋져 기대가 컸지만 2층 침대방이라 솔직히 실망이었다. 무작위로 방 배정을 하여 나는 이광녕.김테경.김영석 선생님과 한 방이다. 김중위 장관님이 불편함을 이기지 못해 모텔을 구해 나갔다. 뒤 따라서 몇 분이 술 한잔 하려 나가고 곧 이어 나도 따라 나섰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음식점이 문을 닫아 가게에서 사 먹는단다. 나는 차라리 돌아가서 잠이나 자려고 그냥 돌아왔다. 나와 이광녕 고문님은 아래층 침대에서 일찍 잠들었다. 두 젊은 김 선생의 모습을 본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다.
제2일 대마도의 하루
대마도행 쾌속선을 타기 위해 어둠이 깔린 아침 5시에 아침식사를 하고 국제여객터미널로 향했다. 숙소에서 직선거리로는 오백미터도 안되지만 부산역이라는 장애물을 건너가야 하니 약 15-20여분이 걸린다. 택시를 타고 가는 분들도 있었지만 수킬로미터를 돌아가야 한다. 길을 잘 알고 있는 나는 몇 분과 함께 도보로 출발하였는데 한상림 선생님이 용케도 잘 따라 붙었다. 부산에서 대마도 이즈하라 항 까지는 약 2시간이 걸리지만 한국전망대가 있는 대마도 북단까지는 채 1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이즈하라는 대마도의 동쪽 해안선의 끝에 있으므로 한 시간 정도 남으로 내려가야 한다. 이번 여행은 입도시에는 이즈하라, 귀국시에는 북쪽에 있는 하타카츠 항을 이용하게 된다.
쾌속선 코비
8시40분에 쾌속선 코비를 타고 대마도로 향했다. 코비는 KOREA-BEE의 조어로서 벌처럼 날아 간다는 의미인가. 선체는 작아도 제트엔진으로 바닷물을 분사하여 수면에서 약간 떠서 항해하므로 왠만한 파도에는 배 멀미를 하지 않는다. 시속 약 80킬로미터의 속도라니 바다위의 비행기 위그선에 버금간다. 이즈하라에서의 입국수속에는 거의 한 시간 정도 소요된다. 일본 여행시 항상 느끼지만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심하다는 느낌이다. 여객터미널 밖으로 나오자 바닷가를 맴도는 바다수리 무리가 반갑게 맞이한다. 이곳 항구에는 갈매기를 볼 수가 없다. 수리는 맹금류로서 독수리보다는 작고 까마귀보다는 약간 큰 듯하다. 사람 사는 세상에 길 들여졌는지 먹이를 찾아 사람을 따라오거나 음식물을 낚아 채 비상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지구 자정작용의 도구인데 바다수리는 자기 본분을 잊은 듯 하다.
대마도의 행정구역
대마도의 행정구역은 나카사키현 쓰시마시이다. 큐슈와의 거리는 후쿠오카와 사가현이 훨씬 가깝지만 나카사키현에 속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러나 지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것은 큐슈 서북단에서 나카사키 앞 바다를 거쳐 이끼섬에 이르는 열도들이 하나로 연결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끼섬은 대마도와 큐슈의 중간에 위치한다. 따라서 대마도는 나카사키 열도의 연장선상에 있는 섬이라는 논리다. 이는 인위적인 행정구역이 아니라 지형적으로 일본 본토와 연결되어 있는 땅이란 의미다. 우리는 어떤가. 특히 강동구와 송파구의 행정구역 획정은 한마디로 저급한 게리멘더링의 전형이다. 일반적으로 행정구역의 경계는 산맥과 하천이 최우선 고려사항이다. 강동구와 송파구 사이에는 성내천이 흘러 지형적으로 행정구역을 구분히는데 안성맞춤이다. 풍납동은 완전히 강동구 안에 있고 주민들도 강동구에서 생활한다. 그럼에도 이제는 풍납동 주민들 스스로가 강남 3구의 일원으로 남기를 원하니 더욱 바로 잡기 힘들 듯하다. 이 곳을 거쳐간 위정자들이여, 당신들의 행위가 부끄럽지 않은가.
대마도의 어원
대마도의 어원에 대해서는 설왕설래다. 언어학적 분석에 의해 한국어에서 변화된 한자 표기라는 설과 우리나라 고대 삼한 중 마한과 마주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한국인 사이에 회자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대마도의 남과 북섬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언어학적 분석은 너무 현학적이고 전문영역이라 읽기조차 힘들고 고대 마한과 마주 보고 있다는 설은 지리와 역사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로 보인다. 대마도가 마주 보는 곳은 부산과 거제도이고 변한지역이다. 나는 차라리 대마도의 사라다케(白堊)산 정상에 마주보고 있는 암봉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는 생각이다. 20여년 전 아소만 남쪽에 있는 산 정상에 있는 두 개의 봉우리에 올라가 보았는데 멀리서 보면 백운대와 인수봉처럼 두 암봉이 마주 보고 있다. 왼쪽 암봉은 땅과 연결되어 있지만 오른쪽 암봉은 다소 날카로워 오르기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우이동이 인수봉의 형상에서 연유한 것처럼 멀리서 보면 두 암봉이 마주보는 말의 형상이라 하여 대마도의 어원이 되었다는 설이다.
청정자연의 필요조건
대마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이즈하라 시내를 거쳐 바다로 흘러드는 시냇물이 그렇게 맑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특히 바다에서 작은 고기떼가 엄청나게 올라오지만 낚시 하는 사람을 볼 수가 없다. 만일 우리나라였다면 낚시, 투망으로 몸살을 앓지 않았을까. 아니 그 이전에 이미 오물과 폐수가 흐르는 생명이 없는 물이 되었으리라.
또 하나 부러운 것은 티끌 없는 대기다. 과거 철학자들이 즐겨쓰던 “명징(明澄)한 대기”라는 용어가 떠오른다. 명징은 글자 그대로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아마도 하늘 우러러 한점 티끌 없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삶을 소망하는 은유적 표현이리라. 특히 한국의 4월은 황사와 미세먼지로 몸살을 앓고 있는 계절이기에 더욱 대비된다. 과거에는 대마도 남쪽 끝자락에 사람이 다니지 않는 원시림도 있었고 비포장 국도도 있었다. 이즈하라 남쪽 전망대에서 보면 맨흙이 보이는 곳은 찾아볼 수 없고 공터도 공항 활주로 뿐이었다. 당연히 휴게소, 가든 모텔등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대마도가 한국 영토가 아닌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매국노나 할 소리라 하겠지만 그것은 인간의 기준일 뿐 신의 입장은 어쩌면 내 생각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영원불멸은 없었다. 이제는 도로가 거미줄처럼 뚫렸고 도시 개발이 상당히 진행되어 원시의 자연도 옛말이다.
이즈하라 시내탐방
이즈하라는 우리나라 읍보다 작은 지역이라 대부분 도보 탐방이 가능하다. 먼저 항구 인근 주택가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수선사를 탐방하고 일식당에서 상큼한 초밥정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버스를 타고 덕혜옹주결혼봉축비가 있는 가네이시(金石)성을 거쳐 일천팔백년 된 녹나무와 신라를 정벌한 신공황후를 봉안한 하치만구(八番宮) 신사, 춘향전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일본신문에 연재한 소설가 나카라이 기념관을 둘러본다.
①최익현 선생 순절비
수선사가 한국인의 주요 탐방장소가 된 것은 최익현 선생 순절비가 있기 때문이다. 수선사 경내에 기념비가 서 있지만 공사 중인지 출입금지였다. 기념비에는 대한국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란 명문이 있으나 사찰 경내 공동묘지에 위치한다. 대한민국의 충신열사가 공동묘지에 묻힌 사람들과 동격이라니 홀대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유적이라면 차라리 안 본 것이 다행이다. 인근 영사관이나 일본 대사관은 민족자존이 무엇인지 모르는가. 아니 나처럼 생각 안 할 수도 있으니 정답은 아닐수도 있지만 말이다. 최익현 선생은 단순히 의병활동을 한 항일투사가 아니라 구 한말 판서까지 오른 고위 신료출신이다. 특히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을 추진하던 대원군을 탄핵하는 상소문이나 의병궐기를 위한 격문등을 보면 최치원의 격황소문 같이 가슴을 울린다. 대원군이 자신을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을 판서의 자리에 까지 올린 것은 선생의 강직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력이었으리라. 아이러니한 사실은 정작 자신은 극단적 보수주의자였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항일운동의 상징적 존재로서 진보진영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②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
가네이시 성은 16세기 이후 대마도 도주 쇼 가문이 거주하면서 조선통신사가 오면 접대 하던 곳이다. 유서깊은 유적이지만 성문 외에는 기억할 만한 게 없다. 산책로와 정원이 잘 꾸며져 있으며 입구를 지나면 좌측에 고종의 고명 딸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가 서 있다. 비문에는 “이왕가종백작가어결혼봉축기념비”로 적혀 있다. 결혼 당시 대마도에 거주하는 한국인에 의해 건립되었으나 현재 비석은 2001년에 다시 세운 것이라 한다.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대마도 번주 쇼 타케유키(宗 武志)백작과 정략적인 결혼을 하였다. 번주란 한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의 의미이고 백작은 일본의 화족제도 5등위 중 3등위 작위이다. 따라서 일국의 왕녀 상대자로는 격이 맞지 않는다. 이처럼 치욕적인 결혼을 축하한다는 기념비 자체가 당사자와 우리나라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덕혜옹주는 한 평생을 불우하게 살아 온 식민지시대의 최대 피해자라는 생각이다.
③하치만구(八幡宮) 신사
하치만구 신사는 자그마한 야산 밑에 위치해 있다. 입구의 도리이가 매우 크고 산 밑에 이르러 여러 갈래의 신사로 연결된 돌계단이 아름답고 작은 도리이가 세워져 있다. 경내에는 수령 1800여년 된 녹나무가 인상적이다. 녹나무는 잎이 버드나무처럼 생겼는데 장수하는 수종인 모양이다. 북큐수 다케오(武雄)신사에는 수령 3000년의 녹나무가 서 있는데 정말 나무의 정령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은 신비감이 들었다.
하치만구 신사는 일본서기에서 삼한을 정벌한 신공황후를 봉안한 신사라고 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출병하여 삼한의 항복을 받아냈다고 한다. 이는 대마도에 있는 박제상 유적지, 광개토대왕비문의 해석과 맞물려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유적으로 보인다. 우리로서는 수용하기 힘든 역사지만 일본서기는 삼국사기 보다 무려 오백여년이나 빠른 7세기경에 쓰여졌으니 우리보다 깨인 민족임에 틀림없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 장수 소서행장의 딸 고니시 마리아가 봉안되어 있다. 그녀는 소서행장의 부장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한 대마도주 종 의지와 결혼했으나 전쟁이후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버지를 잃고 남편과 이혼한 불우한 생을 살았다. 당시 종 의지는 덕천가강 진영에 가담하여 생존할 수 있었던 반면 소서행장은 풍신수길의 아들 히데요리 편에 섰다가 가등청정에게 패하여 처형 당하고 만다. 그로부터 300여년 뒤 종 의지의 아득한 후손인 종 무지가 조선의 왕녀 덕혜옹주와 결혼하였으니 이 또한 기막힌 인연의 끈이다. 소서행장은 전쟁에서의 악행에 불구하고 일본 천주교에서는 성인의 반열에 올라 있다. 이는 종교의 선악이 세속의 정의보다 하위개념임을 보여주는 전형적 모습이다.
④ 니카라이 토스이(半井桃水) 기념관
니카라이는 우리나라 춘향전을 번역하여 아사이신문에 연재 소개한 소설가이다. 기념관은 그의 생가로서 전시실과 일본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대지나 건물규모로 보아선 당시 상류층의 가옥으로 보이는데 인근에는 상당히 큰 규모의 무사 고택이 잘 보존되어 있다. 나카라이 가문은 조선통신사의 통역을 담당한 듯 어릴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부산 초량에 살기도 하였다. 그가 자신의 문학적 업적보다 더 유명한 것은 일본 오천엔권 지폐에 그려진 여류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와의 관계 때문이다. 히구치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가 최종학력이었지만 19살에 나카라이 문하에 들어가 소설을 배우기 시작하여 불과 5년 만에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었다. 그러나 호사다마, 재인박명이던가. 유명작가로서의 영광을 미처 누려보지도 못한 채 이듬해인 25살에 요절하고만 비운의 인물이다. 이곳에는 그녀의 유물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단순한 연인관계는 아닌 듯하다. 니카라이의 사진을 보면 날씬한 미남형이라 히구치를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세끼바시(萬關橋)
이 다리는 대마도를 남과 북으로 분단하는 운하 위에 걸쳐 있다. 여기서 바라보는 조류의 소용돌이는 장관이라고 하지만 실제 볼 수는 없었다. 나는 그동안 이 다리가 발음 그대로 만세교인 줄 알고 있다가 이번에 와서야 세(歲)가 아니라 관(關)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관이 시모노세끼라는 말은 진작 알고 있었는데 왜 이곳 세끼는 관자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 운하는 일본해군이 러시아함대의 남진을 막기 위해 1900년도에 건설한 것으로 폭 약 25미터, 길이 약 500미터 규모이다. 오로지 군사적 목적으로 산을 깎아내어 운하로 만든 애국심과 집념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산을 깎아낸 높이가 평균 오십미터 이상은 되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퍼낸 흙의 량도 엄청났을 것이다. 일본 해군은 러일전쟁(1904-1905)시 서쪽에 있던 주력함대를 이 운하를 통해 대마도 북동쪽으로 우회하여 극동으로 이동하던 러시아 흑해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전멸시켰다고 한다. 대마도 북쪽 미우라 해수욕장 언덕에는 일.러우호의 언덕이 있다. 당시 난파당한 배에서 뛰어내린 병사들을 인근 주민들이 구조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냈고 감사의 표지석이 서 있다고 한다.
운하와 한반도 분단의 연기설
이 운하와 연결되어 있는 역사 파급력의 끝을 찾아가 본다. 제정 러시아는 이 전쟁에서 패하고 난 뒤 1905년 1차 농민혁명이 일어났으나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전제정치를 더욱 강화하였다. 1917년에 이르러 레닌이 주축이 된 공산혁명으로 발전하였고 군대마져 혁명세력에 가담하자 제정러시아가 무너지고 공산국가가 세워졌다. 이는 극동으로 파급되어 중국과 북한의 공산화로 연결되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일본은 러일 전쟁 승리 이후 한반도를 강점하고 만주까지 진출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따라서 러일전쟁의 승패는 당시로서 끝난 게 아니라 1945년 해방이후 현재까지도 남북분단이라는 우리 민족의 재앙을 초래한 원인이었던 것이다. 만일 이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여 제정러시아가 정상적으로 민주화되었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불교의 연기설은 난해하지만 특히 이 운하에서 세상의 모든 사물은 보이지 않는 시공에서도 인과관계로 작용하고 있음을 느낀다.
아소만 지역 탐방
①와타즈미(和多都美) 신사
사진으로만 보던 바다 위에서 걸어 나오는 듯한 도리이가 일렬로 서 있는 곳이다. 신사의 규모는 작지만 매우 아름다운 풍경의 대마도를 대표하는 경관을 자랑한다. 도리이중 두세개는 밀물시 바닷물에 잠긴다. 일본의 도리이는 중국과 비슷하고 우리나라의 홍살문과 의미는 비슷하나 모양은 다르다. 도리이는 세속과 신성구역을 구분하는 경계선을 의미하므로 악을 응징하기 위한 상징이 필요하다. 도리이에 관해 알아 보았지만 명확한 설명은 없어 나름대로 독창적인 해석을 해 보았다. 그것은.두 개의 기둥위에 걸친 대들보 중 위의 것은 칼, 아랫 것은 칼 거치대라는 느낌을 받는다. 절 입구에 있는 사천왕상이 칼과 창을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로 말이다. 이곳에는 우리의 단군신화와 비슷한 일본천황의 탄생설화가 깃들어 있다. 바다 용왕의 딸 토요타미 하코노(豊玉姬)가 이곳으로 나와 아들을 낳는데 시조 천황의 아버지가 된다. 토요타마가 용궁으로 돌아가자 이모의 손에 길러진다. 자신을 길러준 이모와 결혼하여 낳은 자식이 시조 천무 천황이란다. 단군신화의 어머니가 곰이라면 일본 천황의 어미니는 용으로써 고대사회는 모두 모계사회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민족의 특성과 연결되어 있다. 일본은 해양민족이라 바다의 제왕인 용처럼 바다를 다스리는 민족임과 동시에 천황은 어머니, 할머니가 모두 용으로서 신분자체가 신성불가침 영역에서 태어난 존재로 설정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는 대륙민족이라서 야생에서의 힘의 제왕 곰을 닮아 이민족을 힘으로 제압하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아무리 고대사회에서 근친혼이 불가피하더라도 어머니와 동일격인 이모와 결혼한다는 설정은 비윤리적이다. 신사 입구에는 시조 천황 천무의 조모가 되는 토요타마의 돌무덤이 있고 풍옥희지분묘(豊玉姬之墳墓)란 표지석이 서 있다. 우리의 서낭당처럼 암반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 수천년 전 무덤이라고는 믿기 힘들다. 다만 천황을 민족의 구심점으로 떠 받치는 민중의 소망이리라.
②에보시다케(烏帽子岳) 전망대
까마귀가 모자를 쓰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우리나라 통영 앞바다를 보는 듯하다. 만관교 서쪽에 펼쳐진 아소만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로 와타즈미신사에서 남쪽 바닷가로 연결되는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대마도 내에서 유일하게 동서남북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로 바다 위에 떠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을 감상할 수 있다. 대마도의 하롱베이라 불리기도 한다지만 전망대에서는 그냥 평범한 섬들만 보일 뿐이다. 다만 사진으로 보면 아시아의 진주로 불리는 하롱베이 바위섬 같은 섬들의 아기자기한 모습이 있는 모양이다. 이곳이 우리민족을 괴롭힌 왜구들의 본거지란다. 여기서 대마도가 왜구의 본거지라고 하면서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땅의 귀속권은 정복자의 것이 아니라 거기 사는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주차장에서 먹어보는 특산품 고로케 맛이 일품이다. 이곳에서 많은 사진을 찍었으나 정작 내 사진은 제대로 나온 게 없다. 가장 멋진 사진은 연분홍 스카프와 썬 그래스를 낀 모습의 선생님이다. 그 이유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오드리 햅번을 연상시키는 포스였기 때문이다.
③아유모도시 계곡
모도시는 운전 초보시절 주차할 때 많이 듣던 말이다. 핸들을 다시 풀어준다는 뜻인데 바다에서 회귀한 은어가 협곡의 빠른 물살에 밀려 다시 돌아간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계곡은 넓은 암반과 수석처럼 형성된 거대 바위들이 매우 인상적이다. 마치 이무기가 지나간 흔적처럼 옆으로 누운 주상절리가 계곡을 따라 길게 뻗어 있다. 계곡 이름은 은어에서 연유하지만 실제로는 잉어등이 많이 서식한다.
멧돼지 고기집의 인심
오늘 저녁은 야생 맷돼지 구이인데 뱀의 저승사자라 불리기에 보신용으로 좋단다. 어제 저녁은 생선회로 오늘은 멧되지 고기로 음식의 궁합이 조화롭다. 대마도는 예로부터 맷돼지가 많아 허가받은 엽사에 한해 일정량을 포획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물론 이 식당 주인은 직접 멧돼지를 잡는 엽사라고 한다. 식당은 큰 편인데 대부분 한국 관광객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집 인심이 참으로 고약하다. 반찬으로 무엇이 나왔는지 한 가지만 나오고 김치나 상추, 파, 마늘등 우리가 좋아하는 채소류는 아예 없었다. 아무리 불필요한 낭비를 막으려는 풍습인지는 몰라도 돈을 받고 영업을 하면서 오는 손님에게 너무 야박한 인심이 아닐까.
한국 팬션의 포근함
이제 1박2일 동안 대마도의 가장 남쪽인 아유모도시로부터 가장 북쪽에 있는 한국전망대 근처까지 올라온 듯 하다. 내일 오전에는 한국전망대와 미우다해수욕장과 해수온천욕 등 한 두곳을 더 탐방한 후 하타카츠항(比田勝港)을 통하여 귀국하게 된다.
해가 질 무렵 바닷가에 있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팬션으로 들어 갔다. 인근에는 비교적 대지가 넓은 전원주택과 팬션단지이다. 우리가 머물 곳은 아담한 2층 건물로 한국 여자분 둘이 운영하고 있다. 특히 1층에 대형 거실이 있어 편히 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 저녁에도 이광녕, 김영석 선생과는 함께 하고 포공영 선생님이 새로운 룸메이트가 되어 1층 방을 배정받았다. 모두 짐을 풀어놓고 간단한 샤워를 한 후 마루에 모여 맥주파티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버스에서인지 이곳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대마도가 한국 땅이냐에 대한 주제발표 성격의 토론이 있었다. 김중위 장관님은 정치인 출신답계 근세사 중심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영토에 편입하기 위하여 미국에 협조를 요청해 놓고 있던 중 6.25동란으로 중단된 게 아쉽다고 한다. 아울러 일본이 독도에 대하여 집요하게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대마도를 지키기 위한 이른바 도남의재북 전략이라는 의견이 일리가 있다. 이광녕 고문님은 역사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분이라 고려말부터 조선조 초기에 대마도 정벌에 나선 연도와 장수 이름까지 정확히 말씀하시는 기억력이 놀랍다. 한 시간여 맥주파티 모임을 마치고 대부분 선생님들과 함께 어둠이 깔린 바닷가 언덕을 산책하였다. 파도 소리가 간간히 들려오던 해안선의 절벽 높이가 그렇게 높을 줄은 이튿날에야 알았다.
제3일 한국전망대와 귀국길
이른 아침 해뜰 무렵 해변에 나가 보았다. 언덕의 높이는 삽십여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절벽이다. 벌써 많은 선생님들이 해맞이를 위해 나와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특히 여명의 눈동자 여주인공 여옥이 민족의 수난을 온몸으로 맞은 것처럼 다가오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 들이는 여자 선생님들의 포즈가 하나같이 멋지다. 지금도 알수 없는 것은 해가 떠오르는 동쪽이 왜 좌측의 언덕이었는지 의문이다. 한국전망대가 가까운 곳이라면 우측에서 해가 떠야 동쪽인데 말이다.
한국전망대
대마도 최북단에 위치한 한국전망대는 한국까지 약 50km로서 맑은 날에는 부산시의 거리가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눈을 닦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수평선 너머 풍경은 마치 태종대와 오륙도 해운대를 연결하는 육지의 스카이라인이 아른 거리는 것만 같다. 맑은 날에는 태종대나 해운대 달맞이 고개에서도 대마도의 해안선들을 보곤 하였으니 부산시의 거리가 보인다는 말은 과장은 아니다. 전망대는 1997년에 세워졌으며 팔각정 형태로 파고다 공원의 정자를 모델로 하여 한국산 재료와 고증에 의거 한국풍으로 지은 건물이다. 전망대 앞에는 몇 개의 섬들이 평화롭게 보이지만 바람이 불면 거센 파도가 넘실대는 해역이다. 이름하여 현해탄인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윤심덕의 사의 찬미이다. 사의 찬미는 왈츠곡 “다뉴브 강의 잔물결” 곡조 그대로인데 일제의 암울했던 시기에 절망의 끝에서 나온 가사가 압권이다. 이곳에는 조선통신사역관조난사위령비가 서 있다. 1703년 조선통신사. 역관등 108명을 태운 세척의 배가 대마도 앞바다에서 좌초한 이후 전원 사망하고 말았다. 거의 다 도달하고서 암초에 걸려 배가 난파된 사고였으리라. 한국 관광객들이 놓아 둔 꽃다발과 술잔에 아직 그 따뜻한 사람들의 마음이 향기롭다.
미우다 해수욕장과 해수온천
일본 해수욕장 100선에 선정된 비취색 바다와 자연경관이 어우러진 매우 아름다운 해변이다. 특히 해수욕장 한가운데 바위섬이 풍광의 화룡점정이다. 태안의 꽂지 해수욕장 바위섬이 연상되고 걸어 들어갈 수도 있다. 가장 부러운 것은 모래사장이 그렇게 깨끗할 수가 없다. 특히 해변에는 식당이나 샤워장. 탈의장등 일체의 인위적인 시설물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간식을 먹을 수 있는 소형 푸드 트럭이 한 대 있을 뿐이다.
해수욕장 바닷가 언덕에 오르면 아담한 호텔과 해수온천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해수온천에서 여독을 풀고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게 된다. 온천에서 내다보는 바다풍경이 일품이지만 소금기는 느낄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삼사십분만에 끝내고 일찍 하타카츠 항구로 향했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오찬은 우리 입맛에 맞는 한식으로 푸짐하게 나왔다.
현해탄을 각인 시키는 바다
오늘 승선하는 쾌속선은 니나호인데 갈 때 탄 코비 보다 크기만 클 뿐 속도도 느리고 파도에도 취약하다. 우리 일행의 좌석은 1층 중간보다 뒤 편이었는데 파도가 많이 칠 때 멀미를 덜 하는 자리다. 그것도 모르고 바다가 평온하길래 포공영 선생님과 앞 자리에 가서 앉았다. 멋진 바다를 감상하려는 내 소박한 꿈을 현해탄은 용납하지 않았다. 엄청난 파도가 뱃전을 때리고 배가 너무나 흔들려서 일어설 수 조차 없었다. 여기저기서 구토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포 선생님의 상태도 안 좋은 듯 하다. 무려 삼십여분 계속된 배 멀미에 나 역시 속이 매스꺼웠지만 억지로 참으며 간신히 버텼다. 좌측으로 태종대가 보이고 우측으로 해운대 장산이 보이면서 파도는 그제서야 우리를 놓아주고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부산항 도착시 원래의 계획은 부산역앞의 신창 돼지국밥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7시반 고속철로 올라갈 계획이었지만 시간이 늦어 엉망이 되어 버렸다. 배 자체의 연착에다가 멀미에 지친 선생님들이 몸을 추스르고 너무 늦게 나오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특히 배성희 선생님은 거의 업히다시피 나와서 걱정스럽기 까지 하였다.. 그 때가 이미 여섯시 반이라 나는 이광녕 고문님을 비롯한 여닐곱분과 함께 빠른 걸음으로 예약된 식당으로 갔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경과되어 열차시간에 맞추기 위해 7시 10분이 되자 숟가락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절반이나 먹었을까. 식당에서 나와 선생님들이 모두 역사로 들어가는 걸 보고 돌아섰다.
2박 3일의 여정이 한단의 꿈이런가. 모두 떠나고 추억으로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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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등시절 광안리 해수욕장 수양회
처음 바다를 접한
감격에 벌어진 입으로 순간 날아든
짠 기운
아 이래서 바다인가 보다
그 기운을 다시 느낄 수 있게 잘 표현 해 주어서
고맙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