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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아파트를 들어가서 한 번도 손을 보지 않고 살았더니 무척 더럽고 망가져서 큰맘 먹고 리모델링을 하기로 하였다. 리모델링 기간 동안 동가숙 서가식하다보니 지난날 아파트 입주하기 전까지 이사 다녔던 사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1. 대전에 첫발을 들였던 것은 1968년 겨울 실력테스트를 한다고 대전상고에서 무슨 시험을 보러 왔던것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때는 초등학교 동창 몇 명과 신성철 선생님의 인솔로 하룻밤을 자고 시험을 치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원동의 어느 하숙집(여관)에서 묶었던 것 같은데 밖에 구경 나왔다가 묵고 있는 하숙집을 못 찾아서 헤맸던 기억이 지금도 아찔하게 느껴진다.
2. 두 번째 인연은 1969년 1월 중학교를 가기위해 서대전역 옆(지금 계백로 육교밑) 무허가 하숙집에서 보름정도 머물렀던 기억이다. 시험을 치루고 합격자 발표가 나면 예비입학생들의 숙지사항까지 듣고 내려가려고 여러 날을 하숙집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그 때는 TV도 없었고, 만화방에서 여러 권의 만화책을 빌려다 보고 머리 아프면 박카스를 먹으면서 이상의 날개에 나오는 작가의 흉내를 내는 기간이었던 것 같다. 그 때는 부여를 다니는 교통이 편하지 않아서 갔다 오느니 하숙방에 있었던 것이 편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민주공화당 모 후보의 선거운동을 해주고 그 대가로 대한통운 임시직에 취직이 되어 대전에서 생활하는 시초가 된다.
3. 본격적인 대전 생활은 1969년 3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삼성동 대전공전 담 옆집에서 삯월세(사글세)로 시작된다. 사람 사는 집마다 공동묘지에 온 사연보다 더 많은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있다. 주인집이 신탄진 수영장에서 탈의실을 운영하다 폭삭 망한 사연부터, 비오는 어느 날 연탄아궁이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일주일 정도를 밥도 못해먹고 불을 지필 수 없었던 사연이 생각난다. 그 때는 석유곤로(풍로)만 있어도 부유한 집였던 것 같다.
4. 1970년 삯월세 기간이 만료되어 현재 살던 집보다 높은 지역의 조금 좋은 집으로 옮긴 집이 변갑용씨 댁이다. 이 당시 삯월세는 10개월에 1만2천 원짜리이다. 대전에 살면서 수돗물이 아닌 두레박을 이용한 우물이 있는 집, 칙간(측간,변소,화장실))은 판자 붙여놓은 전통적인 퍼세식이고, 아버지는 변갑용, 어머니는 박무당, 자식들은 김00, 남남끼리 가정을 이뤄 사는 복잡한 집안이다. “행복플러스”의 윤흠기 교수의 강의내용이 생각난다. 지난날의 결손가정은 부모중 한 쪽이 없는 가정이 문제였는데, 요즘 결손 가정은 부모중 어머니나 아버지가 2명으로 늘어나는 문제가 있단다. 이곳에 있을 때 자전거 타기를 배웠다. 주인아저씨 자전거를 몰래 끌고 가 발걸이를 하면서 올라타기까지의 연습 훈련은 올림픽선수들 보다 더 많은 노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무릎이하가 성할 날이 없었다. 그래도 꼭 필요한 것이기에 아저씨한테 혼날 줄을 알면서도 무모한 도전은 계속되었다. 아버지께서 임시직으로 다니시던 직장을 그만두고 시골로 가시고, 삯월세 기간을 한 번 더 연장하고 살았다. 암스트롱의 달 착륙영화를 보고, 공설운동장에서 예비군창설기념에 참가했던 기억들…….
5. 1971년 하반기에 성남동 성남초등학교 앞 유정산업 옆집 김 교장 선생으로 이사. 주인아저씨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셨다. 이 집도 조강지처가 상처해서 새엄마와 살고 계셨고, 형제자매들의 어머니가 서로 달랐다. 전처의 큰아들은 대학생이었는데 새엄마와의 초등학교 1학년짜리가 있었다. 여기는 그래도 마당에 약간의 꽃밭과 채전이 있는 제법 큰집이었다. 부자간의 형제자매간 여러 가지 갈등을 체험하게 된다.
6. 1972년 직전의 집에서 300여m 떨어진 기차길옆 철도청 여객전무 유지현씨댁으로 이사. 처음 이사 갈 때는 딸만 5명이고 아버지가 엄청난 주태백이었다. 딸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아버지를 내쫓고, 아버지가 애결복걸해서 겨우 동거하는 가정이었다. 여러 가지로 가세가 기울면서 결국은 집을 팔고 이사하면서 세사는 도중에 주인이 바뀌게 된다. 새로 들어온 주인도 사연이 많았다. 한쪽은 상처, 한 쪽은 생이별로 6.25직후 새롭게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철도청에 근무했던 아저씨 자식은 아들 2명과 딸(당시 여고1년)과 어머니가 데려온 딸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는데 이 딸에게 우리 막내 외삼촌을 중매한다고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안집에 가서 인기리에 방영되던 “여로”를 가끔 볼 수 있었다. 이 때 처음으로 귤(밀감)이란걸 먹어봤다. 이웃집에서 풍기는 된장찌개가 미치도록 먹고 싶던 기억, 처마를 이어낸 화장실 옆방, 화장실을 가려면 주인한테 안에서 끈을 풀어줘야 갈 수 있었던 화장실, 블록으로 쌓아 놓은 담, 방안의 숭늉과 걸레가 꽁꽁 얼던 추억, 설겇이할 때 덜그럭거린다고 밤늦게는 설겇이도 못하던 기억, 안집 식구들 멱(목욕, 그 당시는 샤워란 말이 없었던 것 같다)을 다감은 후에야 뒤늦게 씻을 수 있었던 기억, 기찻길 옆이라서 “미카”기관차가 지나다닐 때마다 검은 매연으로 빨래가 검은 티끌을 뒤집어썼던 것, 길가집이라 장난인지 흑심인지 여자 속옷만 없어졌던 사연들이 생각난다. 안집 여선생 딸과 외삼촌의 만남이 끝나면서 분위기가 안 좋아 다시 새집으로 이사가야했다.
7. 1972년 하반기에 동구 보건소 옆 홍도동 철도청에 다니는 김정길씨댁으로 이사. 이곳은 지금은 삼성2동이지만 당시는 채소밭 가운데 외진 곳으로 전기가 안 들어오는 집이었다. 그래도 수돗물의 혜택은 받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보니 집안이 온통 난리다 밤손님(도둑)이 진흙을 밟은 신발을 신은 채 방마다 다 후비고 다녔건만 까마득히 모르고 편하게 잠을 잤다는 게 기가 막혔다. 없어진 물건은 주로 라디오와 시계등 별로 훔쳐갈게 없었지만 3km 떨어진 파출소에 가서 신고는 했지만 허공의 메아리, 이 집은 고부간의 갈등이 무척 심했다. 편모슬하의 아들이 결혼을 하면서 곡간의 열쇠 주도권으로 전쟁을 하는 경우가 무척 많다. 그렇다보니 세입자와도 사이가 좋을 게 없다. 그래서 누나와 대판 싸우고…….
8. 삼성동 북부교 옆 구멍가게 문간방으로 이사하고 보니 제대로 음식을 해먹을 공간이 없었다. 엄청 불편한 것을 경험하고 5일 만에 다시 홍도동으로 이사하게 된다. 이삿짐이래야 손수레 하나면 충분하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 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다시 홍도동으로 와서는 3년여를 살게 된다.
휴일 위층에서 괴성이 들린다. 어려움을 보고 모른 체할 수없어 올라가보니 아들이 가스중독으로 혼수상태다. 1km정도 떨어진 큰 도로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와서 어렵게 부축해서 응급병원에 가보니 가스중독으로 운명한 상태란다. 그러니까 병원에 가기 전에 이미 숨이 멈춘 상태인데 데리고 갈 때는 살아있다고 생각했기에 덜 무거웠는데, 죽었다는 소릴 듣고는 무거워서 들을 수가 없었던 기억이다. 생전 처음 시체를 직접 접한 계기가 된다. 이곳에 있는 동안 설악산 수학여행을 가게 되는데 수학여행비가 1만원이 채 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차피 설악산 가봤자 산에는 못갈 테니, 그 돈으로 중고 자전거를 산다. 그 기분은 현재의 애마(자동차)를 살 때 기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즐거웠다. 자고로 호사다마라 했던가! 부엌창살문에 자물쇠로 단단히 채워놓고 여름방학을 맞아 시골에 갔다와보니 자전거가 흔적도 없이 살아졌다. 비애, 절망, 좌절 정말로 기가 막혔다. 자전거가 문제랴 1974년인가 육영수 여사가 총을 맞는 사건도 있는데, 학창시절을 마감하고 모든 집을 시골로 옮기고 철수
9. 1975 학교 은사님의 소개로 인쇄사에 취업.
그 당시는 기술을 배우려면 월급을 받지 않고 다니던 시절이다. 그래서 혼자만 살아도 되니 저렴한 월세 방을 찾은 게 성남동 얼음 창고 뒤 성남초등학교 담가에 집이다. 고지대라고 밤 11시 넘어서부터 수돗물이 쫄쫄 나온다. 7세대가 살고 있으니 내가 물을 받으려면 새벽 1시는 넘어야 한다. 그래서 양동이 2개만 내놓고 자고 일어나면 아줌마들이 물을 받아놓았다. 처음에는 밥을 해먹다가 여건상 밥해먹기가 무척 힘들었다. 3월부터 10월까지 쌀 1말을 못 먹었다. 거의 라면만 먹고 살았을 거다. 라면을 싫어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라면도 김치나 계란등 반찬과 잘 먹으면 맛이 있지만 라면 하나만 먹어대니 지금도 입에서 그 때 먹던 라면 냄새가 나는 듯하다. 밤에는 천정에서 서생원들이 운동회도하고 사랑을 나누는 소리에 잠을 설치기도 했다. 여름 한 때는 회사에서 밤일을 하면 식사가 해결되니 자청해서 야간작업을 원했고, 며칠 만에 집에 오니 이불이 축축하다. 비가 새어 이불이 물을 먹었으니 혼자서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런 집에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비가 새지 않는 집을 찾게 된다.
10. 성남동 평화극장옆 무허가 판잣집으로 이사
블록으로 쌓은 집도 아니고 담을 막는 소재로 칸막이를 하고 지붕에는 스레트를 올려놓은 집이다. 겨울이었는데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무척 추웠다. 방안의 모든 물기 있는 것은 얼었다. 이불에 서리는 입김이 언다. 이불속에 백열전구를 켜고 자는데도 얼어 죽을 것 같다. 15일을 버티다가 손을 들고 회사로 들어가 먹고자는 숙식을 제공 받는 조건으로 근무하게 된다. 교통비로 일당 150원을 받던 것 마저 없어진 셈이다. 자는 곳이래야 아랫목 윗목이 있는 어엿한 방이 아니라 작업장 한 모퉁이를 막아놓고 전기장판으로 지탱한다. 먹고 잔다는 핑계로 출퇴근 시간은 없다. 아마 기억으론 하루 16시간씩을 일했을 것이다. 물론 재임기간 열심히 노력해서 기술을 연마해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으니 150원, 300원, 450원, 차차 일당이 늘어간다. 그래서 직장을 옮겨 하숙집을 얻어 나가본다. 하숙비는 4,500원, 9천원 받을 때이니, 하숙비를 주고 나면 시골 갈 차비도 안 남는다. 그래서 다시 백기를 들고 먼저 다니던 회사로 3개월 만에 복귀해서 여러 사람과 함께 생활하다보니 방탕한 생활도 경험하게 되고, 고대로부터 인쇄산업은 문명의 첨단지역인 역과 가까운 곳에 많이 있다. 역주변에는 하숙집, 유흥가, 사창가도 있다. 대전도 중동 10번지 일대는 우범지역으로 청소년 출입금지지역이다. 이곳에서 “섯다, 짓고땡”등을 하면서 유흥비를 대주는 게임을 하게 된다. 이런 사창가는 통행금지도 없다. 이곳에서 숙식을 함께 하는 한 방탕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숙식 독립에 대한 집념은 계속된다. 이때는 월급도 야근수당 등을 받으면 15,000원 쯤 됐다. 그래서 다시 홍도동 날망집에 하숙을 하게 된다. 그 하숙집에 있을 때 송대관의 “해뜰날”로 가수 대상인가를 받게 된다. 훗날 한참동안 나의 애창곡이 되었다. 나도 분명 해뜰날이 올 거라고 굳게 믿고 이를 악물고 버텨본다. 꿈과 희망을 갖자.
희망이란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 루쉰의《고향》중에서 -
* 그렇습니다.
희망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도 생겨나는 것이 희망입니다.
희망은 희망을 갖는 사람에게만 존재합니다. 희망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고,
희망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실제로도 희망은 없습니다.
11. 1977년 동생이 유성농고를 다니게 되어 유성 배나무집으로 이사
동생 뒷바라지를 하면서 직장을 다니고, 그 당시 열심히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던 생각이 난다. 남들은 다 먹은 도시락 젓가락 소리가 나지 않게 해서 다녔지만 나는 덜그럭거리는 도시락을 그냥가지고 다녔다. 그곳에 있는 동안 비가 많이 와서 만년교 교각이 훼손돼 다시 공사하는 동안 한참 동안을 4km씩 걸어 다녔다. 이 무렵 현재의 집사람을 만나게 된다. 직장을 가지고 기술을 연마한다는 생각에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
12.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제안을 받게 된다. 장대동 방앗간 집에서 2층을 기막히게 지어놓았는데 사주관상운세학으로 1년을 다른 집에 살다가 와야 된다면서 우리 보고 1년만 자기네 집(당시 최고급 맨션)에서 공짜로 지내란다. 얼핏 솔깃하기에 대답을 머뭇거리고 회사에 갔다와보니 모든 짐이 옮겨진 상태였다. 한 칸짜리에서 살다가 방이 5개, 목욕탕, 화장실 등이 완벽하게 갖춰진 집, 보기는 무척 좋았다. 그런데 밤이 문제였다. 우리가 ‘액막이’ 대상으로 쓰였다는 게 분하기도 하고 알지 못한 마귀가 귓전에서 윙윙거리는듯해서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3일 정도를 악몽으로 보내는데 마침 시골에서 어머니가 오셔서 난리를 치루셨다. 애들끼리만 있다고 금쪽같은 새끼들을 ‘액막이’로 이용하다니 노발대발에 다시 원상 복귀되었다. 살다보니 별일을 다겪게되었다. 다시 배나무집으로 와서 또 평온한 나날을 보낸다. 어느 날 “이수만과함께” 시간에 응모해 당첨되어 받은 상금으로 자명종 시계를 샀는데, 현재도 소장하고 있다.
13. 1978년 군수지원단 유상사집으로 이사. 이때부터 여동생이 함께해 식구가 셋으로 늘었다. 군수지원단 상사였던 안집은 온통 물품이 군수품이었다. 상사부인은 면세품을 시중에 파는 장사꾼이었다. 그 당시 연탄을 100장 사놓고 누가 가져갈까봐 연탄에 일련번호를 메기던 시절 주인집은 기름보일러를 사용하고 있었다. 상사부인은 그 당시 쌍꺼풀 수술을 하고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던 생각이 난다.
14. 1978년 하반기 용두동 어덕마을 박종규 씨댁으로 이사. 안집아저씨는 한시택시(개인택시 전신)를 보유하고 계셨다. 시민주택이라는 단층슬라브집위에 블록으로 쌓고, 스레트를 덮은 집이라서 무척 덥고 추웠다. 그래도 넓은 2층을 단독으로 사용한다는 호기심에 이사를 한다. 내년에는 막내가 대전으로 오게 되면 식구가 더 늘어나게 되기에 넓은 집이 필요했다. 그 당시 안집 아들들과 지금도 교분을 쌓고 있다. 초등학교 1,2학년이던 애들도 전부 장가를 갔다. 당시 그놈들이 웅변을 했는데 담임선생님과 웅변 지도 선생님과 거의 매일 술파티가 열렸다. 물론 아들은 항상 입상을 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뼈아픈 추억이 있다. 시집간 누나가 추운 겨울 애기를 데리고 와서 며칠 기거하게 된다. 이곳도 워낙 추워서 방에 연탄난로를 피우고 지냈다. 그런데 망년회날 새벽 조카가 비명을 지른다. 웬일인가하고 혹시 체했나해서 물을 가지러간 여동생은 부엌바닥에 나뒹굴고 나도 머리가 무거워 일어날 수가 없었고, 누나도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지를 못했다. 누나가 연통을 잡아주는 철사 줄에 기저귀를 널어놓는 바람에 연통이 빠져서 가스가 샜던 것이다. 당시 응급처치로 빙초산을 묻힌 솜으로 공기를 들이마시면 된다는 지식으로 솜에 빙초산을 묻혀 코에 대고 마시고, 학창시절 배운 적십자응급처치실력을 발휘하여 모두 무사하게 깨어났다. 이 당시 시골 집안아저씨는 빙초산을 입에 넣어 혀가 말려가면서 끝내 운명한 사건도 있었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래서 좀 더 따뜻하고 아늑한 집을 찾아 나서게 된다.
15. 1979년 이 때는 2백만 원 정도의 전세를 살게 된다. 풍한방적 옆에 원만하다고 생각해서 10만원을 주고 계약하고 이사 며칠을 앞두고 다시 방문해 여러 정황을 살펴보니 은행에 저당 잡힌 집이란다. 어렵사리 마련한 전세돈을 날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계약금만 날리게 된다. 이때부터 막내가 6학년 때 전학을 와서 식구가 네 명이 된다. 그래서 좀 더 넓은 집을 얻은 게 충남도경에 근무했던 박종0씨 댁이다. 박순경이 독채를 얻어 오른쪽은 서대전초등학교 선생님, 다른 한쪽은 우리가 들어가 3세대가 살게 된다. 박순경은 가끔 밀주단속 나가서 압수한 술을 가져와 자랑하면서 나눠먹고, 초등선생님댁은 연일 방문하는 학부형 선물로 먹을게 떨어지지 아니한다. 자기네들이 다 먹지 못하기에 우리 집까지 밀려오는 것들이 많았다. 이 때 햄, 소시지를 처음 맛보게 된다. 안집은 순사, 선생님들이 매일 모여 노름을 무척했던 기억도 있다. 이곳에서 살 때 슾픈 추억은 어느 일요일 3형제는 용감하게 계룡산 동학사를 가기로 한다. 바로 밑에 동생은 자전거를 타고 가고 막내와 나는 시외버스를 타고 단돈 5천원을 들고 오후 1시경 집을 나선다. 동학사에서 만나 은선폭포를 지나 정상에 올라가니 물생각이 간절했다. 사이다가 시중에서 2백원 정도인데 정상에서 1천원이었다. 그래도 우선 먹어야 살겠기에 거금을 주고 갈증을 해결하고 갑사에 도착하니 5시, 다시 동학사로 넘어 오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걸릴것 같아 동생만 자전거 때문에 동학사로 넘기로 하고 막내와 둘이는 갑사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오후 8시경, 그런데 자전거를 타고 온 동생이 아니 온다. 시간상으로는 분명 도착이 되었어야 하는데, 엄청 초조한 맘으로 기다리는데 밤 11시경에 나타난다. 무척 반가웠다. 그런데 동생을 들어오면서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웃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상하다 앞니가 2개가 없어졌다. 입었던 운동복과 바지는 다 찢어지고, 사연인 즉은 그 당시는 동학사가는 길이 험난했었는데 차를 피하려다 계속으로 넘어졌단다. 다행히 자전거는 이상이 없었지만 몸이 만신창이가 되고 자전거를 끌고 사력을 다해 능선을 오르는데 3시간여를 소비했단다. 그날은 너무 늦어서 다음날 야매로 하는 집에서 의치를 해 넣게 되는 게 그 때 잘못한 시술로 인해 오늘날까지 부작용으로 고생하고 있다. 무모한 산행에서 얻은 너무나 가혹한 교훈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16. 1980년 바로 밑에 동생은 예산농전으로 가고 막내는 한밭중학교를 가게 되어 삼성동 최통장집으로 이사
1969년에 살았던 곳들이 어느새 많이 변해있었다. 이쯤에서 자영업을 꿈꾸게 된다. 돈 많은 최통장 집은 7세대가 사는 큰 집이었다. 세입자들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많았겠죠. 구석방에 사는 이상한 사이로 보이는 청춘남녀들이 밤새도록 계란을 던지면서 전쟁을 치른다. 정말 괴로운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나도 세 들어 사는 신세이니, 자영업을 시작하려고 무척 신경이 곤두섰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안채 독채를 살면서 어지럼증에 힘들어하는 외손자를 위해 외할머니께서 빈혈에 좋다는 소지라,간,쓸개 등 민간요법으로 백방으로 노력을 했다.
17. 1981년 자영업을 시작하면서 삼성동 소전 터에 새로 지은 2층 슬라브중 아래채 독채에 살게 된다. TV도 사고 냉장고도 사고 초장기에는 냉장고에 음료수가 꼭 들어있어야 되는 시기였다. 그래서 콜라와 사이다를 짝으로 사다놓고 마셔댔지. 이곳에서 슬픈 추억은 여동생이 퇴근길에 대문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있는데 각기목으로 머리를 내려치고 가방을 빼앗기를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아버님 생신 때 온 가족(15명)이 모여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데 6살이던 조카(선옥)가 현관 유리를 밀면서 떨어져 왼쪽팔을 크게 다치는 사건이 생겼다. 그래서 2달간 병원신세를 지고 아가씨가 팔에 상처가 생겨 결혼에도 지장이 있을 거라고 큰 걱정을 했지만 지금은 공무원과 결혼해 잘살고 있다. 자영업을 시작하고부터는 내 시간이 너무 없었다. 하루 20시간씩 일하는 날이 늘어나게 된다. 집은 완전하숙생이 되고 만다. 결혼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우선 빚얻어 차렸으니 빚갚기에 4년여를 전력질주하게 된다. 이곳에 살 때 처음으로 88오토바이를 구입하게 된다.
18. 1984년 결혼을 생각하게 되고 좀 더 넓은 커튼가게 집, 방이 3개에 넓은 2층집으로 이사하게 된다. 그러나 선택을 잘못했음을 이사하고서 알게 된다. 화장실까지 거리가 60여m가 된다. 겨울이 되어 이때부터 예비신부와 함께 살게 되는데 밤에 화장실 가는 게 너무 끔찍했다. 거기에 임신까지 하게 되니 좀 더 편리한 집을 찾게 된다. 15,16,17 세 곳은 전부 삼성2동에서 움직인 집들이다. 적은 돈으로 남동생과 여동생, 우리 부부가 편하게 살집을 찾아야 한다.
19. 1985년 결혼을 앞두고 신혼집은 좀 깨끗해야 되겠기에 변두리를 서성이게 된다. 적은 돈으로 동생들과 함께 살면서 부부만의 공간을 찾다보니 홍도동 날망집을 얻게 된다. 1층과 반지하를 사용하게 된다. 버스에서 내려서 1km 이상을 걸어야 하는 집. 집은 새로 지은 집이라서 깨끗하지만 여기도 화장실은 안집대문을 통해서 들어 가야되는데 밤늦게는 잠근다는 사실, 정말 불편하다. 이곳에 살 때 결혼식도 하고, 기술이 좋아 4.28일 결혼하고 7.16일 첫 딸을 낳아 백일잔치도 했다. 슬픈 추억은 마누라가 부엌에서 목욕하면서 가스중독이되 실신한 사건은 무척 슬픈 추억이고, 동생들이 사는 반지하 방은 항상 습해서 이불등이 축축하고 옷장과 책들이 모두 곰팡이가 생긴다는 사실
20. 1987년 다시 삼성동 종점 부근 단독주택 안채를 전세로 이사하게 된다. 이때는 새마을 보일러가 뜨거운 물까지 쓰는 구조로 된 집이었다. 불란서식 슬래브집, 이곳에 살 때 아버님께서 운명하시게 되고, 호적등본에 내가 호주가 된다. 이곳에 살 때는 좀도둑들이 들 끌었던 시절이기도 했다. 오래된 집이라서 난방이 잘되지 않았다. 벽에 스치로플을 붙이고 도배를 다시 했다. 그래도 딸내미 재롱에 생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난방도 제대로 아니 되고 해서 좀 더 편리한 곳으로 이사를 했는데 그게 타이밍 맞추기가 참어려워요. 우리가 살던 집은 세가 나갔는데 내가 이사할 곳은 기간이 덜 되었다고, 이사 갈 수 가 없으니 거실 넓은 방과 부엌이 딸린 집에 살다가 구석방 한 칸짜리로 2달을 살게 된다. 실내 욕실에 양변기를 사용하던 딸내미는 퍼세식 화장실을 피하게 되는데 파리를 무척 무서워했던 추억, 이사 가려던 집이 기간이 돼서 옮기기로 한다. 그런데 여기서 또 은행에 저당된 집임을 알게 되고 부랴부랴 급하게 이틀 만에 집을 구해야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2살짜리 아장대는 딸내미와 아들은 엄마배속에서 열심히 자라고 있는데 이사할 집이 없다. 답답하죠.
21. 1988년 가까운 곳에 2층 전세를 얻게 된다. 살아가면서 여러 이치를 배우게 만든다. 서향집이라 여름은 밤 12시까지도 달아있어서 무척 더웠다. 여기서 아들을 낳고, 그래도 욕실, 입식부억등 제법 현대식에 가까운 집이었다. 아들 2돌때 아내가 맹장수술을 하게 된다. 퇴원하고 아들과의 상봉은 눈물겨워 어찌볼 수가 있으랴. 이곳에서 살 때 딸내미는 세발자전거를 무척 즐겨 탔다. 하루를 딸내미가 없어졌다고 SOS(긴급구조요청)을 한다. 동네 꼬마 수민이란 친구와 함께 없어졌단다. 수민이 아빠는 경찰서 형사였다. 두 집이 난리가 났다. 가게일 제쳐두고 88스쿠터를 타고 삼성2동을 1시간을 뒤졌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비가 오기 시작한다. 애가 탄다는 말의 뜻을 알게 하는 순간이었다. 그 무렵도 유괴사건등이 종종 매스컴에 소개되던 시절이니…, 찾는 구역을 점점 넓혀간다. 현암교 다리를 건너 중앙고교(당시는 충남상고) 담을 지나치는데 꼬마들과 어느 노년의 신사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비가 오는데 두 꼬마가 울고 있으니 집에 들어가자고 달래고 있는 순간이었다. 이 순간의 환희를 무어라 표현할꼬, 지금도 가끔 집을 나가 찾지 못하는 애들의 전단을 볼 때마다 간담이 서늘해진다. 개구리소년도 생각나고, 그래서 더 인생의 쓴맛단맛을 알게 만드나보다. 이때는 아파트 분양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택부금을 붓고 1순위가 되어야 추첨자격이 주어졌다. 처음 추첨기회가 주어져 대전시청(현재 중구청) 지하에서 추첨한 결과 5층 아파트중 5층 사이드가 당첨되기에 포기를 했다. 그 후로 3순위로 여러 군데 추첨을 했지만 당첨되지 못했다. 그러다 89년 겨울 현재 사는 동아아파트가 미분양 된 게 있다 고해서 계약하게 된다.
22. 1990년 아파트부금을 넣기 위해서는 전세금을 빼고 삯월세로 이사를 가야했다. 이때는 애기가 둘이니 세를 안준단다. 20여 곳을 돌아다니다 어느 교감선생님댁 문간방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다시 퍼세식 화장실에 딸내미가 코를 막고 파리를 벌보다도 더 무서워한다. 3살짜리 아들이 자기가 파리를 쫓아준단다. 애기가 울면 방문 두들기며 조용히 하란다. 방을 빌려준 건만도 감지덕지인데, 꼬맹이 입을 틀어막고 밖으로 나가야된다. 집 없는 설움을 실컷 만끽했다고 본다. 그런 시련이 없었다면 지금 이런 사연을 웃으며 적을 수 있을까? 91년부터 아파트 입주가 시작되었는데 우리가 살기에 너무 벅차보였다. 돈도 쪼들리고해서 2년만 전세를 놓기로 했다. 세 들어오는 사람과 계약을 맺고 나오는데 7살짜리 딸내미는 아빠 여기서 살면 안 돼 하고 아파트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버티던 모습을 지금도 가끔 돌이켜본다. 이 때 삯월세 살면서 포니2 중고를 구매한다.
23. 1993년 세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이사를 해야 되겠다고 하기에 여기저기서 마련해서 전세를 빼주고 그렇게 바라던 내 집 아파트로 입주한다. 그 당시 딸내미가 3학년, 아들 7살 때, 둘이서 이삿짐을 나르며 얼마나 많이 움직였던지 다음날 몸살이 나서 끙끙 앓던 이야기도 종종 회자되고 있다. 나만 여러 번 이사하는 줄 알았는데 전 충남도지사와 충남방적 사장을 역임했던 “이기세”씨의 이력서를 워드작업을 한 적이 있는데 A4로 10페이지는 됐던 것 같다.
학창시절과 남의 집 종업원 생활을 할 때는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책도 읽고 사색을 즐길 수도 있었지만 자영업을 시작하고부터는 남을 위해 청춘을 불사른 것 같다. 항상 아쉬워하는 맘은 여러 집을 이사하면서 얻은 인생사를 책으로 엮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한번 이사해서 잠자리가 바뀌어 익숙해지려면 수명이 1년씩 줄어든다는데, 갑자기 아파트 리모델링으로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니 정말 사연도 많았구나, 그 때 그 때 세세한 것은 훗날 또 소개하기로 약속하면서…. 부끄러운 과거를 읽어 준분께 감사를........ 쑥스럽기도 하고..........모두가 건강하게 사세요.
사노라면-들국화
쨍하고 해뜰날 ~송대관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모두 비켜라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
쨍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
뛰고뛰고 뛰는 몸이라 괴로웁지만
힘겨운 나의 인생 구름 걷히고
산듯하게 맑은 날 돌아온단다
쨍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
쨍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
첫댓글 카페지기님! 대단하십니다...소설을써도될듯~아니면 자서전~?
아~~~정말 놀랐네요 대단하셔~~~기억역도 좋구~~~맞여~~자서전~~~~
오늘 읽어구만 영태의 문장실력이 아 깜짝 역시 책많이 본사람은 다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