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李滉, 1501~1570)은 경상북도 예안(禮安)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眞城), 초명은 서홍(瑞鴻), 자는 경호(景浩), 초자는 계호(季浩)다.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등이 있고,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이황은 좌찬성 이식(李埴)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2세 때 숙부 이우(李?)에게 학문을 배우다 1523년(중종 18)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527년(중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1528년에 사마시에 급제했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였으며, 1534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부정자, 박사, 호조좌랑 등을 거쳐 1539년 수찬, 정언 등을 거쳐 형조좌랑으로 승문원교리를 겸직하였다.
1542년 검상으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사인으로 문학, 교감 등을 겸직하였고, 장령을 거쳐 1543년에 대사성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때 이기(李?)에 의해 삭직되었다 이어 사복시정이 되고 응교 등의 벼슬을 거쳤다. 1546년(명종 1) 낙향하여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 양진암을 지었다. 이때 토계를 퇴계라 개칭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1548년 단양군수가 되었다가 곧 풍기군수로 옮겼다. 1549년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이곳에서 독서와 사색에 잠겼다. 1552년 대사성으로 재임되었으며, 1554년 형조?병조참의에 의어 1556년 부제학, 1558년 공조참판이 되었다. 이후로도 여러 번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대부분 사퇴했다.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하고, 이로부터 7년간 독서와 수양, 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를 길렀다. 1566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1568년(선조 1)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1569년 고향으로 낙향했다 1570년 병이 깊어져 70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황의 학문은 주자학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주자학에서 중요시되는 글뿐 아니라 주자의 글을 평생 깊이 연구했고, 이를 알기 쉽게 편집했다. 주자의 서한문을 초록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는 이황이 평생에 걸쳐서 낸 편찬물이었다. 그의 학문이 원숙하기 시작한 것은 50세 이후부터로 대부분의 저술이 이때 이루어졌다. 53세에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개정하고 후서(後敍)를 섰으며, 『연평답문(延平答問)』을 교정하고 완성했다. 58세에 『주자서절요』, 『자성록(自省錄)』을 거의 완결하고 서(序)를 썼다. 59세에 기대승(奇大升)과 더불어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하여 토론을 했는데, 이 논변은 66세 때까지 계속되었다.
62세에 『전도수언(傳道粹言)』을 교정하고 발문을 썼으며, 63세에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의 초고를 탈고하여 그 서를 썼다. 이것은 명나라 황종희(黃宗羲)의 『송원학안(宋元學案)』에 앞서는 것으로 주자학파를 중심으로 송대 이후 중국 유학사를 정통론적 입장에서 정리한 문헌이다. 64세에 이연방(李蓮坊)의 심무체용론(心無體用論)을 논박했고, 66세에 이언적(李彦迪)의 유고를 정리, 행장을 썼으며 『심경후론(心經後論)』?『양명전습록변(陽明傳習錄辨)』을 지었다. 68세에 성리학의 주요문헌에 나오는 개념을 유기적으로 구성하여 핵심적 교훈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성학십도(聖學十圖)』, 70세에 마지막 작업으로 『사서석의(四書釋疑)』를 편찬했다.
학문의 계승과 역사적 위치 이황의 학문?사상은 이후 영남?근기 지방을 중심으로 계승되어 학계의 한 축을 이루었다. 영남 지방에서 형성된 학통은 류성룡(柳成龍)?조목(趙穆)?김성일(金誠一) 등의 제자와 17세기의 장현광(張顯光)?정경세(鄭經世) 등을 이어 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이진상(李震相) 등 한말까지 내려왔다. 근기 지방에서는 정구(鄭逑)?허목(許穆) 등을 매개로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정약용(丁若鏞) 등 남인 실학자에게 연결되어 이들 학문의 이론적 기초로서 기능했다.
한편 이들의 학통 계승은 17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각 학파?당파의 정치투쟁과 궤를 같이 하면서 전개되는데, 이이의 학문을 사상적 기반으로 기호지방에서 성장한 서인과 치열한 사상투쟁?정치투쟁을 벌이며 조선 후기 사상계?정치계의 한 축을 이루었다. 이황은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609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 나주 경현서원(景賢書院), 괴사 화암서원(花巖書院) 등 전국 40여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퇴계전서(退溪全書)』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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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柳成龍), 조목(趙穆), 김성일(金誠一), 장현광(張顯光), 정경세(鄭經世), 이재(李栽), 이상정(李象靖), 이진상(李震相), 정구(鄭逑), 허목(許穆),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 정약용(丁若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