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옥, 김익렬 중령에게 얻어터지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 4.3사건이 다루어졌다. 사진은 시민군 대장 김달삼(최상훈 역)과 김익렬 중령(이효정 역)이 마주 앉아 평화협정을 맺는다. 제주시민이 폭도로 몰려 학살 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김익렬 중령은 유서를 남기고 제주시민군을 설득하러 시민군막사에 오른다.
훗날 김익렬 장군이 군 사병들의 복지가 너무 열악해 국회를 방문하여 협조를 요청할 때 "의원여러분, 우리 부대는 잘 먹고 있습니다. 멸치를 뻥 튀겨서 북어를 먹으며, 성냥개비를 뻥튀기에 넣어 장작을 만들어 따뜻하게 보냅니다." 라고 자유당 정부를 비판한 강골군인이었다.
4.3 당시 제주도 안보를 책임진 김익렬 중령은 한라산에서 김달삼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 무장해제한다. 굶주림을 피하고 생명을 지켜야 한다. 돕겠다. 도와 달라" 이 말에 김달삼은 "친일 경찰과 행정관을 파면시켜라. 시민지지를 받는 사람을 세워주고 무자비 하게 학살을 일삼고 이간하는 서북청년단을 제주에서 빼라 그러면 우린 무장을 완전해제하고 나간다"
김중령은 "내 능력을 넘는 일이다 노력하겠다" 라고 하지 김달삼은 "이 말을 어찌 믿고 이 무장을 풀 수 있나?"고 하자 김 중령은 "내 아내와 아이들이 당신들과 같이 있도록 하겠다." 고 설득한다.
제주 시민군 김달삼은 김익렬과 예비 군사학교 동기이고 그의 성품을 알기에 주민을 내 보내고 자신들도 제주를 72시간 안에 떠나기로 하였다.
제안을 갖고 김익렬 중령은 경찰청장 제주지사 미군정담당자등과 이야기 하며 평화로 문제를 풀어가자고 하지만 당시 조병옥경찰청장은 김익렬 중령이 아버지가 공산주의였고 사상이 위험한 사람이라고 인신공격을 한다.
화가 난 김익렬은 연상의 조병옥에게 주먹을 날린다. 결국 미국은 강경진압을 지시하였고 김익렬 중령은 보직 해임되어 제주를 떠난다. 진압군은 공격명분을 만들기 위해 오라리 마을을 서북청년단에게 불을 지르게 하고 이것을 시민대가 한 것으로 조작하여 여론을 유리하게 만들고 양민을 학살했다.
김득렬은 69년에 4.3 회고록을 작성하고 자신의 사후에 출판하라고 가족들에게 말한다.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제주 4.3사건을 미군정청의 감독 부족과 실정으로 인해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官)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民)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민중 폭동이라고 본다.
당시 제주도 경찰청장이나 제주군정장관, 경무부장 조병옥씨나 미 군정장관 딘 장군 중에 한 사람이라도 사건을 옳게 파악하고 초기 현명하게 처리하였더라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었던 사건이라고 확신한다.
자신들의 과실을 잘 알고 있던 경무부장 조병옥씨 이하 경찰은 사건 해결보다는 죄상이 노출되어 자기 모가지가 달아날까봐 진상을 은폐하기에만 급급했다. 설사 공산주의자가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고 치자 그러나 제주도민 30만 전부가 공산주의자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폭동진압 책임자들은 동족인 제주도민을 이민족이나 식민지 국민에게도 감히 할 수 없는 토벌살상에만 주력한 것이다. 당시 정치지도자들이나 군경 책임자들이 수만 명의 양민을 공산주의자와 구별 없이 살해하고 자신의 보신과 공명만을 꾀한 것은 민족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한경직 목사는 영락교회 청년 265명이 서북청년단을 만들었다고 스스로 한 말. 그리고 서북청년단이 제주
빨치산을 제압했다는 발언 미국의 구호재정이 서북청년단지원에 쓰여진 의심, 박정희의 군 쿠데타 유신의 정당화를 적극 지지했고 그래서 제주4.3은 언론을 통해서는 박통이 죽기 전에는 금기어라고 말한 이런 것이 밝혀졌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것이 밝혀져도 영락교회와 한 목사 유족 관계자들이 진심의 사과가 있다면 그의 과는 과대로 공은 공대로 인정될 것으로 본다.
장신대 다닐 때 제주도가 고향인 동기생이 MT중에 우리의 질문에 들려 준 제주 학살이야기를 상세히 들었다. 그는 집안 어른과 동네어른들이 학살되고 이후 살아남은 제주도민들이 반공정권에서 숨죽여 살아야 했던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제주도민 전체가 들고 일어나서 민족정신과 통일을 지키는 것에 광적으로 흥분한 미국, 남한 정부, 경찰 ,서북청년단들이 제주도민을 빨갱이로 몰고 제주도민 28만 명 중 3만 명을 죽였던 이 사건을 우리가 70여년이 지나서 다시 생각하는 것은 지금도 이 사건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서북청년단 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었고 이후 이들이 군사 독재를 정당화하고 반 평화를 저지른 것에 대하여 기독인의 한 사람으로 잘못된 기독교에 대하여 부끄러울 뿐이다.
동백아가씨 예수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동백 꽃잎에 새겨진 사연 말 못할 그 사연을 가슴에 안고 오늘도 기다리는 동백 아가씨 가신님은 그 언제 그 어느 날에 외로운 동백꽃 찾아 오려나 아픔에 겨워 오늘도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오늘 비가 눈물이 된다. 피 멍에 물든...
미군정에서 1946년 남한시민 만 명의 응답자를 받은 조사다. 남쪽 시민들이 원하는 정치경제 체제에 대한 통계이다. 자본주의 14%,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7%다. 또 하나는 미 군정청의 의뢰를 받은 우익잡지 '선구' 라는 곳에서 선호 정치지도자 남한 응답자 2000명을 조사한 결과다. 여운형33%, 이승만21%, 김구18%, 박헌영16%, 김일성9%, 김규식5% 였다.
미국 중앙정보부는 이승만을 지도자로 내세우기 위해 학사 석사 박사를 논문 없이 통과시키며 동시에 수여하고 정동제일감리교회에서 명예장로를 세우며 신비화 하는 가운데서도 사회주의에 대한 남한 사람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더욱 미국은 한국이 민족주의가 강해 심히 걱정을 하며 그들이 원하는 아시아 미국기지로 남한을 만들기 위한 노력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위의 여론 조사는 우리가 한국현대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기초가 된다.
제주 4.3 사건을 초 진압 학살로 다스려도 국민들은 여전히 동포의식이 강했고 서북청년단 600명이 투입되어 이간과 탄압을 해도 계속 시민군들이 저항하자 이승만 정부는 여수 국방경비대 14연대를 제주 무장자위대인 민군진압에 투입하려고 하자 당시 14연대 지창수 상사를 중심으로 군인들이 뭉쳐 서북청년단들이 경찰임원이 된 양민탄압반대, 제주파견 반대, 단독 정부반대를 내걸고 무력저항을 하게 된다.
이들이 시민들의 동조를 얻어 금방 순천 고흥 보성 광양 구례 곡성까지 치안을 장악한 사건이 여수 순천사건이다. 서울 신당동 집 비밀 방이 특무대 군인에게 포위되고 김창룡대위는 문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박소령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소? 여수반란군을 진압해야지!" 그때 그 방문을 열고 총을 겨누며 나온 사람은 박정희소령이었고 군에서 5대 전략가로 손꼽히는 박 소령을 우익으로 끌여 들여 이승만에게 충성을 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김창룡은
"동갑인 우리, 친구합시다. 당신을 돕겠소 프락치 군인을 이야기해주면 최종적으로 당신은 군에서 최고의 사람이 될 것이오" 고민한 박 소령은 74명의 이름을 넘겨주며 전향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당시는 민족주의 항일운동이 있던 때라 또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반감이 없어서 군인들도 ‘남노당’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미국의 반공노선과 이승만의 독재 그리고 김창룡 같은 자에 의하여 극우독재 반이성주의가 팽배한 비극이 이어지며 권모술수는 정치적으로 계속된다.
6.25 전쟁 중에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여러분... 김창룡 대령 알잖소. 김 대령을 자식처럼 사랑해주세요. 그는 정말 애국자요. 그가 어제 지리산 공비들이 부산에 들어와 무기를 사가지고 관에다 넣고는 상복까지 업고 상여처럼 매고 위장한 채 지리산으로 가는 걸 붙잡았소. 이 얼마나 애국자요.”
이승만이 김창룡 일행을 들여보내라하자. 일개 대령을 국무회의 석상에 부른다는 건 옳지 않다고 장관들이 반대했지만 김창룡 일행은 우르르 몰려 들어와서 국무회의실 바닥에 압수했다는 무기들을 늘어놓았다,.
살상용으로 쓰일 것 같지 않은 고물들이었다. 이후 모든 것은 조작으로 밝혀진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 사건을 부산에 빨치산들이 출몰했다는 급보로 발표 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는 헌병대를 동원해 국회의원들을 버스에 납치해서 그가 원하는 개헌안을 통과시킨다.
이런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던 허태영 대령은 56년 김창룡소장의 암살을 거행한다. 이승만은 비상 계엄망을 펴고 또 전군 장병의 휴가와 외출 금지령을 내렸다. 허태영은 “내가 했다. 하나에서 백까지 모두 내 책임이다. 송용고와 신초식은 상관인 내 명령에 따랐을 뿐이므로 그들을 닦달하지 말라” 고 말했다. 허태영은 김창룡의 악행을 이렇게 고발한다.
"김창룡은 일제 북만주에서 악질 일본군 헌병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애국독립투사를 투옥했습니다. 중국에서 연합국 포로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일할 때는 포로를 학대한 친일전범입니다. 그는 월남한 후 공산당을 쫒는 군 정보기관에서 근무한 것을 계기로 개인적 영달을 위해 혈안이 되어 행동했습니다. 그는 옥석을 가리지 않고 무분별하게 숙청을 되풀이하여 공산당원 1에 대해서 양민 10의 비율로 무고한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김창룡이 취급한 사건 전부가 허위 날조했거나 침소봉대한 것입니다."
사형집행되기 전 우리나라 삼대법조인으로 말해지는 김홍섭 판사에 권유로 가톨릭에 귀의하여 마태오란 영세명을 받는다. 김홍섭 판사는 검사시절 유명한 정판서 사건을 맡는데 증인문제로 미 군정청이 심하게 간섭하자 항의와 함께 사표를 내고 나간다.
이후 낙향하여 ‘동쪽 물가에 씨앗을 심었더니 고랑마다 무성히 싹이 돋았네. 날 저물어 섶나무 수레를 덮고 길이 어두우니 빛은 이미 저녁 불빛 따라 집에 돌아오니 어린 아들 처마 밑에 기다리네.’ 이렇게 도연명의 시를 외우며 보낸다.
지난 사건들을 다시 살핀다 하여 무엇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바름을 찾는 것은 후손의 도리이다. 바름을 지향한 선조들이 억울함으로도 절망하지 않고 빛을 증거하고 가신 분들이 봄꽃일 같다.
꽃이 피면 더 사무칠 것 같다.
첫댓글 제주4.3은 우리 모두의 아픈 근현대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