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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 《광주문학》 2021년 겨울호 계간평
펜데믹과 삶의 위기를 넘기 위한 서사, 그 실루엣에 비친 시
노 창 수
“전능자의 이름을 부르라. 그대를 구원해 주리라. 다만 눈을 감고 있으라.
그대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실 터이니!”
-『아라비안나이트』 ‘신드바드 모험’ 중에서
〈1.1〉
소년 시절 『아라비안나이트』 속의 ‘신드바드의 모험 이야기’를 밤새워 읽었던 적이 있다. 이 이야기에 홀릭(holic Hollick)되는 재미란 곧 무림의 벌이었다. 하지만 신드바드 모험이 『천일야화(千一夜話)』의 한 장(章, chapter)에 불과하다는 걸 안 건 고등학교 때였다. 우리 시대는 그만큼 독서 정보가 적고도 늦었다. 『천일야화』는 번역본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프랑스의 동양학자 앙투안 갈랑(Antoine Galland,1646~1715)이 펴낸 책이 거의 완결 편에 가까운 자료로 알려져 있다. 작가는 동양의 고전 전공자답게 평생 동안 이야기를 수집하고 ‘시리아본’과 대조하는 등 이야기 전모를 담아내려 애썼다. 필자도 앙투앙 갈랑의 『천일야화』에 빠져 한 달을 허방에 달떠 보내던 때도 있었다.
한편, 사람들의 점입가경을 더욱 부채질한 것이 영화였다. 1974년 옴니버스식 구성의 시네마로 이탈리아 피에르 파올로 파솔로니(Pier Paolo Pasolini, 1922~1975)가 생애 마지막으로 감독하면서 이 이야기는 대중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 동안 일명 ‘세헤라자드 이야기’라고도 하는 『천일야화』는 애니메이션, 영화, 연극, 뮤지컬, 오페라 등 다양한 리메이크를 거듭해 왔다. 그래 이본의 편수를 헤아리기가 힘들다. 2000년대에는 〈탈출게임 아라비안나이트〉란 게임 콘텐츠까지 출시되어 십대들의 재미를 독차지하기도 했다. 이처럼 『천일야화』는 수 천 년이 지났으되 전혀 시들지 않은 인기를 얻는다. 그러므로 여기에 구태여 이념적 주석을 달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문학하는 자세〉라는 이데올로기를 ‘신드바드 이야기’ 끝에 붙이고자 한다. 문학을 위한 쉬운 접근법이 되지 않을까 해서이다. 하면,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된다.
〈1.2〉
모험가 신드바드는 긴 여행을 하려고 배를 탔다.그런 어느 날, 인도양의 넓은 바다로 배가 들어왔다. 이때, 갑자기 선장이 제 터번을 벗어 던지며 소리쳤다. “지금, 우리가 모르는 사이 소용돌이치는 위험한 바다로 들어왔소. 모든 여행이 끝장났소. 하느님께 기도나 하시오. 이제 그 분의 자비가 아니라면 도저히 살아날 수 없소!” 말을 마친 선장이 미처 손도 쓰기 전에 우지끈 하고 밧줄은 끊어졌다. 순간, 배는 암초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이 사고로 대부분 사람들이 죽고 신드바드를 비롯한 몇 명만 배의 잔해에 기대어 간신히 살아남았다. 시간이 지나자 배의 파편에 기대었던 사람들도 다 죽게 되고, 결국 추위를 이겨내며 식량을 아낀 소년 신드바드만은 겨우 목숨을 부지할 정도가 되어 바닷가에 쓰러졌다. 그러나 얼마 후 그도 먹을 게 없어 죽을 무덤을 스스로 파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그렇게 땅을 파가다가 퍼뜩, 동굴 속으로 더 들어가야겠다고 맘을 고쳐먹었다. 계속 파고 들어가자 과연 큰 강이 나타났다. 그는 곧 주변의 나무로 뗏목을 만들어 타고 하구로 내려갔다. 하지만 또 표류하다 탈진한 채 강 언덕에 쓰러지고 말았다. 한참 후 그가 깨어났을 때, 한 무리의 흑인들이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우선 살았다는 기쁨에 환호했다. 순간 평소 아는 아랍 시를 읊었다. “전능자의 이름을 부르라! 그대를 구원해 주리라. 다만 눈을 감고 있으라. 그대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실 터이니!” 그들 가운데 아랍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나타나 그의 기도시를 통역했다. “형제여! 우린 나쁜 사람들이 아니오. 보아하니 무슨 기막힌 사연이 있는 듯한데, 우리에게 그걸 이야기해 줄 수 있겠소?” 흑인들은 말을 끌고 오도록 하여 그를 정중히 태우고 마을로 행했다.
이처럼 신드바드의 기도[詩]와 기막힌 사연의 이야기[小說]는 위급한 순간에도 생존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의 기도는 〈시〉이며, “다만 눈을 감고 있으라”는 지시는 〈시의 리듬〉이다. 그가 여행해온 기막힌 사연은 〈소설〉이다. “그걸 이야기해 주시오”는 전기수(傳奇叟)와 같은 〈구변자〉의 역할 연기를 기대함이다. 사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식인종들이었다. 죽을 뻔한 신드바드가 위기에서 살아나 무심코 발한 게 ‘시와 소설’, 그러니까 〈문학〉이다. 문학이 위험에 빠진 목숨도 구한다는 걸 상징해주는 이야기이다. 고로, 문학은 생명, 또는 생명 자체라고 할 수 있다.
〈2.1〉
지난 가을호에서는 《광주문학》의 100호 특집으로 기획물이 많았다. 회원 작품은 물론 원로 문인들의 원고를 다수 실어 백화난만한 계간지가 되었다. 하지만 청탁에 쫓겨서인지 눈에 확 들어온 작품은 적었다. ‘계간평’의 자리는 이 자리로서 소명이 있기에 원로시인들의 작품 보다는 회원들의 작품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러나 양적 팽창과 더불어 역작을 기대하는 바가 컸던 때문이었을까. 가까스로 다음 5편을 고르기에 급급했다. 이번엔 ‘코로나19’란 펜데믹을 비롯하여, 우리시대 심각한 다른 위기들이 다가오는 지구적 상황과 이에 더불은 문단적 위기에서 이를 헤쳐 나아가려는 극기와 극복을 시에 운위한 작품을 눈여겨보기로 하였다. 그래, 그 작품들을 평설 자리에 앉혀 논의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지금 전 세계를 뒤덮은 ‘코로나19’와 3년째 복마전을 치르고 있다. 백신접종을 완료하고도 ‘부스터 샷’이란 관문을 더 통과해야 하는 시점이다. 오늘(2021.11.17.) 뉴스를 보니, 2차 접종 후의 추가 접종 계획을 4~5개월 당길 입장을 발표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코로나의 종착점은 아닌 듯하다. 하여, 끝날 기미를 보여주질 않는 무기약의 미래이지도 싶다.
마스크 적막 속에
말라버린 땅덩어리
묶어 놓은 실매듭이
미소로 풀릴 때면
가려진
순백의 입술
고스락을 벗어난다
-차상영 「화해의 눈빛」 전문
이제, 마스크 착용은 외출 시 액세사리처럼 기계적 부착물이 되었다. 우리가 얼굴을 가린다는 건 부끄러움에 처했을 때나 하던 일이었다. 사실 얼굴이란 게 ‘태초’라고 상정된 인류의 자연 출현으로부터 언젠가부터 수사나 수식의 미적 대상으로 자리했다. 하면,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표지이자 기호로서 작용해 온 상징적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얼굴은 바로 그 ‘나’ 자신을 정의하고 확인한다.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자급자족적’이며, ‘자기원인적’이다. 그렇듯 얼굴은 언제나 ‘자기발생적’이며, 나아가 ‘자기기원적’인 기호로 존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에릭 미쇼(Ѐric Michaud)는 『야만의 침입들: 마술사의 계보학』에서 이러한 얼굴의 구성이 결코 자기와 동일문제가 아니라, 타자와의 차이화 결과로서 나타난 문제라고 해석한다. 바로 그 점에서 ‘얼굴은 탄생하는 것’이며, 이는 ‘미술사의 숨겨진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오늘날 그 얼굴의 2/3를 가리는 마스크는 얼굴 실상을 기만하는 일일지 모른다.
이 시는 “마스크 적막”이라는 현실을 초래한 “말라버린 땅덩어리”를 걱정하며 현재의 변전된 코로나 삶을 축약도처럼 그려낸다. 사람들이 각자 입을 “묶어 놓은 실매듭”을 풀고 “미소”로 다가갈 때란 언제쯤일까. “순백의 입술”을 드러내고 위태롭고도 근심스러운 그 “고스락을 벗어나”게 될 날이 올 것인가. 시에서 눈여겨보게 하는 것은 “마스크 적막”, “순백의 입술”, 그리고 “고스락을 벗어”나는 상황들이다. 즉 코로나의 외형적 적시를 통해 탈 코로나의 상(像)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광주문학》 가을호 시단에는 여러 편의 코로나 시가 있지만 이 시를 고른 이유는 따로 있다. 마스크를 착용한 그 시선 속엔 “화해의 눈빛”이 희망적으로 상징화된 점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스락”으로 위기를 벗어나려는 의지를 구체화한 점도 그렇다.
토끼등 가는 길
작은 불랙홀을 만났다
태어나면서
누구나 자신만의 블랙홀에 던져진다
이 깊은 공간에선
찰나만이 존재한다
어떻게 될까 생각할 시간은 없다
오직 강력한 중력만이 존재하는 곳
한 발 한 발 중력 속으로 빠져든다
모두가 열심히 걷고 있다
머리가 텅 빌 때까지 걸어볼까
원추리 하나 돌밭 사이로
노란 꽃 한 송이 피우고 있다
나는 그 자리에 나를 멈추게 했다
-나승렬 「걷다 보니」 전문
이 시는 한 생명체가 눈길에 밟혀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바, 순간 그에 헤어나지 못함을 “블랙홀”로 상징한다. 뜻하지 않는 장면에 마음을 빼앗기는 그건 무등산 “토끼등”을 오르면서 공간에 긋는 한 절정이다. 생태와 생명의 미에 몰입하는 시간, 가령 한 사물을 보고 그 “중력 속으로 빠져들” 때에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한 발짝씩 말려드는 심리를 말한 것이다. 무념의 산길을 걷고 있을 때, “원추리”의 “노란 꽃 한 송이”가 신선하게 눈에 들어온다. 꽃은 확대되고 그를 멈춰 서게 한다. 더불어 그는 원추리의 노란 매혹에 빨려 들어간다. 그 보이는 세계란 제 눈에 빠져본 사람만이 갖게 되는 발견적 보물일 것이다. 해서 원추리에 과장된 “불랙홀”은 존재보다 더 값할 만도 하다. 현재적 위기에 처한 자아를 극복하는 건 원추리의 생태미학에 빠짐으로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꿀병이 꿀 먹은 벙어리다
한동안 잊고 지냈더니 냉랭하다
화난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고 꿈쩍도 않는다
손아귀에 온 힘을 주어 돌린다
깔보듯 완강히 찬바람만 돈다
답답하다
그 사람
어디론가 나가더니 뭔가를 들고 온다
새총 같이 생겼다
손잡이가 있고
고무로 된 길고 머리띠 같은 선이
동그랗게 달려있다
병에 딱 맞게 동그라미를 조절하여
힘껏 돌린다
탁, 세상 열리는 소리
가뭄 해갈하듯 막힌 곳 뚫는
가려운 곳 시원하게 긁어주는
해결사 벨트 스패너
사람도
막힌 곳 뚫어주는 사람이 있다
-문설희 「존재감 –벨트 스패너」 전문
지금 ‘11번가’나 ‘G마켓’, ‘옥션’ 등에 아이디어 상품으로 심심찮게 팔리는 것이 바로 가정용 “벨트 스패너”이다. ‘체인렌치’, ‘벨트렌치’, ‘훅 스패너’ 등 비슷한 도구들이 많지만 기능은 다 비슷하다. 한때 사용하지 않아 단단히 고정된 마개나 나사를 푸는 도구로서 만점이다. 어느 날 화자는 “꿀병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열리지 않음을 호소한다. 오래 음용하지 않고 잊고 지낸 물건들은 뚜껑이 녹슬거나 낀 음식이 굳어져 사람을 애먹이기 십상이다. “손아귀에 온 힘을 주어” 돌려보거나 뜨거운 물에 담그고 시도해 봐도 막무가내 “꿈쩍도” 않는다. 이럴 때 남편은 흔히 자기가 쓰던 도구를 활용한다. 그는 “새총” 같고, 손잡이와 고무로 된 “머리띠 같은 선”이 동그랗게 말려 있는 장비를 가지고 온다. 이른바 ‘벨트 스패너’이다. “병에 딱 맞게 동그라미를 조절하여” 힘을 가한다. 탁, 열리는 그 순간에 화자는 세상 여는 소리로 여겨 깜짝 반응한다. 마치 “가뭄 해갈하듯 막힌 곳 뚫는” 것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이를 통하여 사람도 막히면 누군가가 뚫어줘야 한다는 귀결을 얻게 된다. 이는 앞의 기(起), 승(承), 전(轉)을 지나 결(結)의 단계라 할 수 있다. 이런 논리로 상대적 “존재감”이라는 막힌 부분을 “벨트 스페너”로 뚫는 바를 기술했다. 도구와 사람의 “존재감”을 ‘벨트 스패너’를 차용해 깊어지는 시로 변화시킨 작품이다.
〈2.2〉
위기는 위기를 기회로 삼기 위한 도전적 지점이란 말이 있다. 지금이 그런 위기 시대이지만 방심하면 위기는 더 큰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환경이나 생태의 위기를 넘어가기 위한 서사의 실루엣에 비친 시로서 다음 시 두 편을 읽어 본다.
고요한 시골 마을에 별장 한 채가 있었다
창문은 물감 커튼으로 가려져 있고
정원에는
소나무, 단풍나무, 은행나무, 향나무가
이름표도 달지 않은 채 저마다 서 있었다
숲속에는
사슴과 기린과 캥거루가 살고 있었으나
낯선 이의 방문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들은 종소리가 울리기를 학수교대하고 있었다
종소리가 울려야 아이들이 돌아온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귀가 먼 탓에 오래도록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새장은 문이 열린 채 깃털만 남아 바람에 떨고 있었다
연못에는 전설처럼 푸른 이끼가 자라고 있었고
옥잠화가 깊은 세월의 길목에서 하얀 꽃을 피어올리고 있었다
별장 숲길을 지날 때 등 너머로
풍금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내 마음에 연기처럼 흰 구름이 피어올랐다
-박준수 「풍금소리」 전문
“고요한 시골”에 낡아가는 “별장 한 채”가 있다. 얼룩덜룩 비바람 친 “물감 커튼으로 가려진” 걸로 보아 사람이 오랫동안 살지 않은 집이다. 정원엔 단풍나무, 은행나무가 서있고 뒤란 숲속에는 사슴 등의 짐승들이 산다. 거기에 화자는 옛날처럼 “종소리”가 들리면 좋겠단 생각을 한다. 그러면 “아이들이 돌아오”고 집은 다시 생동감이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 된 이 집은 “귀가 먼 탓에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곳의 적막은 주변 연못에 녹아있다. “전설처럼 푸른” 연못의 이끼, “옥잠화가 깊은 세월의 길목에서 피어 올리는” 흰 꽃은 그런 고요의 정취를 더 깊게 해준다. 오래 전부터 화자는 별장 숲길을 산보해 온 듯하다. 그때마다 환청처럼 들려오는 “풍금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는다. 그래, 화자는 젊은 날에 있을 법한 소롯한 기억을 반추해 낸다. 그가 달리던 언덕에 “연기처럼” 피어오르던 “흰 구름”같은 그 시절 말이다. 풍경은 기억 저편에 이끼처럼 누워 있다. 폐교의 서정이 그러하듯 이 별장도 유유한 엣 정을 소환해 보인다. 현재의 위기를 넘기 위한 옛 서사들을 바탕에 두른 실루엣의 시로 보인다.
이처럼 이번호의 작품들은 대체로 서사에 방점을 둔 시들이 있어 향수든 코로나 극복이든 여러 위기에 대한 득의를 표현한다. 다음 박판석의 시는 생태적 위기를 벗으려는 한 서사적 실루엣을 다룬 경우이겠다.
땅에 썩는다는 말은 아름답다
그것은 다음 봄 부활한다는 말
내가 나쁜 열매로 땅에 들어
나쁜 새싹으로 태어난다면
죽어서 안 될 놈이 맞다
죽어서는 안 될 놈, 천추(天錘)가 한쪽으로 기운다
등 돌려 단단해진 땅을
포크레인으로 까뒤집어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새긴 문장
과거형 문장 위에 새가 잠시 쉬었다 간다
썩지 않는 냄새 때문에 부리를 두르고
하얀 밑줄을 그어 퇴고를 권유한 후였다
새 소리는 늘 창공처럼 푸르렀다
당신은
죽어야 하는가?
죽어서는 안 되는가?
스스로 문장을 물어서는 안 된다
새들이 돌아올 시간이다
-박판석 「썩는다는 것」 전문
시가 선언하는 바, 존재가 “썩는다는 것”은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그는 봄에 “부활한다는 말”을 들어 가식된 영구 삶을 말한다. 지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썩히면서 윤회한다. 하면, 썩지 않아 저 혼자 단단해지는 일은 후세에 “천추가 한쪽으로 기우”는 흉물이 될 것임은 자명하다. 시는 그걸 “죽어서 안 될 놈이 맞다”로 치부한다. 그리고 그를 대표한 게 시비(詩碑)라고 보는 것이다. 즉 “등 돌려 단단해진 땅을 포크레인으로 까뒤집어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새긴 문장”으로 정의한다. 화자는 소멸해야 할 법칙을 거부하고 고집으로 세운 비로부터 위기에의 반란을 주장한다. “썩지 않을 냄새”를 피우는 문장에 “새가 잠시 쉬었다 가”지만, 비석은 새의 변기로 추락되어 있다. 새는 똥을 갈겨 하얀 밑줄을 긋고 “퇴고를 권유”하며 날아간다. 이 새를 통하여 화자는 “당신은 죽어야 하는가” 아니면, “죽어서는 안 되는가”를 묻는다. 자연 이법에 의해 죽어야 함에도 죽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강변하는 사람들과 문인들이 많다. 그래, 시인은 “문장을 물어서는 안 될” 일을, 곧 새들이 그걸 확인하러 “돌아올 시간”임을 들어 경고한다. 스스로가 되묻고도 또 시비를 세운다면, 돌아올 새들의 밑줄은 더 하얗게 그어질 것이다. 더불어 기득물(시비)을 소멸시키는 주변의 뭇 탄생물 또한 잡초화 되어 그것을 무너뜨릴 것이다.
〈3.1〉
앞서 소개한 신드바드 이야기와 또다른 서사 중에, 기지의 정서로 위기를 탈출한 다음 「상인의 딸과 고리대금 업자」로 눈을 돌려 본다. 이는 『인도 설화집』에 실린 자료로 필자가 읽기 쉽게 각색했다.
오래 전에 남에게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하면 교도소에 구금되는 시대가 있었다. 그 당시 런던의 한 상인이 한 고리대금업자로부터 많은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했다. 늙고 흉악한 고리대금업자는 상인의 젊고 예쁜 딸에게 완전히 반해 있었다. 그는 빌려간 돈 대신 딸을 자기에게 주면 빚을 감면해 주겠다고 제의했다. 상인과 그 딸은 늙은이의 터무니없는 제의에 기겁하면서 거절했다. 그러자 교활한 고리대금 업자는 신의 뜻에 따라 그것을 결정하자고 말했다. 즉, 자기 돈지갑에 흰 조약돌과 검은 조약돌 하나씩 넣고, 상인의 딸이 그중 하나를 꺼내는데, 돌의 색깔에 따라 거취를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딸이 검은 돌을 꺼내면 자신의 아내가 됨과 동시에 아버지의 빚을 갚지 않아도 되며, 반대로 흰 돌을 꺼냈을 때는 자신과 결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빚도 없는 것으로 해 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상인의 말에 망설이다 마지못해 결국 수락하고 말았다. 그러자 고리대금업자는 상인의 집 정원에 깔려 있는 많은 조약돌 중에 두 개를 집어 얼른 돈봉투에 넣었다. 이때 상인의 딸은 불안해하면서도 그 늙은이가 검은 돌 두 개를 봉투에 넣는 것을 예리하게 보아두었다. 늙은이는 딸과 아버지의 운명을 결정 짓게 될 돌을 꺼내라고 상인의 딸에게 재촉했다. 상인의 딸은 돈봉투에 손을 넣어 돌 한 개를 꺼냈다. 그러나 그녀는 꺼낸 돌을 보여 주지 않고서 곧바로 다른 조약돌이 널려있는 정원에 떨어뜨려 다른 돌과 섞여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어머? 제가 실수를 했군요. 하지만 염려 마세요. 돈지갑에 남아있는 돌을 보면 제가 지금 떨어뜨린 돌의 색깔을 알 수가 있을 테니까요!” 라고 말했다.
〈3.2〉
위기에 처할수록 순간적 기지가 발동할 때가 있다. 우리의 신경적 인식망의 조직이 즉각 대처하도록 시스템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인차가 있을 뿐 누구나 이 잠재력이 작동되는 건 같다. 이걸 ‘인문학적 순발력의 논리’라 부르기도 한다. 창작의 힘이란 사실 일상에서 맞이하는 이 같은 ‘순발력’이나 ‘아이디어’의 산출에 다름 아니다. 좀 과장한다면, 오랜 독서와 사색의 과정을 통과하면 이 같은 기지(機智)는 죽순처럼 자라나게도 될 것이다. 다만 우리가 활용할 때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일상의 삶 속에 꿈틀거리는 순발력의 시품은 삶의 위기를 모면할 지혜까지도 얻게 된다.
〈4.1〉
스페인의 카밀로 호세 셀라(Camilo Jose Cela,1916~2002)의 소설 『벌집』은 특별한 내용에 전대미문의 비극을 다룬 점에서 타 소설과 차별화 된다. 세계 역사상 가장 치열한 내전을 겪은 나라가 스페인이다. 내전이란 어느 나라나 있었지만 스페인의 경우는 생면부지의 이민족과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일상에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던 이웃들과 목숨 걸고 싸운 전쟁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스페인은 후유증과 트라우마가 극심해 이웃을 경계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1936년부터 3년여에 걸친 진보와 반동,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투쟁이 내전의 전모이지만, 지금도 피해의식을 다 떨군 건 아니다.
이 소설엔 뚜렷한 줄거리가 거의 없다. 이야기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가 위기의 연속으로 구성돼 있을 뿐이다. 소설은 차가운 렌즈에 잡힌 마드리드의 모습을 ‘도냐 로사’라는 카페를 무대로 가난한 군상들을 주로 보여준다. 카페에 모인 사람들을 여러모로 추적해 보이지만 별다른 주인공은 없다. 해서, 일정한 줄거리가 없는 건 당연하다. 고된 노동자와 일감을 찾아 나선 실업자들, 동성애자, 하위직 공무원, 거리 악사 등 인물은 대부분 사회에서 밀려난 주변인으로 아웃사이더들이다. 소설에서 위기의식은 상황에 대한 무관심증에 만연된다. 일견 마르틴 마르코를 주인공으로 볼 수도 있다. 한때 대학에 다니고 글을 썼던, 프랑코로 상징되는 그는 파시스트의 세력과 어울릴 수 없어 늘 불편해 했다. 당시 지식인의 위기의식이 드러나듯 옴니버스식으로 된 이 소설은 독립적인 에피소드가 작은 방처럼 열결돼 있다. 그래서 커다란 〈벌집〉의 구조이며 제목도 『벌집』이다. 동성애자의 어머니인 마르고트의 죽음, 또는 바람피우는 돈 로케의 연애, 늘 같은 장소에서 마주치는 사건, 그리고 누군가를 음모하는 그 모든 위기를 다룬다. 리얼리즘에선 현실이 위기상황이라 해도 안에 빛이 감춰져 있도록 그려내지만, 이 같은 전율주의는 끝없는 위기의 연속이며, 그때의 어둠과 냉기만을 담아낼 뿐이다. 마르코트는 주변의 온정을 토대로 자신을 극복하는 길을 찾으려 애쓴다. 하지만 그가 결심한 일을 실행에 옮길 수 없도록 ‘수배’라는 또다른 위기 초래로 암시를 던지며 소설 막은 내린다. 그 수배란 추적할 희망이 위기로 연결되는 걸 보여주는 결말이다. 하면, 이에 내재된 작가 희망은 따로 있다. 그건 내전의 지난한 역사적 과오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현재적 위기에 대한 메시지이다.
〈4.2〉
마찬가지로, 현대시 시에 등장하는 생태 위기에도 희망 같은 극복 요소가 내재된다. 그건 시의 연과 행, 제재의 이면성과도 같다. 시의 메시지가 희망적이지 않다면 스스로 어둠을 밝혀나가긴 힘들 것이다. 코로나19 위기를 비롯한, 여러 위기상황, 예컨대 소상공인의 투쟁, 가난한 문학인들의 저항, 의지를 상실한 사람들의 외로움, 직장에서의 왕따로 죽음의 길을 택한 사람, 힘겨운 이주노동자들, 일상에 침투하는 더 복잡한 난관에 그런 메시지가 타투처럼 쪼아 있다.
인간의 입장에선 유해하지만, 쥐나 모기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인간의 폭력성이 확대되고 그 생태의 내밀성은 더욱 진지해 진다. 그런 세계에 들면 위기를 바로 보는 진정한 생태의 시가 나올 수도 있다. 음식 냄새에 길들여져 천방지축인 초파리처럼 미세 곤충들이 릴레이식으로 틈입하는 구석여행의 기록, 그냥 사라진 듯하지만 태어난 것에게 자상한 습윤성을 끼침으로서 환희를 획득해가는 박테리아 삶의 투쟁사 등의 〈벌집구성〉은 위기를 넘기 위한 생태의 세부 망이기도 할 것이다. 흔히 겉의 미학이란 것은 속의 내심을 모르는 하등 기술법이다. 〈벌집내밀〉을 잊고 겉의 정서만으로는 위기를, 아니 그것의 희망을 제대로 기표하지 못한다. 어떤 이는 빵 앞에서의 배고픔과 그 앓이[病]의 갈급증을 노래하기에도 바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파상 때문에 시품은 늘어져 ‘시인격’을 덮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 부디, 위기를 넘어야 할 시점에 와 있을수록 내밀한 희망을 노래할 진저. ‘벌집’ 없는 무생태의 신변 노래로 해뜨고 지는 경관이나 읊는 시인 앞에 팔딱 일어선 독자들이, 그 따위가 시냐 하며 던지고 곧 도망해 버리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