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경주 석탑 기행
정 정 길
경주를 신라 천년의 고도라고 한다.
신라 역사와 불교와 경주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밀접하다.
이차돈 순교 후 급속하게 번진 불교는 신라의 국민 생활에, 불교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큰 영향을 미쳤으니, 신라 역사와 운명을 함께 했다고 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사실 경주를 찾는 명분은, 이런 불교 문화와 관계없이 시내 곳곳에 널려진 대형 왕릉이나 고분이 아니면 사찰이 있었던 터를 둘러보는 것이 고작이고, 첨성대니 안압지에 포석정 등의 유물 관람이 주종을 이룬다.
그러나 특정 문화재에 관심을 갖고 경주에 들어서면 행동은 사뭇 달라지게 된다.
거석문화의 백미를 찾아볼 작정을 하고 경주를 찾은 때는, 땡볕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8월 중순이었다.
가던 날이 장날이라는 말마따나 하필이면 유전을 갖고 두 나라의 정상이 무슨 약속을 한다는 날이 일정에 들어 있어서 꺼림칙했지만 약간의 차질만 빚었을 뿐 사흘 동안 경주 시내 석탑 순례를 무사히 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고, 여기에는 경주시사적공원관리사무소에서 근무하시는 두 분의 크나큰 도움을 뺄 수 없다.
목포에서 경주까지는 400Km 남짓, 결코 짧다고만 할 수 없는 노정인지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서두른다고 시간이 아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숱하게 겪었던 터라 이성홍씨의 안내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 다행스러운 일은 마침 손수태씨가 현장 조사할 일이 있었던 터라 함께 나서는 바람에 자세한 설명까지 곁들일 수 있어서 더욱 큰 행운이었다.
처음으로 찾은 곳은 황룡사지. 기록에는 3기의 석탑이 있다고 하지만 현장 사정은 전혀 달랐다. 우선 황룡사라는 이름에서부터 혼란이 왔다.
9층 목탑으로 더 이름이 잘 알려진 황룡사가 아니라 감포읍으로 가는 길에 있는, 폐사된 황룡사였다.
그 깊은 골짜기를 파고들어 삶의 터전을 일군 농민들의 의지가 마음에 와 닿았다.
안내가 없었더라면 한나절을 헤매었을 법한 황룡사지 3층은 모두 폐탑으로 곱게 다듬은 탑재만 널려 있었다.
3층으로 추측되는 석탑을 다듬었을 석공의 혼은 어디서 숨쉬고 있을까.
기계로 자르고 깎아 다듬어 세운 요즘의 석탑에서 느낄 수 없는, 풍성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그 탑재에는 아직껏 넉넉하게 살아 숨쉬고 있었다.
탑재의 양이나 낱낱의 크기로 보아 대형 3층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그 석탑은 왜 그처럼 험상궂은 돌덩이가 되어 잠자고 있는 것일까.
대개의 석탑이 그 부근에 널려 있는 돌을 옮겨 깎고 다듬어 세웠듯이 황룡사지 폐탑 석재 또한 현지에 있는 돌과 같은 석질이었다.
감포읍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삼국을 하나로 아우른 문무왕과 깊은 인연을 가진 감은사지의 우람한 석탑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감은사지 석탑은, 이걸 보는 순간 장중하고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는 위용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기단에서 상륜에 이르는 탑신 전체가 풍기는 조형미가 예사롭지 않다.
익산 왕궁리 5층 석탑이 탑신에 비해 옥개석이 턱없이 넓고 펑퍼짐해 체감률이 난조를 보여 안정감이 떨어지는 반면 감은사지 석탑은 탑신과 옥개석의 체감률이 일정하고 탑 자체가 거대하면서도 안정감을 주어 당시 치석에 임했던 석공의 미적 감각이 어떠했는가를 말하고 있었다.
바로 지척에는 문무왕의 해중릉이 있었지만 거길 찾아갈 만큼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저물녘쯤 마동 3층 석탑을 찾아갔다.
역시 신라의 석탑답게 탑신과 옥개석의 크기와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만드는 체감률이 안정감을 주는, 평범한 석탑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 석탑이 거기 세워지게 되었는가가 호기심을 일깨운다.
지리적으로 비슷한 예가 전북의 순창에 있는 ‘빈대탑’이 있고, 해남 옥천 탑동의 4층 석탑이 있으니까 수긍할 만하지만 불교 문화의 거대한 힘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탑이었다.
원래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고 하니까 거기도 어김없는 사찰이 마을 복판에 있었던 셈인데 사찰을 둘러싸고 마을이 형성되었을까, 아니면 마을 복판을 파고들어 사찰이 세워졌을까.
마을 곁에 있는 석탑으로는 이것 말고도 천군동 석탑 2기나, 통일전을 지나 서출지 곁에 있는 남산동 석탑 2기도 마찬가지다.
경주 시내를 벗어나 감포로 가는 도로를 건천이 함께 따르고 건천 건너 논밭을 지나면 그 들판에 천군동 석탑 둘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이 석탑 역시 전형적인 신라 석탑으로 안정감과 조형미가 뛰어나 석조 예술품으로 손색이 없다.
남산동 3층 석탑 2기도 전성기의 신라 불교를 대변하는 전형적인 신라 석탑으로 느껴졌다.
불교가 융성했음을 말하듯 경주역 구내에도 석탑은 있고 남산의 서쪽 끝자락 고위산 정상 아래에도 석탑은 있으며 오묘한 지형 한복판에 들어앉은 천룡사에도 조형미가 뛰어난 석탑이 참으로 기발한 착상이 아니면 선택할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서 있다.
천룡사를 찾은 것은 경주 탐방 이틀째 되는 한낮이었다.
기온이 32C°를 기록하고 있다는 방송을 들었지만 산골짜기에는 물이 넘칠 것이고 솔바람도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는, 남산의 인심을 믿고 천룡사를 찾았다.
그러나 천룡사는 생각처럼 그렇게 만만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낮의 기온이 가장 높다는 그 시각에 하필 하늘의 용이 용트림했다는 천룡사를 찾아야 했으니 그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행 중의 고행이었다.
하늘만 빤히 뵈는 가파른 산골짜기에 난 좁은 등산로를 찾아 오르고 또 올랐지만 석탑커녕 천룡사도 만날 수 없었다.
가물이 들어 농사가 걱정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토록 깊은 산골짜기까지 바싹 말랐을 줄은 미처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애당초에 빈손으로 들어선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물은커녕 산새 소리도 없이 조용한데 하릴없는 매미만 요란을 떨었다.
언젠가 계룡산에 있다는 용강 3층 석탑을 찾기 위해 갑사에 소속된 심원암을 지나 계룡산에서 갈려진 작은 산 정상에 오른 적이 있었는데, 석탑은 찾지도 못했으면서 타는 목을 달래지 못해 죽도록 고생했던 일이 문득 떠오른다.
지리산 법계사 3층을 보기 위해 중산리 주차장에서 지리산 정상인 천황봉 바로 밑에 있는 법계사에 오르면서 가볍게 생각하고 빈손으로 산에 들어섰다가 하루 종일 목구멍을 태운 일도 언뜻 생각난다.
이렇듯 고생했던 경험이 있었으니 적어도 목을 축일 만한 물 한 병이라도 챙겼어야 하는 건데 경주 남산의 자비로운 불심을 믿고 천룡사를 찾겠다고 작정한 것이 실수였던 것이다.
목적지에 닿지도 못하고 되짚어 내려오고 말았다.
내려오는 길에 천룡사 안내판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서 전화를 걸어 위치를 물었더니 되짚어 돌아선 그 자리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 찬찬히 살폈더라면 바로 눈앞에 우뚝 선 석탑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땡볕 속에서 한나절을 허비하고 박물관으로 향하는 길은 무지하게 지루하고 되게 무더운 날씨였다.
그러나 그 경험은 크고 뼈아픈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으로 자위할 수밖에 없었다.
반드시 물을 챙길 것과 더 인내할 수 있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박물관에 가서야 천룡사가 앉은 희한한 지형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박물관 입구 왼편 낮은 솔밭 가운데에 선 용장골을 태생지로 하여 태어난 3층 석탑을 만난 뒤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복판에 남산에 있는 문화재를 이렇게 복원할 계획이라는 청사진을 모형으로 보게 된다.
거기서 참으로 오묘한 지형에 앉은 천룡사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거긴 영락없는 여체의 중간이다.
천룡사가 앉은자리를 배꼽으로 봤을 때 3층 석탑은 더 아래쪽 언덕빼기에 우뚝 서서 골짜기를 은근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석탑을 거기 앉힌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일정한 지역 안에 기이한 형태와 많은 석탑을 가진 곳으로는 화순 운주사를 덮을 만한 사찰이 없고, 땅속을 건드리기만 하면 유물이 나오지 않는 데가 없어 경주라는 땅덩어리는 말 그대로 통째가 문화재라는 말이 있다.
왕릉․고분은 차치하고라도 석탑만 얼추 짚었을 때1995년에 경주시가 발행한 문화재 목록에 의하면 40여 기가 되고 있으니 신라 불교 문화가 어떤 힘을 발휘하고 있었는가를 짐작할 만하다.
다만 석재로 남은 석탑 유물을 언제쯤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그리고 토함산 석굴암 부근 산 속에 있는 3층 석탑을, 산불이 무서워 가로막는 통제가 언제쯤 풀려 그 섬세하고 장엄하면서 안정감과 조형미가 뛰어난 석탑을 보면서 석공의 혼을 만날 수 있게 될는지 기다려 봐야겠다.
(2004년 7월 30일 발행 제2 수필집 "벽오동 심은 뜻은"에서 전문 옮김-저자)
첫댓글 스승님! 천년고도 경주에 가서 스승님과 함께 포석정에 물 띄워 약주 한잔 대접하고 싶습니다. 이글을 읽으면 신라의 문화를 모조리 탐라하는것 같습니다.
경주 남산. 듣기에는 그저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게 내 실수였어., 경주에는 47개가 있는데 경주시사적공원관리사무소 직원의 말에 의하면 진짜 아름답고 좋은 석탑은 모조리 남산에 있다는 거야. 2박 3일을 경주에 투자했건만 남산에 있는 건 하나도 못 건졌어, 올 가을에는 거길 갈 작정이라네. 갖다 와서 소식 주겠네, -정정길-
스승님이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린 언제 문화재 탐방하면서 자연을 즐기고 세상을 바로 보는 이치를 깨달을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은호야 우리 모임 잘해서 단체로 댕기자,,
무시기? 묻지마 관광 떠나자고?
선생님께선 석공도 아니신데.... ㅎ석탑에 왜 이리 관심과 사랑이 깊으신지 궁금증이 생기네요... 선생님 외모랑도 전혀 어울리지 않구요...^*^
글쎄 석탑을 학문적으로 연구했을 때 어느 분야에서 하는고?????? 에이 맨날 숙제밖에 없구먼, 동양미술사 우리나라 대학교에서는 서울대학교밖에 없는 학과. 그래서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석탑 논문을 쓰는데 그 선생님들의 전공이 미술이 아니라 역사. 그 중에서도 국사. 참 희한하지 대개 미술의 조각쯤으로 여기는데 천만의 말씀. 석탑의 시초는 중국에서 시작..... 우리나라에 건너오면서 바뀌었는데.... 에이 그만 하자 . 담에 공부시간에 하지 . 늘 행복하게나. -정정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