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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의 삼바래기
‘삼바래기’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마음의 고향 같은 감성이 저절로 솟구쳐 옴을 느낀다.
‘삼바래기’……
그곳은 내가 어린 시절, 찌는 듯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삼복더위에도 어김없이 소를 치는 작은 목동이 되어 뒷동산으로 오르곤 했던, 어린 시절의 갖가지 추억들이 흠뻑 젖어있는 전남 보성군 복내면 유정리 옥평 마을에 있는 뒷동산의 이름이다.
찌는 듯한 무더위가 시작되고 여름방학이 찾아오면 우리들 꼬마목동들은 모두 소를 몰고 ‘삼바래기’를 오르곤 했었다. 그때 내가 살았던 옥평 마을에서 소를 치는 농가는 대략 15세대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누구든 소를 치는 농가의 대부분은 ‘삼바래기’로 소를 몰아다 놓아두고 시원한 소나무 그늘 밑에서 즐거운 놀이를 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고, 서울이나 부산 등 도회지에 진출하여 나름대로의 기반을 잡고 의기양양하게 고향을 찾은 선배들로부터 가보지 못한 도시생활의 궁금증을 풀어보기도 했으며, 나름대로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향학열에 불타기도 했던 1950년대의 희미한 옛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내 가슴에 젖어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점심을 먹기가 바쁘게 서둘러 소를 몰고 ‘삼바래기’에 오르고 나면, 무더위와 싸우며 높은 산을 오르느라 헐레벌떡 숨이 차곤 했었는데, 숨찬 가슴을 가다듬으며 어디엔가 시원한 곳을 찾고 싶은 욕망에 우리들 작은 목동 꼬마녀석들은 산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을 대나무에 받아 작은 폭포수를 만들어 놓은 ‘목욕폭포’로 달려가서 서둘러 옷을 벗고 ‘폭포수’아래로 달려들곤 하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옛날 옛적이 되어버린 오랜 세월에 다시 한번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하곤 한다.
‘목욕폭포’를 서로들 많이 맞으려고 밀치고 다투고 아우성을 치기도 했고…… 술래잡기 놀이로 하루해가 어느새 훌쩍 넘어가 버리기도 했으며, 삼삼오오 짝을지어 하고 있던 놀이를 모두 끝내지도 못했는데 어두움이 우리 앞에 닥쳐오기도 했던 어릴 때의 온갖 추억들이 송두리째 묻혀있는 ‘삼바래기' 라는 그때 그곳이 정말 그립고 또 그리워진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생각나는 그 옛날 삼바래기에서의 추억 한 토막을 상기해본다. 점심을 먹기가 바쁘게 모두들 한꺼번에 떼를 지어 삼바래기로 소를 몰고 오르곤 했었는데 어느 날 하루는 여느 때와는 달리 늦은 시각에 나 혼자서 소를 몰고 삼바래기를 향하여 부지런히 오르고 또 오르고를 반복하고 있었을 때 한 마리의 암꿩이 20여 마리의 병아리 떼를 몰고 먹이를 찾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꿩 새끼도 병아리와 똑같이 생겼네”
“몇 마리 잡아다가 집에 가서 길러야지”라고 생각하고 암꿩을 따라다니는 병아리 떼를 쫒아서 달려갔었는데…… 순식간에 어디론가 모두 숨어버리고 한 마리도 찾을 수 없었던 신비스런 정경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삼바래기 동산에서 풀을 뜯던 소 떼들은 맛있는 풀을 찾아 산 위로 또 산위로 오르고 올랐는데, 어느 날 하루는 해가 지는 저녁 무렵 우리 집 소가 맨 위쪽에서 풀을 뜯고 있었고, 바로 그 위에서 커다란 여우 한 마리가 풀을 뜯는 소를 보고 앉아있지 않는가!
너무나 무서워 우리들 꼬마 목동들이 모두 힘을 합쳐 그 여우를 몰아 내야 했던 소름 끼친 옛일들이 지금도 그때 함께 있었던 옛 친구들의 가슴에도 남아있으리라 생각하니 그 시절 그 친구들이 그립고, 보고 싶고 또 그리워진다.
그런데 그 ‘삼바래기’가 지금은 그 옛날 그때의 모습으로 남아있지 않고 아무도 찾지 않는 텅 빈 공간으로, 소를 몰고 올라갈 꼬마 목동들마저 한사람도 찾을 수 없는 을씨년스런 산야(山野)로 변모되어 모처럼 큰 꿈과 기대를 갖고 그곳을 찾았던 내게 허무하고 공허한 마음만 안껴 주는 빈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삼바래기’의 옛 추억을 간직했던 어린 시절, 그 때로부터 50여년이 지난 2002년 8월의 어느 날, 조상의 차례를 지내기 위해 모처럼 시간을 내어 고향을 찾았을 때 어릴 때의 추억이 담긴 ‘삼바래기’를 찾았다.
그런데…… 내 앞에 펼쳐진 ‘삼바래기’의 모습은 그 옛날의 ‘삼바래기’와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숲과 나무들만이 오랜만에 찾아온 옛 주인을 알아주고나 있는지! 너무나 허전하고 공허하기만 했다.
왜 이렇게 텅 빈 공간이 되었을까?
내가 어렸을 때처럼 술래잡기를 하고, 목욕폭포를 먼저 맞으려고 앞 다투어 옷을 벗고 달려들기도 하고, 꿈을 심어주고…… 낭만을 품게 하고, 온갖 놀이를 했던 그런 장소로 이어오지 못했을까?
너무나 달라진 모습에, 왜? ?…… 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비단 그곳 ‘삼바래기’ 만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모든 농촌이 안고 있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우리나라 모두의 문제였다.
모두들 도회지로 가고, 도시로 떠나고……
그토록 우리에게 꿈과 희망과 추억을 남겨주었던 그 ‘삼바래기’도 이젠 저절로 빛이 바랜 옛날 얘기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아하! 이일을 어찌하나……
2002년 8월.
서울용강초등학교에서. 소정영
시조(始祖) 경공(慶公)할아버지의
묘소(墓所)를 찾아서
진주소씨 회지 제41호에 게제(2003. 3)
오늘은 우리들 진주(晉州) 소씨(蘇氏)의 시조(始祖)이신 경공(慶公)할아버지의 시제에 참배하기 위해 진주로 가는 날이다. 서울 종친회에서 마련한 관광버스가 동대문운동장 전철역에서 출발한다고 해서 시간에 맞추어 동대문운동장 전철역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나도 모르게 사색에 잠기고 있었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데 내 나이 벌써 환갑을 넘기고 있는 황혼기에 접어들어서야 시조 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아가는 내 지신이 한없이 부끄러워 할 말을 잃고 있었다. 더 젊었을 때부터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숭조화친(崇祖和親)의 삶을 살아 왔어야 했는데……
늘 먹고살기에 바쁘기만 했고 겨우겨우 살아야만 했던 현실 생활에 어쩔 수 없었노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면서 창 밖을 내다보니 어느덧 우리를 태운 관광버스는 서울을 출발하여 경부 고속도로를 따라 대전을 지났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대전에서 진주까지 새로 닦아놓은 대진(대전-진주)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전라북도 무주를 거쳐 남원을 지나 경상남도 진주가 가까워지자 3월의 봄 내음과 따스한 봄바람이 우리에게 살며시 미소 지으며 반겨주고 있는 것 같았다.
시조(始祖)할아버지! 이제서야 찾아오는 못난 후손을 꾸짖어 주세요!……
시조 경공 할아버지께서는 서기 577년 5월 6일 경주에서 신라 25대 진지왕 2년 무은아간(武殷阿干)이신 휴곤공(休昆公)의 5형제(兄弟)중 장남(長男)으로 태어나셨으며 신라 초대왕(初代王)이었던 박혁거세를 양육하신 6촌장(村長)중의 한분이신 소벌공(蘇伐公)님의 25세손(世孫) 이시다.
시조 경공(慶公)의 초휘(初諱:처음이름)는 알천(閼川)이시며 서기 636년 60歲때 27대 선덕여왕 5년 백제가 독산성을 침공하니 신라의 장군이신 알천공(閼川公)은 예하장병(隷下將兵)을 이끌고 출전하여 격전 끝에 이를 물리치고 익년(翌年) 61세에 대장군이 되시고 62세 때인 638년 고구려(高句麗)군과 칠중성(七重城) 밖에서 싸워 이를 격퇴하시고 이찬(伊湌) 벼슬을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서기 647년 진덕여왕(眞德女王) 원년(元年) 70세에 신라 최고 관직인 각간(角干:조선시대의 영의정. 현재의 국무총리와 같은 직급)이 되시고 다음해인 71세때 귀족회의의 의장격인 상대등(上大等)에 오르시었다.
당시 신라는 왕권(王權)이 중심이 되는 귀족국가가 형성되어 가는 과정이었으므로 귀족(貴族)들의 통솔(統率)을 위하여 화백(和白) 즉 귀족회의를 설치하고 좌수(座首)즉 의장격인 상대등(上大等)을 두었다고 한다.
알천공은 상대등에 오르신지 7년후인 서기 654년 29대 태종무열왕 원년 78세로 퇴임하시니 28대 진덕여왕이 승하(昇遐)하신 해이다. 진덕여왕이 승하(昇遐:임금이 세상을 떠남)하시자 군신(君臣)모두가 상대등(上大等) 알천공(閼川公)에게 등극(登極)을 간청하였으나 알천공께서는 왕위(王位)를 완곡(婉曲)하게 물리치시어 굳이 사양하시고 말씀하시기를 「臣은 이미 늙었으며 또한 덕행이 일컬을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춘추공(春秋公)은 덕망이 높고 실로 제세(濟世)의 영걸(英傑)이라 아니할 수 없다.」고 하시며 김춘추를 받들어 왕으로 추대(推戴)하시니 춘추공은 세 번 사양하다가 마침내 왕위에 오르니 이분이 바로 신라29대 태종무열왕이시다.(삼국사기.삼국유사)
그후 태종무열왕 3년인 656년에 무열왕이 알천공의 공로를 가상(嘉賞:찬미하고 칭찬함)하여 공의 24대조 벌공(蘇伐公)을 문열왕(文烈王)으로 봉(封)하였다(삼국사기.삼국유사).
이때 公은 80歲였으나 슬하에 손자가 없음으로 개탄(慨歎)의 나날을 보내시던중 하루는 꿈에 벌공(蘇伐公)께서 현몽(現夢)하시기를 흔소(欣笑:기뻐서 크게 웃음)하시면서 「그대가 도사곡으로 이사하면 가히 구치자(九豸者 : 九將軍)를 얻으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아부인(玲阿婦人) 박씨와 며누리이신 석씨(昔氏)께서도 같은 꿈을 꾸시어 公이 기이(奇異)히 여겨 오시다 84세때(서기 660년 3월 3일) 마침내 도사곡(塗斯谷 : 九柿洞)으로 이거(移居)하시어 다음해에 손자 복서공(福瑞公)을 얻으셨다. 얼마나 기쁘셨던지 그때부터 이름을 알천(閼川)에서 경사스럽다고 하여 경(慶)이라 개휘(改諱:이름을 바꿈)하시었다고 하며 도사곡을 지금까지 진주시 소경동(蘇慶洞) 또는 상대동(上大洞:벼슬이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렇게 훌륭한 시조(始祖)를 모셨음에도 불구하고 몇 백여년 이상을 경공(慶公)할아버지가 시조(始祖)였다는 사실도 모르고 지냈던 못난 후손 이였음을……
또한 시조 할아버지의 묘소(墓所)는 어디에 있었는지를 까마득하게 모르고 지내오다가 조상(祖上)의 음덕과 하늘의 계시(啓示)가 있으시어 지금은 고인(故人)이 되신 소현섭(蘇現燮) 종친께서 1973년 현파가승(玄坡家乘 : 시조할아버지에 대한 자세한 내력이 기록되어 있는 족보 형식의 책자)을 발견하시고 1974년 당시 KBS 아나운서로 재직하고 있었던 소병규 종친께서 진주시 상대동에 거주하셨던 손달선(孫達善)씨로부터 “소정승 묘소(墓所)를 우리 집안에서 수호(守護)하고 있는데 한번 찾아보지 않겠느냐?” 라는 내용의 편지 연락을 받고나서 당시 서울종친회장님이셨던 소진거(蘇鎭巨)님과 부회장님이셨던 소민석(蘇敏錫)님 진주 종친(宗親)이셨던 소해룡(蘇海龍) 소정문(蘇正文) 소재봉(蘇在鳳) 님등이 유적지를 탐문답사(探問踏査)하고 당시 전국종친회 소중영회장님과 임원님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 진주시 상대동에 있는 선학산(仙鶴山) 영봉(靈峰)에서 시조(始祖) 할아버지의 묘소를 발견하고 봉안향사(奉安享祀)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시조 할아버지에 대한 상념(想念)에 잠기면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들로 사색(思索)에 잠겨있을 때 어느덧 우리가 타고 온 관광버스는 진주시 상대동 선학산(仙鶴山)입구에 있는 종친회에서 마련한 제각 집 앞마당에 정차하고 있었는데 이미 그곳에는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신 많은 일가님들이 우리들의 도착을 반겨 주셨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들 모두는 선학산 영봉에 계신 시조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시조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곳을 향하여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난생 처음 보는 모르는 사람들이었는데도 전혀 생소한 기분이 들지 않고 오히려 다정하게 담소하면서 시조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곳을 향하여 한 걸음 또 한걸음 걸어가면서 먼 옛날 시조 할아버지가 활동하셨던 이곳저곳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한참을 오르다보니 아! 과연 이곳이 우리가 찾아온 시조 할아버지의 산소이구나! 라고 실감할 수 있었다.
“신라국(新羅國)각간(角干)상대등(上大等)소공휘경(蘇公諱慶) 묘비문”이라는 큰 비문(碑文)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그 옛날 시조 할아버지께서 신라국을 호령하시고 백제와 고구려를 견제하면서 나라를 통치하신 늠름하고 훌륭한 위업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짐을 느끼면서 함께 올라온 전국 각지에서 모이신 종친님들과 함께 묵념을 하고 또는 인사를 하고 하면서 모두들 경건(敬虔)한 마음으로 시조할아버지께 첫인사를 드리고 있었다.
‘시조 할아버지! 정말 장하시고 훌륭하십니다. 우리 후손들도 시조 할아버지처럼 훌륭한 나라의 버팀목이 될 수 있도록 모든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라고 다짐하면서 묘소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시조 경공(慶公)께서는 이곳 도사곡(塗斯谷:지금의 진주시 상대동)으로 이사를 오신 후 아드님이신 소노흔公과 며느리이신 석씨(昔氏) 부인으로부터 복서(福瑞:청주총관)복상(福祥:병부사)복정(福廷)의 3 손자와 진주땅에서 인생의 말미를 얻으시어 행복하게 여생을 보내시고 110세까지 천수를 다하시고 서기 686년 10월 12일 유명을 달리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시조 할아버지가 유명을 달리하신지가 지금부터 1300여년이나 되는 까마득한 옛날인데도, 또한 지금까지 시조 할아버지의 묘소를 돌보아오지 못했는데도 아직까지도 그 흔적(痕迹)과 자취(紫翠)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묘소가 보존되어 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조상께 감사드리고 천지신명께 감읍(感泣)할 뿐이다.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 종친들은 시조 할아버지의 유업(遺業)을 숭상(崇尙)하고 호족의 후예(後裔)답게 뿌리 있는 씨족으로서의 자긍심(自矜心)을 갖고 진주 소씨(蘇氏)로 태어났음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우리 일가님들이 되어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02년 3월 24일
능성공파 45세손
서울용강초등학교에서. 소정영
※참고문헌
1.진주소씨회보 3호.20호.23호
2.진주소씨 始祖 慶公 墓碑文.
중국기행(中國紀行)
오랜만에 중국행 관광 일정을 잡아 인천 국제비행장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남들은 유럽으로, 동남아로 방학이 되기가 무섭게 해외여행을 떠나는 세상이 되었는데 60평생을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해외여행을 못해 보았으니 너무나 못난 내 자신인것만 같아 아내와 함께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중국의 풍물(風物)을 돌아보려고 마음먹었다고나 할까?
중국은 워낙 큰 나라가 돼서 몇 개의 관광코스별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나는 이번에 우리나라는 추운 겨울철이고 해서 별로 춥지 않다는 상해 소주 항주를 묶는 관광코스를 선택하여 여행사에 예약하여 다녀오기로 했던 것이다.
손꼽아 기다렸던 2002년 11월 19일날 아침!
그 날은 우리나라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날이기도 하여 아침 일찍 일어나 앞으로 5년간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대통령 선거를 하기 위해 투표소를 찾았다.
그리고 투표를 하고 나서 아침을 먹고 여행용품들을 챙겨 인천 국제비행장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우리를 태운 공항버스는 얼마 후 인천 국제비행장에 도착하게 되었고 비행장에 도착한 나와 아내는 여행사에서 안내해준 3층에 있다는 출국 대기실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엄청나게 크고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비행장 시설에 놀라움과 우리의 국력이 이만큼 신장되었음을 확인하는 것 같아 가슴 뿌듯한 자긍심(自矜心)을 느끼면서 출국 대기실에서 우리를 안내할 가이드를 만나게 되었고 그분의 안내에 따라 중국 상해(上海)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搭乘)하였는데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이렇게 크고 많은 사람이 동시에 탑승할 수 있다는 사실에 또 한번 현대의 과학기술의 발전에 경이(驚異)와 감탄(感歎)을 금할 수 없었다.
얼마동안의 시간이 지나자 우리를 태운 비행기는 드디어 넓고 긴 활주로를 뒤로하고 높고 푸르른 창공을 향하여 힘찬 날개 짓을 펴면서 목적지인 상해를 향하여 나르고 있었는데 창(窓)밖으로 보이는 운해(雲海)와 바다가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東洋畵)를 연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얼마동안의 시간이 흐른 뒤에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가 탄 비행기는 이제 곧 중국의 상하이 국제비행장에 도착되고 있습니다. 가시고자 하는 목적지까지 안녕히 가십시오.”
라는 안내 방송과 함께 우리를 태운 비행기는 고도를 낮춰 중국 상하이 국제비행장의 활주로에 착륙하고 있었다. 아! 여기가 중국 상해(上海)라고 했던가! 일제의 식민정책(植民政策)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활동했던 그 상해(上海) 땅을 밟게 된 감회(感懷)에 가슴이 철렁함을 느끼면서 비행기 트랲을 내려 상해공항(上海空港)에 도착하였다.
상해국제비행장에 내린 우리들 관광단 일행은 안내원의 안내에 따라 출입국 심사대를 거쳐 상해비행장 여객터미널에 도착되었는데 이곳저곳에서 우리말이 아닌 중국말이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서야
“아! 이곳이 우리나라가 아닌 중국에 도착되었구나!”
라고 실감할 수 있었다. 상해(上海)비행장에서 교포 3세라고 하는 현지 안내원이 탑승하여 우리들을 안내하여 주었는데 그분의 우리말 구사능력이 너무도 뛰어나서 우리나라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로 능란하게 우리말로 안내해 주었다.
“인사드립니다. 저는 앞으로 3박 4일동안 관광객 여러분을 모시고 안내해 드릴 가이드 유 아무개입니다. 오늘은 이곳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와 윤봉길 의사가 일제에 항거하여 폭탄투척으로 맞섰던 홍구 공원을 답사하고 중국에서 실크의 원산지로 옛날부터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 졌던 소주(蘇州)로 가서 1박을 하겠습니다.”
라고 관광일정을 자세히 알려 주면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상해의 이모저모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안내해 주었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 중국, 중국에서도 경제의 중심지이자 중국 제 1의 도시 상하이, 그 상하이가 이제 정말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보아도 곧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상하이 거리는 현대적 감각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높고 웅장한 고층빌딩, 일천삼백만이 넘는 세계 제 1의 도시이면서도 길거리 어느 곳에서도 쓰레기 하나 볼 수 없는 깨끗한 거리…… 진정 중국은, 상하이는 우리나라에 강력한 도전장(挑戰狀)을 내고 우리를 앞서려고 하고 있음을 한눈으로 직감(直感)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말로만 들었던 임시정부 청사를 직접 보는 감회 또한 무어라 형언(形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반만년(半萬年) 역사(歷史)를 통해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고 민족의 자긍심(自矜心)을 세계만방에 떨치었던 우리였었는데…… 어쩌다 한때의 잘못으로 이민족(異民族)의 침략을 받아 국권(國權)을 상실했던 쓰라린 역사가 우리에게 있었다는 비통함에 무어라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이민족(異民族)의 어떠한 강압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국권(國權)을 다시금 찾고서야 말겠다는 굳건한 신념이 이곳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으니 이 또한 우리의 백절불굴(百折不屈)의 기상(氣象)이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하니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이나마 시원하게 풀린 것 같은 감회(感懷)를 느낄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인 시각은 새벽 4시가 조금 지나서였는데 호텔 방에 난방(煖房)을 하지 않았는데도 별로 추위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이곳 소주(蘇州)의 날씨는 따뜻한 기온(氣溫)을 유지하고 있었다. 16세기 무렵 마르코폴로가 이곳 소주(蘇州)에 와서 동방의 베니스라고 했을 정도로 소주(蘇州)는 수상도시(水上都市)였다고 한다. 이웃집에만 가더라도 보트를 타고 갈 정도로 수로시설(水路施設)이 잘 되어 있었다니 정말 이국적(異國的)인 풍경(風景)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삼국지에 나오는 오나라의 수도(首都)로서 손권의 근거지였다고 하는데 넓은 평야지대로서 “하늘에는 천당(天堂)이 있고 지상에는 소주(蘇州)와 항주(杭州)가 있다”
는 뜻의 상유천당(上有天堂).하유소항(下有蘇杭)이라는 표현을 곧잘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소주(蘇州)와 항주(杭州)는 옛날부터 농산물이 풍부하고 실크의 원산지(原産地)로서 풍족한 생활을 했던 부유(富裕)한 고장 이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중 항주(杭州)는
“아침에도 좋고, 저녁에도 좋고, 비 오는 날도 또한 좋다.”
고 표현되고 있을 정도로 살기 좋은 고장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곳에는 춘추시대 말기 이 지역에서 패권을 다투었던 월왕 구천(句踐)이 오왕 부차(夫差)에게 바쳤다는 미녀 서시(西施)에 비유되는 서호(西湖)라는 넓은 호수를 끼고 있었는데, 이곳은 옛날 송나라의 도읍지로서 그곳 사람들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오염(汚染)되지 않는 깨끗한 호수(湖水)를 만들기 위해 호수(湖水) 주변에는 고층건물은 물론 일체의 위락시설을 짓지 않고 깨끗한 호수로 보존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안내원의 말을 듣고 우리가 꼭 배워야할 덕목(德目)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아름다운 서호(西湖)의 이곳저곳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서호(西湖) 왼편에는 영은사 라는 큰 절(寺刹)이 있었는데, 이 절(寺刹)에는 신라시대 성덕왕의 맏아들로 중국에 건너가 불문(佛門)에 귀의(歸依)하여 지장보살이 되신 김교각(金喬覺) 스님께서 석가모니불 바로 다음 자리에서 수많은 중국인들로부터 예불(禮佛)을 받고 계셨는데 중국인들이 김교각 스님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예나 지금이나 뭍사람들로부터 존경(尊敬)과 흠모(欽慕)를 받는 위대한 선각자(先覺者)가 우리나라에서 더 많이 배출되는, 살기 좋은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所望)을 품으면서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중국!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도 중국을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인데, 이번 중국 관광을 통해서 그 중국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결과는 너무도 가능성이 많고 잠재력(潛在力)이 높은 나라였으며 상해(上海)와 같이 큰 도시의 길거리가 어쩌면 휴지나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한 도시로 가꾸고 있는 것을 보니 우리보다 몇 배 정신적으로 앞서있는 나라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도 하루빨리 자기의 생활주변을 스스로 깨끗이 관리 할 수 있는, 기본이 바른 생활습관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보고 느꼈다고나 할까?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를 따라잡고 또 추월하려고 하는 중국이라는 무서운 나라에 뒤지지 않도록 하루빨리 대오각성(大悟覺性)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텐데…… 라고 기도해본다.
2002년 12월
서울용강초등학교에서. 소정영
임오년(壬午年)을 보내면서
2002년 임오년(壬午年)!
올해는 유난히도 우리에게 매우 뜻 깊고 의미 있는 역사적 시간들의 연속이 많았던 한 해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월드컵 축제기간동안 전 국민이 하나 되어 서울시청 앞과 광화문 거리는 물론 전국을 붉은 물결로 가득 메우며 ‘오! 대한민국, 필승코리아’ 의 함성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던 일, 월드컵 4강 신화를 창조하여 우리의 저력을 마음껏 세계에 과시했던 일 등은 월드컵을 통하여 ‘꿈은 이루어진다’ 는 미래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을 우리에게 심어준 엄청난 한해가 아니었는가 생각해 보면서 가슴 뿌듯한 긍지와 감회를 맛보기에 충분한 임오년(壬午年)이었다고 생각된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던 해는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의 임오년(壬午年:1942년)! 그때는 일제(日帝)의 막바지 강압정치에 시달린 우리민족이 온갖 핍박과 식민정책의 수탈(收奪)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고통의 연속에서 신음했던 그런 시대였었는데 그 어려운 시기에 이 세상에 고고한 새 생명의 씨앗으로 태어난 나는 우리 집안의 희망이요 우리 가문의 등불로서의 역할을 기대하는 부모님과 일가친척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느새 60성상을 살아오는 동안, 어린 시절에는 여순 반란사건과 6.25동란을 거치면서 가난과 배고픔과 동족상잔(同族相殘)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이었던 소설가 조정래씨의 장편소설 「태백산맥」의 주무대였던 바로 그곳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야 했었고 남들보다 뛰어나지도 앞서지도 못했지만, 그러나 늘 내가 가야할 길을 찾아 사색(思索)에 잠기곤 했던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초등학교 교사의 길을 택하여 교육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햇병아리 교사시절에는 고향이었던 전라남도 보성군 일원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고향학교인 전라남도 보성군 복내면 소재지에 위치하고 있는 복내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하게 되었고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도 모두 보성군 일원에 있는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그곳에서 출산하여 부모와 자식으로서의 인연(因縁)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변화와 발전의 욕망(慾望)을 찾아 도서벽지 학교를 희망하게 되었고 전라남도 완도군 금당면 일대에서 낙도교육의 최 선봉장이 되어 봉사와 교육적 신념을 펼쳐보기도 하였으며 다시금 광주를 거쳐 대한민국의 심장부인 수도 서울에 전입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37년 동안을 줄곧 초등교육에 헌신(獻身)해온 동안, 어느 사이 나도 모르게 검은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린 세월의 자국을 실감하게 되었고 60년 만에 한번 돌아온다는 환갑을 맞게 되었으니 가수 최희준씨가 부른 유행가 「하숙생」의 가사가 지금의 내 가슴을 울려주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
지금껏 교직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나는 과연 내가 가르치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심어주려고, 또 무엇을 가르치고 몸에 베이게 하려고 노력해 왔는가를 곰곰이 되돌아보았다.
「실력 있는 용강어린이. 바른 품성을 갖는 용강어린이」를 기르기 위해 학교의 모든 행정력을 기울려 노력하고 있지만 과연 기대했던 만큼 성과가 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가끔 놓친 것들을 생각하곤 한다. 그럴 때면 내가 갈망했던 것들과 끝내 만나지 못했거나 아니면 이루지 못했다는 낭패감에 젖곤 한다.
한해가 끝나가는 12월이나 다시 한해가 시작되는 1월에는 더욱 그렇다. 언젠가 제주도 여행길에서 가져왔던 귤나무 한 그루가 우리 집 베란다 화분 속에서 노란 귤열매를 보기 위해 아내는 정성껏 그것을 기르고 있다. 파아란 귤나무에서 노오란 귤열매를 보기 위해 바람과 햇빛과 물과 정성으로 돌보고 있는 아내의 모습에서 나는 늘 고마움과 미안함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금빛 열매가 매달릴 날을 꿈꾸며 열매보다도 열매를 만들어 가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조금은 깨닫게 되었다고나 할까?
2002.12.25(음 2002.11.22)
서울용강초등학교에서 소정영
요현형. 고마워!
2003년 2월 7일(금).
그 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후 5시가 되었을 때 교장실을 나서며 그 날 하루의 일과를 반성해보면서 교문 쪽을 향하여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오늘의 보람된 일’은 무엇이었지? 오늘, 우리 용강의 어린이들에게 나는 학교장으로서 어떤 보람된 일을 했을까? 라고 자문자답(自問自答)해 보면서 중앙현관을 지나 운동장에 이르니 내가 우리학교에 부임하기 직전부터 활동하고 계셨다는 평생교육 시범학교 게이트볼 회원들이셨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께서 게이트볼을 치고 계셨다.
“할아버지 할머니, 게이트볼 치시네요. 훌륭하십니다!”
“교장선생님! 감사합니다.”
“추운 날씨인데도 열심히 운동을 하고 계신 어르신들의 모습이 훌륭한 그림처럼 아주 장하게 보입니다.”
“교장선생님께서 잘 돌봐주셔서 고맙지요!”
“제가 먼저 들어갑니다. 운동 열심히 하시고 들어가세요.”
라고 인사를 하면서 교문을 나서고 있었다. 내가 우리 서울용강초등학교에 부임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이 지나가고 있음을 실감하면서 곧바로 대흥전철역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고 그곳에서 응암 방향으로 향하는 전철에 승차하여 조용히 그 날 하루의 일과를 생각해보며 사색에 잠기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고 나서 한참 후 그러니까 얼마동안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몽롱한 꿈결 속에서 허리띠에 차고 있었던 휴대폰의 진동으로 전화가 왔음을 직감할 수 있었고 곧바로 “여보세요! 여보세요!” 라고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전화는 받았지만 그때 당시의 상황으로는 상대방의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고 또한 누가, 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도무지 내 자신이 알아차리지를 못하고 있을 때였었다.
“따르릉 따르릉……”
그리고 또다시 걸려오는 휴대폰의 진동으로 나에게 전화가 또 왔음을 인지(認知)하고 호주머니에 넣고 있었던 휴대폰을 꺼내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수화기를 통해서 가냘프게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평생의 반려자이자 사랑하는 아내가 애타게 나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학교에서 퇴근하여 집에 가기 위해 대흥역에서 전철을 탔었는데…… 왜 내가 아직까지 집에 가지 못하고 전동차에 앉아있었는가를 어렴풋이 알아차리고 있었다.
“아 내가 저혈당 이였구나.”
“빨리 정신을 차려야 돼”
“여기가 어디지?”
“여기가 합정이라고 나오는데!”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이고 어떻게 되었다는 속시원한 대답을 했어야 했는데도 마음만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 실제로는 도무지 내가 생각한대로는 행동하지를 못하고 있었다.
“거기가 어디예요?”
“어디예요?”
또다시 걸려오는 핸드폰의 수화기를 여는 순간, 흐느껴 울면서 나를 찾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사랑하는 아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긴 했지만!
“거기가 어디예요?”
“어디예요?”
라고 묻고 있는 간절한 질문에는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얼버무리고만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여기가 합정역이야”
“여기가 망원역인데”
“여기가 수색역이야”
정말 지루하고 긴박하고 어처구니없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합정역이고 망원역이고 또 수색역이라고만 되풀이해서 대답하고 있을 때였었다.
“그곳이 어디예요? 거기서 내려요” 라고 묻는 말에
“여기가 증산역이야.”
“거기서 빨리 내려요”
“그래 내릴께!” 라고 대답하면서 정신을 번쩍 차리고 전철에서 내려 대합실 쪽으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몸이 비틀거려 생각처럼 걸을 수가 없었다.
“아! 내가 저혈당이였었구나! 그래서 아직 전동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지금까지 이렇게 처음 전철을 탔을 때 앉아 있었던 자리에 그대로 앉아만 있었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빨리 대합실 쪽으로 올라가서 무엇인가를 먹어야 할 것 같았고 또 증산역에서 틀림없이 내렸다고 전화로 알려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몸이 비틀거려 혼자서 걷기가 매우 힘들어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마땅히 그럴만한 사람도 보이지 않아서 층계 가장자리에 설치되어 있는 안전대 손잡이를 두 손으로 꼭 붙잡으며 개찰구 쪽으로 어정어정 걷기 시작하였다.
어떻게 걸어갔는지 한참동안 있는 힘을 다해서 걷다보니 어느새 개찰구에 도착되었는데 그때 마침 개찰구를 지키는 역무원 한 사람이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역무원 아저씨! 내가 당뇨병 환자인데 저혈당으로 걷지를 못하고 있어요. 내가 단 것을 먹어야 저혈당에서 깨어납니다. 나 좀 붙잡고 밖에 있는 가게로 데려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 역무원을 붙들고 사정을 했지만, 그러나 나의 그와 같은 간절한 부탁은 전혀 소용이 없었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어서 빨리 저혈당에서 깨어나야 하는데! 더 심한 저혈당으로 빠지기 전에 무엇인가 설탕이 들어있는 단물을 먹어야 하는데”
이와 같은 생각으로 나는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또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전철표를 파는 곳으로 찾아가서 표를 팔고 있는 역무원에게 나의 저혈당 증세를 말하면서 도움을 청하고 또 청했다.
“아저씨! 앞에 가세요. 내가 뒤따라가겠습니다.” 하면서 조금 전 개찰구 쪽에 있었던 역무원이 내게 다가오며 도움을 주겠다는 의사표시를 하였다.
“젊은이! 고마워요.”
정말 너무나 반가웠다. 마치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다. 나는 얼른 그 젊은이의 팔을 잡고 따라가기 시작했고 잠시 후 슈퍼마켓이 눈에 보였다.
“아! 슈퍼마켓이 있구나.”
“이제 살았다!” 라고 생각하면서 가게 안으로 들어가 주인 아주머니에게 음료수 한 병 주실 것을 부탁했다.
“아주머니! 제가 당뇨병으로 지금 저혈당입니다. 뭐 단물 하나만 주세요.”
라고 부탁을 드렸는데 그 가게 집 아주머니께서는 얼른 들어오라고 안내를 함과 동시에 꿀물이 든 음료수병 하나를 내게 주었다.
“이것이 꿀물인데 여기 앉아서 드세요.”
가게 안으로 들어간 나는 가게 집 주인이 주신 그 꿀물을 얼른 받아 단숨에 들이마셨다. 이제 살 것 같았다. 그리고 완연하게 정신이 맑아지고 기운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한참을 앉아있으니 저혈당 증세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아주머니!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얼른 알아보시고 응급 조치를 잘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병원에를 다니는데 거기서 저혈당 환자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얼른 단 것을 드셔야 할 것 같아서 꿀물을 드렸습니다.”
“제가 마포에 있는 용강초등학교 교장인데 학교에서 퇴근길에 전철을 타고 가면서 전동차 의자에 앉은 체로 저혈당에 빠진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내가 저혈당에 빠진 정황을 설명해 드리면서 고마움의 인사를 드린 후 나를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생각하며 그곳 가게를 나와서 증산역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때의 시각은 어느덧 컴컴한 밤이 되어 있었고 오후 여덟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퇴근하려고 학교에서 나와서 대흥전철역에서 전동차를 탄 시각이 오후 5시경이었는데 8시가 넘도록 전동차를 그대로 타고 있었으니 무려 3시간 정도를 전동차에 앉은체로 저혈당에 빠져 있었다는 생각에 이르자 그동안에 나를 찾으려고 애태웠던 아내의 심경이 어떻했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서 빨리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내에게 더 이상의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증산 전철역을 향해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소선생! 어디서 오지?”
“아니! 자네가 어떻게? 나 때문에 왔던가?”
증산전철역 입구에 들어서자 나의 오랜 친구이면서 어려울 때마다 늘 형님과 같은 역할을 수행해주시고 있는 요현 兄내외분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니 나 때문에 형 내외분이 또 이렇게!”
“괜찮아? 정말 다행이다!”
“어서 연신내역으로 가자고! 병용이 엄마가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하면서 우리는 함께 연신내역으로 출발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내가 저혈당으로 행방이 묘연(杳然)해지자 다급해진 아내가 친구 내외분께 도움을 요청했었고, 그렇게 해서 내 아내와 함께 6호선 전동차를 하나씩 뒤지면서 나를 찾고 있었다고 한다.
“요현 兄! 감사해”
“정말 감사해”
내가 친구인 요현 兄과 인연(因緣)을 맺었던 때는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1950년대인 고등학교 1학년 때였었다. 그때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게 살고 있었던 때였으므로 나와 같이 전라남도 일원에서 살고 있었던 시골출신의 학생들은 대부분 도청소재지인 광주에 유학하여 자취(自炊)를 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때 내가 다녔던 광주상업고등학교에서 가장 공부를 잘했고 모범생이었던 요현 兄과 함께 자취(自炊)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었다. 그 시절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때부터 우리는 함께 자취(自炊)를 하게 되었는데 친구인 요현 兄은 무척 부지런하고 집념이 강한 성품 이였음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함께 자취생활을 했으니까 우리는 서로의 생활습관 등을 저절로 알 수밖에 없었고 그 친구가 왜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 이였는가를 저절로 알게 되었다.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함은 물론이고 가끔씩 새벽잠에서 깨어나 보면 언제나 불을 밝히고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아무런 생각 없이 잠만 자고 있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 얼른 일어나 함께 공부했던 그때 그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지금도 엊그제 같이 잊혀지지 않는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 봄에 씨앗을 뿌려야 가을에 수확(收穫)을 거둔다.”
라는 우리의 옛 속담처럼 늘 부지런하고 강한 집념이 있었기에 친구인 요현 兄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부모님께서 거의 뒷바라지를 해주지 못했는데도 자수성가(自手成家)하신 분들의 모범적인 모델을 보여준 훌륭한 친구로서, 세무직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여 여수 순천 목포 전주 광주 세무서를 거쳐 서울에서도 중견 세무공무원으로 재직(在職)하였을 뿐 아니라 세무사(稅務士) 자격고시에 합격하여 서울에서도 명성이 높은 이름난 세무사로써 활동하고 있는 장한 모습에 늘 존경(尊敬)과 흠모(欽慕)의 념(念)을 갖게 하는 兄으로서의 소임을 다해주는 자랑스런 친구이다.
늘 내 주변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서 함께 고민하고 함께 의논하고 함께 해결하려고 애써주는 그 비단결 같은 고마운 마음에 그저 나 혼자서 만이 감사의 마음을 전할뿐…… 아직까지 드러내놓고 정말로 고맙다고 말 한마디도 해보지 못한 못난 친구이고 못난 아우라고나 할까!
연신내 전철역에 도착한 우리들 일행은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아내와 만나게 되었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있는 아내의 모습에 나는 그만 천길 만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송구함과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여보! 미안해!”
“여보! 정말 미안해”
나는 울고 있는 아내에게 더 이상의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다시는 그때 그 날과 같은 일이 없도록 조심! 또 조심하겠다고 다짐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내의 손을 잡고
“여보! 미안해!”
“여보! 정말 미안해”
라는 말만 마음속으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사람은 사회적(社會的) 동물이라고 한다.
우리들 보통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 많은 사람들과 서로 인연(因緣)을 맺고 서로 어울려 살아가면서 친분관계를 유지 발전시켜 친구로서의 사랑을 주고받고 있는데, 나는 유독 요현 兄에게만은 늘 받기만 하는 사랑을 유지하고 있으니!
“요현 兄! 고마워!”
“정말 고마워!”
2003년 2월
서울용강초등학교에서 소정영
교도행정의 본(本)을 보여준
安圭鎬 소장님!
2003. 4. 10일
오늘은 늘 말로만 들었던 화제의 의정부교도소를 찾아서 견학을 가는 날이다.
의정부 교도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안규호(安圭鎬) 소장님께서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들은 교도소(矯導所)와 같은 특수기관(特殊機關)을 평소에 견학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배려(配慮)에서였다.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교도소(矯導所)라는 말만 들어도 ‘살아있는 사람들의 지옥’이라는 ‘이미지’였었는데 근래에 들어와서 각종 보도매체(報道媒體)를 통해 그동안 우리들에게 ‘기피시설(忌避施設)’이라는 사회의 보편적 편견(偏見)을 불식시키며 타 기관에선 1년에 하나의 수상(受賞)도 어려운데 이곳에선 법무부 종합행정감사 우수기관, 교정국 감사순회점검 최우수상을 받아 한꺼번에 2개의 상을 받은 모범적인 교도소로 알려지면서 이곳의 행정을 총괄하고 있는 안규호(安圭鎬) 소장님의 진정한 모범행정이 무엇인지도 알고 싶었고, 또한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몸으로 실천해가고 있는 화제의 주인공 안규호(安圭鎬) 의정부교도소장이 집무(執務)하고 있는 모습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서였다.
다부진 체격과 정직한 눈빛으로 백 마디의 말보다 솔선수범(率先垂範)을 최우선으로 하여 근무의 본(本)을 보여줌으로써 안소장(安所長)이 있었던 곳은 질서(秩序)가 바로 잡히고 직원들의 후생시설(厚生施設)이 획기적으로 발전되어 갔고, 또한 문제성 많은 재소자(在所者)들과의 마음을 터놓은 인간적 교류(交流)는 그들이 사회에 나와서 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하니 그가 실천하고 있는 교도행정(矯導行政)이 우리나라가 선진사회(先進社會)로 진입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役割)을 하고 있는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는 재소자(在所者)들의 편의에 서서 열린행정, 앞선행정을 펼쳐가고 있었는데 재소자들이 마음 놓고 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교육 프로그램과 사회적응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실천토록 함으로서 1999년, 전국(全國) 최초로 외국어교육을 통해 사회적응(社會適應) 능력을 키우자는 취지에서 영어, 일어 교육 반을 편성하여 면학분위기(勉學雰圍氣)를 고취시킨 결과 2002년도 영어 TEPS 응시에서 서울대 신입생 평균 점수보다 159점이 높은 731점의 월등한 실력을 올리는 성과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정보화 사회에 발맞춰 초급.중급.고급반의 차별화된 컴퓨터 교육은 2002년 1년 동안 IT 관련 자격증을 313명이 취득하고 PC 정비사 25명이 합격하는 등 큰 업적을 남기었다고 하니 이곳이 마치 교도소가 아닌 일류학교가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재소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안규호소장님 이야말로 한때의 잘못으로 교도소에 들어온 우리나라의 재소자(在所者)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어주는 참다운 공직자상(公職者象)을 실천하는 베스탈로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기에 충분할 것 같았다.
그는 또한 재소자들에게 자유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재소자(在所者)들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던져서 고락을 함께 했던 재소자들은 형기(刑期)가 끝나고 교도소(矯導所)를 출소한 후에는 다시는 재범(再犯)하지 않는, 그리고 안규호(安圭鎬) 소장을 잊지 않고 관계가 계속되는 끈끈한 정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니 정말 안규호(安圭鎬)소장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공직자상(公職者象)을 실천한 조선시대의 ‘황희’ 정승에 버금가는 분이 아니신가 하는 존경(尊敬)의 념(念)을 갖기에 충분하다.
“법에 대해 무지(無知)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했던 일들 이 법에 위반되는 줄 몰랐다. 그러나 옥중에서 자유의 소중함을 알았기 때문에 절대로 잊지 않고 앞으로 좋은 사람이 되어 사회에 공헌하겠다.”
이것은 안규호 소장과 인연을 맺었던 수많은 재소자들이 한결같이 자기 스스로에게 ‘자기와의 약속’처럼 간직하고 있는 좌우명(座右銘)이라고 하고 있다니 안규호(安圭鎬) 소장님, 정말 장하고 훌륭하십니다.
그런데 이처럼 훌륭한 업적과 치적을 쌓고 있는 안규호(安圭鎬) 소장이 우리와 함께 공부했고 우리와 함께 학창시절을 보냈던 보성중학교 11회 동기동창(同期同窓)이라는 사실에 나 또한 가슴이 활짝 펴지고 어깨가 으쓱해짐을 느끼면서 그 날 의정부교도소를 함께 방문했던 30여명의 우리들 보성중학교 11회 동문들 모두는 “애중친인(愛衆親仁)” 의 교훈(校訓)으로 우리들을 가르쳐주신 고(故) 안태시(安泰時) 교장선생님께도 감사를 드리면서 우리들 보성중학교 11회 동기생 모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가 소속하여 일하고 있는 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役割)을 충실히 하고 있으리라 자부(自負)해 본다……
2003. 4. 10
서울용강초등학교에서 소정영
「백두대간의 새벽」을 읽고
아래 글은 필자가 진주소씨 회지 제 42호에 게제한 내용을 그대로 소개한 글임을 밝힌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 왔다.
먼 예날 삼국시대 때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으로부터 굳건히 나라를 지킨 고구려의 꿋꿋한 기상이 있었는가하면 사색당쟁과 잘못된 정치 지도자들의 수구사상에 의해 일제의 침략을 이겨내지 못하고 반만년 우리 역사에 일찍이 없었던 치욕의 역사를 맛보아야 하기도 했었는데 소진섭님의 대하소설(大河小說)「백두대간의 새벽」은 일제 36년의 어두움의 그림자를 반추(反芻)해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6.25사변이라는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수난기을 맞으면서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박영감과 그의 아들 박만호가 겪어나간 처절하고도 비참한 한국전쟁의 이야기를 실제의 전투상황에 맞게 펼쳐나가면서도 그 시대의 시대상과 우리가 미처 모르고 지나쳤던 역사적인 이야기들이 책을 한번 손에 들고나면 끝까지 읽지 않고는 못 견딜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박영감(박종덕)은 왜정(倭政)때 경성(서울)에서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법학부에서 공부를 했다. 그는 유학시절에 하숙집 딸 하찌꼬와 사랑을 하게 되지만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로 사랑을 맺지 못하게 되어 괴로워했고……
종덕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고 종덕으로부터 사랑의 배신을 당한 하찌꼬는 복수의 일념으로 불타있었는데……
종덕은 해방 후 대학학장으로 후배양성에 힘썼으나 국내정세는 사상이념으로 소용돌이 치고 있었으며 그로인해 제주도 4.3사건, 여수순천 반란사건, 대구 폭동사건 등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이름만으로도 끔직한 6.25 사변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박영감의 아들 박만호는 3대 독자로 대학교 2학년 때 6.25사변을 만나게 되었는데 공산치하에서 자기 집 행랑채에 살고 있던 머슴의 아들 종춘은 내무서원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마을 인민위원장이 되어 만호를 찾아내라고 주인인 박영감을 협박하며 괴롭히고 있었으며 아들 만호를 동네 당집 지하에 숨겨두었던 박영감은 아들 만호를 국군이 있는 먼 남쪽으로 피신할 것을 권유하게 되었고, 만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공산치하에서 견디다 못해 그들의 눈을 피해 남으로 내려가다가 낙동강전선을 뚫고 국군부대와 합류하게 되었으며 군번 없는 학도의용병으로 공산군과 싸우다가 육군 장교로 임관되어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황이 뒤바뀌어 패주하는 공산군을 쫒아 강릉, 원산, 함흥을 지나 계속 전진하다가 함경남도 부전령에서 총상을 입고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그곳 깊은 산 속 외딴집에 살고 있는 석경란의 집으로 몰래 찾아들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그들 모녀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생명을 건졌다. 그리고 그곳 부전령 깊은 산 속에서 야생화처럼 피고 자란 석경란과 사랑을 하게 되었고……
한편 만호의 첫 애인 소정순은 임신을 하게 되어 전쟁중에 한영을 낳았고 미혼모로써 갖은 고생과 설움을 받았다. 수복 후 정순은 미 8군에서 번역 업무를 맡아 일하면서 중단했던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교편(敎鞭)을 잡은 선생님이 되었는데 그때 벌써 4살이나 된 아들 한영을 데리고 안성에 있는 만호의 집을 찾게 되었다. 박영감 내외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이들 모자를 보고 너무나 기쁘고 반가워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고, 이들 모자(母子)를 아들 만호의 호적에 입적시키고 서울 명륜동에 있었던 그의 집과 모든 재산을 한영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지병이 악화되어 3대 독자인 아들 만호를 만나보지 못하고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한편 만호는 아버지의 죽음도 모른 채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인간으로선 참을 수 없는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수형 생활을 계속하다가 탈출을 결심, 수용소 동료인 주철구와 함께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압록강 강변에서 북한 경비원에게 주철구는 살해되고 홀 홀 단신 구사일생 중국으로 넘어가 장백산맥으로 숨어들었는데 그곳에서 기적같이 현광스님을 만나게 되었고 또한 현광스님의 제자 염아를 알게 되었으며 스님의 뜻에 따라 그녀와 냉수를 떠놓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와 함께 중국 내륙을 횡단하여 천산산맥을 넘어 미얀마로 탈출하였고 그곳에서 다시 꿈에도 그리던 우리나라 대한민국으로 귀환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사랑하는 정순, 경란과도 다시 서울에서 만나게 된다는 「백두대간의 새벽」2권까지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해 드렸는데 지금 현재로선 2권까지만 출간하였지만 모두 4권까지 출간하려고 원고를 탈고까지 모두 마치었다고 하니 이 글을 읽으신 우리들 진주소씨 일가님께서는 44세손 소진섭님께서 지으신 「백두대간의 새벽」을 꼭 한번씩 읽어보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2003년 5월
진주소씨 능성공파 45세손
서울용강초등학교에서. 소정영
등반 그리고 일요산악회
십여년 전부터 우리사회도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견문을 넓히고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또한 여가시간을 뜻있게 보내려는 중산층의 시민들이 늘어나면서 산은 자연스럽게 우리들의 생활과 문화의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휴식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도시생활의 번잡함을 벗어나서 자연을 감상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산을 찾고 있음이 오늘의 현실이 되었으니 말이다.
산은 생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과 산나물 등 음식물들을 공급하여 풍요로운 삶을 영유하게 하고, 산은 어머니처럼 많은 것을 우리들에게 베풀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산은 반드시 우리에게 풍요로운 삶을 베풀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우리들이 잘못했을 때는 우리에게 엄청난 재앙(災殃)을 가져다주기도 하는데 2001년 겨울철에 일어났던 강원도 삼척지방의 대 화재로 지금도 그곳의 생태계가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완전하게 원상회복(原狀回復)이 이루어지려면 적어도 50년의 긴 세월이 필요하다고 하니 이처럼 한 순간의 잘못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국민 누구든지 산을 아끼고 보호해야 하며 산을 가꾸고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산과 인연(因緣)을 맺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20여년전 서울혜화초등학교에 재직하고 있을 때부터였는데 내가 갖고 있는 지병인 당뇨병을 이기기 위하여 매일아침 인왕산 중턱에 있는 홍심 약수터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당뇨병을 이기는 데는 무엇보다도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했는데 절제된 식생활과 규칙적인 운동요법이 가장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생활리듬 이였으므로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인왕산 중턱에 있는 홍심 약수터를 찾으면서부터 산은 나에게 내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그때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산은 내 생명이요, 보람이요, 미래로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평소에는 매주 주말마다 내가 살고 있는 서대문구 홍제동 뒷산에 있는 '안산(鞍山)' 정상에 올라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는 서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산과의 깊은 인연을 더해가고 있다.
오늘은 서대문 일요산악회에서 주관하는 등반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등반용품을 챙겨 산악회에서 지정한 홍제동 탑승 장소인 유진상가로 나가서 우리를 태우고 갈 관광버스가 오기로 되어있는 버스승강장에 도착한 시각은 아침 8시가 거의 다 되어서였는데 오늘 함께 등반을 하려는 몇 사람의 일행인 듯한 사람들이 먼저 나와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를 태우고 갈 관광버스가 도착되었고 나는 곧 그 관광버스에 승차하였다. 버스 안에는 30여명의 낯익은 승객들이 우리를 반겨 주었고 곧바로 우리들을 태운 관광버스는 내부순환도로 홍은동 진입(進入)램프로 올라가더니 오늘의 목적지인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운길산(해발 610m)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산은 왜 오르는 것일까?
건강을 위해서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조망(眺望)의 즐거움을 맛보려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땀 흘리며 우뚝 솟구친 산정(山頂)에 올라 용틀임처럼 힘차게 치솟은 산봉(山峰), 해일처럼 밀려드는 산줄기들을 보노라면 다른 어느 곳에서도 맛보기 어려운 벅찬 감흥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찾은 운길산은 그러한 산행의 맛을 아는 조망 산행객(眺望 山行客)들에게 부족함이 없는 좋은 산행이 될 것이라는 산악회 오영만 팀장님의 안내말씀을 들으면서 차창 밖을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조용히 사색에 잠기고 있었다.
어느새 우리를 태운 관광버스는 목적지인 운길산 입구에 도착되었고 우리들은 버스에서 내려 산악회 오영만 팀장님으로부터 등반에 필요한 여러 가지 주지사항들을 안내 받고 드디어 목표로 했던 운길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좁은 골짜기를 따라 오르다보니 시멘트 길로 포장된 비교적 잘 닦아진 산길을 따라 오르고 또 오르기를 계속하며 6월의 무더위를 이기면서 올라가고 있었는데 한참을 오르다보니 수종사 일주문 건립을 위한 봉헌의 자리와 함께 웅장하고 거대한 돌부처상(石佛像)이 우리를 반갑게 맞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참동안을 걷다가 보니 수종사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나 산정(山頂)으로 오르는 가파른 산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돌길, 바윗길, 층계 계단을 따라 땀이 날 정도로 숲 속 산길을 오르다보니 6월의 뜨거운 햇볕도 울창한 산림의 그늘에선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시원한 냉기를 우리들 산행객들에게 선사해 주고 있었다.
또한 우리들 서대문산악회 회원일동은 있는 힘을 다해 등산로를 따라 오르고 또 오르다보니 구름에 잠긴 층암절벽 위에 우리가 목표로 했던 운길산 정상에 도착되고 있었다.
운해(雲海)에 덥힌 깨끗하고 아름다운 산정(山頂)에서 내려다본 운길산의 풍경은 산과 숲과 삼림(森林)으로 둘러싸인 푸르른 절해고도……바로 그것이었다.
운길산 산정(山頂)에서 능선을 타고 수종사 쪽을 향해 하산하기 시작하여 얼마동안을 걷다가 보니 어느 듯 수종사 경내에 있으면서 수종사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엄청나게 큰 은행나무가 우리를 반갑게 맞고 있었는데 “수령(樹齡) 525년, 나무의 둘레 7m, 세조대왕께서 수종사를 창건하시고 기념식수한 나무(1994년 기록)”라고 적혀있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운길산 남쪽에 위치한 수종사는 금강, 설악, 오대산에서 비릇한 북한강과 치악, 속리, 태백산에서 비릇한 남한강이 합류하여 도도히 휘감아 흐르는 마치 구름과 달을 베개로 하여 머무는 도솔천을 방불케 하는 보기 드문 나한(羅漢) 대도량 이었다고 한다. 초창(初創) 연대는 미상하나 기록에 의하면 세조4년(1459년) 대왕께서 오대산에서 기도를 성취하고 배편으로 한강을 따라 환궁하던 중에 이수두(현 양수리)에서 날이 저물어 배를 멈추고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홀연히 이산(운길산)으로부터 범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옴에, 기이하게 여긴 세조대왕께서 날이 밝자 산을 답사하였는데 바윗굴에 十八 나한상(羅漢像)이 모셔져 있음을 발견하고 이 터에 가람(伽藍)을 세워 수종사라 이름하고 동시에 5층 석탑을 조성하여 十八 나한상(羅漢像)을 모시니 범연치 않은 인연이 아닐 수 없다고 하였다.
수종사를 뒤로하고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하며 하산(下山)하고 있었는데 여기저기가 버려진 쓰레기들로 아름다웠던 본래의 산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음을 보면서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갖는 사람은 어디 나 혼자만의 심정이었겠는가!
얼마 전 독일에 다녀온 제가 알고 있는 선생님의 얘기를 들었는데 그곳에서는 집을 새로 짓는 부지(敷地)에 나무가 있었을 경우 그 나무를 옮겨 심지 않거나, 그 수만큼 다른 나무를 심지 않으면 건축 허기를 내주지 않는다고 하며 산에 가서 산나물을 채취할 때도 반드시 채취료를 당국에 납부해야 한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 자연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는 그들의 마음가짐을 우리도 하루빨리 본받아야 할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부러운 눈빛으로 그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었다.
산을 찾아가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산을 자연 그대로 보호해야 하는데 우리는 늘 그런 면에서 아직도 후진적인 생활풍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에 안타까운 마음 그지없다.
“나무나 꽃은 꺾지 않고, 산에서 피고 지는 화초를 체취하지 않으며, 벼랑이나 바위에 낙서하는 일은 거의 찾을 수가 없고, 비누 치약 세제(洗劑)등은 사용하지 않으며 계곡 물에서 목욕을 하는 일은 볼 수 없었습니다.”
라고 하면서 자연을 보호하는 그들의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산을 찾아가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산을 자연 그대로 보호해야 하는데 우리의 현실은 아직도 그들이 산을 아끼고 보호하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자인(自認)하면서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서대문일요산악회에서 만이라도 선진 되고 의젓한 산악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날로 번창하는 산악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2003년 6월
서울용강초등학교에서. 소정영
저 푸른 초원 위에
2003년 1월 4일부터 6월 29일까지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에 방영했던 KBS 2TV 주말연속극으로 대단한 시청률을 기록한 인기 연속극의 이름이다.
감미롭고 따스한 사랑의 감동으로 우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해준 속이 꽉 찬 온달(태웅)과 말괄량이 공주(연호)의 아름다운 순애보의 이야기가 전개되곤 하였는데……
도도한 척 하지만 사실은 덜렁대기 일쑤인 소아과 의사(醫師)인 연호(채림 분)는 이모(姨母)인 애란(김정란 분)과 함께 옷을 사러갔다가 우연스럽게 태웅과 마주치면서 연호와 태웅과의 사랑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가난한 살림을 꾸리면서 자동차보험회사에 근무하는 태웅(최수종 분)은 자동차를 파는 외판원으로 근면 성실하게 자기의 임무를 완수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는데 연호와 승민이 약혼식 날짜를 잡았다는 말을 들은 태웅은 공허한 마음을 채우지 못해 방황하고 있었고, 연호 역시 태웅의 얼굴이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점점 뚜렷하게 각인되어 오고 있음을 연호자신도 어쩌지 못하고 번민하다가……
마침내 연호는 승민과의 약혼을 거절하고 태웅에게 결혼을 했으면 좋겠다고 청혼을 했지만, 두 집안 사이에 얽히고 설킨 구원(舊怨)은 두 사람의 결혼을 쉽게 승낙(承諾)할 수 없었는데…
연호와 태웅은 두 사람의 결혼을 승낙해 달라고 부모님께 간절히 소망했지만 연호의 어머니인 정란은 결코 두 사람의 결혼을 승낙할 수 없다며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고……
그러나 절실하고 간절한 두 사람의 결혼을 끝내 막을 수 없었던 양가(兩家)에서는 마침내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하게 되었고, 드디어 결혼에 성공한 태웅과 연호는 진실하고 성실하게 자기의 할 일을 열심히 수행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는데 태웅의 사람됨을 높이 평가한 신회장의 도움으로 엠제우 차량에 대한 브리핑을 훌륭히 마치고 결국 계약을 따내게 되었는데 코모스 계약 성사로 태웅은 근무하는 보험회사의 대리로 승진되었는데, 태웅의 승진을 뛸 듯이 기뻐한 연호와 함께 공원에 간 태웅은 갑자기 가슴에 통증을 느끼게 되고……
허지만 대진화재 브리핑 준비에 여념이 없던 태웅은 드디어 동료들의 열띤 환송을 받으며 대진화재 브리핑 장으로 가다가 치매노인을 만나게 되었다.
치매노인을 본 태웅은 그냥 갈 수도, 보살펴 줄 수도 없는 갈등을 일으키다가 마침내 그 치매노인을 안내하느라 브리핑 장에 늦게 도착하게 되었는데 그와 같은 사유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심한 질책과 함께 문책을 받게 되었을 때 그 치매노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대진화재 신회장님의 모친이셨다는 사실이 밝혀짐과 아울러 태웅은 일약 회사 전체의 히로인으로 선망 받게 되었다.
그러나 태웅은 매우 희귀한 질병인 척추암으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뒤늦게 발견하게 되었고 그로 인한 가족들의 처절한 낙망과 걱정을 이겨내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늠름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또한 척추암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전혀 병든 사실 자체를 말하지 않으면서 신입사원들에게 자동차 판매왕이란 타이틀 소지자로서의 자기의 소신을 밝히는 자리에 서게 되었는데 그는 그 자리에서
“제가 판매왕이란 타이틀로 이 자리에 섰지만 저에겐 판매왕보다 더 자랑하고 싶은 게 많습니다.
하루 종일 문전박대를 당해 지치고 힘들었던 더운 여름날 시원한 물 한잔을 건네주시던 노점상 할머니, 땀흘려 일하는 소중한 가치를 깨닫게 해 주신 시장의 상인들… 장애를 가진 아들을 위해 몇 년간 모은 손때 묻은 통장을 내 놓으신 아주머니… 가을 들판에서만이 아닌 우리의 삶 어느 곳에서도 풍성한 열매를 거둬들일 수 있다는 걸, 그리고 카 메니저는 차를 파는 직업이 아닌 마음을 파는 직업이 라는걸 가르쳐 주신 분들이 저에겐 가장 큰 재산이며 자랑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을지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 주인공 차태웅씨가 신입사원들 앞에서 말한 한마디 한마디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기에 충분한 내용이 아니었는가 생각하면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주인공인 차태웅씨처럼 진실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선진 사회가 이루어 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2003년 7월
서울용강초등학교에서 소정영
건강!
본인 스스로 노력하는 지혜를!
우리가 서로 인사를 하거나 덕담을 나눌 때 가장 많이 쓰는 단어는 아마도 ‘건강’이 아닐까 생각된다. 건강은 그만큼 우리들에게 개인이든 가정이든 행복을 가져다주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이고 중요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사말이나 덕담으로 주고받은 이 ‘건강’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좋으나 정작 실천으로 얼마만큼 옮기고 있는가에 대해선 자신 있게 대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만큼 ‘건강’을 지키고 관리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뿐더러 평소 건강에 대한 특별한 어려움을 느껴보지 않고 살고 있는 보통사람들이나 특히 요즘처럼 바쁜 일과로 이어지는 조직생활에 매어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또한 유익한 의료정보를 얻는다거나 건강서적을 많이 보고 알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이 건강하다고 말 할 수도 없을뿐더러 건강이 쉽사리 회복되거나 지켜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건강’에 대해 끊임없는 지적욕구와 주변에서의 사사로운 의료정보에 민감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에게는 누구나 가장먼저 장수(長壽)하고 싶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장수(長壽)만이 행복한 것은 아니다. 건강하게 장수해야지 아프면서 오래만 사는 것은 행복은 고사하고 가혹한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들이 건강에 민감하게 되는 이유는 ‘살기 위해서’ 또는 ‘살아남기 위해서’ 일 것이다.
과연 의료서적이나 메스컴에서 제공하는 의료정보대로 살다보면 반드시 건강해지는가를 생각해 보아야할 것 같다. 어떤 병에는 무엇이 좋으니 무엇을 먹고, 또 어떤 병에는 무엇이 부족하니 무엇을 어떻게 하고……
결론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원인을 제공하거나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어떤 병을 치료하거나 예방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수 없다고 본다. 즉 우리가 알게 모르게 그 병이 올 수밖에 없는 정신적, 육체적, 사회적 조건을 파악해야 한다. 그러한 악조건을 방치한 채 무엇이 좋다고 하면서 여기저기 쫒아 다니며 건강을 사러 다닌다거나,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옮겨 다니는 것은 일시적인 효과는 있을지라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건강은 찾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적절한 대안과 해답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먼저 일차적인 해답과 대안은 본인의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의 노력은 소홀히 하고 핑계와 변명만으로는 절대로 건강은 지켜지지 않고 회복되지 않는다.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나는 어떤 경우에라도 반드시 건강할 수 있고 꼭 이겨낼 수 있다.” 라는 굳은 신념과 실천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불규칙한 식생활 습관과 라이프스타일을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시간과 경제적인 부분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도 일면 일리가 있다. 그러나 건강이 시간과 돈으로 모두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잘못된 생각이다. 적절한 자기 절제와 시간조정을 통한 건강관리가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우리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줄곧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낱말을 즐겨 사용해 왔다.
신(身) 즉 풍채(風采)가 좋으면 우선 남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얘기인데 풍채가 좋다고 해서 반드시 건강한 사람이 아니듯이 풍채가 작고 체격이 왜소(矮小)하다고 해서 꼭 그 사람의 건강이 나쁜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서 체격이 왜소하고 지병인 당뇨병까지 갖고 있는, 건강에는 늘 다른 사람보다 열등하다는 생각으로 평생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내 건강은 내가 지킨다.” 라는 굳은 신념으로 열심히 살다보니 젊은 시절 나보다 비교도 안 되게 풍채도 좋고 건강한 것 같았던 사람들이 벌써 몇 해 전부터 저승길로 가버린 친구들이 있는가하면 나보다 훨씬 경미한 당뇨병을 앓던 사람들이 지금은 심한 합병증으로 고통 받고 있음을 보면서 건강은 역시 본인 스스로 어떻게 관리하면서 살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진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서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혜화초등학교에 근무할 때부터 시작된 아침 약수터 산책은 거주지를 옮김에 따라 명륜동에 살 때는 북악산에 있는 삼청각 주변을, 문화촌에서 살 때는 인왕산을, 그리고 지금은 안산(鞍山)과 홍제천 산책로로 바뀌어 지긴 했지만 그때부터 시작된 아침산책은 현재까지도 꾸준히 계속하고 있는데 당뇨관리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식이요법 또한 꾸준하게 실천한 결과 당뇨병이 발생한지 올해로 어언 20년이 지나고 인슐린 주사를 맞은 지도 벌써 17년이나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아무런 합병증 없이 건강을 유지하며 살고 있음을 뿌듯한 자긍심으로 느끼고 있으며 내 자신 건강을 지키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해왔음을 긍지를 갖고 열심히 살고 있다.
지금부터 7년 전 서울북한산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었는데 그때는 서울대학병원에서 인슐린주사를 처방 받아 맞고 있을 때였었다. 한 달에 한번씩 서울대학병원에 나가서 혈당관리 및 건강상황을 점검 받고 인슐린주사를 처방 받아 당뇨병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서울대학교 내분비과 교수인 김성현 박사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소선생님, 당뇨관리 정말 열심히 잘하고 계십니다. 인슐린 주사를 10년을 맞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거의 합병증으로 폐인이 되곤 하는데, 선생님은 아직까지 아무런 합병증도 없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니 당뇨관리를 아주 잘하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당뇨 관리를 열심히 하시면 아무런 문제없이 천수(天壽)를 다 하실 것입 니다.”
라고 격려해 주셨는데 그로부터 어느덧 7년이라는 세월이 또 흐르고 있음을 보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절감하곤 한다.
2003년 7월
서울용강초등학교에서 소정영
남해의 해금강, 홍도!
시간에 쫒기듯 정신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아무리 삶이 힘들고 바쁠지라도 일년에 한번쯤은 휴가를 내어 일상의 업무에서 벗어나 가족들과 함께 뜻있는 휴가문화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매스컴에서는 휴가를 떠나는 행락객들로 고속도로가 꽉 막히는 장면들이 이번 주 들어 줄곧 TV화면을 수놓고 있다. 그야말로 요즈음은 휴가차량들로 모든 도로가 넘쳐나는 풍속도를 지켜보면서 어렴풋이 그 옛날을 회상하고 있었다.
“정말 세상이 많이 달라졌구나!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어디 지금과 같은 세상이 되리라고 감이 생각이나 했었던가? 집집마다 자동차가 있고, 그 자동차들로 인해서 고속도로가 꽉 막히고…… 그만큼 우리들의 생활이 여유스롭고 부유해진 것은 확실하긴 하지만 그러나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생활수준이 부유해 졌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 회가 살기 좋은 사회라고 말 할 수는 없음을 발견하곤 하면서 우리가 선진국이 되려면 경제적인 부(富) 보다도 문화적으로 전체국민들의 의식수준이 향상되었을 때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있을 텐데!”
우리나라 우리사회의 오늘의 현실은 아직도 멀고도 먼 길이 아닌가! 라고 자문자답(自問自答)해 보면서 하루 빨리 건전한 의식수준의 정착으로 알뜰하고 알찬 문화국민의 면모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2003년 8월 2일
나 또한 오랜만에 남해의 해금강이라고 하는 흑산도와 홍도를 가기 위해 여행용 소지품들을 챙기면서 늘 말로만 들어왔던 흑산도와 홍도의 모습을 어렴풋이 그리면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보지 못했던 흑산도와 남해의 해금강이라고 하는 홍도관광을 위해 우리 부부와 내 여동생들 내외분과 함께 4남매의 처남 매부지간이 모처럼 오붓한 시간을 갖기 위해 남도여행길에 오르고 있었는데 4남매가 부부동반을 하여 광주에 있는 막내 여동생 집에서 1박을 하고 목포항에서 아침 7시 10분에 출항한다는 흑산도 행 쾌속선을 승선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이것저것 짐을 꾸려 승용차 두 대에 나누어 타고 목포를 향해 출발하고 있었다.
우리들 부부동반 4남매는 목포를 향해 달리는 차안에서 시원한 아침바람을 쏘이며 남녘의 들판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주평야를 거쳐 영암 강진 해남을 경유하여 어느덧 달리는 승용차는 목포시내를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목포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되었고 타고 왔던 승용차를 주차장에 맡겨놓고 예약했던 흑산도 행 승선표를 구입하여 우리를 태우고 갈 여객선에 승선하였다.
드디어 우리를 태우고 갈 남해고속 쾌속선은 400여명에 달하는 홍도와 흑산도 행 관광객을 태우고 뿌~, 뿌~하고 기적을 울리더니 목적지인 홍도와 흑산도를 향하여 출발하기 시작했다.
출렁이는 남해바다는 수많은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다도해를 지나면서 잔잔한 호수처럼 다소곳이 우리를 맞아준 듯 했었는데, 얼마쯤 시간이 지난 뒤엔 성난 사자처럼 우리가 타고 있는 쾌속 여객선을 사정없이 흔들면서 자연의 오묘함을 증명해 주는 듯 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그렇게 평화롭고 잔잔하기만 했던 남해 바다가 왜 이렇게 갑자기 성난 사자처럼 무섭게 돌변해 버렸을까? 희희낙락하면서 떠들썩했던 배 안의 정경은 어느덧 엎드려있는 사람, 멀미하는 사람들로 쥐 죽은 듯 조용해 졌다. 역시 자연은 신비롭고 경이로운 존재가 아니던가?
목포에서 출항한지 어언 두 시간 반이 되어갈 무렵 우리를 태운 여객선은 낯 설은 섬 부두에 도착되고 있었는데, 바로 그곳이 우리가 1박을 하면서 관광을 예정했던 흑산도 항에 도착되고 있었다.
부두에 내린 우리들 일행은 우선 우리가 묵고 갈 민박집을 구하고 점심을 먹은 뒤에 흑산도 일주도로를 따라 관광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하늘과 바다가 맛 닿아 있는 외딴섬, 지금부터 200여년전 당파싸움과 천주교 탄압의 희생양이 되어 이곳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해야 했고 또 이곳에서 일생을 마친 목민심서의 저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형이었던 정약전의 고혼(孤魂)이 깃든 우리나라 서남단에 위치하면서 어업전진기지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는 흑산도! 맨 먼저 도착했던 곳은 가수 이미자씨가 부른 “흑산도 아가씨”의 노래비가 세워져있고 흑산도의 전경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였었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흑산도의 모습은
“자연의 신비가 빚어놓은 천연항구” 바로 그것이었다.
“아니 이럴 수가”
“이곳은 하늘이 빚어놓은 천연항구네요!”(우리 일행들)
“그렇습니다. 이곳 흑산도는 동양에서 두 번째로 가장 좋은 천연항구 라고 합니다.”(안내 도우미)
“그리고 여기서 바라보는 경치, 정말 아름답지요!”(안내 도우미)
푸르른 바닷물이 출렁이는 망망대해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섬! 섬! 섬!…… 아름다운 다도해의 모습들이 우리들을 경탄케 함은 물론이고 그곳에서 바라본 흑산도항의 모습은 사람의 힘으로는 일부러 만들려고 해도 그보다 더 좋은 항구로 만들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잘 다듬어진 천연항구! 바로 그것이었다. 또한 그곳에서 바라보는 바닷물의 색깔은 푸르고 또 푸르다 못해 검은빛의 색깔을 띄우고 있었는데 우리를 안내했던 안내원의 설명에 의하면
“이곳 흑산도는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입니다. 그런데 왜 이곳의 지명이 흑산도라고 하는지 아시나요?”(안내 도우미)
“저기 바닷물 색깔을 보세요. 푸르다 못해 검은빛이 완연하지요? 그렇습니다. 이곳 흑산도 주변 해역은 바닷물이 너무나 맑고 깨끗해서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면 검은 빛으로 보이지요. 그래서 흑산도라고 한답니다.”(안내 도우미)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바라본 흑산도 주변 해역은 정말 맑고 깨끗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어디를 가든 이렇게 깨끗한 자연환경을 자랑할 수 있었는데 이젠 이렇게 깨끗한 흑산도까지도 사람의 발길이 잦아졌으니 어딘지 불안하고 못 믿어 워 함은 나만의 기우가 아닐런지.
우리들 가족일행은 아직 완공되지는 못했지만 흑산도 일주도로를 따라 안내 도우미의 설명을 들으면서 흑산도의 아름다운 풍경과 역사유적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다.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조선중기 순조 때 정약전이 귀양살이를 했던 동네와 집, 조선조 말 대원군의 수구정책에 반대하여 흑산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면암 최익현 선생의 제자들이 건립했다는 추모비(追慕碑), 그리고 아름다운 흑산도의 이모저모 등을……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인 시각은 아직 먼동이 트지 않는 이른 새벽시간이었다. 민박집에서 조용히 나와 부둣가 선창가로 아침 산책을 나갔는데 멀리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닷바람은, 아! 정말 여기가 우리가 찾아온 흑산도였었지! 하면서 감탄을 자아낼 만큼 시원하고 상쾌하고 가슴 뿌듯한 정경을 만끽(滿喫)할 수 있었다. 새벽하늘에는 촘촘히 박힌 반짝이는 별들이 소리를 치면서 막 쏟아져 내릴 것 만 같았고, 멀리 보이는 서쪽 바다는 그 옛날 해상 왕 장보고의 늠름한 기상이 엿보이는 것 같아 먼 하늘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곤 하였다.
그리고 얼마쯤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민박집으로 돌아와 아침밥을 준비하여 아침식사를 마치고 오늘의 관광 예정지인 홍도를 가기 위해 선착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홍도!
흑산도에서 홍도까지는 우리가 타고 갔던 쾌속 여객선으로 약 40여분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우리를 태우고 간 여객선은 400여명의 관광객을 태우고 홍도에 도착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한번쯤은 가 볼만한 곳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그 섬! 그 홍도에 도착되고 있었는데 막상 부두에서 내려 해안가에 설치된 해상국립공원 입장권징수문을 통과해서 홍도 주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까지 들어가 보았더니 홍도는 흑산도와는 달리 육상으로는 뭐 별로 볼거리가 거의 없는 아주 작은 섬이었다.
홍도의 진면모는 땅위에서의 볼거리보다 유람선을 타고 홍도를 이루고 있는 작은 섬들을 한바퀴 돌면서 구경하는 것이 홍도관광의 백미(白眉)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유람선 승선권을 구입하여 홍도 일주 관광 유람선을 타고 한바퀴를 돌면서 안내원의 설명을 들었는데
“이곳 홍도를 찾아주신 관광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관광안내원)
“이곳 홍도는 행정구역으로 전남 신안군 흑산면 홍도리입니다. 그런데 왜, 이 섬 이름을 홍도라고 했을까요?”(관광안내원)
“이 섬을 이루고 있는 저 바위들을 보십시오. 바위의 색깔이 모두 연한 붉은 빛을 띄고 있죠? 그렇습니다. 이곳 바위의 색깔이 붉고 아름답다고 해서 홍도라고 했답니다.”(관광안내원)
“관광객 여러분! 제 말이 재미있거나 훌륭한 경치를 설명드릴 땐 힘껏 박수를 쳐주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박수를 많이 친 사람은 틀림없이 건강해 지십니다.”(관광안내원)
“오른쪽 10시 방향에 있는 저 바위의 모습을 잘 보아 주세요. 무엇과 같이 생겼을까요?”(관광안내원)
“마치 거북이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 바위를 거북이 바위라고 하고 이곳 홍도에서 살고 계신 주민들은 저 거북이 바위를 홍도의 수호신으로 받들고 있답니다.”(관광안내원)
“그리고 또 저기 11시 방향에 보이는 저 바위는 마치 낙타같이 보이지요? 그래서 낙타바위라고 이름 합니다.”(관광안내원)
“또 저기 9시 방향에 보이는 저 바위는 서울 서대문 형무소 앞에 있는 독립문처럼 보이는지 자세히 관찰해 보세요. 저 바위가 독립문바위입니다.”(관광안내원)
이렇게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면서 홍도를 한바퀴 돌면서 관광을 하는 데는 약 두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과연 남해의 해금강이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섬이었다. 그렇지만 그곳 홍도는 유람선을 타고 해상 관광을 마치고 나면 특별히 볼거리가 없었으므로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오후에 나가는 배로 목포로 나가서 어디 가 볼만한 곳을 구경하는 것이 어떨까?”
“이왕에 목포까지 왔으니까 고산 윤선도 선생의 유적지가 있는 보길도를 구경하면 어때?”
“그게 좋겠구먼. 그렇게 하기로 해.”
이렇게 의논을 끝마친 우리들 4남매는 오후 4시 반에 나오는 배로 목포로 나왔는데 목포에 나와 보니 어느덧 해는 서산에 기울면서 어두움이 짙어지고 있었다.
“어서 빨리 저녁을 먹고 오늘 저녁은 해남 땅끝 마을에서 잠을 자야 할 텐데”
“그곳에도 잠을 잘 곳이 있을까?”
“카페리가 그곳에서 출발하니까 틀림없이 여관이나 민박 집들이 많이 있을 거예요.”
우리는 이렇게 의논을 한 끝에 저녁을 먹고 나서 보길도 행 카페리가 출발한다는 해남의 땅 끝 마을로 가기로 하고 저녁식사는 아침에 흑산도에서 지어왔던 밥으로 저녁밥을 대신했는데 오랜만에 야외에서 밥을 먹어서인지 모두들 김치 맛이 꿀맛 같다고 하면서 맛있게 밥을 먹었다.
그리고 해남 땅 끝 마을을 찾아 부지런히 차를 달렸다. 난생 처음가보는 생소한 길이었지만 우리들 4남매를 나누어 태운 2대의 승용차는 ‘앞서거니 뒷 서거니’를 계속하면서 해남의 땅 끝 마을을 찾아 달리고 또 달렸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시계는 어느덧 밤 10시를 지나서 한 밤중으로 접어들고 있을 무렵 드디어 우리는 해남의 땅 끝 마을에 도착하였다.
“여관이나 민박집을 찾아야 하는데 어디 적당한 곳이 있는가를 살펴 보자구.”
“내일 아침 몇 시에 배가 출발하는지도 알아야 하는데.”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얼마 후 내일아침 여섯시에 보길도 행 카페리가 출발한다는 내용과 함께 우리가 묵고 갈 민박집을 구할 수 있었고 그 집에서 우리들은 오순도순 그 날의 여행담을 속삭이며 꿈나라로 날아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인 시각은 새벽 다섯 시 경이었다. 보길도 행 카페리에 승선하기 위해선 일찍부터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는데 막상 아침 여섯시에 출발한다는 카페리는 오전 10시가 되어도 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다 위에 끼어있는 짙은 안개 때문이란다.
“보길도 관광은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게 어떨까?”
“들어가기도 이렇게 어려운데 그곳에서 나오려면….”
“정말 그래. 보길도는 그만두고 그 대신 강진에 있는 고려청자 도요지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적지를 둘러보도록 하지.”
우리는 이렇게 의논을 마치고 땅 끝 마을에 위치하고 있는 ‘자연사박물관’을 관람한 후 강진에 있는 고려시대의 대표적 문화유적지인 고려청자 도요지와 조선시대 정조대왕의 각별한 신임을 받으면서 개혁정치를 펴려다가 갑작스런 정조대왕의 붕어(崩御) 하심에 당파싸움의 희생양이 되어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18년간의 긴 귀양살이를 하면서 한자가 생긴 이래 세계적으로 가장 방대한 저서를 집대성하신 다산 정약용 선생님께서 기거(寄居)하셨던 ‘다산초당’을 둘려보려고 강진을 향해서 차를 달렸다.
‘다산 정약용 선생을 알지 못하면 근세 한국의 학문과 사상을 말할 수 없다.’
‘술에 취하면 하루가 가고 목민심서에 취하면 천년대계가 이루어진다.’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다산 정약용 선생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서 그의 학문적 터전이라고 할 수 있고 실학(實學)의 산실(産室)이었던 다산 초당을 방문하기 위해 강진군 도암면에 있는 귤동 마을을 찾았다.
가서 보니 강진군에서 직영으로 운영하는 다산 유물관이 운영되고 있었고 다산 유물관에서 또 한참을 올라가니 다산 초당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차를 즐겨 마시는 국민은 흥한다.”
“동트기 전에 일어나라.”
“기록하기를 좋아하라.”
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침을 주셨던 다산 정약용 선생님!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살기 좋은 대한민국, 선진 대한민국이 하루빨리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분발, 또 분발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2003년 8월
서울용강초등학교에서 소정영
2003년(癸未년)
양(羊)띠 해를 보내면서
2003년 계미년도 어느덧 역사속으로 그 자취를 감추려는 듯 메스콤에선 송년음악이 곧잘 경쾌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올해는 2003년 계미(癸未)년, 양띠 해였었는데!
사주풀이에 있어 십이간지 가운데 상극(相剋)인 동물이 없을 정도로 온순함을 대표하는 양! 양을 뜻하는 한자 羊은 아름답고「美」, 착하고「善」, 옳은 것「義」이라는 뜻에 모두 들어간다. 양은 성서(聖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물이라고 하며 우리나라에서 아침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신다고 한 것처럼 유럽에서는 아침에 양을 보면 행운이 온다고 해서 좋아한다고 한다.
인류가 양과 함께 살기 시작한 것은 약 1만 년 전 이라고 하는데 양은 반드시 한 번 지나간 길로만 다닌다는 사실을 안 인간은 양떼가 돌아오는 길목에 몰래 숨어 있다가 덮쳐서 사냥을 하곤 하였다. 그러나 양을 식량으로 쓰게 되면서부터 직접 양을 기르기 시작했고 최초의 유목민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양은 많은 이용가치를 지닌 가축이다. 고기와 가죽을 유용하게 쓰는가 하면 인류가 최초로 마신 동물의 젖 역시 양젖이었다고 한다. 양가죽은 추운 지방에서 의복이나 덮개로 이용되었는데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글을 쓰는 종이 대신 양피지(羊皮紙)를 사용했고 중세 기독교 성경도 양피지(羊皮紙) 위에 쓰여졌다.
양의 성품은 개 한 마리가 양(羊) 수백 마리를 통제 할 수 있을 정도로 온순하다. 무리 지어 살면서도 평생 우위 다툼이 없고 싸워서 심한 상처를 입히는 일도 없다. 오로지 목동과 양치기 개에게 자신들의 생명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무리의 지도자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 간혹 자신의 새끼가 혼자 동떨어져 날뛰어도 어미나 아비양은 버린 자식으로 간주해 쳐다보지도 않고 단체 행동에 따른다.
양은 그 종류에 따라 암수모두 뿔이 없거나 또는 수컷에게만 뿔이 있는 등 다양하다. 염소와 비슷해 얼핏 구별하기 어려우나, 양의 뿔은 자른 면이 삼각형이고 대개 뒤쪽 아래를 향해 소용돌이 모양으로 굽는다. 발굽사이에는 분비선이 있는데 여기서 독특한 향이 나는 분비물이 나와 땅에 배어 이동할 때 신호로 삼는다고 한다. 풀이나 나뭇잎, 나무껍질을 먹고살며 수명은 약 15년 정도라고 하며 가을에 교미를 해 150일 만에 한두 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한편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병을 앓지 않는다는 산양(山羊)은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제 217호로 지정돼 있다. 험준한 고산지대의 기암절벽을 탄탄한 다리와 넓으면서도 스펀지 같은 탄력 있는 발바닥으로 타고 다니기 때문에 병치레 없이 오래 살 수 있다고 한다. 일반 초식동물과는 달리 소심하고 외고집인 데다 귀소성이 강해 한번 정해놓은 자기 고향은 죽을 때까지 버리지 않고 사람이나 맹수들을 피해 은신했다가도 되돌아온다고 하는 양(羊)! 그 양띠 해가 역사 속으로 저물어가고 있음을 인지하면서 금년 1년 동안에 나는 과연 학교경영을 하면서 가장 보람되고 기억에 남을만한 내용은 과연 무엇이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3월 2일에 개학과 더불어 시업식을 하고 나서, 3월 5일에는 1학년 입학식을 거행했고 그리고 기본생활이 바로 된 용강어린이를 기르기 위해 온 힘을 기울려 어린이들과 함께 생활해 오다보니 어느새 여름방학을 맞고 또한 2학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데 금년 여름은 내 일생을 통해서도 처음 겪는 지루한 장마가 7월부터 9월말까지 계속되어 무더위가 없는 이상 기온으로 냉해를 입은 곡식과 과일들이 여물지 못하여 큰 흉년이 들었다는 어두운 소식과 함께 몇 십 년 만에 처음 찾아온 불청객 태풍 「매미」의 큰 위력 앞에 엄청난 피해를 당하여 온 나라가 고통을 함께 하는 재난을 당하기도 했다.
태풍 『매미』의 피해는 국가적으로 엄청난 시련과 피해를 주기도 했지만 우리 서울용강초등학교에서는 그와 같은 국가적인 시련과 불행을 감수하면서도 학년 초에 계획했던 여러 가지 시책들이 차분하게 실천되면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뿌듯한 긍지로 삼고 있는데 그 첫 번째 자랑은 4월부터 시작된 아침등교시 국기에 대한 경례하기를 실천하고 있는 일이라 하겠다.
우리 서울용강초등학교 어린이들 모두가 아침에 학교에 등교하면서 국기게양대에서 펄럭이고 있는 태극기를 바라보며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을을 바쳐 충성을 다 할 것을 굳게 다짐 합니다.”
라고, 경건한 자세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하면 된다’ 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해준 우리 용강의 어린이들과 선생님들께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 2학기로 접어들어 종합 학예발표회를 10월 9일날 성공적으로 마치었고 연이어 10월 13일에는 서울특별시교육청 지정 특기.적성교육 2차년도 발표회를 많은 내빈님들을 모시고 성황리에 마치었으며 학교 교사(校舍)의 본관과 후관 사이에 있는 용강동산을 정말 아담하고 쾌적한 공간으로 꾸미는 일을 마무리 지었다.
용강동산! 지금 내가 근무하고 있는 서울용강초등학교에는 대한민국 어느 초등학교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넓은 공간을 본관과 후관 사이에 갖고 있는데 이곳의 이름을 용강동산이라고 명명하여 부르고 있다.
“이 공간을 어떻게 아름답고 쾌적한 공간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잘만 꾸며 놓으면 정말 좋은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을 텐데……”
늘 이렇게 아쉬움을 갖고 있었는데 다행히 작년 12월에 마포구청에서 보내온 공문을 보니 학교 공원화사업 희망학교를 신청받고 있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우리학교도 신청을 해야지.”
그렇게 해서 학교공원화 사업 추진 대상학교를 신청하게 되었고 드디어 많은 학교들이 앞 다투어 신청들을 하였지만 우리학교가 선정되도록 노력한 결과 1억5천만원이라는 거금을 마포구청의 지원을 받아 오늘의 용강동산을 만들게 되었다. 물론 용강동산을 만들려고 설계하는 과정에서부터 공사감독을 하는 하나하나의 과정이 실제로 공사를 맡아서 시공을 하는 회사의 의견과 상충될 때가 많아서 상당한 의견충돌을 갖기도 했지만 어쨌든 초등학교의 재정으로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새로운 환경을 우리 어린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어 너무나 기쁘고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용강동산의 완성을 축하하는 자축(自祝)의 자리를 마련하여 우리학교에서 근무하고 계시는 모든 교직원들과 학부모 대표님들이 오랫만에 흐뭇하고 열린 마음으로 용강동산에서 꿈을 키우고 있는 우리 어린이들의 아늑한 보금자리가 되어 주리라 굳게 믿으면서 용강의 교가를 힘차게 합창하며 환한 웃음으로 하루를 보냈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 같아 흐뭇함을 느낀다.
“바람막이 노고산 품에 안고서
파랗게 모락모락 자라는 새옹
따스한 볕 봄비에 잎이 핍니다
갖은 향 내 놓으며 꽃이 핍니다
용강은 우리 모교 삼천 동무야
같은 맘 손을 잡고 공부합시다
언제나 이나라에 빛이 되도록”
2003년 12월
서울용강초등학교에서 소정영
향기(香氣)남긴 선생님들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 이라는 조물주의 섭리를 모르는바 아니지만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2003學年度도 어느덧 역사의 수레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가고 한해를 거의 마무리해야 하는 겨울방학을 맞이하여 지금까지 교직생활39년이라는 긴 세월의 터널을 스쳐오는 동안 나와 함께 인연(因緣)을 맺고 지금까지도 흠모(欽慕)의 념(念)을 간직하고 있는 존경했던 교장선생님, 교감선생님, 그리고 수많은 선생님들과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회상해 보면서 조용히 그 옛날로의 과거여행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세월은 화살보다 더 빠르다(光陰速乎矢)』라고 노래했던 옛 선인들의 심경을 헤아려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수많은 학교를 전전(轉傳)하면서 그곳에서 만나고 헤어졌던 잊지 못 할 추억 속의 선생님들의 모습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내가 교사의 길로 처음으로 입문했던 초임교사시절에
『올바른 사도(師道)의 길이 무엇이고 아동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할까?』에 대한 올바른 좌우명(座右銘)을 몸으로 실천하시면서 내게 선생님으로서의 기본자세를 자세히 안내해 주셨던 그때 그 선생님들이 보고 싶어지고 그리워지곤 한다.
늘 빨리 출근하여 어린이 봉사 활동을 직접 지도해 주시고 아침자습 활동과 요일별로 어린이 동요 부르기 지도, 아침독서지도, 그리기지도(繪畫指導) 등 어린이들의 생활 속으로 파고 들어가 아동들과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함께 하면서 가르침의 본(本)을 보여주셨던 K선생님, 치밀한 계획과 성실한 실천으로 참다운 스승 상(像)을 보여주셨던 Y교무부장 선생님, 모든 일을 처리함에 있어 공(公)과 사(私)를 구별하여 사리에 맞게 확실하게 처리하시는 U 선생님, 교수학습 지도의 이론을 몸으로 실천하시고 시범수업, 연구수업 등을 늘 앞장서서 보여주고 실천하신 C선생님, 나와함께 동학년을 맡고 있으면서 학교생활 전반을 그때그때 소상하게 안내하여 주셨던 B선생님‥‥, 그리고 2교시가 시작되자마자 1년 동안이라는 짧지 않는 기간동안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우리 반 교실에 들어오셔서 수업참관을 하셨던 그때당시의 M교장선생님, 수많은 선배 선생님들의 모습들이 내 머릿속을 수놓으며 아름다운 추억여행을 만들어주기에 나는 지금도 가끔씩은 그 옛날로의 시간여행을 즐기고 있다.
이제 며칠만 더 지나면 긴 겨울방학기간도 모두 우리 곁을 지나가고 개학과 더불어 2003학년도가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는데 내가 우리학교에 부임한 후에도 벌써 4번째의 교사 전보이동이 이루어지고 있음에, 아! 정말 옛 선인들이 읊은 것처럼 『세월은 화살보다 빠르다(光陰速乎矢)』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본교에 부임한 이래 우리학교에서 현재의 우리들과 함께 인연을 맺으면서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 간 훌륭하신 선생님들....., 강계남 민영규 이광용 박용서 서정희 안수진 임경희 김용주 방선희 이명숙 배상훈선생님, 늘 행운이 함께 하시고 소원성취 되시기를 기원해 드립니다. 또한 지금 이 시간까지도 우리들과 학교생활을 함께 하면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시면서 우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시고 다가오는 2004학년도에는 우리 곁을 떠나시게 된 여덟 분 선생님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남아있는 우리들에게 2004학년도 학교교육과정을 빈틈없이 설계하시고 용강에 있는 우리교사들이 가르치는데 조금도 지장이 없도록 애써주신 홍복기 연구부장선생님, 우리학교의 원활한 방송교육을 위해서 늘 고군분투(孤軍奮鬪)해 주셨던 김옥경 선생님, 우리학교의 특기적성 교육을 서울의 대표적인 학교로 명성을 올리는데 누구보다도 앞장서시면서도 아동교육에는 조금도 빈틈없이 본(本)을 보여주셨던 임지혜, 백영선 선생님 이제 교사의 길로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는 짧은 경력인데도 항상 학교에 빨리 출근하시어 어린이들과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함께 하시면서 몸소 교사로서의 본(本)을 실천으로 보여주신 김선애 선생님, 우리학교 병설유치원에 계시면서 유치원 원아교육을 위해서 노심초사(勞心焦思)하시면서 열심히 근무하신 보람에 용강병설유치원이 지역사회 학부모들로보터 가장 신뢰받은 유치원으로 인정받아 우리학교 병설유치원을 앞다투어 입학시키고 싶은 유치원으로 만들어주신 이은경 부장선생님과 고숙자 김효윤 선생님, 그리고 우리 서울용강초등학교의 선생님들과 항상 호흡을 같이 하시면서 선생님들의 바쁜 일손을 거들어 주시는데 최선을 다해주신 김희중 선생님!
정말 우리학교에 오래오래 더 모시고 싶은 훌륭하신 선생님들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아쉽고 간절한 심경을 무어라 표현할꼬…….
옛 선인들도 서로가 떨어지기를 섭섭히 여기고 이별(離別)을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을 석별지정(惜別之情)이라고 하여 별리(別離)의 아쉬움을 노래했다고 하며 불교에서는 옷깃만 스치고 지나도 인연(因緣)이라고 했다한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因緣)이라고 한다는데 우리는 하루24시간 중에서 가장중요한 낮 시간의 대부분을 함께 하는 정말 깊은 인연으로 맺어진 동료들이고 선배이고 후배들로서 이제 우리 곁을 떠나시는 여덟 분 선생님들께서는 몸은 비록 우리 곁을 떠나 헤어짐의 인연으로 바뀐다고는 하겠지만, 그러나 여덟 분 선생님들께서 우리 서울용강초등학교에 뿌려놓은 그윽한 향기(香氣)는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뚜렷한 영상이 되어 우리들 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남아있는 우리들도 떠나시는 선생님들처럼 우리 모두 함께 근무하고 있을 때, 깊고 훌륭한 인연(因緣)으로 맺어지는 지혜를 발휘하여 동료선생님들로부터는 훌륭한 선생님으로, 우리가 가르치는 어린이들로부터는 존경하는 스승님으로 오래오래 각인(刻印)되는 향기(香氣)나는 선생님이 되어주시길 간곡하게 소망 드린다.
선생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들의 앞길에 늘 행운이 함께 하시길 진심으로 기원 드립니다.
2004. 2월
서울용강초등학교에서 소정영
기본생활이 바로 된
우리나라 우리사회!
깨끗했던 운동장이 왜 이렇게 지저분하게 되었을까?
교문을 들어서자마자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 스티로폼으로 만든 1회용 떡복이 용기들이 보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뿌리게 하고 있었다.
어제오후 퇴근 때까지는 학교운동장이 정말 깨끗하게 유지 관리되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우리사회는 아직도 전 근대적인 생활습성을 고치지 못하고 되풀이 하고 있을까? 우리들이 살고 있는 생활주변은 늘 이렇게 버려진 쓰레기들로 넘쳐져있어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난다.
『기본생활이 바로 된 용강어린이』…… 이것은 우리 서울용강초등학교에서 내가 우리학교에 부임한 이래 4년여동안 중점적으로 지도하고 있는 경영목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렇게 심혈을 기우려 지도하고 있는 우리학교 운동장이 하루를 못가고 다시 이렇게 어지러지고 있다는데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다.
무엇부터, 어디서부터 지도하고 또 힘써야 할까?……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하루 세 끼니 밥 먹는 것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렵게 살아왔었는데 1960년대부터 추진되기 시작한 경제개발계획과 공업화 정책의 성공으로 이제는 세계 12번째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여 선진국 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소득 1만 달러의 중진국으로 발 돋음 한지 1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2만 달러의 선진국으로의 진입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국민들이 공중도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는 문화적인 후진성과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만 물불을 가리지 못하는 윤리의식의 실종, 그리고 기본생활이 바로 된 생활교육이 제대로 실천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도지 않을까 하고 감히 생각해 본다.
지금부터 10여년전 내가 서울홍은초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수업이 끝나고 휴식시간에 옆자리에 함께 있었던 동료교사 한사람과 동남아 관광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말레이시아를 관광했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말레이시아의수도 쿠알라룸프르에서 있었던 일인데 우리가 탄 관광버스가 길가에 주차된 또 다른 관광버스와 경미한 접촉사고를 내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한참동안 관광에 차질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요. 또 서로들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큰 소리를 칠 테니까요”
“그런데 그렇지를 않았어요. 우리가 타고 온 운전기사가 내려 가더니 저쪽 차의 운전기사와 무슨 말인가를 한참동안 대화하고 난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차가 출발했으니까요”
“양쪽 차의 운전기사들이 전혀 싸우지 않고 그냥 차가 출발 하더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전혀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해결되는 것을 보고 저도 깜작 놀랐습니다.”
정말 신통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신기했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양쪽 차의 기사들이 서로들 큰 소리를 치고 야단이 났을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관광가이드에게 어떻게 된 상황이었는가를 물어 보았더니 관광가이드는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
“죄송합니다. 제가 운전을 잘 못해서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아닙니다. 제가 차를 잘못 주차해두어서 그렇게 되었지요. 오히려 제가 죄송했습니다.”
양쪽 차 기사들의 대화 내용이 이와 같았다고 하니 말레이시아라고 하는 나라. 정말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언제 우리는 그와 같은 수준까지 가능할 수 있을는지?……
지금부터 4년 전 지하철 6호선이 개통 되었을 때의 일이다. 나는 학교 앞 대흥전철역에서 전철을 타고 퇴근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탄 전철 안에는 승객이라곤 모두 10여명에 불과할 정도로 몹시 한적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고 내 좌석의 앞자리에는 서너 살 쯤 되어 보이는 아기가 초콜렛 과자를 먹으면서 엄마와 함께 타고 있었다. 아기는 과자봉지를 손에 들고 널찍한 전철 안을 뛰어 다니면서 맛있게 초콜렛 과자를 먹고 있다가 그만 잘못하여 손에든 초콜렛이 전철바닥에 우르르 쏟아지고 말았다.
아기는 얼른 “내 과자” 하면서 전철바닥에 주저앉아 쏟아진 과자를 줍기 시작했다.
“얘야. 주으면 안돼.”하면서 엄마는 얼른 아기의 손을 잡으며 끌어갔고 전철 바닥에 쏟아져있는 초콜렛 과자를 발로 으깨어버렸다.
“엄마. 내 과자”
“주으면 안돼. 바닥에 떨어진 것 먹으면 더럽잖아”라고 하면서 엄마는 아기를 끌어가 버렸다.
그날 그 엄마가 자기 아기에게 보여준 잘못된 그 행위는 아기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각인(刻印)되어 공중도덕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하는 부끄러운 한국 사람으로 우리 앞에 다가 온다는 것을 그 젊은 아기 엄마는 아마도 생각하지 못했으리라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다.
다음은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께서 가르치고 있는 생활지도 내용이다.
“1학년. 지금부터 선생님말씀 잘 듣습니다.”
“집에 갈 때 큰 길을 건너서 가는 사람 손들어 봐요. 차가 다니는 큰 길을 건널 때는 꼭 횡단보도로 건너야 합니다. 그리고 파란 신호등이 왔을 때만 건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과자 먹고 과자봉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쓰레기통에다 버려야 합니다.”
“정말 잘 알았어요. 길이나 복도 같은 곳에 버리면 안됩니다. 알았지요?”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위와 같은 가르침은 1학년 때는 정말 잘 지켜지고 있다가도 2학년으로 3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상급학년으로 상급학교로 올라갈수록 점점 지켜지지 않고 있는 우리나라 우리사회의 현실을 눈여겨보면서 안타까운 마음 무어라고 표현해야 좋을런지!
2003학년도가 거의 끝나가고 있는 작년 12월 하순경,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고 아침 여덟시 경에 학교정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교문을 지나서 운동장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어떤 중년어른 한분이 운동장 여기저기에 뒹굴고 있는 쓰레기들을 줍고 계셨다.
“감사합니다. 쓰레기를 줍고 계시네요? 저는 이 학교 교장입니다. 저희가 해야 할 일인데 이렇게 쓰레기를 줍고 계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1회용 스치로폼으로 만든 떡볶이 그릇들이 이렇게 버려져 있어서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떡볶이를 팔고 있는 분식집에 말씀을 드려서 떡볶이 그릇을 밖으로 가져오지 않도록 말씀을 드렸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벌써 몇 차례나 분식집에 말씀을 드렸는데도 도저히 말을 들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아니, 교장선생님께서 말씀을 드렸는데도 말을 듣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제가 가서 말을 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한 마음 금할 길 없다. 우리나라 우리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이 분처럼 선진되고 깨여있는 사람들로 하루빨리 자리바꿈해야 할 텐데! 라고 생각하며 가슴 뿌듯한 고마움의 정을 느꼈는데 그날 이후부터 우리 서울용강초등학교의 운동장은 눈에 보이게 깨끗한 운동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다음날도 또 그다음날도 매일 아침 변함없이 운동장에 떨어져있는 쓰레기들을 줍고 또 줍고……
너무도 훌륭한 그 어른의 더 큰 가르침을 우리 용강의 어린이들에게 어떻게 했으면 널리 전파시킬 수는 없을까? 라고 곰곰이 생각한끝에 2004학년도부터 새롭게 구성되는 제 5기 학교운영위원회의 지역위원님으로 모시는 것이 우리 용강의 어린이들에게 그분의 훌륭한 뜻을 전하고 이어받게 하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아침 학교에 출근을 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운동장에서 걷기운동을 하고 계시는 그 분을 만나게 되었고 우리학교 운영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해 주실 것을 부탁드렸다.
“안녕하세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운동하시면서 우리학교의 청소관리까지 해 주셔서 정말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그냥 운동 삼아서 하고 있으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아니, 신경을 써서가 아니고 너무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데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부탁을 하나 드리고 싶은데 꼭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예. 말씀을 해 보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어찌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금년부터, 그러니까 2004년 3월에 제 5기 학교운영위원회가 새로 구성됩니다. 그런데 저희학교에서는 학교운영위원회 지역위원님으로 두 분을 모셔야 되는데 그 두 분 중에 한 분으로 활동해 주셨으면 해서 부탁을 드립니다.”
“제가 뭐 자격이 있어야지요.”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제 부탁 들어 주시는 거죠?”
이렇게 해서 금학년도부터 새로 시작된 제5기 학교운영위원님으로 모시게 되었고 우리 서울용강초등학교의 건전한 학교발전을 위해서 많은 조언을 해 주고 계신 김득충 운영위원님께 감사를 드린다.
7차 교육과정에는 국민공통 기본교육과정이란 말이 나온다. 말 그대로 우리나라 국민이면 누구든지 기본적으로 이수해야 할 교육과정이란 뜻이다. 국민공통 기본교육과정은 창의성과 바른 인성을 보다 더 구체적이고 중점적으로 지도하도록 짜여진 교육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나무로 치면 튼튼한 열매가 열릴 수 있도록 뿌리와 줄기를 튼튼히 하는 과정을 말하며, 컴퓨터로 치면 컴퓨터 활용을 위해 키보드 좌판을 익히거나 컴퓨터하드에 기초 자료나 기본 프로그램을 내장하는 단계를 말 할 것이다.
나무는 뿌리와 줄기가 튼튼하지 못하면 튼튼한 열매를 맺기가 어렵고 컴퓨터는 기본 운용프로그램을 내장하지 않고는 어떠한 창의적 작업도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인간도 기초교육 기본교육이 충실하지 못하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창의적 산물도 생산할 수 없고 어릴 때에 형성되지 않는 기본생활습관은 자란 뒤에는 거의 교육이 불가능해 진다. 따라서 학생은 배우기 싫어도 배워야 할 것이 있고 교사는 가르치기 싫어도 가르칠 것이 있으며, 바라지 않는 방법으로 배워야 하기도 하고, 하고 싶지 않는 방법으로 가르쳐야 하기도 한다.
우리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삶의 기초가 되는 지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고, 어릴 때 익히지 않으면 안 될 기본적인 윤리의식과 기본생활 질서를 익히고 몸에 베일 수 있도록 반복 또 반복훈련을 시켜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가소성(可塑性)이 높은 어릴 때의 교육을 예부터 중요시해오고 있지 않았었던가?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항상 친절하고 상냥한 말씨로 상대방과 대화하는 사람, 운동장이나 큰 길 같은 곳에서는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공중도덕을 스스로 지키는 습성이 몸에 베인 사람, 다른 어린이의 좋은 점을 보고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할 수 있도록 늘 칭찬해주는 기회를 갖는 학급운영, 우리학교에서 벌써 4년째 실천하고 있는 선생님이 먼저 학생 맞이하기, 그렇게 해서 오늘을 상쾌한 기분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학습 분위기 조성하고 교실 복도 계단 등 청소지도가 필요할 때는 청소지도도 하시고……, 하루에 한 번 쯤은 우리나라 국기를 보고 자연스럽게 경례 하면서 국가관을 확립하는 바람직한 생활습관……
이 모든 것들은 초등교육기관에 종사하고 있는 바로 우리 선생님들의 몫이고 우리 선생님들의 사명이고 우리 선생님들이 먼저 실천해야 하는, 동일시(同一視)의 대상으로서의 본(本)을 보여 주시는 선생님이 되실 때에 우리는 진정 국가와 민족이 바라는 ‘스승’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는, 자기 자신에게도 긍지(矜持)를 갖는 교육자로서의 보람을 맛볼 수 있지 않겠는가?
비록 다른 학교 다른 교육기관에서는 실천하지 않고 있는 조금은 낯 설은 시책방향이더라도 단위 학교의 교육을 총괄하고 있는 학교장이 학교장으로서의 교육적 철학을 실천하려는데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함께 실천하는 선생님이 되신다면 요즈음 온 세상에 회자(膾炙)되는 땅에 떨어진 교권(敎權)을 우리가 근무하고 있는 서울용강초등학교에서만이라도 만회(挽回)하고 회복(回復)할 수 있지 않겠는가? 라고 감이 말씀드린다.
내가 맡은 어린이들을 지도하는데 있어서는 페스탈로찌적인 사명감을 갖고 열과 성을 다하는 우리 서울용강초등학교 선생님들로 인해서 어린이들에게는 훌륭한 스승님으로, 학부모님들께는 다시 모시고 싶은 훌륭한 선생님으로, 동료교사들로부터는 잊혀지지 않는 본받고 싶은 선생님으로 오래오래 각인될 수 있는 선생님이 되실 때에 나와 우리의 자녀들이 함께 살아갈 우리나라 우리사회는 점차 밝은 희망의 여명(黎明)이 소리 없이 살며시 우리 곁에 찾아오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분명 그날이 우리나라 우리사회에 하루빨리 찾아올 수 있도록 우리 용강의 모든 선생님들이 앞장서 주실 것을 간곡히 소망 드린다.
2004년 4월
서울용강초등학교 소정영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빛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사랑하는 이의 발길은 끊어져 거의 한 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날아가는 한 마리의 해오라기. 추수가 지난 후의 텅빈 논과 밭. 술에 취한 여인의 모습. 어린 시절 살던 조그만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는 이 없고, 일찍이 뛰놀던 놀이터에는 거만한 붉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데다 당신이 살던 집에서는 낯선 이의 얼굴이 내다보고, 왕자처럼 경이롭던 아카시아 숲도 이미 베어 없어지고 말았을 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이 글은 지금으로부터 43년전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국어교과서를 배우면서 유난히도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했던 안톤 슈낙(Aunton Schnack:1892년 독일 태생, 짧은 산문 부분에서 세계적 대가)의「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일부를 적어 보았는데 각박하게 살고 있는 현실생활에서 정말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어찌 이 것들 뿐이리오.
“교장선생님. 전교적으로 꼭 일기를 써야 하고, 일기를 써야 만 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또 일기쓰기 상을 전교적으로 꼭 줘야 되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습니다.”(K① 부장선생님)
“K①부장선생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교장)
“지난번 월요 애국조회 때 교장선생님께서 훈화 말씀을 하시면서 ‘일기를 쓰는 어린이가 착한 어린이가 되고 공부도 잘하게 된다.’ 라고 말씀 하셨는데 꼭 일기를 써야만 착한 어린이가 되고, 일기를 쓰지 않으면 착한 어린이가 못 된다는 것입니까?”(K① 부장선생님)
“K① 부장님. 선생님으로서 그게 무슨 말입니까?”(교장)
“저는 일기 쓰기에 대하여 교장선생님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어서 하는 말입니다.”(K① 부장)
“그래요? 선생님의 생각을 말해보세요.”(교장)
“한참 말이 없음”
“그렇다면 선생님 생각은 일기쓰기 지도는 않해도 되고 일기쓰기 상도 주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까?”(교장)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교적으로 일제히 일기를 쓰라고 하고 시상도 일제히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K① 부장선생님)
“우리학교의 교장은 내가 교장입니다. 학년초부터 아니 내가 우리학교에 부임하면서부터 줄곧 이렇게 해온 시책입니다.”(교장)
이렇게 해서 그 날의 부장회의는 끝났다(2003.12.18). 그리고 예정대로 2003학년도 제 2학기 일기 쓰기 우수학생 시상을 마치긴 했는데 부장교사 회의석상에서 그와 같은 발언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나라의 교육현실 앞에……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정말 우리를 슬프게 한다.
오늘의 우리나라 교육현실!
무너진 공교육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들 말로만 앞다투어 재잘대고 있을 뿐, 아무도 구체적인 처방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는 사이에 일선교육현장에서는 이렇게 상식 밖의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어제도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지 않을까?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라는 말은 가소성(可塑性)이 높은 초등교육의 중요성을 옛 우리의 선조들도 익히 알고 실천해온 너무나도 당연한 기본적인 생활교육의 A.B.C인데도 오늘의 우리나라 교육현실은 이를 실천하고 실행해야 하는 초.중등교육의 현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광복이후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선배 선생님들께서 혼신의 힘을 다해 열과 성을 다했던 교육현장의 분위기는 이제 서서히 그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으니 이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말로만 가르치는 선생님이 아닌 사제동행(師弟同行)하는 선생님. 청소시간에는 함께 청소하고, 아침자습 시간에는 한발 앞서 출근하여 어린이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오순도순 그 날의 학습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선생님! 우리 서울용강초등학교에는 이와 같은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이 계신다.
그렇지만 「좋은 세 살 버릇」이 여든 가도록 하고, 모든 학년.학급에서 「인사 잘하고, 생활주변을 깨끗이 하고, 질서를 스스로 지킬 줄 아는 어린이」로 자라나도록 지도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합심해서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지도하고 또 지도하고를 반복해 나갈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일인데도 실제로 어느 한 학급에서 수수방관(袖手傍觀)하거나 ‘나몰라라’ 해 버린다면 몇 개 학년에 걸쳐 지금까지 쌓아왔던 「좋은 세 살 버릇」은 너무도 허망하게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나쁜 세 살 버릇」으로 자리 잡아 버린다는데 문제가 있는데도 학교장으로서는 어떠한 특별한 대책을 전혀 강구할 수 없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지 않을까?
며칠이 지난 뒤 K① 부장선생님과 단둘이 만나 대화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선생님!”(교장)
“아침 출근, 조금만 더 빨리 할 수 없을까요? 내가 보기엔 10분만 더 빨리 오셔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래서 오늘을 상쾌한 기분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학습 분위기 조성하고, 교실 복도 계단 등 청소 지도가 필요 할 때는 청소지도도 하시고…… 그게 실천하기가 그렇게 어려울까요? 그리고 부장교사로서의 역할도 조금만 더 신경 쓰면 좋겠는데!”(교장)
“아침 학교에 오는 시각은 제가 뭐 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부장교사로서의 임무는 충실히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K① 부장선생님)
아침 출근시각은 본인의 개인적인 일 때문에(그 일이 어떤 일인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고, 부장교사로서의 임무도 충실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선생님. 단 둘이서만 만나서 허심탐회하게 얘기하다보면 그동안에 있었던 여러 가지 학교생활에서의 잘못된 부분들을 스스로 반성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대화를 했었는데…… 그와 같은 나의 간절한 소망은 한낱 물거품으로 사라져버렸음을 알았을 때의 허탈함을 그 어디에도 하소연 할 수 없음이 정말 우리를 슬프게 한다.
2002학년도 6월 중순 무렵에 있었던 일이다.
우리학교 어린이들의 등교시각은 08:40~08:50까지 약 10분 정도의 시간에 등교하도록 지도하고 있다. 그래서 선생님들의 출근시각은 08:40분까지(夏節期)로 정해져 있지만 그 시각 이전까지 모든 선생님들이 출근하시어 아동 지도에 임해 주시기를 늘 부탁드리고 있었고 그와 같은 학교장의 경영방침에 거의 모든 선생님들이 동의하시고 열심히 아동지도에 임해주시고 있었다.
3월에 시작된 2002학년도 제 1학기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던 6월 중순 무렵의 어느 날, 그 날은 08:50분이 조금 지난 시각에 복도를 지나면서 전교를 순회하고 있었는데 6학년 어느 반에서 어린이들이 유난히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놀고 있었다. 교실로 들어가 보니 남학생은 거의 없었고 모두 여학생들밖에 없었다.
“얘들아. 너희 반은 남학생은 어디 있지?”(교장)
“운동장에서 축구하고 있습니다.”(교실에 있는 여학생들)
“아침 자율학습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데 6학년 언니들이 되어가지고 이러면 안 되는데, 빨리 들어오라고 해.”(교장)
라고 일러준 후 그 반 교실에서 나와 전교를 모두 순회한 후 다시 6학년 복도를 지나게 되었다.
“아니, 이럴 수가! 지금 시각이 09:10분이나 되었는데.”
우리학교 夏節期때의 1교시 수업시작 시각은 09:00부터 인데 수업이 시작 된지 10여분이나 지났는데도 선생님도 남학생 아이들도 교실에는 보이지 않았다.
“얘들아, 남학생들 아직도 안 들어왔네. 빨리 들어오라고 불러야지.”(교장)
이렇게 해서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남학생들을 부르게 했고 조금 뒤 남학생들이 모두 들어왔다.
“얘들아, 지금 시각이 몇 시인데 지금까지 운동장에서 놀고 있지?”(교장)
“운동장에서 축구했습니다.”(남학생들)
“너희 반 축구부 어린이는 몇 사람이냐?”(교장)
“아무도 대답이 없음”
“축구부인 사람 손들어봐.”(교장)
알아보았더니 축구부인 어린이는 한사람도 없었다.
“선생님은 어디 계시니?(교장)
“아무도 대답이 없음”
“얘들아. 너희는 지금 6학년 아니니? 1교시 수업시작 시간이 10분이나 지났는데 지금까지 운동장에서 놀고만 있다니.”(교장)
라고 하면서 어린이들과 대화를 하고 있을 때 그 반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아니 교장선생님께서 오셨습니까?”(K② 담임선생님)
“예. 1교시 시작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09:15) 선생님께서 안 계셔서 들어왔습니다.”(교장)
이렇게 해서 그 날의 일과는 별다른 일 없이 모두 끝이 났고 날자는 바뀌어 다음날의 아침 자율학습 시각이 시작되고 있었는데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다음날 아침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08:30분이 조금 지난 시각에 복도를 순회하게 있었다.
“이상하다. 이 반은 오늘도 어제와 꼭 같으네”
라고 생각하면서 전교를 모두 순회하고 09:00시가 조금 지난 뒤에, 그러니까 1교시가 시작되고 나서 다시 6학년 복도를 지나가 보았다. 그런데 “아니 이럴 수가” 어제와 너무나 똑 같은 현상이 재현(再現)되고 있었다. 선생님은 계시지 않았고, 남학생들은 운동장에서 축구하면서 놀고 있고……
“얘들아. 너희 반은 왜 어제와 똑 같지? 교장선생님은 이제 잘 할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교장)
라고 하면서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부르게 했고 그제서야 아이들은 교실로 뛰어 들어와 모두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책가방을 메고 등교를 한 것으로 보이는 어린이 한 사람이 교실로 들어왔다.
“얘야. 너는 이제야 학교 오는 거니?”(교장)
“묵묵부답으로 대답이 없음”
“아니 지금 시각이 09:10분이 가까워지는데 이제야 학교에를 오다니 정말 큰일 났네”(교장)
“그 애는 맨날 늦게 와요.”(아이들)
다른 아이들이 한 말이었다.
“아니, 그러면 선생님한테 꾸중 안들어?”(교장)
“선생님도 맨날 늦게 들어오시니까 제가 늦게 오는지를 모르는데요.”(늦게 온 어린이)
이렇게 6학년 그 반 아이들과 함께하고 있었는데 한참 후에 담임선생님이 머리를 긁적이며 들어오셨다.
“교장선생님 또 오셨네요.(겸연쩍은 표정으로.)”
“아니, 어디서 무슨 일이 있는 것입니까?”(교장)
라고 물어본 뒤에 6학년 교실을 빠져 나왔다. 그런데 또 그 다음날 아침……, 정말 이일을 어이할꼬?…… 너무나 똑 같은 일이 3일째 반복되어 그 날 오후에는 방과 후 조용한 시각에 그 선생님을 교장실로 모셨다.
“선생님. 난 선생님을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그 시간에 어디서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교장)
“예.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K② 담임교사)
“물론 잘 해야지요. 그렇지만 도대체 왜 그러는 것입니까? 선생님처럼 음악도, 미술도, 컴퓨터도 잘하시고! 그리고 선생님은 더군다나 부장교사 아닙니까?”(교장)
“예. 앞으로는 잘 하겠습니다.”(K② 담임교사)
“불교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한다지요? 우리는 정말 큰 인연으로 만나지 않았습니까? 한 직장에서 이렇게 오래오래 함께 하는 인연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인연을 좋은 인연으로 만들어 가야지, 좋지 않은 인연으로 만들어 가면 되겠습니까? 선생님.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학교 오시기 전에 같이 근무했던 선생님들 말입니다. 함께 근무했던 많은 선생님들 가운데서 어떤 분은 정말 ‘훌륭하다’ 라고 생각되는 선생님도 계시고 또 어떤 분은 생각하기도 싫은 ‘그런 선생님’도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내가 조금만 더 앞장서서 열심히 하다보면 ‘훌륭한 선생님’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 아닙니까? 또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어리니까 모르고 넘어간 것 같으지만 아이들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 아닙니까! 좋은 선생님으로, 아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어요?”(교장)
“예.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K② 담임교사)
정말 좋은 선생님으로, 훌륭한 선생님으로 오래오래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기를 간절하게 소망한다.
얼마 전에는 『도전 2004 청년의 힘』이라는 KBS 텔레비젼을 시청했는데 긍지와 사명감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젊은 과학자들의 일상에 대한 얘기들을 좌담회 형식으로 나누고 있었다. 신약개발을 위해서 밤잠을 자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젊은이들, 세계최고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연구하고 있는 각종 연구소의 연구원들…… 이들의 헌신과 고난이 있었기에 우리나라가 현재 이만큼이나마 세계 속의 한국으로 살고 있지 않느냐면서 그들은 무한한 자긍심과 보람과 긍지를 갖고 근무에 열중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우리학교 특기.적성 과목을 맡고 있는 외부강사 선생님들과 간단한 저녁식사를 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선생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받고 있는 보수도 너무나 적게 받으시면서 이렇게 열심히 가르쳐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교장)
“아니예요. 저희들은 학교에서 너무나 잘 해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있어요.”(특기.적성교사들)
우리학교에서 특기.적성 과목을 맡아 가르쳐주고 있는 외부강사 선생님들의 노고에 정말 감사드린다. 그분들은 정말 너무나 적은 보수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이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이 날로 성장해 가면서 자기가 가르쳐준 ‘공부감’ 을 하나씩 둘씩 소화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긍지와 보람을 갖고 가르치고 있는 모습에 정말 그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선생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누워서 침 뱉기』라는 말이 있다. 위에서 소개해 드린 우리학교 선생님 두 분에 대한 사례의 이야기는 생각하기에 따라선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숨겨두고 싶은 내용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또 다른 거시적인 시각으로 생각해 본다면 이렇게라도 해서 당사자인 본인들이 대오각성(大悟覺醒)해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우리학교 특기.적성 과목을 맡아 정말 헌신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외부강사 선생님들께서는 우리 선생님들보다는 너무나도 열약한 조건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동지도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에 못지않는 긍지와 사명감을 갖고 아동교육에 임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선생님. 갑신년(2004년) 새해에는 정말 ‘새 마음 새 생각’으로 근무에 열중하시어 어린이들에게는 존경받는 스승님으로, 동료교사들께는 훌륭한 선생님으로 오래오래 기억될 수 있도록 해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겠습니다.” 라고 빌고 있다. 선생님께서는 어느 선생님에 못지않게 훌륭한 소양과 자질을 갖고 계신 선생님이기에 “지나간 2003학년도까지는 내가 너무나 바빠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잘못했어! 앞으로는 정말 잘하겠어.” 라고 할 수 있는 선생님이 되시어 선생님의 새로운 면모를 불 수 있도록 하여주시길 간곡히 소망한다.
2004학년도 신학기를 맞이하여 3일째 되는 날이었다.
금년 신학년도는 지금까지 우리 서울용강초등학교의 차분하고 조용한 학교분위기가 아닌 어딘지 뒤숭숭한 분위기가 짙어지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을 때였다.
“교장선생님. 어린이신문 구독문제인데 올 해는 문제가 있을 것 같습니다.” 교부부장님의 말씀이었다.
“왜. 무슨 일이 있었어요?”(교장)
“지금도 신문을 보는 학교가 있느냐고 합니다.(k교무부장)
“그 말이 무슨 말 이예요”(교장)
“우리학교는 지금까지 어린이신문을 활용해서 ‘아침 NIE 학습'을 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 좀 보셔요” (k교무부장)
교무부장님이 주신 푸린트물을 보았더니 『학교는 신문사의 지국이 아니다.』라는 표제가 붙은 A4용지에 복사된 푸린트물 이었는데 A선생님이 우리학교 모든 선생님들에게 나누어준 인쇄물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난 뒤 교감선생님께서 들어오셔서
“교장선생님. 아무래도 이제는 출근보조부 없애야 될 것 같습니다”(교감)
“아니 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교장)
“며칠 전에도 A 선생님께서 내게 출근보조부 얘기를 했었는데 오늘 또 교육감과의 합의사항을 갖고 와서 얘기를 하고 갔습니다. 어차피 교육감과의 합의사항인데 없엘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교감)
“예. 좀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교장)
그리고 다시 며칠이 지난 후 교감선생님과 교무부장님이 교장 실로 들어오셨다.
“교장선생님. 지난번에 말씀드린 어린이신문과 출근보조부문제, 어떻게 할까요? 또 여선생님들 보건휴가 문제도 말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우리학교는 꼭 보건휴가가 필요한분은 수업이 끝난 뒤에 나가시고 있었지만 올해부터는 법에 있는 것인데 당연히 모든 여선생님들이 골고루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작년에 여자선생님들이 보건휴가를 사용하지 않아서 절약된 학교운영비로 여교사 휴게실에 공기청정기와 안마기를 구입해 달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교감)
“글쎄요. 시국이 그런 세상인데 우리인들 어쩔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하시지요. 그런데 출근보조부가 없으면 선생님들의 출근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죠? 그리고 지금까지 신문을 활용해서 아침 NIE 학습을 해 왔는데 이제 신문이 없으면 무엇으로 아침 자율학습을 할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학급별로 아침 자율학습 주제를 적어서 학교장이 알 수 있도록 내게 가져오도록 해 주세요. 또 보건휴가 문제도 법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니까 당연히 희망하는 선생님은 사용하도록 말씀드리세요.“(교장)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선생님들 출근보조부문제, 아침 자율 학습 때 공부감으로 활용했던 어린이신문 구독문제,여교사 보건휴가문제 등을 말씀드렸는데 어린이신문 구독 문제는 학급별로 담임선생님들께서 어린이신문 구독여부를 자율적으로 판단하여 신청토록 하였으나 어린이신문을 계속하여 구독 희망하는 학급은 한 학급도 없었다고 하니 저절로 아침 NIE 학습은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물론 아침 자율학습을 하는데 반드시 어린이신문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므로 선생님들의 자율적인 아침 자율학습시간의 운영을 기대한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난 뒤 K과학부장선생님이 결재를 받으러 와서 하신 말씀이었다.(2004. 3. 30)
“교장선생님. 우리학교에서는 국기에 대한 경례지도를 하고 있는데 꼭 그렇게 해야 되는지 앞으로 선생님들이 문제를 제기 하리라고 봅니다. 어떻게 다른 방법이 없을는지 모르겠습니다.”(K 과학부장)
“그 말이 무슨 말이랍니까”(교장)
“다른 학교에서는 하지 않는 것을 꼭 우리학교에서는 해야 하는가 입니다.”(K 과학부장)
“국기에 대한 경례지도를 하지 않아야 된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다니……”(교장)
“우리학교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지도를 한 것은 작년부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모두들 잘 하고 있었는데 왜 그 얘기가 지금 나오게 되었는지 궁금하네요.”(교장)
“글쎄요”(K 과학부장)
“어느 선생님이 그 얘기를 하였습니까?”(교장)
“예. 그 문제도 A 선생님으로부터 시발되었습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지도를 하기위해서 교문에 세워놓은 ‘표지판’을 여기 중앙현관으로 A 선생님이 치워 놓았는데 아직 못 보셨습니까?”(K 과학부장)
“아. 그랬었습니까. 나는 며칠 전 비가 왔을 때 치워져 있길래 비 맞지 않도록 치워놓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된 것이었군요”(교장)
“교장선생님. 또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자료실에서 근무하는 이실장님이 교장실 청소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시정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지적을 해서 말씀드립니다.” (K과학 부장)
“자료실 이실장님이 교장실 청소하는 것을 시정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 말은 또 어디서 나온 말입니까?”(교장)
“그 말도 A 선생님이 한 말입니다.”(K 과학부장)
“아니 이럴 수가…… 그 문제는 자료실 이실장님이 근무시간이 아닌 아침시간을 이용해서 1주에 1회씩 해주는 것이므로 A 선생님이 간섭할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며칠 전에 아침시간이 아닌 좀 늦은 시각에 청소를 하고 간 일이 있었는데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이실장님께 말씀 드려야겠습니다.”(교장)
너무나 기가 막히고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자료실에서 근무하는 이실장님이 교장실 청소를 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내가 이곳 서울용강초등학교에 발령을 받고 와서 보니 그때부터 자료실 요원인 이실장님이 교장실 청소를 하고 있었다. 1주에 1회씩 매주 월요일 아침시간을 이용해서 교장실을 깔끔하게 청소해주셔서 늘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실장님이 새로 전입해 온 A 선생님에게 교장실청소가 부당하다고 얘기 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금학년도에 들어와서 우리 서울용강초등학교는 정말 너무나 많은 변화의 바람을 겪고 있다. 2000년 9월 1일자로 본교에 부임한 이래 낙후되고 낡은 본교의 시설환경을 개선하고 차분하면서도 내실 있는 학교경영을 하기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해 왔고, 또 본교에 재직하고 있는 모든 교직원들이 학교장을 중심으로 열심히 노력해온 결과 마포지구 10개 초등학교중에서 가장 학교운영이 내실 있게 운영되고 있다는 서부교육청 장학사님들로부터 칭찬의 말씀을 들어오곤 했었는데……
금년 2004학년도에 들어와서 우리 서울용강초등학교의 학교분위기가 왜 이렇게 너무도 갑자기 달라지고 있을까?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사용해왔던 출근보조부가 없어지고, 어린이신문을 활용한 아침 NIE 학습이 없어지고, 여교사들 모두가 매월 보건휴가를 쓰겠다고 하고, 어릴 때부터 투철한 국가관을 갖도록 하기위해 아침등교시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었던 국기에 대한 경례하기를 할 수 없도록 하기위해 학교장이 세워놓은 ‘국기에 대한 경례 알림판’을 철수시켰는가하면 국기에 대한 경례지도를 하면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6학년 어린이에게 특별교육을 하여 국기에 대한 경례하기를 못하게 하고……
과연 이와 같은 행위들이 그들이 말하는 어린이들을 위해서, 진정한 교육을 위해서 하는 일이겠는가? 근무기강이 없어지고 어떻게든 쉽고 편하게만 넘어가겠다는 너무나도 뻔한 속내가 여실히 나타나는데도 막중한 책무를 맡고 있는 학교장으로서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는 현실 앞에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이일을 어이할꼬……
얼마 전 월요 직원종례시(2004. 3. 15) 제 5기 학교운영위원회 교원위원으로 선출된 A 교사는 선출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본교는 시설이나 설비 면에서 많이 열약한 것 같은데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제게 얘기해 주시면 제가 시 교육청에서 예산을 따올 수 있습니다. 저는 대부분의 교육위원들과 잘 알고 지내거든요.”라는 요지의 인사말을 하였다. 학교발전을 위해서 예산을 따오겠다는 충정은 너무나 고마운 일이지만……
어떤 직장에서든 그 직장의 설립목적에 따라 목표달성을 위해 자기에게 맡겨진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해야 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의무이고 순리임에도 불구하고 전교조에서 중요한 직책을 갖고 있다는 분이 교사로서의 신분과 교사의 업무한계를 벗어난 학교경영의 모든 분야에 걸쳐 시시비비(是是非非)를 하고 있는 A 선생님의 처신에 학교장으로서 그 잘못된 점을 명쾌하게 깨우쳐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정말 이일을 어이할꼬……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우리를 슬프게 한다.
“교장선생임. 오늘(2004. 4.22) 우리 2학년 현장학습 가는 날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계약했던 차가 4대 중에서 1대가 다른 차가 왔습니다.“(k교무부장)
“그랬어요? 그러면 어떻게 했어요?”(교장)
“그래서 책임자한테 책임을 물었는데 어쨌든 오늘 현장학습은 가야 되지 않겠어요?”(k교무부장)
“당연하지요. 그렇지만 계약된 차가 아니고 다른 차가 왔다면 보완조치를 해야 할 텐데.”(교장)
“그래서 행정실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보험이라든지 기타 보완조치를 하라고 말을 했습니다.”(교무부장)
“잘했습니다. 그렇게 했으면 다녀오세요”(교장)
“그런데 A 선생이 가면 안 된다고 하네요.”(k교무부장)
“왜요?”(교장)
“학운위에서 얘기도 안했는데 계약도 안 된 차가 ‘갈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교무부장)
“그게 무슨 말이랍니까? 현장학습을 가야지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 이예요? 어서 다녀오세요.”(교장)
이렇게 해서 2학년 부장교사를 겸임하고 있는 교무부장 선생님이 나가신 뒤 교무실로 어떻게 된 상황이었는가를 알아보려고 교무실 쪽으로 막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행정실 앞을 지나고 있을 때 A 선생님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땜빵차 알아요? 땜빵차”(A 교사)
“그게 무슨 말이랍니까?”(교장)
“교장이 돼가지고 땜빵차 몰랐어요?”(바로 내 면전에다 삿대질을 하면서. A 교사)
“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교장)
“그러면 이리와요. 버스를 가서 보세요.(내 옷소매를 가볍게 잡아 끌면서. A 교사)
아무리 생각해도 그대로 가만둘 일이 아니었다. 학교에 무슨 일이 있을 때는 당연히 본교 교사로서 건설적인 얘기를 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만, 오늘 A 교사가 교장에게 말하는 태도는 도저히 교사라기보다는 어디 시중잡배(市中雜輩)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A 교사가 우리학교에 전입해 온 3월 이후 조용하고 오순도손 했던 면학분위기는 너무나 달라져가고 있었기에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나한테 무어라고 했습니까? 이리 오세요. 교장실로 가서 말을 해 봅시다.”(교장)
“땜빵차. 모른다면서요?”(교장실로 들어오지 않고. A교사)
“당신도 선생님이예요? 그리고 지금 몇 살입니까? 선생님이 교장한테 하는 태도가 이래도 괜찮은 거예요?” 라고 하면서 큰 소리로 A 교사를 질책을 하였고, 중앙현관 앞 운동장에서는 2학년 선생님들이 현장학습 출발을 하기 위해 2학년 어린이들을 버스에 승차시키고 있었으며 10여명 정도로 보이는 2학년 학부모들이 버스 주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선생님. 마침 잘 됐습니다. 이런 상황을 우리 선생님들과 학부모님들께 보여드려야겠습니다. 이리 나오세요” 라고 말하면서 버스가 정차되어 있는 쪽으로 나가면서보니까 어느 사이 A 선생님은 밖으로 나오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버려서 자연스럽게 그때의 상황을 학부모님들과 선생님들께 공개해 드리지 못하게 되어 아쉽게 되었다고나 할까?
학운위 제 3 차 회의가 2004. 4. 23일 개회되었다. 그날은 급식업체 선정문제 등 학운위 안건(案件)으로 올라온 의안(議案)들을 토의한 뒤 기타토의 안건으로 학윈위 위원장님께서 학교경영에 대한 다음과 같은 건의말씀을 하셨다.
“학교경영의 모든 문제는 교장선생님께서 판단하시고 또한 교장선생님의 교육적 철학에 의해서 운영하고 계신 문제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린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있는 학부모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그렇게 되면 곤란한데?’라고 생각되는 문제들이 있어서 건의말씀을 드리게 되었음을 양해하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학교운영위원장)
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학부모로서의 우려의 얘기들을 소상하게 개진(開陳)하였다.
“작년까지는 우리 서울용강초등학교가 학교운영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어 모든 면에서 정말 열심히 가르치는 학교였다고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금학년도에 들어와서는 학교가 어수선해지고 선생님들에게 믿음이 가지 않는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들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왕에 말이 나왔을 때,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금년 3월부터 선생님들 출근보조부가 없어졌다는데 우리 학부모들이 걱정하는 것은 출근보조부가 있고 없고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출근보조부가 없어지고 난 뒤에 선생님들이 아침 출근시각이 지났는데도 아주 많은 교실에서 선생님들이 아직 출근하지 않고 있는 현상이 늘 눈에 뜨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태가 이와 같은데 교장선생님께서는 어떤 조치를 취하고 계신지 알고 싶습니다.”(학교운영위원장)
“저도 제 소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작년 후반기에 대흥동으로 이사를 와서 학교 운동장으로 아침운동을 왔다가 교장선생님을 뵙고 자격도 없는 사람이 이렇게 운영위원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만 작년에는, 금년 3월까지만 해도 학생들이 아침 등교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정말 가슴이 뭉클했었습니다. 그런데 금년 3월까지는 그런대로 잘하고 있었는데 4월로 접어들어서 아이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더라구요. 왜 이렇게 금년들어서 흐지부지 되고 있는지 안타까워서 드리는 말씀입니다.”(K 지역위원)
“저도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끔씩 아침에 학교에 나와 보는데 저희학교의 선생님 출근시각이 8:40분으로 알고 있는데 그 시각이 지났는데도 많은 교실에서 아직 선생님들이 오시지 않을 때가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저희 학부모 단체의 많은 학부모들의 얘기는 모든 면에 모범을 보여주셔야 할 선생님들이 이렇게 학생들보다 늦게 학교에 오셔도 괜찮은 것인지 말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몇 분 학부모들은 ‘선생님들의 출근 시각을 한번 체크해 보자’라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교장선생님!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 여쭈어 봅니다.”(K 학부모위원)
“국기에 대한 경례문제는 내가 아이들에게 무어라고 했느냐 하면 하고싶은 사람만 스스로 하는 것이지 우리학교처럼 알림판을 세워놓고 아이들이 지켜서서 강제로 시키면 안 된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그리고 선생님들 출근시각 문제는 학교관리장이 관리하는 것이지 학부모님들이 관여하는 문제가 아닙니다.“(A 교사위원)
“제가 학교 교장으로써 오늘 이렇게 듣지 않아야 할 얘기들을 듣고 보니 정말 낯이 뜨거워 숨고 싶습니다. 오늘 여기서 논의됐던 문제들을 선생님들께 사실대로 알려드리고 국기에 대한 경례문제는 어린이들이 자율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지도해 보겠습니다. 앞으로는 학부모님들께 실망시켜드리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학교장)
정말 듣기 거북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노라니 천길 만길 낭떠러지에라도 떨어진 것 같은 비참한 심경을 누구에게 하소연 할꼬……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정말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런 일이 있고나서 첫 번째 교사모임이 있는 날이었다.(2004.4.27) 학운위에서 논의됐던 의제들을 학운위 교사위원인 K 교무부장님께서 간략하게 알려드리면서 출근보조부 문제와 국기에 대한 경례문제 때문에 나왔던 얘기들을 안내하였는데 몇 분 선생님들이 심히 불쾌한 내색을 감추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교장인 내가 그때의 상황을 소상하게 알려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다음과 같이 말문을 열었다.
“교무부장님의 말씀을 듣고 몹시 불쾌한 표정들이신데 왜 그런 얘기들을 들을 수밖에 없었는가를 소상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학부모위원들이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은 우리학교의 출근보조부가 금년 3월부터 없어졌는데 출근보조부가 없어진 것 자체를 따지는 것은 아니고, 그것이 없어진 뒤에 우리 선생님들의 근무자세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심지어는 학년을 바꾸어서 교사들의 출근상황을 체크해 보겠다고 까지 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작년에 우리학교의 자랑이었던 국기에 대한 경례문제도 논의 되었습니다. 작년에는 그렇게 잘 했는데 왜 금년에는 흐지부지 되고 있는지 몹시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들어오는데 선생님은 그냥 들어오는 선생님도 계셨다면서 정말 보기가 민망스러웠다고 했습니다.(학교장)
“그리고 이런 문제들을 학운위에서 거침없이 말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교권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당신들이 왜 우리의 교권을 짓밟느냐고 항의 할 수 있습니까?”(교장)
(선생님들 몇 분이 웅성거림. A교사는 이때 밖으로 나가버리고 K①교사는 근무시간이 지났으니 다음으로 미루자고 하고)
“선생님들께서 교권이란 낱말을 잘못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교권이란 낱말에는 3가지의 뜻이 함께 포함된 낱말입니다. 교권(敎權)이란 교사의 권리, 교사의 권한, 교사의 권위, 이렇게 3가지의 뜻이 함께 내포된 말입니다. 첫째 교사의 권리는 선생님들께서 교사라는 직위를 갖고 있음으로서 생기는 사회적, 법적으로 행사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예를 든다면 교육공무원법에 ‘교사는 부당하게 징계(徵戒)나 해고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라고 되어 있는데 바로 그런 것이 교사의 권리입니다. 둘째로는 교사의 권한(權限)입니다. 선생님들께서 교사라는 직위를 갖임으로서 생겨나는 힘입니다. 아이들에게 숙제를 낸다든가 상을 주기도 하고 벌을 주기도 하는데 그와 같은 것이 교사의 권한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는 교사의 권위(權威)입니다. 교사의 권위는 외부로부터 또는 법적으로 부여받은 것이 아닙니다. 교사의 권위는 개별선생님들의 인격입니다. 또한 개별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저절로 느껴지는 사랑과 열정의 정도입니다. 선생님 각자가 학생들로부터, 학부모로부터 존경을 받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저절로 느껴지는 향기입니다. 그런데 왜 교권을 무시하느냐고 따지기라도 한다면교권은 오히려 더 떨어지거나 내려가는 것이지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따지겠습니까? 우리는 다시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도록 더욱더 열심히 근무해서 존경의 마음으로 돌려놓도록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교장이 왜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하고 있는지 교장의 뜻을 아시겠지요? 선생님들 퇴근시간이 진즉 넘었는데 이렇게 말하고 있는 교장의 뜻을 이해(理解)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학교장)
이렇게 해서 그날의 교사모임은 끝났다.(2004. 4.27)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 전교 어린이 회장 두 사람이 어린이회의록을 갖고 교장실로 들어왔다.
“교장선생님 결재 받으러 왔습니다.”(어린이회장)
“금주에는 어린이회에서 무엇을 논의 했니? 어린이회에서는 실제로 너희들이 의논하고 토의할 의제는 꼭 실천 할 수 있는 문제를 갖고 의논하고 토의하는 것이 좋을거야. 예를 든다면 지금 우리학교에서 실천하고 있는 국기에 대한 경례 문제를 어린이회에서 정식 의제로 선정해서 토의해보고 작년에는 정말 잘 실천했는데, 금년 3월까지도 잘 하고 있었는데, 4월부터서 흐지부지 되기 시작하여 지금은 거의 실천되지 않고 있는 국기에 대한 경례문제를 우리학교의 좋은 전통으로 계속 남기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너희들이 한번 실 천방안을 토의하여 집중적으로 1~2주동안 교문과 후문에서 봉사활동을 해서라도 다시 잘 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너희들의 생각은 어떻니?”(학교장)
“저희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어린이회장)
“그래? 그렇다면 한번 실천해보렴.”(학교장)
이렇게 해서 국기에 대한 경례문제를 어린이회에서 정식 의제로 선정하여 논의한 결과 우리학교의 좋은 전통으로 남겼으면 좋겠다고 결의하고 아침등교시 전교 어린이회 회장단 이린이들이 정문과 후문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지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8:30분경 A 선생님이 출근하면서 정문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지도를 하고 있는 어린이와 ‘국기에 대한 경례 알림판’을 붙잡고 무슨 말을 상당히 오랫동안 얘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런 일이 있은 후 교감선생님과 교무부장께서 교장실로 들어오셔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 주셨다.
“교장선생님. 지난번 학운위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지도는 하지 않기로 했다면서요?”(교감)
“예? 학운위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지도를 하지 않기로 한 것이 아니고 금년들어서 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고 흐지부지 되느냐는 얘기를 했었는데요.”(교장)
“안상은 선생은 국기에 대한 경례를 강제로 시키지 않고, 하고 싶은 사람만 자율적으로 하도록 했는데 또 저렇게 아이들을 시켜서 강제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도록 하면 불가피하게 서울시교육청 홈페이지에 용강학교를 띄울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K교무부장)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서울시교육청홈페이지에 띄울려면 띄우라고 하세요. 그 선생님이 정상적인 선생님인지 정말 의심이 갑니다. 지금 국기에 대한 경례지도를 하는 것은 교장이 나가서 강제적으로 시키는 것이 아니고, 또 아이들이 지도한다고 해서 강제적으로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작년에 우리학교 어린이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잘했었는데 그때 1년 내내 교문에서 지도하지 않았습니다. 1학기때 2주, 2학기시작하고 1주 동안만 교문에서 집중적으로 지도했었습니다. 1년내내 잘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올해에는 안상은 선생이 와서 잘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일부러 못하게 지도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금년에 갑자기 우리학교의 좋은 전통이 점차 없어져가고 있지 않습니까? ”(교장)
“안상은 선생님 말은 학운위에서 자율적인 방법으로만 지도 한다고 했는데 어린이 회장단이 교문에서 지켜보고 있으니까 강제적 이라는 겁니다.”(K교무부장)
“지금 어린이 회장단이 교문에서 지도하고 있는 것은 교장이 강제적으로 ‘지도해라’라고 시킨 것이 아니고 전교 어린이회에서 정식 안건(案件)으로 채택해서 토의하고 의논한 결과 우리학교의 좋은 전통을 살려갈 수 있도록 집중적으로 1~2주 동안 지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회에서 스스로 결정해서 하는 것을 강제적이라고 하면 말이 안 되지요(교장)
“어린이회에서 토의해서 결정하긴 했지만 누군가가 아이들에게 말을해서 그런 문제를 토의한 것 아닙니까?"(K교무부장)
“그거야 당연히 교장인 내가 얘기를 했었지요. 자율적이라고 해서 교육적인 꼭 필요한 문제를 아이들에게 말하면 안되는 건가요? 아이들에게 안내해서 교육이 되는 방향으로 지도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닙니까?”(교장)
“안상은 선생님 말은 교문에서 직접 지도하는 것은 강제적이니까 훈화로만 지도를 해야지, 하고 싶은 사람은 하고, 하기 싫은 사람은 안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K교무부장)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수 있는 습관을 갖도록 지도하는 것은 학교장의 철학입니다. 당연이 우리학교 선생님이라면 학교장의 철학에 따라야 되는 것 아닐까요? 그리고 지난번에 내가 선생님들께 나누어드린 ‘글(기본생활이 바로 된 우리나라 우리사회)’을 보면 우리가 근무하고 있는 초등학교에서는 교육상 필요한 것은 ‘배우기 싫어도 배워야할 것이 있고, 가르치기 싫어도 가르칠 것이 있다’ 라고 적었었는데 바로 이런 것이 ‘가르치기 싫어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교장) 라고 말씀드렸다.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 라고 하는데 오늘의 대한민국의 공교육의 현황은 이처럼 학교장이 장학활동을 하는 것까지도 일개 교사의 신분으로 반대하고 간섭하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있는데도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할 교육당국에서는 어느 누구도 학교장의 영(令)이 설 수 있도록 교육행정을 뒷받침 해 주지 않고 오히려 학교장의 영(令)이 설 수 없도록 전교조와의 단체협약이 체결되어 배포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정말 이 일을 어이할꼬……
다음날 아침(2004. 4.29)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학교에 등교하고 있었다. 그리고 금년 들어서 거의 없어져가고 있는 국기에 대한 경례하기를 금주에는 어린이회에서 집중적으로 지도하도록 계획되어 있었기에 정문과 후문에서 어린이회장과 부회장어린이가 지도에 임하고 있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지도하는 어린이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럴까?’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 어린이회장과 부회장어린이를 교장실로 불렀다.
“얘들아. 금주에 국기에 대한 경례를 집중적으로 지도 할 줄 알았는데 왜 너희들 활동을 안 하고 있지?"(교장)
“저는 후문에서, 제 친구는 정문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하기를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학선생님이 오셔서 ‘왜 아이들한테 강제적으로 경례하게 만드느냐?’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강제로 하는 것 아니라고 했는데 ‘여기 서 있는 것이 강제가 아니냐?’ 라고 하셔서 못했습니다.” (남자어린이회장)
“저도 어제 교문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지도를 하고 있는데 과학선생님이 오셔서 ‘왜 여기 있느냐?’ 라고 하셔서 못했습니다.”(여자 어린이회장)
정말 교장인 나도 그 선생님의 잘못된, 도저히 교사라고 할 수 없는 그릇된 행위를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인데 아이들이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정말 이일을 어이할꼬……
금학년도에 들어와서 우리 서울용강초등학교에서 전개되고 있는, ‘국기에 대한 경례하기.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왜 그렇게 집착할까?’ 라고 생각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것 까지도 좌절되는 현실에서 또 다른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A 교사가 우리학교에 전입해 와서 늘 하고 있는 말은 ‘어린이 교육을 위해서 학교 예산이 제대로 잘 집행되고 있는가?’ 를 점검해 본다는 것이다. 정말 그분의 뜻대로 어린이 교육을 위해서 라고 한다면, 어린이 신문을 활용한 아침 NIE 학습은 꼭 계속지도가 필요한데, 교사 출근보조부는 교육감과의 합의사항이라고 해서 반드시 없애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어쩔 수 없이 없애기는 했지만 그것이 과연 교육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른 학교에서는 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국기에 대한 경례하기를 계속하지 못하도록 학교의 분위기를 슬금슬금 이끌어가는 행위들도 과연 어린이교육을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학교에 근무하고 계신 모든 선생님이 1년에 한번씩 하고 있는 공개수업을 A 교사는 “내가 왜 공개수업을 하느냐?” 라고 하면서 응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학교의 모든 교사가 학교의 업무분장 하나씩을 위임받아서 추진하고 있는데도 유독 A 교사만은 ‘나몰라라’ 하고 있는 이유는 또 어떻게 설명하려는지?
『물은 흐르지 않고 고여 있으면 썩는다』라는 것은 자연의 이치(理致)이다. 어떻게 했으면 고여 있는 물을 흐르게 할 수는 없을까? 너무나 안타깝고 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우리의 옛 속담이 있는데 우리 서울용강초등학교의 오늘과 같은 시점에서 A 교사라는 잘못된 한사람의 ‘힘의 파워’로부터 이를 극복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교육의 물꼬를 터주기 위해서는 누군가 교장의 뜻에 힘을 실어주고 함께 맞들어 주는 동반자가 계셨으면 좋겠는데……
교장이라는 막중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오늘과 같은 어렵고 힘든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교육자적 리더쉽이 정말 너무나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인데…… 아쉽게도 학교장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오늘의 우리 서울용강초등학교에서 전개되고 있는 너무나도 잘못된 상황들을 올바르고 명쾌하게 처결하지 못하고 있음에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정말 우리를 슬프게 한다.
2004년 4월
서울용강초등학교 소정영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 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나는 그때 힘주어 대답하기 위해,
지금 관심을 가지고 좋은 교육자로 살아가겠습니다.』
2004년 5월
(좋은생각 중에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 볼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라고 적고 있는데 나는 벌써 내 인생에 가을이 찾아 온지 오래됐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와 같은 물음들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반성(反省)과 회한(悔恨)의 념(念)을 함께하면서 이글을 쓰고 있다.
초등교육에 종사해온지 어언 40여년의 연륜(年輪)이 지났는데도, 내가 가르쳤던 사랑하는 제자들이 기대했던 대로 우리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재능(才能)과 특기(特技)를 마음껏 발휘(發揮)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키웠노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모자람이 많은 것 같아 송구한 마음 금할 길 없다.
지금부터 4년전 내가 서울용강초등학교에 부임하면서 우리 선생님들과 함께 다짐했던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인사말을 상기해 보면서 그동안에 있었던 용강에서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존경하는 교감 선생님! 그리고 우리 서울용강초등학교에서 교육의 꿈을 실현하고 계신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우리 서울용강초등학교는 학교의 규모 면에서 크지도 작지도 않는 아주 아담한 학교로서 마포 지구에서는 가장 내실 있는 교육을 실천하고 있는 훌륭한 학교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전통을 만들어가고 계신 선생님들과 함께 근무하게 되었음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초등학교는 지식만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바른 인간을 기르기위해 인성교육(人性敎育)에 큰 비중을 두고 교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학교에서는 학과공부 이외에 바른예절, 질서있는 행동, 청결하고 정리정돈 잘하는 습관, 웃어른을 잘 섬기는 마음, 자기의 몫을 스스로 다 하는 자세 등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사는데 기본이 되는 행동 습관이며 태도를 기르는데 우리의 교육력을 총 결집시켜 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정말 큰 인연(因緣)을 맺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 속에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하루 생활의 대부분을 우리 용강초등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함께 보내고 있으니 얼마나 큰 인연(因緣)으로 만났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똑같은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이지만 사람에게는 만남의 인연만 있는 것이 아니고 헤어짐의 인연, 별리(別離)의 인연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지나간 과거를 생각해보면 똑같이 함께 살았던 동료들 가운데도 어떤 사람은 부지런하고 진실하고 배울 점이 많은 훌륭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그 사람 개개인이……
존경하는 우리 용강초등학교 선생님 여러분!
우리는 용강초등학교라는 하나의 울타리 안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공동 운명체입니다. 늘 활력이 넘치고 늘 보람된 일을 스스로 찾아서 행하시고 성취감을 맛보시며 근무하는 선생님이 되시어, 먼 훗날 선생님의 이름이 선생님과 관계하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추억으로 기억되는 훌륭한 인연이되도록 다함께 노력해 주실 것을 부탁드리면서 인사말을 가름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와 같은 인사말과 함께 시작된 서울용강초등학교에서의 교직생활은 늘 보람과 아쉬움의 연속으로 점철되면서 4년여의 세월이 어느덧 우리 곁을 훌쩍 지나고 있음에 지나간 세월을 반추(反芻)해보면서 아쉬움의 회포(懷抱)를 더듬어 본다.
내가 우리 서울용강초등학교에 부임했던 2000년 9월 1일 날은 토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부임했던 첫째 날은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오전근무시간이 지나가 버렸고 그날부터 시작된 태풍 루사는 서울을 스쳐 동해안에 많은 피해를 남기면서 동해로 물러갔는데, 문제는 월요일아침 출근을 하면서 교문을 들어서니 운동장 서편 스텐드 쪽에 있는 아카시아나무 한 그루가 태풍에 못 이겨 운동장 쪽으로 넘어져 있음을 알고부터 서였다.
“어마나! 이 일을 어떻게 해.”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카시아 나무가 학교담장 밖으로 넘어지지 않고 학교운동장 쪽으로 넘어졌다는데 있었다. 정말 ‘불행중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아~ 그래서 前任 이용주 교장선생님께서 나무들 때문에 신경 좀 써야 할 겁니다.’라고 말씀하셨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로부터 4년이라는 세월이 우리 곁을 스치고 지나간 사이에, 당시로선 학교의 힘으로는 거의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교정(校庭)의 나무들을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전정(剪定)을 할 수 있었고, 낡고 허름한 학교시설물들을 어린이교육에 지장이 없도록 고치고, 만들고, 구입하고를 거듭해오면서 우리가 가르치고 있는 용강의 어린이들이 슬기롭고, 올바르고, 튼튼한 어린이로 자랄 수 있도록 용강초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모든 교직원들이 열심히 그리고 또 열심히 혼신(渾身)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는데……
용 강 동 산
푸른 꿈 높은 꿈 해맑은 꿈을
친구들과 뛰놀면서 꿈꾸는 동산
운동장을 지나서 뒤뜰로 가면
용강의 보금자리 용강동산이
우리들을 손짓하며 반겨 맞는다
곱고 큰 아름드리 동량되라고…
이곳은 우리용강 배움의 전당
굳세거라 바르거라 꿈을 심어준
용강의 보금자리 용강동산이
우리들을 손짓하며 반겨 맞는다
푸른 꿈 높은 꿈 해맑은 꿈을
곱고 큰 아름드리 동량되라고…
글 : 소정영
“푸른 꿈 높은 꿈 해맑은 꿈을, 친구들과 뛰놀면서 꿈꾸는 동산. 운동장을 지나서 뒤뜰로 가면, 용강의 보금자리 용강동산이. 우리들을 손짓하며 반겨 맞는다, 곱고 큰 아름드리 동량되라고……”
라는 시귀(詩句)가 머릿속에 연상되어 영원이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의 동산이, 그리고 꿈이 서린 우리 이린이들의 모교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안데르센 동화집에 ‘우글우글 와글와글 선생과 물방울’이란 이야기처럼 어느 날 우글우글 와글와글 선생이 물웅덩이에서 퍼 온 물방울을 현미경으로 살펴보다가 몇 백, 몇 천이나 되는 작은 생물체들이 서로 물어뜯고, 때리고, 할퀴고, 싸우는 장면을 관찰하다가 싸움질만 하는 물방울을 보다 못한 우글우글 와글와글 선생은, 보고 있던 물방울을 밖으로 내다 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의 내용을 생각해 보면서 요즈음 우리 앞에 전개되는 자화상(自畵像)을 되새겨 본다.
요즈음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육현장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이라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가르치는 본업에는 슬금슬금 하면서도 이러쿵저러쿵 그럴듯하게 말만 앞세우는 잘못된 선생님 한 두 사람이 아직도 우리주변에 공존하고 있음을 통탄하면서도 올바르고 명쾌하게 학교장으로서의 리더쉽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교육현실에 정말 이 일을 어이할꼬……
숲이 아름다운 것은 숲의 구성원들이 다른 생물을 해쳐가면서까지 나만 살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더불어 살아가며 도움을 주기 때문이리라!
우리도 숲 속에서 살고 있는 나무들처럼, 단순한 직업인이 아닌 겨레의 스승으로서 지금 내가 가르치고 있는 사랑하는 내 제자들이 선진국 어느 나라 아이들보다 바르고, 곱고, 슬기롭게 자라도록 교사로서의 역할(役割)을 충실히 해서, 내가 맡은 어린이들을 지도하는데 있어서는 페스탈로찌 적인 사명감을 갖고 열(熱)과 성(誠)을 다하여 어린이들에게는 훌륭한 스승님으로, 학부모님들께는 다시 모시고 싶은 훌륭한 선생님으로, 동료교사들로부터는 잊혀지지 않는 본받고 싶은 선생님으로 오래오래 각인(刻印)될 수 있는 선생님이 되시도록 돕고 또 도와드려야겠는데……
“허준이 부럽습니다. 유의태가 부럽습니다.
스승의 말씀을 하늘의 소리처럼
받아 섬기던 제자가 있었습니다.
꾸짖으시면 온종일 꿇어앉아 빌고
스승님의 분부라면 어떤 어려움이나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던 이가 있었습니다.
스승 또한 보통 어른이 아니었지요.
오로지 태도와 실력만을 기준으로
아들 대신 제자의 손을 들어 줍니다.
죽음에 이르러서는 제자의 공부를 위해
자신의 몸까지 선뜻 내어놓고 떠나갑니다.
그렇습니다. 몇 년 전
우리 모두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던
드라마 『허 준』이야기 입니다.
여러 가지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워 큰 감동을 남겼지요.
그 가운데서도 스승 ‘유의태’와
제자 ‘허 준’이 서로 사랑하고 공경하는 모습은
실로 아름답고 또 아름다웠습니다.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면서
평가절하(平價切下)하진 맙시다.
설사, 거짓이라 해도 믿고 싶고
꾸며졌다 해도 고스란히 본받고 싶은
이야기이니까요.
솔직히, 그 주인공이 부러운 요즘입니다.
‘허 준’이 되고 싶고 ‘유의태’가 되고 싶은
오늘입니다.”
2004. 5.10날 아침 지하철역에서 무료로 배포된 아침 신문‘THE DAILY FOCUS’ 1면에 게재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글인데, 요즈음 우리사회에 만연된 잘못된 교육풍토를 있는 그대로 지적해 주면서도 스승과 제자 사이의 참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함을 느낀다. 그리고 이미 가을을 맞고 있는 내 인생에서 나는 나에게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자신 있게 묻지 못 할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다.
대장장이가 쇠붙이를 가지고 불에 달구고 망치로 두들겨서 연장(鍊匠)을 만들고, 또 쇠붙이를 강하게 만들고자 하면 불에 달궈진 쇠붙이를 빠르게 물속에 넣었다 빼고, 반대로 강한 쇠붙이를 연하게 만들고 싶으면 서서히 물속에 넣어 식힌 것처럼, 교육도 이와 다를 바 없는 이치(理致)가 아닌가 싶다. 대장장이가 훌륭한 연장(鍊匠)을 만들기 위해서는 구슬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들이 맡고 있는 어린이들이 훌륭한 인격체로 성장 할 수 있도록 교육하기 위해서는 대장장이가 연장을 만들 때에 흘린 땀방울보다 몇십배 몇백배의 정열과 교육자적인 혼신의 노력이 필요한데도 오늘의 우리나라의 초등교육의 현황은 이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있어 보이니⋯
2004년 5월
서울용강초등학교 소정영
서울용강초등학교 학부모님께!
존경하는 서울용강초등학교 학부모님! 그리고 용강의 어린이 교육을 위해서 늘 노심초사(勞心焦思)하시면서 성원해주고 계신 지역사회 어르신님께 인사 올립니다.
금년 여름은 유난히도 폭염이 계속되더니 벌써 아침저녁으론 서늘한 가을바람이 감돌아 옷깃을 여미게 하는 이때에 존경하는 용강초등학교 학부모님! 늘 건안 하시옵길 진심으로 소망 드립니다.
제가 우리 서울용강초등학교에 와서 사랑하는 어린이들과함께 존경하는 학부모님들과 인연(因緣)을 맺었던 때는 지금부터 4년전, 그러니까 2000. 9.1일자로 서울특별시 교육청의 인사발령에 의해서 용강의 어린이들에게 작은 밀알이 되겠노라는 청운의 꿈을 품고 부임(赴任)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4년이라는 짧지 않는 세월의 터널이 드리워져 있음에 이제다시 그동안 정들었던 우리 용강의 어린이들과 학부모님들께 석별(惜別)의 아쉬움을 말씀드려야하는 시점에 와 있음을 감히 전해 올립니다.
아뢰올 말씀은 2004.9.1일자로 서울시교육청의 인사발령에 의하여 서울홍제초등학교로 자리를 옮기에 되었습니다.
막상 내일 모래부터 우리 용강초등학교가 아닌 다른 초등학교로 출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회자정리(會者定離:만나면 반드시 해어질 때가 온다) 라는 조물주의 섭리(攝理)를 모르는바 아니지만 너무나 아쉽고 서운한 감정에 할말을 잃습니다.
제가 우리 용강초등학교와 인연(因緣)을 맺기 시작한때는 지하철 6호선이 개통되기 직전 이였었는데 용강초등학교에 부임하자마자 태풍 루사가 80여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용강초등학교를 강타하고 동해로 빠져나가면서 동해안에 많은 피해를 남기기도 했는데 그때 태풍 루사의 피해로 운동장서쪽 스탠드쪽에 있는 아카시아나무 한그루와 푸라다나스 한그루가 태풍을 못 이겨 운동장 쪽으로 넘어져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오랜 연륜(年輪)을 가진 교정(校庭)의 나무들이 넘어지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어딘지 많은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용강의 교육환경을 어린이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즐겁게 뛰노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만들어주기 위해 불철주야(不撤晝夜) 고심해 왔었습니다. 다행히 많은 학부모님들의 열렬한 성원과 대다수의 학교 선생님들께서 학교장을 중심으로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셔서 어렵고 힘든 일들을 대과(大過)없이 그런대로 잘 진행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우리 용강초등학교 학부모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제가 우리 용강초등학교에 와서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고 하는 우리의 용강교육을 바르고 내실(內實) 있게 추진하려고 노력하면서 21세기를 이끌어갈 지(智), 기(技), 덕(德), 체(體)를 겸비한 민주시민을 기르는데 최선을 다해온 결과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 용강초등학교가 속해있는 마포지구 10개 초등학교 중에서 학교운영이 가장 내실 있게 운영되고 있다는 서부교육청 장학사님들의 칭찬의 말씀을 받아오곤 했었는데⋯⋯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능가할 수 없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더욱이 가소성(可塑性)이 가장 높은 초등학교 시절은 인사 잘하고, 부지런히 노력하고, 자기 주변을 스스로 깨끗이 청소하고, 이웃과 더불어 오순도순 잘 지낼 수 있는, 인성교육(人性敎育)이 바로 되고 기본생활습관이 몸에 베일 수 있도록 우리 선생님들께서 몸소 실천하시면서, 동일시(同一視)의 대상으로서의 본(本)을 보여 주시면서 가르칠 수 있는 학교의 학습 분위기가 조성되도록 정말 많은 노력을 해 왔었는데⋯⋯
그러나 질 높은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교육의 주체(主體)인 교사와 학부모와 학생 모두가 심기일전(心機一轉)하고 의기투합(意氣投合)하여 학교현장에서의 교육활동이 정말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학교장으로써의 리더쉽을 명쾌하게 발휘하는 교장선생님이 되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하고 아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제가 용강에서 재직했던 지난 4년동안 우리 용강의 대부분의 학부모님들과 학부모단체 임원님들, 학교운영위원회 위원님들께서 보다 질 높은 교육활동이 이루어지도록 많은 격려와 후원을 해 주셨는데도 학부모님들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副應)하지 못했음을 사죄드리면서⋯⋯
제가 이루지 못한 교육의 꿈이 꼭 이루어질 수 있도록 더 많은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셔서 우리 용강의 모든 어린이들이,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수도 서울의 초등교육이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어 우리 어린이들 모두가 밝고 알찬 꿈나무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4. 8. 30
서울용강초등학교를 떠나면서 소정영 드림
용강을 떠나면서
교문을 들어서면 은행나무 숲
그 숲길 걷다보면 넓은 운동장
오순도순 얘기하며 지나다보면
아담하고 듬직한 용강초교가
아이들의 보금자리 되겠노라고
말없이 반겨주며 나를 맞는다.
'학교사랑 나라사랑' 낯익은 글귀
그 글귀 바라보며 지난 세월이
어느덧 나도 몰래 흐르고 흘러
이루고 보여주고 하려고 했던
소박한 소망들을 뒤로 미룬체
용강의 그 교정을 떠나갑니다.
글 : 소 정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