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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커있는 여자
토요일 오후 내가 퇴근하기 위해 책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전화 벨소리가 텅빈 사무실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동료 철재 씨가 있었지만 그는 헤드폰을 낀 채 흥얼거리고 있어서 내가 수화기를 집어 들 수밖에 없었다.
"윤석 선배님 잠깐만 내려 와보세요."
"응, 왜?"
"왜는 일본이 왜구요. 일단 와봐보세요. "
혜진의 전화였다. 나는 혜진의 끝마디 '내려와봐보세요.'를 생각하며 잠시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다. 혜진이 특유의 말버릇 중에 하나였다. 어쨌든 혜진으로 부터의 호출은 나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게 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혜진의 호출에 대한 진의 파악에 부심했다. 오랫동안 연락을 않고 있다가 일방적으로 전화해서는 또 그렇게 끊어버린 것이다.
혜진이는 6개월전만해도 같은 부서에서 일했으나 계열사의 신설 부서로 발령이 나면서 나와는 연락이 뜸했던 후배로 생기발랄한 모습에 항상 상냥한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윤석 씨 방금 전화온 게 혜진이 맞죠? "
"네. 철재 씨가 어떻게? "
"아, 아까 은행가다가 만났는데 윤석 씨 안부를 묻더라구요. "
철재 씨도 전화 벨소리를 못들은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 벽쪽에 붙어있는 시계를 쳐다봤다. 시간은 오후3시35분으로 치닫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들고서 사무실 입구 쪽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철재 씨 등뒤로 가서 툭툭치며,
"찬제 씨 먼저 퇴근할게요. 즐거운 주말! "
나는 언제나 하는 버릇처럼 손가락 두 개를 곧게 펴서 원을 그리며 인사를 하고서 사무실을 나섰다. 나는 사무실 문 밖에 있는 커피자판기 앞을 지나다가 다시 돌아와 멈춰섰다. 바지주머니를 뒤적거려서 동전을 찾아내어 투입구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점자를 만지 듯 왔다갔다하다가 문득 블랙커피에 힘주어 눌렀다. 평소 같았으면 밀크커피를 선택했지만 오늘은 생각과 감정을 바꿔보자는 의미에서 새로운 선택을 했다. 커피광고에 나오는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일에 대해선 항상 최고를 추구하지만 커피만큼은 한가지를 선택해서 마신다고, 내심정이 지금은 그 여자와 궤를 달리하고 있음을 느꼈다. 창조적인 아이템 개발에 두뇌를 많이 쓰는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여러 가지로 선택하라는 말이 떠올랐다. 같은 버스, 골목을 지나다보면 생각에 더 이상 발전이 없다는 일본의 어느 광고인의 말이 떠올랐다. 커피 한 잔 마시는 지금에 와서 그 말이 왜 떠올랐는지 내조차도 몰랐다. 나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가는 현대인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평범한 말이라고 단정하고서 창조적 두뇌의 사용 여부에 상관없이 누구나 평범함보다는 비범함이라는 무의식을 가지고 있을것이란 생각을 해버림으로써 편안함을 되찾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퇴근해서 집으로 바로 가지않고 누군가를 만나거나 어디라도 들러서 가야 마음이 안정되는 이유를 알 것 같다는 식으로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떡거렸다.
혜진의 사무실은 별관건물2층에 있었다. 계열사이다 보니 같은 건물을 사용하지만 불편한 점은 없지않아 있었다. 이를테면 총무과 같은 경우에는 내가 있는 5층 홍보부에서 1층으로 내려와서 몇 걸음 옮긴 뒤 다시 별관2층으로 올라가야 업무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아동완구를 제조하여 일본으로 수출하고 있으며 혜진이가 근무하는 계열사의 경우는 일본의 원작만화를 수입하여 국내에 번역, 편집하여 출판까지 맡고 있는 출판사이었다.
어느새 혜진의 사무실 앞에 서있음을 느꼈다. 나는 헛기침을 몇 번하고 목을 가다듬고서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나는 문을 살짝 열었다. 안에는 혜진이만 덩그라니 앉아 있었다.
"어머! 선배님, 오랜만이네요. "
"응, 잘 지냈니? "
"네, 덕분에, 여기 앉으세요. "
혜진은 여전히 생기발랄해 보였다. 나는 그녀를 볼때마다 칠흑같은 어두운 밤하늘에 떠있는 혜성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활기를 느끼곤 했다.
"선배님! 짜증안나세요. 즐거운 주말을 혼자 보내려니. "
"짜증? 이래봬도 나대로 재미있게 지내고 있다. "
"거짓말 마세요. 늘 혼자이던데, "
"뭐! 너 날 몰래보고 있었냐? "
"그게 아니라요. 선배님, 일하다가 갑갑하면 한번씩 회사 정문을 가끔 응시하다보면 어떤때 퇴근하시는 모습을 볼 때가 있는데 초라해보이고 왜소하게 느껴질 때가...., "
"니가 그런 것까지 다보고 있었다니. 이럴줄 알았다면 아무 아가씨 팔짱이라도 끼고 당당하게 걸을걸 그랬구나. "
"선배님 그래서 하는 말인데 오늘 시간 있으세요? "
혜진이는 언제나 빛나는 눈과 빨간 입술로서 상대방의 표정과 기분을 읽어내는 재주를 가진 소녀같이 보였다. 거기다가 밝은 미소까지 더하면 〈모나리자〉의 미소조차 비교되지 못할만큼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것이 2년전 혜진이가 입사할 때 보았던 첫인상 그대로였다.
"응, 친구 자취방에 시간나면 가기로 했어, 왜 예쁜 여자 하나 소개시켜 줄라고? "
"어머, 윤석 선배님은 바로 맞추니까 재미없다. "
"진짜니? "
"사실은 요. 저쪽 자리에 앉은 언니가 있는데 지난주에 은근히 물어봤어요. 착하고 좋은 선배님이 있는데 한번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그랬더니 별로 싫은 표정이 아니더라고요. "
"그래서? "
혜진은 더욱 신이나서인지 짜여진 대사처럼 말을 뱉어 놓았다.
"오늘로 정해놓고 염치불구하고 전격적으로 선배님한테 통보 드리는 거예요."
나는 뜻밖에 전해들은 혜진이로부터의 소개팅 제안이 다소 황당했지만 한편으로 아주 반갑게 들였다.
"그래 좋아, 혜진이가 소개시켜 주는데.... "
"근데 선배님, 좋거나 싫더라도 너무 표시내고 그러면 안돼요. 알았죠. 먼저 나가 있어요. 지금 전화해서 장소를 정할테니까요. "
나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혜진이의 사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하릴없이 8층짜리 회사 본관과 5층짜리 계열사가 입주해있는 별관건물을 바라보다가 햇빛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눈을 감고서 고개를 내렸다. 5월의 햇살이 강하다고 노래나 싯구절에서 익히 듣고 보아왔지만 이토록 강할 수 있을까. 나는 언젠가 읽었던 소설 하나가 불현듯 떠올랐다. 햇빛을 가렸다고 사람을 살해했다는 그 실존주의 소설, 근원적인 부조리.
"선배님 됐어요. "
혜진이가 핸드백을 어깨에 걸친 채 꽁꽁 뛰듯이 정문으로 내려왔다.
"그래, 어디로 가면 되니? "
"종로3가에서 5시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시간은 넉넉해요. "
나는 손목시계를 보고서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은 오후4시1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회사에서 지금 출발한다고해도 소요시간이 20분이니까 넉넉잡고 4시40분 그러면 20분이 남는데 어떻게 보낼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혜진아 오락실에 갈래? "
"어이구 오락은 무슨, 밥사줘요. "
"밥! 저녁을 벌써 먹는단 말이야. "
"저녁? 전 아직 점심도 못먹었단 말예요. "
나는 어린애 달래 듯이 혜진이의 등을 밀며 회사 왼쪽으로 나가서 꺽어진 골목 첫 번째 집에 들어갔다. 나는 혜진이가 밥을 먹는 동안 신문과 시계를 보다가 하면서 아주 초조한 모습을 보였다. 보리차를 들이키고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어 불을 붙였다. 그리고 달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는 달력 속의 날짜 하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혜진아, 근데 나한테도 정보 좀 주라. "
"정보는 무슨?"
"니가 나를 소개시켜준다고 그 언니란 사람한테 말할 때 몇마디라도 던졌을 것 아니냐? 그러니...., "
"그만 됐어요. 모르고 하는데 오히려 재밌잖아요, 얼굴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
"하긴 그래. 옛날에는 얼굴도 안보고 결혼해서 첫날밤을 보냈다는 얘기가 있지. "
나는 혜진으로부터 정보 얻기를 체념하고 전철에서 내려 커피숍인 약속장소를 행했다. 그 커피숍은 물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아주 은은한 분위기를 느꼈다. 우선 수십 개의 장식용 조명이 아주 빛나고 있었고 고전주의 풍으로 장식을 해놓은게 그랬고 가운데 웅장하게 매달려 있는 샹들리에와 아래쪽의 4명의 천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물줄기는 아주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서면서 좋은 장소 하나 알면서 또 하나는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성공적인 만남으로 이어지면 나중에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이 남는 장소로 기억되겠지만 만약 그렇기 못할 경우에는 씁쓸한 기억과 함께 쓰라린 장소로 영원히 남을 것이 아닌가.
"혜진아, 여기야! "
내가 혜진이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는데 앞에서 누군가가 손을 들어 소리쳤다. 나는 그 손끝을 따라 시선을 재빨리 옮겼다. 하지만 앉아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내지 못했다. 금방 손을 내려버려서인지 손가락마디 하나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하필 좌석이 놓여져 있는 곳에서 어두운 조명이 깔려있어서 그런지 전방2~3미터 사람의 잘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선배님, 아까 이야기한 주의사항 명심하고 있죠."
"그래 염려마. "
혜진이는 마치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를 다루듯 몇 번이고 주의주는 것을 잊지않았다. 주의를 받고나면 나역시도 그만만큼 조심스런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언니, 먼저 와있었네. "
"지하철을 탔더니 금방이네. "
"아까 최부장이 불러서 뭐라 그러디? "
혜진이와 그녀는 한동안 회사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마주앉은 두여자만의 대화에 시선 둘 바를 몰라 냉수만 마시고 있었다.
잠시후 혜진이는 목을 가다듬고서 화제를 내 쪽으로 돌렸다. 나는 숨막히는 고통 속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후련함을 느꼈다.
"선배님 미안해요. 아까 좀 좋지않은 일이 있어서...., 언니! 그 경상도사나이가 이분이야 인사해. "
"네. 안녕하세요. 이영미라 해요. "
"처음 뵙겠습니다. 한윤석이라 합니다. "
나는 영미와의 통성명을 간단하게 끝내고 2라운드에 접어들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우선 무슨 말을 어떻게 어느 시기에 해야 처음 만난 여성에게 점수를 딸 수있을 것인가 하고 고민을 했다.
"선배님 뭐하세요. 말씀도 안하시고. "
"혜진이로부터 눈 깜빡거림의 1차경고가 주어졌다. 나는 대뜸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원래 말씀이 없으신 분 인가봐요. "
거기다가 영미로부터'공격'을 받고서야 나는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랑 편안하게 말씀 나누세요. "
"혜진아, 경상도사람이 그런거 아니니? "
영미 한테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나서도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아 너무나 답답해하는 나자신을 느꼈다.
"혜진이 한테 듣기로는 전에 같은 회사에 있었다면서요? "
"네. 홍보부에 있습니다. "
"1년6개월을 같이 있다가 혜진이가 출판부로 옮겼죠. "
영미가 참지못한 듯 말문을 열어왔고 혜진이가 꼬집는 것을 신호탄으로 2차경고가 날라왔다. 축구경기 같았으면 벌써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당할 판이었다.
"저희가 이번에 어린이만화잡지를 창간해요. 수입한 일본만화를 번역에서 출판까지 맡아하고 있어요. "
"편집? 따분하지 않습니까?"
"따분요? 조금 그래요. 사실 편지이란 게 하루 웬종일 책상에 앉아서 가위로 오려 풀로 붙이고.... 그러다보니. "
나는 막상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렇게 쉽게 대화가 되는구나 하는 자신감을 갖고서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이러자 이번에는 혜진이가 따분함을 느끼는 듯 입을 가린 채 하품을 했다.
"혜진아, 영미랑 같이 호프 한 잔하러 가자. "
"선배님은 언니가 맥주를 마시는지 못마시는지 알고서 그래요?"
나는 혜진의 반응에 의외로 놀랐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러한 것이 예의라는 것을 가르쳐주려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혜진에게 미소로 대답했다.
"염려 마세요. 저 술 잘 마시니까요. "
나는 월요일 아침에 아주 산뜻한 기분으로 일찍 출근했다. 토요일의 테이트의 기억이 아무래도 아직까지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사무실에는 여전히 철재 씨만이 덩그라니 앉아 있을 뿐 다른 직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철재 씨가 토요일 오후부터 지금까지 꿈적도 하지않고 있는 것만 같아 소름이 끼쳤다. 출근시간이 20분 정도 남아있어서인지 어쩌면 다른 직원이 보이지 않는 그 자체가 오히려 좋게 받아 들여졌다. 왜냐하면 철재 씨는 서울 태생이면서도 부산에서 올라온 나하고 입사동기로 회사 내에서 마음맞는 몇 안되는 동료 중에 한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전에 회사를 다니다 와서 경력사원으로 들어와 나이는 나보다 두 살 많았지만 언제나 친구처럼 지낼 정도로 친하게 지내왔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
"윤석 씨 무슨 기분좋은 일 있나보죠? "
"커피나 한 잔합시다. "
"좋아요. "
두사람은 자판기 앞에 섰다.
"주말에 재미좋은 일 있었던 모양이죠? "
"혜진이가 소개팅을 시켜주던데요. "
"어이 미팅요? 나보고는 애인있다고 말도 안꺼내더니, "
"예고도 없이 미리 약속을 해놓아 한번 만나본 것뿐이예요. "
"잘해보세요. "
"잘해보나마나 저자신이 어려운 처지란 걸 잘아시잖아요. "
"지난번 월급날 술자리에서 했던 이야기 말이죠? "
"다른 살길을 찾아볼까 하는데 혜진이가 좋은 만남의 자리를 만들어 오히려 부담스러울 지경이에요. "
나는 출근했을 당시의 기분보다는 다소 가라앉은 지금의 분위기를 읽어볼 수 있었다. 종이컵에 녹아있는 커피가 쓰다는 느낌이 들었다. 설탕의 양이 적어서라기 보다는 지금 내가 내뱉고 있는 말 자체가 소태껍질 그 자체였던 셈이다.
"윤석 씨가 잘 생각해요. 옆에서 한마디 해주는 것이 중요할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게 나을 것입니다. 어차피 여자문제는 그 다음으로 생각하더라도. "
"어쩌면 여자문제나 거취문제를 너무 어정쩡하게 하지않나 생각해요. 미팅시켜 준다고 했을 때 그냥 싫다고 거절하면 될 것을...., "
"뭐 그렇다고 학대할 것까지는 없고. "
나는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었다.
"윤석 씨! 아침부터 노니닥거리고 있어요? 일찍 왔으면 회의준비나 할 것이지. "
완구수출과 박과장이었다. 그는 코 옆에 붙어있는 사마귀가 유난히 크게 보였는데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심술사마귀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박과장이 들어가고 나서 윤석 씨와 나는 얼굴을 마주보다가 어쩔도리 없다는 제스처를 하고는 담배를 다시 집어넣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날 저녁에 퇴근하고 나서 토요일에 찾지 못했던 자취하고 있는 대학 동기한테 가보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30분을 소요해서 겨우 자취방에 당도할 수 있었다. 광고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친구 석근이와는 서로 어렵고 힘들 때 만나서 위로를 주고받고 했다. 그나마 서울에서 고민을 호소할 유일한 친구인 것이다. 그전에는 나만의 고충을 배경이 다른 회사 동료 몇몇과 술을 마셔가며 하소연하며 끝내 홀로 부르짖음으로 끝나버린곤 했던 것이 전부였다. 나는 상경해서 사촌누나집에서 하숙생활을 하고 있지만 석근이는 줄곧 혼자 자취를 해오고 있었다.
"석근아 형님 왔다. "
내가 부엌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석근의 자세는 움직이지 않는 동상 그 자체였다. 석근이는 짧은 바지에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서 이불을 베개삼아 TV앞으로 다리를 쭉뻗어 눈을 내리깐 채 브라운관을 주시하고 있었다. 더 이상의 편안한 자세가 없어 보일 정도로 안정되어 보였다. 나는 가만히 한쪽에 앉아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뿐 더 이상의 말이나 행동은 삼갔다. 석근이와 대학에서 수년을 같이 지내오면서 겪어왔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석근을 부를 때마다 나자신을ꡐ형님ꡑ이라 했지만 거부를 하지않고 늘 그러한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윤석이 왔네. "
"사람이 왔으면 아는 체 좀 해라. 뭐가 그리 재밌나? "
"토요일에 비디오 빌려 겨우 다봐가는데.... 임마! 조금 늦게오지. "
"얼씨구 비디오 때문에 살인사건 나겠네. "
"그래 너거 회사는 어떻냐? "
석근은 큰 눈을 느리게 끔뻑거리며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불만이야 많지만 하루하루 웃으며 지내려고 애쓰지. "
"그래. 나도 마찬가지다 조금 더하고 덜하다는 것뿐이지. "
"참는 김에 조금만 기다려봐라. "
석근이는 누운 채 눈을 내리깔고서 입만 달싹거리고 있었다.
"부산에 있는 회사에 원서 한 군데 넣어놓았는데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솔직히. "
석근은 갑자기 일어나 TV와 VTR을 차례로 끄더니 옷을 줏어입기 시작했다.
"나가자 한잔하러. "
나는 순간적으로 변한 그의 자세에 놀라며 일언반구의 저항도 못하고 그냥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가는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를 그였기에 일단 따라 나서기로 했다.
"종현이 한테 한번 연락해볼까? "
옷을 챙겨입고 나가서 석근이가 내뱉은 말이다. 석근이와 종현이는 대학에서ꡐ팝스&오디오ꡑ동아리 선후배로 얼마전에 취업해서 서울에 올라왔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바 있었다.
"휴대폰 한번 해봐라. "
"퇴근해서 집에서 뭐하냐? 지금 봉천사거리 그 집으로 나와라."
석근이와 나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봉천사거리에 있는 삼겹살구이 집으로 들어갔다. 소주2병과 삼겹살3인분을 시켰다.
"굶지않고 사는 건 만해도 다행이다라는 안이한 생각까지 든다. "
"객지에서 하는 직장생활이 다그렇지 뭐. 스트레스와 긴장의 연속. "
"월급은 쥐꼬리만큼 쥐어주면서 구조조정이란 말을 남발하고...., "
한 잔 술에 취기가 오른 두사람은 방금 말문이 터진 벙어리 마냥 말들의 잔치가 이어졌다.
"야, 입맛이 살살 도네요. "
소주 한 병을 비울 즈음 종현이가 나타났다. 종현은 오토바이를 타고 왔는지 헬멧을 음식점 안으로 들고 들어왔다.
"이 자식이 선밸 봤으면 인사부터 안하고 니 눈에 돼지고기 밖에 안보이냐? "
"아, 미안하요. 그동안 잘지냈소. 막 쌀 씻으려고 하는데 전화가 와서 어찌나 반갑던지. "
"종현아 오토바이는 웬만하면 타고 다니지 말아라. 위험하잖니? "
"방금도 50cc로 한강다리를 건넜다는 거 아닙니까? "
돼지 굽는데에서 나오는 연기에 몇 번씩 기침을 하다가 나는 목구멍까지 따가워서 냉수 몇 잔을 들이키며 속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몇 인분의 고기가 추가로 주문되어 나오고 거기다가 소주와 음료수까지 더해서 풍성한 진수성찬이 되었다. 모두들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변했다.
"종현이 너 오토바이 놔두고 가야 되겠네. "
"그러죠 뭐, 그런 의미에서 자 한 잔 합시다. "
"석근아, 여자 소개받았었다. "
"뭐! 거취문제가 어쩌구저쩌구하더니 여자를.... "
나는 취기가 올라서인지 지난주 토요일 오후에 소개받았던 '미경'씨에 대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놓으며 감회를 내뱉기 시작했다.
"선배님, 그날 두사람 호프집에서 나와 어디 갔었어요? "
"응, 영미 씨가 말안하던? "
"언닌 그런 얘기 잘안해요. "
"그럼 나도 하면 안되겠네. "
"벌써부터 따돌리시기예요? "
미팅이 있고 난 그 다음주 화요일 점심시간 식당에서 만난 혜진이는 궁금한 점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지난일에 대한ꡐ보고ꡑ가 싫었지만 혜진이의 집요하고 끈질긴 질문공세에 순순히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호프집에 나와보니 주머니가 비었더라. 그래서 그냥 가기 섭섭해서 커피 한 잔 더했지. 얻어 마시자는 심뽀도 있었지 뭐. "
"배짱을 내밀었나보죠. 그럼 영미언니 집에도 못데려다 줬겠네요."
나는 그날의 기억이 너무나 맑고 선명하게 기억이 피부 속으로 스며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영미와의 만남을 가지고 나오며 나 스스로 패배자라는 생각을 했던 이유를 알지 못한다. 적어도 그 과정은 모르더라도 내가 패배자라고 정의를 내린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기억이 또렷하다. 그 또렷한 기억이 지금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3시간을 같이 보냈지만 나자신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고 혼란스러운 일상에 대한 한마디도 꺼내보지 못하고 멍하니 헤어져 버렸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 옷자락을 잡고서 하소연하려는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만. 그만큼 허상을 감춰둔 채 허울좋게 타인에게 잘 보이고 선전하려 했다는 자체가 나를 점점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 혜진이를 만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의 영혼은 구천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좋으면 차라도 한 잔하자고 데이트 신청도 하고 그러세요. 혜진이를 봐서라도. "
혜진은 무언가의 확답이 필요한 듯ꡐ데이트신청ꡑ이란 말에 억양을 넣고서 식당을 나오자마자 쏜살같이 회사 정문으로 달려갔다.
나는 곧바로 사무실로 들어갔다. 일에 푹 빠진 듯한 직원 몇몇이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나는 직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책상에 앉았다. 일이 쉽게 손에 잡히지 않았다. 두손을 깍지 낀 채 멍하니 앞쪽 벽을 주시했다. 내책상 앞쪽 벽에 있는 낡고 허름한 시계를 주시했다. 어느 고물인생 하나가 고물시계를 보며 위안을 삼지만 그 자체도 어쩌면 엉터리로 시계바늘이 움직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다. 값비싼 시계이든 그렇지 않든 시간은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란 생각뿐.
"윤석 씨! 몇 번씩이나 불렀는 지 알아요? 전화받아보세요."
나는 미스 전의 독촉을 받고서야 정신을 가다듬고 수화기를 들었다.
퇴근시간을 에누리없이 맞춰서 나온 나는 회사 길 건너편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20분을 넘게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않아 나는 제과점 옆 통로 계단에 안장 담배를 꺼내 한 대 물었다. 그리고 신속한 동작으로 담뱃불을 붙였다. 밤하늘에 희뿌옇게 담배연기가 퍼지는 모양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인 나머지 황홀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흡사 행위예술의 세계에서나 봄직한 말라비틀어진 나무의 형상화 같기도 했다. 그런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뭇사람들은 건강을 해친다는 고정관념 덕분에 담배연기를 싫어한다.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사악한 회색빛깔의 연기의 군무를.
"안녕하세요? "
영미였다. 쪼그리고 앉은 모습이 형편없이 보였을 법한데 나를 먼저 발견한 것이다.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켜 세우고 담뱃불을 꺼서 휴지통을 향해 던졌다.
"오늘은 일찍 마쳤나 보죠. "
"네 일본어학원에 다니고 있어요. 윤석 씨는 어디 가세요?"
"친구랑 약속이 있어 오늘은 좀 일찍 마무리하고 나왔어요. "
"약속이 만사를 해결한다 주의이군요. 그거 좋네요. "
"일본어 번역을 맡는다고 하더니 잘됐네요. 근데 자라는 아동한테 꼭 왜색문화를 심어줘서 어떡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네요. '아기공룡둘리'나 '달려라하니', '영심이'같은 우리 정서에 맞는 만화를 많이 창작, 개발하면 좋을텐데.... "
"회사 방침이 그러니.... "
나는 괜히 말을 꺼내놓고서 쑥스러워 했다. 나름대로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왔던 이야기를 하필 이런 자리에서 말할 필요는 없을 듯 싶었는데.
"영미 씨 다음주에 한번 만나요. "
"네, 그래요. 연락주세요. "
영미는 가벼운 목례를 하고 기다리던 버스가 오자 올라타고 떠났다. 영미를 태운 버스의 뒷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혹시 안에서 손이라도 흔들면 같이 해줘야 된다는 의무감에서 그녀가 자리에 앉은 모습까지 시선을 주시했다. 버스가 출발해서 시선 밖에 까지 나가자 그제야 나는 대작을 끝낸 영화감독 마냥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숨을 내쉬자말자 이번에는 30분을 기다린 끝에 내가 타고가야할 버스가 앞에 섰다. 나는 버스에 오르면서 그녀의 뒤를 쫓아간다는 생각과 환상에 사로잡혀 한동안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다음날 점심시간. 나는 비교적 일찍 식사를 마치고 책상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신문을 가지런히 접어놓고서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누워 상념에 잠겼다. 어제 저녁 밤늦도록 마신 술로 인한 숙취가 덜 풀려서인지 나는 가끔씩 배를 어루만지며 속을 달래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책상서랍을 열어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손으로 책상 위로 더듬다가 라이터를 찾아 불을 붙였다. 그리고 담배 한 모금을 깊숙이 빨아 당겼다. 어제 저녁 버스정류소에서 보았던 담배연기와 흡사한 것이 아주 자유롭게 사무실 천장 위로 퍼졌다. 나는 담배연기가 천장에 얇게 붙어서 번져가는 모습을 신기한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사무실의 창문이 한 두개라도 열렸더라면 이렇게 슬로모션으로 연기의 부활을 지켜볼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서 이번에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윤석 씨 담배 좀 바깥에 나가서 피우면 안되요?"
"아 미안해요. 깜빡했네. "
식사를 마치고 금방 들어온 입사후배 미스 안의 다그치는 소리에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박과장은 수출바이어 상담관계로 외근을 나가 코쭝배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호랑이 없는 굴에서 잠시나마 임자노릇하는 늑대같은 존재라 할까. 하지만 지금은 호랑이가 잘 키워 놓은 여우한테 쫓겨나는 신세가 되다보니 처량하게 느껴졌다.
"식사하러 어디 갔었어요? 혜진이랑 같이 갈려고 찾아봤었는데 "
철재 씨였다. 옆에 혜진이와 팔짱을 끼다시피 붙어 있었다.
"속이 쓰려 해장국 한그릇하느라 혼자...., "
"뭐하러 오다뇨? 선배님 커피 한 잔 안 뽑아 주실 거예요? "
나는 혜진이의 저돌적인 언행을 보자면 정말 밝아지고 발랄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몰랐다. 나역시 그 이유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ꡐ야한여자론ꡑ에 동조하다보니 그럴지도 모르겠기에.
"언니 한 번 만나보세요. 부담갖지 말고요. "
그동안 나자신이 영미를 만나지 않은데 대해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싫은신 것 아녜요? "
"혜진아 여자문제보다도 윤석 씨는 ...., "
"찬제 씨 그 얘긴 나중에 합시다. 먼저 갈게요. 참! 혜진아 잘되면 너 옷 한 벌 사줄게 "
나는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는 듯 미소로 마무리 지으며 고개를 돌려 사무실로 들어갔다. 문손잡이를 잡고 기대어 서서 밖에서 밀려오는 심한 불안감과 적막감을 막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문이 왜 안 열리는 거야. 잠갔나? "
밖에서 박과장의 목소리가 거칠게 들려왔다.
"이영미 씨 좀 바꿔주세요. "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난 시간에 나는 큰마음 먹고서 영미의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더 이상 기다리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나서보는 것이 상황극복을 위해 좋다는 것을 떠올렸다.
"전데요. 누구시죠? "
"네 한윤석입니다. "
"어머 오랜만이네요. 전화 목소리로 들으니 낯설게...., "
나는 처음 나누는 전화통화에서 서로 간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시점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였다. 또 이렇게 애써 전화통화를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대화가 연결되지 않음에 역겨움을 느꼈다.
ꡒ오늘 어떠세요. ꡓ
ꡒ좋아요. 회사 길 건너 버스정류소에서 전에 윤석 씨가 쪼그려 앉아 담배 피던 거기에서.ꡓ
나는 영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의외의 가벼운 독설에 적잖게 당황했다. 영미가 독설을 할만큼 나하고 가까워 졌는가. 그렇지 않으면 영미가 나라는 존재를 길거리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 피울 정도로 나약하고 비참한 존재로 밖에 여기지 못했다는 말인가. 단독 첫데이트. 대학 다닐 때 미팅 후 몇 번의 만남 이후 사회생활에서는 처음 이어서인지 긴장과 초조함이 몰려왔다. 약속시간 얼마 전부터 심장의 박동소리가 커지고 맥박이 숨가쁘게 뛰는 이유를 알지 못했으며 업무가 손에 잘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퇴근시간이 되자 쏜살같이 버스정류소로 향했다. 미지에서 오는, 버스에서 내릴 어떤 낯선 사람을 기다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ꡒ조금 늦었죠? 번역이 좀 밀려서.ꡓ
내가 손목시계를 네 번째 들여다보려는 순간 영미가 나타났다. 뛰어온 듯 입에서 입김이 연신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미는 베이지색 한 벌 짜리 정장을 입고서 아주 날렵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나와의 테이트가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미리하고 나온 사람처럼.
ꡒ아름답게 차려입고 나오셨네요. ꡓ
ꡒ지난주에 어머니랑 백화점에서.... 어서 가요. ꡓ
우리는 버스를 타고 충무로에 내려서 극장가를 돌아 다녔다. 공교롭게도 괜찮은 프로가 있었지만 매진이거나 시간이 맞지않아 발걸음을 돌렸다. 종로로 나갈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가 괜한 시간낭비라는 의견에 인식하고 먼저 식사부터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영미가 인도하는 데로 움직였다. 그것은 내자신이 충무로 지리를 잘 모르는데 반해 영미는 골목까지 누비며 음식점을 설명하면서 그것도 모자라 이 건물 저 건물에 대해 유래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아주 빠른 리더를 하며 나를 끌고다니다시피 하면서 거리를 누볐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후 예정된 코스처럼 호프집으로 향했다. 호프집은 200평 이상 될 정도로 넓어 보였고 연말이어서 인지 호프집은 사람들로 시끌벅적해 보였다. 저쪽에서는 생일을 맞은 듯 제과회사 단체 회식이라며 축하음악이 흘러나왔다.
ꡒ과자나 팔고 앉아있지 뭐하러 나왔어? ꡓ
ꡒ네? ꡓ
나는 영미의 독설은 처음 들었다. 못들은 척하고 넘어가려고 했지만 너무나 뚜렷하게 들렸다.
ꡒ여긴 직영점이라 호프 맛이 달리 좋아요.ꡓ
ꡒ흑맥주 한 번 마셔볼까요?ꡓ
ꡒ그러죠 뭐. ꡓ
두사람은 호프 2,000cc와 그녀가 즐겨먹으며 맛이 괜찮다는ꡐ골뱅이무침ꡑ을 시켰다.
ꡒ영화ꡐ서편제ꡑ보셨어요? ꡓ
ꡒ네 지난번에 회사 직원과 단성사에서, ꡓ
그녀는 맨처럼ꡐ영화ꡑ이야기로 소재를 꺼내놓았다.
ꡒ소설가 이청준씨의 원작이라는 건 다아는 이야기이지만 소설이 처음 나올 때에는 〈남도사람>이란 제목으로 5편의 글이 묶어서 나왔죠. 영화 〈서편제〉에서 중반부에 보면 아버지로 나오는 이가 여자아이를 장님으로 만들어 버리죠. 이는 의붓자식이 달아나자 계집아이마저도 자기로부터 달아날 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저지른 일일 수도 있는 사내의 행위가 나오는데....,ꡓ
ꡒ네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이복누이동생이 지니게 되었을 한에 대한 설명으로 볼 수 있죠. 그해 국제영화제에서 이러한 장면으로 인해 서양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았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멀쩡한 사람을 장님으로 만들어 버리는 게 말이죠.ꡓ
ꡒ전 그 영화를 보고 많이 울었어요. 쑥스럽지만, ꡓ
ꡒ감정이 많이 풍부하신 가봐요.ꡓ
영화이야기를 한동안 주고받다가 나는 호프 한 잔으로 건배를 하고 영미에게 그만 일어나서 가자고 했다. 영미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나서 나는 혼자 택시 안에서 명상에 빠진 채 모처럼 평온하게 귀가할 수 있었다. 살아가는 이야기 외에도 우리는 아직 할 말이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한 듯.
나는 그 뒤로도 영미를 몇 번 더 만났다.
점심시간에 같이 식사하러 나갔었고 한번은 과자를 사서 주고 오면서 조그마한 선심공세를 펼쳐 보였다. 그럴 때마다 혜진이는 옆에서 괜히 시기하거나 질투해서 나자신을 당황하게 만들었는데 나중에 알고봤더니 더욱 열심히 행동으로 보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영미와 만나는 순간만큼은 부산으로의 귀향에 대한 결심이 차츰 흐려졌을 뿐 잊혀진 것은 아니었다. 마치 마약을 주사하고 약효가 있는 동안만큼은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어쨌거나 나는 영미에게 고백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귀향하려고 표시해놓은 달력의 한 날짜가 하루하루 카운터다운 되면서 영미를 만나는 그 자체가 나에게 씻을 수 없는 죄악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나는 예상 밖의 일을 당하고 말았다. 영미 씨로부터 약속 제의가 거절당한 것이다. 만나서 나름대로 고백성 대화를 나누며 후일을 기약하려는 의도가 있었지만 그마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ꡒ저, 지금 집이 비어서 나갈 수가 없는데요.ꡓ
ꡒ그럼 제가 지금 집부근으로 갈테니 그냥 잠깐만 나오시면 됩니다.ꡓ
나의 요구는 간절했지만 영미는 막무가내로 거절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결국 나는 전화로 만남의 성사를 위해 끈질기게 외치다가 나중에는 실토를 하고 말았다. 영미는 어디선가 들어서 아는 것 같았지만 전화에서는ꡐ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ꡑ하면서 질타를 해왔다. 그 질타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후 열흘쯤 있다가 나는 회사를 사직하였다. 그리고 영등포역에서 석근이와 후배 종현이의 배웅을 받고 열차에 올라섰다. 그리고 회사 사직하기 며칠 전 혜진이가 전해 준 ꡐ토요일밤부터 일요일새벽까지ꡑ라는 노래가 담긴 테이프를 고이 간직하였다. 종현이가 노래방에서 잘불렀던선물바부산으로 내려갔다. 서울발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 앞에서 그리고 부산에서는 도서관에 다니며 공부를 하며 입사시험을 준비했다. 3개월 후에 철재 씨의 결혼식 연락을 받고 나는 서울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나는 혜진이를 만나 영미의 근황을 물어보았다. 그녀 역시 수개월 내에 결혼을 한다는 이야기와 나한테는 비밀로 해달라는 이야기를 덧붙여 듣게 되었다.
부산에서 입사준비로 한창일 때 예쁜 꽃봉투가 날라 왔었다. 겉봉투에는 발신자 이름이 없어 뜯어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혜진이의 가느다란 글씨였다. 편지를 읽고나서 그 동안의 의문을 어느 정도 풀 수 있었다. 철재 씨가 혜진이에게 나의 고민과 갈등부분을 전달했으며 다시 그이야기가 영미에게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후로 영미는 나를 차츰 좋았던 하나의 추억 속의 인물로 남겨두기로 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던 어느날 조카의 졸업선물로 교양도서 몇 권 사다주기 위해 서점에 들렀다. 고등졸업선물로 많은 고민을 하다가 책을 사주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조카를 위해 책을 고르던 중 나는 어린이 만화잡지에 손이 가고 있음을 알았다. 순수창작 만화잡지로 정평이 나있는 〈만화천국〉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몇 장 뒤적거리다가 뒷표지 쪽을 보게 되었다.ꡐ편집: 이영미ꡑ라는 눈에 익은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내가 내려와있던 6개월. 그 어느 시기에 회사를 옮겼던 것이다. 예정대로라면 〈보물천국〉이란 잡지에 이름이 등재되어 있을텐데. 회사가 바뀌며 번역업무에서 직무는ꡐ편집ꡑ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내가 다녔던 회사에서 출간된 잡지가 도열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예전처럼 일본만화와 국적불명의 만화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 석자가 있는 책을 골라서 나왔다. 그녀는 메이커있는 여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서점에서 나와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소 앞에 서있다가 나는 무엇을 잊어버리고 나온 사람 마냥 되돌아가서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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