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4:3-9 주님께 헌신합시다
개척 교회시절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교회재정이 어렵다 보니 헌금에 당연히 관심이 쏠리던 시절에 어떤 분이 헌금 봉투에 백만 원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개척교회에 백만 원이나 헌금하셨구나! 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았는데 백만 원은 없었습니다. 그분의 성이 ‘백’이고 이름이 ‘만원’이었던 것입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템플대학교가 있습니다. 그 대학교 안에는 큰 교회가 하나 있는데, 원래는 주일학교 아이들이 다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예배당이 매우 협소했습니다. 그 주일학교에 잘 다니던 어린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그만 중한 병에 걸려 일찍 죽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죽으면서 교회 목사님에게 유서와 함께 56센트를 유리병에 담아 드렸습니다. 그 유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이들이 주님께 마음껏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싶지만, 예배당이 작아서 밖에서 드리거나 돌아가는 아이들이 많아요. 자리가 없어서 예배당에 못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예배당을 크게 지어주세요.”
그 소녀의 유서에 교인들은 크게 감동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크게 짓기 위해서 건축헌금을 모금해 교회를 짓게 되었는데 그게 지금의 템플 처치입니다. 템플 교회 예배당 앞에 가면 ‘56센트의 기적’이라는 소녀의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예배당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자기 일처럼 가슴 아파하며 하나님께 적은 돈이지만 드렸는데, 그 작은 헌신이 큰 기적을 만든 것입니다.
인도의 정치적, 정신적 지도자인 간디의 연설 중 인도인의 ‘희생’을 강조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는 연설 중 '쥐가 고양이를 이길 수 있는가?’란 질문을 인도 사람들에게 던졌습니다. 그가 말한 고양이는 영국이고 쥐는 인도를 빗댄 말입니다. 모두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간디는 쥐가 고양이를 이기는 방법이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쥐가 쥐약을 먹고 고양이 앞에서 춤추는 것입니다. 고양이는 쥐를 잡아먹을 것이고 그때는 쥐도 고양이 밥이 되지만 고양이도 쥐약 먹은 쥐를 먹었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입니다. 당시 7억의 인도 사람이 조국을 위해 희생이란 쥐약을 먹기만 한다면 영국을 이길 수 있다고 외친 것입니다.
나라도 국민의 희생을, 가정이나 모든 공동체도 누군가의 헌신을 통해 세워지고 발전, 성장합니다. 주님 피 값으로 산 교회 역시 목사이든 성도이든 누군가의 썩어지고 죽는 희생을 통해 부흥 성장합니다.
성도 여러분, 진정 교회 부흥을 원하십니까? 섬기는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주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예수님은 나를 살리려 밀알이 되어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님의 희생의 열매입니다. 나를 사랑하여 비우고 낮아져 오셨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한 알의 밀이 되어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희생으로 맺어진 열매들에게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헌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중심으로 주님의 음성을 마음으로 듣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값진 향유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그 기름을 부었습니다. 옥합에 든 내용물은 향유(순전한 나드)였습니다.
이 향유는 여자들이 자기 결혼을 위해 준비하는 결혼 지참물입니다. 이 향유로 결혼식 첫날 밤에 남편의 머리에 한 방울을 붓고 남편이 죽었을 때 시신에 부어 악취를 제거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부은 향유 한 옥합의 값은 300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이 하루 일당이니 300일 값입니다. 안 먹고 안 쓰고 모은 1년 차 임금입니다. 일당을 10만 원이라 하면 3천만 원입니다. 매우 값진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큰 헌신입니다. 이 헌신을 두고 어떤 사람들의 반응과 평가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막 14:4-5)
여기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 중심에는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그들이 화를 냈습니다. 이유는 큰돈을 허비했다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사고 쳐서 3천만 원이 순간 없어졌으니 아깝다는 것이지요.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지 왜 허비하냐고 헌신한 여자를 책망까지 했습니다. 자기 돈도 아니면서 본인이 알아서 하는데 남이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간섭한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인데 절기 때에는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꼈다가 이틀 후 유월절에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지 한꺼번에 그걸 다 허비했느냐는 것입니다.
다 보고 들은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이 한 일을 어떻게 평가하셨을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막 14:6-8)
어떤 사람들이 한 말 아시지요. “그걸 허비하지 말고, 가난한 자들 구제하지.” 지혜롭지 못한 행동이라고 책망했습니다. 각자 자기 관점에서 말을 합니다. 옳고 맞는 말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평가입니다.
“그 여자를 가만 두라, 그를 왜 괴롭게 하느냐,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
신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 평가가 중요합니다. ♪주님께 드리는 나의 노래
예수님께서는 옳고 맞는 일보다 더 높고 숭고한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이라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를 절기에 돕는 일 옳고 맞다. 틀린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 일보다 더 높고 숭고한 일이 있다. 내가 보기에 좋은 일이다. 그 좋은 일을 이 여인이 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좋은 일은, 이틀 후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대속적 죽임을 당하는데, 오늘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다는 것입니다. 더 크고 가치 있는 일, 좋은 일을 했다는 칭찬을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옳은 말보다 더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들어보세요. 욥이 고난의 이유도 모른 채, 극한 고통을 느끼며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머니 뱃속에서 유산되었다면,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렸다면, 이런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연약한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극한 고통을 느끼자 괴롭고 힘듦을 토로한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크고 심한가를 역설한 것입니다.
욥의 이런 말을 다 들은 친구 엘리바스가 하나님은 공의로우신데 이유 없이 고난을 주었겠느냐 너의 죄 때문이니 회개하라고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하자 욥이 듣고 하는 말입니다.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욥 6:25)
친구의 말 자체는 옳고 바른데 왜 나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고 고통스럽고 아프냐는 것입니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친구의 말 때문에 더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 10:23-24)
옳은 말보다 더 중요한 말은 남에게 유익이 되고 덕을 세우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즉 사랑의 말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적금 깨 보셨습니까? 오직 힘들면, 못 버티고 깨겠습니까? 주님을 위해 깨 보셨습니까? 혹, 주님을 위해 내 소중한 것을 팔아보셨습니까? 생계를 위해서가 아닌 주님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면 가족일지라도 이해 못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처럼 화를 내고 책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나를 위해 몸을 찢고 생명의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생명이라는 옥합을 깨뜨려 먼저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예수님께 옥합만 깨뜨려 달라고 할 때가 많습니다. 이제는 주님께 은복으로 받은 것 중에 하나라도 깨뜨려 드려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거기 모여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막 14:9)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자의 헌신도 증거되리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영원합니다. 주님께 드리는 헌신도 영원히 기억되고 보상받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썩어지고 소멸하는 것에 소망 두지 마시고 영원한 것들에 마음 두시고 힘쓰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 왕은 늘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싶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무명의 목동에서 한 나라의 왕이 되어 좋은 백향목 궁에 살고 있다는 것, 꿈만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 주신 우리 주님이 임재하신 언약궤가 천막에 있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싶었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은 좋은 집에 살고 하나님은 천막에 계시는 것 같아 불편하고 괴로웠습니다. 이게 다윗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좋은 것을 드리고 싶은 선한 마음입니다.
주님이 먼저 나를 한 나라 주권자로 세워주셨으니, 내가 주님께 큰 은혜를 받아 누리고 있으니 정말 감사하고 그 은혜를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나도 주님께 향유를 드려야 한다는 마음이 다윗의 마음입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도 같은 마음입니다. 나를 사람답게 살게 해 주신 주님이 얼마 후면 나를 사랑하여 돌아가시는데, 몸 찢고 피 흘려 죽으시는데, 힘 다하여 향유를 부어 드려 장례를 미리 준비해 드리자는 마음이었습니다. 받은 은혜와 사랑이 감사해서 더 드리고 싶고, 더 좋은 거로 드리고 싶은 마음이 옥합을 깨뜨리는 여인의 마음이고 다윗의 마음입니다.
편함만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우리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마음이며 우리가 이어가야 할 마음이 옥합을 깨뜨리는 마음, 주님께 헌신하는 마음, 주님께 좋은 것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어떤 분들은 토요일 저녁이면 주일에 하나님께 드릴 헌금을 준비하면서 동전은 광을 내고, 지폐는 다리미로 다렸습니다. 그런다고 1만 원이 2만 원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그렇게 드리면 못 써’라는 아름다운 신앙인의 마음과 자세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 드릴 돈을 은행에 가서 신권으로 바꿔 준비해 두었다가 주일에 하나님께 드립니다. 또 다른 분은 교회 절기를 앞두고 혼자 작정기도를 하면서 절기헌금을 크게 준비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준비도 기도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작지만 옥합을 깨뜨리는 여인과 다윗 같은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하늘비전 가족 여러분, 우리 안에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좋은 마음, 더 드리고 싶고, 더 감사하고 싶은 마음, 주님께 헌신하는 마음이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하여 하나님 나라에 귀한 도구로 쓰임 받으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종의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