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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양업 신부
한국인으로 두 번째로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崔良業, 1821-1861) 신부는 ‘사목자의 생활과 성덕의 전형’으로 추앙받고 있다. 또한 오늘날 한국교회가 아시아 선교에 힘을 기울여야 할 때에 한국인 선교사들의 귀감이 되실 분으로 여겨지고 있다. 오늘날 최양업 신부의 시복 시성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1) 생애
(1) 성장기: 출생과 신학생 선발
최양업은 부친 순교자이며 성인인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1805-1839)과 모친 순교자인 이성례(李聖禮, 마리아, 1801-1840)사이에서 1821년 3월 1일 6형제의 장남으로 충청도 홍주의 다락골(현 충남 청양 화성면 농암리 누곡)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본관은 경주이고, 아명은 양업, 관명은 정구(鼎九)이며, 세례명은 토마스이다.
증조부 최한일(漢馹)이 아우 한기(漢驥)와 함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1752-1801)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 후 한일은 경주 이씨와 혼인하여 아들 인주(仁柱)를 낳았는데, 순박함과 신심이 뛰어났던 인주는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때 많은 고초를 겪고 석방된 후 모친과 함께 청양 다락골로 피신하여 이후 3대가 이 곳에서 생활하였다.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이며 강력한 성품을 타고난 부친 최경환은 가족들의 신앙심이 냉담하게 되자 고향과 친척과 재산 등을 떠나 서울 낙동(駱洞, 현 회현동)에 거처하다가 다시 이곳을 떠나 여러 산골로 이사를 다녔다. 그리고 과천의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 3동)에 정착하면서 교우촌(敎友村)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진하여 가시덤불과 돌 자갈밭을 개간하는 등 극도의 궁핍과 재난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자주깊이 묵상하고 신심 독서를 함으로써 열렬한 애덕과 하느님 신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얻었으며, 과일을 추수할 때면 가장 좋은 것을 골라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모친 이성례(마리아)도 남편 못지않은 극기와 신심을 지니고 있었고, 신앙생활에도 충실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시 포도청에 갇혔다가 모성애 때문에 배교했으나 후에 형조 감옥에 갇힌 후 모성애를 극복하고 배교를 취소한 뒤에 용감하게 1839년 12월 27일 순교하였다.
(2) 유학기: 신학생 시절과 사제수품
교우촌에서 열심 한 부모와 함께 성장한 최양업은 경기도 부평에 살 때에 교회 지도자들과 1835년 11월 25일(음)에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그는 동료 김대건⋅최방제 등과 함께 1836년 12월 3일(음 10월 25일) 모방 신부 앞에서 서약을 한 뒤 서울을 출발하여 봉황성 책문(12월 28일)을 거쳐 이듬해 6월 7일(음 5월 5일)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대표 르그레즈와(Legrégeois) 신부, 부대표 리브와(Libois) 신부, 교장 칼레리(Callery) 신부, 매스트르(Maistre) 신부와 베르뇌(Berneux, 張敬一) 신부, 사천(四川) 선교사인 데플레슈(Desflèches) 신부 등의 지도를 받기 시작하였고, 1839년 4월부터 11월까지는 필리핀 마닐라와 롤롬보이(Lolmboy)에서 신학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이때 리브와 신부는 “브뤼니애르(de la Bruniére) 신부는 조선 학생(최양업)을 교육하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그는 이 학생에게서 많은 재능, 무엇보다도 좋은 판단력을 발견하였음을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브뤼니애르 신부는 그를 가르치기에 아주 적절한 학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고 하였다.
1842년 7월 아편전쟁으로 인해 중국이 한창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만주 선교사인 브뤼니에르 신부와 함께 북상하는 프랑스 함선 파브리트(la Favorite)호의 통역을 맡아 마카오를 떠나게 되었다. 그해 9월 11일 상해에 도착하여 김대건 일행과 합류하였고, 이들은 요동의 태장하(太莊河)⋅백가점(白家店)⋅양관(陽關)을 거쳐 11월에는 3대 교구장인 페레올(Ferréol) 주교(1843년-1853년 교구장 재위)가 있던 길림성의 소팔가자 교우촌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였으며, 1844년 12월 10일경 김대건과 함께 부제품을 받았다. 최양업 부제는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훈춘과 의주 변문(邊門)을 통해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1845년 초에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있는 홍콩으로 가서 페레올 주교가 보낸 프랑스어본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파리로 보냈다. 1847년 7월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중국⋅인도 해군기지 분함대장인 라피에르(Lapierre)가 지휘하는 글로와르호(la Gloire)를 타고 왔다가 신치도(薪峙島) 인근에서 좌초함으로써 네 번째로 귀국에 실패하였다. 상해에 도착한 최양업은 예수회의 서가회(徐家匯) 신학원에서 마지막 신학수업을 마친 뒤 1849년 4월 15일 예수회 마레스카(Maresca) 주교에 의해 사제로 수품되었다.
(3) 사목활동기: 사목활동과 죽음
최양업 신부는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페레올 주교와 약속되어 있던 백령도(白翎島) 까지 갔으나 마중 나온 신자들을 만나지 못해 상해로 되돌아갔다. 1849년 5월 만주 요동으로 가서 7개월 동안 만주교구장 직무대행 베르뇌 신부 밑에서 중국교우들을 위하여 병자성사를 집전하고, 주일과 축일미사의 강론을 맡고, 어린이 교리와 고해성사를 집전하였다(1850년 10월 1일자 서한). 당시 사목활동 지역은 요동의 전교중심지인 양관(陽關, 현 개주시 羅家店)과 차쿠(岔溝, 현 장하시 蓉花山)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이러한 사목활동을 통해서 볼 때 중국 땅에서 중국 신자들에게 최초로 공식적인 사목을 담당한 한국인 사제라고 할 수 있다.
페레올 주교가 보낸 조선교회의 밀사를 봉황성 책문에서 만난 그는 그해 12월 3일 압록강을 건너 귀국하였다. 1842년 마카오를 떠난 지 7년 6개월 동안 모두 여섯 차례의 여행 끝에, 신학생으로 고국을 떠난 지 13년 만에 귀국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뒤 한덕골(현 용인시 이동면 묵리) 교우촌에 가서 중백부 영겸(榮謙)과 동생 신정(델레신포로)을 만났으며,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동골 교우촌을 사목거점으로 삼고 사목활동을 하였다. 입국이후 1850년 1월부터 전라도 지역부터 시작된 6개월 동안 쉬지 않고 5개 도에 걸쳐 있는 교우촌을 사목 방문하였다.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기간은 장마와 무더위, 농사일 때문에 순회할 수 없는 7-8월 한 두 달에 지나지 않았다.
귀국 후 11년 6개월 동안 선교사들이 방문할 수 없는 지역이나 산간 오지에 있는 교우들을 방문하는 일은 모두 그의 몫이었다. 낮에는 80리 내지 100리를 걸어야 했고, 밤에는 고해를 들어야 하고 또 날이 새기 전에 다시 떠나야 하는 등 한 달 동안 나흘 밤 밖에 휴식을 취하지 못할 정도로 말할 수 없이 피로가 누적되었던 그는 박해가 수그러진 듯 하자 교구장 베르뇌 주교에게 사목방문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다가 경상도 문경 땅의 한 작은 교우촌에서 1861년 6월 15일 선종하였다. 일단 그 곳에 가매장되었다가 11월 초에 신학교 푸르티에 신부와 신자들에 의해 배론 신학교 뒷산 언덕에 이장되었다.
2) 사목 활동
(1) 선교활동과 성직자 양성
① 선교활동
선교활동은 교우촌 신자들을 위한 사목 방문이었다. 1850년 1월부터 1861년 6월까지 그는 서양 선교사들이 사람들의 눈에 띄기 쉬워 순방할 수 없는 지역을 주로 담당하였다. 1850년 1월 전라도 지역부터 시작된 사목방문은 6개월 동안 쉬지 않고 5개 도에 흩어져 있는 교우촌을 찾아다니며 3, 815명의 교우들을 만났는데, 이는 전국 교우 수 11,000명의 약 35%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1857년에 관할구역 신자들은 모두 4,075명이라고 하였다. 1852년 8월 매스트르 신부의 입국으로 그의 사목방문 지역은 줄어들게 되었지만, 이듬해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면서 다시 넓은 지역을 담당하였다. 1857년 3월에 입국한 페롱신부가 강원도 지역과 경상도 북부를, 1858년 10월부터 프티니콜라(Petitnicolas) 신부가 경기⋅충청⋅강원⋅경상도 일부를 담당하고, 1859년에 다블뤼 부주교가 내포지역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일부를 담당하면서, 그는 경상도 중부와 남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제가 담당하는 조선의 5도에는 매우 험준한 조선의 알프스 산맥이 도처에 있습니다. 저의 관할 신자들은 깎아지른 듯이 높은 산들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깊은 골짜기마다 조금씩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사흘이나 나흘씩 기를 쓰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가 봐야 고작 40명이나 50명쯤 되는 신자들을 만날 뿐입니다. 제가 담당하는 그러한 공소 즉 교우촌이 자그만치 127개나 되고, 그러한 마을에서 세례명을 가진 이들을 다 합하면 5,936명이나 됩니다. 한 공소에 고해자가 40명 내지 50명이 있어도 그들 모든 신자에게 하루 안에 고해성사를 다 집전해 주어야 합니다. 반면에 고해자가 2명이나 3명밖에 없는 공소에서도 다음날 미사를 봉헌하고 신자들에게 성체를 배령하게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하루를 묵어야 합니다.”(1851년 10월 15일자 서한)고 하였다.
최양업 신부의 19통의 서한을 통해서 그의 선교활동 및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회개하여 세례를 받은 이들의 다양한 입교과정을 보고하였다. 박해를 피해 여종이 된 신자가 주인을 회개시키고 교우촌을 건설하고(1857년 9월 14일자), 공소 회장을 끈질기게 졸라서 교리를 배운 젊은이가 공소 집을 준비하고(1857년 9월 14일자),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족들과 가정을 다 잃어버린 여인(1858년 10월 3일자), 교만한 양반에서 비천한 시골뜨기로 변한 김 베드로(1858년 10월 3일자), 모든 것을 버리고 교우촌으로 숨어 들어와서 사도의 사명을 받은 양반 조 바오로(1851년 10월 15일자) 등을 최양업 신부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렇게 사는 교우들을 방문하여 돌보아 주었다. 또한 교우들, 그 중에서도 양반과 부녀자들은 고통과 수난을 겪었고(1850년 10월 1일자),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교우들의 생활을 보고 비신자들이 찾아와서 교리 배우기를 청하였으며(1851년 10월 15일자), 전교하고자 공소에서의 전례 행사를 자랑했다가 공소 집이 완전히 파괴당한 일도 있었다(1857년 9월 14일자). 또한 교우들의 인내와 친절과 겸손으로 마을 전체가 회개하여 교우촌이 되었고(1859년 10월 11일자), 공소를 지어주고 화려한 촛대까지 선물하는 외교인도 있었다(1859년 10월 11일자). 그리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그가 방문중인 교우촌을 찾아오는 교우들이 있었고(1857년 9월 14일자), 19년간 성사생활을 못하고 외로이 사는 안나에게 찾아갔으며(1850년 10월 1일자), 세 명의 교우라도 방문하여 성사를 주고 위로하였다(1851년 10월 15일자). 교우들은 하느님 나라와 성사와 성물에 대한 갈망과 열정이 있었고(1850년 10월 1일자), 동정생활을 갈망하는 처녀들과 만난을 무릅쓰고 동정을 지킨 처녀들이 있었다(1850년 10월 1일자). 이러한 교우촌은 험준한 산골짜기에 흩어져 있었는데, 그의 방문을 받아 축제를 지내기도 하였다(1850년 10월 1일자). 매년 걸어서, 혹은 말을 타고 방문하는 거리가 7천 리가 넘었는데, 오직 하느님의 섭리에만 의탁하며 사목활동을 하는 그의 노고와 표양은 신자들에게 더 큰 힘과 모범이 되었던 것이다.
② 성직자 양성
파리외방전교회의 교육을 받은 자답게 성직자 양성에도 힘써서, 최양업 신부는 1854년 3월 이만돌(바울리노), 김 요한과 임 빈첸시오 등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말레이 반도 서쪽 섬인 페낭(Penang)에 자리 잡고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로 보낸 뒤, 그들에게 계속 서한을 보내 관심을 표명하였다. 리브와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김 요한이란 학생은 잔재주가 많고 성격이 불안정하여 일찍 바로잡아 주지 않으면 버림받을 위험이 많다”고 염려하였으며, “신학생들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겸손을 잘 깨닫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조선에서는 사람들이 겸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선사람들은 참된 겸손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인간의 본질을 정당하게 평가할 줄도 모르며 오로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세속적이며 외적인 영화와 부귀공명에서 찾을 줄만 압니다.”고 당부하기도 하였다. 또한 최양업 신부는 1855년 초 배론 장주기(요셉)의 초가집에 신학교가 세워지자 배론을 방문하였고, 여기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1855년 10월 8일자 서한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가 보낸 이 바울리노는 1857년 휴양 차 홍콩의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에 머물던 루세이(Rousseille) 신부의 지도 아래 제주 출신의 표류인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에게 교리를 가르쳐 세례를 받게 하였다. 이후 김기량은 귀국하여 육지를 오가며 성사를 받았고, 페롱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거처하고 있던 교우촌도 방문하였다. 휴양을 끝낸 바울리노는 페낭 신학교로 돌아갔고, 칼래(Calais) 신부는 1861년 3월 12일 다시 몸이 약해진 바울리노를 데리고 조선에 입국하였다. 임빈첸시오와 김 요한도 1863년 6월 30일 오메트르(Aumaître) 신부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후 김 요한은 신학교를 그만두었고, 임빈첸시오와 이바울리노는 배론신학교에 편입하여 공부하다가 1864년에 각각 소품과 삭발례를 받았으나, 1866년 3월 병인박해를 만나 신학교를 떠나야 했다.
③ 백성들에 대한 연민과 물의 정화 노력
최양업 신부가 귀국하여 사목한 시기는 대체로 철종(哲宗, 1850-1863)의 치세(治世)와 맞물린다. 최 신부는 교우들의 생활 전반에 대해 지극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다. 특히 여교우들은 집안에서는 수계할 수 없는 경우가 많고 그렇다고 집을 떠나면 겁탈을 당해 외인들의 첩이나 종이 되기 일쑤라고 하였다. 그는 “저는 교우촌들을 두루 순회하는 중에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들을 도와 줄 능력이 도무지 없는 저의 초라한 꼴을 보고 한없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저들은 포악한 조정의 모진 학정아래 온갖 종류의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얽히고 설켜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비참한 곤경에 빠져도 손가락 하나 꼼짝달싹할 수 있는 자유조차 없습니다....아! 이 불쌍한 여인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들을 때 저는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는지 모릅니다....백성은 각종 세금과 수탈과 착취에 짓밟혀 극도의 불행에 빠져 있습니다.”고(1850년 10월 1일자 서한) 하였다. 또한 “도처에서 신자들과 외인들이 약탈과 착취를 일삼는 양반들과 포졸들한테서 억울한 처사를 당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되니, 실로 통탄과 동정을 도저히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고(1859년 10월 11일자 서한) 하였다.
그는 그런 중에서도 백성들의 한 가지 고통만이라도 덜어주려고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이 나라에는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기에 좋은 곳이 평야에나 산골에나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주민들은 실성하거나 간질에 걸리고, 피 섞인 가래침이 나오며, 몸이 나른해 지는 등 여러 가지 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모든 질병이 물의 비위생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어집니다. 그러니 물을 정화하는 방법을 아시면 분명하게 일러주시기 바랍니다.”고(1850년 10월 1일자 서한) 간청하였다.
(2) 번역과 저술 및 순교자 자료 수집
① 교리서의 번역
최양업 신부는 당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전교활동과 교리 공부에 유리한 것 두 가지, 즉 상복(喪服)과 한글을 말하고 있다. 상복은 서양 선교사들을 위해서 발명된 도구라고 할 만큼 큰 도움이 되는데, 이 상복과 상을 지내는 풍속이 없었더라면 선교사들은 한 발짝도 외출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둘째로 한글이라고 하였다. 그는 한글의 유용성에 대해 “한글이 교리 공부하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우리나라 알파벳은 10개의 모음과 14개의 자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주 쉬어서 10살 이전의 어린이라도 글을 깨우칠 수가 있습니다. 이 한글이 사목자들과 신부님들의 부족을 메우고, 강론과 가르침을 보충하여 줍니다. 쉬운 한글 덕분으로 세련되지 못한 산골에서도 신자들이 빨리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구원을 위한 훈계를 받을 수 있습니다.”(1851년 10월 15일자 서한)라고 하였다.
당시 교회에서 사용하던 교리서와 기도서들은, 첫째 교회 창설 이후 한문교리서의 한글 번역본과 한문 기도문의 음만을 언문(諺文)으로 적어 암송하던 언문체 기도문, 둘째 앵베르(Imbert) 주교에 의해 편찬된 한글 서적, 셋째 1839년에 순교한 이문우(요한) 성인이 지은 ⌜삼세대의⌟(三世大義)와 민극가(스테파노)성인이 저술한 ⌜옥중제성⌟(獄中提醒) 등의 천주가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신자들이 필요로 하는 서적이 부족했으므로 베르뇌 주교는 1862년부터 서울의 목판 인쇄소에서 한글본 서적들을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서적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와 교리서인 ⌜성교요리문답⌟이 널리 사용되었는데, 그 번역과 편찬 작업에 최양업 신부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 그가 오랫동안 연구해 온 한글 교리와 기도, 천주가사 등이 여기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859년에 페롱신부의 관할 구역인 경상도 안곡(경북 선산군 무을면 안곡리의 안실)을 여름 휴식처로 삼고 다블뤼 주교를 도와 ⌜성교요리문답⌟의 한글 번역과 교정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한글본 ⌜천주성교공과⌟의 번역작업을 시작하여 이듬해 여름에 이를 끝마쳤다. 페롱 신부는 “그의 한문지식과 조선인으로서의 장점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책을 번역하는 일에 그 누구보다도 적격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벌써 이 분야에서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고 하였다. 1862년에 처음 간행된 ⌜천주성교공과⌟(4권 4책)는 이후 100여 년 동안 교회의 공식 기도서로 사용되었으며, 1864년에 간행된 ⌜성교요리문답⌟(1권 1책)은 이후 70년 동안 공식 교리서로 사용되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사본문답⌟을 모두 익혀서 영세를 하는 신자가 소수에 불과하였고, 심지어는 죽을 때까지 사본문답을 외우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었다.
② 천주가사의 저술
1. 출현 배경
‘천주’라는 서구 사상과 ‘가사’라는 전통적 양식의 융합이다. 가사의 전통적인 양식인 3⦁4조, 4⦁4조를 기본으로 하여 천주교의 가르침이 담겨 있다.
조선후기 가사는 일생생활에서 사용하는 구어(口語)를 대폭 수용하여 생활 속의 문학이 되었다. 천주가사는 현실을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관을 지향하던 사회, 서민 의식의 각성으로 보다 활발해진 문학사적 변화, 선교를 위한 교회의 필요성을 배경으로 한다. 천주교를 널리 전파하기 위해서는 민중들이 생활 속에서 쉽게 이해하고, 노래로 부를 수 있는 가사가 설득력이 있었다. 박해를 거치면서 쉽게 암송하여 부를 수 있어 선교와 신앙 교육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여겨졌다. 특히 1850년대 글을 모르는 여신자와 하층민들이 가정 안에서 구송(口誦)에 의해 천주교 교리와 신앙의 가르침을 쉽게 이해하고 편하게 암송할 수 있도록, 당시의 대중 가사 형식을 빌려 한글본 천주가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하느님을 섬기고 영혼 구원을 갈망하기에 ‘천당 노래’라고 하였는데,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영적 성장에 자양분이 되는 소중한 작품인 것이다. 즉 서구의 새로운 사상을 전통적인 가사 양식에 담아 전파함으로써 거부감 없이 수용되었고, 종래의 유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2. 보급과 확대
천주교 교리와 당대의 시대적 흐름을 모두 수용함으로써 우리 문화 안에서 살아있는 신앙으로 발전하였다. 박해시대 신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면서, 절대적인 신앙을 우리말과 우리의 양식으로 소화하였던 것이다. 1886년 이후 종교의 자유를 얻은 이후에 필사되었기에 제작 시기 및 작가에 대한 논쟁을 낳고 있다.
박해시기 민극가(스테파노)가 지은 「삼세대의」(1840), 옥중에서 신자들을 각성시키는 이문우(요한)의 「옥중제성」(1840), 상주의 이생원이 지은 「피악수선가」는 천주학으로 유학의 모자람을 보충한다는 보유론적인 입장에서 교리를 유학의 경전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보유론적인 입장이 나타나 있고, 우리 민속과 결부된 내용이 많이 있다. 이러한 천주가사는 한문서학서 등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죄악의 7개 근원과 이를 극복하는 7가지 덕행을 다룬 『칠극』, 양심성찰 지침서인 『성찰기략』, 참회 기도서인 『회죄직지』, 영성생활 지침서인 『신명초행』, 칠성사의 교리 해설서인 『성교절요』, 사후 묵상서인 『사말론』 등이다. 그리고 병인박해 이후 교우촌의 회장들이 천주가사를 통한 선교와 신자 재교육에 힘써 필사본 천주가사집을 보급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전승되는 필사본 천주가사집은 1885년의 시복자료집을 필두로 총 53종이다.
3.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
민족과 민족 문화를 사랑하며 천주교를 이 땅에 뿌리내리는데 일생을 보낸 최양업 신부는 인간의 종말에 치러야 할 죽음과 심판인 사말(四末, 죽음⋅심판⋅천당⋅지옥)을 노래한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 천주가사의 진수라고 일컬어지는 하느님 자녀들이 가야 할 본래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부른 ⌜사향가⌟(思鄕歌)를 편찬하였다.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는 영성은 박해 영성의 특징적인 부분이다. 이 안에서는 인간의 죽음, 신자와 비신자의 죽음의 차이점, 생전에 행한 공로와 죄악에 대한 심판과 상과 벌, 천당과 지옥, 사심판과 공심판의 차이점, 공심판에 임하는 사람들의 모습, 만인에게 공개될 죄악, 심판관이신 주님의 엄준한 판결, 심판 때에 도움을 주시는 분들, 그리고 하느님의 완전한 통치에 대하여 가르친다.
위 네 편의 가사 내용은 최양업 신부가 한글로 번역한『성교요리문답』과 『천주성교공과』와 동일한 부분이 많다. 그는 신자 재교육의 측면에서 주요 교리를 다시 한 번 주지시켜 주고, 이를 통해 그들 스스로 묵상과 교리실천, 신심 함양에 힘쓰도록 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그는 박해와 순교라는 조선교회의 현실을 중시하였으며, 그 자신이 따르고자 했던 순교자의 교리 실천과 신심, 순교의 용덕을 천주가사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죽음과 심판, 곧 천당과 지옥을 말함으로써 현세에서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가를 언명하고 있다.
특히 ⌜사향가⌟는 천주가사 가운데 가장 많이 불려지던 노래로, 천주가사 중에 이본이 가장 많은데, 이것은 그만큼 널리 읽히고 많은 필사(구전)를 거쳐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 고향이 하느님 나라임을 밝히고 교리를 종합적으로 수용하며, 유교 윤리와 천주교 윤리의 갈등을 반영하고 있다. 신자들에게 내세를 지향하고 박해를 극복하게 하는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현세는 영원한 생명을 위해 준비하는 장소이고, 죽음 또한 삶의 끝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제시되며, 천상 영복을 받을 수 있는 순교자적 삶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삶은 삶의 지침이 되었고, 묵상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마테오 리치가 지은 『기인십편』의 하권 ‘천향’(天鄕)조에 “인류는 본디 하늘나라의 백성이다. 그러므로 그 완전한 복은 오직 하늘 나라에 이을 뿐이다. 인간이 나그네로서 타계에 유배되어 와 있기 때문에 항상 본향을 바라며, 항상 탄식을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성경직해』권 3에서도 “본향은 천당”이라 하였다. 사향가라는 제목은 바로 이런 가르침에 바탕을 둔 것이다.
전체 15단락의 내용과 832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게 다섯 단락으로, 즉 1단락 천당 지향, 2단락 죽음과 심판, 3단락 천당갈 예비, 4단락 외교인에 대한 개유와 응대, 5단락 천당 지향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세부적으로 보면, 1단락은 인간의 본향이 어디인가를 알고 그 본향을 찾아가야 함을, 2단락은 천당의 영원한 복과 지옥의 영원한 괴로움을, 3단락은 세속사람의 어리석음과 죽은 뒤의 엄한 심판을, 4단락은 칠죄종(七罪宗)을 칠극(七克)으로 이겨내고 천당 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5단락은 미신 숭봉, 불교 신봉, 제물 탐린(貪吝), 헛맹세 등을 하지 말 것, 6단락은 천주 존재, 천지 창조, 영혼 불멸, 천당과 지옥, 신마유분(神摩有分), 천주강생, 동정 생자(童貞生子), 예수의 부활과 승천, 예수의 구속, 사심판과 공심판, 사후상벌 등 교리에 대한 세인의 비판을, 7단락은 천주교가 외국에서 온 도라고 배척하는 데 대해 공자와 맹자는 조선인이 아니고 한자도 외국어인데 어찌 쓰며, 주자의 가례(家禮)와 상례(喪禮)는 외국에서 온 것이 아니냐고 하였는데, 이는 중국 이외의 나라를 오랑캐로 취급하는 화이관(華夷觀)의 독선과 폐쇄성을 비판한 것이다. 8단락은 영혼 삼사(三司), 삼혼분별(三魂分別), 사원행(四元行), 사말, 원조범명(犯命), 천주강생, 수난과 부활, 승천, 혈세 보속을, 9단락은 인간영혼의 영능과 천주의 전능과 그 은혜를, 10단락은 구약과 신약의 세계로 들어와 천주의 강생구속을, 11단락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천주를 알지 못하면 “의복입은 짐승이오 말 잘하는 금조(禽鳥)”임을, 12단락은 당시 선비들의 위선과 거짓 효양, 헛된 제례를, 13단락은 이 세상에서의 해로움이나 괴로움보다 죽은 후 무궁세의 괴로움을 생각하여 영혼의 구원을 꾀해야 함을, 14단락은 현세의 잠생사(暫生事)만 생각하지 말고 통회 정개하고 인간의 영생사(永生事)를 도모해야 함을, 15단락은 천주교에 대한 수많은 비방과 훼방을 물리치고 본향을 찾아가서 대부모(大父母)를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노래하였다.
사향가의 문학형식은 호소⋅훈계⋅권면⋅설명조로 이루어져 있고, 특유의 감동과 호소력으로 사람을 그 안으로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있으며,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하는 훌륭한 교수법이다. 이처럼 당시의 신자들이 외우고 배우던 중요 교리와 기도문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신자들에게 긴요한 육화론적 영성(교리 실천)과 함께 종말론적 영성(순교 신심)을 함양해 주기 위해 저술된 천주가사였다. 한문 서학서에 들어있는 서양의 중세철학 사상을 잘 소화해 내고 있는 대표적인 천주가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바로 언문체 천주가사들을 통해 교리의 토착화를 시도한 선구적 인물이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그는 우리보다 시대를 앞서 서양 교리를 한국 옷으로 갈아입히는 정도가 아니라 조선인의 생활감정과 의식구조, 문화에 맞는 천주교가 되도록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 진리를 신자들에게 설명하며 가르치고 신자들의 수준에 맞게 보급하였으므로 ‘신앙의 교육자’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고, 이러한 그의 생애와 저술 활동으로 볼 때 한국교회의 ‘교부’(敎父)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지대한 공로를 세웠던 것이다.
4. 천주가사에 나타난 영성과 의의
천주가사는 하느님을 섬기고 자기 영혼의 길을 가르치는 신앙 본래의 목적을 노래하면서, 현실을 넘어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고, 공동체적 삶, 순교자 등을 지향하고 있다.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성찰과 통회를 통한 수덕의 삶과 이를 통해 시련을 겁내지 않고 진리를 향하는 단호한 도전을 통해 생활화된 신앙이 나타난다. 신자들에게 교리를 전달하기 위해 수준높은 상징이나 비유보다는 생활 속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민속이나 소박한 비유로 이루어졌다. 토착화된 신앙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천주가사가 다른 종교의 가사와 다른 것은 자력구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의해 인간이 구원될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이 내재해 있다. 영성의 본질인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 자신 안에 있는 죄악의 뿌리를 알고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칠죄종과 칠극이다. 교만은 겸손, 인색은 자선, 탐욕은 담박, 분노는 인내, 질투는 인애, 음욕은 정결, 나태는 근면으로 대응하는 것은 인간 안에 내재한 속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의의]
1) 문학사적 의의: 19세기 가사문학에는 근대 계몽기에 보여지는 변모의 잠재력이 이미 내재되어 있는데, 천주가사는 한국의 시가 문학이 변모하는 중심에 존재하는 것이다. 천주교 사상으로 대표되는 근대적인 이념을 수용하여 계몽기의 흐름을 선도하고 있다는 점이나 그것이 교회 기관지를 통해 보급되고 있었다. 교회 음악의 측면에서도 근대 악곡으로 가창되었다는 점에서 천주가사가 우리나라 근대 문학이나 음악을 태동시키는 데 가교역할을 하였다. 또한 천주가사가 가사문학의 한 흐름으로써 우리 문학사 속에 존재하는 것 자체도 문화 담당층의 주체적 역량과 문화 지평의 거대함을 확인해 준다.
2. 사회사적 의의: 박해를 겪으면서 신자들의 신앙은 철저히 생활화되었고, 그 안에서 천주가사를 탄생시켰다. 박해라는 커다란 시련을 이겨낸 실질적인 문화 담당층의 주체적 역량을 의미하는 것이다.
3. 교회사적 의의: 천주가사는 신앙인이 시대적 상황에 맞서서 자기를 지키고 신앙의 명맥을 지킬 수 있는 중요한 버팀목이었다. 천주가사가 그 자체로 이 땅에 토착화된 교리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전래된 서학서들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 심성에 바탕을 두고 우리의 언어로 한국적인 소재를 가지고 신앙을 심화시킨 것이다.
③ 순교자 자료 수집과 정리
1847년 초 현석문과 이재의(토마스)가 수집하고 페레올 주교가 보완 정리한 프랑스어본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여행 중에 사전도 없는 상황에서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여기에 수록된 82명의 행적 중에서 기해박해 순교자 73명은 최양업이, 병오박해 순교자 9명의 행적은 매스트르 신부가 번역하였는데, 이 라틴어본 행적은 프랑스 파리에 있는 르그레즈와 신부의 손을 거쳐 교황청으로 보내졌으며, 1857년에는 82명 모두가 가경자로 선포되었다. 이 라틴어 번역본은 한국순교자들의 시복 첫 단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그는 “저의 조상들의 순교사실을 더욱 세심하게 조사하지 아니하고서는 도저히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페레올 주교님께서 보내주신 순교록을 중국에서 읽었을 때 조국에 돌아가면 신부님들에게 그 보고서에 관하여 더 정확히 써 드려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1851년 10월 15일자 서한)라고 하였다. 이러한 자신의 결심 외에도 유럽 신자들에게 감동이 되거나 표양이 될만한 순교자들의 행적이 있으면 적어 보내달라고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부탁을 받았다(1856년 9월 13일자 서한). 그 후 귀국 순방 중에 부친 최경환과 모친 이성례, 그리고 친척 최해성(崔海成, 요한)의 순교행적을 조사하여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냈다. 그 외 다른 순교자들에 대해 틈틈이 글로나 구전으로 전하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기는 하였지만 필요한 증인이나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또 그의 조사 사업은 이 단계에서 중지되었다. 왜냐하면 베르뇌 주교는 1856년부터 다블뤼 신부에게 정식으로 순교자 행적으로 조사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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