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장인 <장도리 곰탕> 이장우 사장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 ‘지속과 반복’
지속은 승자의 언어, 반복은 패자의 언어
얼핏 보면 가벼운 풍채. 그러나 덜 익은 사람처럼 부산을 떨지는 않는다. 만남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오히려 장중한 무게를 느끼게 한다.
이장우 사장(50)은 장인이다. 현장을 장악한 사람은 그 경륜과 기술만큼이나 무게와 힘이 실리게 마련이다. 결코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치열하게 불타오르는 그의 장인기질 실체를 추적하다보면 근저에 자리 잡은 것이 바로 ‘지속’이다.
지속은 승자의 언어다. 반복은 패자의 언어다.
지속은 반복이 결코 아니다. 지속과 반복은 얼핏 보면 반복과 동일선상의 언어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지속과 반복은 차원이 전혀 다른 용어다. 지속은 어제와 같은 것을 막연하게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매일매일 조금씩이라도 더 나아지는 것을 말한다.
지속은 희망적인 언어이며, 반복은 절망적인 언어인 셈이다. 그 차이점을 알고 있다면 당신도 승자가 될 자격이 있다.
지속과 어울리는 단어는 갈망이다. 갈망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 소구될 수 있는 것은 갈망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저차원의 욕구일 따름이다. 갈망에는 따라서, 만족도 없다. 불만족, 불충분함은 갈망의 특질인 셈이다. 바로 이 불충분, 불만족이 성장을 이끄는 동인(動因)이다.
어머니를 넘어서기 위해 10년, 그리고 넘어선 이후 10년의 세월을 다시 보내면서도 그는 오늘도 갈망하고 있다. 잡힐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맛의 지평이 그가 갈망하는 대상이다. 언제까지 그리고 어디까지 그 지평선을 넓힐 것인지는 그의 삶, 앞과 뒤가 말해 줄 것이다.
89년 암사동 시절
서울시 강동구 암사동을 택한 것은 연고가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낯설다 못해 생소한 곳이다.
1989년 암사동은 상당히 낙후된 곳이었다. 집다운 집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황량한 벌판에 아파트 타운 기초공사가 이뤄지고 있었고, 일부지역은 재개발로 인한 철거가 한창이었다.
그가 황량한 이 곳에 식당을 구하려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어머니와 되도록이면 멀리 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저는 어머니와 함께 서울 강서구 신월동에서 곰탕집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저를 부르시더니만 당신과 멀리 떨어져 살라고 하더군요. 남들에게 쉽게 말 못할 집안 사정 때문입니다."
“서운한 감정이 있을 턱이 있나요. 어머니에게는 그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 곁을 떠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멀리 떨어져야 하는 것은 그렇다 치자. 그에게는 식당을 차릴 충분한 돈이 없었다. 수중에는 단 500만 원뿐이었다. 암사동이 낙후된 지역이라 해도 식당을 구할 수 있는 충분한 자금은 아니었다. 절대 부족했다.
눈에 띄는 건물주인을 무작정 찾아갔다. 건물주인은 2000만 원의 보증금을 요구했다.
“200만 원과 문방구 어음을 들고 찾았습니다. 3개월만 기다려주면 벌어서 갚겠다고 진지하게 얘기했지요. 처음에는 미친놈 봤다는 식으로 상대를 하지 않으려 하더군요. 일주일을 쫓아다녔습니다.”
열정에 반한 것일까. 아니면 그의 자신감 있는 태도를 믿은 것일까. 아무튼 건물주인은 문방구 등 2개의 좁은 가게를 터서 20평 내외의 식당을 만드는 것을 허락했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식당은 이후 지금까지 줄곧 17년째 <장도리곰탕>의 간판을 지키고 있다. 앞으로도 천재지변이 아닌 이상 간판을 내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출판계에서 ‘원고는 임자가 있다’는 말이 있다. 원고를 구하려 하지 않는데도 좋은 글이 들어온다는 얘기다. 마찬가지로 이 식당은 그를 위한 자리가 아니었을까. 식당자리는 비어있던 가게도 아니었기에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든다.
가게를 얻고 나니 어머니와 함께 한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고생도 많이 했지만 보람도 많은 세월이었다.
“지난 61년 대전에서 곰탕 전문 ‘대원집’을 시작으로, 어머니는 울산, 경남 거제, 그리고 서울의 신월동에서 곰탕 전문집으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당시로 계산해서 자그마치 28년의 세월이지요. 어머니는 어디에서 식당을 하던 손님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음식솜씨가 탁월했거든요.”
89년10월 어렵게 문을 연 장도리 곰탕(당시 상호는 장수곰탕)은 첫날부터 손님들로 가득 찼다. 주변에 식당다운 식당이 없었던 것도 이유지만 건물외관이 독특한 것도 한몫 거들었다. 반듯한 상가건물 1층에 소나무껍질 등으로 치장한 토속적인 외관이 일단 시선을 끌었던 당시로서는 곰탕이라는, 흔히 볼 수 없는 아이템이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3500원이라는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그날은 미처 오후 4시가 되기 전에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재료가 동났던 것이다.
“못 팔아도 최하 100만 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어머니 맛을 넘기 위해
문득 고개를 들어 벽면을 바라보았다. 시계 바늘은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천근만근의 무게로 그의 몸뚱아리를 사정없이 눌렀다. 하루 종일 장사를 하는 와중에도 느끼지 못하던 압박감이다. 아니 일에 열중하는 낮에는 피곤한 줄 몰랐다. 오히려 즐거운 시간의 연속이었다.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손님들을 접대하다보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던 기억이 새로워졌다. 하루 동안의 감정의 변이가 이렇게 다를 수 있는가. 하루의 일과를 더듬어왔다.
새벽시장을 다녀와서 줄곧 곰탕을 끓였다. 손님을 맞이한 것은 12시가 채 안 될 무렵. 이때부터는 손님을 맞이하는 틈틈이 새로운 시도로 끓이는 곰탕을 체크했었다. 마지막 손님을 내보내고 종업원이 퇴근한 이후부터인 밤11시부터 지금까지 4시간동안 그는 주방에 홀로 남아 곰탕을 끓였다. 정확히 말하면 엊저녁부터 끓이던 곰탕을 완성하던 중이었다.
‘오늘도 실패다.’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치도록 보고파졌다. 어머니에게 달려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감정대로 행동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어찌 생각하면 이 대목에서 어머니를 그린다는 것은 나약한 자신을 비웃는 행위라고 볼 수가 있다.
‘어머니는 결국 넘어설 수 없는 벽일까.’
한탄에 젖은 목소리로 몇 번이나 중얼거리던 그는 그대로 꼬꾸라졌다. 피곤에 절은 몸이 그대로 주저앉은 것이다. 이와 동시에 주방의 전구불이 흔들거렸다. 바람이 없는 실내 공간에서 전구가 스스로 움직였다. 그가 쓰러지면서 전구를 건드렸을지도 몰랐다. 전구불은 몇 번 앞뒤로 흔들거리더니 정지했다.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서서 그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통나무처럼 쓰러져 있던 그가 슬며시 눈을 떴다. 강렬한 백열전등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일어서서 전등을 꺼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뿐이었다. 납덩이처럼 축 늘어진 몸은 좀처럼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대로 잠이 들 것이고, 어김없이 새벽 6시면 아내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이고, 그리고 ‘또 날 샜어’ 하며 그를 깨울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 그는 멍한 눈으로 그녀를 보며 한마디 할 것이다.
“일어나야지.”
소 재료와 불의 세기만으로
그가 택한 것은 전통 방식. 정직한 재료와 불의 세기 그리고 이들의 적절한 혼합과정 만으로 최고품질의 곰탕을 끓일 것을 자신에게 요구했다. 이렇게 끓인 곰탕은 분명 영양가도 충분한 보양식이 될 것이라는 믿음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최고의 곰탕에는 물론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전제가 붙어있었다. 냄새를 제거하는 물질을 사용하는 것은 지양했다. 어렵겠지만 오직 고답적(高踏的)인 방법만이 최고의 작품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는 역시 장인이었다.
장인이란 무엇인가. 일본의 작가 에이 로쿠스케는 장인과 관련,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장인일이라는 것은 진보가 없어. 진보하면 안 좋아. 연장이든 뭐든 옛날부터 써 온 것을 써야 제일 좋게 만들 수 있지.’
그러나 그가 택한 방법에는 상당한 고난도의 비법이 요구됐다. 쉽지 않았다. 될 듯 될 듯 하다가도 막판에 떠먹어보면 소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났다. 강한 의지력을 가진 그도 점차 지쳐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좌절했다. 서서히 그의 몸과 마음이 시들어갔다.
‘나의 역량이 이것뿐인가. 이는 영원히 풀 수 없는 난제인가.’ 하루 종일 말이 없이 지내는 날들이 늘어만 갔다.
그에 반해 손님들의 반응은 날로 뜨거워졌다. 점점 곰탕 맛이 최고라며 그의 손을 잡는 손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다. 부끄러운 마음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있고 싶었다.
그런 그를 보고 아내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남들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고도 돈만 잘 버는데….”
그 소리에 그는 몸을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내라. 그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자신감을 심어주며 보통 사람 같으면 나가떨어질 역경 앞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게 해준 사람이 바로 그의 부인이다.
우리 시대의 포정해우(庖丁解牛), 어머니를 뛰어넘다
그의 일과는 곰탕을 끓이는 반복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곰탕을 끓이는 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조금씩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똑같은 것을 반복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조금씩 달리 방법을 바꿔가면서 그는 미세한 차이를 찾아 헤맸다. 그는 지속과 반복의 차이를 아는 장인이다.
그가 훗날 최고의 곰탕, 냄새가 나지 않고 담백한 맛이 폐부까지 찌르는 곰탕을 만들어내는 성공비결은 바로 이 같은 지속의 법칙에서 나온다.
사람들이 성공에서 좌절하는 것은 그가 머리가 부족해서도, 의지가 약해서도 아니다. 잘 못된 길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그동안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다시 맨 처음, 잘못 들어섰던 부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수긍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같은 방식으로 곰탕을 끓였는데도 냄새가 날 때와 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미칠 것 같더군요. 그런 날이면 머리에 핏발이 섰습니다.”
그런 세월이 1년, 2년, 3년 흘렀다. 그리고 1년 ,2년, 3년이 또 흘렀다. 아내는 그를 말리는 것을 포기했다. 종업원들도 사장이 원래 그러려니 하며 체념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7살 때부터 어머니식당에서 음식과 인연을 맺고, 힘이 팔팔한 나이인 35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음식장사, 이제 그의 나이도 마흔 줄에 들어섰다. 그의 얼굴에도 잔주름이 끼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가 찾고자 하는 진정한 음식의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나놓고 생각해보면 이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나온 『시의전서』,『규곤요람』,『역어유해』등 고문서를 들여다봐도 그가 찾고자하는 곰탕비법은 없었다. 냄새가 나지 않은 순수한 곰탕 맛은 세상 어디에도, 그리고 어느 시대에도 없었던 것이다.
정리하자면 그가 추구하는 것은 전통을 뛰어넘은 새로운 음식이었다. 없는 것을 찾는 것은 애초부터 이뤄질 수 없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곰탕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한시도 해본 적이 없다. 그게 그의 슬픔이었다. 영원한 장인의 숙명이었다.
또다시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97년이 되었다. 그가 어머니 곁을 떠나 음식장사를 시작한지 9년째 되던 해다. 손님들의 곰탕에 대한 시비가 사라졌다. 간혹 있었던 비린 맛이 난다며 투덜거림도 없어졌다. 그러나 아직 희미하나마 냄새가 나는 것은 여전했다.
또다시 1년이 흘렀다. 98년 봄이 되자 비로소 그의 얼굴에는 맑은 미소가 떠올랐다. 몇날며칠을 연속해서 끓여도 누르스름한 우유 빛이 감도는 곰탕은 신기하게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재료, 불의 세기, 혼합의 비밀을 찾은 것이다. 비로소 어머니 맛을 뛰어넘은 것이다.
어머니 곁을 떠나 음식장사를 한지 10년 만의 일궈낸 쾌거였다. 채워질 수 없는 게 갈망이던가. 그토록 갈망하던 목표를 이뤘지만 뜻밖에도 그의 가슴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다음날 역시 그는 일찍 일어나 조용히 곰탕을 끓였다. 또 다른 갈망이 그의 가슴속에 똬리를 틀었던 것이다.
‘전쟁에서 이겼다고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칭찬한다면 최고 중의 최고는 아니다(戰勝而天下曰善, 非善之善者也)’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구절이다. 환호와 박수에 오염된 사람은 진정한 최고가 될 수 없다. 고수의 반열에 오른 그에게는 박수가 아닌 또 다른 도전이 남아있을 따름이었다.
“입에 착 감기는 곰탕을 만들려면 연륜이 필요합니다. 좋은 음식은 간단히 만들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그로부터 또다시 7년의 세월이 흐른 2005년 11월 현재. 그의 경지는 어느 정도일까.
“이제 국물만 떠먹어도 어느 부문이 부족했다는 것을 단번에 압니다. 예를 들면 오늘 점심식사로 나온 곰탕은 잡뼈 부문이 약했어요.”
이쯤해서 <장자> 에 나오는 포정해우(庖丁解牛) 고사가 떠오른다. 일명 ‘포정(庖丁)의 소를 잡는 최고의 솜씨’란 뜻이다
“제가 처음 소를 잡겠다고 했을 때는 소의 겉모습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지 3년이 지나니 어느새 소의 겉모습은 눈에 띄지 않고 소가 부위별로 보이게 되더군요. 그리고 또 19년이 흐른 요즘 저는 눈으로 소를 보지 않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소의 살과 뼈 근육 사이에 틈새를 봅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칼이 지나갑니다.”
포정의 얘기다.
어느 분야든 최고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시간과 노력, 그리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이겨낸 자만이 최고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곰탕요리법은 어떤 것인가.
“서른여섯 시간 동안 아홉 번을 나눠 끓입니다. 이 동안 불의 강약조절이 중요합니다. 솥은 당연히 무쇠 솥입니다. 전통방식과 전통도구로 끓여야만 제 맛이 납니다.”
역삼동으로 진격
직장이동, 이사 등으로 암사동을 떠나는 고객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어쩌다 암사동을 찾을 일이 있으면 어김없이 이사장을 찾아와 인사를 했다. 이들은 곰탕 한 그릇을 비우고 한 마디씩 했다.
“다른 곳에서도 장도리곰탕을 먹었으면 합니다.”
분점을 내달라는 요청도 많이 들어왔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빙그레 웃었다. 자신의 음식을 알아주는 고객이 고맙고, 그러나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돈 욕심 때문이라면 벌써 수십 개 수백 개 가맹점을 내겠지요. 제대로 물량 공급 시스템을 갖춘 상황에서 제대로 된 가맹점주를 만나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같은 요청은 점점 거세만 갔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전통음식에 대한 사람들의 선호도가 높아진 것을 파악했다. 그는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그해 강남 역삼동 차병원 뒷골목 식당을 인수했다. 그가 단지 식당 하나 늘리자고 역삼동을 택한 것은 아니다. 장도리곰탕 전국화에 앞서 서울 도심에 먼저 뛰어드는 수순을 택한 것이다.
암사동 시절처럼 3개월여 동안 그는 직접 식당을 꾸몄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직접 몸으로 부딪혀 보아야만 되는 습성 때문이었다.
노동은 그의 인생을 엮는 중요한 단서다. 그는 땀을 흘리는 일을 중요시한다. 노동을 통한 사회와의 교감이 그의 삶 방정식이다. 머리로만 이해할 때 모든 것은 명사일 뿐이지만 몸과 가슴으로 알면 동사로 다가온다.
“한국산 소나무로 내 외부 치장에 열중하다보면 지나가는 사람이 걱정하는 거예요. ‘또 한사람 쫄딱 망해서 나갈 것’이라나요. 이 자리에서 성공한 식당이 없었거든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결심했지요. ‘맛으로 승부를 벌이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2003년 11월 2층에 100평 규모의 식당이 문을 열었다. 장도리곰탕의 역삼동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역시 가게는 첫날부터 소문 듣고 밀려드는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장도리 명성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가장 강력한 마케팅 수단은 입소문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들이 어찌 장도리 곰탕을 알고 찾아왔겠는가.
그는 사람들의 입을 활용할 줄 아는 지혜가 남다르다. 대표적인 것을 하나 들자면 2004년에 개발한 얼음냉면그릇이다. 얼음 그릇은 남성에게는 사각이, 여성에게는 하트 모양이 인기다. 순수 수공예 제품이기에 가격이 비싸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무더운 여름날 역삼동 장도리를 알리는 첨병 역할을 한다. 그 신기함 때문에 방송에도 나오는 등 인기몰이와 매출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환불소동 음식박람회
길게 늘어선 고객들을 보며 이사장은 입안이 타들어갔다. 이제 막 점심시간이 지났을 무렵인데도 불구하고 손님 줄은 끊이지 않았다. 기쁘다고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음식이 동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긴급히 역삼동과 암사동 매장에서 팔던 곰탕을 수배했다. 이미 현장에서 팔던 곰탕은 떨어진지 오래다. 예상 이상의 손님들이 몰린 탓이다. “500그릇 정도 예상했는데 서너 배 이상사람이 몰렸어요.”
2004년 5월, 코엑스에서 열린 세계음식박람회 첫날의 일이다. 장도리가 외부행사에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행사장을 찾은 고객들이 한번 맛을 보고는 주변 사람들을 몰고 왔습니다. 암사동 시절부터 장도리 곰탕을 즐겨 찾던 고객들도 찾아주었고요.”
아무튼 장도리 곰탕은 고객들로부터 강력한 불평을 들어야 했다. 음식이 부족해 그날 환불한 티켓만 해도 무려 240만 원. 행사관계자들은 이 같은 환불소동은 처음 있는 일이라며 놀라워했다.
박람회 참가를 계기로 이사장은 자신의 곰탕 맛에 더욱 자신감을 얻었다. 이제 그가 평소 꿈꿔왔던 장도리 곰탕의 전국화 전략을 가동할 시간이 가까워졌음을 직감했다.
<장도리 곰탕> 전국화 초석을 닦다
지난 9월 장도리곰탕은 충북 진천에 1520평 규모의 식품공장을 경매로 낙찰 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무쇠 솥 등 전통도구와 방식으로 끓이는 곰탕을 대량 생산할 예정이다. 대량 생산체계를 갖춘다는 것은 그동안 꿈꿔왔던 장도리 곰탕 프랜차이즈 시대를 연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조만간 가맹점 모집에 나설 예정이다. 이미 확보한 예비가맹점주도 상당수 있어 프랜차이즈 사업은 제법 빠르게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동시, 이사장은 경기 용인 곤지암에 500평 규모, 경기 광명시에 600평 규모의 직영점을 연내 오픈한다. 직영점과 가맹점의 적절한 조화로 장도리 곰탕 전국화를 노린다는 전략이다.
가맹점 1호는 경기 덕소에서 나왔다. 가맹점은 우연치 않게 탄생했다. 평소 거래하던 은행의 담당 직원이 퇴직하자 전격적으로 가맹점을 내줬다. 몸이 불편한 가맹점주와 이사장과의 우정은 최근 해당 은행사보에 실리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다시 <지속>을 위하여
“최상의 것이 아니면 참을 수 없었습니다. 최고의 곰탕을 끓인다는 생각뿐입니다. 음식을 만들때 지금도 희열에 떨지요.”
맛 개발에 몰두할 때 그는 어떻게 해서든 원하는 곰탕을 끓이고 싶었다. 자신의 영혼을 팔아서라도 그는 원하는 곰탕비법을 만들고 싶었다. 곰탕 끓이는 데 전력을 기울이는 그를 보고 아내가 울었다. 힘들게 살지 말자고 흐느꼈다. 그런 아내를 달래면서 10년의 각고 끝에 그는 최고의 곰탕을 만들어냈다.
그의 성공비결은 ‘미루어진 만족’으로 볼 수가 있다. 나중의 웃음을 위해 당장의 만족을 연기해야 한다. 성공을 목표로 하면 일상의 행복은 포기해야 한다.
또 다른 성공 포인트를 꼽자면 그것은 남다른 목표에 있다. 전통방식인 불(火)과 소(牛)만으로 냄새가 안 나는 곰탕을 만드는 것이 꿈이었다. 원대하면서도 단순한 목표였다. 단순하다는 것은 일의 본질에 직접 도달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된다. 복잡한 것은 일을 모호하게 만들 뿐이다.
단순하고 강렬한 목표는 강한 동기부여를 낳는다. 베트남전의 경우 미국의 목표는 22가지나 되었다. 반면 베트콩의 목표는 단 한 가지. 월남 점령뿐이었다. 베트콩은 원대하지만 단 하나의 목표에 치중했다. 미군은 바로 코앞의 전투에 목을 맸지만 베트콩은 수년 앞을 내다보았던 게 승리의 원동력이 됐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가 이장우 사장의 성공포인트로 꼽는 것은 이러한 요인들이 아니다. 단 하나의 포괄적인 단어로 설명하고 싶다. 그것은 ‘지속’이다. ‘반복’이 아니다. ‘지속’이 있기에 ‘미루어진 만족’이 있었으며, ‘단순하고 분명한 목표’를 지탱할 수가 있다. 그렇게 말하면 너무 간단하다. 그래서 이 말을 아무도 쉽게 믿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모방하기가 어렵다. 또한 제2의 <이장우>, <곰도리 곰탕>은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에필로그, 송영감과의 만남
목이 탄다. 심한 갈증에 잠시라도 제자리에 있을 수 없다. 머리는 복잡하게 돌아가고 마음은 무엇인가 애타게 찾고 있다. 그러나 무엇을 찾는지 잘 모르겠다. 모르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언제부터 갈증을 느꼈던가. 하루 이틀 전이 아닌 것은 분명한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터. 창 밖의 맑은 햇살이 새삼스럽다. 문득 가을이라는 생각이 난다. 아, 그러고 보니 또 생각나는 것이 있다. 이장우 사장과의 만남이다. 그 무덥던 지난 여름, 첫 만남부터 그는 필자를 갈증 나게 만들었다. 애잔하면서 장중한 다소 모순된 기운이 그를 감싸고 있는 것을 본 순간부터 느꼈던 감정일 것이다.
이글을 쓰는 동안 황순원의 ‘독 짓는 늙은이’를 다시 읽어보았다. 이 시대 비극적인 장인이랄 수 있는 독쟁이 송영감의 아픔이 물씬 풍겨나는 줄거리다. 이 사장과 송 영감의 해후를 필자는 기대하지 않는다. 기대해서도 안 된다. 다만 외길 고독의 그림자가 두 사람 모두에게 드리워지고 있다는 생각은 첫 만남부터 줄곧 이어져 오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다가 열어젖힌 곁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늦가을 맑은 햇빛 속에서 송영감은 기던 걸음을 멈추었다. 자기가 찾던 것이 예 있다는 듯이. 거기에는 터져나간 송영감 자신의 독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 <외식경영>정보철 편집주간
이장우 사장은
61년부터 곰탕집을 하는 어머니를 따라 대전 울산 거제 서울 신월동 등지에서 음식장사를 하다. 89년부터 독립, 서울 암사동에 20평 내외의 장도리곰탕을 운영했다. 2003년에는 서울 역삼동에 100평 규모의 직영점을 오픈했다. 역삼동 직영점은 그해 12월 서울시가 지정하는 ‘자랑스런 한국음식점’ 선정됐다. 최근 1500여 평의 식품공장을 인수, 대량 생산체제를 갖추고 프랜차이즈 시장에 뛰어들었다. 장도리곰탕은 오직 불의 세기와 소 재료만으로 냄새를 제거한 것이 특징. 담백하고 입에 짝 붙는 맛으로 다양한 매니아 층을 두고 있다. 대전 출생. 55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