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 참는 개에 관한 글에 댓글을 달다 생각나서 본글을 써 봅니다.
개가 종소리를 듣고 침을 흘리는 경우는
종을 치고 나서 밥을 주면 얼마 안가서 개는 자동으로 종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리게 됩니다.
이는 개의 무의식에 그렇게 세팅되었기에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팅되지 않은 보통의 개는 아무리 종을 쳐도 침을 흘리지 않습니다.
이와 비슷한 현상이 종교에도 나타납니다.
마호멧을 모독하는 소릴 듣게되면 이슬람교인들은 분노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슬람교를 믿지 않은 기독교나 불교도에게 마호멧을 모독하는 이야기를 해도 그들은 분노하지 않습니다.
이슬람교에 대한 신앙적 감정이 기독교나 불교도에겐 없기 때문입니다.
최근 문제가 되는 교학사 국사교과서 경우
많은 사람들은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지역을 떠나 역사가 왜곡되는 것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수적인 일부 사람들에겐 그러한 우려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우려 하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와이프가 화가 나서 참기 힘든 소리를 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쪽 지역사람들은 원래부터가 블라블라블라...
제가 그쪽 지역사람이라 그런 소리를 듣게되면 뚜껑이 열리기 일보 직전까지 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잘 살아가는 것을 보면 이 공부한 보람이 나름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 지역사람이라 그런 소리를 듣게되면 속에서 뭐가 올라 옵니다.
제가 다른 지역사람이라면 와이프는 그런 말도 하지 않았겠지요.
대신 저의 속을 파내는 신의 어떤 한마디를 던졌을 겁니다.
아내의 목적은 저의 속을 뒤집는 것에 있지 저의 고향이 어디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서울 살면서 나도 고향을 그래도 조금 생각하는 놈이구나 합니다.
불교에서는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공부의 기회로 삼습니다.
자신안에 올라오는 감정과 관계된 무엇인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라고 합니다.
이름하여 경계를 만난 것입니다. 경계를 만났으니 공부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죠.
인격적 신을 믿는 종교를 추구하는 나라에서 태어난 경우는
인격적 신에 대한 감정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게 됩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신에 대한 감정이 형성되어 있기에
그 틀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의 경계이지만
그것이 그의 호리병이지만
사람들은 스스로 경계안에 있고자 하며
스스로 호리병안에 있고자 합니다.
경계를 벗어나면 큰일 나는 줄 압니다.
호리병을 벗어나면 더이상 세상이 없는 줄 압니다.
인간이기에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갓태어나 그는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하였기에 의지하는 속성이 그에게 내재되어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다 해도 꼭 그것이 인격적 신에 의탁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는 길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신을 믿는 종교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그리고 신을 믿는 종교에서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신을 믿는 종교에서 이야기 하는 수행의 방법으로 수행을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신을 믿는 종교에서 이야기 하는 수행의 범위를 넘어서게 됩니다.
브라만교 입장에서 보면 부처님은 그때부터 이단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불교도 입장에서 보면 부처님은 그때부터 인간이 가 보지 않았던 길에 들어선 것으로 보일 것이구요.
그럼 부처님이 가신 경지까지 경험하지 않는 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전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인가 하면 그건 또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수행방법이 아니라 부처님이 수행을 통해 결국 알게된 것이 무엇이냐에 있기 때문입니다.
드러난 가르침의 핵심은 연기법과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입니다.
각자의 인생과정을 통해 형성된 인식을 통해 위 가르침을 해석하여 가져 갈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인식하는 그 틀이 경계라고 합니다.
그 틀이 호리병이라고 합니다.
경계를 벗어나도 또 세상은 있습니다.
호리병을 나와도 역시 세상은 있습니다.
이름하여 중도입니다.
첫댓글 무화과가 침 흘리고 있음을 안다는게 참 대견스럽 답니다.
지금은 닦을 정도는 아니랍니다. 다른 사람이 흘리는 침을 보고 저거 닦아야 하는데 하기 보다는 상황에 따라 침이 흐르는 것을 그냥 놓아 두고 보기도 한답니다.
망치로 무릎을 치려하는구나 알고 있으면 망치로 무릎을 쳐도 발에 힘을 주면 발이 올라가지 않기도 하더이다.
하물며 조건이 이미 주어진 것은 그 보다 조금 쉽겠죠. 흘리고 흘리지 않고 떠나서 이미 청정하니 온 국토까지 갈 필요는 없는것 같습니다.
나라마다 변화의모습이 조금씩 다르지요.
인도는 오천년간이나 카스트제도를 유지하였고 지금도 그 영향을 받고 있지요.
프랑스는 황제를 없애버렸지만 영국은 아직도 존재하지요. 미국은 흑인이 대통령이구요. 그래서 흑인들에게 많은 위안이 되었을 겁니다. 나라 전체적으로도 생각이 조금 바뀐 계기로 작용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이니 우리의 길을 스스로 만들어 가 보는 것!
올해 걸린 감기엔 감기인가 합니다.
병자년 피난길에선 임진년으로 모두 경험했지 싶은 생각이었는데... 이기 뭐꼬?
뭐긴...심술부리는 것이지...
누가...낸들 알간...
그래?...그래...
이름하여 무명이라 한다지요!
종소리와 밥은 인과관계 없는데 인위적으로 만들었죠.
몇천년 계속되면 전통이 되고 진리로 여겨지기도 하죠.
오래된 것 우리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죠!
정사유는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죠.
그것이 자신의 인식 범위를 넘어서면 판단보류하는 것이구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곧바로 신의뜻이라 말해온 것이 인류의 전통 중 하나이지만...
이해불가하더라도 판단보류하고 누구에게도 위임하지 않는 자세. 어렸을때는 부모를 믿고 따르는 것이 필요하지만 이제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 생각하면 믿고 따르는 그것에서 독립하여야지요.
드러난 경전에 나타난 세존의 가르침은 일반적인 인식내의 것과 일반적인 인식 밖의 것 모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기하신 부분이 있고, 들어내어 말씀하신 부분이 있죠. 개인에 따라 인식가능한 범위는 천차가 있으나, 그렇다고 자신이 모르는 것에 성인과 전통을 무조건 믿고 따라야 되는 것이 아니죠. 한 방법이 될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구구단을 무조건 따라 외우고 배운 것이 아니죠. 왜 이곱하기이는 4인지를 궁구하면서 외우고 배우는 사람도 있답니다. 자신의 경험이 다가 아닌 것은 아시죠. 2곱하기2는 2를 두번 더하는 것을 곱셉으로 표시할 때 그렇게 표시하는 것이고 그런 다음에 외우든지 하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는 외우지 않기에 계산기로 계산하는 것이구요. 그리고 수학과 형이상학은 조금 차이가 나는 분야인데요. 그리고 어렸을 때 믿고 외우는 것이 좋겠지만 커서는 왜 그런지 조금 따져보는 것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요. 그럼에도 어렸을 적 습관대로 그대로 믿고 따르고자 한다면 그것은 생각없이 침흘리는 것입니다.
모든 개가 종소리를 듣고 침흘리는 것이 아니며, 설사 그 지역 개가 모두 그러하다 하여도 종소리와 침흘리는 것은 인과관계가 인위적으로 설정된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죠.
2+2=4라는 산술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서양에서는 아바비아숫자가 들여오기 전까진 로마자로 산술을 했습니다. 당시엔 특수층만이 산술을 할 수 있었죠. 아라비아숫자가 들여오고 나서 누구나 할 수 있는 토대가 성립된 것이구요. 지금의 2+2=4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흘렀으며, 초기엔 특수층이 아닌 사람들이 산술을 할 수 있게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법으로 금하기 까지 한 것을 보면 특수층들은 항상 자신들만의 영역을 유지하고자 하죠. 알고 보면 특수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한글을 반대한 조선시대 양반들과 비슷해도 너무 비슷하죠.
수학은 형이상학과 다른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시 돌아가서 종소리에 침을 흘리는 자신을 보면서 왜 종소리에 침을 흘리는지를 궁구하는 것이죠.
채동욱총장의 사안과 같은 경우에서 왜 각각 다르게 판단하느냐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왜 판단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침은 이미 흘렀으니 계속 흘리면서 살 수도 있지만, 이제 컸으니 조금 생각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하여 보니 종소리와 침 흘리는 것이 어떤 관계가 없다는 것이고 그렇게 길들여져 있었다는 것이죠.
생각해 보니 제가 길들여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길들여졌음을 알아채면 그때부터는 자신이 원하여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채동욱총장의 경우에서도 길들여진 판단이 아닌 제3의 판단을 할 수 있고, 판단을 보류할 수도 있는 것이죠.
자신이 길들여져 있어 침을 흘리고 있음을 알아채는 것!
이제 컸으면 계속 길들여진 그대로 살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그때그때 선택하며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요. 궁구할 것이 없다는 것은 관심이 없는 경우이거나 모두 이해했다는 것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삶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바람처럼 불어왔다 가는 것이기도 하는 것이구요.
님에게는 삶의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 것이 조금 아쉽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겠지요.
각각 펼쳐져 가는 삶이 다를 수 있기에 이해하지만...
통연명백하지는 않습니다. 얼핏 보았다 정도.
상대적관념 이전의 자리가 잡히길 원하면 언젠가 그런 날이 오겠지요.
삶이 주는 나름의 자극을 원하는 상황이니,,,
세상이 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에서 그 또한 자신의 과정을 밟아가는 과정까지.
그런 과정중에 서로 부딪힐 수도 서로 도울 수도 있는 것이겠죠.
님의 건승을 빕니다.
인류의 삶은 기준을 세워가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님은 태어나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기준을 배워왔죠. 저 또한 예외가 아니구요.
기준을 넘어선다는 것은 기준을 내려 놓는다는 표현도 좋지만 기준에 매이지 않게 되는 것에 가까울 수 있답니다. 지금껏 배워온 그 기준이 단박에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저에겐 아닌 것으로 경험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