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일류 문화 국가 창조의 중심 신동명천제단 카페지기 대조영입니다. 이번 주간 훈화는 <제89회 어린이날 특집 - 대한민국 어린이들의 영원한 우상 소파(小波) 방정환 선생> 입니다.
회원 여러분, 어린이날이라 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십니까? 대한민국 공휴일 중의 하나, 부모들이 어린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어린이가 평소에 가지고 싶어했던 물건 등을 선물해 주는 날 등등 다양한 대답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이날은 지금 세계 여러 나라에서 기념일로 정해져 있는데, 나라와 종교 및 문화권에 따라 기념일이 서로 다르며, 대한민국과 일본은 5월 5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회원 여러분, 대한민국의 어린이날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소파 방정환 선생입니다.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 선생은 1899년에 태어나 할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어머니와 누나가 일찍 죽고 새어머니가 들어왔으나 가깝게 지내지 못하고 글짓기와 그림 그리기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7살 때 삼촌을 따라 갔다가 보성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보성소학교에 입학하려면 댕기를 자르고 머리를 깎아야 했는데, 이를 안 그의 할아버지는 우리 몸은 부모가 준 것이므로 함부로 다치면 큰 불효가 된다며 펄쩍 뛰었으나 공부를 하고 싶다는 손자를 존중하여 이를 말리지 않았습니다.
10살 때 방정환 선생은 <소년입지회>를 조직하여 동화구연, 토론회, 연설회 등의 활동을 했는데, 당시 방정환 선생은 어물전과 미곡상을 운영했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고모에게서 식량을 얻어야 할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방정환은 가업을 잇기를 바랬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1913년, 서울미동초교를 졸업하고 선린상고에 입학했습니다. 그 해, 이광수가 발간한 잡지 <청춘>에 보낸 글이 당선되었습니다. 그러나 새어머니가 병석에 눕고 집안 경제 사정이 더욱 나빠지자, 2년만에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다시 1916년, 방정환 선생은 집안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조선 총독부 토지 조사국에 취직하여 서류 필사를 맡았으나, 조선 총독부 토지 조사국이 당시 한국인들의 토지 수탈을 담당하는 기관이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동포의 땅을 뺏는 일을 하며 돈을 벌기 싫다며 사퇴했습니다. 직장을 그만둔 방정환 선생은 천도교 청년회, 개벽사, 천도교 소년회 등의 천도교 기관들과 어울렸습니다. 아버지가 천도교 신도였으며, 스스로도 천도교의 인내천 사상에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18년, 천도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 선생의 셋째 딸과 중매 혼인을 하고, 그 해에 청년문학단체인 청년구락부를 세워 그 곳에서 5년간 활동하며 본격적인 어린이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손병희 선생이 운영하던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듬해, 3·1 운동이 터지자,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돌렸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습니다. 일제 경찰에게 붙잡히기 전에 증거를 없앴기 때문에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지만, 독립신문 발행에 동참한 청년구락부원들은 고문을 견디지 못해 옥사했고, 방정환 선생도 고문에 시달렸습니다.
이후 방정환 선생은 일본으로 유학을 갑니다. 당시 3·1 운동의 영향으로 헌병 경찰 통치 체제를 대체한 문화 통치 체제하에서 이루어진조선 총독부의 우민화 정책으로 한국에서는 높은 수준의 학문을 공부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일본으로 간 방정환 선생은 동양대 철학과에 입학하여 아동 문학과 아동 심리학을 공부했습니다. 계몽사의 <방정환> 전기에 따르면 당시 일제 경찰이 형사를 보내 방정환 선생을 감시했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의 영향으로 어린이 문학이 발전하여 어린이용 책이 널리 팔리고 있었지만, 한국의 어린이들은 그렇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유학 기간인 1920년 내지 1923년 사이에 천도교 잡지인 <개벽>에 사회주의 성격의 우화들을 연재하고, 같은 잡지 3호에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번역해서 발표하였는데, 이 글에서 대한민국 사상 최초로 '어린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쓰인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1921년에는 외국 동화를 번역한 <사랑의 선물>을 출판했는데, 이는 방정환 선생이 만든 유일한 단행본으로, 변역 동화 10편이 실려 있었다고 합니다.
동시에 방정환 선생은 1921년, 서울에서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고 어린이들의 인격을 존중하자는 내용의 순회 강연을 벌였습니다. 1923년에는 한국 최초의 아동 잡지인 월간 <어린이>를 창간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수탈로 먹고 살기가 힘들어 지면서 독서를 사치로 여겼던 분위기와 엽서에 이름과 주소를 적어서 보내주면 돈을 받지 않던 초기 구독 신청 방식으로 인하여 큰 인기를 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방정환 선생은 동화 구연을 통해 <어린이>를 홍보했고, 이후 많은 아동 문학 작가들의 이름이 실림으로써 <어린이>는 한국 아동 문학계의 발전에 공헌했습니다.
다시 그 해 5월 1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동료 유학생들과 함께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 색동회를 창설했습니다. 1927년에는 어린이 단체를 통합한 '조선소년연합회'의 위원장을 역임하며, 아동 소설 및 아동 연극 창작과 외국 동화 번역에 힘썼으며, 세계어린이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이렇게, 1931년 7월 23일 과로로 쓰러져 '문간에 검정말이 모는 검은 마차가 자신을 데리러왔으니 가야겠다.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을 때까지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의 존엄성과 지위 향상을 위해 힘썼습니다.
색동회의 창립일인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고, 어른들이 '어린것', '이놈', '아이', '애새끼' 등으로 천하게 불렀던 어린이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뿌리내리고자, 어렸을 적부터 어린이 운동으로 평생을 바쳤던 소파 방정환 선생. 이분은 몸소 한국인들의,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크게 바꾸어 주고, 대한민국 어린이들이 누릴 수 있는 문화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라는 짧지만 깊은 뜻을 지닌 문장을 중얼거리고 그 뜻을 실천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그날까지 소파 방정환 선생은 대한민국 어린이들의 영원한 우상으로 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