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대골'(官垈谷)이라고도 하는데 , 연해불에서 동해 휴게소 쪽으로 펼쳐진 골짜기를 말한다. 크고 넓다는 뜻으로 '도깨비골'이라고도 한다.
구전에 의하면 어떤 억센 분이 말을 타고 강릉에 갔다가 늦어져 이곳을 지나는데, 이쁜 색시에게 홀려"오빠 같이 가자"하니 '그럼 내뒷 등에 타라"고 하여, 떨어질까봐 꽁꽁 동여 가지고 집에 왔었는데 색시는 없고 빗자루만 뒤에 꽁꽁 묵여 있더라는 것이다.그래서 화가난 이남자는 그 빗자루를 모탕에 놓고 도끼로 내리치니 빗자루가 잘리면서 핏물이 튀었다고 하여 빗자루에 피를 묻히는 것을 금하였다고 한다.
고요한 날이면 거기서 큰소리를 지르면 "사람 살려라" 하는 소리가 들려, 이상해서 등불을 켜가지고 가서 보니 수풀 밑에서 들리는데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도깨비는 여자들이 머리를 빗을때 피가 빗에 묻으면 빗에있던 것이 나와서 도깨비가 된다고 하고, 또 부인들이 경도가 있을때 빗자루를 깔고 앉았다가 내 던지면 그것도 도깨비가 된다고 토속적인 구전 전설로 나와있다.
♠ 심동로(沈東老) 묘와 일출문(日出門)
동호동에 연안된 삼척 심씨 시조 심동로(沈東老)의 묘소에 얽힌 전설로서 이 묘소의 정동향(正東向) 바다쪽에는 향로봉이라고 부르는 조그마한 산이 있다.
해변에 접한 이봉에 육지 산쪽으로 큰 구멍이 뚫린 바위가 있었는데 이름을 일출문이라고 하였다. 일명 일월문이라고도 불렀는데 아침해가 뜨면 일출문 구멍을 통하여 햇빛의 초점이 동호동 뒷산의 한 곳을 비쳤던 바 심공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바로 그 빛이 비치는 장소에 영안케 하니 오늘날까지 명당이라 전하는 심공의 묘소이다.
그후 진주군 심동로의 시제(時祭)는 매년 9월에 날을 정하여 제를 올리게 되는 바, 그 당시의 제도에 의하면 시제에 바치는 어물(생선)은 인근 어촌인 어달동 대진에서 어민들이 마련하여 바쳤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부터 150여년전 어느 해 심공(沈公)의 제일(祭日)이 가까이 왔는데 연일 파도가 거칠어 도저히 고기잡이를 할 수 없게 되자 어민들은 심히 걱정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만약 어물을 장만하지 못하면 당시의 세도가인 심씨 문중에서 추상같으 문책이 떨어질 것이 번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두타산(頭陀山)의 중 연용섭(延龍攝)이 시주를 얻고자 이 마을에 들렀다. 이때 한 주민이 중에게 "우리는 심씨 시형(時亨)에 바칠 어물을 날씨 탓으로 준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니 대사께서 좋은 방도를 일러주시면 우리들은 시주를 아끼지 않겠다"고 사정을 했다. 이 말을 듣던 중은 엄숙한 표정을 띠며 이렇다 저렇다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다음날 이 고승은 진주군의 묘소에 나타나 심씨 종중이 모인 자리에서 "이 묘는 일출문바위의 구멍에서 햇살이 비쳐오기 때문에 후손의 대성(大盛)이 어려우니 저 일출문 바위를 파괴해 버리고 신도비를 없애는 것이 길(吉)하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 버렸다. 이일이 있은 후 심씨문중은 중이 꾸민 말을 믿고 그 바위를 깨버리고 신도비도 바다에 던져 버렸다고 전하기도 하고, 그러한 곤욕을 받지 않기 위해 고승의 말에 따라 어부들이 몰래 그 바위를 깨어 버렸다고 전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지금은 일출문 바위는 흔적도 찾아 볼수 없으며 동로공의 묘소만 동해를 바라보며 명당을 자랑하듯 따뜻한 양지에 아담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강감찬과 개미
지금 망상학교 앞 철길 옆에 들축나무골이 있는데, 그 곳은 들축나무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고려때 강감찬 장군이 강릉부사로 있다가 남쪽으로 가는 길에 그 들축나무에 기대어 쉬고 있는데 개미들이 자꾸 덤벼들어 귀찮게 하였다. 장군은 쥐고 있던 지팡이로 금을 쭉 그었대. 그랬더니 개미들이 전혀 달려들지 않았고, 지금도 그 금이 그어져 있던 자리에는 사람이 누워 자도 개미들이 달려들지 못한다고 전해진다.
강감찬과 모기
옛날 강감찬 장군이 강릉부사로 있다가 남쪽으로 가는 길에 뒷뜨루(현 북평동)에 와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모기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아무리 뒤척거려도 잠을 잘 수 없자 장군은 종이에다 방을 써서 창밖으로 뿌렸다. 그러자 모기들이 울지도 물지도 않아 잠을 편히 잘 수 있었고 지금도 뒷뜨루에있는 모기는 사람을 물지 않는다고 한다.
아기장수 이야기
아기장수가 태어났던 집터는 지금은 토지정리를 해서 없어졌지만 쌍용양회 부근이라고 전해진다. 그곳에 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있었는데, 그의 아내가 "배선남"이라는 애를 낳고 태를 자르 려고 하니 애가 안보이는 것이었다. 놀라서 남편을 부르고 관솔불을 훤하게 하고 찾아보니 이제 막 태어난 아기가 실공(시렁)위에 냉큼 올라가서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는 장수가 나면 역적이라 해서 죽이고 3대를 멸하는 시대라 부부는 이를 염려하여 맷돌로 아기를 쳐 죽였다. 그러자 근처 굴에서 용마가 나 세번 울고 사라졌다고 한다. 근 300년전 이야기 이지만 용마가 난 곳은 도경역 근처에 있는 굴이라고 전해진다. 그 일이 있고 난뒤 그 집안에는 벙어리가 속출 하는 등 거의 다 부실하였다고 한다.
댐지실 부자
옛날 심곡리 댐지실에 김씨 부자가 살았는데, 어찌나 인색한지 시주나온 스님에게 쌀대신 마굿간 걸금을 잔뜩 퍼 주곤 하였다. 봉변을 당한 어느 스님이 집 주위를 한번 흘끔 보고 가더란다. 그후 몇일이 지났는데 그 스님이 변장을 하고 다시 와서 집뒤에 있는 묘자리가 돼지형상이라서 조상이 돼지로 되어 꿀꿀 거리겠다며 묘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주인은 조상이 돼지가 된다니 겁도 나지만 한편 그자리가 명당이라는 말을 들었던 차라 망설이다가 "묘를 파서 이상이 없으면 당신 목을 내놓으라"고 하고는 묘를 파는데, 파다 보니 돼지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일이 이쯤 되니 이장을 할 수 밖에. 사실 스님은 모욕에 대한 앙갚음으로 주인을 속인 것이었다. 그 묘자리는 김씨부자 집에서 일하던 박씨가 샀는데 그 사람은 그 자리가 명당이라는 것을 알고 아버지 묘를 이장했고, 가문이 잘 되어 자손중에 참의벼슬까지 나왔다고 한다. 그 후 김씨네는 집안이 망하고 자기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다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바 위
♠ 용암(龍岩)과 철불(鐵佛)
이 바위는 구 삼화사(三和寺) 터 앞에 있는 바위로서 삼화사사기(三和寺史記)에 의하면 신라(新羅)때 여래불(如來佛) 삼불(三佛)이 서역(西域)에서 동해(東海)로 건너와 인연이 깊은곳을 찾던 중 이곳을 발견하고 한 부처는 삼화사에, 한 부처는 지향(智香寺)사에, 나머지 하나는 근덕(近德)영은사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이때 삼불(三佛)을 태우고 온 용(龍)은 바위로 변하였는데 이가 곧 용암(龍岩)이다.
현재에도 용암 윗면에 삼불이 앉았던 자국이 완연히 남아 있으며 삼불 중의 하나가 현재 삼화사 좌불암에 보관되어 있는 철불(鐵佛)이라고 한다.
♠ 빨갛게 얼룩진 고부석(姑婦石)
옛날 망상(妄想) 마을에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사이좋게 살고 있었다.
어느해 여름 긴 장마가 계속되다가 모처럼 햇빛이 나오자 두 고부(姑婦)는 냇가에 나가 밀렸던 빨래를 빨았다.시어머니는 너무 날씨가 무더워 빨래를 그만두고 목욕을 하게 되었다. 오랜 장마뒤라 물살이 세어 시어머니는 자신도 모르는 순간 냇물에 휘말려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자 빨래하는 며느리에게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요청을 하였다. 열심히 빨래를 하던 며느리는 위급한 목소리를 듣고 당황하여 물속에 뛰어들어 시어머니를 구하려 했으나 오히려 며느리도 소용돌이에 휘말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후 냇가 양쪽에 빨갛게 얼룩진 돌이 생기고 비오는 밤이면 여자의 괴이(怪異)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며 이 바위를 고부석(姑婦石)이라 부르게 되었다.
♠ 어진 호장(戶長)과 까막바위
묵호항에서 해안을 따라 북으로 300m지점에 높이 10m에 유난히 검은 색을 띠고 깍아 세운 듯한 해변에 우람한 모습을 나타내고 서 있는 바위가 곧 까막바위다.
이 까막바위에 대한 전설이 구구하지만 공통점을 지닌 전설에 의하면 이조 중엽(연대미상) 지금의 묵호동이 망상현에 속해 있을 때 이야기인 즉 이곳 마을에 인품이 온후하고 덕망있는 의로운 호장 (戶長:지금의 통·리장)이 살고 있었다. 춘궁기(春窮期)가 되면 마을의 가난한 사람은 한 집도 빼지 않고 곡식을 나눠 먹고 지나는 걸인 까지도 후한 대접을 해 주는 어진 호장으로 부략민의 존경을 받는 분이다.
그런데 동해안에는 가끔 왜구가 침입하여 재물을 빼앗고 주민을 학살하고 부녀자를 농략하기 시작했다. 이때도 그 호장은 왜적에게 호통을 치며 싸웠으나 맨손으로 당해 내기는 속수무책이었다. 왜적은 약탈한 재물과 그 호장을 묶어 배에 싣고 항해(航海)하려 하자 마을의 전주민이 삽, 괭이, 곡괭이, 막대기를 들고 왜적들에게 그 어진 호장을 못 데려간다고 했으나 무참히 죽어만 갔다. 분노에 떨던 호장은 왜장에게 크게 노하여 하는 말이 "비록 내가 너희들에게 육신은 죽어도 너희들을 다시는 이곳에 침범하지 못하게 하리라"라고 꾸짖자, 맑던 날씨가 갑자기 어두워지며 천둥번개가 치고 파도가 밀어 닥쳤다. 그러자 호장이 탄 배가 뒤집혀 모두 죽고 말았다.
이때 남은 한척의 배가 달아나자 거대한 문어 한 마리가 난데없이 나타나 달아나는 왜수의 배를 내리쳐 배는 산산조각이 나고, 왜구는 모두 죽었다. 다음순간, 하늘은 맑게 개고 파도가 잔잔해지자 한 떼의 까마귀가 몰려들어 왜구들의 시체를 뜯어 먹었다.
그 때 나타난 큰 문어는 어진 호장이 죽어 변신한 혼이라고 말하며 그로부터 이 마을에 왜구의 침입이 끊어졌다. 이 까막바위 밑에 큰 굴이 두 개 있는데 그 호장이 영혼이 살고 있다고 전해 오고 있으며 해녀들도 이 근처에는 가지 않고 있다. 어느 날 한 주민이 까막바위 굴 밑을 들여다보니 큰 문어가 있어 놀라 되돌아 오는데 갑자기 수십마리의 까마귀 떼가 덮치고 물어 뜯으며 울어댔다고 하며 죄지은 사람이 까막바위 밑을 지나면 문어에게 잡혀 죽었다고 한다.
♠ 여우가 변한 서구암(瑞咎岩)
서구암은 북평 취병산(翠屛山) 서편 백월산(白月山) 밑에 있는 바위이다.
이 바위는 서구라는 여우의 화신인 노파가 죽어 변하였다는 전설로 서구의 손자국 흔적이 남아있다.
서구는 천년 묵은 여우의 화신으로 신통력과 괴력(怪力)을 가지고 있었다. 인근 주민이 자기에게 거슬리면 심통을 부려 농작물에 피해를 주고 또 질병을 퍼뜨려 주민을 괴롭혔다. 특히 어린이에게 천연두를 퍼뜨려 죽게 하므로 주민은 서구를 무척 두려워 하였다. 서구의 장난이 무서워 이곳을 지나갈 때 수십명의 무리를 지어 소(牛)와 제물(祭物)을 바치고 지나갔다. 이처럼 서구의 작폐로 인근 주민이 불안과 공포에 전전긍긍하고 있던 차 이곳 출신의 소문난 효자 최진후(崔鎭厚)와 힘센 역사(力士) 김면(金眠)이 서구의 피해로부터 주민들을 구하기로 하고 합심하여 서구와 싸워 서수 머리를 쑥으로 뜸을 100여 곳에 놓자 서구는 3일간 정신을 잃고 있다가 죽어갔다.
이때 서구가 죽어 바위로 변하였는데 이 바위가 서구암이다
♠ 화랑들의 휴식처 유천암(溜天岩)
부곡동 제1 수원지(과거 동해시 북부일대의 상수원)에서 500m지점 승지골로 가 는 도중 골짜기인 듯한 지형의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는 이 유천암은 풍류객을 위하여 누가 만든 것 같이 규모가 반듯하고 아담하여 마치 안방에 들어선 느낌을 주는 듯 하다.
바위에 유천(溜天)이라고 새겨진 것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선인(仙人)이 이곳에 놀다 필적을 남기고 갔다고 하며 신라시대에 화랑도들이 싸움중에도 이곳에 와서 즐겼다고 전하기도 한다.
바로 위 산턱에 국경 경계지주로 보이는 입석(立石)이 있으며 곡절배회하는 부곡천 물은 전설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고만 있다.
♠ 할머니 모습의 할미바위
일명 마고암(麻姑岩)이라고도 하는 이 바위는 북평동 전천 하류 구호(龜湖) 밑 해변 기암 괴석상에 고인돌 같이 얹혀져 있다.
주위 3m, 높이 2m의 약간 타원형의 암석인데 암석반위에 얹혀져 있으면서 한사람이 밀때나 여럿이 밀 때에도 언제나 일정하게 흔들리는 휘귀한 바위이며 바위의 모양이 할머니 모습 같아 할미바위라고 부르며 여기에 얽힌 전설을 아는 이는 없다.
동해시가 산업기지 배후도시 건설을 할 때 기점을 바로 이 할미바위에서 잡았으며(반경 12km) 또 인근에는 소나무와 잔디가 있고 바다를 겸해 이곳을 찾는 탐방객이 많다.
마고암(麻姑岩)
崔潤祥
바다를 짓누르고 하늘을 치받치고 넓은 세상에 우뚝 앉았구나
마고 할멈 흡사하니 천년 묵은 돌이 둔갑했느냐?
♠ 노고암
망상동 노봉 바닷가에 위치하여 옛날 임씨성을 가진 노인이 늙으막하게 여자 하나를 만 났는데 잘 생긴 여자였다. 10년 정도 같이 살다 용이되어 승천하려다 그만 바위가 됐다.
나는 천년 묵은 구렁이이니 부르지 말라는 당부의 말을 잊고 승천하려는 여자를 부르고 말았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폭우가 쏟아지면서 두 사람을 휩쓸어 간 다음 그 자리에 바위가 두 개가 불쑥 살아났다.
지금도 노봉 바닷가에 가면 바위 두 개가 서있다.
♠ 형제의 혼이 변한 형제봉(兄弟峰)
망상동 만우에 높이 485m의 쌍봉이 형제처럼 나란히 마을을 내려보고 있는 바 마을사람들은 형제봉 이라고 한다.
이 형제봉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이 마을에 부모에 효도(孝道)하고 형제간의 우애 (友愛)가 돈독한 젊은 형제가 살고 있었다. 형제는 가난한 살림이라도 지성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행복하게 살아 마을 젊은이의 모범이 되었다.
어느 해 나라에서 난(亂)이 발생하자 효성심과 같이 나라에 대한 충성이 강한 형제는 전쟁에 자진 출전 (出戰)하여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쟁터에서 전사하였다. 이들이 전사한 후 뒷산에 두 봉우리가 솟아 올랐고 마을 사람들은 두 형제의 넋이 부모님의 안위가 걱정되어 생겨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형제봉이라 불렀다.
현재도 이 형제봉은 수려단아(秀麗端雅)한 모습으로 마을을 내려다 보며 산상(山上)에는 냉천(冷泉)의 맑은 물이 흘러내려 가뭄이 들 때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도 한다.
사 문 재
시 승격시 발한 3,11,12리를 합쳐 士文洞이라 하였음. 특히 망상과 발한을 넘나드는 조그마한 고개마루턱이 있는데 이곳을 "士文재"라 한다. 일설레 의하면 신라와 고구려의 전쟁이 심할때 병란을 피해 이 고개를 넘어오다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하여 "死門재"라 하였다고 하는데 그 후 삼국이 통일되고 오랑캐를 물리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경주에서 강릉방면으로 가던 김유신장군이 이 고개의 유래를 주민들로부터 듣고 사문재에 올라 고인들의 명복을 빈 다음 고개 이름을 "士文재"라고 고쳤다고 한다.
다른 일설에 의하면, 이조 숙종때 심곡에서 약천 남구만선생이 학문을 연구할때 약천선생에게 학문을 배우기 위해 삼척,북평,발한 등지에서 많은 선비들이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 하여 이 마을을 "士文재"라 했다고도 한다.
강
♠ 임진왜란과 전천(箭川)
이 하천을 박곡천, 북평천, 소고리천(所古理川), 살천(薩川)이라고 하는데 청옥산(靑玉山)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백복령(百福嶺)에서 흐르는 물이 합쳐 북평평야를 가로 지르고 동해(東海)로 뻗어 흐르는 하천이다.
구전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 의하여 두타산성(頭陀山城)이 함락 될 때 교전이 심하여 전사자의 유혈이 하천을 붉게 하였으며 화살이 물에 떠서 강에 가득차 흐르므로 이때부터 이 하천을 전천(箭川)이라 불러 오늘에 이르렀단다.
강의 연장은 오십리, 하구(河口)는 넓어서 폭 300m, 길이는 600m나 되는 담수욕당(潭水浴場)이다. 연어, 은어, 황어, 흑현(黑峴)이 많이 서식하고 있으며 지금도 동해항 뒷편으로 역사를간직한 채 서서히 흐르고 있는 이 하천(河川)은 현재 농·공업 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 고대(古代)격전지 마상천(馬上川)
망상동의 넓은 들판에 농업용수로 사용되는 조그마한 하천이 있다. 이 하천을 마상천이라 하는데 이 지역은 삼국시대 고구려(高句麗)와 신라(新羅)의 접경지여서 자주 접전이 벌어지던 곳으로 주변에 군사 요충지임을 증명하는 고현성지와 같은 장소들이 많다.
군사들이 진을 쳤던 곳, 병마의 훈련장으로 말을 기른 곳, 말 달리기 연습장 등의 흔적들이 그러하다.
그때당시 이 하천에 말이 쉴새없이 드나들어 항시 발이 하천에 서 있다 해서 마상천이라 불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입 석 (立 石)
삼국시대 신라의 실직과 고구려의 하슬라의 경계지주로 추정되는 이 입석은 부곡동 승지골로 통하는 길목에 2 의 화강암으로 된 지주석이다. 이 지역에서는 군사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가마솥 모양의 토기와 화살촉 등이 많이 출토되었고, 뒷산 능선에는 방호선을 쌓은 흔적이 남아 있으며, 그 당시 향로봉과 송이고개로 이어지는 구릉에는 고구려 군사가, 평릉과 부곡에는 신라 군사들이 매복하고 치열한 전투가 계속 되었다고 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입석은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임을 표시하는 경계지주가 아닌가 추정이 된다,
☞ 형제봉(兄弟峰)
동해시 망상 괴란동과 만우동에 연결되어있는 산전설 1 ▶형제봉에 얽힌 구전에 의하면 옛날 이 마을에 부모에 효도(孝道)하고 형제간의 우애 (友愛)가 돈독한 젊은 형제가 살고 있었다. 어느 해 나라에서 난(亂)이 발생하자 형제는 전쟁에 자진 출전 (出戰)하여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들이 전사한 후 뒷산에 두 봉우리가 솟아 올랐고 마을 사람들은 두 형제의 넋이 부모님의 안위가 걱정되어 생겨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형제봉이라 불렀다. 전설 2 ▶옛날 마음 착하고 의좋은 형제가 마을에 살다가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 지며 조수(해일)이 일어나 마을이 물에 잠기자 두 형제는 각기 다른 봉우리에 올라 가서 살아남았다고 전해진다.그때의 조수(해일) 온 마을을 덮었다 하며 형제 봉 정상에 아직도 조개 껍질이 발견된다고 한다.형이 올랐던 봉우리는 형봉, 동생이 올랐던 봉우리는 아우봉이라고 하고, 두 봉우리를 합하여 형제봉이라고 한다.
☞ 두타 산성과 피소
동해시 전천 상류 삼화동 홍도마을 입구에 위치한 피소는 붉은 피가 가득하여 '피가 고였던 소, 즉피소'라 하였다.임진왜란 당시 두타산성의 의병을 공격하기 위하여 피소(지금의 삼화동 입구 쌍용 양회 집수장 부근)에서 공격 통로를 찾던 중 빨래하고 있던 마고 할머니의 제보로 지름길을 알게된 왜병이 이기리의 더바지재를 넘어 두타산성을 배후에서 공격하여 성은 함락되었고, 왜병과 우리 의병 주민 등 2000여명이 전멸하여 붉은 피가 비린내골(피내골)을 덮었으며, 파소에 흘러내린 피줄기는 오랫동안 파소에서 맴돌았다 하여 파소. 피소라 이름하고 또 화살이 강을 메웠다 하여 전천(箭川):살천(薩川)이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자료: 동해문화원, 관동대 박물관의 공동지표조사 보고서와 구전에 의한 설화를 토대로 작성>
☞ 초록봉(草錄峰) 장수(將帥)바위
위치: 동해시 천곡동 산 342-24 번지
그 옛날 하느님이 혼탁한 세상에 장수를 보내어 세상을 바로잡게 하였다 하고 임무를 완수한 장수가 하늘로 승천하기 위하여 힘껏 발디딤을 하였는데 그 장수의 오른쪽 발자국은 초록봉 벼락 바위위에, 왼쪽 발자국은 초록봉아래 바위에 큰 흔적으로 남아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후 후세 사람들은 그 바위에 소원을 빌면 소원성취 된다고 하며 일명 칠성(七星)바위라고 하고 오늘날에도 소원을 빌기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이다.
☞ 의승(義僧) 혜연(慧衍)
본명은 태영(泰英)이라 하며 동해 혈암리(穴岩里)에 살았다. 동해시 북삼동(당시 쇄운리)에 최세필 (崔世弼)이 훈도하는 서당에서 글을 배웠는데 남보다 일찍와서 공부를 열심히 하던 그는 어느해 며칠 계속 지각을 하는지라훈장이 이를 이상히 여겨 태영의 태도와 인상을 자세히 본 즉 미간(眉間)에 요기(妖氣) 로운 기운이 베어 있는지라 즉시 그를 조용히 불러「너는 가까운 장래에 아마도 요사스러운 장난이 있을 것 같아 보이니 조금도 숨기지 말고 이야기 해보라고 하니 그는「아침에 집을 나와 서당으로 오는데 이도리(梨島理:지금의 이원동)에 이르니 입에 구슬을 문 아름다운 여인이 송림 속에서 나와 저를 붇들고 장난을 걸며 내 입에다 구슬을 물렸다가 다시 자기 입에 넣고 하는 것이 여러달이라 오늘도 늦었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훈장은「내일 아침 올적에도 그렇게 하거든 네가 구슬을 물면서 그 여인의 혀를 사정없이 꽉 물어라. 그러면 그 여인이 땅에 고꾸라질 것이다. 그리고 괴변이 생길 것이니 놀라지 말라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반드시 위험하리라」라고 일러주었다. 그 이튿날 태영은 그 미인을 만나 입에서 입으로 구슬을 주거니 받거니 장난을 하다가 선생이 이르는 말대로 여인의 혀를 사정없이 깨물없더니 아니나 다를까 요괴로운 짐승으로 변하여 죽었다 하며 그일이 있은 후부터 태영은 풍수지리(風水地理)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1701년(숙종 27년) 4월 10일에 삼척향교의 터를 구터에서 몇자 낯추어 짖게 하였고 출가하여 관(官)의 의승대장(義僧大長)겸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까지 지냈으며 풍수지리에 뛰어났을뿐더러 나라일에 충성을 다한 의승으로 전해오고 .................
- 후기-
양보라는 청년이 무제라는 보살의 제자가 되기 위해 부모님 곁을 떠나 길을 걸었다.그러다가 도중에 어떤 스님을 만났는데, 늙은 스님이 양보에게 물었다. "어디를 가시요. 젊은이" "예 무제 보살님의 제자가 되려고 찾아가는 중입니다."그러자 늙은 스님이 이렇게 말했다. "보살을 찾아가느니, 아예 부처님을 찾아가는 것이 낫지 않겠소?" "부처님이 어디 게시는데요?" 양보의 이 물음에 늙은 스님이 대답했다. "지금 집에가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신발을 꺼꾸로 신은 채 뛰어나오는 사람이 있을 거요. 그분이 바로 부처님이오." 양보가 그 늙은 스님의 말대로 집으로 달려가니 깜깜한 밤이었다. 문앞에서 사람을 부르자 제일 먼저 어머니가 달려 나왔다. 어머니는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너무 기쁜 나머지 옷도 입지 못한 채 이불을 뒤집어 쓰고 신도 거꾸로 신고 달려 나온 것이다. 이후로는 부모님을 부처님 처럼 성심 성의 껏 모셨다.고 한다.
'관대골'(官垈谷)이라고도 하는데 , 연해불에서 동해 휴게소 쪽으로 펼쳐진 골짜기를 말한다. 크고 넓다는 뜻으로 '도깨비골'이라고도 한다.
구전에 의하면 어떤 억센 분이 말을 타고 강릉에 갔다가 늦어져 이곳을 지나는데, 이쁜 색시에게 홀려"오빠 같이 가자"하니 '그럼 내뒷 등에 타라"고 하여, 떨어질까봐 꽁꽁 동여 가지고 집에 왔었는데 색시는 없고 빗자루만 뒤에 꽁꽁 묵여 있더라는 것이다.그래서 화가난 이남자는 그 빗자루를 모탕에 놓고 도끼로 내리치니 빗자루가 잘리면서 핏물이 튀었다고 하여 빗자루에 피를 묻히는 것을 금하였다고 한다.
고요한 날이면 거기서 큰소리를 지르면 "사람 살려라" 하는 소리가 들려, 이상해서 등불을 켜가지고 가서 보니 수풀 밑에서 들리는데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도깨비는 여자들이 머리를 빗을때 피가 빗에 묻으면 빗에있던 것이 나와서 도깨비가 된다고 하고, 또 부인들이 경도가 있을때 빗자루를 깔고 앉았다가 내 던지면 그것도 도깨비가 된다고 토속적인 구전 전설로 나와있다.
♠ 심동로(沈東老) 묘와 일출문(日出門)
동호동에 연안된 삼척 심씨 시조 심동로(沈東老)의 묘소에 얽힌 전설로서 이 묘소의 정동향(正東向) 바다쪽에는 향로봉이라고 부르는 조그마한 산이 있다.
해변에 접한 이봉에 육지 산쪽으로 큰 구멍이 뚫린 바위가 있었는데 이름을 일출문이라고 하였다. 일명 일월문이라고도 불렀는데 아침해가 뜨면 일출문 구멍을 통하여 햇빛의 초점이 동호동 뒷산의 한 곳을 비쳤던 바 심공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바로 그 빛이 비치는 장소에 영안케 하니 오늘날까지 명당이라 전하는 심공의 묘소이다.
그후 진주군 심동로의 시제(時祭)는 매년 9월에 날을 정하여 제를 올리게 되는 바, 그 당시의 제도에 의하면 시제에 바치는 어물(생선)은 인근 어촌인 어달동 대진에서 어민들이 마련하여 바쳤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부터 150여년전 어느 해 심공(沈公)의 제일(祭日)이 가까이 왔는데 연일 파도가 거칠어 도저히 고기잡이를 할 수 없게 되자 어민들은 심히 걱정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만약 어물을 장만하지 못하면 당시의 세도가인 심씨 문중에서 추상같으 문책이 떨어질 것이 번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두타산(頭陀山)의 중 연용섭(延龍攝)이 시주를 얻고자 이 마을에 들렀다. 이때 한 주민이 중에게 "우리는 심씨 시형(時亨)에 바칠 어물을 날씨 탓으로 준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니 대사께서 좋은 방도를 일러주시면 우리들은 시주를 아끼지 않겠다"고 사정을 했다. 이 말을 듣던 중은 엄숙한 표정을 띠며 이렇다 저렇다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다음날 이 고승은 진주군의 묘소에 나타나 심씨 종중이 모인 자리에서 "이 묘는 일출문바위의 구멍에서 햇살이 비쳐오기 때문에 후손의 대성(大盛)이 어려우니 저 일출문 바위를 파괴해 버리고 신도비를 없애는 것이 길(吉)하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 버렸다. 이일이 있은 후 심씨문중은 중이 꾸민 말을 믿고 그 바위를 깨버리고 신도비도 바다에 던져 버렸다고 전하기도 하고, 그러한 곤욕을 받지 않기 위해 고승의 말에 따라 어부들이 몰래 그 바위를 깨어 버렸다고 전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지금은 일출문 바위는 흔적도 찾아 볼수 없으며 동로공의 묘소만 동해를 바라보며 명당을 자랑하듯 따뜻한 양지에 아담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강감찬과 개미
지금 망상학교 앞 철길 옆에 들축나무골이 있는데, 그 곳은 들축나무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고려때 강감찬 장군이 강릉부사로 있다가 남쪽으로 가는 길에 그 들축나무에 기대어 쉬고 있는데 개미들이 자꾸 덤벼들어 귀찮게 하였다. 장군은 쥐고 있던 지팡이로 금을 쭉 그었대. 그랬더니 개미들이 전혀 달려들지 않았고, 지금도 그 금이 그어져 있던 자리에는 사람이 누워 자도 개미들이 달려들지 못한다고 전해진다.
강감찬과 모기
옛날 강감찬 장군이 강릉부사로 있다가 남쪽으로 가는 길에 뒷뜨루(현 북평동)에 와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모기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아무리 뒤척거려도 잠을 잘 수 없자 장군은 종이에다 방을 써서 창밖으로 뿌렸다. 그러자 모기들이 울지도 물지도 않아 잠을 편히 잘 수 있었고 지금도 뒷뜨루에있는 모기는 사람을 물지 않는다고 한다.
아기장수 이야기
아기장수가 태어났던 집터는 지금은 토지정리를 해서 없어졌지만 쌍용양회 부근이라고 전해진다. 그곳에 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있었는데, 그의 아내가 "배선남"이라는 애를 낳고 태를 자르 려고 하니 애가 안보이는 것이었다. 놀라서 남편을 부르고 관솔불을 훤하게 하고 찾아보니 이제 막 태어난 아기가 실공(시렁)위에 냉큼 올라가서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는 장수가 나면 역적이라 해서 죽이고 3대를 멸하는 시대라 부부는 이를 염려하여 맷돌로 아기를 쳐 죽였다. 그러자 근처 굴에서 용마가 나 세번 울고 사라졌다고 한다. 근 300년전 이야기 이지만 용마가 난 곳은 도경역 근처에 있는 굴이라고 전해진다. 그 일이 있고 난뒤 그 집안에는 벙어리가 속출 하는 등 거의 다 부실하였다고 한다.
댐지실 부자
옛날 심곡리 댐지실에 김씨 부자가 살았는데, 어찌나 인색한지 시주나온 스님에게 쌀대신 마굿간 걸금을 잔뜩 퍼 주곤 하였다. 봉변을 당한 어느 스님이 집 주위를 한번 흘끔 보고 가더란다. 그후 몇일이 지났는데 그 스님이 변장을 하고 다시 와서 집뒤에 있는 묘자리가 돼지형상이라서 조상이 돼지로 되어 꿀꿀 거리겠다며 묘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주인은 조상이 돼지가 된다니 겁도 나지만 한편 그자리가 명당이라는 말을 들었던 차라 망설이다가 "묘를 파서 이상이 없으면 당신 목을 내놓으라"고 하고는 묘를 파는데, 파다 보니 돼지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일이 이쯤 되니 이장을 할 수 밖에. 사실 스님은 모욕에 대한 앙갚음으로 주인을 속인 것이었다. 그 묘자리는 김씨부자 집에서 일하던 박씨가 샀는데 그 사람은 그 자리가 명당이라는 것을 알고 아버지 묘를 이장했고, 가문이 잘 되어 자손중에 참의벼슬까지 나왔다고 한다. 그 후 김씨네는 집안이 망하고 자기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다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바 위
♠ 용암(龍岩)과 철불(鐵佛)
이 바위는 구 삼화사(三和寺) 터 앞에 있는 바위로서 삼화사사기(三和寺史記)에 의하면 신라(新羅)때 여래불(如來佛) 삼불(三佛)이 서역(西域)에서 동해(東海)로 건너와 인연이 깊은곳을 찾던 중 이곳을 발견하고 한 부처는 삼화사에, 한 부처는 지향(智香寺)사에, 나머지 하나는 근덕(近德)영은사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이때 삼불(三佛)을 태우고 온 용(龍)은 바위로 변하였는데 이가 곧 용암(龍岩)이다.
현재에도 용암 윗면에 삼불이 앉았던 자국이 완연히 남아 있으며 삼불 중의 하나가 현재 삼화사 좌불암에 보관되어 있는 철불(鐵佛)이라고 한다.
♠ 빨갛게 얼룩진 고부석(姑婦石)
옛날 망상(妄想) 마을에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사이좋게 살고 있었다.
어느해 여름 긴 장마가 계속되다가 모처럼 햇빛이 나오자 두 고부(姑婦)는 냇가에 나가 밀렸던 빨래를 빨았다.시어머니는 너무 날씨가 무더워 빨래를 그만두고 목욕을 하게 되었다. 오랜 장마뒤라 물살이 세어 시어머니는 자신도 모르는 순간 냇물에 휘말려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자 빨래하는 며느리에게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요청을 하였다. 열심히 빨래를 하던 며느리는 위급한 목소리를 듣고 당황하여 물속에 뛰어들어 시어머니를 구하려 했으나 오히려 며느리도 소용돌이에 휘말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후 냇가 양쪽에 빨갛게 얼룩진 돌이 생기고 비오는 밤이면 여자의 괴이(怪異)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며 이 바위를 고부석(姑婦石)이라 부르게 되었다.
♠ 어진 호장(戶長)과 까막바위
묵호항에서 해안을 따라 북으로 300m지점에 높이 10m에 유난히 검은 색을 띠고 깍아 세운 듯한 해변에 우람한 모습을 나타내고 서 있는 바위가 곧 까막바위다.
이 까막바위에 대한 전설이 구구하지만 공통점을 지닌 전설에 의하면 이조 중엽(연대미상) 지금의 묵호동이 망상현에 속해 있을 때 이야기인 즉 이곳 마을에 인품이 온후하고 덕망있는 의로운 호장 (戶長:지금의 통·리장)이 살고 있었다. 춘궁기(春窮期)가 되면 마을의 가난한 사람은 한 집도 빼지 않고 곡식을 나눠 먹고 지나는 걸인 까지도 후한 대접을 해 주는 어진 호장으로 부략민의 존경을 받는 분이다.
그런데 동해안에는 가끔 왜구가 침입하여 재물을 빼앗고 주민을 학살하고 부녀자를 농략하기 시작했다. 이때도 그 호장은 왜적에게 호통을 치며 싸웠으나 맨손으로 당해 내기는 속수무책이었다. 왜적은 약탈한 재물과 그 호장을 묶어 배에 싣고 항해(航海)하려 하자 마을의 전주민이 삽, 괭이, 곡괭이, 막대기를 들고 왜적들에게 그 어진 호장을 못 데려간다고 했으나 무참히 죽어만 갔다. 분노에 떨던 호장은 왜장에게 크게 노하여 하는 말이 "비록 내가 너희들에게 육신은 죽어도 너희들을 다시는 이곳에 침범하지 못하게 하리라"라고 꾸짖자, 맑던 날씨가 갑자기 어두워지며 천둥번개가 치고 파도가 밀어 닥쳤다. 그러자 호장이 탄 배가 뒤집혀 모두 죽고 말았다.
이때 남은 한척의 배가 달아나자 거대한 문어 한 마리가 난데없이 나타나 달아나는 왜수의 배를 내리쳐 배는 산산조각이 나고, 왜구는 모두 죽었다. 다음순간, 하늘은 맑게 개고 파도가 잔잔해지자 한 떼의 까마귀가 몰려들어 왜구들의 시체를 뜯어 먹었다.
그 때 나타난 큰 문어는 어진 호장이 죽어 변신한 혼이라고 말하며 그로부터 이 마을에 왜구의 침입이 끊어졌다. 이 까막바위 밑에 큰 굴이 두 개 있는데 그 호장이 영혼이 살고 있다고 전해 오고 있으며 해녀들도 이 근처에는 가지 않고 있다. 어느 날 한 주민이 까막바위 굴 밑을 들여다보니 큰 문어가 있어 놀라 되돌아 오는데 갑자기 수십마리의 까마귀 떼가 덮치고 물어 뜯으며 울어댔다고 하며 죄지은 사람이 까막바위 밑을 지나면 문어에게 잡혀 죽었다고 한다.
♠ 여우가 변한 서구암(瑞咎岩)
서구암은 북평 취병산(翠屛山) 서편 백월산(白月山) 밑에 있는 바위이다.
이 바위는 서구라는 여우의 화신인 노파가 죽어 변하였다는 전설로 서구의 손자국 흔적이 남아있다.
서구는 천년 묵은 여우의 화신으로 신통력과 괴력(怪力)을 가지고 있었다. 인근 주민이 자기에게 거슬리면 심통을 부려 농작물에 피해를 주고 또 질병을 퍼뜨려 주민을 괴롭혔다. 특히 어린이에게 천연두를 퍼뜨려 죽게 하므로 주민은 서구를 무척 두려워 하였다. 서구의 장난이 무서워 이곳을 지나갈 때 수십명의 무리를 지어 소(牛)와 제물(祭物)을 바치고 지나갔다. 이처럼 서구의 작폐로 인근 주민이 불안과 공포에 전전긍긍하고 있던 차 이곳 출신의 소문난 효자 최진후(崔鎭厚)와 힘센 역사(力士) 김면(金眠)이 서구의 피해로부터 주민들을 구하기로 하고 합심하여 서구와 싸워 서수 머리를 쑥으로 뜸을 100여 곳에 놓자 서구는 3일간 정신을 잃고 있다가 죽어갔다.
이때 서구가 죽어 바위로 변하였는데 이 바위가 서구암이다
♠ 화랑들의 휴식처 유천암(溜天岩)
부곡동 제1 수원지(과거 동해시 북부일대의 상수원)에서 500m지점 승지골로 가 는 도중 골짜기인 듯한 지형의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는 이 유천암은 풍류객을 위하여 누가 만든 것 같이 규모가 반듯하고 아담하여 마치 안방에 들어선 느낌을 주는 듯 하다.
바위에 유천(溜天)이라고 새겨진 것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선인(仙人)이 이곳에 놀다 필적을 남기고 갔다고 하며 신라시대에 화랑도들이 싸움중에도 이곳에 와서 즐겼다고 전하기도 한다.
바로 위 산턱에 국경 경계지주로 보이는 입석(立石)이 있으며 곡절배회하는 부곡천 물은 전설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고만 있다.
♠ 할머니 모습의 할미바위
일명 마고암(麻姑岩)이라고도 하는 이 바위는 북평동 전천 하류 구호(龜湖) 밑 해변 기암 괴석상에 고인돌 같이 얹혀져 있다.
주위 3m, 높이 2m의 약간 타원형의 암석인데 암석반위에 얹혀져 있으면서 한사람이 밀때나 여럿이 밀 때에도 언제나 일정하게 흔들리는 휘귀한 바위이며 바위의 모양이 할머니 모습 같아 할미바위라고 부르며 여기에 얽힌 전설을 아는 이는 없다.
동해시가 산업기지 배후도시 건설을 할 때 기점을 바로 이 할미바위에서 잡았으며(반경 12km) 또 인근에는 소나무와 잔디가 있고 바다를 겸해 이곳을 찾는 탐방객이 많다.
마고암(麻姑岩)
崔潤祥
바다를 짓누르고 하늘을 치받치고 넓은 세상에 우뚝 앉았구나
마고 할멈 흡사하니 천년 묵은 돌이 둔갑했느냐?
♠ 노고암
망상동 노봉 바닷가에 위치하여 옛날 임씨성을 가진 노인이 늙으막하게 여자 하나를 만 났는데 잘 생긴 여자였다. 10년 정도 같이 살다 용이되어 승천하려다 그만 바위가 됐다.
나는 천년 묵은 구렁이이니 부르지 말라는 당부의 말을 잊고 승천하려는 여자를 부르고 말았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폭우가 쏟아지면서 두 사람을 휩쓸어 간 다음 그 자리에 바위가 두 개가 불쑥 살아났다.
지금도 노봉 바닷가에 가면 바위 두 개가 서있다.
♠ 형제의 혼이 변한 형제봉(兄弟峰)
망상동 만우에 높이 485m의 쌍봉이 형제처럼 나란히 마을을 내려보고 있는 바 마을사람들은 형제봉 이라고 한다.
이 형제봉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이 마을에 부모에 효도(孝道)하고 형제간의 우애 (友愛)가 돈독한 젊은 형제가 살고 있었다. 형제는 가난한 살림이라도 지성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행복하게 살아 마을 젊은이의 모범이 되었다.
어느 해 나라에서 난(亂)이 발생하자 효성심과 같이 나라에 대한 충성이 강한 형제는 전쟁에 자진 출전 (出戰)하여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쟁터에서 전사하였다. 이들이 전사한 후 뒷산에 두 봉우리가 솟아 올랐고 마을 사람들은 두 형제의 넋이 부모님의 안위가 걱정되어 생겨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형제봉이라 불렀다.
현재도 이 형제봉은 수려단아(秀麗端雅)한 모습으로 마을을 내려다 보며 산상(山上)에는 냉천(冷泉)의 맑은 물이 흘러내려 가뭄이 들 때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도 한다.
사 문 재
시 승격시 발한 3,11,12리를 합쳐 士文洞이라 하였음. 특히 망상과 발한을 넘나드는 조그마한 고개마루턱이 있는데 이곳을 "士文재"라 한다. 일설레 의하면 신라와 고구려의 전쟁이 심할때 병란을 피해 이 고개를 넘어오다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하여 "死門재"라 하였다고 하는데 그 후 삼국이 통일되고 오랑캐를 물리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경주에서 강릉방면으로 가던 김유신장군이 이 고개의 유래를 주민들로부터 듣고 사문재에 올라 고인들의 명복을 빈 다음 고개 이름을 "士文재"라고 고쳤다고 한다.
다른 일설에 의하면, 이조 숙종때 심곡에서 약천 남구만선생이 학문을 연구할때 약천선생에게 학문을 배우기 위해 삼척,북평,발한 등지에서 많은 선비들이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 하여 이 마을을 "士文재"라 했다고도 한다.
강
♠ 임진왜란과 전천(箭川)
이 하천을 박곡천, 북평천, 소고리천(所古理川), 살천(薩川)이라고 하는데 청옥산(靑玉山)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백복령(百福嶺)에서 흐르는 물이 합쳐 북평평야를 가로 지르고 동해(東海)로 뻗어 흐르는 하천이다.
구전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 의하여 두타산성(頭陀山城)이 함락 될 때 교전이 심하여 전사자의 유혈이 하천을 붉게 하였으며 화살이 물에 떠서 강에 가득차 흐르므로 이때부터 이 하천을 전천(箭川)이라 불러 오늘에 이르렀단다.
강의 연장은 오십리, 하구(河口)는 넓어서 폭 300m, 길이는 600m나 되는 담수욕당(潭水浴場)이다. 연어, 은어, 황어, 흑현(黑峴)이 많이 서식하고 있으며 지금도 동해항 뒷편으로 역사를간직한 채 서서히 흐르고 있는 이 하천(河川)은 현재 농·공업 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 고대(古代)격전지 마상천(馬上川)
망상동의 넓은 들판에 농업용수로 사용되는 조그마한 하천이 있다. 이 하천을 마상천이라 하는데 이 지역은 삼국시대 고구려(高句麗)와 신라(新羅)의 접경지여서 자주 접전이 벌어지던 곳으로 주변에 군사 요충지임을 증명하는 고현성지와 같은 장소들이 많다.
군사들이 진을 쳤던 곳, 병마의 훈련장으로 말을 기른 곳, 말 달리기 연습장 등의 흔적들이 그러하다.
그때당시 이 하천에 말이 쉴새없이 드나들어 항시 발이 하천에 서 있다 해서 마상천이라 불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입 석 (立 石)
삼국시대 신라의 실직과 고구려의 하슬라의 경계지주로 추정되는 이 입석은 부곡동 승지골로 통하는 길목에 2 의 화강암으로 된 지주석이다. 이 지역에서는 군사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가마솥 모양의 토기와 화살촉 등이 많이 출토되었고, 뒷산 능선에는 방호선을 쌓은 흔적이 남아 있으며, 그 당시 향로봉과 송이고개로 이어지는 구릉에는 고구려 군사가, 평릉과 부곡에는 신라 군사들이 매복하고 치열한 전투가 계속 되었다고 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입석은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임을 표시하는 경계지주가 아닌가 추정이 된다,
☞ 형제봉(兄弟峰)
동해시 망상 괴란동과 만우동에 연결되어있는 산전설 1 ▶형제봉에 얽힌 구전에 의하면 옛날 이 마을에 부모에 효도(孝道)하고 형제간의 우애 (友愛)가 돈독한 젊은 형제가 살고 있었다. 어느 해 나라에서 난(亂)이 발생하자 형제는 전쟁에 자진 출전 (出戰)하여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들이 전사한 후 뒷산에 두 봉우리가 솟아 올랐고 마을 사람들은 두 형제의 넋이 부모님의 안위가 걱정되어 생겨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형제봉이라 불렀다. 전설 2 ▶옛날 마음 착하고 의좋은 형제가 마을에 살다가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 지며 조수(해일)이 일어나 마을이 물에 잠기자 두 형제는 각기 다른 봉우리에 올라 가서 살아남았다고 전해진다.그때의 조수(해일) 온 마을을 덮었다 하며 형제 봉 정상에 아직도 조개 껍질이 발견된다고 한다.형이 올랐던 봉우리는 형봉, 동생이 올랐던 봉우리는 아우봉이라고 하고, 두 봉우리를 합하여 형제봉이라고 한다.
☞ 두타 산성과 피소
동해시 전천 상류 삼화동 홍도마을 입구에 위치한 피소는 붉은 피가 가득하여 '피가 고였던 소, 즉피소'라 하였다.임진왜란 당시 두타산성의 의병을 공격하기 위하여 피소(지금의 삼화동 입구 쌍용 양회 집수장 부근)에서 공격 통로를 찾던 중 빨래하고 있던 마고 할머니의 제보로 지름길을 알게된 왜병이 이기리의 더바지재를 넘어 두타산성을 배후에서 공격하여 성은 함락되었고, 왜병과 우리 의병 주민 등 2000여명이 전멸하여 붉은 피가 비린내골(피내골)을 덮었으며, 파소에 흘러내린 피줄기는 오랫동안 파소에서 맴돌았다 하여 파소. 피소라 이름하고 또 화살이 강을 메웠다 하여 전천(箭川):살천(薩川)이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자료: 동해문화원, 관동대 박물관의 공동지표조사 보고서와 구전에 의한 설화를 토대로 작성>
☞ 초록봉(草錄峰) 장수(將帥)바위
위치: 동해시 천곡동 산 342-24 번지
그 옛날 하느님이 혼탁한 세상에 장수를 보내어 세상을 바로잡게 하였다 하고 임무를 완수한 장수가 하늘로 승천하기 위하여 힘껏 발디딤을 하였는데 그 장수의 오른쪽 발자국은 초록봉 벼락 바위위에, 왼쪽 발자국은 초록봉아래 바위에 큰 흔적으로 남아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후 후세 사람들은 그 바위에 소원을 빌면 소원성취 된다고 하며 일명 칠성(七星)바위라고 하고 오늘날에도 소원을 빌기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이다.
☞ 의승(義僧) 혜연(慧衍)
본명은 태영(泰英)이라 하며 동해 혈암리(穴岩里)에 살았다. 동해시 북삼동(당시 쇄운리)에 최세필 (崔世弼)이 훈도하는 서당에서 글을 배웠는데 남보다 일찍와서 공부를 열심히 하던 그는 어느해 며칠 계속 지각을 하는지라훈장이 이를 이상히 여겨 태영의 태도와 인상을 자세히 본 즉 미간(眉間)에 요기(妖氣) 로운 기운이 베어 있는지라 즉시 그를 조용히 불러「너는 가까운 장래에 아마도 요사스러운 장난이 있을 것 같아 보이니 조금도 숨기지 말고 이야기 해보라고 하니 그는「아침에 집을 나와 서당으로 오는데 이도리(梨島理:지금의 이원동)에 이르니 입에 구슬을 문 아름다운 여인이 송림 속에서 나와 저를 붇들고 장난을 걸며 내 입에다 구슬을 물렸다가 다시 자기 입에 넣고 하는 것이 여러달이라 오늘도 늦었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훈장은「내일 아침 올적에도 그렇게 하거든 네가 구슬을 물면서 그 여인의 혀를 사정없이 꽉 물어라. 그러면 그 여인이 땅에 고꾸라질 것이다. 그리고 괴변이 생길 것이니 놀라지 말라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반드시 위험하리라」라고 일러주었다. 그 이튿날 태영은 그 미인을 만나 입에서 입으로 구슬을 주거니 받거니 장난을 하다가 선생이 이르는 말대로 여인의 혀를 사정없이 깨물없더니 아니나 다를까 요괴로운 짐승으로 변하여 죽었다 하며 그일이 있은 후부터 태영은 풍수지리(風水地理)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1701년(숙종 27년) 4월 10일에 삼척향교의 터를 구터에서 몇자 낯추어 짖게 하였고 출가하여 관(官)의 의승대장(義僧大長)겸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까지 지냈으며 풍수지리에 뛰어났을뿐더러 나라일에 충성을 다한 의승으로 전해오고 .................
- 후기-
양보라는 청년이 무제라는 보살의 제자가 되기 위해 부모님 곁을 떠나 길을 걸었다.그러다가 도중에 어떤 스님을 만났는데, 늙은 스님이 양보에게 물었다. "어디를 가시요. 젊은이" "예 무제 보살님의 제자가 되려고 찾아가는 중입니다."그러자 늙은 스님이 이렇게 말했다. "보살을 찾아가느니, 아예 부처님을 찾아가는 것이 낫지 않겠소?" "부처님이 어디 게시는데요?" 양보의 이 물음에 늙은 스님이 대답했다. "지금 집에가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신발을 꺼꾸로 신은 채 뛰어나오는 사람이 있을 거요. 그분이 바로 부처님이오." 양보가 그 늙은 스님의 말대로 집으로 달려가니 깜깜한 밤이었다. 문앞에서 사람을 부르자 제일 먼저 어머니가 달려 나왔다. 어머니는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너무 기쁜 나머지 옷도 입지 못한 채 이불을 뒤집어 쓰고 신도 거꾸로 신고 달려 나온 것이다. 이후로는 부모님을 부처님 처럼 성심 성의 껏 모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