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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뿔소
이오네스코 작//오증자 역
등장인물
베랑제
장
데이지
뒤다르
보따르
빠삐용 씨
노신사
논리학자
웨이트리스
카페 주인
뵈프 부인
주부
식료품가게 주인
식료품가게 안주인
소방수
노인
노인의 아내
작품해설
1960년 [코뿔소]가 독일의 뒤셀도르프 초연에서 성공을 거두자 이어서 파리에서는 장 루이 바로 연출과 주연으로 오데옹 극장에서 공연되고, 영국에서는 오슨 웰즈 연출,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으로 로열코트 극장에서 공연됨으로써, 이오네스코는 세계적인 극작가로 부각된다.
[코뿔소]는 그의 초기 작품들에 비해 주제가 뚜렷하여 이해와 공감이 쉬운 작품에 속한다. 이오네스코는 당시 전 유럽을 휩쓸던 나치즘의 집단 본능에 대한 맹렬한 풍자로서 이 글을 썼다고 한다.
한 평화로운 마을에 코뿔소가 등장함으로써 마을 주민들이 속속 코뿔소로 변신하는 가운데 그들 사이에 엇갈리는 경이와 공포가 코믹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유행병처럼 번지는 변신에 저항하는 한 소시민 베랑제의 투쟁이 영웅적이면서도 희비극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76년 극단 산울림에 의해 공연되었음)
제 1 막
장치
시골의 어느 작은 마을의 광장. 무대 안쪽 이층집. 아래층은 식료품 가게의 전면. 두세 개의 계단을 올라가서 유리문을 통해 들어가게 되어 있다. 가게 전면 위에 식료품상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도록 써 붙여져 있다. 이층에는 두 개의 창. 이 가게 주인들의 살림집으로 되어 있다. 식료품 가게의 위치는 무대 안쪽으로 비교적 왼쪽 무대 뒤에서 과히 떨어져 있지 않다.
식료품 가게 너머로 멀리 교회의 종각이 보인다. 식료품 가게와 오른쪽 무대 사이에 골목길이 있음직하다. 무대 오른쪽에는 약간 비스듬히 카페의 전면 이층에 창문 하나. 카페의 테라스 앞에는 테이블과 의자들이 무대 중앙까지 여러 개 널려 있다. 테라스의 의자들 옆에는 먼지가 자욱이 쌓인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푸른 하늘에 눈부신 햇살. 그 빛에 벽들이 하얗게 빛난다. 여름의 어느 일요일 정오에 가깝다. 곧 장과 베랑제가 테라스의 의지로 가서 앉을 것이다.
막이 오르기 전에 종소리. 종소리는 막이 오르자 몇 초만에 그친다. 막이 오르면 한쪽 팔에는 빈 장바구니를, 또 한쪽 팔에는 고양이를 안은 여자가 말없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지나간다. 그녀가 지나가자 식료품 가게 안주인이 가게문을 열고 그녀가 가는 것을 내려다본다.
{{이오네스코 - [코뿔소] }}
식료품가게 안주인 아, 저 여자예요. (가게 안에 있는 남편을 향해) 저 여자라구요. 건방지게 우리 집에선 안 사가지 뭐유.
안주인, 들어가 버린다.
무대는 잠시 비어 있다. 무대 오른쪽에서 장이 나타난다. 동시에 왼쪽에서는 베랑제가 나타난다. 장의 옷차림은 말쑥하다. 밤색 양복, 붉은 넥타이, 풀이 빳빳이 선 칼라에 밤색 모자, 혈색 좋은 얼굴, 반짝반짝 닦은 크림색 구두를 신고 있다. 베랑제는 면도도 안하고 모자도 없다. 머리는 덥수룩하고 옷은 구겨져 있다. 모든 게 허술하다. 피곤한 표정. 졸리운 듯 이따금 하품을 한다.
장 (오른쪽에서 나오며) 오긴 왔구먼, 베랑제.
베랑제 (왼쪽에서 나오며) 오랜만이야 장.
장 역시 또 지각이로군. (팔목시계를 본다) 열 한 시 반에 약속을 했는데 벌써 열 두 시가 다 됐지 않아?
베랑제 미안해. 오래 기다렸어?
장 아니, 보다시피 나도 지금 오는 길이야.
그들은 카페 테라스의 테이블로 앉으러 간다.
베랑제 그렇다면 좀 덜 미안하군. 자네도 역시….
장 아냐, 난 달라. 난 기다리는 건 질색이야. 그럴 시간이 없다구. 자네가 워낙 제 시간에 올 줄을 모르니까 내가 일부러 늦게 온거지. 자네가 나타날 만한 시간에 맞춰서 왔단 말씀이야.
베랑제 그건 그렇지만… 그래두….
장 왜 제 시간에 왔다는 말이라도 하려구?
베랑제 아니 물론… 그런 소리야 내가 어찌 하겠나만.
장과 베랑제, 앉는다.
장 그야 그렇지.
베랑제 뭘 마시겠어?
장 자넨 아침부터 마시겠다는 거야?
베랑제 하두 더워서. 너무 가물구.
장 마시면 마실수록 목을 더 마르는 법이야. 이건 과학적인 상식이라네.
베랑제 과학적으로 구름까지 몰아올 수만 있다면야 이렇게 가물지도 않겠고 목도 덜 마르게 될 텐데 말야.
장 (베랑제를 자세히 뜯어보며) 그런 건 자네가 참견할 게 못돼. 베랑제, 지금 자네가 마시고 싶은게 물은 아니겠지….
베랑제 여보게 장,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장 왜 몰라서 묻나? 난 지금 자네의 갈증에 대해서 얘기하는 걸세. 자네의 갈증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야.
베랑제 그 말을 들으니 마치….
장 (베랑제의 말을 가로막으며) 이봐, 자네 처량하게 됐군.
베랑제 처량하다니, 그렇게 보이나?
장 난 장님이 아니야. 자넨 지금 지쳐 있어. 또 밤샜군? 자네 하품하는데 그래? 졸려 죽겠는 모양이지.
베랑제 머리가 좀 아파서….
장 술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베랑제 응, 좀 마셨더니 목이 칼칼하고
장 일요일 아침이면 늘 이 꼴이란 말야. 허긴 보통날도 마찬가지지만.
베랑제 아냐, 보통날은 그렇게 잦지는 않아. 일을 해야 하니까.
장 그래 넥타이는 어쨌나? 취해서 돌아다니다가 잃어버렸구먼.
베랑제 (손으로 목을 만져 보더니) 응, 정말 이상한데. 내가 넥타이를 어떡했지?
장 (웃저고리 주머니에서 넥타이를 꺼내며) 자, 이걸 매게.
베랑제 아니 이건… 고맙네. 자넨 정말이지 친절해. (그는 넥타이를 맨다)
장 (베랑제가 넥타이를 아무렇게나 매는 것을 보며) 머리도 엉망이로군. (베랑제, 손가락으로 머리를 쓱쓱 빗는다) 자, 빗 여기 있네. (웃저고리의 다른 주머니에서 빗을 꺼낸다.)
베랑제 (빗을 받으며) 고마워. (그는 엉성하게 빗질을 한다)
장 면도도 안 했잖아? 자네 얼굴을 좀 잘 보게.
그는 웃저고리의 안주머니에서 손거울을 꺼내 베랑제에게 준다. 베랑제는 거울을 들여다본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혀를 내민다.
베랑제 혓바닥이 하얗게 덮였군.
장 (거울을 돌려받아 주머니 속에 다시 넣으며) 그야 놀라울 것도 없지. (베랑제가 내미는 빗을 받아서 주머니에 다시 넣으며) 간장이 나빠지고 있는 거라네.
베랑제 (불안해져서) 정말 그럴까?
장 (넥타이를 돌려주려는 베랑제에게) 넥타이는 그대로 매둬. 난 많이 있으니까.
베랑제 (감탄하며) 자넨 몸단장에 주의가 대단하단 말야.
장 (여전히 베랑제를 살펴보며) 옷은 다 구겨지구 한심하군! 셔츠도 원 저렇게 더러워서야, 구두는… (베랑제는 발을 테이블 밑으로 감추려 한다) 구두도 안 닦았잖아? …어쩌면 이렇게 엉망이지. 저 어깨는 도….
베랑제 내 어깨가 어때서?
장 몸을 뒤로 돌려봐. 자 어서. 어디 벽에 가서 기대섰던 모양이로군…. (베랑제, 힘없이 장 쪽으로 손을 내민다) 솔은 없어. 주머니가 불룩해져서 솔은 안 갖고 다녀. (베랑제, 여전히 힘없이 어깨에 묻은 하얀 먼지를 손바닥으로 툭툭 턴다. 장은 고개를 돌린다) 원 저런! 도대체 그런 건 어디서 묻혔나?
베랑제 기억이 안 나는데.
장 한심하군 한심해. 친구라기가 부끄러울 지경일세.
베랑제 그 말은 너무 심하잖아?
장 그 말밖에는 안 나오게 됐네.
베랑제 장, 하지만 내겐 낙이라는 게 거의 없잖아? 이 마을에서는 모두가 따분하단 말야. 난 매일 사무실에서 하루 여덟 시간씩 일에 쫓기고, 휴가래야 여름휴가 3주뿐이니, 마치 일 때문에 사는 사람 같다니까. 그러니 토요일 밤엔 숫제 지쳐서… 이해하겠지. 그래서 기분전환을 하려고….
장 어이, 그런 게 어디 자네뿐인가!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사는 거야. 난 뭐 남들처럼 일 안 하는 줄 아나? 나도 매일 사무실에서 여덟 시간 근무하고 휴가는 일년에 스무 하루뿐일세. 그런데도 보다시피 난… 견디어 낸다고.
베랑제 견디어 낸다고?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자네처럼 잘 견디지는 못할걸.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아.
장 모든 사람이 다 참고 견디는데 자네라고 뭐 특별한 인간이라도 되나?
베랑제 그렇다는 게 아니라….
장 (말을 가로막으며) 나도 자네 정도는 되네. 아니 분명히 말하자면 내가 자네보다야 낫지. 자기 의무를 다할 줄 아는 사람이 우월한 인간이니까 말이야.
베랑제 의무라니?
장 자신의 의무 말야… 이를테면 직장에서의 의무라든가.
베랑제 아, 그렇군 직장에서의 의무라….
장 그런데 어젯밤엔 어디서 마셨나? 그거야 생각나겠지.
베랑제 오귀스트의 생일 파티가 있었어. 우리 친구 오귀스트의….
장 우리 친구 오귀스트라고? 그럼 왜 난 초대 안했지? 우리 친구 오귀스트의 생일이이라면 말야….
그때 아주 멀리서 부산한 소리가 들려온다.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면서 야수의 숨소리, 급히 달려오는 소리. 코뿔소의 긴 울음소리.
베랑제 거절을 못하겠더군. 또 거절한다는 것도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
장 난 안 갔잖아?
베랑제 안 갈 수 밖에. 자네는 초대를 안 받았잖아.
웨이트리스 (카페에서 나오며) 안녕하세요? 뭘 드시겠어요? (소음이 아주 커졌다.)
장 (베랑제에게 안 들릴까봐 사뭇 소리친다. 그 자신은 아직 의식 못하고 있는 그 소음을 누를 만큼 큰소리로) 그래 맞았어. 난 초대 안 받았다구. 초대받는 영광이 내겐 안 왔었단 말야… 하지만 초대를 받았어도 난 안 갔을 걸세. 왜냐하면… (소음이 이제는 굉장히 커졌다.) 아니, 저게 무슨 소리지? (육중하고 세찬 짐승이 달려오는 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들린다. 속도가 매우 빠르다. 짐승의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들린다.) 도대체 저게 뭘까?
웨이트리스 정말 저게 무슨 소릴까요?
베랑제는 여전히 느슨한 채로 아무것도 귀에 들리는 않는 듯이 장에게 초대에 대한 얘기만 태평스럽게 늘어놓고 있다. 그는 입술을 움직이지만 무슨 소린지는 들리지 않는다. 장은 벌떡 일어나다가 앉아 있던 의자를 쓰러뜨린다. 왼쪽 무대 뒤쪽을 바라보면서 손가락으로 그곳을 가리킨다. 그러는데도 베랑제는 시종 지친 듯이 그대로 앉아 있다.
장 아니, 저기 코뿔소가! (짐승의 부산한 소리가 여전히 빨리 이번에는 멀어져 간다. 그래서 그뒤에 오는 말소리들은 분명하게 드린다. 이 장면은 극히 신속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다시 되풀이해서) 아니, 코뿔소가!
웨이트리스 코뿔소가!
식료품가게 안주인 (가게 문으로 얼굴을 내밀며) 아니, 코뿔소가! (가게 안에 있는 남편에게) 여보, 빨리 와봐요. 코뿔소예요.
모두들 짐승이 달려가는 왼쪽으로 눈길을 보낸다.
장 사정없이 막 달려가는군. 진열장에 부딪칠 듯이 아슬아슬하게 스쳐가는데.
식료품가게 주인 (가게 안에서) 어디에?
웨이트리스 (두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어머나!
식료품가게 안주인 (여전히 가게 안에 있는 남편에게) 어서 나와 봐요.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주인이 고개를 내민다)
식료품가게 주인 (고개를 내밀며) 아니, 코뿔소가!
논리학자 (왼쪽에서 무대로 급히 나오며) 코뿔소! 그게 전속력으로 저 맞은 편 인도를 달려가고 있어요.
장의 "아니, 코뿔소가!"에서 시작된 대사들은 모두가 거의 동시에 쏟아져 나온다. "어머나!" 하는 어떤 여자의 외마디소리가 들린다. 그 여자가 무대에 나타난다. 그녀는 무대 중앙까지 뛰어나온다. 장바구니를 들고 지나가던 그 주부이다. 무대 중앙까지 오자 그녀는 바구니를 떨어뜨린다. 바구니 안에 있던 물건들이 무대 위로 흩어진다. 병이 하나 깨진다. 그러나 한 쪽 팔에 안고 있던 고양이는 놓지 않는다.
주 부 어머나!
왼쪽에서 노신사가 주부의 뒤를 이어 나타난다. 그는 식료품가게로 달려가 주인 부부를 밀어제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그 사이에 논리학자는 식료품가게 입구의 왼쪽 구석 벽에 붙어선다. 장과 웨이트리스는 선 채로, 베랑제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이 세 사람이 따로 한 무리를 이루고 있다. 동시에 왼쪽에서는 "저런!"이라든가 "어머나!"라는 외마디소리. 도망 다니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짐승이 지나가면서 일으킨 먼지가 무대 위로 뿌옇게 밀려온다.
카페 주인 (카페의 이층 창에서 얼굴을 내밀며) 무슨 일이야?
노신사 (식료품가게 주인 부부 뒤에 숨어서) 실례합니다.
멋쟁이 노신사는 흰 각반에 소프트 모자, 상아 손잡이의 지팡이를 들고 있다. 논리학자는 벽에 붙어 서 있다. 그는 회색 콧수염에 코안경을 걸고 납작한 캉캉모자를 쓰고 있다.
식료품가게 안주인 (노신사에게 떠밀리는 바람에 남편을 떠밀며 노신사에게) 조심하세요. 지팡이까지 들구.
식료품가게 주인 이건 너무하지 않소. 조심 좀 하시오!
이들 부부 뒤로 노신사의 머리가 보인다.
웨이트리스 (카페 주인에게) 코뿔소예요!
카페 주인 (창에서 웨이트리스에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때 코뿔소를 보고) 아니, 저런!
주 부 어머나! (무대 뒤의 "저런!"이라든가 "어머나!"하는 소리가 그녀의 "어머나!" 하는 소리의 반향처럼 울려 온다. 찬거리와 병이 들었던 바구니를 떨어뜨린 주부는 한쪽 팔에 안고 있는 고양이는 놓치지 않았다.) 가엾어라. 너도 무서웠던 모양이로구나.
카페 주인 (계속 왼쪽을 바라보며 짐승이 달리는 것을 눈으로 좇고 있다. 그러는 동안 짐승 소리들은 차츰 멀어진다. 소의 발굽소리며 울음소리 따위가. 베랑제는 흙먼지 때문에 고개를 약간 돌릴 뿐 조는 듯이 아무 소리가 없다. 얼굴만은 찡그리고 있다.) 이거야 원.
장 (역시 고개를 약간 돌리며 그러나 과격하게) 아니, 저런 (재채기한다)
주 부 (무대 중앙에서 왼쪽을 돌아다본다. 찬거리가 그녀의 주위에 흩어져 있다.) 아니, 저런. (재채기한다)
식료품가게 주인 부부 (무대 안쪽에서 노신사가 들어가서 닫은 가게 유리문을 다시 열며) 아니, 저런.
장 아니, 저런! (베랑제에게) 자네도 봤지?
코뿔소 때문에 들려오던 소음과 소의 울음소리가 아주 멀어졌다. 모두들 선 채로 아직도 코뿔소가 달려가는 쪽을 바라본다. 베랑제만은 여전히 무심하게 앉아 있다.
일동 모두 (베랑제만 제외하고) 아니, 저런!
베랑제 (장에게) 응, 코뿔소였던 것 같지? 어유, 이 먼지.(그는 손수건을 꺼내 코를 푼다.)
주 부 아니, 저런… 정말이지 무서워서 혼났네.
식료품가게 주인 부인의 바구니가… 찬거리가….
노신사 (부인 곁으로 와서 바닥에 흩어진 물건들을 주우려고 허리를 굽히다가 모자를 벗으며 부인에게 상냥하게 인사한다)
카페 주인 아무리 생각해도….
웨이트리스 글쎄 말예요, 그럴 수가….
노신사 (부인에게) 이것들을 주워 드려도 괜찮을까요?
주 부 (노신사에게) 네, 감사합니다. 모자는 어서 쓰시죠. 아유, 어찌나 무서웠던지.
논리학자 공포라는 건 이성적인 게 못 됩니다. 이성으로 마땅히 공포심을 극복해야죠.
웨이트리스 이젠 코뿔소가 안 보이는군요.
노신사 (주부에게 논리학자를 소개한다) 제 친구 논리학자입니다.
장 (베랑제에게)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베랑제 되게 빠르네, 짐승이라는 건.
주 부 (논리학자에게) 처음 뵙겠습니다.
식료품가게 안주인 (남편에게) 그것 참 고소하게 됐는데. 우리집에선 안 사가더니….
장 (카페 주인과 웨이트리스에게) 어떻게들 생각하세요?
주 부 그래도 난 고양이는 놓치지 않았어요.
카페 주인 (창에서 어깨를 으쓱하며) 이런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인데요?
주 부 (노신사가 흩어진 물건들을 줍고 있는 동안 논리학자에게) 이것 좀 잠깐 맡아주시겠어요?
웨이트리스 (장에게) 이런 일은 생전 처음이에요.
논리학자 (고양이를 받으며 주부에게) 사납진 않겠죠?
카페 주인 (장에게) 마치 별똥별같이 빠르잖아요?
주 부 (논리학자에게) 아주 온순해요. (다른 사람들에게) 내 포도주가.
식료품가게 주인 (주부에게) 저희 가게에도 있습니다. 뭐든지 다 있습죠.
장 (베랑제에게) 이봐, 자네 생각은 어떠냐니까!
식료품가게 주인 (주부에게) 물건들도 썩 좋구요.
카페 주인 (웨이트리스에게) 그러구 서 있지만 말구 어서 손님들 모셔. (베랑제와 장을 가리키는 소리이다. 그는 다시 안으로 사라진다)
베랑제 (장에게) 뭘 말야?
식료품가게 안주인 (남편에게) 어서 가서 한 병 가지구 나와요.
장 (베랑제에게) 뭘 말야?
식료품가게 주인 (주부에게) 저희집에 깨지지 않는 병에 든 기가 막힌 포도주가 있습니다요. (그는 가게 안으로 사라진다)
논리학자 (안고 있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나비야! 나비야! 나비야!
웨이트리스 (장과 베랑제에게) 뭘 드시겠어요?
베랑제 (웨이트리스에게) 빠스띠스 두 잔!
웨이트리스 네, 갖다드리죠. (카페 입구 쪽으로 간다)
주 부 (노신사의 도움을 받으며 흩어진 물건들을 줍는다) 선생님은 정말 친절하시네요.
웨이트리스 빠스띠스 두 잔이요. (그러고는 다시 카페로 들어간다)
노신사 (주부에게) 원 별 말씀을.
식료품가게 안주인,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논리학자 (물건을 줍고 있는 노신사와 주부에게) 좀, 질서 정연하게들 넣어봐요.
장 (베랑제에게) 그래, 자넨 어떻게 생각하느냐 말야?
베랑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응… 뭐 별로… 먼지가 좀 나는구먼….
식료품가게 주인 (포도주병을 들고 가게에서 나오며 주부에게) 부추도 있습니다.
논리학자 (여전히 안고 있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나비야! 나비야! 나비야!
식료품가게 주인 (주부에게) 1리터짜리, 100프랑입니다.
주 부 (가게 주인에게 돈을 주고 흩어졌던 물건들을 모두 바구니에 다시 담은 노신사 쪽으로 가며) 정말 친절하십니다. 프랑스적인 예절을 갖추고 계시네요. 요즘 젊은이들 같으면야 어림도 없죠.
식료품가게 주인 (주부에게 돈을 받으며) 저희집으로도 좀 오십쇼. 행길을 건너실 필요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럼 그런 무서운 일도 안 당하실 게 아닙니까?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장 (앉아서 계속 코뿔소 생각만 한다) 아무래도 보통일이 아냐.
노신사 (모자를 벗고 주부의 손에 키스하며) 부인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주 부 (논리학자에게) 감사합니다, 선생님. 제 고양이를 맡아 주셔서요.
논리학자, 고양이를 주부에게 내준다. 웨이트리스가 마실 것을 들고 다시 나타난다.
웨이트리스 자, 여기 빠스띠스 가져왔습니다.
장 (베랑제에게) 그 버릇 못 고치는군!
노신사 (주부에게) 모셔다 드릴까요?
베랑제 (장에게 카페로 다시 들어가는 웨이트리스를 가리키며) 난 광물수를 좀 갖다 달랬는데 저 여자가 잘못 가져온 거야.
장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경멸조로 어깨를 으쓱한다.
주 부 (노신사에게) 고맙습니다만 남편이 기다리고 있답니다. 그럼 다음 기회에.
노신사 (주부에게) 그럼 진심으로 다음 기회를 기다리겠습니다, 부인.
주 부 (노신사에게) 저도요. (부드러운 눈길을 보내고 나서 왼쪽으로 나간다)
베랑제 이젠 먼지도 안 나는군….
장은 또 한 번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노신사 (사라져 가는 주부를 지켜 보며 논리학자에게) 멋이 있어!
장 (베랑제에게) 코뿔소 말야, 암만해도 꿈만 같다니까.
노신사와 논리학자, 오른쪽으로 걸어가 조용히 나가려고 한다. 두 사람은 차분히 이야기를 나눈다.
노신사 (주부 쪽으로 마지막 눈길을 보낸 다음 논리학자에게) 매력 있지 않소?
논리학자 (노신사에게) 삼단논법을 설명해 드리지.
노신사 아, 그 삼단논법?
장 (베랑제에게) 난 암만해도 꿈만 같아. 도대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구.
베랑제는 하품한다.
논리학자 (노신사에게) 삼단 논법에서는 대전제, 소전제, 그리고 나서 결론이 있는 거예요.
노신사 결론이라니 무슨 결론?
노신사와 논리학자, 퇴장한다.
장 아냐, 꿈만 같아.
베랑제 (장에게) 자네야말로 꿈을 꾸고 있군. 아까 그건 코뿔소였다구. 진짜 코뿔소 말야… 저쪽으로 갔군…저 멀리로.
장 하지만 이봐. 이런 일은 들어보지도 못하던 일이란 말야! 시내 한복판을 코뿔소가 멋대로 뛰어다니다니! 자넨 그게 놀랍지 않단 말야? 이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구! (베랑제, 하품 한다) 입 좀 가리고 하품하게.
베랑제 아… 아…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 위험하니까 말야. 난 그 생각을 미처 못했군. 너무 신경쓰지 말아. 우린 괜찮으니까.
장 경찰에 항의해야 해. 경찰은 뭐하러 있는 거야?
베랑제 (하품을 하다가 얼른 손으로 입을 막는다) 아, 실례… 코뿔소가 동물원에서 도망을 나온 모양이지?
장 자넨 서서 꿈을 꾸고 있는 것 아냐?
베랑제 난 앉아 있는걸.
장 앉아 있으나 서 있으나 마찬가지라구.
베랑제 아냐, 달라.
장 그런 게 문제가 아냐.
베랑제 하지만 마찬가지라고 말한 건 자네 아닌가? 앉아 있는 거나 서 있는 거나.
장 자네 말귀가 그렇게 어두운가? 앉아 있건 서 있건 꿈을 꾸긴 매한가지라 이 말이야.
베랑제 그래, 난 꿈을 꾸고 있어… 인생을 꿈이니까.
장 (계속해서) …그 코뿔소가 동물원에서 도망친 거라고 말했으니 자넨 꿈을 꾸는 게 아니고 뭔가?
베랑제 응, 그런 모양이라고 내가 그랬지.
장 (계속해서) …동물들이 페스트에 걸려 다 죽은 뒤로는 이 고장엔 동물원이 없는데두? 벌써 옛날부터 말야.
베랑제 (여전히 무관심하게) 그렇다면 곡마단에서 도망을 친 걸까?
장 곡마단이라니?
베랑제 글쎄…순회곡마단 같은 데서 말야.
장 이 고장에선 떠돌이 흥행은 금지돼 있다는 걸 자넨 몰라서 하는 소린가? 우리 어릴 때부터 그런 건 안 한다구.
베랑제 (하품을 참으려 하지만 하품이 나오고 만다) 그렇다면 그때부터 이 부근 숲속 늪지에 숨어 있었나 보지?
장 (두 팔을 하늘로 들어올리며) 이 부근 숲속 늪지라니, 이 부근 숲속 눞지라니… 이봐, 자네 알콜의 캄캄한 안개 속에 완전히 파묻혀 있군.
베랑제 (고지식하게) 응, 그건 사실이야… 뱃속에서 자꾸만 올라오는데.
장 뱃속이 아니라 머리를 온통 덮어 씌우고 있네. 자네 이 부근 숲속 늪지를 알고 있나? 이 지방을 '소 카스틸랴'라고 부르는 소리 못 들었어? 그 정도로 이 지방은 사막 같은 곳이라구!
베랑제 (기진맥진해서) 그러니 어떻단 말야? 그럼, 아마 조약돌 그늘에 숨어 있었을까? …아니면 마른 나뭇가지에 둥지라도 치고 있었나?
장 자네, 재치를 좀 부려 보겠다는 생각인 모양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 자넨 지금 지쳐 있는 거야. 그따위 허튼소리나 하구. 자넨 진지한 말을 할 힘이 없어.
베랑제 오늘, 오늘, 오늘만이야… 사정이 그렇게 돼서…. (그는 어렴풋이 고개를 든다)
장 어디 오늘뿐인가 늘 그 모양이지.
베랑제 아냐, 늘 그렇진 않아.
장 자네의 말재주 따위는 안 통해.
베랑제 아냐, 그런 게 아닌데.
장 (말을 가로막으며) 난 누가 날 놀리는 건 질색이야!
베랑제 (가슴에 손을 대며) 자넬 놀리다니, 장. 절대로 그럴리가….
장 (말을 가로막으며) 베랑제, 자넨 지금 날 놀리고 있는 거야.
베랑제 아냐. 그렇지 않아.
장 맞아, 자넨 방금 날 놀린 거지 뭔가?
베랑제 어째서 그런 생각을….
장 (말을 가로막으며) 확실해.
베랑제 난 절대로….
장 (말을 가로막으며) 자넨 날 바보 취급하고 있어.
베랑제 자넨 정말 고집불통이로군.
장 게다가 날 아주 멍청이인 줄 안고 있는 모양인데 자넨 날 모욕한 거야.
베랑제 그런 생각은 꿈에도 없네.
장 그런 생각은 꿈에도 없다구?
베랑제 그런 생각을 안 했으니까 없는 거지.
장 마음에도 없는 것을 생가하는수가 있거든.
베랑제 그럴 리는 없어.
장 어째서 그럴 리가 없다는 거지?
베랑제 그럴 리가 없으니까 없는 거지.
장 어째서 그럴 리가 없는지 설명해 봐. 자넨 뭐든지 다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으니까.
베랑제 그런 말 한 일 없는데.
장 그렇다면 자네 왜 그렇게 잘난 체하는 건가? 그리구 다시 한번 묻겠는데 왜 날 모욕하지?
베랑제 자넬 모욕하는 게 아냐. 오히려 자넨 내가 자넬 얼마나 존경하는지 알고 있잖아?
장 자네가 날 존경하고 있다면 왜 내 말에 반대하는 거지? 시내 한복판에 코뿔소가 날뛰게 내버려둬도 괜찮다느니 하면서 말야. 더군다나 일요일 아침이니까 거리엔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하기야 어른도 그렇지.
베랑제 대개들 미사에 갔잖아? 어른들이야 뭐 위험할라구?
장 (말을 가로막으며) 아니지, 장보러 가는 시간이기도 하지.
베랑제 난 시내 한복판에서 코뿔소가 뛰어다니게 내버려두는 게 위험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었어. 다만 그 위험을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거야. 미처 그걸 생각 못했다구.
장 자네가 뭘 깊이 생각해 본 일이 있나.
베랑제 그래, 맞았어. 코뿔소를 풀어놓은 건 좋지 않군.
장 그런 일이 있어선 절대로 안 돼.
베랑제 맞았어. 그런 일이 있어선 절대로 안 되지.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래, 하지만 그런 짐승 때문에 자네와 내가 싸울 까닭이야 없지. 어쩌다 우연히 우리 앞에 나타난게 된 그따위 코뿔소 한 마리 때문에 자네가 내게 시비를 걸 거야 없지 않아? 그건 우리가 화제에 올릴 가치조차 없는 미련한 네 발 짐승이라구. 더군다나 사나운 짐승인데다가… 어쨌든 이젠 사라지고 없는 것 아냐? 지나가고 만 짐승 한 마리를 놓고 자꾸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구. 그러니 장, 이젠 우리 다른 얘기를 하는 게 어떨까… 화제가 궁한 것도 아닌데. (그는 하품한다. 그리고 컵을 들며) 자네의 건강을 위해서.
그때 노신사와 논리학자가 오른쪽에서 다시 등장. 그들은 얘기하면서 카페 테라스의 의자로 앉으러 간다. 장과 베랑제에게서는 꽤 떨어진 오른쪽 뒤쪽에.
장 그 잔, 테이블 위에 내려놔. 이젠 좀 그만 마셔.
장은 자기 잔을 한 모금 마시고서 반쯤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놓는다. 베랑제는 자기 잔을 놓지도 마시지도 못하며 손에 들고 있다.
베랑제 그렇다고 이걸 그대로 이 집 주인에게 내보낼 거야 없지 않아? (마시려는 시늉을 한다)
장 내려놓으라니까.
베랑제 좋아. (그는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려 한다. 그때 금발의 젊은 타이피스트 데이지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무대를 지나간다. 데이지를 보자 베랑제는 후닥닥 일어선다. 일어서다가 삐닥 하는 바람에 잔을 떨어뜨려 장의 바지에 술을 엎는다) 어이, 데이지!
장 이봐, 조심해. 하는 짓이 어째 이 모양이야.
베랑제 데이지야… 미안해… (그는 데이지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숨는다) 이런 꼴로야… 데이지가 보면 곤란해.
장 정말 안 되겠는데, 절대로 안 되겠어.(그는 사라져 가는 데이지 쪽을 본다) 저 여자가 무서운가?
베랑제 쉿! 쉿!
장 심술궃게 생기지도 않았는데.
베랑제 (데이지가 일단 사라지자 다시 장에게로 오며) 미안하게 됐네. 이렇게 또.
장 그게 다 술을 마셔서 그런 거야. 이젠 몸도 말을 안 듣고 손에 힘까지 빠져 버렸으니 정신도 멍해지고 흐느적거릴 수밖에. 자넨 지금 제 손으로 제 무덤을 파고 있어. 이젠 끝장이라구.
베랑제 난 그 정도로 술을 좋아하진 않아. 하지만 술을 안 마시고는 안 되겠으니까 그러는 거지. 두려워서랄까? 그래서 안 두려워지려고 마시는 거야.
장 두렵긴 뭐가 두려워?
베랑제 나도 잘 모르겠어.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려운 그런 불안감이야. 사람들 틈에 끼어서 산다는 게 난 불안해. 그래서 그럴 때마다 한 잔씩 마시는 건데 마시면 기분이 가라앉거든. 잊어버리구.
장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거겠지.
베랑제 난 피곤해. 벌써 여러 해 전부터 피곤하다구. 내 몸 하나 가누기가 힘들단 말일세.
장 그게 바로 알콜중독증이라구. 술고래의 우울증이고….
베랑제 (계속해서) 난 내 몸이 마치 납덩어리 같은 기분이야. 아니면 등에 다른 사람을 하나 지고 다니는 기분이고. 난 나 자신에 영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말일세. 난 나 자신이 정말 나인지 아닌지를 모르겠어. 그런데 술만 좀 들어가면 그 무겁던 짐도 싹 없어지고 나 자신의 모습이 보인단 말일세. 난 다시 내가 된다 이런 말이야.
장 쓸데없는 소릴랑 집어 치워. 베랑제, 날 좀 보게. 난 자네보다 더 무거워. 그런데도 나는 가뿐하기만 해. 가뿐하지 가뿐해.
그는 마치 날기라도 하려는 듯 두 팔을 옆으로 벌리고 흔든다. 노신사와 논리학자가 다시 나타나 얘기하며 무대 위로 걸어오고 있다. 바로 그때 그들은 장과 베랑제 곁을 지나가다가 노신사가 장의 한쪽 팔에 부딪친다. 그 바람에 노신사는 논리학자의 팔에 쓰러진다.
논리학자 (토론을 계속한다)삼단 논법의 일례를…. (충돌한다) 아니!
노신사 (장에게) 좀 조심하시오. (논리학자에게) 미안.
장 (노신사에게) 죄송합니다.
논리학자 (노신사에게) 천만에.
노신사 (장에게) 괜찮아요.
논리학자와 노신사, 카페 테라스의 테이블에 가 앉는다. 장과 베랑제의 뒤 약간 오른쪽에.
베랑제 자넨 힘이 넘치는군.
장 암. 나는 힘이 세지. 내가 힘이 센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네. 난 체력이 강하니까 힘이 세고, 또 정신력이 있으니까 힘이 넘치지. 거기다가 또 난 술에 젖어 있지 않으니까 힘이 세고, 난 자네에게 약을 올리려고 하는 소린 아니네. 하지만 사실상 자네 마음이 괴로운 건 술 때문이란 말일세.
논리학자 그러니 이게 바로 삼단 논법의 예입니다. 고양이는 네 발 동물이다. 이지도르와 프리코는 네 발 동물이다. 그러므로 이지도르와 프리코는 고양이다.
노신사 내 개도 네 발 동물인데.
논리학자 그렇다면 그것은 고양이지요.
베랑제 난 그저 살아갈 만한 힘밖에 없네. 살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고.
노신사 (한참을 생각한 끝에)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내 개는 고양이라 이 말씀이요?
논리학자 논리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같은 이치로 고양이도 강아지가 될 수 있지요.
베랑제 내 마음을 짓누르는 건 고독이야. 사람들과의 접촉도 그렇고.
장 그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아. 자네 마음이 괴로운 건 고독 때문인가, 아니면 주위에 사람이 많기 때문인가? 자넨 자기가 무슨 생각이라도 많이 하는 사람 같은 소리를 하지만 논리적인 데가 하나도 없어.
노신사 논리학이라는 건 아주 훌륭하군.
논리학자 남용만 하지 않는다면 그렇지요.
베랑제 살아간다는 건 이상한 거야.
장 천만에, 그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은 없지. 그 증거로 모든 사람이 다 살고 있으니 말야.
베랑제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더 많은걸. 죽는 사람 수는 자꾸 느는데 산사람 수는 극히 적으니 말이야.
장 죽은 사람이야 숫제 아무것도 없는 건데 그런 걸 가지고 얘기를 하다니… 하하 (크게 웃는다) 죽은 사람들이 자네를 괴롭히기라도 한단 말인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 어떻게 자네 마음을 괴롭힌다는 거지?
베랑제 난 내가 존재하고 있는 건지 어떤지를 모르겠어.
장 자넨 존재하고 있지 않네. 자넨 생각을 안 하니까 말야. 생각을 좀 하게. 그럼 존재하게될 테니.
논리학자 삼단 논법의 예를 하나 더 들어봅시다. 모든 고양이는 죽게 마련이다. 소크라테스도 죽는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고양이다.
노신사 그럼 소크라테스도 네 발 동물이겠군. 옳아요. 난 지금 소크라테스라는 고양이 한 마리를 기르고 있거든.
논리학자 그것 보십쇼.
장 결국 자넨 틀려먹은 인간이야. 거짓말쟁이고. 자넨 입으로는 인생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면서 어떤 사람한테는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말야.
베랑제 누구한테?
장 자네 사무실의 여자 친구한테 말야. 아까 지나간 그 여자. 자넨 그 여자를 좋아하지?
노신사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고양이였겠군요?
논리학자 논리학은우리에게 그렇다는 걸 증명했지요.
장 자넨 그 여자에게 자네의 이런 처량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다며? (베랑제의 몸짓) 그건 자네가 매사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라는 증거야. 그런데 자넨 그 여자가 술고래한테 마음을 줄 것 같은가?
논리학자 그럼, 다시 고양이 얘기로 돌아갑시다.
노신사 말씀하시죠.
베랑제 그러나저러나 그 여자는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걸.
장 그게 누군데?
베랑제 뒤다르라고 회사 동료야. 법대 출신에 법학자라고. 회사에서도 전도가 유망한 청년이지. 데이지의 마음 속에서도 전도가 유망하고. 난 그 친구하고는 도저히 경쟁이 안 돼.
논리학자 고양이 이지도르는 네 발 동물이다.
노신사 그걸 어떻게 알죠?
논리학자 이건 가정입니다.
베랑제 그 친구는 부장 눈에도 들었어. 그런데 나야 뭐 장래랄 게 있나? 공부도 못했고 행운이라는 건 하나도 없으니까.
노신사 아, 가정이란 말씀이군요.
장 그래 자넨 이대로 물러서겠다는 거야?
베랑제 안 그러면 어쩌겠나?
논리학자 프리코도 네 발 동물이다. 그렇다면 프리코와 이지도르는 발이 몇 개일까요?
노신사 둘 합해서? 아니면 따로따로?
장 인생은 투쟁이야. 싸우지 않는다는 건 비겁해.
논리학자 합해서냐 따로따로냐는 경우에 따라 다르지요.
베랑제 그렇지만 할 수 없잖아? 내겐 무기가 없는걸.
장 이봐. 무기를 잡으라구 무기를.
노신사 (곰곰 생각한 끝에 논리학자에게) 여덟 개, 여덟 개지요.
논리학자 논리학은 암산으로 통합니다.
노신사 논리학이란 여러 가지 면이 있군요.
베랑제 어디서 무기를 구하지?
논리학자 논리학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장 자네 자신 안에서 구해야지. 자네의 의지로.
베랑제 어떤 무기를?
논리학자 이를테면 말입니다.
장 인내라는 무기, 교양, 시성이라는 무기지. (베랑제, 하품한다) 발랄하고 반짝반짝하는 정신이 있어야 하는 거야. 현대적 인간이 되라, 그 말이야.
베랑제 현대적이 되라니, 어떻게?
논리학자 그 고양이 두 마리에서 다리 두 개는 빼겠습니다. 그럼 한 마리에 몇 개씩 남죠?
노신사 그건 복잡한데요.
베랑제 그건 복잡한데.
논리학자 복잡하긴 오히려 간단하죠.
노신사 당신에겐 간단할지 모르지만 내겐 그렇지도 않아요.
베랑제 자네에겐 그게 간단할지 모르지만 내겐 그렇지도 않아.
논리학자 머리를 좀 써봐요. 자, 한번 해보시죠.
장 기운을 좀 내보게. 자, 한번 해보는 거야.
노신사 모르겠는데요.
베랑제 정말 모르겠는데.
논리학자 어째 그렇게 머리가 안 도실까?
장 어째 그렇게 머리가 안 도나?
논리학자 종이에다 계산을 한번 해보십시오. 고양이 두 마리에서 다리 여섯을 뺍니다. 그럼 한 마리에 몇 개씩 남지요?
노신사 잠깐… 기다려요. (그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계산한다.)
장 이렇게 하면 되네. 우선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면도는 매일 할 것. 셔츠는 깨끗하게 입을 것.
베랑제 세탁비가 비싸서.
장 술을 줄이면 돼. 외관은 이렇게 하게. 이런 모자에 이런 넥타이, 품위 있는 양복 그리고 구두는 반짝반짝하게 닦는 거야.
옷차림을 얘기하면서 그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모자, 넥타이, 깨끗한 구두를 베랑제에게 과시한다.
노신사 해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군요.
논리학자 말씀해 보시죠.
베랑제 그러구 나선 어떡하면 되지? 말을 해보게.
논리학자 어디 좀 들어봅시다.
베랑제 어디 좀 들어보세.
장 자넨 내성적이야. 하지만 재능은 있거든.
베랑제 내게 재능이 있다구?
장 그 재능을 발휘하란 말야. 자극을 받지 않으면 안 되네. 현대의 문학과 문화를 알아야만 돼.
노신사 우선 이런 답이 나올 수 있겠군요. 즉 고양이 한 마리는 다리가 네 개요, 또 한 마리는 다리가 두 개란 말씀이에요.
베랑제 그럴 만한 한가한 시간이 내게 있어야지.
논리학자 당신에겐 재능이 있습니다. 그 재능을 발휘만 하시면 되겠습니다.
장 그 얼마 안 되는 시간만이라도 유효하게 쓰면 되는 거야. 되는대로 적당히 살면 안 된다구.
노신사 내게 그럴 만한 시간이 어디 있어야죠, 관리였으니까요.
논리학자 공부할 시간이란 찾으면 늘 있게 마련입니다.
장 시간이란 늘 있게 마련이라구.
베랑제 너무 늦었어.
노신사 내 나이엔 너무 늦었어요.
장 절대로 너무 늦은 게 아냐.
논리학자 절대로 너무 늦은 게 아닙니다.
장 자넨 하루 여덟시간 근무야. 나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야. 하지만 일요일이 있고 퇴근 후의 저녁시간이 있고 또 여름 휴가 3주가 있지 않나? 그 정도면 충분해. 시간 이용의 방법만 좋으면 말이야.
논리학자 그럼 다른 해답을 들어봅시다. 방법만 좋으면… 방법만…
노신사, 다시 계산한다.
장 이봐, 술 마시고 병이 나는 쪽보다는 생기발랄한 쪽이 낫지 않아? 회사에서도 말야. 그렇게 되면 한가한 시간을 훌륭하게 보낼 수 있다구.
베랑제 말하자면 어떻게?
장 박물관에 간다든가 문예잡지를 읽는다든가 강연회를 들으러 가는 거지. 그러면 자네의 그 불안감도 없어지고 자넨 문화인이 되는 거야.
베랑제 그렇겠군.
노신사 이럴 수도 있겠군요. 즉 다리가 다섯 개 있는 고양이 한 마리에다가…
장 과연 그렇지?
노신사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고양이가 한 마리. 하지만 이런 것들도 고양이라 할 수 있을까요?
논리학자 논리적으로 안될 까닭이라도 있습니까?
장 돈도 함부로 쓸 것이 아니라 마음의 양식이 될 수 있는 곳에 써야 하네. 이를테면 재미있는 연극을 보기 위해서 극장표를 산다든가 하면 좋겠지. 자네 요즈음 화제가 되고 있는 전위극이 뭔지나 알고 있나? 이오네스코의 연극 가 본 일 있어?
베랑제 아니, 그저 얘기만 들었지.
노신사 여덟 개의 다리에서 두 개를 빼면 두 마리의 고양이 중의….
장 지금 마침 이오네스코의 연극을 하고 있으니 어서 가보게.
노신사 한 마리는 다리가 여섯 개일 수도 있겠고….
장 그 연극은 말야, 현대 예술 생활로 들어갈 수 있는 기가 막힌 입문서가 될 걸세.
노신사 그렇다면 또 한 마리는 다리가 하나도 없다는 해답이 되겠습니다.
베랑제 과연 그렇겠는데. 자네 말대로 난 이제부터 현대적으로 되어야겠어.
논리학자 그럴 경우에는 그 한 마리는 특수한 고양이가 되는 거지요.
베랑제 그렇게 하겠네. 자네에게 약속하지.
장 나한테보다는 우선 자네 자신에게 약속을 해야지.
노신사 그럼 고양이 한 마리는 다리 넷이 다 없으니까 고양이에선 낙오되는 것이 아닐까요?
베랑제 엄숙하게 약속하지. 그 약속 꼭 지키겠네.
논리학자 그건 옳지 못해요. 그러니까 그것은 논리적인 것이 못됩니다.
베랑제 이젠 술 마시는 대신 교양을 쌓기로 결심했네. 그랬더니 벌써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은데, 머리도 맑아지구….
장 그것 보라니까.
노신사 논리적이 아니라구요?
베랑제 오늘 오후부터 당장이라도 시립 미술관엘 가보겠네. 오늘밤엔 연극표를 두 장 사겠고. 같이 안 가려나?
논리학자 왜냐하면 올바른 것이 곧 논리이니까요.
장 끈기가 있어야 해. 자네의 그 뜻이 변치를 말아야 한다구.
노신사 알 것 같군요. 올바른 것이.
베랑제 약속하지. 자네에게도 도 나 자신에게도. 오늘 오후에 날 미술관에 데려가 주지 않겠나?
장 오늘 오후엔 난 낮잠을 자야 해. 그게 내 스케줄이라구.
노신사 올바르다는 것도 논리학의 일면이군요.
베랑제 그럼, 오늘 저녁 극장에는 나하고 같이 가주겠지?
장 오늘 저녁은 안되겠는데.
논리학자 머리가 이젠 탁 트이셨군요.
장 자네의 그 좋은 뜻이 계속되야 할 텐데. 하지만 난 오늘 저녁엔 맥주 홀에서 친구들과 만나야 하거든.
베랑제 맥주 홀에서?
노신사 그런데 다리가 하나도 없는 고양이는….
장 가기로 약속했거든. 그러니 약속은 지켜야지.
노신사 …생쥐를 잡으려 해도 빨리 뛸 수가 없겠습니다.
베랑제 이 사람아, 자네가 그런 좋지 못한 예를 보여주다니, 자네도 마시면 취할걸.
논리학자 아, 벌써 논리학에 진전이 있으십니다.
그때 또다시 코뿔소가 달리는 빠른 발소리, 울음소리, 시끄러운 발굽소리, 요란한 숨소리가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소음이 들려온다. 그러나 이번에는 반대로 무대 안쪽에서 전면을 향해. 왼쪽 무대 뒤에서.
장 (화를 내며) 어이, 어쩌다간 한 번이야. 자네하곤 근본적으로 달라. 왜냐하면 자넨… 자넨… 어쨌든 자네하곤 다르다구.
베랑제 어째서 다르지?
장 (상점들 쪽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누르려고 큰소리로) 난 술꾼은 아니란 말이야.
논리학자 고양이는 발이 없어도 쥐를 잡아야 합니다. 그게 고양이의 천성이니까요.
베랑제 (아주 큰 소리로) 난 자네가 술꾼이라고는 말 않겠네. 하지만 난 왜 자네보다 더 술꾼이 돼야 하느냐 말야? 같은 조건인데두!
노신사 (큰 소리로) 고양이의 천성이 뭐라구요?
장 (아주 큰 소리로) 매사엔 정도라는 것이 있는 거야. 난 자네와는 달리 분수를 지킬 줄 안단 말야.
논리학자 (노신사에게 귀에다 손을 대고) 뭐라구요?
굉장한 소음이 네 사람의 얘깃소리를 지워 버린다.
베랑제 (귀에다 손을 대고 장에게) 그럼 난, 난 어떻다구?
장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내 말은….
노신사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내 말은.
장 (소음이 아주 가까이서 나는 것을 깨닫고) 무슨 일이지?
논리학자 이게 뭐지?
장 (일어난다. 일어서면서 앉았던 의자를 쓰러뜨린다. 아까와는 반대쪽으로 달려가는 코뿔소이 소음이 나는 무대 뒤 왼쪽을 바라본다) 야, 코뿔소가!
논리학자 (일어서면서 앉았던 의자를 쓰러뜨린다) 야, 코뿔소가!
베랑제 (여전히 앉은 채로 그러나 이번에는 졸음이 가신 표정으로) 코뿔소다! 아까와는 반대편인데.
웨이트리스 (쟁반과 잔을 들고 나오다가) 이게 뭐지? 어머나, 코뿔소가! (쟁반을 떨어뜨린다. 유리컵이 깨진다)
카페 주인 (가게에서 나오며) 뭔데 그래?
웨이트리스 (카페 주인에게) 코뿔소예요.
논리학자 코뿔소가 맞은편 보도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오는데.
식료품가게 주인 (가게에서 나오며) 야, 코뿔소다!
장 야, 코뿔소다!
식료품가게 안주인 (가게 이층 창에서 고개를 내밀며) 어머나, 코뿔소가!
카페 주인 (웨이트리스에게) 그렇다고 컵은 왜 깨뜨려?
장 마구 달리니 진열장들이 아슬아슬한데.
데이지 (왼쪽에서 등장하며) 어머나, 코뿔소가!
베랑제 데이지!
먼젓번과 마찬가지로 도망 다니는 사람들의 다급한 발소리, 여기저기서 "야!" "어머나" 하는 외마디소리
웨이트리스 아니 저런!
카페 주인 깨뜨린 건 물어내야 해.
베랑제, 데이지의 눈에 뜨일까봐 숨으려 한다. 논리학자, 노신사, 식료품가게 주인, 무대 중앙으로 나오며 외친다.
일 동 아니 저런!
장과 베랑제 아니 저런!
찢어지는 듯한 고양이의 울음소리. 이어서 여자의 째지는 듯한 외침소리.
일 동 오!
거의 동시에 소음이 급히 사라져 간다. 조금 전의 그 주부가 나타난다. 바구니는 없다. 그러나 피투성이의 죽은 고양이 한 마리를 안고 있다.
주 부 (울먹이며) 내 고양이를 밟아 죽였다구요. 내 고양이를!
웨이트리스 코뿔소가 고양이를 밟아 죽였대요!
식료품가게 주인 부부는 창문에서, 그리고 노신사, 데이지, 논리학자는 주부를 둘러싸고 말한다.
일 동 저런 가엾어라.
노신사 가엾어라.
데이지와 웨이트리스 가엾어라!
식료품가게 주인 부부 (안주인은 창에서) 노신사·논리학자 가엾어라!
카페 주인 (웨이트리스에게 깨어진 유리컵과 쓰러진 의자들을 가리키며) 뭘 하고 있는 거야! 얼른얼른 주워 담지 않고서.
이번에는 장과 베랑제가 급히 나와 죽은 고양이를 안고 울먹이는 주부를 둘러싼다.
웨이트리스 (깨진 컵과 쓰러진 의자들을 정리하려고 카페의 테라스 쪽으로 간다. 계속 주부가 있는 쪽을 뒤돌아보며) 가엾어라!
카페 주인 (웨이트리스에게 깨진 컵과 의자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야, 저기.
노신사 (식료품가게 주인에게) 어떻게 된 걸까요?
베랑제 (주부에게) 울지 마십쇼, 부인. 정말 안됐습니다.
데이지 베랑제… 여기 있었군요? 당신도 봤어요?
베랑제 안녕. 데이지. 면도도 못해서 미안합니다.
카페 주인 (유리조각 줍는 것을 감독하다가 주부 쪽을 힐끗 보며) 그 고양이 참 안됐군.
웨이트리스 (유리조각을 주어 모으려 주부 쪽으로 등을 돌린 채) 가엾어라.
(물론 이 대사들은 매우 빨리 거의 동시에 튀어나온다)
식료품가게 안주인 (창문에서) 정말 이건 너무한데?
장 너무한데.
주 부 (죽은 고양이를 안고 흔들어 주며 울먹인다) 가엾은 미쭈, 가엾은 미쭈!
노신사 (주부에게) 이런 처참한 일을 당하신 부인을 다시 만나뵙게 되다니.
논리학자 그만해 두십쇼, 부인. 고양이란 모두 죽게 마련이니까요. 이젠 단념하십시요.
주 부 (울먹이며) 내 고양이가, 내 고양이가, 내 고양이가!
카페 주인 (앞치마에 깨진 컵을 불룩하게 담고 있는 웨이트리스에게) 어서, 쓰레기 통에다 갖다 버려! (의자를 다시 세우며) 천프랑 물어내야 해.
웨이트리스 (카페 안으로 들어가며 주인에게) 돈밖에 모르셔.
식료품가게 안주인 (창에서) 이젠 진정하십요, 부인.
노신사 고정하십죠, 부인.
식료품가게 안주인 오죽이나 마음이 아프겠어요.
주 부 내 고양이가! 내 고양이가! 내 고양이가!
데이지 그렇구말구요. 오죽이나 마음이 아프겠어요.
노신사 (주부를 부축하여 테라스의 테이블 쪽으로 간다. 모두들 따라간다) 부인, 여기 좀 앉으십시오.
장 (노신사에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식료품가게 주인 (논리학자에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식료품가게 안주인 (창문에서 데이지에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카페 주인 (여전히 울면서 죽은 고양이를 안고 흔들어 주는 주부를 테이블 앞에 앉히는 동안 다시 나타난 웨이트리스에게) 부인한테 물 한잔 갖다 드려.
노신사 자, 부인. 앉으시죠.
장 부인이 안 됐어.
식료품가게 안주인 (창문에서) 고양이가 가엾지.
베랑제 (웨이트리스에게) 차라리 꼬냑을 한 잔 갖다드리죠.
카페 주인 (웨이트리스에게) 꼬냑 한 잔! 지불은 선생님께서 하시는 거죠?
웨이트리스, 카페 안으로 들어가며 대답한다.
웨이트리스 알겠습니다. 꼬냑 한 잔이요.
주 부 (흐느끼면서) 괜찮아요. 마시고 싶지 않아요.
식료품가게 주인 조금 아까도 지나갔다구요. 가게 앞으로.
장 (식료품가게 주인에게) 같은 놈이 아니에요.
식료품가게 주인 (장에게) 하지만….
식료품가게 안주인 아까하고 같은 소였어요.
데이지 그럼 두 번씩이나 지나갔단 말이에요?
카페 주인 내 보기엔 같은 놈 같던데.
장 아뇨, 아까하고는 다른 코뿔소였어요. 먼저 지나간 놈은 뿔이 코에 뿔이 두 개 난 아시아 종 코뿔소였고, 이번 놈은 뿔이 하나밖에 없는 아프리카 종 코뿔소던데요.
웨이트리스가 꼬냑 한 잔을 들고 나와 부인 앞에 놓는다.
노신사 자, 꼬냑입니다. 이걸 드시면 기분이 좀 가라앉으실 겁니다.
주 부 (울면서) 싫어… 요….
베랑제 (갑자기 신경을 곤두세우며 장에게) 바보 같은 소리 좀 작작하게! …뿔이 하난지 둘인지 자네가 어떻게 안다고 그래? 그놈은 쏜살같이 지나갔는데! 제대로 볼 수도 없게 말야….
데이지 (주부에게) 그래요. 기운이 좀 나실 거예요.
노신사 (베랑제에게) 과연, 무섭게 빠르더군요.
카페 주인 (주부에게) 어서, 들어 보세요. 술맛이 좋습니다.
베랑제 (장에게) 자넨 뿔을 셀 틈이 없었을 텐데….
식료품가게 안주인 (창에서 웨이트리스에게) 마시게 해드려요.
베랑제 (장에게) 게다가 흙먼지에 파 묻혀서….
데이지 어서 마셔보세요, 부인.
노신사 부인, 한 모금만… 기운을 차리시고….
웨이트리스가 잔을 주부의 입술에 갖다대며 마시게 한다. 주부 처음에는 거절하는 듯하더니 결국은 마신다.
웨이트리스 됐어요!
식료품가게 안주인 (창에서) 데이지, 됐어요!
장 (베랑제에게) 난 멍청한 사람이 아니야. 계산이 빠르거든. 두뇌가 명석하니까…
노신사 (주부에게) 이제 좀 괜찮으시죠?
베랑제 (장에게) 하지만, 그 놈은 머리를 숙이고 달려갔잖아?
카페 주인 (주부에게) 맛이 괜찮습죠?
장 (베랑제에게) 그러니까 잘 보이지.
주 부 (마시고 나서) 내 고양이가!
베랑제 (화를 내며 장에게) 말 같지 않은 소리!
식료품가게 안주인 (창에서 주부에게) 원하신다면 우리집 고양이라도 드릴까요?
장 (베랑제에게) 내가? 자네가 감히 내 말을 말 같지 않은 소리라니?
주 부 (식료품가게 안주인에게) 다른 고양이는 필요없어요! (그녀는 고양이를 흔들어 주며 흐느낀다)
베랑제 (장에게) 그래,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카페 주인 이젠 잊어버리시죠.
장 난 말같지 않은 소리는 한 일이 없네!
노신사 좀 달관하실 줄도 아셔야 합니다.
베랑제 자넨, 잘난 척 할줄 밖에 몰라. (소리를 높이며) 유식한 체나 하고….
카페 주인 (장과 베랑제에게) 이것 보세요, 선생님들 그만!
베랑제 (장에게 계속해서) …유식한 척 하지만 아는 것도 제대로 없으면서… 이봐, 코에 뿔이 하나밖에 없는 코뿔소는 아시아 종이라구! 아프리카 종은 뿔이 두 개야….
모두들 주부는 팽개쳐 두고, 큰소리로 다투고 있는 장과 베랑제 주위로 몰려든다.
장 아냐, 그 반대야!
주 부 (혼자서) 그처럼 귀엽던 내 고양이가….
베랑제 내기 할까?
웨이트리스 내기를 하려나 봐요!
데이지 화내지 마세요, 베랑제.
장 너하곤 내기 안 하겠어. 뿔이 두 개 난 건 바로 너야! 이 아시아 종자야!
웨이트리스 어쩌면.
식료품가게 안주인 (창에서 남편에게) 싸움이 붙을 것 같아요.
식료품가게 주인 (아내에게) 무슨 소리야! 내기라는데!
카페 주인 (장과 베랑제에게) 여기서 난동을 부리시면 곤란합니다.
노신사 저… 코에 뿔이 하나밖에 없는 코뿔소가 무슨 종이라고 했죠! (식료품가게 주인에게) 댁은 장사를 하는 분이니까 아시겠군요?
식료품가게 안주인 (창에서 남편에게) 그래요, 당신은 아시겠구려!
베랑제 내게 무슨 뿔이 있어? 뿔이 나한테 왜 났겠느냐 말야!
식료품가게 주인 (노신사에게) 장사꾼이라고 뭐든지 다 알 리가 있습니까?
장 뿔이 있다구.
베랑제 난 아시아인이 아냐! 또 아시아인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이라구!
웨이트리스 그럼요, 아시인도 댁이나 나같이 똑같은 인간이죠….
노신사 (카페 주인에게) 옳습니다!
카페 주인 (웨이트리스에게) 누가 네 의견 말하랬어?
데이지 (카페 주인에게) 이 여자 말이 옳아요. 아시아인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인걸요.
이런 말다툼이 오가는 중에도 주부는 계속 울먹인다.
주 부 그렇게 착하더니! 우리하고 똑같았는데.
장 (흥분해서) 그자들은 피부색이 노랗다구!
논리학자는 장과 베랑제를 둘러싼 무리와 주부 사이에서 혼자 떨어져 그들의 논쟁에 가담은 하지 않은 채 주의깊게 바라만 보고 있다.
장 난 가겠습니다, 여러분 안녕!. (베랑제에게) 너한테 인사하는 것 아냐!
주 부 (여전히) 우릴 그렇게 따르더니! (흐느낀다)
데이지 자, 베랑제! 장….
노신사 나한테 아시아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럼 그 사람들은 진짜 아시아인이 아니었나?
카페 주인 내겐 진짜 아시아인 친구가 있었죠.
웨이트리스 (식료품가게 안주인에게) 내게도 아시아 친구가 하나 있었죠.
주 부 (여전히) 내겐 정말 귀여운 녀석이었는데!
베랑제 그래, 넌 빨갛다 빨개!
식료품가게 안주인 (창에서) ·웨이트리스 어쩌면!
카페 주인 어째 사태가 험악해 지는데!
주 부 (여전히) 그렇게 깨끗하더니! 저 혼자서 오줌 똥 다 가리구.
장 (베랑제에게) 정 이러면, 날 다신 못 만날 줄 알아! 내가 너 같은 얼간이하고 어울리다니 시간이 아깝다!
주 부 (여전히) 감정도 그러게 잘 나타내더니!
장 (화가 나서 급히 오른쪽을 향해 걸어간다… 그러나 아주 나가려다 말고 다시 되돌아온다)
노신사 (식료품가게 주인에게) 아시아인 중에는 피부색이 흰 사람, 검은 사람, 푸른 사람 그리고 또 우리 같은 사람들도 있죠.
장 (베랑제에게) 이 술주정뱅이야!
모두들 깜짝 놀라 그를 본다.
베랑제 (장을 향해) 이젠 용서 못하겠다!
일동 모두 (장을 향해) 저런!
주 부 (여전히) 말만 못했지. 아니, 그것도….
데이지 (베랑제에게) 저이의 화를 돋구지 말 걸 그랬어요.
베랑제 (데이지에게) 그건 내 탓이 아니예요….
카페 주인 (웨이트리스에게) 조그만 관을 하나 찾아와. 이 가엾은 고양이를 넣게….
노신사 (베랑제에게) 내 생각엔 당신 말이 옳아요. 아시아 종 코뿔소가 뿔이 두 개고 아프리카 종은 뿔이 하나….
식료품가게 주인 이 양반은 그 반대라는 거예요.
데이지 (베랑제에게) 두 분 다 옳지 못했어요.
노신사 (베랑제에게) 어쨌든, 당신 말이 옳았어요.
웨이트리스 (주부에게) 부인, 어서 이 상자에다 고양이를 넣으세요.
주 부 (미친 듯이 울면서) 안 돼요! 안 돼요!
식료품가게 주인 미안하지만 난 장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데이지 (주부 쪽으로 돌아서며) 이젠 정신을 차리셔야죠, 부인!
데이지와 웨이트리스는 고양이의 시체를 안고 있는 주부를 카페 입구 쪽으로 데리고 간다.
노신사 (데이지와 웨이트리스에게) 같이 가 드릴까요?
식료품가게 주인 아시아종 코뿔소는 뿔이 하나고 아프리카 종은 두 개죠. 또 역도 진이구요.
데이지 (노신사에게) 괜찮아요.
데이지와 웨이트리스는 여전히 슬퍼하는 주부를 데리고 카페 안으로 들어간다.
식료품가게 안주인 (창에서 남편에게) 아니, 당신은 왜 밤낮 남하고는 거꾸로만 가는거유!
베랑제 (모두가 코뿔소의 뿔 얘기만 하는 동안 혼자 떨어져서. 방백) 데이지 말이 옳아. 장의 말을 반박하는 게 아니었는데.
카페 주인 (식료품가게 안주인에게) 댁의 남편 말이 옳아요. 아시아종 코뿔소는 뿔이 두 개고 아프리카 종도 두 개일 수 있다구요. 또 역도 진이고.
베랑제 (방백) 장은 반박당하는 건 견디지 못해. 조금이라도 자기 뜻을 거슬리면 펄펄 뛰니까.
노신사 (카페 주인에게) 당신이 틀렸어요.
카페 주인 (노신사에게) 대단히 죄송하게 됐습니다!
베랑제 (방백) 화를 내는 게 그 친구의 유일한 결점이지.
식료품가게 안주인 (창에서 노신사와 카페 주인과 남편을 향해) 두쪽이 다같은 건지도 모르죠.
베랑제 (방백) 사실은 아주 착한 녀석이거든. 내가 신세를 많이 졌는데.
카페 주인 (식료품가게 안주인에게) 한쪽이 뿔이 두 개라면 다른 한 쪽은 응당 하나라야 하잖아요?
노신사 아니죠. 어쩌면 그 다른 한쪽이 뿔이 두 개고 한 쪽은 뿔이 한 개일지도 모르죠.
베랑제 (방백) 내가 조금만 참았으면 좋았을걸. 그런데 그 친구는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렸을까? 난 그를 화나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모두에게) 그 친구는 늘 엄청난 소리만 내세우는 거예요. 자기의 지식으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은 거죠. 자기가 틀렸다는 걸 절대로 시인하지 않는답니다.
노신사 (베랑제에게) 그럴만한 증거라도 있으시오?
베랑제 증거라니, 무슨?
노신사 조금 전의 당신 주장 말이오. 친구하고 그런유감스러운 논쟁까지 일으키게 했던 그 주장에 대한….
식료품가게 안주인 (베랑제에게) 그래요, 무슨 증거라도 있으슈?
노신사 (베랑제에게) 코뿔소 두 마리 중의 한 놈은 뿔이 두 개고 다른 한 놈은 뿔이 하나였다는 걸 어떻게 아시죠? 그리고 어느 쪽이 그렇다는 거죠?
식료품가게 안주인 이 양반이라고 우리보다 더 잘 알 리가 있겠어요?
베랑제 우선 코뿔소가 과연 두 마리였는지조차 모르는 일입니다. 내 생각엔 코뿔소는 한 마리뿐이었던 것 같아요.
카페 주인 코뿔소가 두 마리였다는 점은 인정하기로 합시다. 그렇다면 뿔이 하나 있는게 어느 놈이죠? 아시아 종인가요?
노신사 아니죠. 뿔 두 개짜리가 아프리카 종입니다. 난 그렇게 생각해요.
카페 주인 뿔이 두 개 있는 놈은?
식료품가게 주인 아프리카 종이 아니예요.
식료품가게 안주인 암만 따져 봤자 도로아미타불이로군.
노신사 하지만 이 문제는 분명히 밝혀져야 합니다.
논리학자 (조심스럽게 나온다) 여러분 말씀중에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만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제 소개부터 말씀드리자면….
주 부 (울먹이며) 이 분은 논리학자세요.
카페 주인 아, 논리학자요!
노신사 (논리학자를 베랑제에게 소개한다) 제 친구, 논리학자입니다.
베랑제 처음 뵙겠습니다.
논리학자 (계속해서) …논리학의 전문가지요. 여기 제 신분증이 있습니다. (그는 신분증을 보인다)
베랑제 영광입니다, 선생님.
식료품가게 주인 저희들도 대단히 영광스럽습니다.
카페 주인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십쇼. 아프리카종 코뿔소는 뿔이 하나인지...
노신사 혹은 둘인지...
식료품가게 안주인 그리고 아시아종 코뿔소는 뿔이 둘인지…
식료품가게 주인 혹은 하나인지.
논리학자 아니, 바로 그 점이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내가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것이 바로 그 점이지요.
식료품가게 주인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싶어하는 것은 그 점입니다.
논리학자 자, 여러분 제게 말을 좀 시켜 주십시오.
노신사 여러분, 어디 들어봅시다.
식료품가게 안주인 (창에서 남편에게) 그럼, 그 양반 얘기를 좀 들어 보세요.
카페 주인 듣고 있습니다, 선생님.
논리학자 (베랑제에게) 내가 얘기하는 것은 특히 당신에게 하는 말이오. 그리고 여기 계신 여러분에게도 하는 말입니다.
식료품가게 주인 우리에게도….
논리학자 자, 우선 여러분은 어떤 한가지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무의식중에 그 문제에서 이탈하고 만 거예요. 처음 시작은 방금 지나간 코뿔소가 아까 지나간 코뿔소와 같은 코뿔소냐, 아니냐가 문제였습니다. 해답을 구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점입니다.
베랑제 어떻게요?
논리학자 자, 여기 뿔이 하나밖에 없는 동일한 코뿔소를 여러분이 두 번 보았는 지도 모르겠고….
식료품가게 주인 (잘 알아들으려는 듯 되뇌인다) 뿔이 하나밖에 없는….
카페 주인 (마찬가지로) 코뿔소를 두 번….
논리학자 (계속해서) 혹은 뿔이 두 개있는 동일한 코뿔소를 여러분이 두 번 보았는 지도 모르겠고….
노신사 (되뇌인다) 뿔이 두 개 있는 코뿔소 한마리를 두 번….
논리학자 그렇죠. 또, 첫번째 코뿔소의 뿔이 하나였는데 다른 코뿔소인 두번째 코뿔소도 역시 뿔이 하나였는지도 모릅니다.
식료품가게 안주인 (창에서) 하, 하….
논리학자 마찬가지로 첫번째 코뿔소의 뿔이 둘, 두번째 다른 코뿔소도 역시 뿔이 둘이었는지도 모르겠고.
카페 주인 그렇군요.
논리학자 이번에는 여러분이 본 것이….
식료품가게 주인 우리가 본 것이….
노신사 그래요 우리가 본 것이….
논리학자 만일 여러분이 본 것이 첫번째 놈은 뿔이 두 개 난 코뿔소였고….
카페 주인 뿔이 두 개 난 코뿔소였고….
논리학자 두번째 놈은 뿔이 하나밖에 없는 코뿔소였다면….
식료품가게 주인 뿔이 한 개밖에 없는 코뿔소였다면….
논리학자 그렇다 치더라도 역시 거기서는 아무런 결론이 안 나옵니다.
노신사 거기서는 결론이 안 나옵니다.
카페 주인 어째 그럴까요?
식료품가게 안주인 원, 난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네.
식료품가게 주인 원! 저런!
그의 아내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창에서 사라진다.
논리학자 왜냐하면, 얼마 안 되는 그 사이에 코뿔소가 뿔을 하나 잃어버렸을 수도 있으니까. 조금 전의 코뿔소가 먼젓번 코뿔소와 동일하다는 것도 또한 가능하기 때문이죠.
베랑제 알겠습니다. 하지만….
노신사 (베랑제의 말을 막으며) 잠자코 좀 있어요.
논리학자 또, 뿔이 두개 있는 코뿔소 두 마리가 두 놈 모두 뿔을 하나씩 잃어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노신사 그럴 수도 있죠.
카페 주인 암, 그럴 수도 있지요.
식료품가게 주인 그렇구말구요!
베랑제 네, 그렇지만….
노신사 (베랑제에게) 잠자코 좀 있어요.
논리학자 만일 여러분이 본 코뿔소가 첫번째 놈은 그것이 아시아종이었건 아프리카종이었건 뿔이 하나밖에 없었고….
노신사 아시아종이건 아프리카종이건….
논리학자 …두번째 코뿔소는 뿔이 두 개였다고 한다면….
노신사 뿔이 두개였다고 한다면!
논리학자 그것이 아프리카종이었건 아시아종이었건 상관없이….
식료품가게 주인 아프리카종이었건 아시아종이었건….
논리학자 (논증을 계속하면서) …그때는, 우리가 서로 다른 두 마리의 코뿔소를 문제로 삼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가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두번째 뿔이 코뿔소의 코에서 삽시간에 눈에 띠도록 크게 돋아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노신사 매우 희박하고 말고요.
논리학자 (자신의 추론에 만족해서) 그렇게 되면 그것은 아시아종이나 아프리카종의 코뿔소가….
노신사 아시아종이나 아프리카종의 코뿔소가….
논리학자 …아프리카종이나 아시아종 코뿔소가 되는 것인데….
카페 주인 아프리카종이나 아시아종이.
식료품가게 주인 허허!
논리학자 이것은 논리적으론 불가능하지요. 왜냐하면, 하나의 생물이 동시에 두 장소에서 태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노신사 또, 연거푸 태어날 수도 없고.
논리학자 (노신사에게) 그 점에는 증명이 필요해요.
베랑제 (논리학자에게) 잘 알겠습니다만 그것이 문제의 해결은 안 되는군요.
논리학자 (베랑제에게 권위있는 표정으로 빙그레 웃으며) 물론이죠. 단, 이런 식으로 해서 문제는 정확하게 제시되어야만 합니다.
노신사 정말 논리적이로군요.
논리학자 (모자를 벗으며) 여러분, 그럼 안녕히!
그는 돌아서서 왼쪽으로 나간다. 그 뒤를 노신사가 따라간다.
노신사 여러분, 안녕히. (그는 모자를 벗고 논리학자를 뒤따른다)
식료품가게 주인 그게 아마 논리적이라는 모양이지….
그때 카페에서 주부가 비탄에 젖어 상자를 들고 나온다. 그 뒤로 마치 장례식처럼 데이지와 웨이트리스가 뒤따라오고 있다. 행렬은 오른쪽 출구를 향해 간다.
식료품가게 주인 (계속해서) 그게 아마 논리적인 모양이지. 하지만 뿔이 하나였는지 둘이었는지 아시아종인지 아프리카종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코뿔소에게 고양이 한 마리가 밟혀 죽은 것은 사실이란 말이야. (그는 극적인 몸짓으로 밖을 향해 나가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카페 주인 그 말이 옳아요. 그건 맞았어요! 그게 코뿔소이건 무엇이건 간에 고양이가 밟혀 죽은 것만은 용서할 수 없어요!
식료품가게 주인 그건 용서할 수 없죠.
식료품가게 안주인 (가게 문으로 얼굴을 내밀며 남편에게) 여보, 어서 들어와요! 손님들이 와요!
식료품가게 주인 (가게 쪽으로 가며) 암, 용서할 수 없지.
베랑제 장하고 싸우지 말았어야 했는데! (카페주인에게) 꼬냑 한 잔 주세요! 더블로!
카페 주인 예, 드리죠. (꼬냑 잔을 가지러 카페 안으로 들어간다)
베랑제 (혼자서) 내가 화를 내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카페주인, 손에 커다란 꼬냑 잔을 들고 나온다) 마음이 너무 서글퍼서 미술관엔 못 가겠는데. 교양을 쌓는 일은 다음 기회로 미루지. (그는 꼬냑 잔을 들고 마신다)
-막
제 2 막 제 1 장
장치
관청 사무실 또는 개인 기업, 이를테면 법률서적의 대 출판사 사무실. 무대 중앙 안쪽으로 커다란 두짝 문, 그 위에 '부장실'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다. 그 문 옆, 왼쪽 구석에 타이프라이터가 놓여 있는 데이지의 책상이 있다. 계단으로 통하는 문과 데이지의 작은 책상 사이에는 왼쪽 벽에 붙여 놓은 또 하나의 테이블. 그 위에는 직원들이 출근하면서 사인하는 출근부가 있다. 거기서부터 왼쪽 전면에 계단으로 통하는 문. 계단의 상부, 난간 그리고 층계참이 보인다. 전면으로 테이블 하나에 의자 둘. 테이블 위에는 교정지, 잉크, 펜. 보따르와 베랑제의 책상이다. 베랑제는 왼쪽 의자, 보따르는 오른쪽 의자. 오른쪽 벽 가까이에 그보다는 좀더 큰 또 하나의 장방형 테이블. 역시 서류며 교정지 등이 흩어져 있다. 이 테이블에도 (훨씬 좋고 '거창한') 두 개의 의자가 마주 보고 있다. 뒤다르와 뵈프 씨의 테이블이다. 뒤다르는 벽에 기대어 있는 의자에서 직원들을 마주보게 될 것이다. 그의 직함은 부장대리.
안쪽 문과 오른쪽 벽 사이에는 창이 하나 있다. 오케스트라 박스가 있는 극장에서는 객석과 마주보이는 가운데 전면에 간단한 창틀만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오른편 안쪽 구석으로 외투걸이. 회색 작업복이나 낡은 웃저고리들이 걸려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외투걸이가 오른쪽 벽 바로 옆, 무대 전면에 놓일 수도 있다.
벽에는 먼지가 쌓인 책과 서류들이 나란히 꽂혀 있다. 왼쪽 책꽂이 위에는 안쪽으로 '법률', '법전'이라고 씌어 있고, 오른쪽 벽에는 약간 비스듬히, '관보', '국세법'이라고 씌어 있다. 부장실 문 위의 시계가 9시 3분을 가리키고 있다.
막이 오르면 뒤다르가 그의 테이블 옆에 서 있다. 객석에서는 오른쪽 옆모습이 보인다. 테이블 반대쪽에는 보따르. 객석에서 왼쪽 옆얼굴이 보인다. 두 사람 사이로 역시 테이블 앞에 부장이 객석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다. 부장 왼쪽에 약간 뒤로 데이지. 그녀는 타이프로 찍은 서류를 들고 있다. 세 사람이 둘러앉은 테이블의 교정지들 위로 신문이 크게 펼쳐져 있다.
막이 오르면 몇 초 동안 인물들은 움직이지 않은 채, 그 자세에서 최초의 대사가 시작된다. 활인화를 형성한다. 제1막의 시작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부장. 50세 가량, 단정한 복장. 곤색 신사복, 레지옹 도뇌르 약장(略章), 빳빳이 세운 칼라, 검은 넥타이, 갈색의 짙은 콧수염. 빠삐용 씨라고 불린다.
뒤다르. 35세. 회색빛 신사복 웃저고리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검은색 소매커버를 끼고 있다. 안경을 써도 좋다. 키는 큰 편, 장래의 간부, 부장이 국장대리가 되면 그가 부장이 된다. 보따르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보따르. 전직 국민학교 교사. 거만한 표정에 짤막한 흰 콧수염. 나이 육순은 실한 노인(그는 모르는 게 없이 매사를 다 아는 척한다.) 베레모를 쓰고 회색 긴 작업복을 입고 있다. 꽤 높은 코에 안경을 쓰고 귀에는 연필이 꽂혀 있다. 팔에는 역시 소매커버.
데이지. 금발의 젊은 처녀.
뒤에 등장할 뵈프 부인. 50대의 뚱뚱한 여인. 눈물이 잦고 숨을 헐떡인다.
등장인물들은 막이 오르면 오른쪽 테이블 주위에 선 채로 움직이지 않는다. 부장은 식지로 신문을 가리키고 있다. 뒤다르는 보따르를 향해 손을 뻗치고 '하지만 잘 보란 말야!' 하는 듯한 표정. 보따르는 작업복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입술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미소를 띠고 '나는 못 속일걸' 하는 표정.
데이지, 타이프한 서류를 들고 뒤다르를 지켜 보고 있는 듯하다. 잠시 후에 보따르가 입을 연다.
보따르 말도 안 되는 소리! 황당무계해도 분수가 있지!
데이지 제가 봤는걸요! 코뿔소를 내 눈으로 봤다구요.
뒤다르 신문에 났으니까 그건 확실해요. 부인할 수야 없지.
보따르 (형편없이 경멸하는 투로) 흥!
뒤다르 여기 씌어 있지 않아요? 자, 고양이가 밟혀 죽었다는 기사가 여기 있군요! 부장님 한 번 읽어보시죠!
빠삐용 씨 "어제 일요일, 정오경. 시내 공원 광장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후피 동물에게 밟혀 죽었음."
데이지 바로 교회 광장은 아니었지만요!
빠삐용 씨 이게 전부야. 상세한 내용은 없군.
보따르 흥!
뒤다르 그 정도면 충분하죠. 확실합니다.
보따르 난 신문기자들을 믿지 않아요. 신문 기자란 모두가 허풍장이지. 난 난대로의 생각이 따로 서 있어서 내 눈으로 본 것 외에는 믿질 않거든. 전에 선생으로 있을 때부터 난 명백한 것,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것 이외에는 상대하지 않아요. 말하자면 나는 정확하고 방법적인 정신의 소유자란 말씀이오.
뒤다르 지금 정확하고 방법적인 정신이라는 것이 여기서 무슨 소용이 있죠?
데이지 보따르씨! 이 기사는 아주 정확한 것 같아요.
보따르 이걸 정확하다는 거요? 그렇다면, 후피 동물이라는 건 도대체 뭘 말하는 거지? 고양이가 밟혀 죽었다는 기사를 쓴 기자가 말하는 후피 동물이 어떤 동물이냐 말이오! 거기 대해서 한마디도 없지요? 그리고 고양이라는 건 또 뭘 말하는 거지?
뒤다르 고양이가 뭔지는 누구나 다 아는 것 아닙니까?
보따르 수코양이냐 암코양이냐가 문제란 말이오. 또 무슨 색이지 어떤 종자인지. 나는 인종차별에는 반대지만 말이오.
빠삐용 씨 이봐요 보따르, 문제가 다르지 않소? 인종차별이 이 문제와 무슨 상관이 있소?
보따르 부장님, 용서하십쇼. 하지만 인종차별이 20세기의 가장 큰 과오 중의 하나라는 건 부인 못하시겠죠?
뒤다르 물론 그거야 우리도 동감이지만 그러나 여기선 그게 문제가 아니라….
보따르 뒤다르, 그건 경솔하게 다룰 문제가 아니에요. 역사적인 사실이 증명하듯이 인종차별은….
뒤다르 그 문제와는 상관이 없다니까요.
보따르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을 텐데.
빠삐용 씨 인종차별의 문제가 아니에요.
보따르 아니조, 인종차별을 고발할 기회는 절대로 놓쳐선 안 됩니다.
데이지 하지만 여기에는 인종차별의 편견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다구요. 당신은 문제의 방향을 다른 데로 끌어가시는 거예요. 지금은 단지 후피 동물, 그러니까 코뿔소에게 밟혀 죽은 고양이가 문제라니까요.
보따르 난 남불(南佛) 태생이 아니오. 남불 사람들은 상상력이 너무 지나쳐서 탈이야. 그러니까 이번 사건도 어쩌면 생쥐에게 밟혀 죽은 벼룩 하 마리를 가지고 떠드는 건지도 모르지. 그걸 과장한 거요.
빠삐용 씨 (뒤다르에게) 자, 그럼 우리 사건의 요점을 이야기해 보지. 데이지가 봤다구? 코뿔소가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니는 걸 말이야.
데이지 어슬렁거리다니요? 막 뛰어 다녔는걸요.
뒤다르 나 자신은 직접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믿을만한 사람들이….
보따르 (말을 가로막으며) 그게 다 허튼 수작들이란 말이오. 신문 기자들을 믿다니! 그자들은 대중을 우롱한다 이 말이오. 그 너절한 신문이 잘만 팔리게 꾸며서 사장의 비위를 맞추려는 거지. 그들은 사장의 종이니까. 뒤다르, 그런 걸 당신이 믿고 있다니! 법학사요? 법률가라는 사람이. 참 우스워서! 하, 하, 하….
데이지 하지만, 내가 봤는걸요. 코뿔소를 봤다니까요! 정말이에요.
보따르 아니, 난 아가씨를 얌전하게 봤는데.
데이지 보따르, 내가 착각한 게 아니에요! 나 혼자 본 게 아니에요. 제 주위에서 여러 사람이 봤는걸요.
보따르 흥! 그야 뭔가 다른 것을 봤겠지! …어차피 아무 할 일도 안 하고, 빈둥거리는 한가한 사람들이니까.
뒤다르 어젠 일요일이었습니다.
보따르 난 일요일에도 일해요. 교회에 나오라는 신부의 말은 난 안 들으니까! 그 말 듣다간 땀 흘려서 밥 벌어먹을 시간 다 뺏기게.
빠삐용 씨 (분개해서) 무슨 말을 그렇게!
보따르 죄송합니다. 부장님의 비위를 거슬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종교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이 종교를 경멸한다는 뜻은 아니올시다. (데이지에게) 아가씨는 우선 코뿔소가 무지나 아시오?
데이지 그건… 굉장히 크고, 보기 흉한 동물이죠!
보따르 그러면서도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할 수 있어요? 데이지, 코뿔소란….
빠삐용 씨 코뿔소에 대한 강의는 여기서 하지 말아요. 여긴 학교가 아니니까.
보따르 그렇다면 유감이로군요.
이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부터 베랑제가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사무실 문을 살며시 열어 본다. 문이 열리면서 '법률출판'이라는 푯말이 보인다.
빠삐용 씨 데이지양, 아홉시가 지났으니 출근부 이리로 가져와요. 지각한 사람들에게는 안됐지만!
데이지는 출근부가 놓여 있는 왼쪽 작은 테이블로 간다. 그때 베랑제가 들어온다.
베랑제 (방 안 사람들이 토론을 계속하고 있는 사이에, 들어서면서 데이지에게) 안녕. 데이지. 나 지각 아니죠?
보따르 (뒤다르와 빠삐용 씨에게) 난 다만 저 아가씨의 무지를 반박하는 거예요.
데이지 베랑제. 자, 빨리요.
보따르 …학교가 아니더라도 궁전이건 초가집이건 아무 데서라도 좋아요.
데이지 출근부에 빨리 사인하세요!
베랑제 고마워요. 부장님 벌써 오셨나?
데이지 (손가락을 입에 대고, 베랑제에게) 쉿! 저기 계세요.
베랑제 벌써? 이렇게 일찍? (그는 급히 출근부에 사인한다)
보따르 (계속해서) 아무 데서건 상관없습니다. 출판사라 해도 마찬가지지요.
빠삐용 씨 보따르, 내가 보기에는….
베랑제 (사인하면서 데이지에게) 아직 10분도 안 지났는데….
빠삐용 씨 말이 너무 지나친 것 같군.
뒤다르 (빠삐용 씨에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부장님.
빠삐용 씨 (보따르에게) 당신의 동료요 나의 협력자인 뒤다르를 무지몽매한 사람처럼 말을 하면 안 되죠. 더구나 이 사람은 법학사요 우리 회사의 우수한 직원인데.
보따르 전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때로는 단과대학이나 종합대학이 국민학교만큼의 가치도 없긴 하지만요.
빠삐용 씨 (데이지에게) 어서, 출근부 가져와!
데이지 여기 있습니다, 부장님.
빠삐용 씨 (베랑제에게) 아, 베랑제가 나타났구만.
보따르 (뒤다르에게) 대학에는 명확한 관념, 관찰 정신, 실용적인 감각이 결여되어 있단 말이오.
뒤다르 (보따르에게) 그럴 리가!
베랑제 (빠삐용 씨에게) 안녕하셨습니까, 부장님. (그는 부장의 등 뒤를 지나 세 사람의 테이블 뒤를 돌아서 외투걸이 쪽으로 간다. 외투걸이에서 작업복 혹은 낡은 웃저고리를 벗기고 그 자리에 외출복을 대신 걸어놓는다. 그리고 외투걸이 옆에서 입고 있던 웃저고리를 벗고 작업복으로 바꾸어 입은 다음 자기 테이블로 가서 서랍 속의 검정빛 소매커버를 꺼내는 등… 사람들에게 인사도 한다) 안녕하셨어요. 부장님? 죄송합니다. 하마터면 지각할 뻔했지요. 잘 지냈어? 뒤다르! 안녕하세요, 보따르!
빠삐용 씨 베랑제, 자네도 코뿔소를 보았다구?
보따르 (뒤다르에게) 대학 교육이란 건 생활엔 아무 필요도 없는 추상적인 것뿐이라구.
뒤다르 (보따르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
베랑제 (지각한 것이 송구스러워 계속 부리타케 사무용품들을 챙기면서 빠삐용 씨에게 자연스러운 어조로) 네, 물론 봤습니다.
보따르 (돌아다보며) 흥!
데이지 그것 보세요. 내가 터무니없는 소릴 한 건 아니라구요.
보따르 (빈정거리듯) 베랑제는 인사로 하는 소리예요. 보기와는 달리 여자에겐 친절하단 말야.
뒤다르 코뿔소를 봤다는 게 어째서 인사로 하는 소리라는 거예요?
보따르 그럴 수 있지. 그게 데이지의 꿈 같은 이야기를 두둔해 주려는 거니까. 모두가 데이지에게는 친절하거든. 그야, 이해가 갈 만하지만.
빠삐용 씨 보따르, 그렇게 악의로 해석하진 말아요. 베랑제는 우리 얘기엔 끼어 들지 않았으니까. 방금 들어오지 않았소?
베랑제 (데이지에게) 당신도 봤죠? 우린 봤다니까요.
보따르 흥, 허긴 베랑제라면 코뿔소를 봤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는 베랑제의 등 뒤에서 베랑제가 술 마시는 흉내를 낸다) 상상력이 풍부하니까 말야! 이 친구 같으면야. 모든 게 다 가능할 수 있어요.
베랑제 나 혼자가 아니었단 말입니다. 코뿔소를 본 게… 한 마리였던가 두 마리였던가….
보따르 몇 마리를 봤는지조차 모르시는군.
베랑제 내 친구 장하고 같이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도 있었고.
보따르 (베랑제에게) 횡설수설하시는군.
데이지 뿔이 하나밖에 없는 코뿔소였어요.
보따르 흥! 두 사람이 한 패가 돼서 우릴 놀리는군.
뒤다르 (데이지에게) 내가 듣기로는 뿔이 두 개라든데.
보따르 그럴려면 아예 미리 함께 짜놓을 걸 그랬구려!
빠삐용 씨 (시간을 보며) 이제 그만해 둡시다. 시간만 자꾸 가는군.
보따르 베랑제, 코뿔소는 한 마리를 봤소, 두 마리를 봤소?
베랑제 에― 그게 실은….
보따르 그것도 모르고 있군. 데이지양은 외뿔박이 코뿔소 한 마리를 봤다는데 베랑제 당신이 본 코뿔소는 뿔이 하나였소? 둘이었소?
베랑제 실은 바로 그것이 문제랍니다.
보따르 무슨 소린지 통 모르겠군.
데이지 기가 막혀!
보따르 난 당신들을 화나게 할 생각은 없소. 하지만 당신들 얘기를 난 믿지 않아요. 이 나라에 코뿔소를 봤다는 소리는 아직 한 번도 들은 일이 없으니까!
뒤다르 어쩌다가 그럴 수도 있겠죠.
보따르 아니 절대로 없어요. 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그림 외에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코뿔소는 할머니들의 미신속에서나 꽃이 피는 거요.
베랑제 코뿔소에 '꽃이 핀다'는 표현은 적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뒤다르 맞아요.
보따르 (계속하며) 여러분들의 코뿔소 얘기는 신화니까!
데이지 신화요?
빠삐용 씨 자, 이젠 일할 시간이오!
보따르 (데이지에게) 신화라니까! 비행접시 같은 이야기지!
뒤다르 하지만 실제로 고양이 한 마리가 밟혀 죽었잖아요? 그건 부인할 수 없죠.
베랑제 그건 내가 증언할 수 있어요.
뒤다르 (베랑제를 가리키며) 이런 증인들이 또 있다는데요!
보따르 이런 증인을 신용하다니!
빠삐용 씨 자, 여러분! 어서!
보따르 (뒤다르에게) 군중심리라는 거요. 뒤다르, 군중심리. 그건 마치 대중의 아편인 종교 같은 거란 말이오!
데이지 난 비행접시를 믿어요.
보따르 흥!
빠삐용 씨 (단호하게) 그만들 두지 못할까! 잡담들은 이제 그만하라구! 코뿔소가 있거나 말거나 비행접시를 믿건 안 믿건 일은 해야지! 실제 동물이냐 가공의 동물이냐를 놓고 떠들면서 시간을 보내라고 회사가 월급을 주는 줄 아나?
보따르 가공이에요?
뒤다르 실제라구요.
데이지 실제로 있고말구요.
빠삐용 씨 여러분 다시 한 번 주의를 주겠는데 지금은 근무 시간이오. 결말도 안 날 그 논쟁은 이젠 그만 두시오….
보따르 (기분이 상해서 빈정대듯) 동감입니다. 부장님, 당신은 부장이시니까 부장님 명령이라면 우리야 복종해야죠.
빠삐용 씨 자, 빨리들 해요. 난 당신네들 월급에서 벌금을 제하게 하고 싶진 않으니까! 뒤다르, 금주법에 관해서 자네가 쓴 해설은 어디까지 진행됐나?
뒤다르 지금 정리중입니다, 부장님.
빠삐용 씨 빨리 끝내요. 급하니까. 베랑제. 그리고 보따르. '특산주 등록'이라는 포도주 통제법의 교정은 끝났나요?
베랑제 아직 안 끝났습니다, 부장님. 어지간히는 했습니다만...
빠삐용 씨 같이 교정을 봐서 끝내시오. 인쇄소에서 기다리고 있소. 데이지양은 내 방으로 편지에 사인 받으러 오고. 타자를 빨리 쳐서.
데이지 알겠습니다, 부장님.
데이지는 그녀이 작은 테이블로 가서 타이핑한다. 뒤다르도 자기 테이블에 앉아 일을 시작한다. 베랑제와 보따르는 그들의 작은 테이블에 가서 앉는다. 객석에서는 두 사람 다 옆모습. 보따르는 계단 쪽 문에 등을 향하고 있다. 보따르는 기분이 언짢은 표정. 베랑제는 소극적이며 피로한 표정. 그는 케이블 위에 교정지를 놓고 보따르에게 원고를 넘겨 준다. 보따르는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는다. 그 사이 빠삐용 씨는 문을 쾅 닫고 나간다.
빠삐용 씨 그럼 이따 봅시다, 여러분! (나간다)
베랑제 (읽으면서 교정한다. 보따르는 연필을 들고 원고를 읽어 내려간다) '특산주'의 통제라… (교정한다) '득'이 아니라 '특'이고… (교정한다) 등록도 '녹'이 아니라 '록'이지… 상부구릉지대의 하부지역 보르도 지방의 특산주등록은….
보따르 (뒤다르에게) 나한텐 없는데, 한 줄 띄었군.
베랑제 다시 한번 읽어야지. 특산주 등록은….
뒤다르 (베랑제와 보따르에게) 좀 조용히들 읽으시오. 그 소리 때문에 내 일에 집중이 안 돼요.
보따르 (뒤다르에게 베랑제의 고개 너머로 조금 전의 토론을 다시 시작한다. 그 사이에 베랑제는 잠시 동안 혼자서 교정을 본다. 그는 소리없이 입술만 움직인다) 그건 속임수라구!
뒤다르 속임수라니, 뭐가요?
보따르 당신네들의 그 코뿔소 얘기 말이오. 그런 소문을 퍼뜨리는게 당신네들의 선전이니까!
뒤다르 (일손을 멈추고) 선전이라니요?
베랑제 (참견한다) 그건 선전이 아니에요….
데이지 (타이핑을 중단하고) 내 눈으로 본 걸요! 나도 보고 또 모두들 봤다고 몇 번씩 말하지 않아요?
뒤다르 (보따르에게) 웃기시는군… 선전이라니? 무슨 목적으로요?
보따르 (뒤다르에게) 그만둬요! 그거야 나보다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잖아? 시치미떼지 말라구!
뒤다르 (화를 내며) 난 그런 이상한 조직에서 월급 받는 사람은 아니에요!
보따르 (화가 나서 얼굴이 시뻘개지며, 주먹으로 테이블을 친다) 이건 모욕이야 용서할 수 없어! (보따르 일어선다)
베랑제 (사정하듯) 보따르, 그만….
데이지 뒤다르, 그만둬요….
보따르 모욕이라니까….
별안간 부장실 문이 열린다. 보따르와 뒤다르는 얼른 다시 앉는다. 부장은 출근부를 들고 있다. 그가 나타나자 갑자기 조용해진다.
빠삐용 씨 뵈프 씨는 오늘 안 나왔나?
베랑제 (주위를 둘러보며) 그러고 보니 안 나왔군요.
빠삐용 씨 바로 그 사람이 있어야겠는데 말야. (데이지에게) 아프다든가 출근을 못하겠다는 무슨 연락이라도 없었나?
데이지 아무 말도 없었는데요.
빠삐용 씨 (문을 활짝 열고 들어선다) 계속 이 지경이면 파면이야. 벌써 여러 차례 나를 골탕먹였거든. 여태까지는 눈감아 줬지만, 이젠 안 되겠어…. 누구, 그 친구 책상 열쇠 가지고 있는 사람 없소?
바로 그때 뵈프 부인이 들어온다. 마지막 대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녀가 층계를 황급히 뛰어오르는 것이 보인다. 그녀는 불쑥 문을 연다. 숨을 헐떡이며 몹시 당황한 표정.
베랑제 뵈프 부인이 오셨군요.
데이지 안녕하세요? 뵈프 부인.
뵈프 부인 안녕하셨어요, 부장님. 안녕들 하셨어요, 여러분!
빠삐용 씨 그런데 바깥양반은요? 어떻게 된 거예요? 이젠 안 나오겠답니까?
뵈프 부인 (숨이 차서) 죄송합니다… 저의 그이 때문에 말예요… 주말여행을 갔다가 감기가 살짝 들었지 뭡니까!
빠삐용 씨 감기가 살짝 들었어요?
뵈프 부인 (부장에게 편지를 내밀며) 네, 이렇게 전보로 왔군요. 수요일에나 돌아온다고요… (사뭇 기절이라도 할 듯이) 물 한 컵만 주세요… 의자하구요….
베랑제가 무대 한가운데로 자신의 깨끗한 의자를 갖다 준다. 그녀는 그 위에 털썩 주저앉는다.
빠삐용 씨 (데이지에게) 물 한 컵 갖다드려요.
데이지 네, 곧 가져올게요!
그녀는 물 한 컵을 갖다가 다음의 몇 마디 대사가 진행되는 사이에 뵈프 부인에게 물을 마시게해준다.
뒤다르 (부장에게) 저, 부인, 심장이 약한가 보죠.
빠삐용 씨 뵈프 씨의 무단 결근은 곤란한데요. 하지만 그렇다고 부인께서 그렇게 떨 건 없습니다.
뵈프 부인 (간신히) 그건… 그건… 코뿔소가 저를 막 쫓아와서 그런거예요. 집에서부터 여기까지….
베랑제 뿔이 하나던가요? 둘이던가요?
보따르 (웃음을 터뜨리며) 웃기지 좀 마쇼!
뒤다르 (분개해서) 부인 얘길 들어봐요.
뵈프 부인 (분명하게 말하려고 애를 쓰며, 손가락으로 층계 쪽을 가리킨다) 저기 있어요. 아래층 입구에! 층계를 올라올 기세던데요.
그순간 소음이 들려온다. 굉장한 무게로 계단이 무너지는 것이 보인다. 아래층에서 코뿔소의 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계단이 무너질 때 일어나던 먼지가 일단 가라앉으면서 허공에 매달린 층계참이 보인다.
데이지 맙소사!
뵈프 부인 (의자에 앉아서 가슴에 손을 얹고) 아!….
베랑제가 부인에게로 달려가, 부인의 뺨을 툭툭치고 물을 먹인다.
베랑제 진정하세요!
그 사이에 빠삐용 씨, 뒤다르, 보따르는 왼쪽으로 달려가 급히 문을 여느라고 먼지에 묻힌 층계참에서 서로 부딪친다. 코뿔소의 울음소리가 계속 들린다.
데이지 (뵈프 부인에게) 좀 괜찮으세요?
빠삐용 씨 (층계참에서) 저기 있다. 저 아래! 한 마리야!
보따르 내 눈엔 안 보이는데요. 착각이라니까요.
뒤다르 있어요. 저 아래 빙빙 돌고 있는데요.
빠삐용 씨 여러분, 틀림없어요. 빙빙 돌고 있어요.
뒤다르 올라오진 못할 거예요. 계단이 없어졌으니까.
보따르 정말 이상하군.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람.
뒤다르 (베랑제 쪽을 돌아보며) 이리 와봐. 와서 보라구. 자네가 말하던 코뿔소야.
베랑제 갈게.
베랑제, 층계참 쪽으로 달려간다. 데이지도 뵈프 부인을 놓아두고 뒤따른다.
빠삐용 씨 (베랑제에게) 자, 코뿔소의 전문가가 와서 좀 보라구.
베랑제 전 코뿔소의 전문가는 아닌데요...
데이지 어머, 저것 좀 보세요… 빙빙 돌고 있군요. 괴로워하는 것 같은데 왜 그럴까요?
뒤다르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군. (보따르에게) 어때요, 이젠 보이시겠죠?
보따르 (퉁명스럽게) 과연 보이는군.
빠삐용 씨 그럼, 우리 모두가 착각을 일으킨 거요? 당신도….
보따르 난 절대로 착각 같은 건 안 합니다. 저 이면에 뭔가 있겠죠.
뒤다르 있다니 뭐가요?
빠삐용 씨 (베랑제에게) 저건 분명히 코뿔소지? 안 그래? 자네가 봤다는 게 저거지? (데이지에게) 데이지양도 그런가?
데이지 네, 물론이죠.
베랑제 뿔이 두 개군요. 저건 아프리카종, 아니 저건 오히려 아시아종인지도 몰라요. 모르겠는데요. 아프리카종 코뿔소는 뿔이 두 개인지 하나인지.
빠삐용 씨 저 놈이 층계를 무너뜨려서 오히려 다행이군. 어차피 무너지게 돼 있었으니가! 다 썩어빠진 저 낡은 계단을 시멘트 층계로 갈아 달라고 내가 사장한테 말을 했는데….
뒤다르 일주일 전에도 제가 그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부장님.
빠삐용 씨 어차피 무너지게 돼 있었다구. 그걸 미리 알았던 거지. 내 말이 틀림없었어.
데이지 (빠삐용 씨에게, 비꼬듯) 부장님 말씀이야 늘 틀림없죠.
베랑제 (뒤다르와 빠삐용 씨에게) 뿔이 두 개 있는 건 아시아종 코뿔소의 특징인가요 아니면 아프리카종의 특징인가요. 그리고 뿔이 하나 있는 게 아프리카봉의 특징인가요. 아시아종의….
데이지 가엾어라. 저렇게 끝없이 울며 돌고 있으니. 왜 그러는 걸까? 어머나 우리를 쳐다보네. (코뿔소를 향해 쓰다듬어 주기라도 할 듯) 어디 좀 보자. 여기야, 여기….
뒤다르 귀여워해도 안 될걸. 길이 안 들어 있을 거요.
빠삐용 씨 어쨌든 이젠 위험할 건 없어.
코뿔소가 무섭게 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