竹香 류 재 일
우리 동기회는 50년을 한결같이 지혜롭게 지내온 마음의 고향입니다.
60년대 초 힘들었던 대학시절을 대다수가 아르바이트 면학으로 졸업하고, 교직 초년에 초라한 동기회 모임으로 시작하였으나 졸업 20주년을 기점으로 기금이 확보되고 참가회원이 정착되어 안정적으로 운영되어 왔습니다. 졸업 30주년에는 2800여만 원의 기금이 조성되어 회비 부담없이 100여 명이 참가하는 정기모임, 연 1회의 동기여행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8개의 반우회, 5개의 지역회, 또 여러 개의 동호회들이 본격적으로 운영되어 오늘의 졸업 50주년을 맞는 행복하고 자랑스런 동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동기회가 이루어진 저변에는 첫째, 마음이 통하는 열성적인 동기님들의 풀뿌리 동기애가 바탕이 되었고 둘째, 교직을 벗어나 타 직종에 종사하는 한빛회와 서울 동기회의 재정적 지원이 윤활유가 되었다고 봅니다. 이제 행복한 동기회의 역사를 되새겨 보면서 졸업 50주년의 영광을 다함께 맞이하고자 합니다.
-고난의 학창시절
1962년 학제개편에 따라 대입 학과별 국가고시를 부산여고에서 치르고 1,900여 명의 전국 교육대학 합격자 중 320명이 부산교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부분이 일류대학을 갈 수 있는 실력이나 가정 형편으로 2년제 직업대학을 택한 것이다. 박승룡 동기는 전국 교대 톱으로 자랑스럽게 부산교대를 택하였다. 1962년 3월 부산대학교 병설 교육대학으로 개교되었다가 1963년 3월 부산교육대학으로 개편되었다.
1학년은 모두 8반으로 나누어져 1반~5반은 남자반(200명), 6반~8반은 여자반(120명)이었고 박의광, 신기석, 송수방, 정기호, 전정부, 황영숙, 함기미, 김상임이 각반 실장을 2년간 맡았으며, 1학년 땐 이상헌이 학생회 부회장을 2학년 땐 남찬현이 학생회장을 맡았었다. 우리 1학년만 한·일 협정반대 교내 데모를 하였고 현 신기석 회장은 주모자로 곤경에 처했으나 김하득 학장님의 배려로 구제되었다.
존경하는 김하득 학장님의 ‘‘교사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는 훈시는 우리들의 가슴속에 평생교육철학이 되었고 ‘사랑과 슬기를 길러 겨레와 인류에 이바지하는 바르고 큰길에 살자’는 교훈은 교육자의 길에 나침반이 되었다. 바이엘, 무용, 교육학, 교과지도법 등의 강의가 아나로그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속에 교감과 열정과 교육애가 넘쳐흘렀으나 어찌보면 남학생들에겐 참 재미없는 대학 교육과정이었다.
대부분의 동기들은 아침, 저녁 가정교사로 학비와 생계를 유지하여 갔다. 매일 지각하는 신기석 회장은 학장실에 불려가 이유를 묻자 ‘홀어머니와 6남매의 맏이로서 아침에 2시간 집단과외를 하고 온다.’고 하며 수입이 oo원이라고 하자 학장님이 ‘내 봉급보다 많다. 계속해라’고 하셨단다. 음악관 뒷마을의 남문구 일대는 서부경남(마산, 진주, 통영,울산) 유학생들의 하숙 마을로 유명했고 이들은 아침운동은 교대운동장에서, 세수는 부설초등학교 세면대에서 해결하였다. 2002년 내가 교대부설초 교장으로 부임하여 세면대를 리모델링하고 외부에 항상 개방토록하면서 옛 생각에 잠긴 적도 있었다.
여학생들은 미모에다 공주병도 약간 있어 주로 4년제 대학생들과 상대해서 남학생들의 속을 많이 썩혔으며, 그때 남학생들은 2세는 당당한 4년제 명문대를 보내 우리 같은 초라함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을지도 모른다. 1964년 2월, 292명이 졸업하여 부산 103명, 서울 10명, 경남175명, 기타지역 4명이 발령되었고 첫 봉급은 4,800원 정도를 받았다.
-동기회의 초창기
졸업 후 10여년간은 지나다가 만나면 반가워 하는 정도로 지내다가 1975년부터 우리 2기도 총동창회에 참가해야겠다는 생각에서 통지서를 100여 통 내어도 참가는 10~20명 정도(남자)가 고작이었고 잔디밭에 앉아 안주 없는 소주에 얼굴만 붉히고 헤어지곤 하던 초라한 모습도 있었다. 이때 교대 1,2,3기 배구대회가 정기전으로 열려 선배 기수들 간의 단합의 정을 나누기도 하였다. 한번은 동기모임에 강원도 속초에서 내려온 이상헌 사장이 두둑한 봉투를 총무에게 주고 사라져 교대 앞 곱창집에서 마음과 배를 실컷 불린 일이 지금도 너무 고맙다.
1981년 이직한 김재복 동기가 회장을 맡고서 맥주잔이 오가며 동기회가 본 궤도에 올랐으며, 1984년 이윤준 회장이 국제호텔에서 가진 졸업 20주년 홈커밍데이를 기점으로 기금 350만 원이 조성되었다. 이때 본인이 총무를 맡아 신기석 회장의 서울 경기초등학교를 방문해 서울 동기 8명과 4인조 배구를 하고 최윤도 회원 아파트로 가서 밤샘 고스톱을 하던 일, 마산지역 분회에 강신민 친구와 같이 찾아가 동참을 권유하던 일, 은사님 12분을 행사장에 모시고 온 일 등으로 동분서주하였다. 이때부터 전국모임이 순조롭게 연중행사로 되었고, 동창회 체육대회에는 우승과 다수참가상을 독점하는 명실공히 교대선배기수의 면모를 갖추게 되어 행복한 동기회가 시작되었다.
-동기회 지원모임
우리 동기회에는 자칭 이단자라는 교직을 떠난 회원이 다수 있다. 그들은 다른 환경에서 사업에 몰두하면서도 동기회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한빛회’와 멀리 서울에서 1년에 두 번씩 부산을 오가며 동기회에 우정의 불꽃을 붙여준 ‘서울동기회’이다.
한빛회를 조직한 김재복 사장은 1981년 회장을 맡은 후 마산, 울산, 양산으로 오가며 소주와 삼겹살로 단합을 이끌어 부부모임까지 하면서 동기회 기반을 닦았고, 이윤준 회장은 20주년 홈커밍데이를 한빛회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후 12년간 이윤준, 윤가일, 이상헌, 윤종식, 박태우 님이 차례로 동기회를 맡아 우리 동기회를 키운 모체가 되었다. 그러면서 ‘동기회가 정상궤도에 오르면 회장직을 교직에 있는 사람에게 넘기자.’는 약속에 따라 1993년 5월 류재일(본인)에게 정권(?)을 이양하여 30주년 기념행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울 동기회는 20주년 행사 이후로 매년 2회씩 부산을 찾으며 열정과 재정적 지원을 푸짐하게 해왔으며 그 중심에는 항상 남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신기석, 박연남이 있었고 최정자, 윤연희, 황영숙, 제정혜, 윤미순 등이 맞장구를 쳤다. 그 후 백무석이 합류하였고 최근에는 김승삼, 이학원, 김정태의 열성도 대단하다. 그 외 의사 부인이 된 최홍순, 김말희, 신방자, 강미대, 한하자 회원의 동기회 지원 열정도 대단하였다.
-졸업기념 행사
졸업 20주년 홈커밍데이가 이윤준 회장이 맡아 국제호텔에서, 졸업 25주년 행사는 이상헌 회장이 맡아 동래관광호텔에서, 졸업 30주년 행사는 류재일 회장이 맡아 글로리호텔에서, 졸업 40주년 행사는 윤가일 회장이 맡아 그랜드호텔에서 가져 4,600만 원의 기금도 확보되었다. 이런 행사 때마다 회장 못지않게 뒷바라지에 힘쓴 두 여동기생 이상순, 심미순을 잊을 수 없다. 정년퇴임이 시작되든 2004년 말 우리 동기들의 쉼터를 신기석 회장의 거금으로 서면에 마련해 5년간을 잘 사용하였다.
-분회 및 동호회 활동
우리 동기회는 매년 5월에 전국정기총회를 가지며 가을에는 국내, 국외 동기여행을 실시하고, 11월 총동창회 체육대회에는 항상 다수 참가상을 받아왔다. 이런 행사에는 상당액의 경비가 기금으로 지원되고 있어 참여율이 상당히 높다.
지역분회로는 서울, 부산, 마산, 진주,울산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8개의 반우회가 활성화되어 수시로 모임을 갖는다. 취미. 우정 중심의 동호회로는 98회(부산지역42명), 98산우회(13명), 교2기우회(8명), 사진동호회(5명), 골프회(8명), 파크골프회(4명), 테니스회(7명), 5·10클럽(여행7명), 불도회(3명), 푸른모임(남자동기12명), 송이들(6반 8명)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개인적으로 강의, 봉사, 침술, 예체능 활동에 많은 회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런 풀뿌리 모임들이 행복동기회의 버팀목 역할도 하고 있다.
-부산 교육·문화의 선도역할
우리 동기회원은 대다수가 교육현장에서 사명감을 갖고 봉직하였으며 남학생 일부는 이직하여 사업이나 타 직종에 성공하였고 여학생 상당수는 결혼 후 전업하였다. 교육계에서 정년하기까지의 활동경력을 살펴보면 교장 78명, 대학교수 6명이나 되며, 부산예총회장을 역임한 최상윤 회원, 총동창회장을 지낸 윤가일 회원, 부교육감을 지낸 고)정용진 회원, 부산교육위원회 의장을 지낸 이명우 회원, 교육장을 지낸 신무용, 장두기(경남) 회원, 모교 교수로 지낸 이해웅, 이근재, 이명우 회원, 교대부설교장을 지낸 류재일 회원. 국제고등학교장을 지낸 정현경 회원, 길동인회를 이끈 권용호, 백청 화백, 시인 이해웅, 동시인 김구용, YWCA회 회장을 지낸 최홍순 회원들은 교육·문화의 선봉에서 소임을 다하여 명실공히 부산의 교육·문화의 발전을 위해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런 교육활동의 이론적 뒷받침을 해준 교육개발원, 교육부에서 일한 최윤도 회원도 빠질 수 없다.
-행복 동기회
우리 동기는 60년대 초 빈곤의 환경 속에서 부산교대에서 만나 대한민국의 산업화, 민주화, 선진화 과정을 겪으면서 교육현장에서 산업역을 길러내는 일에 전념하여 조국과 겨레를 위하는 일에 일익을 담당했다고 본다. 그 힘은 동기회의 모임을 통해 우정을 다지고 화합의 정신을 쌓으며 정보를 교환하여, 삶의 질을 다듬고 교육에 대한 사명감을 높이는 좋은 만남에 있었다.
동기회 초기의 어려울 때 교직을 떠난 한빛회의 지원으로 기반이 다져졌고, 20주년 행사 이후로 구름같이 모여드는 전국회원님들의 참여열기로 기금조성이나 참가인원 면에서 막강한 동기회로 매김되었다.
교육현장에서도 많은 회원들이 성공적으로 활동하여 부산교육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퇴임 후에도 후배들의 귀감이 되는 자기 역할에 모두들 충실하고 있다. 동기회 정기총회, 추억여행, 체육대회에는 항상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지역분회, 반우회 활동은 더욱 내실있게 이루어지며, 취미서클이 10여 개나 되어 개인적인 삶의 질 향상에 노력하고 있다.
우리 부산교대 2회는 교직도 성공적으로 마치고 기금도 안정되어 있으며 참석회원도 다수이고 각종 취미서클도 다양하게 즐기는 참 행복한 동기회입니다. 이제 졸업 50주년을 맞아 우리들을 키워준 모교를 아끼고 후배들을 더욱 사랑하여 선배기수로서의 모델이 되어 영원한 불사조의 행복동기회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