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 놀았다'는 산골 마을
초봄엔 매화·초여름엔 매실향 가득
양산시 원동면 영포리 어영마을은 오지마을로 제법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요즘 오지마을 대부분이 그렇듯 옛 모습을 상상할 정도의 오지는 아니다. 세월의 흐름으로 문명의 혜택을 받아 포장된 도로가 나 있고, 적당하게 개량된 주택이 주변 환경과 잘 어우러진 산골마을이다. 마을 주변 산을 찾는 등산객들도 더러 지나가지만, 아직은 한적하고 조용하다. 그래서 마을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고, 정이 가는 고향 같은 마을이다.
글·사진 이형분 명예기자(양산시문화관광해설사)
매화축제 유명한 원동면 북쪽에 자리잡아
어영마을은 원동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그리 멀지않은 9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낙동강의 지천인 원동천과 접한 원동로를 따라 배내골 방향으로 가다보면 도로 왼쪽에 세워진 '어영마을' 표지석을 만난다.
표지석을 뒤로 하고 어영교를 지나 왼쪽에 산자락을 낀 작은 도로를 따라가면 길은 좁은 계곡으로 들어선다. 계곡 주변에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펜션건물들이 없다면 '이런 곳에 사람이 살고 있을까'라는 생각마저 들 만큼 계곡이 깊다.
이 골짜기를 '도득골'이라고 한다. 옛날 어영마을 동쪽 매봉 아래에 적지 않은 선비들이 들어와 터를 잡고 살았는데, 어영마을 아이들에게 글과 예절을 가르쳤다는 데서 유래한다. 마을 사람들이 도(道)를 얻었다고 하여 '도득골'이라 불렀다.
이런 옛 이야기가 전해올 만큼 어영마을은 산속 깊숙이 숨어있다. 산과 산이 빚어낸 골짜기 경관을 감상하며 계곡을 오르면 하늘부터 시야가 넓어진다.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쳐진 어영마을이다.
400m 넘는 능선과 봉우리에 둘러싸인 분지
마을은 해발 200m 이상 분지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입구 좁은 골짜기 외엔 사방이 해발 400m에서 700m를 훌쩍 넘는 능선과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어 흡사 호리병 안에 들어앉은 형상이다.
마을입구 길 양쪽에는 마을의 수문장이자 수호신으로 여기는 바위 두 개가 서있다. 오른쪽은 '두꺼비바위', 왼쪽은 '붓돌바위(부뜰바위)'라고 불린다. 이 바위들은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만, 안내판에는 선사시대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붓돌바위의 부스러기를 떼어내 망치로 치면 불이 일어나는데 불이 귀한 옛날 마을사람들이 편리하게 사용했다고 한다.
붓돌바위에 소원을 빌면 들어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그래서 정월대보름날 마을사람들이 이 바위 아래에서 공을 들이고, 외지에서 찾는 사람들도 정성을 들인다. 일제 강점기 때 도로확장을 위해 붓돌바위를 깨뜨리려고 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겨우 보존했다고 한다. 1970년대에는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도로를 확장하면서 훼손되는 시련을 겪었다.
마을사람들은 두꺼비바위와 붓돌바위 덕분에 마을에 재물이 모여들고, 인물이 많이 난다고 믿는다. 마을에는 정감을 주는 옛 지명으로 금샘이 있었다는 금새미방우를 비롯해 절골, 진등 등이 있다.
예전엔 대·닥나무 많아 죽제품·한지로 유명
'물고기가 헤엄치며 노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어영(魚泳)'이라는 마을 이름은 이곳에 들어 온 물고기가 부족한 것 없이 살다보니 나가지 않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만큼 평안하고 풍족한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난을 피해 온 김녕 김씨와 김해 김씨가 이곳에 정착한 것이 마을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옛날 어영마을은 삼천냥마을로 불리며 인근에서 부자마을로 통했다. 대나무와 배나무, 닥나무가 많아 대천냥, 배천냥, 닥천냥이라는 데서 유래한다. 마을에서 생산된 죽제품과 한지는 인근 양산과 밀양 등지로 팔려나가면서 마을 주민들을 부자로 만들었다. 집집마다 한 두 그루씩 있던 청실배나무도 마을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청실배는 옛날 임금님에게 진상된 귀한 과일이다. 어영마을에서 수확한 청실배는 인근 원동장과 물금장, 구포장으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아직도 마을 앞산이나 뒤편에서 더러 볼 수 있는 대나무밭과 마을주변 밭둑이나 계곡 근처에 몇 그루씩 남아있는 닥나무와 청실배나무가 삼천냥의 흔적이다. 스무 살 때 인근 물금 증산마을에서 시집왔다는 김순자(76) 할머니는 "마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대나무가 많았고, 온 밭에 닥나무를 심어 종이를 만들었다"며 "껍질을 벗겨 잿물에 삶고, 종이를 만들기까지 엄청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산행 중 산오디·산딸기 맛보는 재미 쏠쏠
마을회관 앞 공터와 큰 물푸레나무는 매실 수확 철이면 마을사람들이 따온 매실을 선별하고, 여름이면 더위를 식히며 담소를 나누는 곳이다. 밀양과 경계를 이루는 금오산(760.5m)을 비롯해 주변 산을 찾는 등산객들이 짐을 챙기고, 목을 축이며 쉬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회관 왼쪽으로 난 마을길이 산행의 초입이다. 마을주변에는 산뽕나무와 산딸기나무가 곳곳에 서식한다. 6월이면 산행 중 잘 익은 산오디와 산딸기를 맛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예전엔 닥나무로 가득했다는 마을 왼쪽 밭은 매실밭으로, 마을을 둘러싸고 있던 대나무밭은 밤나무밭으로 변했다. '닥천냥', '대천냥'이 '매천냥', '밤천냥'으로 바뀐 셈이다.
매년 3월 말이면 매화축제가 열릴 정도로 원동은 매실로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어영마을의 매실은 크기가 작지만 과즙이 풍부하고 향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5월 중순부터 6월 초순까지 어영마을은 매실 수확과 선별로 일손이 바빠진다.
산나물로 만든 묵나물·장아찌는 웰빙음식
마을주변에는 산나물도 많아 마을사람들은 봄에 채취한 각종 산나물로 묵나물을 만들거나 장아찌를 담가 이듬해 봄까지 밥상에 올린다. 두릅과 엉개나물(개두릅·음나무 새순), 비비추, 매실 등으로 담근 장아찌는 주민들의 부수입원이자 도회지 자녀들에게 웰빙음식으로 공급된다.
봄에 뜯어 만든 묵나물과 장아찌를 아들과 딸들에게 나눠준다는 이순자(76) 할머니는 열아홉 살 때 원동에서 걸어서 신행길을 오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산에서는 숯을 구워 팔고, 마을 앞에 모여 닥종이 만드는 일을 많이 했다"며 옛 추억을 더듬었다. "그때는 감나무도 많아 늦가을이면 감을 머리에 이고 원동이나 멀리 부산 구포까지 팔러 나갔는데, 돌아오는 길이 늦은 날 마을 입구 산모퉁이를 돌아올 때면 무서워서 오금이 저렸다"고 했다.
이맘때 어영마을을 찾으면 여기저기 돌담이나 언덕 밑에 피어있는 금낭화를 많이 본다. 4~6월에 붉은 색 선명하게 피는 꽃이 금주머니를 닮아 이름 지어진 금낭화는 금오산 7~8부 능선에도 많이 자생하며 등산객들의 눈길을 끈다.
영포리와 내포·함포·쌍포
산·계곡에 왠 포구 이름?
원동면 지명
원동면은 높은 산과 깊은 계곡 지형인데도 어영마을이 속한 영포리를 비롯해 내포리, 함포, 쌍포 등 포(浦)가 붙은 지명이 많다. 이와 관련 아주 옛날 원동천에 물이 많아 실제로 포구였다는 설이 전해온다. 심지어 배내골로 넘어가는 배태고개까지 배가 드나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원동천을 따라 내려가면 그리 멀지 않아 낙동강 하구에 다다른다. 낙동강하구언이 생기기 전에는 바닷물이 강으로 유입돼 제법 거슬러 올라왔으니 원동천에 배가 다녔다는 게 과장만은 아닐 수도 있다.
영포리에 있는 신흥사의 벽화 관음삼존도(보물1757호)의 물고기를 들고 있는 어람관음상(魚籃觀音像)도 이곳의 물길이 반영됐다는 해석이 있다. 신흥사 창건 설화 중에 인도에서 석가모니의 제자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절을 지을 수 있는 목재와 불교용품을 바다에 띄웠는데 그것이 표류하다가 닿으면 인연이 있는 곳이라 하여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 사찰이 신흥사라는 것이다.
이런 설화와 구전 또한 주변이 포구였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이야기다.
신흥사는 닥나무로 종이 만드는 부역을 심하게 시키다 한때 폐사(廢寺)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