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은 같은 민족 끼리 피터지게 싸울 수밖에 없는 통과제의였다.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길이란 없는 듯 보였다. 백제는 신라를,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를, 신라는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공략하기에 겨를이 없었다.
영혼의 벗이었던 거진랑은 불귀의 나그네가 되고 말았다. 바로 엊그제까지만 해도 같이 무술 시합도 하며 떠들고 웃고 하던 친구들이 모두가 하릴없는 시체로 돌아왔다.
신라가 전쟁에는 이겼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게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죽어 돌아온 아들과 남편이며 형제를 맞이하는 어머니의 눈물, 새댁의 한숨, 그들의 피어린 눈물과 한숨 이런 모든 것들이 너무도 한심한 것들이었다. 또 포로로 잡혀간 이들의 가족들은 또 어떠하고.... .
서당의 번뇌는 점점 깊어만 갔다. 칼과 활을 들었던 자신이 싫어지기 시작하였고 불타오르던 애국심은 아예 바람에 밀리는 구름이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같은 민족 끼리 싸우다 당 나라 외세를 끌어들이는 것은 더더욱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그는 그 길로 군대를 나와 불지촌을 찾았다. 그의 할아버지인 잉피공은 매우 놀라며 서당의 이야기만 듣고 한숨만 내 쉬었을 뿐. 이윽고 할아버지는 말을 하였다.
“내가 눈을 감기 전에 네가 나라를 위하여 큰 공을 세우는 것을 보고 싶었는데… 너의 아비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송구합니다. 꼭 화랑이라야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마음의 평화를 찾고 중국에 매이지 않고 사는 길이 무엇인가 생각하며 살고 싶습니다.”
나이 탓인가 힘이 없어 보이는 할아버지는 서당을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었다. 임종이 가까웠다. 죽음을 맞이한 할아버지가 공부하는 서당을 불렀다.
“얘야. 나의 죽음을 너무 서러워 마라. 태어난 이는 모두가 죽는다. 어떻게 사는 길이 참된 길인가를 잊지 마라. 자신과 이웃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말야.... .”
서당에게 할아버지는 아버지였다. 너무 슬펐다. 할아버지의 장례를 모시고 난 서당은 모든 게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그리운 것들은 다 사라져 가버리다니... .
서당은 할아버지 무덤 앞에서 목을 놓아 소리쳐 울었다. 산에서 내려오다 자신이 태어난 밤나무를 지나면서 어머니를 떠올렸다. 쉬어 갈 겸 밤나무 그늘에서 떠가는 흰 구름을 보며 매미소리에 넋을 놓고 앉았다. 누군가 옆으로 와서 말을 건넨다.
“뭘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나?”
허름한 옷에 갓을 쓰고 바랑을 맨 늙수그레한 스님이었다. 서당은 물었다.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 게 인생인가에 대하여 묻고 싶습니다.”
“낸들 어이 그걸 알겠소. 그냥 사는 게지.”
“어서 일어나시게, 마음을 고쳐먹어 보시게.”
하며 껄껄 웃었다. 그리고 스님과 서당은 나무 아래 조용히 앉았다. 스님은 지팡이를 내려놓고 바랑 속에서 불경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스님의 낭창한 독경 소리가 조용한 숲 속에 가야금 소리처럼 새소리와 함께 어울렸다.
‘이 건 영혼의 소리....’
태어나 이런 소리는 처음이다. 무슨 경인가는 알 수 없으나 마음이 편해지고 모든 시름을 다 잊을 수 있었다.
“스님. 저의 집으로 가시어 좀 더 좋은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만.. ”
“그럽시다. 떠도는 몸이니 어딘들 못 가겠소이까?”
“어디 가면 그런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까?”
“잘 한 번 생각해보시게나. 모든 걸 내려놓고 집착을 보려보시게. 하면 새로운 세상이 그대의 영혼 속으로 샘솟아 나올 테니까.”
“알겠습니다.... .”
서당은 그를 집으로 모셔 참다운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생각하였다. 다음 날 스님은 훌훌히 떠났다.
“맘먹기에 달린 것은 아닐까? 그래 그런 거야.”
서당이 형에게 서라벌 갔다 오겠다 하면서 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집을 떠났다. 모량리 동네를 뒤로 하고 서천 갈대밭을 지나 황룡사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황남동 천마총을 지나 이윽고 황룡사 앞에 다다랐다. 황룡이 서린 듯 위엄이 있어 보이고 저곳에 들어 가 공부하며 행자의 길을 걸었으면 하는 생각이 바람 부는 언덕의 불길처럼 솟아올랐다.
때는 진덕여왕 2년(648) 비담의 반란을 진정시키고 한참 민심을 추스르려던 참이었다. 권력무상, 날아가는 새라도 떨어트릴 듯 잘나가던 상대등 비담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임금이 새로 등극하면서 예를 좇아 새로이 백 명의 승려가 될 길을 열어 주었다. 당시 승려라 함은 법흥왕이 왕좌를 물려주고 스스로 법공이라는 법명을 갖고 수도생활을 하던 관행으로 정식 승려가 되는 길은 아무나 쉽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고승 가운데는 화랑 출신이 많았다. 향가를 지은 지은이 가운데 충담사 같은 승려들이 화랑 출신임은 이를 말해 주고 있으니까.
절의 일주문을 들어서 긴 회랑을 지나 동편으로 지어진 요사채로 가려는데 웬 늙수그레한 스님이 지팡이를 짚고 종무소 쪽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도 한데. 갸우뚱 거리며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앗.. 지난 번 밤골에서 만났던 스님이야... ”
“스님. 안녕하셔요? 저 서당이라 합니다. 지난번 압량에서 뵈웠던 일이 있습니다만... 기억이 나세요?”
“그럼 기억이 나고말고. 여긴 어떻게 오셨는가?”
“스님 말씀 듣고 사문으로 들어오겠다는 굳혔습니다.”
“나이 들어 행자 생활이 쉽지만은 아닐 텐데..”
“마음 굳게 먹고 시작해보겠습니다.”
“주지 스님은 누구세요..?”
“나라면 믿겠나?”
“스님께서 자장율사님이시란 말입니까?”
“...... ?”
“그렇지요? 정말 황송하옵니다.”
“그럼 내 밑에서 공부를 해보겠나? 어쩔 텐가?”
“감당이 어렵습니다. 심부름이나 시켜 주시면...”
《삼국유사》를 보면 서당은 선생이 없이 공부한 학불종사(學不從師)라 했다. 이로 보면 원효는 자장 밑에 가서 공부를 하면서 스스로가 자신의 깨달음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게 화근이었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그를 위하여 울타리가 되어 줄 고승대덕이 없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는 어려울 때마다 항상 황룡사에 높이 솟은 9층탑을 보며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였다. 당 나라에서 들어온 불교라 하나 우리는 우리 몸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민족불교를 꿈꾸었다.
자장(慈藏)이 누구인가. 김씨 무림의 아들로서 선덕여왕의 왕사가 되었다가 국사로 추앙받는 당 나라 유학파의 최고 승려가 아닌가. 그는 또 당나라에 있을 적에 눈이 먼 사람을 뜨게 한 도력이 아주 높은 신승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의 제안으로 선덕여왕 시절 9층탑을 세웠다.
서당은 황룡사 옆에 자리하면서 황룡사의 서고가 있는 분황사를 자주 드나들었다. 특히 화엄경과 금강경을 공부하면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스스로 깨닫기를 힘썼다. 스스로 불교식 이름을 원효(元曉), 당시 신라 말로는 시단(始旦)이라 했다. 첫 새벽이란 뜻이다. 참으로 당당하면서도 아주 건방진 이름이기도 하다. 이름값을 하나 보자는 식으로 주위의 승려들은 빈정대기도 하였다.
서당이 황룡사의 행자로 들어온 지 벌써 3년여가 흘렀다. 나이 31세에 정식으로 머리를 깎고 수도승이 되었다. 늦깎이 승려였다. 이 때 머리를 깎아준 고승은 자장이었다. 손쉽게 그를 일러 원효라 하였다. 본디 늦깎이란 말은 중이 되기 위하여 머리를 늦게 깎았다는 말에서 비롯한 것이다.
승복을 걸친 원효는 그 날도 분황사로 공부하러 가는 길이었다. 어디서 본 듯한 처연한 듯 고운 여인과 몇 사람이 분황사에 예불하러 절 우물을 지나 대웅전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한눈에 요석임을 알 수 있었다. 다 지난 인연인데... . 파란 하늘의 흰 구름 같은 연정이 진달래 같이 피어올랐다. 요석이 먼발치에서 눈인사를 한다. 의례적으로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립고 애틋했던 사람.. . 봄 언덕에 아지랑이 같은 추억들이 떠오른다. 원효는 스스로 다짐을 한다.
“나무아미타불.. 아, 이래 가지고 무슨 수도를 한단 말인가.”
모전 탑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지금 와서 뭘 어쩌란 말인가. 허사인 것을.. . 이제부터는 서당으로서의 삶이 아닌 원효로서의 삶을 시작해야 한다. 이 소란한 세상에 평화를 가져 올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 원효는 서고 쪽으로 미련 없는 양 바람에 장삼 자락 날리며 들어가 버린다.
첫댓글 계속되는 거지요? 다음편을 기대하겠습니다.~~
길이란 길로 이어 갈 길은 멀어,
그래도 가야만.
행운을 빕니다. 마무리 잘하세요. 감내 두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