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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의 호텔 HOLIDAY INN EXPRESS SANT CUGAT | 호텔 침실 |
이번에도 역시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국경을 통과한다.
마치 톨게이트 같은 국경을 지나 남프랑스에 입성한다.
오늘 우리는 남프랑스의 아를과 마르세유를 관광한다.
스페인-프랑스 국경 | 차창밖으로 보이는 남프랑스의 풍경 |
프랑스의 고속도로 휴게실에 들렀다.
스페인의 휴게실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사람들의 표정이 확연히 다르다.
스페인 사람들보다 훨씬 여유있고 풍요로와 보이는 인상이다.
마침 휴게실 여자 화장실을 수리중이라 여성들이 어쩔줄몰라했다.
사태를 파악하고 내가 나서서 화장실 정리를 했다.
남자화장실 2칸을 여성용으로 쓰게하고 남자들은 나머지 칸을 사용하도록 했는데,
우리 일행 뿐아니라 프랑스 사람들도 정말 잘 따라주었다.
남프랑스의 휴게실 | 남프랑스의 휴게실 |
남프랑스의 휴게실 | 남프랑스의 휴게실 |
[남프랑스 아를]
남프랑스 아를은 고흐가 사랑한 마을이다.
그가 서성대던 카페, 병원, 골목길에도 고흐의 흔적이 있다.
세상에 적응 못하고 떠난 비운의 화가를 부둥켜안은 쪽은 어쩌면 아를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유작들은 전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지만 이방인들은 고흐를 더듬기 위해 작은 도시를 찾고 있다.
프로방스(남프랑스와 이탈리아 일부)의 길목에 1년간 머물며 고흐는 2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어느 때보다 왕성한 활동이었고 [해바라기] 등 그의 명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고흐가 아를을 찾은 것은 1888년 2월. 겨울이었다.
아를 여행은 고흐의 흔적을 쫒는 데서 시작된다.
현지 안내서는 그의 자취를 따라 노란 동선을 마련해주고 있다.
그가 걸었을 론 강변, 해 질 녘의 카페 거리 등을 걸어서 호젓하게 둘러볼 수 있다.
고흐의 숨결 위에 덧칠해진 것은 로마시대의 유적이다.
아를의 풍경이 낯설고 신비로운 것은 사실 이 유적들 덕분이다.
로마인들은 기원전 100년 즈음에 원형경기장과 고대 극장 등을 세웠으며 그 잔재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경기장 외에도 무덤인 네크로폴리스 등을 남길 정도로 로마인들은 이 도시에 미련을 보였다.
경기장 아레나 등 로마시대의 유적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남프랑스 아를 | 남프랑스 아를 |
드디어 아를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점심식사를 위하여 예약된 식당을 찾아 이동하였다.
주변에 놀고 있던 꼬마가 우리 일행을 보고 '꼬레아'라고 하며 말춤을 추기 시작한다.
우리 일행이 웃음으로 응대하여 주었다.
아를에서 점심식사
아를의 식당 | 프랑스식 현지 점심식사 |
식당주인과 한컷 | 아를의 식당 |
식사를 끝낸 후 식당근처의 아를 시내를 자유롭게 돌아보았다.
바람이 불고 약간의 비가 날리는 흐린 날씨에도 아름다운 마을 이었다.
식당근처의 아를 시내 | 식당근처의 아를 시내 |
로마 유적지 원형경기장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원형 경기장 | 이곳에서의 모습을 고흐가 그렸다 |
아를 시내 관광
로마시대 유적지 | 이것만 따라가면 고흐의 작품을 만난다. |
아를 시내 관광 | 아를 시내 관광 |
아를 시내 관광 | 아를 시내 관광 - 로마 유적지 |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서 관광
[고흐]
고흐는 네덜란드 후기인상파의 대표화가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걸작들을 남겼다.
고흐는 1853년 네델란드 태생으로 아버지는 캘빈교의 목사였다.
어머니는 왕립미술관 관계의 일을 했고 숙부의 화랑에서 작품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전문적인 미술 교육도 받지 않았고 아주 유복하지도 않았다.
그림을 그리게 된 것도 대부분 자신의 현재 모습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 가족에게 보내기 위함이었다.
고흐가 그린 인물화로는 <우체부 롤랭>, <까미유 롤랭> 등으로 이웃을 그림으로 그려주었던 것이다.
<밤의 카페테라스>라는 명작은 그가 친구들과 만나고 외로움을 잊으려 즐겨찾던 곳의 야경을 그림으로
옮겼던 것이다.
고흐는 미술적인 빛을 보지 못하고 정신병원 생활을 하다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는 생전에 돈과 명예를 얻지는 못했지만 현재에는 최고의 화가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를에는 1988년 와서 1년간 작품활동을 하였다.
고흐가 입원했던 정신병원 | 고흐의 작품 - 생레미의 정신병원 |
고흐가 자주 다녔던 노란색 카페 | 고흐의 작품 - 밤의 카페테라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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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강 | 고흐의 작품 -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
노란집이 있던 곳 - 2차대전때 집은 파괴되어 사라짐 | 고흐의 작품 - 노란집 |
아를 시청 광장에서 마침 결혼식 축하연을 하는 광경을 보았다.
결혼식을 마치고 시청에 등록하러 오는 과정에서 축하행사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랑, 신부를 중심으로 전문악사와 많은 하객들이 모두 즐겁게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시청 청사와 광장 | 시청 건너편에 있던 아를의 성당 |
결혼 축하연 | 결혼 축하연 |
결혼 축하연 | 결혼 축하연 |
마르세이유로 이동
[마르세유]
마르세유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제국의 항구'이다.
동시에 이 나라에서 가장 프랑스적이지 않은 도시이다.
기원전 600년 그리스 인에 의해 처음 세워진 이 항구는 프랑스 영토가 된 이후에도 모든 지중해인들의 거처였다.
20세기 초반에는 이탈리아 인들이 대거 들어와 인구의 40% 이상을 차지했고,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동유럽인들이 밀려들어왔다.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식민지 개척과 독립의 과정을 통해 알제리인과 베르베르인들도 자연스럽게 늘어나
현재 인구의 1/3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알제리 계 이민인 축구 선수 지네딘 지단의 고향이 바로 이곳, 그의 환상적인 드리블은 '마르세유 턴'이라 불린다.
마르세유로 가는 도중 고속도로 휴게실 | 마르세유로 가는 도중 고속도로 휴게실 |
차창 밖으로 보이는 마르세유 항구
마르세유 항구 | 마르세유 항구 |
마르세유 항구 | 마르세유 항구 |
마르세유에 입성하였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마르세유의 큰길을 지나 마르세유시내를 차로 관광하기로 하였다.
때마침 우리 일행 중에 여선생님 한 분이 이 곳에 자유여행을 오신 적이 있어서 안내를 맡았다.
노틀담 성당을 찾아가는데 마르세유의 길은 우리 골목길 처럼 좁았다.
길을 다니는 차들이 대부분 소형 승용차였는데 이 곳에서는 아주 안성마춤이다.
길이 너무 좁아 우리 차량의 스페인 기사님이 엄청 애를 먹었다.
결국 버스가 너무커서 꺾지 못하여 노틀담 관광을 포기하고 대신 멀리 성당이 보이는 곳에 주차하였다.
호텔을 찾아 큰길로 가는 도중에 골목길에서 차가 막혀 오도가도 못하게 되는 위기도 맞았다.
우리 인솔자와 몇사람이 우리차를 따라 줄지어 있는 다른 차들을 부탁해서 뒤로 빼고 정리를 하였다.
우리 스페인 기사님이 엄청난 기술을 발휘하여 간신히 차를 후진시켜 빼서 다른 길로 찾아갔다.
우리가 정말 놀란것은 이런 과정에서 프랑스사람 누구하나 불평하거나 짜증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차량정리를 하는 대로 적극적으로 따라주어 별일 없이 위기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마르세유에서 석식 때 나온 생선 스프 | 식당에 진열된 생선 식재료 |
마르세유 야경 | 마르세유 야경 |
멀리 보이는 마르세유 노틀담 성당 | 마르세유 야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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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재헌 총무님 프랑스 니스에서의 추억과 모나코 왕국 이야기도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