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양은 나의 친구
푸른 늑대의 파수꾼/김은진/창비
반전이 있는 결말이 신선하다.
과연 후지모토는 하루코의 자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타인의 시간을 빼앗은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는 하루코의 유서를 보면서 후지모토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후지모토는 하루코의 자살 후에도 조선 소녀들의 빼앗은 시간에 대해서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을 것만 같다.
햇귀, 이름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와의 반전이 흥미롭고, 결말의 반전이 신선하다. 벽장 속에서 회중시계의 태엽을 감으면서 race the clock, race the clock이라고 주문을 외우며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부분은 친숙한 느낌이 드는 장치지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해주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 시간일지도 모르니 그것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려고 회중시계를 사용한 듯하다.
약간 억지 설정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하루코가 영어선생님을 짝사랑하는 부분과 햇귀의 영어 실력을 버무려 과거 속에서, 수인과 하루코와 햇귀가 만났을 때 영어로 자신을 소개하는 부분은 조금 인위적이라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또한 태후와의 관계에서는 푸른 늑대의 파수꾼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짜 맞춘 캐릭터로 태후를 등장시켰을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태후와 우민, 그리고 담임과의 관계를 민밋하게 그려놓고 많이 다루지 않는 부분도 조금은 개연성이 떨어지는 느낌도 든다. 또한 수인이 만난 한씨 아저씨가 하는 이야기는 굉장히 이상적인 말인 것 같다.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러워도 자신의 꿈을 포기 하지 말라는 선생님 같은 역할을 한씨 아저씨가 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사느냐? 꿈과 환상을 먹고 사는 것이다” (~본문 65쪽 ) 끝까지 수인이 가수의 꿈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는 부분 역시 한씨 아저씨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반전이 있어 잘 읽힌다. 이 책을 읽는 어린 독자들도 타임머신을 이용하여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데도 전혀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잘 읽어 낼 것 같다. 조금 신기한 부분은 과거에 수인과 하루코와 햇귀가 만났을 때 서랍 속 회중시계와 햇귀의 주머니 속 회중시계가 만나는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회중시계가 사라지게 묘사한 부분은 자연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면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햇귀는 ‘푸른 늑대의 파수꾼’이라는 이름처럼 늑대로부터 자신을 잘 지켜낼 수 있을까? 늑대로부터 도망쳐도 늑대는 도처에 널려 있기에, 결코 도망가거나 피할 상대가 아니라 당당하게 맞서야 하는 것임을 햇귀는 깨달은 듯하다.
"우리의 이야기가 사라지기 전에, 우리가 죽기 전에 말하라, 일본 정부여!
위안부 여성들에게 미안하다고 나에게 말하라. 나에게, 나에게, 나에게! 말하라.
미안하다고 말하라, 미안하다고."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말하라' 모놀로그 중에서)
한국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 주최로 1992년 1월 8일 시작된 수요집회가 2011년 12월 14일 1,000회를 맞았다. 일본 정부의 반발이 있었지만, 같은 날 '평화비' 제막식도 진행되었다. 평화비는 위안부로 끌려갈 당시 10대 소녀의 모습을 형상화한 높이 130㎝의 상으로 주한 일본 대사관 정문 앞 인도에 일본 대사관을 바라보도록 세워졌다. 첫 수요 집회 당시 234명이던 위안부 할머니들은 그동안 171명이 세상을 뜨고 2017년 6월 현재 39명만이 남았다
태후가 햇귀의 아이디를 도용해서 위안부에 대한 글을 인터넷에 올린 부분은 충분히 현실성이 있는 것 같다. 지금의 중학생들은 과연 종군위안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고,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햇귀가 과거로 들어가서 수인과 하루코에게 진실을 알려줄 수는 있지만, 진실을 느끼게 할 수 있는 부분은 다르다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정말 요즘의 중학생들은 종군 위안부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만나서 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마음이다. 이부분에서 공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만약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다면, 사회적 죽음을 우리 역시 묵인하고 있는지도 모르니 말이다.
사회학자 올랜도 패터슨은 노예상태를 정의하는 본질적인 요소는 자유의 부재가 아니라 ‘사회적 죽음’이라고 지적한다. ‘사회적 죽음’이란 사회적으로 그 존재가 지워져 있다는 것,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2017년 6월 8일자 한겨레신문 기사 일부분)
이 기사를 읽으면서 사회적 죽음의 원인 제공자는 바로 국가라는 생각이 든다. 제대로 된 국가가 없었기에 수없이 많은 생명들이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이제야 제대로 된 국가로 거듭나기 위한 힘찬 발걸음을 이번 정부가 하고 있다. 이제라도 천만 다행이다.
참혹하고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 위안부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아리따운 소녀였던 그들이 지금은 할머니가 되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미안하다고 말하라고. 제대로 사과하라고.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국가의 공정한 역할 부재로 인한 사회적 죽음을 맞고 있었던 위안부 할머니들, 이제 몇 분 남아계시지 않지만, 그분들이 살아계실 때 가해자인 일본은 생생한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진정한 사과를 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서는 개인의 역할보다는. 국가의 역할 이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사회적 죽음으로 내몰린 목숨들이 어디 위안부할머니들 뿐이겠는가 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들은 촉박하다.
타인의 시간을 빼앗은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는 후지모토의 말처럼, 할머니들의 시간을 빼앗은 일본은 언제쯤 진정으로 사과할 것인가? 어서 어서 사과하고 진정으로 반성하라고 우리 모두 두 눈 부릅뜨고 늑대를 지키는 파수꾼처럼 제대로 된 역할을 해내야 할 것이다.
여전히 매주 수요일 열리고 있는 수요집회에 참석할 시간이 안 된다면, 가까운 부평공원에 의연하게 서있는 130cm의 소녀상이라도 만나서 우리도 기억하고 있다고,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푸른 늑대의 파수꾼.hwp
첫댓글 언니도 엄청빠름...
늦은저녁 카페나와서 프린트물 천천히 읽었네요..깊은 생각 하게되네요 .. : )
바쁜 중에도 늘 감상글 작성해오셔서 항상 감사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