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의 연원(本貫淵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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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전득시(田得時:자는 천우, 시호는 忠元)는 1130년(고려 인종 8) 누대에 걸쳐 담양(潭陽)에 토착세거해온 고을 향리의 아들로 태어나 1155년(의종 9) 현령으로 천거되고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좌복사·참지정사(중서 문하성의 종2품 벼슬)등을 지낸 후 담양군(潭陽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득시(得時)를 시조로하고 본관을 담양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오면서 6세(六世)까지 독자로 내려 오다가 희경의 아들 3형제 대에서 예문관 대제학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한 맏아들 녹생은 야은공파, 삼사좌윤 밀직제학을 역임한 둘째 귀생은 뇌은공파, 찬성검의부사를 지낸 세째 조생은 경은공파로 갈리었다.
가문을 중흥시킨 이들의 업적을 더듬어 보면 녹생이 고려 말의 영현으로서 공민왕때 정당문학·문하평리(문하부의 종2품 벼슬)등을 지내고 문신이면서도 무예에 뛰어나 「문무전재(文武全材)」란 칭을 받았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당시의 권신(權臣) 이인임의 주살을 상소한 일로 장류(杖流)도중 장독(杖毒)으로 죽었다.
그의 아우 귀생(고려 말에 삼사 좌윤과 밀직제학을 역임)과 조생(고려말에 찬성참의 부사를 지냄)은 모두 문장에 뛰어나고 학문이 깊어 3형제가 함께 명성을 날렸는데,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귀생은 불사이군의 충절로 두문동에 들어갔으나 누차 벼슬 할 것을 권유받자 절해고도로 자취를 감추었고, 조생은 깊은 산속에 숨어서 절개를 지킴으로써「두문동 72현록」에 올랐다.
이때 세상사람들은 이들 3형제를 가리켜「삼은전선생(三隱田先生)」이라 불렀으며, 지금도 전라남도 담양읍 향교 앞에 「삼은전선생유허비」가 전해지고 있다.
특히 담양전씨는 이들 3형제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가문을 빛냈는데, 맏집인 야은공파 녹생의 후손에서는 성리학의 대가인 우(愚)가 이율곡·송시열등의 학통을이어 받아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뇌은공파 귀생(貴生)의 아들 한(漢)이 중랑장을, 손자 묘는 소윤(少尹)을 역임했고, 조선조에 와서 가종이 군수를, 가식은 예조 판서를 지냈다.
가종의 둘째아들 구주는 중종때 급제하여 이조 참의·예문관 직제학·춘추관 지제교까지 지낸 후 문명을 날렸으며, 임은 임진 왜란 때 백의로 창의병 삼백명을 이끌고 전공을 세운 후 장렬하게 전사하여 이름을떨쳤다.
경은공파 조생의 후손에서는 그의 아들 순·엄·회·개가 뛰어났으며, 세조때 판내시 부사(내시부의 정2품 으뜸 벼슬)로 하음군에 봉해진 균과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지내고, 명 문장으로 유명한 여림, 보령 현감으로 선정을 베풀어「삼옥태수(三玉太守)」란 칭송을 들은 벽(闢), 성리학자 병순, 임진 왜란때 아들 득우와 함께 왕을 호종하여 호성원종공신에 녹훈된 윤(潤)등이 대표적이다.
고려 조선조를 통틀어 담양 전씨 문과 급제자는 1백27명. 봉군 15명 판서급 22명 정승3명 등을 배출했다.
그러나 세도를 탐하지않는 선비가문의 기질 탓인지 권력의 정상에 오른 인물은 없다. 담양 전씨는 전통적으로 文을 숭상하는 가문이었지만 조선 선조왕때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많은 무장을 배출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