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불가 의 전래와 발전방안 모색
서론(序論)
1.불교음악의 성격
불교음악은 불교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부르거나 연주하는
불교와 관련이 있는 모든 종류의 음악을 말한다.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 불교가 탄생 되면서 직, 간접으로
부르고 연주하는 모든 음악을 총칭하며 소위 찬불가 또는 찬송가라 말한다.
불교가 고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래 되면서 시작된 찬불음악은 시대가 바뀌고
또 각 나라로 전파되면서 그 나라의 토속문화와 접속되어 각 나라만의
독특한 불교음악으로 발전하는데 이는 불교를 떠나 민족의 음악으로
발전됨을 알 수가 있다.
2.불교음악의 이해
역사적으로 볼 때 음악이 없는 종교는 상상을 할 수가 없다.
이런 현상으로 볼 때 불교역시 음악이 없다면 그 영역을 키울 수도 없고
불, 보살의 위신력(威神力)이 높다한들 아마 불교라는 종교는 자리매김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많은 작가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는 제1의 수단이
찬불가 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찬불가는 불법을 모토로 두고 가사가 만들어 져야하며 인간답게 사는 길을 제시하는
자비보시의 가르침에 충실하여야지 막연한 노랫말을 찬불가라 한다면
결코 찬불가라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고금을 통해 본 한국의 찬불음악
1. 삼국시대
1)범패....... 범패는 중국에서 전래 되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진감선사가 중국에서 전수해오고
일본의 엔닌 승려의 당나라 구법순례기 에서도 언급했듯이 중국에 있는 신라의
사찰 적산원에서 그 유래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서력372년 불교가 전래되면서 의식에서 범패를 사용)
범패의 종류.......1)범패승 의 겉 채비소리(짓소리 와 훗소리)
2)일반승려 의 안채비소리(염불)
3)화청 (축원곡) . .불교의 추도의식에서 망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노래
2) 향가(고유의노래)
신라의 가요로 알려진 향가는 본래 가사와 곡으로 이루어진 노래의 형태를 갖춘
것이지만 지금 전해지는 것은 가사(文)만 25수 정도만 전해 내려온다.
전래된 것으로 보면 알 수가 있듯(도솔가, 원왕생가 ,도천수관음가 , 처용가 등등)
일반적인 가사 보다는 불교의 색채가 뚜렷하다.
신라뿐이 아니고 당시의 삼국(신라 백제 고구려) 모두 불교의 신앙을 떠나서는
생각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백성의 불교의존도 및 그 영향력이 지대하였다.
이런 신라시대의 불교음악이 곡의 맥이 끊기고 가사만 전해오는 것이 아쉬움이 클 뿐이다.
향가는 분명 불교로 인해 만들어 지고 불교음악(찬불가)의 한 장르로
하루 빨리 발굴하여 현대에 맞게 재탄생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혜성가(용천사 작시) -
(원문) 옛날 동해가의 건달바가 놀던 성을 바라보고 왜군이 왔다고 봉화를
들게 한 동해가 있도다. 세 화랑의 산에 놀러 옴을 달도 빨리 그 빛을
나타내므로 , 길을 쓰는 별을 바라보고 혜성이라 말한 사람이 있다.
아! 달이 아래에 떠갔도다. 보아라! 무슨 혜성이 있을 것인가.
2. 조선시대
비록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하여 산중(山中)불교가 되었지만 불교음악은
신라나 고려보다 한발 앞서 발전이 되었다.
세종 때 국사였던 신미대사(김수성)의 아우였던 김수온의 “사리영웅기” 에 소개된
바에 의하면 세종은 직접 찬불 곡을(7곡) 작곡 하였다.(예. 삼불예찬문)
당시 세종이 작곡한 곡을 대중에게 선보일 때에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는 무동 까지67명 이었다하니
지금에서도 공연되기 어려운 편성이었음을 가늠 할 수 있고
현대의 오케스트라에 버금가는 멋진 향연이었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가 있다.
(악기는 29종 연주자 45명 / 죽간자 2 , 노래하는 사람 10명 / 춤추는 사람 10명)
*죽간자- 악단의 앞과 뒤에서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대나무 여러 개를 쪼개서
칠을 한 만든 긴 막대 (향악보단 아악이나 정악에서 주로 사용)
1)곡의 성격
이 당시 중국에서 전래된 아악(雅樂)보다는 우리음악인 향악(鄕樂)으로 볼 수 있다.
세종의 성격으로 볼 때 선왕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형태의 찬불음악이 중국의
음악을 차용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10여명의 가수가 노래하였음을 볼 때 현재의 교성곡 형태가 아닐까
추측을 할 수가 있다.
2) 이밖에 곡의 종류
1)영산회상 (성악곡에서 →기악곡으로 변천)
부처님의 영취산 설법을 회상하며 만들어진 이 곡은 음악과 노래와 춤으로
이루어진 곡으로 후불탱화로 모신 영산회상도 를 음악으로 만든 것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불교와는 관계가 없는 음악이 곁들어져 순수기악곡으로
전래 가 되고 있다.
2)회심곡
15세기 서산대사 휴정이 지은 것으로 전래되고 있는 대표적인 불교의 민요이다.
이 곡을 만들게 된 동기는 전란을 거치면서(임진왜란, 병자호란) 흉흉해진 민심을
불심으로 달래려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승가에 전해지는 화청으로 불리는 불가조의 회심곡 과 민간에서 민요로 불리는
소리조의 회심곡이 있다.
가사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부모은중경의 내용을 쉽게 풀어 누구나 부를수
있도록 만든 곡이 회심곡이다.
인생의 무상함을 깨달아 부모님께 효도하고 신심을 잘 닦아서 선행을 기원하는
가사가 서도소리(다소 슬프게 들림)를 만나서 처량하게 들리는 것이 특징이다.
(별회심곡, 특별회심곡 , 속회심곡) 김영임의 회심곡은 집에 하나씩 소장
3)탑돌이
근자에도 경기민요를 부르는 많은 사람들이 부르는 것이 탑돌이 이다.
작자는 미상이나 불교행사에서 사리를 모신 탑을 돌면서 부르는 것을 볼 때
불교포교를 목적으로 만들어 졌다고 볼 수가 있다.
4)기타
보렴 - 행선축원문을 남도창 조로 부르는 것을 말한다.
산염불 - 서도민요에 속하는 산염불은 글자 그대로 산에서 하는 염불이다.
범패가 어렵다 보니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도록 많든 곡이고
주로 황해도나 평안도 지방에서 불러졌으며 무속인 들이 많이 불렀다.
3. 정리
위에서 살펴본 음악은 현재 우리가 부르고 있는 의식곡이나 찬불가요와는
다소 거리감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불교음악의 한 장르이고 또
여기에서부터 발전이 되어왔으므로 꼭 보존하여 전승되어야 하는 민족의
유산이라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일제를 거치면서 조선총독부는 민족불교의
색채가 짙은 조선불교의 말살 정책을 펴기 시작했으며 이 때문에 절에서
의식이 사라지고 말았다.
근대의 창작 찬불가
창작 배경 과 의의
근대의 창작 찬불가는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면서 일대 변환기를 맞는다.
백용성의 찬불가와 등이 그것이다.
(근대 찬불가의 시조는 백용성 스님이라고 할 수가 있다)
기독교에서는 찬불가가 자신들의 찬송가에서 파생 된 것이라 하나
이는 어불성설이다. 비록 오선이라는 서양음악기법을 차용하긴 했지만
불전에 기록된 음악용어에 분명 찬불가와 찬송가 가 불교의 음악용어이다.
그러나 이교(異敎)가 유입이 되면서 시작된 노래를 통한 포교는
가무(歌舞)를 즐기는 우리민족의 특성상 타종교의 집회에서 울려 퍼지는
선교와 집회용 찬송가를 보면서 불교에서도 적극 추진을 하였다.
(초창기는 승려중심의 찬불가를 거치면서 재가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여기에 일제의 민족불교 말살정책으로 왜색 창가(唱歌)풍의 찬불가가
작곡 되어 불러지고 또한 작곡 보다는 작사의 창작이 더더욱 돋보인다.
이는 서양의 음악교육을 받은 이는 거의 기독교인으로 불교에서는
그 만큼 인재가 귀하였으며 귀에 익숙한 동요 등에 찬불 가사를 얹어
효과를 보고자한 방법을 썼던 것이다.
*창가 - 갑오경장이후 유입된 군가풍의 일본노래
1)스님들이 전개한 찬불가
일제의 조선불교 탄압으로 시작된 말살 정책은 새로운 신 불교운동의 태동
과 함께 찬불가의 보급이 시작된다.
최초의 찬불가는 왕생가 , 권세가 두곡이며 당시(1920~40)에 신불가(新佛歌.찬불가)
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백용성 스님 이외에도 조학유 , 권상로 ,김정묵 등이 있다.
백용성 의 득도게송
오음산 속에서 소를 찾는 나그네여
외로운 달빛 드는 빈방에 홀로 앉아 있네.
뉘라서 이 길고 모나고 둥근 것을 구별 하리오
한 덩어리 불길이 삼천대천세계를 다 태우네.
*백용성 - 경,율,논을 터득하여 막힘이 없으며 도심 포교당의 개척자 이고
서울 대각사를 건립했으며 선학원을 세웠고 불일지(佛日志)잡지출간.
위의 게송을 소개함은 지금이라도 곡만 붙이면 찬불가가 될 수 있는 주옥같은
글이 현재도 많이 전해옴에 찬불가 작곡가 들은 귀 기울여 봄직하다.
용성스님이 누구에게 작곡을 배웠는지는 (중국 유학설 , 수감당시 타종교인설)
알 수 없지만 당시 풍금을 연주하면서 직접 가르쳤다고 하니
그의 문학과 음악적 지식이 가히 천재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찬불가를 통하여 홍법을 하겠다는 집념이 매우 컷 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조학유 - 조학유의 작품엔 거의 작곡가가 없다. 이는 타종교의 선율에 자신이 쓴
가사를 붙여놓는 방법으로 하였다, 당시는 불교 잡지 등을 통해 발표를 하여
알 수가 없었지만 후일 타 종교와 교류를 하면서 거의가 사라진 상태이다.
예) 찬양합니다. 조학유 작사 / 작곡자 미상
염부수하의 느낌(곡 황성의 달) / 정반왕궁(변찮는 주님의사랑)
권상로 - 찬불가 작사에 업적이 많은 권상로는 부모은중경뎐을 시작으로 많은 곡을
작사, 작곡 하였다. 그러나 작곡가가 아닌 그는 서양음악 전공자에게 곡(율)을
부탁하여 찬불가집 까지 출판하였다. 지금 이야 별로 전해 지는 곡은 없지만
어찌되었던 찬불가의 든든한 초석을 다짐은 확실하다.
김정묵 - 생몰여대를 알 수 없는 베일에 쌍인 인물이다. 다만 그는 대한불교중앙포교사로
있으면서 정선초교당에서 찬불가 가사를 쓰고 그것을 정운문에게 주어 작곡 및
찬불가 운동을 부탁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그의 작품은 동요 등에 가사를
붙인 곡들이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우리절 부처님을 강아지로 바꾸는 등 그 시대
아이들이 부르던 동요에 접목을 하여 쉽게 받아들이도록 한 것이다.
(원문- 우리 집 강아지는 복실 강아지 학교갔다 돌아오면 멍멍멍
개작찬불 - 우리 절 부처님은 자비 하시죠 우리 또한 잘 자라게 하시고)
*그의 작품들 =삼귀의 ,보살의 서원 ,불교유치원 노래 , 꽃 공양 등 수십 곡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비록 타 종교 나 일본의 창가 등에 가사를 붙여 부른
찬불가가 많았지만은 그것이 불교의 포교운동에 큰 몫을 담당했던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격동기의 찬불가
해방 후 외세가 밀려오면서 기독교의 득세로 이어지고 왜색불교에 멍든
불교계는 해방의 기쁨도 잠시이고 상처가 회복되지 못하고 더욱 악화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어둠이 지나고 새벽을 맞이하면서 찬불가 운동을 시작한 이가
바로 정운문 이다.
용성의 뒤를 이은 운문스님이 대한불교조계종 사회국장으로 취임하면서
개운사에 보리수 어린이회를 만들고 조계사에는 연화어린이회 를
창립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찬불가 운동은 광폭의 길을 이어갔다.
이는 40여년전 백용성 스님이 일요불교학교를 만들어 찬불가를 보급하던 것과
일치한다. 그만큼 어인 새싹이 장차 민족불교의 큰 자산임을 알고
어린이 포교에 집중하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
운문스님은 자신이 작사를 한 많은 가사를
추월성 , 정민섭 , 이찬우 등에게 작곡을 의뢰 하였다.
운문스님은 자신이 거처를 옮길 때마다 그 작곡가들과 동행을 하여
함께 음악작업을 하였는데 그것을 사찰에 있는 다른 승려들이 무척
싫어했다고 후일 전해진다. 아마도 신성한 도량 자처하는 절집에서 밤낮으로 울려 퍼지는
오르간 소리가 매우 시끄러워 그리 했던 건 아닌가 싶다.
그들에게서 지금도 제방의 사찰에서 법회때 불러지는 많은 찬불가가
작곡이 되었지만 아쉬운 점은 정운문에게 의뢰를 받아 작곡을 한 이들에게
불교계는 물론이고 저작권에 있어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의 승가에서는 그들을 구박하고 무시하고 외면하고
천사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운문의 가사를 작곡 의뢰받은 사람들의 종교가 전부 불자는 아니었다 한다.
다만 스님의 취지가 좋고 하고자 하는 열정이 남달라서 동참했던 경우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것을 보면 운문스님의 찬불가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을 할 수가 있다.
(필자가 저작권협회에서 검색을 한 바에 의하면 이들의 작품등록은
거의 전무한 상태인데 그 책임은 오롯이 승단의 책임으로 돌리고 싶다.)
*추월성 - 어린이 집회가 ,일곱 걸음 걸으시고 (주 작품이 동요품의 어린이곡)
*정민섭 - 산회가 , 보현행원 (법회용 찬불가)
*이찬우 - 청법가 (이광수 작사) , 애착을 끊어라
현대의 불교음악
보편화된 찬불가
운문스님의 찬불가운동에 힘입어 잠잠했던 불교계에 새바람이 인다.
이는 그 동안 침묵했던 재가불자 음악인들도 찬불가 운동에 참여를 하면서
그 폭이 넓어지고 양 과 질도 수준급으로 올라선다.
특히 각 사찰에 합창단 붐이 일면서 불교 음악인에게 일자리 제공은 물론이고
찬불가도 의식 곡에서 합창곡으로 이어지는 중흥기를 맞이하고
소위 대박이라 일컬어지는 힛트곡도 나오게 된다.
그러나 한편 아쉬운 점은 찬불가 운동에 참여한 젊은 음악인들이 대개는
서양음악 전공자들로 민족 음악적 성격보다는 기독교 찬송가 풍의 노래만
양산하기에 이른다.
*이는 공론이 필요하다.
초기 찬불가요가 율(곡)을 중시하기보다는 문(가사)을 중시하여 일본식 창가나
어린이 동요에 맞추어 불렀다면 찬불가 중흥기를 맞아 율 과 문 이 같이
중요시 되는 상황에서 민족불교 본래의 전통음악을 가미한 국악풍의 한국적
불교음악이 자리매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찬불가 개화기의 주요 작가들
작사가 반영규 - 반영규 는 정운문의 뒤를 잇는 재가 불자 작사가이다.
그는 불교 포교를 목적으로 ‘자비의소리’를 설립하고 자신의 작품을
서창업 등에게 의뢰하여 자신이 만든 자비의소리를 통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다.
(작품 - 붓다의 메아리 ,삼보님께 의지하오니 , 무상게 , 탑돌이 등)
작곡가 서창업 - 서울대 음대를 나온 서창업은 불교음악연구원을 설립하였다.
불교에 문외한 이었던 그는 반영규를 만나 작곡을 하면서 불교에 심취하였고
많은 곡을 썼지만 살림은 넉넉지 못하였다. 작곡을 위한 피아노도 광덕스님이
희사 하였다함.
그의 작품은 한국적인 음악을 채택하기 보단 찬송가풍을 채택하여 민족음악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불교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작품 - 홀로 피는 연꽃 , 둥글고 밝은 빛 등)
작곡가 김희조 - 김희조의 작품은 민족음악적인 요소와 서양음악기법을 적절히 섞어
곡을 썼다. 제자 정민섭의 소개로 운문을 만나고 우연히 서창업의 악보를 접한후
‘이건 찬불가가 아니다.’ 라는 혹평과 함께 자신이 곡을 썼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비록 작품 수는 적지만 김희조의 찬불가는 앞으로 찬불가가 어떻게 만들고
불러져야 하는가 하는 방향을 제시했다고 본다.
(작품 - 님의 말씀 등불삼아 , 사랑하는 우리부처님 ,만유에 두루 하심 등)
작곡가 최영철 -모든 법회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노래가 바로 최영철의
삼귀의 와 사홍서원이다. 최영철은 충남 및 대전지역의 종립(보문)고등학교
음악선생이다. 조계종의 찬불가요 공모에 당선이전부터 찬불가에 관심이
많았는데 당시에 작곡되어 배포된 삼귀의 와 사홍서원이 지극히 서양적인데
다가 질서가 없어 다시 작곡을 하게 된 것이다.
(작품 - 삼귀의 ,사홍서원 ,참회합니다. 진리의 빛 등)
작곡가 김용호-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오페라를 작곡했던 김용호는 대불련 회장 출신인
선진규 법사의 의뢰로 찬불가 작곡에 발을 디디게 된다.
김용호의 작품은 우리의 전통음악(범패,향가,이조시대 찬불가 등)을 기초하여
곡을 써서 새로운 찬불가의 정립을 위해 노력했다.
(작품 -연등 , 불교도의 노래 ,달마대사 등)
국악풍의 찬불가와 교성곡
서양음악적인 기법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것이
국악풍의 찬불가 음악이다. 이것에는 교성곡 , 합창곡. 무용곡 등 모든 것을 아우르면서
음악과 무대에서 관객을 압도하는 전통을 고수하는 찬불가이다.
국악을 전공한 작곡가들이 다수 포함되는 그 이유가 있다
1990년대 불교 방송에서는 신작 찬불가를 위촉하면서 다수의 국악전공 작곡가들을
섭외하면서 시작이 된다. 당시 불교방송에서는
귀의, 예배, 찬탄, 공양, 참회, 발원, 회향, 행사 등으로 구분을 하여
제작을 의뢰하였다.
5년간 지속된 찬불가 공모에서 총104곡의 곡이 탄생하였고 지금도 가장 많이
불러지는 것이 이달철 작곡의 ‘우리도 부처님 같이’ 이다.
작곡가 박범훈
국악 찬불가운동의 중심엔 박범훈이 있다.
박범훈은 불교합창단의 찬불가 부르는 모습이 마치 교회의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불교음악=전통음악 으 로 생각했던
그는 불교다운 찬불가를 써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서울올림픽 이차돈의 일대기를
극화한 작품의 의뢰를 받고 (하얀 초상) 그것을 불교적으로 쓴 것이 그의
최초 찬불가 작품이라 하겠다.
이후 국악 교성곡 붓다 , 보현행원송 ,용성 , 부모은중송 등 대작을 발표하였다.
교성 곡들의 진행방식을 살펴보면 선창가수(예 김성녀)가 앞부분을 부르면
후창은 합창단(예 불광사합창단)이 따라 부르는 식으로 진행이 되며 곡에 따라서는
120분 이상을 소요하는 거작으로 음악을 하는 필자로서도 공연 현장에서
전율을 느낄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그가 얼마나 불교음악에 관심이 큰지 그리고 그의 천재적인 음악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불교음악의 한 장르를 개척한 공이 크다.
(작품들 - 무상게, 탑돌이, 무상인, 찬미의 나라, 오계의 노래 ,부처님 오신 날 등)
작곡가 변규백
그는 1980년대 불교음악을 작곡한 이들 중 유일하게 국악을 전공한 사람이다.
범패를 배우고 나서 범패가락을 차용한 찬불가를 써야한다는 생각에
주로 8/6 박자의 국악풍 선율을 채택하였으나 후반에는 4/4 박자 장조로
고을 쓰기도 했다 이는 자신의 곡이 좀 더 대중음악에 친숙한 멜로디로
많은 사람이 부르게 하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작품들 -청산은 나를 보고 , 부처님께 귀의 합니다. 등)
작곡가 정부기
중앙대학교 음악대학 교수인 정부기는 찬불가의 작곡 동기가 부친의 영향이 받았다.
서울음악제 위촉 작품 조지훈의 ‘승무’작곡했고 ‘파랑새 울고’로 공식 데뷔를 한다.
이후 정부기 작곡집‘불교명상음악’을 출판하여 다수 의 곡을 발표하였다.
(작품들 - 초파일 송가 , 범종 ,방생의 노래 등)
불교 합창단의 전성시대
불교합창단의 창단은 찬불가의 발전을 몇 계단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찬불가를 아무리 많이 작곡하여도 그것을 부르는 사람들이 없다면
속빈강정이라 할 수가 있다.
60년대 이후 각 사찰 및 종단 종립학교 등에서 탄생한 합창단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70년대 이후 활발한 찬불가운동의
결과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단점도 있어서 재정이 열악한
사찰의 경우 초빙된 강사의 수고비도 감당하기 어려워 합창단을 해체하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찬불합창단이 설립된 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1)찬불가 경연대회의 정례화
2)사찰의 법회 일상화
3)부처님오신 날의 범사회적 축제
4)사찰 합창단의 정기발표회
누가 주체인가
찬불가를 만들고 알리는 그룹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방송 -1990년대 불교방송을 통해 만들어 지고 보급된 것이 지금은
방송을 통해서만 송출을 한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아직도 찬불가가 대중의 인지도가 약해 편성에 한계가 있음을 볼 때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현재 불교방송 찬불가 편성 프로그램 :우리들의 찬불가)
(불교TV : 전무 / 불교TV앱 울림: 음악채널 )
2.종단 - 대한불교조계종 에서는 신작 찬불가 가사를 공모하여 당선된 작품을
기성 작곡가에게 의뢰하여 발표하는 행사를 수년째 어어 오고 있다.
문화포교 및 찬불가의 중요성을 알기에 해마다 하는 행사 이지만
정작 일선의 사찰에서는 산사문화행사에 찬불가 보다는 대중가요가 판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틀 린 말이 아니다.
신작찬불가를 만들고 또 기성가수들이 노래를 한다면 응당 사찰문화행사에서
소개됨이 마땅하다. (*종단의 지속적인 홍보로 변화유도)
3.음악단체 - 현재 음악단체를 통해서 발표되는 찬불가도 상당 수준에 이른다.
불교음악협회 , 대한찬불가제정위원회, 육화림, 한국불교작곡가협의회, 풍경소리
가릉빈가소리 등에서 발표되는 찬불가도 상당 수준에 이르지만 혹 잘못된 기재로
인하여 선배 작곡가의 명예에 혹 여 누가 될지 몰라 아직 활동이 미진한
글을 쓰는 본인(오해균)의 작품이며 가릉빈가 소리의 대중가수 몇 분의
찬불가를 소개한다.
*상기에 소개된 작품들은 음반이 제작되어 이미 많이 알려져 있고 해마다 찬불가요콘서트 를 통해 음반을 보급하고 있다.
찬불가 및 찬불가요 음반에 공을 들이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중에 필자와 교류가 있는 몇 분을 소개한다.
-자명스님 : 문화포교에 가장 적극적인 경우 이다. 스님은 자신의 앨범을 4집까지 출시하고
공연무대도 오페라를 차용한 불교악극으로 전국을 다니며 공연 중이다.
쓰고 노래를 불러 해마다 몇 회씩 자신의 사찰에서 공연 법석을 연다.
유명하며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
찬불가요를 노래하는 희욱스님 등 많은 분들이 음성공양으로 포교를 한다.
1)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 할 것.
2)대중이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적당한 운율과 내용으로 할 것.
3)불교교리에 어긋나거나 개인의 감흥은 피한다.
4)불교교리를 쉽게 풀어서 대중이 함께 부를 수 있도록 쓸 것.
5)어려운 낱말의 가사나 여러 절(節)을 하면 외우기 어려우니 단순하게 할 것.
6)타인의 작품에서 카피하는 행위를 금할 것.
2)기독교 찬송가 풍이나 선율을 차용하지 않는다.
3)모두가 함께 부를 수 있도록 적당한 음역을 쓴다.
5)불교를 믿는 사람이 곡을 써야 오롯이 불심이 녹아든다.
현대는 말 그대로 대중가수의 르네상스시대이다.
부르고 또 현장에서 부르기를 원하며 많은 사람들이 부르고 있다.
1)불교적인 내용의 가사에 대중음악을 접목할 것.
2)어느 정도 정상에 올라선 가수를 섭외할 것.
3)불교를 신행하는 가수에게 곡을 줄 것.
4)불교의 교리를 체득하고 신행하는 사람이 곡을 쓸 것.
구슬이 서 말 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하나같이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불,보살님을 존경하고 부처님 믿어야 복을 받는다는
대중가수가 부르면 보고 듣는 이가 바로 이해 할 수 있는 그런 가사가 필요한 때이다.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가사로 알려져 있다.
제 불, 보살님께 이글을 바칩니다.
첫댓글 본 주제에 대한 토론원고로 다시 고쳐쓰고 있어 본 원고는 참고자료로만 읽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