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공선사(梵空禪師)
경순왕 계자 김황(季子 金湟,신라 마지막 왕자) 年譜
◆ 914년
신라 53대 신덕왕 3년 월성(경주)에서 탄생
부친 金傅(경순왕)와 모친 竹房夫人 朴氏(竹房王后)의 季子(막내아들)로 탄생
◆927년
※兄 太子 鎰(마의태자)는 912년생
부 金傅 敬順王에 등극
- 후백제 견훤 서라벌 침공, 경애왕 자진케 하고 옹립-
◆927년
경순왕 季子 湟 각간에 임명, 장남 鎰은 태자로 책봉
◆930년
옥저 河氏(시중 하원호의 따님)을 빈으로 맞으심
◆932년
장남 雲發(운발, 나주김씨 관조) 탄생
◆934년
차남 雨發(우발, 경주김씨 선계) 탄생
◆935년 10월
경순왕은 935년(경순왕9년) 화백회의(군신회의)를 열어 “나라의 형세가 강함도 없고 약함도 없는데 외롭고 위태함이 이와 같아 형세는 이미 온전할 수 없으니 내가 차마 죄 없는 백성으로 잔혹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하고 고려 태조 왕건에게 신라 천년사직 손국(遜國), 이로써 신라는 건국 후 56왕 992년 만에 종언을 고하게 됨.
“季子湟은 형인 太子鎰과 손국을 극력 반대하였으나 부왕이 가납하지 않으시자 처자를 속세에 두고(棄妻子 기처자) 통곡하며 영사입산, 사작불수 하고 부왕의 영정을 모봉하고 가야산 법수사에서 범공스님이 되어 법수⦁해인사를 왕래 주접하시다 종신하게 됨, (삼국유사 기록)부왕의 영정 해인사에 봉안중 화재가 발생하자 이를 구해 영천 은해사로 이봉하였다가 이 영정을 모봉한 영정이 1778년 경주 숭혜전 봉안.(경주김씨 문헌록, 조선왕조실록기사)
-형인 태자 鎰은 죽방모후와 가솔을 데리고 (率妻子 솔처자)통곡하며 상악(금강산)으로 들어가 마의초식에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살다 종신 하였다함(후에 마의태자로 불리어짐)
◆935년 11월
경순왕 손국 행렬은 11월 3일 서라벌 출발 10일 만인 11월12일 개경에 도착
- 계자 황왕자 빈 옥저하씨와 운발, 우발 두 공자 손국 행렬에 포함
◆935년
고려 태조 왕건 서라벌을 경주로 개칭하고 경순왕을 수종한 모든 관료 신라에서와 동급 등용
◆1281년
고려 충렬왕 때 일연선사 삼국유사 저술시 “신라 멸망 시 계자입산 범공 스님이 되어 법수⦁ 해인사에 살았다”는 내용 수록
◆1654년
김씨소원록(金氏溯源錄 효종명에 의해 부승지 남훤(南翧이 정리, 규장각 소장)에 계자 범공스님이 되고 자 운발 나주김씨가 되었다는 기록과 경순왕 왕자의 서차 및 본관 기록
◆1709년
나주김씨 최초 족보 준흥보 서문에 “계자의 입산” 사실 기록
◆1769년
안악보 발간 서문 계자를 “2자로 표기 입산(스님)”으로 기록
◆1778년
동사강목(안정복 저술 역사서)에 “계자 범공스님”이 된 기록 서술
신라가 歸麗(귀려)시에 “季子가 충절을 지켜 棄妻子하고 梵空스님이 되시어 법수 해인사에 머물다 종신 하신일”은 “중국의 촉한의 멸망시 북지왕 유심의 충절과 관련한 고사에 비견할 정도로 의기가 장렬하지만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아 참으로 애석하다”(爲僧名梵空後住法水海印寺云吳氏曰 王子義烈可與北地王諶爭光日月 而名不傳東方文獻埋沒可惜)
◆1784년
◦ 정조 8년(갑진) 개성 동북 오룡산에서 殷說(경순왕의 4자)의 묘지(墓誌)와 계자의 묘지석 발견, 경순왕 아들들의 서차 및 실전되었던 태자와 계자의 휘(諱)가 일(鎰)과 황(湟)으로 밝혀짐
◆1786년
나주김씨 병오보 서문 및 본문에 경순왕 계자 史失名 ‘승명 범공’으로 표시
◆1790년
증보문헌비고(조선 영⦁정조 왕실 편찬 정사)에 季子 梵空의 장남 雲發이 羅州君으로 책봉 나주김씨 관조라고 명기
◆1792년
◦ 경순왕 어진 영천 은해사 충효암(상용암)에서 1778년(정조12년) 경주 숭혜전 이봉함(1792년(정조16년) 조선왕조실록 4월 기사)
◆1922년
경주김씨 문헌록에 경순왕의 2자 황왕자가 신라 멸망시 해인사로 입산하면서 부왕의 영정을 그려 모셨다가 해인사에 화재가 일어나자 이 어진을 영천 은해사 충효암으로 이봉 하였다가 후에 경주 숭혜전으로 봉안 했다는 내용 명기
◆1987년
교양국사(한국사)등에 경순대왕의 귀려(歸麗)에 태자⦁계자 반대, 계자 가야산 해인사에 입산 범공스님이 되었다는 내용 수록
◆1996년
한국불교사찰사전(이정 편저)에 경순왕 작은 아들이 범공스님이 되어 법수사에 머물렀다는 기록 등재
◆2008년 11월 7일
경주문화원(부설 향토문화연구소)에서 경순왕 어진에 관한 세미나 개최, 숭혜전 보존 어진 5본 중 4본이 황왕자가 가야산 입산시 해인사에 모봉한 “경순왕 어진”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우리나라 현존하는 최고의 어진임을 발표
(발표자 조철재 경주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소장)
- 우리나라 문화사적 회화사적으로 가치가 높다고 평가
◆2009년 7월 7일
법수사지 3층 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82호, 경북 성주 수륜면 소재)
⌜삼국유사⌟에 신라 경순왕의 계자인 김황(金湟 나주김씨의 비조)이 승려가 되어 법명을 범공이라 하고 법수사에 머물면서 해인사에 드나들며 산승으로 일생을 마쳤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 법수사지 안내판 해당 부분 -
안내판에 황왕자(나주김씨의 비조)의 입산 내용 등재
◆2010년 6월 12일
한국미술사학회 학술세미나(장소 :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어진’은 경순왕의 계자 황왕자 입산시 모봉하여 해인사에 봉안한 어진으로 해인사가 화재가 나자 영천 은해사로 이봉하고 있다가 1778년 경주 숭혜전에 봉안한 경순왕 어진이라고 발표
(발표자 : 경주대학교 정병모 박사)
◆2010년 7월 5일
법수사지 삼층석탑 보물1656호 승격 지정(안내문 내용 변경 없음)
◆2010년 7월 9일
나주김씨 중앙종친회 나주김씨 조경단(肇慶壇) 설단 공역 완료(계자 황왕자와 나주김씨 관조인 문하시중 운발 두 분의 영위(靈位) 모심
◆2010년 11월 7일
◦ 나주김씨 조경단과 가연비(佳緣碑.청주양씨와의 아름다운 인연을 기리는 비) 제막식 거행
◦ 제1회 나주김씨 조경단 시조제 거행
◆2010년 12월
전문 학술연구지인 강좌 “미술사(사단법인 한국미술사연구소, 한국불교미술사학회 발행) 35호”에 신라 경순왕 영정의 제작과 그 의의(정병모 경주대 교수 발표)에서 현재 경주 숭혜전에 봉안된 경순왕 어진은 황왕자가 해인사에 봉안 했다가 영천 은해사를 거쳐 1778년에 이봉한 것으로 현존 최고의 어진임을 정식으로 학계에 보고 발표
◆2013년 10월 15일
해인사 홈페이지에 황(湟)왕자 범공 스님이 되어 해인사에 머물다 종신 하였다는 기록과 경순황 어진을 봉안 했던 사실을 해인사지등에 기록 등재 요청
◆2013년 11월 4일
해인사 답변 : 범공스님에 대한 사실기록과 자료를 해인사 성보 박물관으로 보내 주면 모든 자료와 기록을 검토하여 이후 해인사지등 발간시에 참고 하겠다고 함.
◆2013년 11월 10일
해인사 성보 박물관 방문, 범공 선사에 대한 모든 기록일체를 전달해 줌
◆2016년 12월 1일
해인사 성보 박물관을 방문하여 해인사 백지현 학예실장과 같이 해인사에 전달 된 범공선사 자료의 해인사지등 기록등재에 대하여 심도있게 협의함
◆2017년 6월 5일
사단법인 범공선사숭선연구회가 서울특별시장으로 설립허가(제2017~150호) 됨
(지상 김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