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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金後)
성명(姓名) |
김후(金後) |
본관(本貫) |
상산(商山), 상주(尙州) | ||
시대(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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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
각부(覺夫) |
호(號) |
단구재(丹邱齋) |
이력(履歷) |
나무리(法勿)김씨 나무리(法勿)김씨는 현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 평지리 법물(法勿)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600여년을 세거(世居)해온 상산김씨(商山金氏)를 말한다.
김후(金後) = 김준(金浚) 1365(고려공민왕14)ㅡ1397(테조6) 고려말 두문동72현 초명은 김준(金浚)이고 자는 각부(覺夫) 호는 단구재(丹邱齋) 또는 은락재(隱樂齋) 전교규정(典敎糾正) 김경생(金慶生)의 아들이다. 난계 김덕배(蘭溪 金得培)에게 글을 배웠고 정포은(鄭圃隱)의 문인이다. 일찍이 급제하여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올랐고 1392년 4월 4일 포은선생이 우해당하자 시신을 수습하고 만시(輓詩)를 지어 통곡하니 내 평생 성격이 혜강을 닮아 남 조상 안한지가 오래 되었는데 오늘 당신을 곡하는 한없는 슬픔은 천고에 다시없는 그 충성심 때문이다 이어 7월에 고려가 운이 다하자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의 집에서 동지들과 회합 단사(壇祠)를 지내고 충신과 열사들이 신하로서 신조에 신복(臣僕)할 뜻이 없음을 결의 모두 숨을 곳을 찾아 헤어졌는데 이분들을 세칭 두문동72현(杜門洞72賢)이라고 한다. 1392년 단성 법물에 은둔(隱遁) 이름 김준(金浚)을 김후(金後)로 개명 1397년 고려절신임을 자손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기 가슴에 묻어둔 채 세상을 하직하니 향년이 겨우 33세였다. 분묘는 법물 고안동 신좌원인데 2003년 고총(古?)으로 경상남도 지정문화재 제251호로 지정되었다. 아들 김장(金張)은 세종 때 사간원좌정은이고 손자 김극용(金克用)은 사간원사간, 김이용(金利用)은 사헌부지평, 김정용(金貞用)은 승문원박사로 세칭 삼세오과(三世五科)라고도 한다. 대대로 벼슬이 이어져 잠영세가(簪纓世家)를 이루었고 특히 팔종형제(八從兄弟)가 문학으로 저명하여 향곡(鄕曲)에서 김씨팔군자(金氏八君子)라고 그 이름이 빛났다. 자손들은 약 3000호가 되는데 산청의 법물을 비롯하여 진주의 발산(鉢山), 창원의 석산(石山), 함안의 칠원(漆原), 김해의 생림(生林)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요약정리.입력 : 한국농촌공사 정보관리실 정보개발팀장 상산(商山) 김홍근(金泓根)
상산김씨 유래 상산김씨 허옹이 고려말의 정사가 어지러워지고, 오래 못갈 것을 예견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이곳에 터를 잡고 살다가 뒤에 단계로 옮겨 살았다. 허옹는 고려의 문신(文臣)으로 호는 우헌(迂軒)이며, 김해 허씨이다. 그는 충숙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헌납(헌納)이 되었다. 충혜왕 1년 (1331년)에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있던 한종유(韓宗愈)와 우대언(右代言)으로 있던 이군해(李君該)가 과거사무를 맡아 보면서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있던 최안직(崔安直)의 아들 경(璟)을 부정으로 급제 시켜주었으므로, 그는 정언(正言) 조겸(趙兼)과 정천유(鄭天濡)등과 상의하고 이 부정을 탄핵하여 과거의 재 실시를 주장했으나 허사로 돌아간 일이 있었다. 충숙왕이 다시 왕위에 오른 5년(1336년) 감찰장령(監察掌令) 자리에서 물러났다. 충숙왕 8년에는 랑사(郞舍)로 있으면서 앞서 부정으로 급제한바 있는 최경(崔璟)이 사령(辭令)을 줄 때 끝내 동의 서명(同意署名)을 거부하여 임금을 난처하게 만든 정직한 사람이다. 뒤에 전라판서에 올랐다. 그는 청렴하고 강직했던 문신으로 이름이 들난 사람이다. 그의 후손들이 지금 진주시 지수면(智水面) 승산(勝山)마을에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있다. 나무례의 동방(東坊)의 웃마을에 큰 집터가 있는데 그곳에서는 시(詩)를 읊었던 곳으로 가대(歌臺)와 놀이터인 무사(舞謝.舞臺)에 오르는 층계가 임진왜란의 뒤에까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옛 노인들을 통해 서로 전해 오기를 어느 성(姓) 바지의 대가집(大家) 부원군(府院君)이 살았던 집터인데, 그 집안의 살림살이는 왕후장상(王候裝相)이 부럽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집안의 젊은 부인이 지나치게 사치스러워 마을 나들이에도 가마를 타고 다닐 정도였다. 그 부인은 끝내 주색이 사로잡힌 망난이에게 홀려 부끄러움을 잊고 놀아나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때와 장소를 아랑곳 없이 음탕하게 놀아나니 집안은 끝내 패가망신하고 말았다. 주군이 집안을 그런 꼴로 다스렸으니 그 가문(家門)이 온전할 수가 있었겠는가. 다만 주인의 성은 전하지 않고 그 방탕했던 여인네의 성이 채(蔡)씨로 전해 오는데, 나는 그것을 의심한다. 부원군의 집이니 방탕한 그 여인네는 공주거나 옹주 였을 것이고 부원군의 성이 채씨일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그 집터가 오늘의 김인환(金麟煥)의 집 일원이며, 지금도 그때의 석재(石材)를 확인할 수 있다. 나무례에서 이런꼴로 패가망신한 부원군의 집안이 풍지박산이 나자 어떤 연고에서 인지 전라판서 우헌(迂軒) 허옹(許邕)이 정착하게 되고, 그가 단계리로 이사하면서 그의 사위인 전서 장강(張綱)이 이곳에서 살게 되었고 그는 무남독녀를 고려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이며 두문동 은사(杜門洞隱士) 인 상산(商山) 김후(金後)에게 시집 모냈고 장강이 죽자, 그의 사위인 김후가 눌러 살게되어 그 후손이 6백년 동안 이어 살고 있다. -내용 출처 : 근원이 깊은 나무례 마을의 천년역사 : 향토사학자 상산(商山) 김 상조 -요약정리.입력 : 한국농촌공사 정보관리실 정보개발팀장 상산(商山) 김홍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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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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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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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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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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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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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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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兄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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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文獻) |
1. 김후 집성촌을 찾아서 <2> 산청군 신등면 상산(商山) 김씨(金氏) '충절의 피' 600여년 이은 양반 고을 고려때 김후선생 첫 정착…현재 50가구 70여명 거주 조선말이후 유학자 끊임없이 배출 '법물金氏'로 통해 옛 학자들의 강학소 '인지재' 한때 고서만 1000여권 경남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 면소재지에서 합천군 가회면 쪽으로 난 지방도 1089호선을 따라 2㎞여를 가다보면 삼거리에 닿고 이곳에서 좌측 도로를 타고 4㎞가량 달리면 산청군 신등면 평지리 법물마을이 나타난다. 고려말 충신열사를 장식한 '두문동(杜門洞) 72현'에 이름을 올린 단구재 김후(1365~1397)선생이 처음으로 정착한 이후 지금까지 600여년간 상산(商山) 김씨들이 단일 성씨를 이루며 살아온 유서 깊은 곳이다. 지금도 이 마을엔 다른 성씨를 찾아볼 수 없다. 마을앞 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자 마자 500년 수령의 거대한 은행나무가 취재진을 맞이했다. 둘레가 4m를 넘는 은행나무 밑에는 주민 서너명이 둘러 앉아 한창 얘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우리 마을에서 젊은 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 담소를 나누던 일행중 김순희(여·71)씨에게 마을내 서열이 어떻게 되는지 묻자 즉각 되돌아온 답변. 그는 은행나무 옆 경로당에서 꺼내 온 배를 깎아내며 취재진에게 자리를 권했다. "마을에 사는 50여 가구 70여명 주민들 모두가 상산 김씨 제학공파 입니다. 이 곳에서 600여년을 살다 보니까 마을 이름을 따 법물 김씨로도 통하지요. 현재 촌수가 30여촌까지 벌어졌으나 여전히 한 집안이지요." 부산에서 사업을 하다 그만두고 5년 전부터 고향과 부산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는 김포환(75)씨는 김순희씨의 얘기를 듣고 있다가 휴대전화를 걸어 누군가를 불러냈다. "형님이 오라면 와야지. 정자나무 밑으로 퍼뜩 온나." 김포환씨는 요즘 고향에서 선조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집필하는 일을 한다면서 "두문동 72현 출신인 김후 선생은 고려 충신으로 유명하고 김준민 장군은 임진왜란때 나라에 충절을 바쳤지. 조선말기 이후부터는 법물마을에서 유학자가 끊임없이 배출돼 왔어"라고 자랑했다. 이야기가 한참 무르익는데 김포환씨가 호출한 이가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났다. 산청군 한시협회 회원인 김정환(69)씨 였다. 요즘 옛 대가들의 한시를 들여다 보면서 그윽한 작품 세계에 빠져들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다고 자신의 근황을 소개했다. "젊었을때 글을 많이 못 읽어 아쉬워하다가 늦게라도 학문에 매진해보고자 결심했지요. 협회에 자주 나가 습작을 하면서 정진하는 중 입니다." 그는 선비의 마을 후손답게 '도의정신앙양'(道義精神昻揚)이란 시제로 한시를 지어 보이며 한학에 대한 두터운 애정을 내보였다. 법물마을의 또 다른 지킴이로 보수 없이 산청군 문화관광 해설사로 일하는 김효영(53)씨를 빼놓을 수 없다. 지역 문화유산을 알리는데 열성을 다해 온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마당발이다.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돕고 해결해 주민들 사이에 인기가 높단다. 이 마을이 낳은 군의원 김민환(53)씨도 신망이 두텁다. 그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뛰면서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마을 뒤쪽에는 김후 선생의 재실인 은락재(隱樂齋)가 있다. 1892년에 준공됐는데 해마다 음력 10월 15일 선생의 묘제를 지내고 문중의 큰 행사도 치르는 곳이다. 여기서 1889~1910년 종요록 물천집 등 1400여장의 목판각 작업이 진행됐다. 법물마을에서 2㎞ 떨어진 산중턱에 자리잡은 인지재(仁智齋)는 조선 숙종 12년(1686)에 건립된 학자들의 강학소. 수차례의 변란으로 장서가 분실되는 등 애로를 겪어오다 상산 김씨 선조인 김이표(金履杓)공이 거금을 희사한 후 20년만에 고서 1000여권을 모아 도서관으로 거듭나기도 했다. 취재진이 법물마을을 한바퀴 돌고 나니 어느 새 점심때. 경로당에 들어서자 신김치를 곁들인 촌국수 점심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곧 주민들이 몰려들어 "삼촌 조카"하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유쾌한 웃음 소리가 경로당 담장을 넘어 동구밖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요약정리.입력 : 한국농촌공사 정보관리실 정보개발팀장 상산(商山) 김홍근(金泓根)
2. 김후(金後) 자양보(紫陽洑)의 유적(由迹) | 나무리 商山 김씨 2005/09/07 19:06 http://blog.naver.com/kilokim/100017136219 자양보(紫陽洑)의 유적(由迹) 고려말 두문동(杜門洞) 은사(隱士)인 상산(商山) 김씨 김후(金後)는 포은 정몽주의 수제자로서 포은 정몽주가 이방원(태종)에게 개성 선죽교에서 피살되자 시신을 거두어 예장(禮葬)하고 비탄에 빠져 벼슬을 헌신처럼 버리고 지리산으로 숨어 들어가니 세칭 두문동 현사(賢士)로 손꼽으며 고려 팔청(八淸)에 들었는데 처부전서(妻父典書) 장강공(張綱公)께서 살고 있는산청군 신등면 평지리 법물마을(나무리)로 옮겨 후진을 양성하면서 살았다. 그의 오세손(五世孫)이며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의 김돈(金敦)의 아들로서 김징(金澂)(號 :삼청당(三靑堂))이 조선 명종(明宗) 13년, 1558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진사(成均進士)가 되었다. 공(公)은 뛰어난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준수(俊秀)하여 조정(朝廷)에서 여러번 불러 부사직(副司直)을 임명하였으나 사양하고 지역사회 발전에 힘쓰다가 산청 덕산(德山)으로 출입하던 중 쇠만이(金萬伊) 지금의 산청군 단성면 자양리(紫陽里)의 광활한 옥토(沃土)가 물이 없어 방치되어 있는것을 보고 안따깝게 여겨 이곳을 개척키로 결심하고 수천석의 사재(私財)를 기우러 중태동(中台洞) 입구(지금의 자양보 위치) 십여리의 거리가 되는 쇠만이들까지 인수로(引水路)를 뚫어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목측(目測)을 하던 중 오육월(五六月) 삼복(三伏)인데도 인수로 팔곳따라 서리가 내려선을 그어 놨거늘 하늘이 인도(引導)하는 계시(啓示)라 하고 강을 막고 골짜길를 지르고 구렁을 메우고 언덕을 깍아 수로를 만들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4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전하고 있으니 어찌 이것이 우연이겠는가? 하늘이 내린 복(福)이리라. 수년을 거쳐 이처럼 거창한 공사를 마치니 그넓은 메마른 평야에 기름이 흘러 옥토로 변하니 지방인의 탄성은 말할 것도 없고 원근에서 관광차 찾아오는 사람들의 칭송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공(公)이 돌아가신 후에 지방인들이 그 공덕을 전하고자 인수로(引水路) 입구에 공적비를 세웠는데 세월의 이끼에 밀리고 환란의 자취에 시달려 흔적도 없어 졌으니 실로 애석한 일이다. 다만 그 자리에 경상남도내에서도 유일하게 가동보를 건립하여 군내에서 제일가는 수리안전답이 되었으면 지금도 천복(天福)을 받은 공은(公恩)을 잊지 못하여 자양마을에서는 매년 보제(洑祭)를 올리고 있다. -단성지(丹城誌), 진양지(晉陽誌),삼가읍지(三嘉邑誌) 참조 -글 : 산청군 단성면 자양리 이재규 자양보 보제(洑祭) : 한국농촌공사 산청지소장 상산(商山) 金泓根 (현 한국농촌공사 정보관리실 정보개발팀장)
3. 두문동 72현중의 한 분인 상산(商山) 金 後(후)가 은거처로 경남 산청군 신등면 평지리 법물마을(일명 : 나무리) 에 정착하였다. 그 후손들이 나무리 상산 김가로서 후세에 많은 업적을 남기고 있다. -자료제공 : 전)경상대학교 대학원장.명예교수,농학박사 상산(商山) 金昌효 -자료정리 :한국농촌공사 정보관리실 정보개발팀장 국민대학교 비지니스 IT전문대학원 박사과정 상산(商山) 金泓根
4. 김후(金後)(1372~1404) 본(本) 상산(商山) 각부(覺夫) 단구재(丹邱齋) 丹邱世家錄 국립 | ||||
기타(其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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