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일로 가는
[백두대간 5회차]
무룡고개-영취산-백운산-중재-지지터널
6월 19일(토) 대간5구간은 흐림 雲霧
기상청 일기예보에 의하면
오늘은 장마전선의 북상으로 전국에 많은 비가 오겠으며
특히 남부지방에는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 바람이 몰아 치겠다고 예보했습니다.
또한 '남아공'에서 열리고 있는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우리나라 태극전사들이
당당히 16강에 진출해 '우루과이'와 8강 진출을 위한 중요한 경기를 펼치는 날이기도 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올라간 월드컵 16강 경기도 응원해야하고, 특히 불순한 일기 예보를 참고한다면
상식적으로는 '백두대간' 산행에 나설수 없는 여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 우리는 길을 떠났습니다.
뭔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들처럼.......
[산행 개념도]
오늘은 지난 4구간의 날머리였던 "지지터널"앞에서 "중재"로 올라
"백운산"과 "영취산"을 정복하고 "무룡고개"로 내려 와야 합니다만,
기상청의 단호한 일기예보와 월드컵 응원을 위해 조기 귀경을 목표로 역순으로
"무룡고개"에서 "영취산, 백운산"을 지나 "중재"로 갑니다.
[무룡고개 에코브릿지] 10시 30분
"무룡고개 舞龍峙"
"백두대간"에서 "금남호남정맥"으로 가지를 뻗는 마루금이 지나는 "무룡고개"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과 번암면을 가르고, "금강"과 "섬진강"의 물줄기가 서로 나뉘어
갈길을 결정 짓는 "水界"인 "무룡고개 舞龍峙"입니다.
해발 900m정도되는 높이에 있으니 雲霧가 그 모습을 더욱 신비롭게 하며,
에코 브릿지 속에서 금방이라도 龍이 뛰쳐나와 솟아 오르며, 춤을 출듯한 "舞龍峙"입니다.
[단체기념사진]
앞서 말씀 드린대로 오늘 같은 날에는 집에서 푹 쉬면서, 월드컵 응원하며,
주룩주룩 내리는 장맛비를 창가에서 즐기며,
집사람이 부쳐주는 빈대떡에 한잔하는 편이 훨씬 좋을텐데.....
뭐 먹고 살일 있다고 또 이렇게 산삐알에 섯습니까? ㅎ
"舞龍峙" 에코브릿지에서 뛰쳐 나온건 龍이 아니고 '거인산악회 대간 14기'였군요 ㅎ
['무룡고개'에서 '백운산'까지 구글어스]
1. 무룡고개(10시35분 출발)-(18분)-영취산(10시53분)-(1시간35분)-백운산(12시 28분)
이해하기 쉽죠?
[무룡고개 휴게소] 10시 35분
'무룡고개' 산행 들머리 옆에는 휴게소가 있어 편리합니다.
산행은 휴게소 윗쪽으로 올라가며 시작 됩니다.
약간의 안개비 정도가 그것도 잠시 내렸고 기상청의 예보와는 완전히 거리가 멀었습니다.
어서 빨리 '파란문'을 기상청장으로 보내야 한다니까요~~ㅠㅠ
['영취산' 오르는 길]
'무룡고개'에서 "영취산"까지는 매우 가깝습니다.
하지만 제법 된비알입니다.
'무룡고개'가 이미 해발 900m쯤 됨으로 "영취산"이 비록 1,075.6m 높이라 하더라도
오르는데 아무른 문제가 없습니다. 18분만에 영취산에 오릅니다.
[영취산 정상] 10시 53분
"영취산 靈鷲山" 1,075.6m 높이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정상은 가까웠습니다.
"영취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은 전국에 여러곳 있습니다.
그 대표 "영취산"이 '낙동정맥'에 있는 "통도사"의 뒷산인 "영취산(영축산-취서산)"입니다.
고대 인도에서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가 불법을 설파하던 산이 "영축산-영취산"이었습니다.
[영취산 정상석] [영취산 이정표]
"영취산 靈鷲山" 1,075.6m
"취, 독수리鷲"인데 인도의 그 '영취산(영축산)'에 독수리가 많았다고 합니다.
왜? 그 산에 독수리가 많았을까?
그리고 부처는 왜? 하필이면 독수리가 많은 그 산에서 불법을 설파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산은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갖다 버리는 곳이었습니다.
시체를 가장 좋아하는 새가 독수리이지요? 때거지로 모여 살며 시체 오기를 기다리는 독수리들..
종교는 인간의 최대 약점인 "죽음"을 미끼로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부처는 "인간의 허망한 죽음"이 있는 곳에서 불법을 전파하는게 가장 효과가 있기에
시체를 버리는 산에 올라 불법을 전파 한것이었습니다
그 산이 바로 고대 인도의 마가다국에 있는 독수리가 많은 영취산, 다른 말로 영축산인데
자장율사가 부처의 진신사리를 가지고와 '통도사'에 안치 할때에 통도사의 뒷산의 이름까지
"영취산-영축산"으로 명명하니 전국으로 퍼져 절간이 있는 곳엔 "영취산-영축산"이라는
이름이 많아지게 된것이라 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파란문의 산행기 "낙동정맥19구간"을 참고 하세요
[영취산 정상 기념사진]
'무룡고개'에서 워낙 가까우니 '영취산' 정상에서 모두 만났습니다.
남는건 증명사진 뿐이니 만나면 우선 찍습니다. ㅎㅎ
[선바위고개 이정표] 11시 8분
'영취산' 정상에서 다소 가파른 내리막을 잠깐 400m쯤 내려가면 "선바위고개"를 만납니다
"선바위"는 일반적으로 바위가 눕지않고 서 있어서 "서 있는 바위"라는 뜻으로
"선바위", 즉 한자로 "立石"이라고 합니다.
다만, 서울 '인왕산'에 있는 "선바위"는 "禪바위"입니다.
'무학대사'와 '삼봉 정도전'이 그 "선바위"를 '한양성'에 포함시킬 것인지를 놓고
옥신각신 했습죠. 불교의 무학대사와 유교의 정도전이 알력 싸움을 한것으로 유명합니다
[헬기장] [산죽군락지대]
헬기장 하나를 지나고 "산죽군락지대"를 지나 갑니다.
구름과 안개 때문에 주변 조망은 전혀 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산행기도 아주 간단합니다.
눈에 뵈는게 없으니 산행기를 쓸만한 건덕지도 없어서 저도 이번엔 편합니다. ㅎㅎ
그리고 산행길도 아주 단순해서 길안내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백운산 정상으로 오르는 된비알]
'무룡고개'에서 약2시간 정도 걸려 '백운산'으로 오릅니다.
정상부근에서 약간의 급경사가 있을 뿐입니다.
[백운산 정상] 12시 28분
"백운산 白雲山"이 이름에 걸맞게 구름 속에서 나타납니다.
안개 속의 풍경을 보았답니다
정지 되어버린 어촌의 마지막 숨이 넘어가듯...
소울음 소리가 왜 들렸는지 알았답니다
우음도의 마지막 장례식을 보는 듯...
페넬로페의 바이올린이 숨죽여 울던 날
머리 한가득 가녀린 한 사람의 그림자만을 채워 돌아오던 날...
안개 속의 풍경 - 피안의 새
[백운산 정상]
전국에서 백운산은 이곳 함양과 장수에 걸쳐있는 '백두대간'의 백운산(1,278.6m),
'호남정맥'의 광양 백운산(1,218m), 원주 백운산(1,087m), '한북정맥'의 포천 백운산(904m),
동강 백운산(883m)정도가 알려 져 있지만 전국적으로 큰산만 약 20여개가 있다고 합니다.
작은 산까지 합치면 통계 내기가 쉽지 않을 듯....
이곳 함양의 백두대간 '백운산'이 전국의 백운산 중에서 대빵 "백운산"입니다.
[백운산 정상석]
이곳에서 보이는 지리산과 백두대간 산줄기가 장관인데.....
白雲 속에 들어와 있으니 갑갑하기만 했습니다.
다행인 것은 기상청의 일기예보는 완전히 빗나갔다는 것입니다.
산행 내내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바람은 전혀 없었습니다.
白雲과 白霧만이 시야를 가렸을 뿐.....
[백운산 정상에서 점심식사]
'백운산' 정상 헬기장에서 점심 식사를 약40분간 하고.....
백운산 구름 속에서 먹는 식사 메뉴가 뭔지 아세요?
"오리무중탕 五里霧中湯"
'오리'가 들어 있냐구요? '오리'가 안개 속으로 '五里'나 달아나 잡으러 다니다 볼일 다 봤죠.
'오리'는 없었지만, 서로 나눠 먹는 맛있는 情이 가득 들어 있었답니다.
지금 배경 음악으로 흐르는 노래는 모두 다 아시는 "사랑의 기쁨"입니다.
그 유명한 그리이스 출신의 세계적 가수 "나나무스꾸리 Nana Mouskouri"가
사랑이 기쁨인지..사랑이 슬픔인지를 애절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이 노래를 선곡한 이유는 조금 있다가 방문하는 "논개 생가"에서 자연히 알게 됩니다.
['백운산'에서 중재'까지 구글어스]
2.백운산-(1시간)-중고개재-(30분)-중재-(15분)-지지터널앞
오늘 원래 계획대로 중재에서 백운산으로 올랐다면 조금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상청의 도움과 월드컵 16강전이라는 핑개로 아주 쉽게 5차 산행을 합니다. ㅎ
구글어스를 보세요. 중재에서 백운산으로 올라 갔다면 좀 짭짤했겠죠? ㅎㅎ
['중재'로 하산]
꺼꾸로 올라 왔다면 좀 힘들었겠다고 생각하며 눌루랄라 하산합니다.
이름 모를 아름다운 여인으로부터 뭔 선물을 하나 받은 것처럼 아주 즐겁고 가뿐한 하산길...ㅎ
[중고개재] 2시 2분
장수군 장계에서 번암면으로 이어지는 "지지계곡" 도로가 뚤리면서 "중고개재"는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세월 속으로 뭍혀져 갑니다.
['중재'로 가는 길]
울창한 숲이라 어두컴컴한 길을 걷기도 하고.....
곳곳에 멧돼지들이 파헤쳐놓은 이랑을 보며 약간의 무서움도 느끼며....
이번 산행으로 판소리의 고장 남원시 운봉-아영면을 완전히 벗어 납니다.
그냥 흥부-놀부의 고장을 떠나기가 아쉬워 가상으로 편지 한장 씁니다.
"흥부 마눌"이 저승에서 여러분들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
심심하신 분들만 읽어 보세요. 바쁘신 분들은 그냥 건너 뛰시고....
씰데없는 얘기를 해서 읽느라 시간 낭비했다고 후회 마시고....
['중재'로 가는 길]
저승에서 보내는 흥부 와이프의 편지
지금도 첩첩산중인 백두대간 지리산 산삐알, 그당시엔 얼마나 산골이었겠습니까?
그곳에서 자란 제가 그 당시 핵교를 다녔겠습니까? 서당을 다녔겠습니까?
한마디로 아무것도 모르는 '일자무식'인 제가 이렇게 공부도 많이하고 '흥부전'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여러분께 지나간 제 가정사 얘길할려니 쑥스럽기 짝이 없군요.
아무리 촌년이었어도 저도 한때는 꿈많은 소녀였답니다. 말똥 굴러 가는 것만 봐도 까르르 웃고..
아영면 성리에서는 그래도 이쁘다고 동네 총각들이 군침을 많이 흘렸다구요
에휴~ 어쩌다가 찢어지게 가난한 연씨집에 시집와서 하는 일없이 개기다 보니
대책없이 올망졸망 애들만 많이 낳아서 식구수만 불려 놓았답니다.
차라리 요즘 같으면 국가로 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을 텐데 그때는 그런것도 없던 때였죠.
집도 기차길옆 오막살이가 아닌 들판의 오막살이라 자다가 시끄러워 깰일도 없었는데....
애들 아부지...
그러니까 우리 흥부씨가 가진 재물은 없었지만 그놈의 정력은 무지 쎈편이었습니다
흥부씨는 그 당시에 빽이 있었겠어요..돈이라도 많았겠어요.
빽, 돈은 한푼 없었으니 어디 가서 바람 필곳이 있어야지요.
그러니 죽으나 사나 일편단심 저하고만 놀수 밖에 없었고.... 놀면 그냥 노나요?
꼭 내 치마 밑에 들어와 놀다 보니 본의 아니게 애들만 무지 많이 생겨 난것입니다
뭐 제가 낳고 싶어 낳은건 절대 아니란건 모두 아시죠?
어떤 땐 먹을거리가 없어서 물만 먹어서 사족..아니 오족이 힘이 없었는데도
긴긴밤 별다르게 소일할 오락거리가 없다보니 하는게 그것밖에...에휴~ㅎㅎ....
다리 부러진 제비 사연도 이참에 다 털어놓지요
그날도 흥부씨가 마루에서 먹을건 없고, 놀거리도 없어
멀거니 제 치마자락만 붙들고 자꾸 방에 들어가자 하는걸
제가 또 애 생길까봐 참아라하고 있든차, 그 다리 다친 제비가 눈에 뜨인겁니다.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 그 제비를 가만 두겠습니까?
우리들이 한거라곤 빨간 아까징끼 조금 발라주고 1회용 대일밴드 붙여준거 밖에 없는데 ....
그 제비가 어디가서 그런 신통방통한 박씨를 물어왔나 모르겠어요.
근데 사실은 그거 순 지어낸거랍니다.
박 속에서 그렇게 금은보화가 쏟아져 나온다면 뒷집의 땡칠이가 들어도 웃습니다.
그런 소린 우리 횐님들 국민학교 댕길때나 통한거지 요즘 애들한테는 씨알도 않먹힙니다
사실은 제가 먹을 거를 구해 오라고 바가지를 박박 긁었더니, 놀부형 한테 가서는 얻어터지고
울면서 복성이재 쪽으로 올라가다가 성질이 나 돌뿌리를 걷어 찼는데, 그 돌뿌리가 튕겨 나와
자세히 보았더니 그 돌뿌리가 금덩어리였던 거에요. 그래서 부자가 된거구요
지금도 복성이재 근처에 "사금모퉁이"라고 있는데, 그 이후 사금꾼들이 우리 흥부씨가 캐고
남은 금을 채취하던 곳이에요. 이건 진짜에요.
그런데 흥부 얘기가 금은보화를 터트리는 대박나는 이야기-'해피엔딩'으로 끝나고
그 이후의 뒷 얘기가 왜 없는줄 아십니까?
제가 더 이상 뭘 숨기겠어요. 내친김에 다 얘길 해버릴께요.
사실은 돈 생기니까 흥부씨가 자꾸 옆눈을 파는기라요
돈 생기면 세상 남자들 하는 꼬라지 다 똑같지요? 똠방각하가 되어...
룸싸롱 가는건 기본이고 심지어 야타족 되어 원조교제까지....흑흑.
그래 니죽고 나 살자고 눈만뜨면 머리터지게 쌈하다가 내린 결정은
"서로의 성격이 안맞아 못살겠다. 깨끗이 정리하자"
고로 저도 위자료 조로 한 살림 받아서 빠이빠이 한겁니다.
그러니 Happy-Ending이 아니고 Unhappy-Ending이 됐는데 우째 뒷 얘기가 있겠심니까?
사건이 그렇고 그리 된거랍니다.
물론 저도 그 돈받아서 귀부인 스타일로 얼굴 확 뜯어고쳐서 연하남자 데리고
우짜고저짜고 하다가 돈날리고 뭐날리고 날릴거 다 날렸지요.
그래가 챙피스러워서 걍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겁니다.
돈 있을때 얼굴을 너무 뜯어 고쳤더니 지옥에서 염라대왕도 저를 몬 알아보고 ..
나중에 염라대왕이 신경질 내더라구요. 좀 적당히 뜯어 고쳤어야 알아보지....라며 ㅎㅎ
제가 이거 쓰는 이유는 평소에 돈 있다고 칠랑팔랑 쓰지말고 한푼이라도 아껴서
노후에 등따스고 배부르시라고 간곡히 충고 드리는겁니다.
'다시는 나같은 불행한 군인이 없기를..' 어디서 듣던 소리...인용해서
다시는 나같은 여자가 이땅에 있어선 안되겠지요?
횐님들 처럼 열심히 산에 다녀 건강 챙기시고, 씰대없이 바람피며 다니지 마시고...
모두모두 열심히 노력해서 부~우자 되셔요.
안녕
저승에서 흥부 와이프 드림
P.S. '파란문'이 쓴 글 절대 아니고 '흥부 와이프'가 쓴 글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중재] 2시 30분
간단하게 "중재"에 도착합니다.
지난 4회차 날머리였기에 이미 와 본적이 있어 친근감이 듭니다.
['중재'에서 '지지터널'로 가는 길]
'중재'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 '지지터널'앞으로 바로 내려 갑니다.
['지지계곡'에서 알탕] 2시 55분
지난번에 알탕을 못한 횐님들이 이번엔 알탕 준비를 단단히 해 왔나봅니다.
유명한 "지지계곡"에서의 알탕은 앞으로는 경험하지 못할지도 모르기에
대부분의 횐님들이 물속으로 풍덩 풍덩 뛰어 들었습니다.
와~우 시원해!~
['지지터널' 앞에서 뒷풀이]
오늘은 "주형팀"이 뒷풀이를 준비해 주었는데....
남원 동동주 두말과 돼지고기등 푸짐한 안주로 참가한 횐님들을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주형팀" 福 많이 받을꺼에유~
1. 총산행 도상거리 : 10km
2. 총산행시간 : 약4시간 30분
['논개' 생가터] 4시 15분
'지지터널' 앞에서 약 1시간 정도 뒷풀이를 하고
'무룡고개' 바로 아래에 있는 "논개 생가"를 잠시 들렸습니다.
언제 또 다시 여길 오겠습니까
입구에는 "의암주논개생가지"라고 웅장한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논개' 생가터 정문]
"논개"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자세히 아시는 분들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대략 "임진왜란 때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을 끌어 안고 죽은 여자"정도 일겁니다.
그리고 "애국심이 강한 충절의 여자"로 국민적 추앙까지 받고 있다는 정도?
이 여자가 어떤 여자였기에 이렇게 어마어마한 생가터를 복원해 놓고 기념관까지 차려 놨을까?
요즘 지자체들이 관광 돈벌이를 위해서 이런 저런 것들을 관광화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보고 지나가야 겠습니다.
"논개"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나와 있는 자료가 거의 없습니다.
네이버 '논개' 정보에는 "성은 주(朱). 전북 장수(長水) 출생.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며, 그 밖의 자세한 성장과정은 알 수가 없다."고 기록되 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본 적장을 안고 물속에 뛰어들었다`는 역사기록 때문에 유명한 논개.
그러나 그의 이전 기록은 베일에 쌓여있습니다.
`기생`이라고 하는가 하면 최경회 장군의 `소실`이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안내문]
이곳 공식적 안내문에는 '주 논개 朱論介'는 "남편과 나라의 원수를 갚기위해 기생으로 가장"하여
왜군 승전연에 참석 왜장 '모곡촌육조毛谷村六助'를 진주 남강변 현재의 의암이라고 불리는
바위로 유인하여 함께 투신 순국한 겨래의 여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안내문 대로라면 "안중근의사"보다도 더 위대하고 훌륭한 여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기생으로 가장했으니 실제 기생도 아니었다는 것이니 품위 단정한 여인이
남편과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며 순국했다는 것이 됩니다.
[정문 "義娘樓" 안으로 보이는 '논개' 石像]
저는 '장수군'과 '진주시'가 홍보하고 있는 내용의 논개 이야기가 실제 역사 기록 속에
오로지 기록에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알리고 있는 것인지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실체에 더 가까이 가보려고 짧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쓰는 글은 "주 논개 朱論介"를 폄하하려고 쓰는 글은 절대 아님을 미리 밝혀둡니다
역사적 인물 '주논개'의 실체적 사실 여부는 아직도 논쟁꺼리로 남아 있음을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논개' 원경]
'논개'가 당시 장수현감이었던 "최경회'의 세칸드였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향토사학자 '추경화'씨는 "최경회가 선조10년(1577)에 장수 현감이었을 때 논개는 4세 어린아이였다"며
`최경회 소실설`은 납득 할수 없다고 합니다.
또한 향토사학자 '조중화'씨 역시
'임진왜란 2차 진주성 전투'로 진주성이 함락 될때에 "최경회"가 "경상 우병사"로 있었다고 하는데
진주성 함락 당시 '경상 우병사'는 '조대곤'으로 밝혀졌다며 `전투 당시 논개가 경상 우병사 '최경회`와
함께 있었다는 내용이 맞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논개' 앞뒷면]
"논개"에 대해 역사 속에 확실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유몽인 柳夢寅'이 쓴 '어우야담 於于野談'입니다. 물론 그 이외에도 몇 있습니다
'유몽인'은 조선 선조 때에 학자이며 외교관으로도 이름을 떨쳤던 인물입니다.
'어우 於于'는 '유몽인'의 호입니다. 그 글을 소개해 드림니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만력 계사년에 김천일이 거느린 의병이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에 맞서 싸웠다.
마침내 성이 짓밟히자 군사는 패하고 백성은 모두 죽었다.
논개는 얼굴과 매무새를 아리땁게 꾸미고 촉석루 아래 우뚝한 바위 위에 있었으니,
바위 밑은 바로 깊은 강물 가운데로 떨어지는 곳이었다.
여러 왜병들이 바라보고 좋아했지만 모두들 감히 가까이 오지는 못했는데,
한 장수가 홀로 나서서 다가왔다.
논개가 웃으면서 맞이하니 왜장도 그를 꾀면서 끌어당겼다.
이때 논개는 드디어 왜장을 끌어안고 물속으로 몸을 던져 함께 죽었다.
임진왜란 때에 관기로서 왜적을 만나 욕을 보지 않으려고 죽은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논개 한 사람뿐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이름을 거의 잃어버렸다.
저들 관기는 음탕한 창녀들이라 '곧고 맵다[貞烈]'고 일컬을 수가 없다지만
죽는 것을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겨 왜적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았으니
또한 거룩한 임금의 교화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의 하나가 아닌가?
차마 나라를 저버리면서 왜적을 따르지 않았으니 충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참으로 서글픈 일이로다
[논개]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에서는 "논개"를 어떤 여인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논개'가 끌어 안고 투신 순절했다는 그 남자, 왜장은 누구인가!
그가 바로 임진왜란 때에 '일본군의 2군 사령관'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 가등청정"의 핵심 副將인
"게야무라 로쿠스케 毛谷村文助"였습니다.
["게야무라 로쿠스케"영정]
현재 일본 사당에 걸려있는 "게야무라 로쿠스케"영정이라는데 이 쌔끼 인상 더럽지요? ㅎㅎ
에구~ "신의 칼"이라는 별명을 가진 놈이 한 기생의 꼬임에 강물에 떨어져 죽어? ...ㅉㅉ
70년대 초에 은퇴한 일본인 건축설계사 "우에쓰카 하쿠유"는 '후쿠오카현 다가와시' 근처
'히꼬산' 자기 소유의 밭을 갈다가 오래된 묘비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비석에는 임진왜란때 이름을 떨친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이야기가 쓰여있었답니다.
'신의 칼'이란 별명을 가진 "게야무라 로쿠스케"는
임란때 쇼군으로 승승장구한 전설적인 사무라이였답니다.
['우에쓰카'씨가 발견한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비석]
또한 그 지방 지인들은 "논개"가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꾀여 끌어 안고 투신한것이 아니라,
촉석루에서 자축연회가 벌어 지고 있을 때 둘이서 몰래 나와 의암 위에서 정사를 벌이다
너무 열열한 나머지 실족했다고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김태훈씨가 쓴 `이순신의 두 얼굴`(2004. 창해)이라는 책에 따르면
많은 일본인들은 논개가 일본 장수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연인"으로
일본까지 따라가서 자식을 낳고 산 줄로 알고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저자 김태훈씨는 "1910년 이후 소위 일본의 극우 학자들이 '가토 기요마사'의 영웅성을 부각하다 보니
그의 부장이었던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치욕스런 부분을 왜곡한 결과"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현재 일본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고향 후쿠오카에서는 "논개"가 '쌕스의 심볼"로
여겨지며,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들이 '부부금실을 좋게 해 주는 여인'으로 추앙 받으며
모셔지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일부 인간들의 행동이겠지요. 쪽바리들의 언행이 대게 이렇지요?
[논개 생가]
제가 가장 닮고 싶어하는 역사 속의 인물이 누구 인지 아세요? 다산 정약용선생입니다.
그가 쓴 "진주 의기사기 晉州義妓祠記"도 인용해 드리니 참고 하시기 바람니다.
부녀자들의 성품은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
그러나 하품(下品)인 사람은 분독(忿毒)을 이기지 못하여 울적하여 죽고
상품(上品)인 사람은 의로워서 그 몸이 더럽혀지고 욕을 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여 죽는다.
그가 죽었을 때 모두들 절개가 바르다고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자기 혼자 죽는 데 그친다.
창기(娼妓)와 같은 부류는 말할 나위도 없다.
어려서부터 풍류스럽고 음탕한 일과 정(情)을 옮기고 바꾸는 일에 길들여졌으므로,
그들의 성품은 흘러다니고 한군데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 또한 남자들은 모두 남편이라고 생각한다.
부부(夫婦)의 예에서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군신(君臣)의 의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로부터 전쟁터에서 멋대로 미녀(美女)를 약탈한 경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
죽어서 절개를 세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옛날에 왜구(倭寇)가 진주(晉州)를 함락하였을 때 의로운 기생이 있었으니,
그녀는 왜장(倭將)을 꾀어 강 가운데 있는 돌 위에서 마주 춤을 추다가 춤이 한창 무르익어 갈 즈음에
그를 껴안고 강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이곳이 그녀의 의절(義節)을 기리는 사(祠)이다.
아, 어찌 열렬한 현부인이 아니랴.
['논개' 생가]
그 옛날 두메산골 長水 계곡에 있던, 가난해서 팔려 가기도 했던 '논개의 집'으로는
엄청나게 큰 대궐같은 생가입니다.
['논개' 생가 우물과 장독대]
지금 저보고 와서 살라고 하면 얼릉 와서 살겠습니다.
물론 관광객들을 위해 전시용으로 만들어 놨겠지만.....
[논개 석상 앞에 있는 "논개 기념관"]
'논개' 석상 앞으로 장안산이 구름 속에 살짝 비치며
좌측으로 기념관이 제법 큰 규모로 건립되 있습니다.
[논개 기념관 입구]
'논개 기념관' 門에는 '논개 영정'이 먼저 관람객들을 맞이 합니다. 친절도 하셔...
'논개 영정'은 얘깃꺼리가 많습니다.
진주 촉석루 "의기사 義妓祠"에 봉안되 있던 '논개 영정"을 시민 단체들이 강제 철거했지요.
철거 이유가 "친일파 매국노 '以堂 김은호 화백'이 그린 영정"이라는 것이었죠
검경찰은 위법행위라고 시민단체를 기소하여 법정으로 가 재판을 받았는데 대법원까지 가는
치열한 싸움을 했지만, 법원은 검경찰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대법원 판결 주내용은
"주거 침입등의 유죄를 인정한다. 정치적 역사적 사안은 법원이 판결할수 없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지금 보시는 국가가 인정하는 표준 영정을 새로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충남대 회화과 윤여환 교수가 다시 그린 "논개 표준영정"이 보입니다.
사실 검경찰이 법원으로 사건을 송치 할것이 아니라 사회에 공론으로 붙였어야했던 사안이라
생각됩니다. 공론으로 붙이면 뻔한 결과를 알면서도 법원으로 간 이유를..에구 대단한 우리나라 검경찰
'以堂 김은호 화백'은 조선 왕실 최후의 "어용화사 御用畵師"였지요.
한국화 미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엄청난 인물입니다.
그가 그린 인물화 중에는 '고종','순종'의 초상화가 있고,'신사임당','이율곡','이순신'.
'논개'등이 있으며 창덕궁 대조전 벽화제작에 참여한 미술계에서는 빼놓을수 없는 인물입니다.
현재 오만원권 지폐에 그려진 신사임당도....
하지만 그는 1930년대 후반 일본의 전시파쇼체제가 강화되자 1937년 친일미술가단체인 '단광회'와
1942년 '조선남화연맹전','반도총후미술전'등에 참여하며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한 반민족행위자였습니다
대표적 친일 작품이 "금차봉납도 金釵奉納圖"라는 그림인데, 우리나라 고위직 사모님들의
친일단체인 '애국금차회'가 금비녀를 모아 일본 '미나미 총독'에게 전쟁비용으로 쓰라고 바치는 광경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런 뇨자들 IMF때엔 반돈짜리 애기 돌반지 하나는 물론 십원 한장 안내놓았겠지요
그 '애국금차회'의 간사를 맡았던 여자가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당시 젊은 '김활란'친일파였습니다.
[논개 영정]
충남대 회화과 윤여환 교수가 그린 "논개 표준영정"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논개의 순국]
.............당시 19살 기생이었던 논개가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순국하는 장면을 모형으로 만들어 놨습니다요
[논개의 일생]
..........
[귀경길의 고속도로] [시내버스로 귀가] 7시 50분
기상청의 일기예보는 또 엄청난 오보를 남겼습니다
돌아 오는 길에서도 비 구경은 할수 없었습니다
'논개'의 순절을 생각해 보며 '나나무스꾸리'가 부른 '사랑의 기쁨'을 듣습니다.
진정으로 국가와 민족을 사랑해서 '사랑의 기쁨'으로 순절했으리라 믿으며
당일로 가는 백두대간 5회차 산행을 마칩니다.
사랑의 기쁨은 잠시 한순간 뿐
사랑의 슬픔은 일생동안 지속됩니다.
당신은 냉정히 다른 여자를 위해 날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또다른 연인을 찾아 당신을 떠났죠.
사랑의 기쁨은 잠시 한순간 뿐
사랑의 슬픔은 일생을 지속합니다.
이 강물이 초원을 따라 시냇물로 조용히 흘러가는 한
그처럼 당신을 사랑할거라고..
그녀는 되풀이하며 말했죠.
강물은 지금도 흐르고 있건만 그녀는 변해버렸습니다.
사랑의 기쁨은 잠시 한순간
사랑의 슬픔은 일생동안 지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