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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社의 1/72 F-101 B "부두" 전투기 박스 커버)
(F-101 부두(Voodoo) 전투기)
맥도널 에어크래프트社 (McDonnell Aircraft Corp.)는 냉전 시대 최고의 걸작 전폭기 중에 하나로써 평가되는 F-4 팬텀 II 의 제조社로써 명성을 날렸고 1967년 더글러스 에어크래프트社와 합병하여 "맥도널 더글러스"社로 거듭 나게 된 후에는 F-15 이글과 F/A-18 호넷의 제조社로써 현재까지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F4 팬텀 II 전폭기 - 맥도널 社가 개발한 미국 전투기 역사에 길이
남게 되는 걸작 중에 걸작입니다.)
(맥도널 더글러스 社의 F-15 이글 전폭기, 1972년에 최초로 비행을 했던
무려 40년이 넘는 이 기체에 스텔스 기능을 추가한 F-15SE가 대한민국
공군의 차세대 전투기로 선정될 뻔 할 정도로 아직도 1선에서 물러나지
않고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명작입니다.)
바로 이 맥도널 社가 개발한 센츄리 시리즈의 두번째 주자 F-101 부두 전투기가 오늘 소개해드릴 기종입니다.
냉전 기간 중에 미공군의 최고 사령부는 몇개로 나뉘어서 운영되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운영되어야 한다는 사상은 2차대전 중에 미공군의 전신인 미육군 전투 항공대 (USAAF)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지만 이 복잡한 전술/전략 결정 구조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보다 그저 간단히 다음과 같이 개념만 잡도록 하겠습니다.
1.전략 공군 사령부 (Strategic Air Command - SAC)
주로 지상 기지를 근거로 발진하는 핵 무장 폭격기들과 대륙간 핵 탄두 미사일의 운영을 중심으로한 전술/전략을 결정하는 최상위 조직입니다. (1992년에 폐지)
2.전술 공군 사령부 (Tactical Air Command : TAC)
미공군 내에 공격과 방어의 전술/전략의 전체적인 조화있는 운영을 위한 최상위 조직입니다. 사실 SAC라는 사령부 위에 "옥상옥"도 아니면서 어정쩡한 위치에 있는 조직이었습니다. (TAC와 마찬가지로 1992년에 폐지)
이런 불합리한 명령 체계는 오늘 소개하는 F-101 부두와 같은 냉전 시대에 개발된 제트 전투기들에 일관성 없는 개발 방향과 주먹구구식의 용도 변경등을 초래하는 비효율성을 보이게 됩니다. 덕분에 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50년대부터 F-4 팬텀 II 를 포함한 안정감있는 절대 강자들이 미공군 전력의 중심을 잡아주게 된 1960년대 중반 이전까지 약 15년간에 미공군은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기종들을 운용하였고 많은 기종들이 채 10년도 안되는 활동 기간을 끝으로 후속 기종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센츄리 시리즈라고 부르는 일련의 기종들도 어쩌면 F-4 팬텀 II 부터 그 이후 걸작들의 탄생을 위한 시행착오의 과정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두 역시 이런 배경에서 그 활동 이력이 비교적 간단한 편입니다. 우선 1960년대 초 핵 전쟁 발발 직전까지 이르렀던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정찰기로써 크게 공헌을 하였습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 - 1962년 10월 미국이 터키에 미사일을
배치한 것에 대항하여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자
미국은 이를 소련의 "선전포고"를 받아들이고 양국이 전쟁 발발
직전까지 대립하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벌어지게 되지만 최종 순간에
양국이 타협을 이루게 되었던 사건입니다. 사진은 당시 군 수뇌부와
회의 중인 미합중국 대통령 존 F. 케네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사태가 발발했을 때 미국은 당시 최첨단 정찰기
U2와 부두 F-101A를 사용하여 항공 정찰을 하였습니다. )
이어서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에 다른 기종들처럼 미그 킬러로 명성을 날리거나, 정글을 불바다로 만드는 전폭기로써 위용을 자랑하지는 못했지만 정찰 임무 전용기로써 나름 자기 몫을 단단히 하였습니다.
개발의 시작
(제2차 세계대전 미국이 자랑하던 최강의 전투기 P-51 무스탕)
2차대전이 끝나고 1년이 지난 1946년 미육군 전투 항공대 (미공군의 전신)은 전쟁 기간 중에 B-17이나 B-24와 같은 폭격기들을 호위해주었던 P-51 무스탕 전투기와 같이 이제 핵 무장을 한 새로운 세대의 폭격기들을 호위해줄 수 있는 믿음직한 전투기가 필요하였습니다. 즉시 미국에서 내놓으라 하는 항공기 제작 회사들에게 이런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소위 침투 전용 전투기 (Penetration Fighter)의 개발을 요구하고 최종 업체를 선정하기 위한 일종의 "경합"을 실시하게 됩니다. 1947년 2월에 맥도널 社가 제작한 시제품 "XF-88 부두"가 선정되었는데 이때 최초의 시험용 기체는 두개의 웨스팅 하우스 製 XJ134-WE-13 제트 터보 엔진을 사용하였습니다. (여기서 2차대전 직후에 개발이 끝난 일종의 선구자 격의 기종들은 F-86 세이버까지 대부분이 1개의 제트 엔진을 사용하는 것에 비해서 "침투용 전투기" 개념에서 USAAF가 보다 강력한 파워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1947년 맥도널 社의 XF88 부두 시제기는 록히드 社와 노스 아메리칸 社
와 같은 쟁쟁한 업체들의 시제기들을 제치고 선정되었습니다.)
최초의 시험 비행 결과 바다 해상에서 시속 1,032km의 최고 속도를 냈는데 이것은 두개의 제트 엔진으로 구동하는 기체로써는 실망스러운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맥도널 社 개발팀은 엔진 출력 향상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속도를 상승시켰고 동시에 이륙 거리도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미공군이 최강이라고 자랑하던 B-29 와 같은 폭격기들이 소련제 미그-15와 같은 제트 전투기의 공격에 기대 이상으로 무력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미공군은 "침투 전투기" 프로젝트를 아예 철회해버리고 "보다 강력한 요격기" 프로젝트로 바꾸게 됩니다. 즉 한국전쟁의 경험으로 미공군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4발 프로펠러 엔진의 B-29와 같은 폭격기들이 제트 엔진을 탑재한 "침투용"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는다고 해도 미그와 같은 엄청난 속도의 적 전투기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는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그럴 바에야 적 폭격기와 전폭기의 공격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막아낼 수 있는 "전천후 요격기"를 개발하는데 힘을 기울이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실제 한국전쟁 중에 미그-15에게 추격당하고 있는 B-29
폭격기. 2차대전 말기에 등장한 이 거대한 폭격기는 일본
원폭 투하의 장본인으로 미공군 戰社에 한 획을 그었지만
제트 전투기의 시대가 개막된 한국전쟁에서는 미그-15에게
희생물이 되곤 하였습니다.)
이미 선정되었던 맥도널社의 XF88뿐만 아니라 탈락했던 두 회사들까지 다시 불러서 새로운 경합을 실시한 결과 첫번째 경합과 마찬가지로 맥도널 社가 다시 한번 이 프로젝트의 공급업체로 선정되었습니다. 선정될 당시에는 새로운 공군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서 XF88은 성능 개선을 거듭하였고 그결과 1951년 11월 최종 기종 이름은 "F-101 부두"로 명명되게 됩니다.
(XF-88 - 얼마 안있어서 F-101 부두라는 정식 명칭을 부여받고 활약하게 됩니다.)
(우삭님 작품 - F-101 부두)
애초의 XF88에서 변경된 설계로 재탄생하게 된 F-101은 미공군의 새로운 개념의 요격기 요구사양을 맞추기 위해서 저장할 수 있는 연료의 양이 무려 3배나 증가하게 되었고 새롭게 보다 강력한 Pratt & Whitney社의 J57 터보제트 엔진을 장착하면서 전체적으로 훨씬 커지게 됩니다. 이렇게 보다 강력한 성능으로 모습을 갖춘 F-101 부드 전투기는 애초의 폭격기 호위 임무도 수행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핵 전술 전폭기 임무도 수행하게 되는 말하자면 두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기종으로 개발이 진행됩니다. 1953년 F-101A형이 최초로 29대 생산되어 공군에 공급되게 됩니다.
(쥔장님 작품 F-101 부두)
1954년 9월에 F-101A는 시험 비행에서 고도 10,670m에서 마하 0.9에 최고 속도를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끝나게 되고 이어서 기존의 프로펠러 엔진의 대형 폭격기들과는 그 차원을 달리하는 제트 엔진의 초거대 핵 무장 폭격기 B-52의 개발이 시작되자 F-101A의 전략적 필요성이 없어지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침투용" 전투기의 강력한 폭격기 호위 임무 전용의 전투기 프로젝트는 백지화 되버립니다. 그동안 F-101의 개발의 가장 큰 후견인이었던 SAC가 새로운 핵 무장 제트 폭격기 B-52에게 관심이 옮겨가자 F-101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버렸습니다.
여기서 잠깐!
1952년 최초의 비행을 했던 B-52 폭격기는 현재도 미공군의 주력 전투기로 후속 기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활약 중이며, 놀랍게도 최근 공군은 이 "고조"할아버지 級 폭격기를 지속적인 성능 개선을 통해서 2040년까지 사용하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역사상 전투기종은 물론 일반 민간기종까지 통 털어서 거의 100년에 가까운 동안 현역으로 활동하는 항공기는 B-52가 유일합니다.
(B-52 제트 폭격기의 등장은 그동안의 폭격기의 개념을 완전히 바꿔놓은 혁신적인 기종
이었습니다. 속도와 운행 거리는 물론 핵 무장이 아니더라도 상상을 초월하는 파괴력의
폭탄 탑재 규모는 이 기종의 별칭인 "Stratofortress"(성층권에 요새)처럼 엄청난 고도에서
감히 적기의 요격을 엄두도 못내게 만드는 엄청난 포스의 폭격기였습니다.)
다시 F-101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비록 SAC는 더이상 F-101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TAC의 경우는 여전히 F-101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즉 한개의 핵 탄두를 장착한 "핵 무장 전폭기" 개념으로 F-101은 여전히 핵 전술상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결국 TAC의 지원을 받아 1955년에 시험 비행이 재개되었고 1956년에는 본격적인 양산이 시작됩니다. 1957년 F-101A가 TAC 소속 제27 전략 비행단에 배치되었고 그때까지 운용되었던 F-84 Thunderstreak을 대체하게 됩니다.
(F-84 Thunderstreak)
F-101A는 Pratt & Whitney社의 J57-P-13 터보엔진 두개가 탑재되어 매우 탁월한 가속 성능을 보유하게 되었고 급격한 상승 능력도 가능하였습니다. 또한 음속 돌파에 있어서 당시로써는 우수한 성능을 보여주어 최고 속도가 마하 1.52까지 올라갔습니다. 게다가 대폭 증가한 연료 저장량은 4,828km의 운행 거리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불과 3~4년 전에 한국전쟁에서 명성을 떨쳤던 F-86 세이버의 운행거리의 두배가 훨씬 넘는 수준이었고 최고 속도 역시 세이버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므로 그때까지 미공군에서 여전히 운용하고 있던 F-86 세이버를 훨씬 앞지르는 성능의 전투기가 바로 F-101이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빈티지 키트라 할 수 있는 하세가와 1/72 RF-101C 부두,
어린 시절 미도파 백화점 모형 코너에서 우람한 팬텀에 비해 왠지
빈약해 보이는 이 전투기의 모습을 키트 박스 아트로 보면서 특이한
콧날이 독특해 보이는 저놈은 과연 어떤 배경 이야기를 갖고 있을까
궁금했었습니다.)
게다가 한개의 Mk 28 핵 폭탄을 장착하고 출격할 수 있었는데 이 폭탄은 미공군이 보유했던 전술 수소 폭탄으로써 과거 우리나라에 주둔했던 미공군도 보유했던 것으로 추정하는 엄청난 파괴력의 핵폭탄입니다. 뿐만 아나라 전통적인 구형 폭탄, 로켓탄, 기관포 및 팔콘 공대지 미사일 무장도 가능하였습니다. 하지만 핵 폭탄으로 무장하고 출동할 경우가 전무했던 탓에 결국 이런 우수한 성능을 가지고 그 빠른 스피드를 정찰 임무에 주로 사용하게 되었고 그 경우에 4개의 M39 기관포들로 무장하는 수준에서 가벼운 체구를 유지하곤 했습니다.
1957년 12월 보다 성능을 향상시킨 신형 엔진인 J-57-P-53을 적용한 시험기 JF-101A는 시속 1,943km로써 당시 최고 속도 신기록을 수립하였는데 그때까지 신기록은 1956년에 Fairey Delta 2 (영국)가 기록했던 시속 1,811km였습니다. 하지만 JF-101A의 신기록도 불과 반년만에 록히드의 또하나의 센츄리 시리즈 기종인 F-104 스타파이터에 의해서 깨지게 됩니다.
(Fairey Delta 2는 영국에서 개발된 정찰 임무용 제트기였습니다.)
어쨌든 다른 어떤 능력보다도 다른 기종들에 비해서 빠르고 신속한 고도 상승 능력을 가진 F-101은 전투기나 전폭기의 용도보다 정찰기로써 더 쓸모가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 미공군은 1953년 10월에 F-101A 2대를 시험적으로 정찰기로 개조를 요구하게 됩니다. 그 결과가 만족스럽다고 평가하게 되자 본격적으로 35대의 정찰기 전용 RF-101A의 생산이 이어졌고 기수에 기관포와 레이다를 떼어내고 정찰용 항공 촬영 카메라 6개를 장착하였습니다. 1957년 기존의 미공군 정찰기 RB-57 칸베라를 대체하고 부두 전투기의 정찰기로써의 명성을 시작하게 됩니다.
(RB-57 칸베라 정찰기)
(RF-101A)
(독특하게 변경된 형태의 RF-101A 기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기간에 미공군 제363 전술 정찰 비행단 소속 RF-101A가 쿠바 상공에서 매우 중요한 정찰 임무를 반복해서 수행하게 됩니다.
(1959년 8대의 RF-101A가 미국의 우방이었던 대만 공군에 공급되었는데
이중 2대는 정찰 임무 중에 중공군의 대공포 사격으로 격추되었습니다.)
F-101A는 1958년 TAC의 결정으로 본격적으로 핵 무장 가능한 전폭기로써 임무를 시작하게 되었지만 문제는 아직도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해결이 안된 상태였습니다. 특히 문제점들 중에서도 기체 구조 설계의 불안정성이 가장 시급히 개선이 필요했습니다. 2세대 제트 전투기들이 개발 초기에 누구나 겪고는 했던 결함을 F-101A도 똑같이 겪는 셈이었는데 이런 문제는 2차대전까지 프로펠러 전투기들의 시대에서 전후 냉전 시대로 들어오면서 제트 엔진 전투기들이 주종이 되었지만 갑작스럽게 엄청난 속도로 증가한 비행 조건에서 안정성을 유지해줄 수 있는 기체 구조의 설계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비로서 개선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령 2차대전 최강 전투기로 자타가 공인하는 P-51 무스탕의 경우 최고 속도는 시속 700km가 조금 넘는 수준이었습니다.(사실 그때는 이정도 속도도 매우 우수한 수준이었습니다만...) 하지만 불과 10년도 안된 1950년대 후반에 등장한 F-101A의 경우만 봐도 무려 무스탕의 3배에 가까운 시속 2,000km를 육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술적인 문제점들을 무릅쓰고 TAC는 F-101A와 101C 두 버전 모두 제81 전술 전투 비행단에 배치하였는데 이 비행단은 유럽에서 나토군의 일원으로써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공산 진영 공군력과 대치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됩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일화는 TAC가 F-101을 가지고 핵 탄두를 무장한 핵무장 전폭기로써 공산진영에 핵공격을 감행하는 시나리오의 경우 거대한 몸집의 핵 폭격기들에 비해서 적의 공격을 훨씬 빠른 속도로 피해서 침투할 수 있다는 잇점은 있었지만 불과 2.000km 갓 넘는 운행 거리 탓에 핵 공격 후에는 귀환을 못하고 적진에서 조종사가 연료가 소진되면 비상 탈출하여 낙하산으로 적진에 강하할 수 밖에 없는 일종의 "자살 공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어처구니 없는 전술은 실제 사용될 일이 없었고 1966년에는 전설적인 전폭기 F4C 팬텀 II로 교체되게 됩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공군 도장 기준한 RF-101C - 2011년
아리조나 소재 항공기 전시장에서 촬영함.)
RF-101C는 부두의 정찰임무 전용 버전으로 1957년 7월에 최초로 시험 비행을 시작하여 1958년부터 본격적으로 실전에 배치되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부두 전투기의 진가가 애초에 TAC에서 기대했던 핵 무장 전폭기로써의 역활보다 실전이었던 베트남 전쟁에서 정찰 전용기로써 활약하게 되는 역사의 시작을 하게 됩나다. 실제로 총 166대가 생산된 RF-101C 중에는 원래는 전천후 전폭기 또는 요격기로써 계획되었던 분량이 정찰용으로 변경 생산되었을 정도였습니다.
1961년 F-100 슈퍼 세이버와 함께 베트남 전쟁에 투입하게 된 RF-101C는 1970년까지 베트남 전쟁 기간 내내 정찰기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였고 1965년 이후에는 팬텀의 정찰기 버전인 RFC-4 팬텀 II에게 조금씩 역활을 넘겨주게 됩니다. 전쟁 중에 무려 35,000회 출격을 수행하면서 무려 39대가 격추되었는데 대부분은 월맹군의 대공포나 SAM 미사일 공격으로 격추되었지만 1967년 9월에 미그 21과의 공중전에서 격추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부두 전투기가 베트남 전쟁에서 대지상 공격용 전폭기도 아니고 정찰기로 주로 사용된 배경에는 워낙 뛰어난 스피드와 급상승 능력이 재빨리 정찰 지역을 둘러보고 사진 촬영이 끝난 후에는 바로 신속하게 "줄행랑"을 칠 수 있는 점을 인정(?) 받았기 때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행동만 빨랐지 파괴력을 갖춘 화력이나 공중전 능력에서는 F-100 슈퍼 세이버나 부두 이후에 등장한 후배 기종들에게 떨어진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베트남 전쟁 중에 월맹군의 주력 전투기 미그-21)
여기서 부두 전투기의 기본 무장을 보면 M39 20mm 기관포 4문에 GAR-1(AIM-4 팰콘) 세미 액티브 호밍 미사일 3발, 2.75인치 FFAR 6발들이 로켓탄 팩 2개를 동체 아랫면에 장착하였습니다. 화기 관제 장치는 MA-7 레이더와 K-19 건 카메라를 조합하여 기관포와 미사일을 통제하였습니다. 이정도의 무장 능력은 F-100 슈퍼 세이버와 F-4C 팬텀 II에 비교하면 크게 떨어지는 수준이었던 탓에 사실상 정찰기 임무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비록 정찰 임무 전용기였지만 RF-101C야말로 실제 전투 경험을 가진 유일한 부두 기종이 되었고 베트남 종전 이후 부두 전투기는 정찰기로도 전폭기로도 이미 경쟁력을 상실하여 매우 빠른 속도로 F4C 팬텀 II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F4 팬텀 II 시리즈의 탄생에 앞서서 같은 제작사였던 맥도널이 F-101 부두를 통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과연 F4 팬텀 II와 같은 뛰어난 전투기가 베트남 전쟁에서 미그 전투기들과의 공중전과 광활한 정글의 공중 타격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면서 부두 전투기가 미공군 전투기 역사에 나름 중요한 역활을 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베트남 전쟁 중에 정찰 임무 중인 RF-101C)
첫댓글 재미있고 유익한 글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앞으로 자주 뵙도록 해요.
오랜만에 김작가님의 글 을 보니 너무 좋습니다! 새삼스래 느끼는 것이지만 수많은 시행착오와 연구를 통해 명작이 생겨난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글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요즘에 휴머니스트님의 눈이 휘둥그래지게 만들어주시는 괄목상대에 혀를 내두르는 중입니다. 세상에 이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고시는 분도 있구나 하면서 부러워하는 중입니다. 진담입니다.
주인장의 부두가 아니었으면 부두에 대해 관심도 없었을 텐데, 지금은 제게 꼭 만들어볼 비행기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뒷이야기도 무척 흥미롭네요.
이제 F101 끝냈는데 언제 F-35까지 달려갈지.... 뭐 급한 마음 갖지 않고 천천히 천천히 걸어갈 생각입니다.
제가 빈이네 찾아오게 된 계기가 바로 저 쥔장님 부두 때문이거든요^^;; 이렇게 알고보니까 아주 재미있네요
두분 작품들 모두 너무 뛰어나서 제글에 무단 게재했습니다. 정말....와......
팬텀의 뼈대가 보이네요~ 역시나 이런 베이스가 있기에 역대의 전투기가 나올 수 있었겠지요.. 잘 보고 갑니다.
F4 팬텀 II 까지 아직도 멀고 먼 길이 될 것 같네요. 하지만 뭐 급할 것 없으니 나름 꼼꼼하게 써내려가 보겠습니다.
사진도 많고 상당히 재미있을것 같습니다.
아껴 두었다가 내일 아침에 커피한잔 마시면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
오랫만이네요. 요즘 연일 우울하고 답답한 하루 하루인데 제 글이 커피 한잔과 함께 휴식을 드릴 수 있다면 기쁠 따름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