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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부가 민 박사 일가의 망명을 세계에 발표했으나 아직 한국으로 온다는 소식은 없었다. 쿠알라룸푸르에 가 있는 각 언론사 특별취재단은 민 박사 일가의 한국 이송이 늦어지는 이유에 대해 취재공세를 폈으나 정확한 이유를 캐내지 못했다.
‘민 박사 일가와 한국망명에 대해 완전히 합의를 하지 못했나.’ 또는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것인가.’ ‘보안상 어떤 문제가 있는가.’ 등등의 추측기사를 쓸 뿐이었다. 한국정부 측은 취재팀의 질문공세에 “현재 민 박사 일가의 이송준비 중에 있다.”는 답변만 되풀이 했다.
지섭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채영과 전화통화도 되지 않았다. 휴대폰이 아직 지급되지 않은 것이다. 채영이 모스크바에서 쿠알라룸푸르로 와서 아버지, 동생과 무사히 만난 것까지 확인했었다. 그리고 민 박사 일가가 한국으로의 망명에 합의하고 공식발표가 나왔다. 대한신문 등 일부 언론사 취재단은 민 박사 일가의 이송작전을 취재하기 위해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잠복 취재까지 했다. 그러나 이송작전이 워낙 극비리에 진행되어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지섭은 다른 언론사가 공항에서 철수한 후에도 끝까지 남아 지켜보았으나 저격사건 현장을 놓치고 말았다.
대한신문 취재단은 민 박사 일가의 신변에 중대한 문제가 생겼다고 결론지었다. 특히 북한이나 인스펙터의 저격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았다. 지섭은 쿠알라룸푸르 시내 주요 종합병원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뒤졌으나 민 박사 일가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지섭은 절망 속에 낙담했다.
‘아 아, 내 취재력이 이것밖에 안되나. 채영, 당신은 지금 어떻게 된 거야...’
그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지섭은 쿠알라룸푸르에 끝까지 남아 민 박사일가의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겠다고 고집했으나 본사에서는 그의 귀국을 명령했다. 무작정 현지에 남아있을 수만은 없다는 게 이유였다. 다른 언론사들도 모두 철수했다. 그는 납덩이같은 무거운 가슴을 안고 귀국했다.
지섭이 한국으로 돌아온 후 일주일이 지나서 한국정부는 민 박사 일가의 한국 이송에 대해 성명을 발표했다. 민 박사 일가는 응급가료를 마치고 이제 비행기로 이동이 가능하다고 판단되어 비행기에 태워졌다. 그들을 태운 특별기가 안전하게 비행해 인천공항에 도착하기 세 시간 전에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북한에서 귀순한 민영대 북한내각 전 부총리와 딸, 아들 등 가족 세 명은 지난 사월 이십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괴한 두 명으로부터 저격을 받고 두 명은 중상, 한명은 경상을 입었습니다. 다행히 세 사람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이들은 합당한 응급 치료를 받은 후 현재 한국으로 안전하게 이송 중입니다. 경호원 세 명도 중상을 입었으나 역시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저격수 중 한명은 총격전 도중 현장에서 숨지고 한 명은 총에 맞아 중상을 입고 말레이시아 현지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체포된 저격수는 북한에서 파견된 요원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사망한 저격수는 인스펙터라는 국제범죄조직의 조직원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이 성명을 들은 한국 국민들은 다시 한 번 경악했다. 외국 언론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저격을 받은 민 박사 일가는 과연 어떤 상태인가.
저격수가 쏜 총알은 민 박사의 왼 쪽 갈비뼈 쪽을 뚫었다. 총알은 다행히 엷게 스쳐 폐와 다른 장기를 피해갔다. 한 달 정도 치료하면 어느 정도 기동이 가능한 상태였다. 수영은 오른 쪽 팔에 총알을 맞았다. 그러나 총알이 빗겨 나가 중상은 아니었다.
문제는 채영이었다. 총알이 왼쪽 다리를 관통했다. 응급수술을 받았으나 후유증이 남을 가능성이 있었다.
오월 일일. 인천공항으로 가는 고속화 도로.
승용차를 운전하는 지섭은 손, 발이 허둥거려 운전이 제대로 안되었다. 목이 바짝 타들어가고 입안의 침이 말랐다. 차대환 경무관과 국정원, 외교부 쪽을 통해 취재된 바로는 채영이 가장 중상이라는 것이다.
‘채영 당신에게 어찌 이런 일이... 아직도 신은 그 여자에게 더 시련을 주는 건가. 신, 당신에게 얼마나 더 빚을 갚아야 되나...’
지섭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르 흘렀다. 소리 내어 엉엉 울고 싶었다. 모스크바 공항에서 보았던 채영의 밝은 모습. 따뜻한 손...
민 박사 일가의 귀국발표를 들은 각 언론사 기자들은 지금 인천공항으로 뛰고 있다. 웅서도 공항으로 달려가고 한얼잡지사의 은경도 이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보기 위해 공항으로 달리고 있었다.
은경의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입술을 꼭 깨물었다. 슬픈 눈물이 아니라 분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으나 이를 악물고 참았다.
‘눈물을 보이면 내가 지는 거야.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어. 그 여자가 북쪽으로 끌려갔을 때 모든 게 끝난 걸로 생각했는데, 이게 뭐람. 오빠가 북쪽으로 잠입한 것도 모자라 모스크바로, 북경으로, 쿠알라룸푸르로 뛰었잖아. 그리고 이제 온 가족이 귀순한다? 그 험난한 파고를 넘고 머나 먼 길을 돌아 그 여자가 이제 인천공항으로 온다...’
은경은 채영의 존재를 알기 전, 싱가포르에서 지섭과 보냈던 짧은 행복의 시간이 꿈결 같았다.
‘오빠가 그토록 그리워하고 가슴 아파하며 사랑하던 그 여자는 어떤 모습일까. 부상을 당했다는데 어느 정도지? 어떤 여자 길래 오빠 마음을 그렇게 사로잡았어. 촌스런 북한 여자가 그렇게 좋은가, 뭐.’
은경의 머리는 분노와 시기심으로 터질 것 같았다.
오후 두시 이십분. 지섭의 차는 이제 인천공항 입국장 쪽으로 들어섰다. 채영을 태운 특별기가 오후 세시에 도착예정이니까 이제 사십분 남았다. 지섭은 차를 주차시키고 단거리 선수처럼 뛰어 입국장 쪽으로 갔다. 아직 취재진이 많이 와 있지는 않았다. 방송사 생중계 팀이 카메라를 설치하는 등 부산하게 움직였다. 일부 사진 기자들도 사진 찍기 좋은 자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지섭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일부러 편의점에서 커피를 마시며 호흡을 가라앉혔다. 커피를 마시니 가슴이 더 뛰었다.
‘채영이 중상이라니... 한국에서 치료하면 곧 좋아질 거야. 그래, 후유증 없이 건강해질 걸...’
지섭은 애써 좋은 방향으로 생각했다. 시간은 이제 세시에서 십분 남았다. 웅서와 은경도 입국장 입구를 보고 서 있었다. 비행기가 도착해도 입국장 쪽에 나타나려면 시간이 상당히 걸릴 것이다.
은경은 지섭에게 전화를 할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수많은 취재진을 두루 둘러보다가 대한신문 취재진에 끼어 있는 그를 발견했다.
‘오빠를 만난 지도 꽤 됐지. 그치만 여기서 만나긴 싫어.’
시간은 이제 오후 세시 삼분 전, 이분 전, 일분 전. 정각 세시.
예정대로라면 특별기는 활주로에 착륙했을 것이다. 특별기에서 민 박사 일가가 나오기로 되어 있는 곳에 가 있던 차 경무관에게서 지섭에게 전화가 왔다.
“박 기자, 비행기가 지금 막 착륙했어요. 너무 걱정 말아요. 민채영씨, 그렇게 많이 다친 건 아니야. 우리나라 의료시설 좋잖수. 그깟 외상쯤 금방 치료할 수 있어요.”
“차 대감, 채영씨가 다리를 다쳤다면서요. 얼마나 심각한 거요? 자세히 말 좀 해봐요!”
“나도 자세한 건 몰라요. 좀 있다 입국장으로 나가면 그때 볼텐데, 뭐.”
차 경무관은 채영의 부상상태를 알고 있었으나 지섭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내가 쿠알라룸푸르에서 좀 더 있어야 했는데 회사에서 들어오라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채영씨를 찾아내 같이 왔어야 했어요.”
“박 기자, 어차피 특별기에 같이 탈수는 없고, 이렇게 인천공항에서 들어오는 걸 보는 것도 의미 있어요.”
취재진과 관계자들이 초조하게 기다리는 가운데 시간은 세시 삼십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부상자들이 나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기다리던 시간이 흘러 이제 세시 오십분. 드디어 입국장 문이 열렸다. 먼저 쿠알라룸푸르에서 특별기에 함께 타고 온 통일부 사무관이 나왔다. 이어서 통일부 차관과 주 말레이시아 한국 대사가 나왔다. 사무관이 말했다.
“지금 민영대 북한내각 전 부총리와 딸, 아들이 곧 이곳으로 나올 겁니다. 이 분들이 부상 중인 점을 고려해서 취재진 여러분께서는 질서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사진 정도만 찍으시고 기자회견은 별도로 마련한 회견장에서 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이어서 통일부와 국정원 관계자들, 경호원들이 나왔다. 그리고, 드디어 민영대 박사가 그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반짝이는 은발에 감색 싱글을 산뜻하게 입고 있었다. 부상 부위가 불편한 듯 해 보였으나 엄청난 취재진 등 인파를 침착하게 둘러보았다. 만감이 교차하는 듯 감회어린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한국의 김규태 박사와 함께 한반도에서 가장 뛰어난 핵물리학자의 한 사람인 그가 이제 북에서 남한 땅에 들어선 것이다. 방송 생중계 팀의 카메라가 돌아가고 사진기자들의 셔터소리가 요란하게 터졌다. 뒤이어 수영이 오른 팔에 팔걸이를 하고 씩씩하게 나타났다. 그는 많은 인파가 놀라운 듯 눈을 둥그렇게 뜨고 사방을 보았다.
드디어 마지막으로 채영이 환자용 밀차에 누워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 사이에서 탄식의 소리가 나왔다. 모스크바에서 지섭을 우연히 만난 후, 민 박사일가가 한국으로 귀순하기까지 수많은 고비를 넘긴 장본인. 이 스토리를 아는 취재진은 크게 웅성거렸다. 티브용 이엔지 무비카메라가 일제히 집중되고 카메라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졌다. 부상정도를 확인하려는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부상 중인 이분들을 위해서 질서를 지켜주십시오!”
정부 관계자가 소리쳤다. 지섭은 밀차에 누워 나오는 채영을 보고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채영, 얼마나 다쳤기에...”
그는 밀려드는 보도진을 뚫고 사진기자가 도열해 있는 포토라인을 넘어 채영 쪽으로 돌진했다. 경호원이 그를 세차게 제지했다.
“보도진이요, 보도진. 비켜요!”
지섭은 보도증을 보이며 소리쳤다.
“보도진이라도 이 선 이상 접근은 안 됩니다.”
경호원들이 지섭을 더 세게 밀어 제쳤다. 지섭은 몸싸움을 하며 뛰쳐나가 “채영씨!”하고 부르짖었다.
웅서와 은경도 각 각 취재진에 끼어 민 박사 일가의 모습을 보았다. 은경은 눈을 크게 뜨고 밀차에 누워있는 채영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채영의 부상이 가장 심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은경은 채영을 좀 더 자세히 보려고 접근했으나 경호원들에 막혀 더 이상 접근이 어려웠다.
비록 밀차에 누워있으나 왠지 평화로워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신기했다. 지섭 오빠 곁으로 온다는 행복감이 그녀를 저렇게 평화롭게 보이게 하는 것일까. 저게 사랑의 신념인가. 온 몸으로 그 신념이 느껴지는 것 같애. 은경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아, 여기가 남한 땅이구나. 지섭씨, 나 여기왔어요. 지금 나 보고 있죠.’
밀차에 누워있는 채영은 난생 처음 보는 수많은 취재진의 소란함 속에서도 마음이 편안했다.
‘많이 놀랐죠. 그치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생명에는 지장 없어요. 까짓 상처 문제 아니야요. 난, 당신과 남한 땅, 같은 하늘 아래 있으면 돼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지섭의 모습을 찾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때, “보도진이요!”하며 뛰어드는 지섭을 보았다.
‘아! 그리운 사람. 나 여기 있어요.’
그러나 이 말은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지섭은 채영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쳐다보는 걸 알고 손을 조금 들어 신호를 하고 눈으로 인사를 했다. 지섭과 채영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얼마나 다쳤어, 채영’
‘너무 걱정 말아요. 나 괜찮아요.’
두 사람의 눈은 이렇게 말했다.
사진촬영을 마친 세 사람과 정부 관계자, 보도진은 특별회견장으로 향했다. 채영의 밀차는 민 박사와 수영과 함께 카펫이 깔린 복도를 따라 갔다. 보도진들도 밀려갔다.
“채영, 채영씨!”
그때 낮으나 힘 있는 소리가 채영의 귀에 들렸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지섭이었다. 그가 채영의 밀차를 따라 붙었다.
“지섭씨!”
그녀는 남쪽 땅에 내린 뒤 처음으로 떨리는 소리로 외쳤다. 경호원이 “기자 회견장에서 취재해 주세요.”하며 지섭을 또 다시 제지했다. 채영이 급히 말했다
“그냥 두세요. 이 분은 저희 가족의 은인이에요. 대화하게 해주세요.”
이 때, 민 박사가 지섭을 돌아보고 말했다.
“아, 박 기자. 오랜만이요. 두 사람 대화하게 놔두시구려.”
경호원이 마지못해 물러났다.
“많이 다쳤어요? 이렇게 밀차에 실려 오게...”
“괜찮아요. 치료하면 곧 나을 거예요.”
채영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검은 머리칼이 시트에 흐트러져 있었다. 얼굴은 생각보다 혈색이 돌고 건강해 보였다. 그러나 다리가 아픈지 가끔 얼굴을 찡그렸다.
“다리 다쳤다면서요. 많이 아프지요?”
“지섭씨 만났으니까. 이제 안 아파요”
“얼마나 치료해야 돼요?”
“한 달쯤? 좀 있다 일어날 수 있어요. 너무 걱정 마요.”
“다리 수술도 했지요?”
“네.”
“채영씨가 젤 많이 다쳤나 봐.”
“그래도 이렇게 생명에 지장 없잖아요.”
회견장으로 들어가기 전, 지섭이 채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빨리 나아서 우리 곧 만나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채영도 속삭였다. 다른 취재진들이 대화를 들으려고 함께 따라붙으려 하고 질시어린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공항 특실에 마련된 기자회견장.
민 박사와 수영이 나란히 앉고 채영은 밀차에 누워 있었다. 국내외에서 몰려든 이백여 명의 기자들로 회견장은 초만원이었다. 지섭은 재빨리 제일 앞자리에 앉았다.
민 박사가 먼저 성명서를 읽었다.
“우선 저희 일가를 이렇게 환영해 주신 남한 국민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네다. 저는 우리 한반도 북쪽과 남쪽의 동포들을 모두 사랑합네다. 저는 과연 헐벗은 북쪽의 인민들을 저버리고 우리 가족만의 안락을 위해 남한으로 귀순해도 될까 하는 문제로 많은 고뇌와 번민을 거듭했습네다. 북쪽 공화국은 제가 일생을 헌신하다시피 한 저의 조국이었습네다. 잘사나 못사나 사랑하는 동포들을 저는 저버릴 수 없었던 것입네다.”
여기서 민 박사는 일단 말을 끊고 수많은 취재진을 돌아보았다. 지섭은 오, 륙 미터 떨어진 곳에 누워있는 채영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도 지섭을 찾으려는 듯 시트에서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지섭을 발견하고는 안심한 듯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 박사가 성명서를 계속 읽었다.
“그러나 저는 드디어 결심하고 말았습네다. 이제 남북한이 전쟁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저의 여생을 바칠 각오를 했습네다. 제가 남한에 와서 한반도의 전쟁을 막고 평화적인 통일에 이바지 할 수 있다면 어떤 일도 할 것임을 여러 국민들께 맹세합네다. 여러분,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네다. 저는 어떠한 위기가 닥치더라도 이것을 막기 위해...”
민 박사는 거기서 만감이 교차하는 듯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채영은 다리에 통증이 오는지 가끔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곧 눈을 뜨고 지섭을 보려 애썼다.
민 박사는 북한이 인스펙터와 합동작전으로 오는 시월 일일 남한과 일본 등을 핵무기로 공격하는 ‘백두산 작전’ 계획은 아직 밝히지 않았다. 부상이 어느 정도 치료된 다음 별도로 마련예정인 회견장에서 밝힐 예정이다. 기자들이 귀순동기, 북한의 핵무기 개발상황 등등에 대한 질문을 했으나 간단히 설명하는데 그쳤다. 정부 관계자가 나섰다.
“지금 민 박사님 가족은 부상 때문에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이런 장거리 여행도 사실은 무리지만 국민들이 궁금해 하실 것으로 생각되어 귀국을 강행한 것입니다. 이분들이 어느 정도 치료된 후 조속한 시일 안에 별도의 정식 기자회견을 마련해 여러분들의 궁금증을 풀어드릴 예정입니다. 미흡하시겠지만 이점을 양해해 주시고 오늘 회견은 이만 끝내기로 하겠습니다.”
그때 지섭이 일어나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질문하겠습니다. 민 박사님 가족 중 두 분의 부상이 상당히 심하다고 했는데 부상이 어느 정돈지 치료는 얼마나 걸리는지, 부상 후유증은 없는지 말씀해 주십시요.”
정부관계자가 말했다.
“먼저 민 박사님은 좌측 옆구리 부분에 총을 맞았습니다. 총알은 다행히 장기부분을 빗겨갔으나 갈비뼈 등을 다치셔서 앞으로 약 한달 간 안정가료를 요하며 후유증은 없습니다. 따님인 민채영씨는 왼쪽 다리부분에 총알 관통상을 입었습니다. 현지에서 응급수술을 받았으나 국내의료진의 정밀검사와 치료가 필요합니다. 치료기간이 얼마나 될지는 정밀검사 결과가 나와 봐야겠지만 수개월은 넘기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아드님인 민수영 군은 오른팔에 총상을 입었으나 관통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 삼주 치료하면 나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역시 채영이 가장 중상이구나. 지섭은 낙담했다.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는 것인가.
“그럼 민채영씨가 가장 중상이라는 말인데 부상상태를 좀 더 자세히 말해주세요.”
지섭이 소리쳤다. 실내가 약간 소란스러워졌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의료진이 정밀검사를 한 뒤에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지섭은 후유증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냐고 재차 질문하고 싶었으나 채영이 낙담할까봐 차마 묻지 못했다. 정부 관계자들은 서둘러 기자회견을 끝냈다. 민 박사 일가의 부상을 생각하면 더 이상 시간을 끌기도 어려웠다. 민 박사 일행은 정부 관계자들과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총총히 회견장을 빠져나갔다. 지섭은 서둘러 채영의 밀차를 따라갔다. 민 박사 가족은 공항청사를 나가 미리 대기하고 있던 앰뷸런스에 태워졌다. 채영은 청사를 나가기 전 지섭을 애써 발견하고 마지막으로 그를 바라보고는 앰뷸런스에 태워졌다. 지섭은 언제까지나 그 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북한 조선로동당 삼호 청사 대회의실.
국방위 제1위원장이 불같이 화가 난 가운데 살벌한 분위기에서 국가 비상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국방위 위원, 당정치국 위원, 국가안전보위부장 인민군 총 정치국장, 총참모장, 내각 총리 등 권력 핵심간부들이 살얼음판에 앉은 듯 긴장해 있었다.
“우리의 위대한 성전을 앞두고 이 무슨 어이없는 실책이요, 민영대 일가가 어캐 몽땅 남조선으로 넘어간단 말이요? 입이 있으면 어디 말해보시오.”
제1위원장이 말했다. 회의실 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았다.
“국가안전 보위부장, 경위를 말해 보시오!”
“할 말 없습네다. 민영대를 말레이시아로 보내달라는 국내외의 압력에 굴복한 꼴이 되었습네다. 제가 관리를 잘못했습네다. 처분만 바랍니다.”
“보위부 감옥에 있든지, 벌써 처단되었어야 할 반동분자 민영대와 딸이 버젓하게 외국으로 나가 남조선으로 넘어가? 이게 말이 되오?”
제1위원장은 북한을 세계에 선전하기 위해 민 박사가 말레이시아 핵물리학회에 참석하는 걸 양해하고도 이렇게 질책했다.
“국가보위부내 반동 내통분자와 당과 군에 기생하고 있는 반동 력적들을 색출해 처단할 것을 건의합니다.”
총 정치국장 최성태의 말에 국방위 부위원장 오대열, 총참모장 김광철, 등이 합세했다.
“반국가 력적들을 처단하는 건 당연하지만 국가 안위에 이렇게 구명이 뚫린데 대해 대책이 있어야 할 것 아니오!”
몇 몇 간부들이 보안 대책과 조직 강화에 대해 의견을 내놓았지만 뾰족한 대책은 못되었다.
“인스펙터가 우리 요원을 살해하고 민영대를 빼돌리려 한 건 뭐요?”
“그 조직이 민영대를 데려다 핵무기를 만들려고 한 것으로 압네다.”
“우리와 손잡은 척 하면서 속으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 아뇨?”
“인스펙터를 전적으로 믿을 수 없지만 그 조직을 이용할 필요는 있다고 사료됩니다.”
“이용하기는커녕 이용당하고 있지 않나 말야.”
“백두산 작전은 공화국 단독으로 감행하기 보다는 인스펙터와 공동작전으로 실행하는 거이 좋다고 봅니다. 그 조직이 아직은 쓸모가 있습네다.”
“총정치국장이 이번 일에 대해 인스펙터에 은밀히 엄중 항의하고 우리 요원 살해에 대해 책임추궁을 하시오. 그리고 보위부장은 여기서 자아비판 하고 실책에 따른 처벌을 있을 것이니 각오하시오.”
보위부장 얼굴이 창백해졌다.
“민영대가 남조선으로 갔으니 우리의 ‘백두산 작전’을 다 불어버릴 거 아뇨. 그건 어캐야 하나?”
“그 계획은 취소 될 수 없습네다. 날자를 변경해서라고 기습적으로 공격해야 합네다.”
총참모장이 말했다.
“총참모장 말이 맞습니다. 일단 터무니없는 허위날조라고 부인한 댐에 저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기습적으로 공격을 감행해야 합네다.”
총정치국장이 말했다.
“그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네다. 만일 그 계획이 알려지면 남조선과 미국, 일본 등이 그에 대한 대비를 할 겁네다. 다각적인 전략을 다시 세워야 합네다.”
김백주 정치국 상임위원 말했다.
“그렇습네다. 백두산 작전은 이번 시월 일일에 감행하기는 어렵습네다. 인스펙터를 믿을 수도 없습네다. 계획을 일단 재검토하거나 최소한 연기하고 보다 치밀하고 완벽한 작전을 세워야 합네다.”
이상국이 말했다. 일부 강경파가 자못 못마땅하다는 듯 김백주와 이상국을 노려보았다.
제1위원장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가 말했다.
“백두산 작전은 일단 부인하는 성명을 내시오. 화전 양면전략을 구사하면서 그동안 더 철저히 전략을 세우고 때가 되면 기습작전을 감행하시오.”
이 무렵 인스펙터 본부 회의실.
“무슨 일을 이렇게 허술하게 처리하는가. 이런 사소한 일도 제대로 못해서야 우리의 위대한 세계전략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겠는가. 어디 대답들 해보시오.”
조직의 최고 책임자인 A-1의 얼굴은 노기로 붉게 상기되었다. 그의 주제로 각 지역 대표자들이 모여 엄숙하게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민 박사 일가를 데려 오는 하찮은 일에 실패한 것도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하는데 최후수단인 민 박사 일가의 암살에도 실패한 데 더 화가 치밀었다. 조직에 포섭하려다 실패하면 차라리 없애버리는 게 차선책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들이 보낸 저격수가 죽은 것도 자존심 상하는데다 수사당국이 이번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조직이 드러날 수도 있는 위험에 처하지 않았는가.
민 박사 작전을 지휘한 것은 C-2였다. 그는 껄끄러운 상대인 C-1을 제치고 이번 일에 개입했다 참담한 실패를 했다. 그는 C-5인 아나스타샤가 북한에서 민 박사를 접촉하는 등 민 박사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에 개입한 냄새를 맡고 있었다. C-2는 이 일을 빌미로 아나스타샤와 C-1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계획이 차질을 빚었다.
“우리의 원대한 세계경영전략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려고 하는 마당에 그까짓 북조선 부총리 하나쯤 데려 오는데 치명적인 실수를 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이제 우리는 필요한 자금과 첨단무기를 확보하고 있고 민영대를 데려와서 자체적인 핵무기 개발능력을 배양하려고 했는데 거대한 둑이 쥐구멍 하나로 무너지듯 이런 실수가 있을 수 있단 말이요? C-2 어디 말해보시요!”
“무엇이라 죄송한 말씀을 드릴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모스크바와 말레이시아에서 상대방을 너무 얕보았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어떤 처벌이라도 감수하겠습니다.”
C-2는 진땀을 흘렸다.
“현재 가장 큰 문제는 러시아 수사당국이 우리조직에 대해 본격적으로 수사를 하고 있다는 점이오. 말레이시아 수사당국이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러시아와 공조를 취하고 있단 말이오. 이제 우리 목을 죄어 올 것이오. 어디 대책들을 말해 보시오.”
A-1은 번쩍이는 시선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회의실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이윽고 B-1이 입을 열었다.
“러시아는 지금 과거 소비에트연방과 같은 강대국이 지위를 회복하려고 대외관계에 열중하고 있고 골치 거리인 마피아 수사 때문에 우리조직의 수사에 전력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다행히 수사당국은 우리를 마피아의 변종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우리가 철저히 대비하면 우리의 본거지를 파악하지 못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조직을 철저히 지하로 숨기고 일단 눈에 띄는 활동을 자제해야 하며 시베리아 가스전 개발사업에 전력하는듯 한 모습을 보여야 할 걸로 생각합니다.”
B-1이 발언을 마치자 A-2가 말을 이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사안은 오는 시월 일일에 감행하기로 했던 백두산 작전입니다. 민영대가 한국으로 망명했으니까 이 작전을 세계에 폭로할 겁니다. 그렇다고 이 작전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북한과 조율해서 시기를 조절해야 할 줄 압니다. 민영대가 우리계획을 폭로하면 설마 이 작전을 실행에 옮기겠는가 하는 생각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의 허를 찔러야 합니다. 이 계획이 폭로되면 북한당국은 일단 부인할 겁니다. 그들이 화전 양면작전을 구사하면서 시기를 저울질 하겠지요. 그러나 이 계획의 포기는 없습니다. 계획을 앞당기던지 시기를 늦춰 방심할 무렵에 기습 공격을 해야 합니다.”
A-1은 라이벌의식을 느끼고 있는 A-2를 힐끗 쳐다보았다.
‘저놈은 역시 무서운 냉혈한이야. 우리의 세계작전이 무엇인가. 핵무기 공격으로 적을 초토화 시키겠다는 것 아닌가. 그 핵 공격을 서슴없이 하자고 하는군. 언제 내 뒤통수를 칠지 몰라.’
A-1은 이런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그것도 고려해볼 만한 작전이오. 그 문제는 수뇌부끼리 다시 한 번 협의하고 북조선과도 의견조율을 해서 결정하기로 하겠소. 그리고 우리는 일단 이 건물에서 철수하겠소. 시베리아의 우리 비밀기지는 당장 탐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 우선 본부에서 철수하는 것으로 아시오. 새로운 본부 건물은 B-1이 물색하고 있소. 현재 우리에게 위기가 오고 있다고 보고 정신들 바짝 차리시오. 세계 여러 지역 책임자는 앞으로 어떤 실수도 없도록 특히 보안에 각별히 신경 쓰시오. 우리의 세계작전은 어떤 난관이 있어도 시기가 결정되는 대로 실행된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밝혀 두겠소.”
이어서 대형 스크린이 펼쳐지며 B-2가 시베리아 비밀기지 건설 진척상황을 브리핑했다. 유전과 가스전 개발로 위장하고 있는 거대한 지하 벙커에는 미사일과 핵무기가 숨겨져 있고 적의 어지간한 공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견고하게 건설되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고 브리핑을 듣던 A-1이 못마땅하다는 듯 코멘트했다.
“지금 미국과 러시아의 핵무기 공격력과 첨단무기가 얼마나 무서운 줄 아시오? 핵무기를 감축했지만 우리와 비교할 수 없소. 좀 더 면밀하고 막강한 전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오. A-2가 책임지고 핵 기지 건설에 박차를 가하시오.”
그는 일부러 A-2에게 책임을 지게 했다. 그들은 세부 계획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세계 각 지부의 조직을 점검했다. 때때로 A-1의 질책과 고성이 터져 나왔다. A-2와 B-1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냉소를 띄었다.
유월 오일. 아침 여덟시 삼십분. 서울 세종로 정부청사 특별 기자회견장.
국내신문, 방송, 통신 등 기자는 물론 외국 특파원을 포함한 이백여명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이들은 잠시 후부터 시작되는 민영대 박사 일가의 공식기자회견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 언론인 중에는 지섭과 명성일보의 웅서, 한얼 잡지사의 은경도 끼어 있었다.
한 달여 전 밀차에 누운 채 공항입국장에 나타났던 채영. 오늘은 어떤 모습일까. 그동안 부상이 얼마나 치료되었을까. 후유증은 없나? 과연 스스로 걸어 나올 수 있을까. 지섭은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지섭의 곁으로 은경이 다가왔다.
“오빠 왔어?”
“응, 은경이도 왔구나.”
은경은 그러나 평소 그녀답지 않게 갑자기 할 말이 별로 없는 듯 잠시 우물쭈물 했다.
“민채영씨 부상치료가 어떻게 됐대?”
은경은 겨우 이 한마디를 했다.
“나도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재수술을 하고 치료 중인가 봐.”
“혼자 걸을 수 있대?”
“아직 보조기 도움을 받아야 한데.”
“후유증은 없나?”
“모르겠어. 더 자세한 취재가 안 되네.”
은경도 그녀의 부상정도가 궁금했다.
‘만일 후유증이라도 남아 있다면 어떻게 되지? 그래도 오빠는 민채영을 사랑할 거야. 지금 오빠 모습 좀 봐...’
은경은 여성의 직감으로 지섭이 얼마나 채영을 초조하게 기다리는지,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분하고 질투가 나서 휙 돌아서 자기 자리로 가벼렸다.
여덟시 사십오 분. 정부 관계자가 마이크 실험을 하고 자리를 정돈하는 등 준비에 부산했다. 사진기자들은 셔터와 플래시를 점검하며 준비 태세를 갖췄다. 이엔지 티브이 카메라가 움직였다. 중국, 일본, 미국, 유럽 취재진도 긴장했다. 미국 CNN, 일본 NHK 등도 티브이 카메라로 생중계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아홉시 정각. 정부 대변인이 나와 마이크 앞에 섰다. 통일부, 국방부 장관 등 정부고위 관리들이 나와서 배석했다. 그만큼 내외적으로 중요한 회견이었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민영대 북한 내각 전부총리와 따님 민채영씨, 아드님 민수영군의 기자 회견을 시작하겠습니다. 민 박사님 일가를 따뜻하게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산뜻한 양복을 입은 민 박사가 팔걸이를 하지 않은 채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수영은 역시 씩씩하게 걸어 나왔다. 드디어 채영이 나타났다. 그녀는 목발을 짚고 있었다. 약간 불편한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카메라 플레시가 터지고 티브 카메라가 분주히 돌아갔다.
민 박사와 수영이 의자에 앉았다. 채영도 불편하게 움직여 의자에 앉았다. 채영은 전문가가 코디해준 듯 밝은 색의 투피스에 배색이 잘된 블라우스를 받쳐 입고 스카프를 매었다. 화장도 세련되게 했다. 다리가 불편한 것에 비해 두 볼은 건강하게 빛났다. 채영은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취재진 중에서 누구를 찾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그녀는 누구를 발견한 듯 시선을 고정하고 그 쪽만 바라보았다.
지섭은 채영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앞에서 둘째 줄에 앉은 그를 채영은 어렵지 않게 찾았다.
‘지섭씨, 그동안 많이 걱정했죠. 다리가 좀 불편해도 나 괜찮아요. 다리 좀 불편하면 어때요. 이렇게 당신 가까이 있잖아요. 너무 걱정 마요.’
‘채영, 다리가 어떻게 된 거야. 많이 불편해 보이는데. 후유증이 있는 거야? 수술은 잘 됐어요? 관통상이라 치료가 더딘 거야?’
그들은 눈으로 이렇게 대화했다. 채영은 지섭이 걱정할까 봐 안심시키려고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으려고 했다.
‘지섭씨, 보고 싶었어요. 우리 곧 만나요.’
‘그래요. 곧 만나요.’
그들은 속으로 또 이렇게 대화했다.
오늘 기자회견 전 신변안전을 위해 민 박사 일가에 대한 취재는 상당히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전화통화도 아직 되지 않았다. 그가 여러 경로를 통해 어렵게 취재한 바로는 국내 의료진이 채영의 부상한 다리를 다시 정밀검사 한 후 재수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술 후 한 달 동안 재활치료를 받아 상당히 회복되었다는 정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지섭이 가장 궁금한 것은 부상 후유증이 없느냐 하는 점이었다. 또 휠체어나 목발에 의지해야 하는지 아니면 혼자 걸을 수 있는지 여부였다. 차대환 경무관 등을 통해 취재한 바로는 아직 보조기에 의지해 걸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섭이 지금 불안한 이유였다.
은경은 서 있는 채영을 처음 가까이서 보았다. 지난번에는 밀차에 누워 그녀를 자세히는 보지 못했다.
‘무엇이 지섭 오빠를 그렇게 사로잡았을까. 그 많은 난관을 뛰어넘어 이 자리에 까지 오다니... 지금 오빠한테로 왔다는 행복감이 얼굴에 넘치잖아. 아이 속상해... 그러나, 그러나 혹시 목발을 영원히 짚고 다녀야 하는 건 아닐까. 그렇게 된다면...?
은경은 이런 생각이 왔다 갔다 하면서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세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자 정부 대변인이 말했다.
“지금부터 기자회견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민 박사님의 기조 말씀이 있겠습니다.”
민 박사는 마이크 앞으로 걸어 나오며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잠시 보도진을 돌아보다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는 먼저 북한의 정치와 경제, 주민들의 생활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자신은 북쪽의 인민을 버리고 귀순했지만 그것이 한반도의 평화 유지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제가 비행기에서 내려서 남한 땅을 처음 밟았을 때 저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이 한 몸을 바치겠다고 생각했습네다. 제가 남한으로 귀순한 것은 한반도를 무서운 전쟁의 위기로부터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점을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네다. 여러분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중대한 발표에 대해 너무 놀라거나 동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눈을 감았다 떴다.
“지금 한반도는 여러분이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네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북한 정권은 지금 핵무기를 개발, 보유하고 있으며 오는 시월 일일을 기해 남한에 핵무기 공격을 감행할 극비 계획인 백두산 작전을 확정했습네다.”
기자회견장은 한순간 경악과 혼돈과 소란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십시오. 북한이 시월 일일에 남한에 대해 핵 공격을 한다구요?”
한 기자가 소리쳤다.
“기렇습네다. 이건 분명한 실행 계획이외다. 이 엄청난 백두산 작전은 저를 포함한 최고위층 몇 사람만 알고 있는 특급 비밀 사항입네다. 물론 북한 정권 내에는 이 무모한 계획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습네다. 그래서 소위 대남 강경파인 전쟁파와 대남 협상파인 온건파 사이에 갈등이 있었지만 결국은 일부 군부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가 국방위 제1위원장을 움직여 이렇게 계획을 확정했디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네다. 인스펙터라고 하는 국제 범죄조직이 그것이디요. 이 조직은 러시아에 본부를 두고 중국, 일본, 동 유럽, 중동 등 세계에 방대한 조직원을 거느리고 있으며 세계적인 핵물리학자를 포함한 많은 과학기술 두뇌, 전쟁 전략전문가, 무기상을 포함한 무기 전문가, 유전 및 가스 개발 전문가 등을 포섭하고 있습네다. 이들은 거액의 자금을 모아 러시아에 석유채굴과 가스전을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시베리아 어느 장소에 거대한 지하 핵 기지 벙커를 건설한다는 정보를 들은바 있습네다.
백두산 작전은 이 조직의 세계전략 중 하나이며 북한에 막대한 자금을 살포하면서 남한에 대한 핵 공격을 부추기고 자신들도 일본, 중국 등에 핵 공격을 가해 아시아의 주도권을 잡아 보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들었습네다. 저는 이 계획을 알고 그동안 고뇌를 거듭한 끝에 백두산 작전을 세계에 폭로해 전쟁을 막아 보려는 목적으로 남한에 귀순했습네다. 제가 핵물리학자로서 북쪽에서 제조한 핵무기로 한반도가 쑥대밭이 되는 것을 막아보려고 이 무시무시한 계획을 세계에 알리는 바입니다.”
기자회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각사 기자들은 일단 이 정보를 본사에 보고하느라 한동안 소란이 계속되었다. 보도진들이 일차로 급한 보고를 한 뒤 일문일답이 시작되었다.
먼저 대한신문 기자가 질문했다.
“북한이 그동안 몇 차례 핵실험을 했지만 과연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게 소형화, 경량화 된 핵무기개발에 성공했는지 의문이 많은데 언제 개발에 성공했나요?”
“미국처럼 정밀화, 고도화 된 기술은 보유하고 있지 않지만 극히 최근 남한 정도의 거리에 투하할 수 있는 소형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습네다. 핵무기 개발능력은 사실 대단한 건 아닙네다. 남한도 현재의 원자력 기술이라면 자본을 집중투자하고 기술을 집약하면 단 시일 내에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것으로 압네다.”
KBC 기자가 물었다.
“북한이 노동 1, 2, 3호 등 일본은 물론 중국, 러시아까지 도달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했고 미국까지 겨냥한 대포동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핵무기 소형화에 성공했다면 운반수단은 미사일에 장착하는 방식인가요, 비행기에 실어 투하하는 공중투하 방식인가요?”
“미사일에 탑재해 투하할 것으로 봅네다. 공중투하 방식은 사전에 요격당할 위험이 있습네다. 장거리 미사일은 아직 정밀도에서 뒤떨어져서 핵무기를 탑재할 정도는 아니지만 남한 정도의 거리에는 발사할 수 있습네다.”
명성일보 기자가 질문했다.
“남한에 핵무기를 발사한다면 어느 정도 규모의 핵폭탄을 어디에 투하할 계획입니까?”
“태평양 전쟁 말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투하했던 이 십 킬로톤 정도의 핵폭탄을 투하할 계획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네다. 구체적인 투하지점은 최고위층만 알고 있기 때문에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일차로 제주도 남방에 위협발사하고 이차로 울산이나 대전 정도에 투하하는 걸로 알고 있습네다.”
긴장감에 휩싸인 보도진 사이에서 탄식이 쏟아졌다. ABS 기자가 물었다.
“대부분의 북한 국민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핵무기를 개발할 여유가 있습니까?”
“일부 특권층을 제외한 북한 인민들은 기아와 압제에 신음하고 있습네다.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납네다. 그렇지만 없는 돈을 긁어 모아 핵무기는 개발했습네다. 핵무기만 끓어 안고 자폭을 하려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 없습네다.”
대동일보 기자가 질문했다.
“북한이 백두산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해도 민 박사께서 이렇게 세계에 폭로한 이상 북한에서 그런 계획이 없다고 부인하고 남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민 박사님을 이용해 모함한다고 역선전 하면 어떻게 반박하시겠습니까?”
“북한에서 그렇게 나올 가능성이 다분히 있습네다. 백두산 작전을 폭로하면 북한이 당장 허위날조라고 부인하고 남한이 저를 이용한 역선전을 한다고 하겠지요. 그러나 기렇게 해서라도 북한이 핵 공격을 포기한다면 제가 귀순한 목적을 달성한 셈이 됩네다.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누명을 써도 이 무시무시한 핵전쟁과 우리 금수강산이 초토화 되는 것을 막을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갔습네까.”
민 박사는 그렇게 말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북한이 이번에 백두산 작전이 허위날조라고 부인한다 해도 우리가 방심한 사이에 기습 공격할 가능성은 없습니까?”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네다. 아마 북한 측이 화전 양면작전을 쓰며 그때그때 전략을 바꿀 겁네다. 그러나 화해의 제스처를 써도 언제 기습작전을 펼지 모르니까 방심은 금물입네다.”
“설사 북한이 핵무기 공격을 시도한다 해도 미국이 핵무기로 반격할 가능성도 있고 북한의 핵무기 발사 징후가 포착되면 남한과 미국의 첨단무기로 핵무기가 발사되기 전 발사원점이 타격될 수 있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그래서 귀순 전 북한의 핵 공격이 무모하다고 여러 차례 반대의사를 표명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네다. 북한의 강경파들은 남한의 어떤 지점에 제한적인 핵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기선을 잡고 이를 토대로 협상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습네다, 그리고 인스펙터와 공동작전을 펴서 기선을 제압할 수 있다고 보는 겁네다. 그렇지만 이는 망상에 불과하고 백두산 작전은 결국 북한이 멸망하는 길로 가는 무모한 불장난에 불과합네다.”
지섭이 질문했다.
“인스펙터라는 국제 범죄조직이 소위 그들의 세계전략 중 하나로 일본, 중국 등을 핵 공격하고 북한이 남한에 대해 핵 공격을 한다는 시나리오를 짜고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이게 가능하기나 합니까?”
“나도 인스펙터의 정체는 자세히 몰라서 뭐라고 정확하게 답변하기 어렵지만 서두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중국, 일본까지 공격하고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도록 충동질 할 정도로 무시 못 할 조직과 자금력을 갖추고 있다고 들었습네다. 그러나 실제로 그 계획이 얼마나 실현 가능할지는 모르갔습네다. 당사국인 중국과 일본은 물론 미국도 개입할 수 있는 상황이라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갔습네다. 그러나 북한은 이 틈에 남한을 공격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봅네다.”
“그 인스펙터인지 하는 조직에 대해 의문점이 많은데요. 러시아 당국이 그런 방대한 조직을 수사하지 않나요? 미국 CIA 같은 첩보기관에서도 조사를 할텐데요. 혹시 러시아 마피아 같은 조직 정도가 아닙니까?”
“그 점은 저도 자세히 모릅네다만 지금 러시아 당국이 수사를 하고 미국 CIA가 은밀히 조사하고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습네다. 그러나 이 조직이 마피아 정도의 간단한 조직이 아닌 걸로 압네다. 제 가족이 납치기도와 피습을 당하고 제 딸아이도 납치될 번 하지 않았습네까?”
민 박사가 컵의 물 한 목음을 마시며 질문의 홍수 속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민 박사나 채영은 이렇게 많은 기자들이 조금도 주저 없이 마음대로 하고 싶은 질문을 하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격앙된 분위기에서 더 많은 질문과 답변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민 박사 일가의 부상이 아직 완쾌되지 않은 상황에서 너무 오랜 시간 무리하는 것을 걱정한 정부 측이 회견 마무리를 서둘렀다.
“질문 한 가지만 더 하겠습니다. 현재 민 박사님과 따님, 아드님의 부상은 얼마나 치료되었는지요? 특히 따님 민채영씨의 부상이 가장 심하다고 들었는데 얼마나 치료해야 합니까?”
명성일보 웅서가 지섭이 가장 궁금해 하는 사항을 물었다. 지섭과 은경이 바짝 긴장했다.
“네, 병원에서 여러 가지 치료를 잘 해주어 많이 좋아지고 있습네다. 저는 이제 통원치료만 하면 되고 수영이는 거의 치료가 다 되었습네다. 딸 아이 채영이는 사실 오늘 이렇게 나와 앉아 있는 거이 좀 염려는 되디요. 아마 회견이 끝난 후 다시 입원 치료를 해야 되지 않을까 봅네다.”
이 때 옆에서 치료를 담당하고 있는 의사가 추가로 설명했다.
“민 박사님은 저번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왼쪽 갈비뼈 부분에 총상을 입어 그동안 치료 결과 조금만 더 통원치료 하면 완쾌될 것으로 보고 아드님 수영 군은 현재 완치상태에 있습니다. 따님 채영 양은 보시다 시피 왼쪽다리 부상으로 목발을 짚고 있습니다. 입원 치료와 정밀검사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민채영씨는 앞으로 얼마나 치료를 해야 하며 치료하면 목발은 짚지 않아도 되나요?”
지섭이 다급하게 물었다.
“수개월 정도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완치되어 목발이 필요 없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수개월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몇 달이란 말입니까? 한 달이요, 두 달이요. 그리고 목발이 필요 없기를 희망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지요?”
지섭이 재차 질문했다.
“의학적인 정밀검사를 해봐야겠지만 아마 직접 치료는 앞으로 한 달은 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그 후 재활치료와 훈련이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훈련이 끝난 후면 목발이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의사의 말은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닌가. 지섭은 절망했다. 채영의 얼굴을 보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이 스쳐갔으나 다시 평온하고 행복한 표정이 되었다.
‘지섭씨, 너무 걱정 말아요. 치료 잘될 거예요. 후유증 없이 재활훈련 잘 받을게요. 나, 당신 앞에 목발 없이 설 거예요. 꼭 꼭 그렇게 할 게요’
채영의 눈은 그렇게 말했다.
이때 ABS 기자가 벌떡 일어났다.
“한 가지만 더 질문하겠습니다. 민채영씨는 모스크바 유학도 하고 싱가포르 대사관에 근무하는 등 해외 경험을 하면서 대한민국에 귀순할 결심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민 박사님 일가가 이렇게 함께 귀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들었는데 직접 한번 답변해 주시지요.”
보도진의 모든 시선이 이제까지 조용히 앉아있던 채영에게로 일제히 쏠렸다. 보도진의 플래시가 터지고 티브이 카메라와 조명이 집중되었다. 채영은 갑자기 당하는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작을 되찾고는 답변했다.
“제가 귀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기보다는 아버지께서 백두산 작전을 아시고는 혼자 너무도 고민하시고 고통 받으시는 모습을 옆에서 차마 보지 못해 해외에 나가 폭로하는 것이 어떠냐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핵전쟁은 무슨 수를 쓰든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시고 여러 경로를 통해 반대의사를 표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저희 가족은 핵전쟁의 위기를 느끼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때가 마침 제가 해외에 근무할 때여서 개방된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을 보고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과연 현재 북한의 체제가 옳은 것인가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분의 조언과 도움으로 남한으로의 귀순을 결심하고 아버지께 건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때 은경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그 도움을 주었다는 분이 누구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채영은 은경을 잠시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건 훗날 기회가 있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실내가 잠시 웅성거렸다.
“자, 기자 여러분. 이제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습니다. 궁금한 것이 많으시겠지만 민 박사님 가족이 아직 완쾌된 것이 아니어서 오늘 너무 무리하면 안되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기자회견을 끝내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기자들은 그 자리에서 서둘러 이 세기의 뉴스를 노트북 컴퓨터로 기사화했다. 민 박사 일행도 자리를 뜨고 있었다. 지섭은 재빨리 채영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많이 아프지요? 꼭 나아야 해요. 꼭...”
“걱정 말아요. 치료 잘해서 담에는 목발 없이 혼자 걸을게요.”
“꼭 그래야 해요. 휴대전화는 아직 없어요?”
“아직 받지 않았는데 달라고 해서 전화하겠어요.”
“우리 빨리 만나요.”
“빨리 만날 수 있게 막 조를게요.”
“그때까지 안녕..”
“안녕...”
지섭은 채영이 관계관들에게 둘러싸여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은경이 지섭에게 다가섰다.
“아, 은경아. 아직 안갔어?”
은경은 말없이 입술만 깨물고 서 있다가 홱 돌아서서 가벼렸다. 웅서가 두 사람을 보고 서 있었다.
“웅서야, 민 박사 가족들이 언제나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을까? 사회부보다 너희 정치부에서 더 빨리 알 수 있지 않을까.”
“우선 민 박사와 채영씨 부상치료를 서둘러야 할 거고 다음은 경호가 문젠데, 이제 기자회견서 모든 걸 폭로했으니까 북한과 인스펙터에서 본격적으로 저격수를 보내겠지. 아마 당분간 자유로운 외출은 안 될 거야.”
지섭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섭아, 인스펙터의 움직임은 진영 형이나 아나스타샤에게 알아봐 달라고 하지 그래.”
“그래야겠어. 근데 아나스타샤도 요즘엔 위험해. 조직에서 이탈하려는 것을 눈치챘나봐. 부쩍 감시가 심해진데.”
민 박사의 기자회견 후 세계는 들끓었다.
북한은 민 박사의 기자회견 후 즉시 반박성명을 발표했다.
“남조선은 우리 측 고위 관리인 민영대의 딸을 감언이설로 유인해 그들 일가를 강제로 납치, 협박해서 얼토당토않은 허위사실을 날조해 선전에 이용하고 있다. 우리 조선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은 평화를 애호하며 미 제국주의자들과 남조선의 전쟁도발에 말려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저들이 도발해 오면 비겁하게 굴복하지 않고 천배 만 배의 불벼락을 내릴 것이다. 우리 공화국을 모함하는 무리들에게 엄중한 경고와 함께 응분의 책임을 묻는 바이다. 더구나 인스펙터인가 뭔가 하는 조직을 우리는 알지도 못하며 우리 공화국이 그들과 공모해 뭔가를 꾸민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허위날조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 두는 바이다.”
미국 국무부도 즉각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정부는 핵전쟁을 획책하고 있는 북한과 인스펙터라는 조직의 무모한 계획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으며 한국 및 우방 국가들과 협의 하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해 이를 저지할 것이다. 북한은 지금이라도 핵전쟁 계획을 철회하고 정상적인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돌아 올 것을 요구한다. 아울러 개혁, 개방의 길을 선택하기를 촉구한다. 전쟁도발에 의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북한과 인스펙터에 있음을 경고한다. 그리고 러시아 당국은 즉시 그들 영토 안에 있는 인스펙터 조직에 대한 수사를 벌여 무모한 범죄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사법처리할 것을 요구한다.”
중국은 자국에 대한 핵 공격 계획을 세우고 있는 인스펙터에 대해 분노하고 있으며 이에 동조해 한국에 대한 핵 공격을 하겠다는 북한에 대해서도 경고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중국은 어느 국가나 단체를 불문하고 어떤 이유에서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반대한다. 특히 다른 나라를 이유 없이 핵무기로 침공하려는 무모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나라와 조직은 즉각 음모를 중단하고 국제사회의 심판을 받으라.”
이와 함께 중국의 항공모함과 스텔스 전투기, 잠수함 등이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태평양 전쟁 때 이미 원자탄 세례를 맞본 일본 국민들도 경악했다. 일본 정부는 즉각 강경성명을 발표하고 언론들도 연일 핵전쟁 시나리오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국민들은 불안에 휩싸였다. 극우파들은 당장 일본의 핵무장을 주장했다.
러시아는 자국 내에 있는 인스펙터 기지와 본부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와 수색작전을 벌였다. 아울러 세계 각국과 공조해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인스펙터 조직에 대한 수사와 조직원 검거에 들어갔다. 러시아 당국은 인스펙터 본부가 핵무기를 갖추고 있다고 보고 이들이 선제공격을 하기 전에 공격할 준비에 들어갔다.
미국은 한국, 일본과 공조해 전쟁에 대비한 비상태세에 돌입했다. 한반도와 가까운 오끼나와, 괌 기지의 전투기와 함대 뿐 아니라 제7함대가 거느리고 있는 조지워싱턴 항공모함과 이지스 함, 핵 잠수함 등 화력을 한반도를 비롯해 일본, 동아시아에 긴급 이동 배치했다. 최신예 F-22 스텔스 전투기, 핵미사일을 발사하는 B-2, B-52 전략폭격기,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등이 발진태세를 갖췄다.
한국도 F15-K 최신예 전투기와 이지스 함, 잠수함 등이 당장 발진할 수 있는 준비에 들어갔다.
민 박사의 기자회견 후 대통령이 주재하고 있는 비상 국무회의장.
남북일 대통령이 무겁게 입을 떼었다.
“한반도에 마침내 핵전쟁의 위협이 닥쳤습니다. 북한이 비록 백두산 작전 계획을 부인하고 있지만 계획자체를 포기했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이제 국가 존망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우리가 이 위기를 어떻게 지혜롭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한반도가 초토화 되느냐, 아니면 생존할 수 있느냐가 결정될 것이오.”
대통령이 좌중을 둘러보고는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최후의 순간까지 북한과 인스펙터가 계획을 포기하도록 우방 국가들과 협조 하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이오. 그러나 한반도에서 핵전쟁이 있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변수가 있는데 국가정보원장 보고해 보세요.”
국가정보원장이 침을 한 번 삼키고는 보고했다.
“귀순한 민영대 박사의 정보에 따르면 민 박사는 오는 팔월 십오일 북한노동당 정치국의 온건 개혁파의 거두인 김백주 상임위원이 보내는 밀사를 비밀리에 모스크바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합니다. 김백주는 이상국 정치국 위원과 민 박사, 그리고 한영일 비서국 비서와 함께 결의형제를 맺은 사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북한군부의 야전군 실세 박기웅, 배동명 대장 등과 함께 민 박사 일가를 탈출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대남 협상파로 백두산 작전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민 박사 일가의 귀순으로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이들이 언제 숙청될지 모르는 위험한 처지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김백주의 밀사를 예정대로 모스크바에서 접촉할 수 있을지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일단 우리도 민 박사와 함께 갈 사람을 극비리에 정해 놓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대통령이 말했다.
“그것은 좋은 정보지만 우리가 그 것에만 기대고 있을 수만은 없소. 북한의 공격을 미리 탐지하고 상대방의 전략중심부를 타격해 작전, 통제기능을 미리 마비시키는 방법에 대해 국방장관 말해 보시오.”
“한, 미군은 최신예 정찰기와 위성탐지, 조기경보체제로 북한의 공격징후를 미리 탐지하고 우리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선에서 방어를 하는 동시에 적의 미사일 기지와 장거리 포대, 해안포대에 타격을 가하고 전쟁지휘부를 무력화 시킬 수 있습니다. 최신 공대지 미사일로 북한의 핵무기 발사 기지를 격파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최신예 전투기는 제공권을 장악할 것입니다. 그러나 핵무기 발사 징후를 미리 감지하지 못했을 때는 문제가 심각해 질수도 있습니다. 요격 미사일로 요격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동시에 핵무기를 발사하더라도 핵전쟁에서는 상호간 막대한 피해는 면할 수 없습니다.”
회의장에서 대통령을 비롯한 각료들이 깊은 신음과 탄식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극비리에 추진하고 있는 계획에 대해 이 자리에서 밝히겠어요. 한라산 작전이라고 명명된 이 계획 대해서 국방장관의 설명이 있겠소.”
“네, 대통령님의 특명에 따라 그동안 극비리에 추진해 오던 한라산 작전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우리 국방과학연구소는 그동안 우리의 원자력 기술을 바탕으로 핵무기 개발을 해왔습니다...”
회의장 내에서는 여기저기서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몇 년 전부터 핵물리학자들을 비롯한 해외과학자들을 유치한 것을 여러 장관님들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대통령님 주재 하에 국가안보회의 멤버들과 이들 저명한 과학자들, 그리고 국내 몇몇 과학자들과 여러 차례 토의를 거듭한 끝에 우리도 핵무기를 가져야겠다는 결정을 했습니다. 우리는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풍동실험 등을 거쳐 북한이 개발, 보유한 핵무기보다 성능이 우수한 핵무기 개발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두산 작전이 계획되고 있는 시월 일일 전까지 실전배치할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최대한 개발속도를 서두르면 연내에는 실전배치할 수 있을 걸로 사료됩니다.”
이미 이 계획을 알고 있는 장관들과 아직 계획을 공식적으로 통보받지 못한 장관들 모두 심각하고 비장한 표정이 되었다.
한 장관이 발언했다.
“핵무기 개발은 우방인 미국과 국제사회에 미치는 충격이 대단히 클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장 유엔의 재제가 들어올 것인데 무역으로 먹고사는 개방국가인 대한민국이 이런 국제 사회의 재제와 압력에 견딜 수 있을지 대단히 우려되고 의문시 됩니다. 이에 대한 대책이 있습니까?”
외교부 장관이 답변했다.
“충분히 예상되는 일입니다. 대통령님을 비롯해 국가안보회의 멤버들도 이 문제에 대해 많은 고민과 망서림을 가졌습니다. 만일 이번에 백두산 작전 계획을 평화적으로 무산시키고 남북이 평화적 통일을 달성하면 우리는 핵무기 폐기를 단행할 수도 있다는 점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대통령이 말했다.
“한라산 작전에 대해서는 많은 우려와 충격이 예상된다는 점을 나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작전과 함께 북한의 내부 움직임을 기민하게 포착해서 이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전략도 갖고 있습니다. 한라산 작전에 대해서는 극비에 붙이고 말조심하시기 바라오. 민 박사와 함께 모스크바로 갈 밀사는 국정원장과 통일부 장관으로 정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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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국 뉴스에서 북한의 핵무기 실험을 많이 보도하던대...소설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실감나고 좀 걱정이 되네요.
광섭씨는 뭐 좀 알고 있는것 같애. 앞으로 어떻게 story가 이어질지 궁금. 한국에 머무는 동안 뉴스만 보면 겁이 나던데.
영화로 만들어도 흥미 있을것 같은대. 어때요?
현실보다는 약간 앞선 얘기니까 걱정 안하셔도 돼요~~~. 북한이 아직 이 정도는 못됩니다. Story를 극적으로 꾸미다보니...
전에 KBS에서 연락이 왔는데 좋은 소재지만 무대가 방대하고 제작비 문제와, 북한에서 반발할까봐 걱정이라고...ㅋㅋ
지금까지 9편,내 카페에 옮기면서 대충은 훑지만 다시 좀 한가함을 만들어 새롭게 읽으려고 하네요.
글을 읽으며 영화화나 드라마화를 생각합니다. 내가 주연은 안될것이고 어디 지나기는 행인이라도 혹시.....단 한 컷에 총맞고 죽어 퇴장하는 역만 아니라면....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