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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 운영자 |
Subject | 전라북도청 홈페이지에 전라도 역대 도지사 조선시대 세종때의 60대 전라감사 한전(韓磌) |
Homepage | http://jbphoto.jeonbuk.go.kr/ |
전라도 역대 도지사 조선시대 세종때의 60대 전라감사 한전(韓磌) 발자취를 따라 조선시대 남원중방현 이었던 전남 구례군 시상리에 경재(하연 선생)의 비각에 할아버님의 시를 발견할수가 있었으며,또한 합천해인사에서 발간한 신옹유부 책속에 청주후인 한전 찬 한내용이 발견됨으로 그동안 역사속에 묻혀 있던 선조님의 실록을 찾게 되었습니다. 한전(韓磌) 할아버지에 대한 전라감사 유록을 발견하여 게시하니 청주한씨 참의공파 후손 들께서는 선조님의 내용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세종 26년(1444) 7월에 전라감사직에서 이임한 李孟畛에 이어 韓碩(한석)이 그 후임으로 재직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그 사실을 세종실록에서 확인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석이라는 인물의 행적 또한 분명하지 않다. 위 실록에 따르면 한석은 세종 22년 9월 11일(경술)에 첨지중추원사에 임명되었다고 나올 뿐 그밖에 다른 어떤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그 뒤 뜻밖에도 淸州韓氏 門中의 연락을 받고 河演(1376~1453)의 문집인 敬齋集 을 조사한 결과 이 때 전라감사를 지낸 인물은 한석이 아니라 한전(韓磌)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연 또한 세종 초에 전라감사를 역임한 인물로, 이 문집에 따르면 세종 4년 가을에 남원의 산동에 왔다가 시를 지어 돌에 새겼다. 그 후 세종 27년에 한전이 감사로 이곳에 와서 그 시비가 이끼에 파묻혀 있고 글자가 닳은 것을 보고 石工에게 명하여 이를 다시 새기게 했다는 것이다. 한전이 감사로 재직한 시점은 선생안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선생안에서 한석이 이임 후 호조참의에 임명되었다고 하였는데, 세종실록에서 한석이 아니라 한전이 호조참의에 임명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선생안의 기사는 韓磌을 韓碩으로 誤記한 것이 확실하다. 성종의 외조부이기도 한 韓確은 바로 그의 친형이다. 한전에 관해서는 세종실록에 세종 원년(1419)에 義盈庫丞에 임명되었다고 한 것이 그 최초의 기사이다. 그 뒤 동왕 22년(1440) 11월에는 공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다음 달 형조참의로 자리를 옮겼다. 동왕 24년(1442)에는 황해도 관찰사로 외직에 나갔다. 당시 젊은 한전을 감사로 발령낸 데 대하여 사헌부에서 그가 “나이 젊고 자질이 아름다워서 일을 할만 하지만, 일에 경험이 없으니 갑자기 중한 책임에 임명할 수는 없다”고 반대하면서 서울에서 행정사무를 숙달시킨 뒤에 요직에 기용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은 대신들과의 논의를 거쳐 임명을 그대로 확정지었다. 전라감사에 임명되었다. 한전은 감사로 재직하면서 특히 왜구의 동향에 관심을 갖고 이에 대처하였다. 그 해 윤 7월 그는 병조에 통첩을 보내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이미 諸鎭에 공문을 보내어 엄중히 경계하여 變에 대응하도록 하였습니다. ” 받았다. 특히 남해 지역의 방어에 힘쓰라는 당부를 받았다. 이듬해 2월에도 왜구의 잦은 노략질과 관련하여 왜적의 방비에 만전을 기하라는 유시를 다시 받았다. 그는 세종 26년 11월 감목관이라는 직책을 혁파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였다. “監牧官이란 직책은 여러 섬에서 기르는 말들의 번식하는 것을 살피는 일에 불과할 뿐인데, 수령과 萬戶들이 다 監牧을 겸해서 그 일을 맡아 보고 있습니다. 감목관은 목장을 순시하는 것이 1년에 두세 차례에 불과한데, 이로 인하여 지나가는 고을마다 창고의 곡식이 소비되어 그 폐가 적지 아니합니다. 더구나, 司僕寺에서는 매년 봄·가을로 여러 섬에 있는 말들을 점검하고, 監司도 또한 감목을 겸직하고 있는 수령과 만호의 잘하고 못하는 성적을 살피고 있으므로, 감목관이란 벼슬은 없어도 좋으니, 청하옵건대, 혁파해 버리고, 그 여러 섬의 牧養하는 상황을 點馬別監으로 하여금 검찰을 兼行하여 위에 아뢰게 하고, 감사에게 이첩하여 출척의 자료로 삼게 하소서. ” 전라감사 한전은 도내 인민이 먹을 양식 7만석을 청하여 정부의 재가를 받았다. 동왕 29년 1월에는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다음달 사망하였다. 그가 죽자 임금은 棺槨과 米豆 10석을 賻儀로 내려 주었다. |
첫댓글 조상님의 유록을 찾고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몸소 현지답사하신 참의공파 종중회장 및 임원님들의 노력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