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지역(West Bank)과 사해(Dead Sea)
서안지역 관광은 원래 여행 일정에는 포함되지 안한 지역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어제 요르단과 이스라엘 국경(알렌비) 입국과정에서 너무나 시간이 지체되어
차질이 생겼기 때문에 오늘 사해를 보기위해 아침 일찍 출발하게 된 것이다.
여행을 준비하면서도 그 위험한 서안지역에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해 본 일이지만 버스를 타고
예루살렘에서 사해로 가는 도로가 서안지역을 통과 해야만 하기에 차창 밖으로 비쳐지는
실상만을 보았을 뿐이다.
예루살렘(해발 800m)이란 도시도 비교적 높은 지대에 위치하지만 사해로 가려면 동쪽 언덕 높은
구릉지를 지나야 했다.
버스 안에서 빠르게 지나는 풍광을 보고 있으려니 정말 실감나는 갈등의 현실을 목격하게 되고
국내 언론매체에서 왜 중동 분쟁의 불씨가 서안지역 바로 여기에서 촉발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특히 중동 분쟁의 비극의 참 모습을 똑똑히 보는 것 같아 씁쓸함을 느꼈고 한편으로
이스라엘 관광의 진수(眞髓)의 묘미를 체감할 수 있어 흡족하였다.
수천 년 전부터 심심찮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종교와 영토분쟁이 잉태되어 두민족의
아픈 역사가 얼마나 많은 갈등과 반목으로 이어졌는지 대충 짐작이 같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분쟁의 서안지역 약도-----
-----예루살렘 동쪽구릉지의 서안 지역-----
-----이스라엘 정착촌을 보호하기 위한 콩크리트 벽-----
-----이스라엘 정착촌을 보호하기 위한 콩크리트 벽-----
-----예루살렘 동쪽 구릉지의 베두인족 마을-----
서안지역(West Bank)은 이스라엘의 동쪽지역과 요단강 사해 사이의 분쟁지역을 말한다.
면적이 5860km2정도이며 현재 아랍인이 210만 명이 살고 있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영토분쟁의 핵심 지역이다.
행정구역상 팔레스타인 독립국 자치정부의 영토로 분할되어 있는 이 지역은 국제법상 어느
나라의 영토도 아니고 실질적으로 이스라엘 군사 통제 하에 놓여 있는 곳이다.
이곳은 팔레스타인의 대 이스라엘 테러가 끊이지 않고 있는 지역이어서 이스라엘이 테러범
소탕작전을 대대적으로 벌이는 곳이기도 하다.
서안지역(West Bank) 안에는 유대인 정착촌이 군데군데 산재해 있어 이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이스라엘군이 개입하는 것이다.
성지순례 하는 관광객을 향해 돌을 던지거나 혹은 무력행사로 테러를 서슴지 않고 감행하는
아랍인 들은 그 이유가 관광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간접적으로 돕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서안지역으로부터 이스라엘군의 철군 문제와 연관되어 있어 중동평화회담의
핵심이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요단강 서안지역이 처음 형성된 것은 1948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와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독립선언을 선포하고 UN의 승인을 받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아랍인들은 이에 강력히 반발을 하고 요르단은 요단강 서쪽지대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스라엘과 전쟁을 일으켜 분쟁지역으로 만든다.
1949년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고 소위 “녹색선(The Green Line)" 이라는
경계선이 형성되면서 ”서안지역“이라고 불리는 지역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이곳에 아랍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그리나 요르단은 이스라엘과의 휴전협정을 어기고 이 서안지역을 일방적으로 요르단 영토에
편입시키는 한편 거주하는 모든 사람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에 1967년 이스라엘은 6일 전쟁을 통해 완승을 거두고 이스라엘 영토는 두 배로 확장되면서
이 지역도 점령했으나 합병하지 않고 군사적 점령지역으로만 남겨 두었었다.
그 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샤론 총리(당시 건설장관)가
이곳에 대규모 유대인 정착촌(140여 곳)을 건설하고 20여만 명의 유대인들을 이주 시킨데 서 부터다.
국제법상으로 불법점령지에 정착촌을 세운다는 것은 UN을 비롯하여 모두가 비난하고 있었지만
이스라엘 역대정권은 이를 무시하고 현재까지 입장 변화 없이 정착촌을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이 대이스라엘 무장테러를 시작한 것은 1982년 “레바논 전쟁” 이후부터인데
이는 레바논을 거점으로 테러를 일삼는 PLO 본부를 섬멸하고자 하는 이스라엘의 의도에서였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극한 대립은 점점 고조되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민족봉기(인티파다)로
이어져 양측은 첨예한 대립관계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미국 워싱턴에서 회합을 갖고
“오슬로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해결하는 듯 했다.
그러나 최종 협상과정에서 양측은 현격한 입장 차이를 드러냈는데 이스라엘은 자국의 안보가 보장된
이후에 요단강 서안지역을 팔레스타인에게 돌려주겠다는 “선 안보 후 반환” 을
팔레스타인 측은 “선 반환 후 협상”이라는 주장을 서로 굽히지 않았다.
그러한 다른 입장을 내세워 1996년부터 팔레스타인의 대이스라엘 테러행위가 격렬하게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대중교통수단인 버스에서의 자살테러가 감행되는가 하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측의 평화협정
준수 의지를 의심하고 팔레스타인 측은 영토를 반환할 의사가 없기 때문이라고 이스라엘 측에
책임을 떠넘겼다.
이러한 양측의 뚜렷한 입장 차이는 수십 차례의 평화회담에도 불구하고 전혀 좁혀지지 않고
아무런 결론에 도달하지 못 했다.
이러한 가운데 요단강 서안지역서는 다시 제2차 “인티파다“가 일어나 안보에 위협을 느낀
이스라엘은 중동평화회담을 전면 중단한다.
그 후 팔레스타인의 테러행위는 계속되었고 테러행위를 저지하기 위하여 철수하였던
이스라엘군대가 재점령하고 강경정책을 썼지만 분쟁은 계속되었다.
-----서안지역 이스라엘 정착촌 콩크리트 벽-----
-----서안지역 구릉지의 베두인족 마을---
-----서안지역 구릉지의 베두인족 마을-----
그럼 왜 분쟁의 실마리를 못 찾고 있는지 원인과 역사적 배경을 되돌아보기로 하자.
역시 이 분쟁을 이해하는 데는 구약성서라는 성경에서부터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데
이 두민족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아브라함의 한 핏줄이다.
적자(이삭)와 서자(이스마엘)로 출생된 이 두 형제는 장구한 세월을 같은 언어 같은 풍습을
지니고 반목과 질시 서로 다른 배타적 성격의 종교를 갖고 철천지원수로 살아간다.
기원전 77년 유대는 로마에 의해 패망하여 지도상에서 흔적도 없이 살아져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 각 지역에서 뿔뿔이 흩어져 갖은 박해를 받으며 살았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에서 전항이 불리해지자 아랍인과
유대인에게 각각전쟁에서 승리하면 독립을 약속하며
샤리프 후세인(Sharif Hussein)-헨리 맥마흔(Henry Macmahon)서한과
밸푸어선언(Balfour Declaration)을 했다.
내용을 보면 후세인- 맥마흔 서한이란 주 카이로 영국 판무관 맥마흔이 10여 차례에
걸쳐 아랍의 정치지도자 샤리프 후세인에게 독립을 보장한다는 약속의 서한이고.
밸푸어 선언이란 영국외상 밸푸어가 유대계 은행가 로스차일드(Rothschild Nathan Meyer)
에게 시오니즘을 지지함과 동시에 전쟁비용을 지원해 주면 종전 후 옛 유대 땅에 이스라엘
건국을 약속한 것이다.
어떻게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영국은 양진영에 독립 국가를 보장한다는 약속을 하고
한쪽에는 목숨을 걸고 싸우게 하고 한쪽에는 막대한 자금을 지원 받았는데 결국 종전 후에는
모든 약속을 저버리고 자신의 위임 통치지역으로 만들었다.
한 지역을 가지고 두 민족에게 모순된 약속을 하여 양 민족 간의 분쟁을 일으키게 한 촉진제
역할을 한 영국정부가 비극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 같다.
밸푸어 선언과 맥마흔 선언은 독립을 열망했던 아랍인들의 분노로 이어져 테러와 습격에
봉착하였고 영국은 사태 해결을 보류한 채 UN에 떠넘기고 발을 무책임하게 뺐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두고 갈등을 빚은 중동전쟁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데 그래도
이 복잡한 문제를 당사자와 국제적 감각으로 풀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쉽사리 분쟁의 해결책이 나오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렵겠지만 진정한 평화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세계 각국의 중재노력과 양측 간의 신뢰회복이 선결과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황량한 구릉지 사막-----
-----황량한 구릉지 사막-----
-----높은 구릉지 사막에의 서안지역-----
-----해면을 알리는사해로 내려가는 레벨입구-----
-----사해로 들어가는 입구에 레벨 표시점-----
사해 (死海=Dead Sea)
사해는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 국경에 있는 염호(鹽湖)이다.
호면이 해면보다 400m 가량 낮아 지구에서 가장 낮은 수역을 형성하고 있는 이 염호는
서쪽엔 이스라엘 구릉지대와 동쪽으론 요르단 고원이 있고 북쪽으로는 요단강이 흘러든다.
길이는 80km. 너비는 18km. 면적은 1020km2로 최대수심은 396m에 이른다.
사해라는 이름은 고대 헬레니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히브리인의 조상 아브라함과
고대 도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성서의 내용에서부터 관련되어 있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백성들의 부도덕으로 인해 하늘에서 내린 유황불로 심판했다고
전해지는 소돔과 고모라의 터가 현재 사해의 남쪽 수역에 가라앉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어
사해라는 이름이 연유된 이유인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사해라는 이름의 유래는 염도가 일반 바다보다 10배가량 높아 생물이 전혀
살지 못하기 때문에 사해라는 명칭이 자연스럽게 붙여진 것으로 추측된다.
사해는 역사적으로도 숫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스라엘 왕 다윗과 유대 왕 헤롯 1세가
왕이 되기 전 피신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로마인들이 난공불락의 마사다성을 점령하기
위하여 전투를 벌인 격전지로도 유명하다.
또한 연안지대는 고대문명이 발전한 곳이어서 사료적 가치가 높은 유적이 많이 발굴되고 특히
근처 쿰란동굴(Qumran Caves)에서는 고대 필사본 두루마기 사해문서(DeadSeaScrolls)가
발견되어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역사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레벨 표시점에서 사해로 내려가는 길 옆 풍광-----
-----사해 풍광-----
-----사해 풍광-----
-----사해 풍광-----
-----사해 풍광-----
사해는 북쪽의 요단강으로부터 물은 유입되나 유출 구는 없는 막힌 호수다.
이 지방은 비교적 건조한 기후이기 때문에 유입수량과 거의 동량의 수분을 증발 식혀 수면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균형이 깨져 수백만 년 동안 지속된 이런 상황이 사해의 크기가 줄고
퇴적층의 두께는 많이 두꺼워진다고 한다.
사해에 유입되는 물의 량에 비하여 증발되는 량이 많아 1년에 평균 80cm 가량 수면이 낮아져
이미 50년 전에 비하여 20m 이상 낮아졌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비율로 간다면 얼마 안가
사해는 소금밭으로 지형이 변형 될 것이라 학계에선 보고 있다.
이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스라엘과 요르단과 세계은행 등에서는 사해로 유입되는
수량을 늘리기 위하여 이념과 민족 간 갈등을 초월하여 협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고 한다.
-----사해 풍광-----
-----사해 풍광-----
-----사해 풍광-----
-----사해 풍광-----
사해의 물은 기본적으로 지중해에서 유입된 바닷물이라고 한다.
400만년 전 지구 온난화를 비롯한 기후 대변동을 겪으면서 지중해의 해수면이 상승하여
바닷물이 이곳에 흘러들어 큰 호수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냉각기가 도래하면서 바닷물이 더 이상 흘러들어 가지 못하자 현재의 사해보다 긴 225km 길이의
거대한 호수가 형성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무더운 기후와 함께 호수의 물은 증발하여
호수 면이 차츰 낮아지면서 지중해 해수면보다 낮아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거대한 호수는 결국 물의 증발이 가속되어 북쪽의 갈릴리 호수와 남쪽의 사해로 나뉘게 되고
이 두 호수는 지금도 요단강으로 연결되어 물이 흐르고 있다.
-----사해 풍광-----
-----사해 풍광-----
-----사해 풍광-----
-----사해 풍광-----
사해는 염도가 높아 누구라도 물에 들어가면 수영을 못해도 가라않지 않는 진기한 현상을 맞이한다.
그리고 인체에 유익한 각종 광물질을 다량으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진흙 목욕과 함께 병 치료에도
효과적이고 특히 미용효과에 뛰어나다고 알려지면서 화장품공장이 설립되기도 했다.
이집트 여왕이었던 클레오파트라도 미용을 위해 노예들을 시켜 정기적으로 사해의 검은 진흙을
가져 오라고 했다니 고대부터 이 사해의 진흙은 유명했던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