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淵書院 창건기를 번역하다가 요약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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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서원 창건일기
36쪽 4000자로 추정되고 도연서원에서 자료를 참작 조선말 기존 기록을 보고 일괄적으로 한 사람이 쓴 것 같다.
도연서원 창건일기는 1868년 서원폐철 전 까지 기록으로 추정되고 중간에 약간의 일자 오류도 있다고 본다. 현재 보이지 않는 부분과 해석 문제로 곤란하지만 전반적으로 큰 내용은 없고 대략 다음과 같다. [춘양지] 저자가 본 도연서원 건설자이기에 전반부는 춘양지 내용이 더 정확하다.
당시 서원 건설은 많은 금전이 소요되는 바 서당훈장인 김진우가 1665년경 30대 후반에 모금을 하여서 시도하다가 경신대기근(80만 사망,1670-1671) 으로 보류하고 1680년에 정구의 제자 허목이 [한강(정구)문집]을 만들고 아마 여기에 자극 받아 서원 건설을 1681년 50대 초 나이에 재시도한 것 같다. 자금은 15년전 받아놓은 것이 그새 쌀 1000가마니 정도이니 2500냥 정도이고 100칸 기와집이 1500냥이니 건설은 가능했고 기존의 우곡서당 자리에 그 자재를 이용하였으니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강 정구와 함께 동강 김우옹이 같은 성주 출신인데 계속 배향이 논의 되고 있다. 그러다가 정구 단독으로 결정되고 1702년 봉안된다.
과정을 보면 여러 사람이 책임자에서 바뀌고 우여곡절이 있는바 그 때 마다 수십명 단위의 집회와 토론,의결이 있다.
1702년 허목 선생도 같이 배향 했다는 기사도 있으나 본 [일기]에는 없다. 그리고 이른바 5현(류성룡,김성일,장현광,정구,김우옹)의 공동배향 문제가 수시로 나온다. 구리고 이문제로 매우 의견이 분분함을 알수가 있다. 그런데 후기 채제공이 배향되었다고 하지만 그 기록은 [일기]에는 없다.
그리고 서원건설에 인근 서원들이 전부 관여하고 [통문(신문)]를 전부 돌려서 의견을 모으고 시행하는 것을 알 수있다. 또 관료(지역 단체장)의 도움도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수가 있다. 당시 의사결정은 상당히 민주적인 면이 강해 보인다.
동강 정구가 안동부사로 재직중 여러 문제를 원만히 해결한 내용도 실록등에 나온다. 그리고 그는 퇴계,남명의 학맥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고 또 배향이 거론되는 동강 김우옹과는 절친이고 류성룡,정현광과도 학연 혈연등으로 통한다. 그는 천재적 자질과 온후 합당한 인품으로 모두를 아우르는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오늘날 춘양의 풍토에 끼친 영향도 매우 크다고 본다.
만일 도연서원의 재건이 어렵더라도 본 [일기] 말미에 나오는 ‘주련’용 사자성어를 잘 써서 [춘양]의 교훈으로 삼는다면 그나마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글 권오철)
-건원일기 (줄거리) - 오역등이 있으나 현재 전문가 의견 수렴후 전면 개역중
/ 1665년 현종6년 풍산 이진백과 내성의 김현이 왔다. 관물헌 김진우(金震遇, 1628-1707/ 도연서원 창건자)가 한강 정구 선생 제사에 대해 이야기 하다.
/ 재원조달 문제는 기존 서당의 자재를 이용하기로 하고 토목감독에 김진현이 담당하기로 했다.
/ 한강 정구 선생은 전에 안동 부사였고 대학자인 존숭 받을 만 한 분이다.
/ 서당을 해체하고 그 자재로 동재와 서재를 건축했다.
/ 1689년 숙종15년 5월16일 유지영(서원직원)이 왔고 이후
/ 읍내(경북북부지역) 유림의 의견은 서원에 누구를 모시느냐로 의견이 분분한데 장로(어른)들은 양강(한강 정구, 동강 김우옹)을 모시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 양강서(한강 정구 문집 –허목 1680년 발간 – 과 동강 김우옹 문집이 나온지도 40년인데 두분을 모시는 일이 지지부진하다.
/ 한강 정구(1543-1620/청주정/성주), 동강 김우옹(金宇顒, 1540∼1603의성김/성주) 두사람은 서로 비견되는 인물이 후학들에게 존경받을 만하지만 상호 추종자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 불행이도 이 두 사람은 그 명성이 이어오지 못하고 그 사당도 없고 적막한 신세이다.
/ 1693년 숙종19년 가을부터 한강 정구선생 추모를 위한 제사를 위해 읍내 유림의 장로들이 논의를 했다. 사당에 모셔야 한다는 것이다.
/ 1700년 숙종26년에 춘양 탑평지(흥국사터)에 우선 사당을 건립하기로 하고 1693년 숙종19년에 이백과 유순이 수고하여 완성하고 동강 김우옹 선생도 같이 모시는 문제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 1693년 숙종 19년 가을, 공론은 분분하고 책임자가 그만 두고 하여서 노학자 장개녕을 중심으로 유생들을 모이게 했다.
/ 1693년 숙종19년 7월 유생 이백엽과 유순시를 보내서 국가의 보조로 봉안하려 하기도 했다.
/ 동강 김우웅 선생을 같이 모시는 것이 서원창건의 의미가 아니냐는 의견이 있었고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 통문(회보,소식지)에는 여헌 장현광(1554-1637)도 해야 한다 했지만 결국 전부 안되었다.
/ 1701년 숙종 27년 봄에 유생 김하신이 제안하고 남악의 유생 정항의 사의를 반려하고 유생 손산 역시 사의를 반려했다.
/ 1701년 숙종27년 2월6일 경북 북부 지역역 사림의 200명 유생이 들고 일어나 책임자 이광전,유사광을 벌하라고 하였다.
/ 도감(책임자)으로 김하신,이시상을 임명하고 사테를 수습하고 사업을 진척해 나갔다.
/ 1701년 숙종27년 2월10일 봉안도감(서원배향 총책임자) 정문흥이 와서 보니 정문구, 이시상 도감등이 분란이 일어나 의견을 모으지 못한 것이었다.
/ 1701년 숙종27년2월18일, 풍산의 김초안 송야의 권영수 주촌의 이후천등이 모여서 논의하니 이강(한강,동강) 두분을 모시는 문제로 분분하였다.
/ 1701년 숙종27년2월20일, 주계서원에서 사림의 유생들이 모여서 회의,
/ 1701년 숙종27년2월27일, 풍산 이광전, 내성 유사광 등은 경광정사(안동 서후 금계리)에 모여서 책임자 권영춘을 처벌하라고 하였다.
/ 1701년 숙종27년3월3일, 식당에 50인이 모여서 약간 추운데도 항의를 하고 60명정도가 모여서 권두익.정태징,조한익,조모씨.권시대.김휘일,권극,김이도,이천휘,권이선,정태주등을 비난하니
/ 식당에서 80인 정도가 모여서 50인이 이수약, 계상의 이참봉, 도집례(행사최고책임자) 정태주를 임명했다.
/ 1701년 숙종27년 3월27일, 행사에 필요한 제구등을 모으고 서현의 권원장,마애(남후면)의 정이주가 서원(도연)에 와서 상의하고 도산서원, 태사묘(안동)에서 곡식,음식,필묵등을 보내왔다.
/ 1701년 숙종27년 4월3일, 안동부사 이무공이 옥사문제로 중요한 봉안문제에 의견을 못주고 권원장이 유생 10여명과 같이 와서 양강(정구,김우옹) 봉안 문제 논의후 토론후, 안동부사,봉화현감(?) 두 사람에게 문의하고 한강(정구)선생 단독으로 하기로 하고 도감(도집례) 정태주로 했다.
/ 이동성,조계,권이완,정태주,김희윤,/ 김희일,이시빈,김담,이수항을 삼염(집례중의 하나)과 학생으로 삼아 공반(밥을 올림)하였다.
/ 1701년 숙종27년 3월5일, 도집례(총진행자)가 학생(안내역할)들은 옷을 정제하여 입고 대선생(정구)의 영전에 배알하고 경광서원의 의견도 듣고 반대의견으로 행사가 안될 수도 있었으나 사문(유교)의 막대한 사업을 진행했다.
/ 1702년 숙종28년 1월에 이야기가 나와서 3월에 사림의 유생 70여명이 주계서원(안동 와룡)에 모였다.
/ 1702년 숙종28년 3월 상순(丁日) 정구선생 단독 봉안.
/ 1702년 숙종28년 3월6일, 새벽에 향례(봉안)를 진행하고
/ 당장(제사 주재자)은 정흥주와 권사중, 위판(위패담당) 이기명. 아헌관 이희격 종헌관(샛째헌관) 권담 축(순서낭독) 이기윤 진설(상차리기) 이두로 박중창 정동양 김기수 권필문 이채도, 집례(진행) 정태징, 찬자(순서낭독) 권두익 정치흠 알자(안내) 정천주 찬인(안내2)윤상형 정준월, 봉향(향불담당)정시걸, 봉로(향로담당) 이수약, 본작(술올림) 정태희 임세영 권재대 임세한 금유 권극, 습준(술잔) 권중 권태영 정태연 이항춘 등으로 하고 행사를 성대히 거행했다.
/ 이판서(손산 이익찬) 답장[서신] ; (인사말)
/ 이익찬 답장[서신] ; (인사말)
/ 이익찬 답장[서신] ; (인사말) ‘...30년 일이 이제야 되니...’
/ 이익찬 답장[서신] ; 1693년 숙종19년, 양강선생 봉안문제 부타 4년뒤 정일두(정여창1450-1504) 김성일(1538-1593) 봉안문제 ,오현(유성룡,김성일,정여창,정구,김우옹) 문제등이 있었다.
/ 1725영조1년, 이원장 김원장등이 와서 의논후 춘양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한강 정구선생을 봉향했다.
/ 1725영조1년, 논의 류성룡,김성일 배향문제는 호계서원에 모셔졌고, 30년 동안 논의된 바이다. 그리하면 정구선생이 폄하된다.
/ 이찬 답서: 정구선생 단독으로 하자! 여현 장현광 선생도 봉안하자는 말이 있다.
/ 안진사 답서: 우리고장에 이런 사원이 세워져서 기쁘고 모든일은 광명정대하게 되면 좋겠다.
/ 사림에 돌린 통보문: 회연서원(성주 수륜면1622년 (광해군 14) 정구 (鄭逑)와 이윤우 (李潤雨)에 정구선생 모셔져 있다.
/ 1748년 영조24년, 정구.김우옹에다가 장현광까지 봉안하는 문제를 논의,
/1754년 영조30년,김굉필, 정여창 봉안문제논의
/1778년 정조2년, 유성룡 봉안문제 논의
/1782년 정조6년, 김성일 봉안문제 논의
/ 논의에 참석자: (명단) 50-60명 (생략)
/ 한강.동강 배향 문제 논의, 장현관 배향 문제, 목천서원(현재 기록없음), 사빈서원에서 양읍(안동,봉화) 유림들이 논의
/ 1821년 순조21년 본 서류를 보낸다.
/ 1821년 순조21년 4월13일 도동서원(대구?)에서 주계서원(와룡)으로 4월14일 호계서원(임하)으로 4월22일에 경광서원(서후)로 4월27일에 청성서원(풍산)으로 노림서원(일직) 또 경산서원(경주)로 가서 9월25일에 본원(도연서원)에 도착.
/ 정구선생 별도 봉향 서원 건립 이유와 동강 김우옹 같이 봉안 못한 이야기
/ 장개녕 답서 : 장현광은 천곡서원(성주 벽진)에 봉안하고, 1862년 철종13년 5월16일 쓰다. 정구선생 모시니 사액서원으로 하고 동강 김우옹 봉향은 불필요하다.
/ 장개녕 답서: 초겨울 봉안제문,
/ 장개녕 답서: 한강 정구 선생 모신지 30년 한강집(1680년숙종 6,허목 (許穆)편찬·간행)을 봉정하다.
/ 장개녕 답서: 병으로 늦지만 봉안서를 올린다.
/ 한강선생 도연서원 봉안제고문: (4자 성어로 칭송/서원의 주련)
/ 동수도서: (4자 주련용)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