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권맹손(1390-1456)
예천군 용문면 성현리 중마( 鳩谷) 출신으로, 용문면 대제리로 옮겨 살았다. 자는 효백(孝伯), 호는 송당(松堂), 시호는 제평(齊平), 본관은 예천, 상(祥)의 아들이다.
19세로 1408년(태종 8)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427년(세종 9)에 문과 중시(重試)에 을과로 다시 급제하여 검열을 제수받은 후 영해(寧海) 부사(1428)로 선정을 하였고, 여러 차례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국위를 선양했다. 시문도 많이 지어 <대동시림(大東詩林)>에 실려있고, 모든 일에 공정하고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1432년(세종 14)에 좌부대언으로서, 왕명으로 악장 문학인 문덕곡(文德曲)과 무공곡(武功曲)을 만들었고, 그 이듬해 3월에 다시 왕명으로, 태조의 공덕을 노래한 몽금척(夢金尺)과 태종의 공덕을 노래한 수명명(受明命) 등을 만들었는데, 이들은 뒷날 <용비어천가>의 창제에 기반이 되었다.
1441년(세종 23) 겨울에 경기도 관찰사로 있다가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그 후 서울로 돌아가 벼슬이 의정부 좌찬성, 공조 판서, 대제학으로 올라갔고, 1450년(문종 1)에는 이조 판서로서 의창 제도의 모순과 관리들의 부정을 지적하여 이의 개혁을 상소하여 왕의 허락을 받았고, 함길도 관찰가 되어 네 번째로 도지사 생활을 하였다. 권맹손이 함흥에 문소루(聞韶樓)를 지어 낙성하는 날에 <용비어천가>가 발표되어 기쁨을 더하였다.
그 뒤 중추원 부사를 지냈다. 아홉 번이나 과거 시험관을 하여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예천읍 갈구리 구미산(龜尾山)에 묻히었고, 용문면 하금곡리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다.
권맹손이 1439년(세종 21)에 3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서 예천에 오니, 마침 객사(客舍)가 새로 이루어져 낙성식을 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시를 지어 이르기를, "3도를 순찰함에 쉬던 곳이 몇이나 되던고, 순박한 내 고향은 옛 이제가 한결같네. 산은 북에서 내려와서 큰 들에 이르렀고, 물은 동으로부터 달려와서 긴 숲을 둘렸네. ...좋은 계절에 낙성하여 이윽고 늙은 나에게 잔치 베푸니 순찰사도 부질없이 흥이 나서 또한 높이 읊었노라."라고 하였다.
2) 이문좌(1461-1491)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하금곡리 사람으로, 자는 현도(顯道), 호는 세촌(細村), 본관은 경주, 상(祥)의 맏아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풍채가 늠름하고 덕행이 남과 달랐다. 문장에 능하고 성리학에 통달하여 1480년(성종 11)에 진사가 되고, 1483년(성종 14)에 식년 문과에 갑과로 장원 급제하였다.
국립대학인 성균관에 들어가 학유에 기용되고, 곧 박사, 전적(1484)으로 승진되었다. 이어서 서장관(1484)으로서 중국 명 나라에 다녀올 때 부사(副使)가 비리를 범하므로 논박하여 바로 잡았으나, 부사의 원망을 사게 되었다. 귀국하여 정랑에 임명되었다. 이어 승문원 교검으로 옮기고, 춘추관 기주관과 편수관을 겸하였다. 그리고 사헌부 감찰로 물망에 올랐으나, 융통성 없는 너무 곧은 성격 때문에 훈구파들의 방해로 헛일이 되었다. 더욱이 밀려나서 안협 현감(1486)으로 좌천되었다. 안협은 토질이 기름지지 못하였다. 여러 해 가뭄이 들자, 백성들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문좌는 세금을 줄이고, 형벌을 가볍게 하고, 정부미를 풀어 도와주었다.
벼슬을 그만 두려하자(1488), 안협 현민들이 가마에 매달려 울면서 말리었다. 할 수 없이 그냥 머물다가, 그 후 6년 동안 벼슬을 더 하다가 관아에서 31살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였다. 모두 슬퍼하였다. 하금곡2리 유전동 개금자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이문좌는 하금곡리 사람 권오복(權五福)과 친하여, 권오복의 여동생인 권선(權善)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나중에 권오복이 사형 당하고, 김종직의 제자들이 모두 화를 입은 무오사화(1498)가 일어났다. 이 때 이문좌는 이미 타계하였기에 화를 면하였으나, 부인과 아들인 절(節, 1491-1578)은 바닷가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1506)으로 풀려났다.
3) 권오기(權五紀)
1463(세조 9)∼?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예천. 자는 협지(協之), 호는 졸재(拙齋). 아버지는 별좌(別坐) 선(善)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95년(연산군 1)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동생 오복(五福)과 함께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다.
1499년에 봉교(奉敎)가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동생 오복이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어 극형을 당하자 이에 연루되어 해남으로 귀양갔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석방되고, 1511년(중종 6) 지평(持平), 1526년 경상좌도군적경차관(慶尙左道軍籍敬差官), 1530년 사도시부정(司䆃寺副正)을 거쳐 좌통례(左通禮)를 역임하였다.
4) 이광윤(1564-1637)
예천군 용문면 하금곡리 사람으로, 자는 극휴(克休), 호는 양서( 西), 본관은 경주, 잠(潛)의 둘째 아들이다. 1585년(선조 18)에 진사가 되고, 임진왜란(1592) 때는 하금곡리의 이개립, 제곡리의 권욱과 더불어 예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신이 되었다.
그 공으로 소촌도 찰방(1594)을 제수받고 비안 현감이 되었다.
1594년(선조 27)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내외직을 두루 거쳤는데, 내직으로는 성균관의 전적, 직강, 사예와 익위사의 익찬 및 5조의 좌랑과 3조의 정랑이 되었다. 또 삼사(三司)에 들어가서 정언, 수찬, 부교리, 교리, 지평, 장령 등을 하였다. 또 정3품 벼슬인 장악원 정, 사옹원 정, 사섬시 정을 거쳐서 통례원 우통례에까지 벼슬이 이르렀다. 통례원은 임금을 만나는 절차나 제사 사무를 맡은 관청이었다.
외직으로는 강원도와 함경도의 도사와 초계와 영천의 군수를 거쳐서 성주 목사에 이르렀다. 무릇 44차례나 벼슬을 옮겼다.
그리고 사신(1603)으로 중국 명 나라에 가서 문장가로서 이름을 날렸고, 5대 사고를 만드는 일(1606)에도 참가하였다. 간신배 이이첨을 제거하기 위한 상소를 올리다가 오히려 엄중한 견책을 받기도 하였다. 학문을 일으켜야 한다고 항상 강조하여 당시 10대 시인과 36대 문장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초서와 예서를 잘 썼고, 일할 때에는 절대로 남을 속이지 않았다. 1631년(인조 9)부터 몸이 쇠약해져서 하금곡리 집에서 여생을 보냈다. 정구, 김륵, 유성룡, 김광엽 등과 서로 사귀면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당시 문장과 선행이 영남 유림의 으뜸이 되었다.
무덤은 예천읍 용산리 제동(堤洞)에 있고, 도승지(1650)에 증직되었다. 하금곡리 유전동(柳田洞)의 인산서원(仁山書院)과 예천읍 생천리의 정산서원(鼎山書院)에 제향되었고, 문집이 있다. 김응조(金應祖)가 시로써 이광윤을 추모하기를, "바른 붓은 간신배를 쫓았고, 맑은 글은 나라를 빛내었네. 어짐으로 백성을 건졌고, 풍속을 바꾸어 학교를 일으켰네... 죽지 않고 길이 남을 것은, 영원한 그의 꽃다운 이름이도다."라고 하였다.
5) 김경언(金慶言)
자는 언희(彦喜)이며 본관(本貫)은 순천(順天)이다. 1543(계묘)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며 병조정랑을 지냈다.
6) 권용(1684-1772)
용문면 하금곡리 태생으로, 자는 중첨(重瞻), 호는 선계(仙溪), 본관은 예천, 희익(希益)의 둘째 아들이다. 성격이 온화하고 배움에 게으르지 않고 학문이 깊어 1714년(숙종 40)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또한 부모를 섬김에 정성을 다했기 때문에, 신령이 감탄하여 매년 곡식이 빨리 익었고, 맛이 좋았으며, 새들도 와서 까먹지 않았다고 한다.
1749년(영조 25)에 효행으로 천거되어 영릉 참봉에 오르고, 이어 제용감 봉사, 상서원 직장(尙瑞院直長)의 벼슬을 하였다. 늙어서는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오르기도 하였다.
문장에 능해 선비들이 존경하였고, 호명면 형호리의 양한당(養閒堂), 예천읍 용산리의 석문정(石門亭)에 권용의 시문들이 남아 있다. 무덤은 하리면 금곡리 처용산에 있고, 용문면 하금곡리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또한 후손들이 하리면 금곡리 지경터 마을 한 가운데 권용을 위해 선계정(仙溪亭, 1967)을 세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