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할 것 없는 가정에서 자란 게으른 반항아, 실패한 예술가 지망생, 국가 고위직에 오를 법한 인물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사람이 어떻게 독일의 최고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 권력을 어떻게 절대 권력으로 굳혔기에 백전노장 사령관들까지 한낱 상병 출신 지도자가 내리는 명령에 무조건 복종할 수 있었을까? 대중의 원초적 정서를 자극하는 선동술밖에 없었던 독학자가 어떻게 성직자, 외교관, 법학자 같은 사회 엘리트들을 완전히 사로잡아 복종시킬 수 있었을까? 어떻게 현대 국가의 시민들이 무자비한 인종 학살의 동조자가 될 수 있었을까?
이 책은 젊은 히틀러의 좌절과 분노의 뿌리를 추적하는 데서 시작해, 패전 후 갈 곳 없는 무명의 병사를 정치의 중심으로 끌고 들어간 독일 사회 ‘이념의 카오스’를 선명하고 상세하게 그린다. 독일 민족의 구원자가 되겠다는 히틀러의 환상과 의지가 점점 더 많은 지지자를 끌어 모으는 과정이 여러 시점에서 입체적으로 재구성된다. 대중의 환호와 보수파의 방조로 독일 총리가 된 뒤 순식간에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가로 떠오르는 장면들이 숨 막히도록 생생하게 펼쳐진다. 이어 제3제국의 광기가 전쟁으로 질주하고 전쟁 속에서 극단으로 치달아 마침내 베를린의 어두운 지하 벙커에서 히틀러의 자살로 막을 내리기까지 나치 체제의 몰락 과정이 차가운 분석의 메스로 세밀하고도 총체적으로 해부된다.
방대한 자료, 균형 잡힌 시각, 탁월한 통찰력, 윤택한 문장이 어우러진 최고의 전기! 《히틀러》는 영국의 구조주의 역사학자 이언 커쇼가 30여 년에 걸친 히틀러와 제3제국 연구 성과를 종합하여 완성한 방대하고 압도적인 전기(1권 - 1998년 출간, 2권 - 2000년 출간)의 한국어판이다. “우리 시대에 이룩된 가장 뛰어난 학문적 성취이자 최고의 전기”로 평가받는 이언 커쇼의 《히틀러》는 지금까지 나온 히틀러 연구서 가운데 가장 치밀하고 깊이 있고 균형 잡힌 저작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출간 즉시 히틀러와 제3제국 연구자들 사이에 동시대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이언 커쇼는 지난 수십 년간 발간된 히틀러와 관련된 모든 공식, 비공식 자료들, 독일의 바이에른, 런던, 워싱턴, 모스크바의 국공립 문서고와 여러 연구소를 오가며 수집한 자료들과 히틀러 시대를 살았던 독일의 보통 사람들의 증언과 개인적인 일기와 편지 등의 기록에 이르기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자료를 바탕으로 히틀러와 나치 체제를 분석했다. 그 결과물인 《히틀러》는 출간되자마자 세계 역사학계에 큰 충격을 던지면서 최고의 역사 저작에 수여하는 울프슨 역사상을 수상했다. 또한 우리 말 문장에 능숙한 일급 번역가 이희재 씨의 3년에 걸친 번역과 6개월에 걸친 편집으로 완성된 한국어판 《히틀러》는 200자 원고지 1만 2천 장, 2,236쪽(1권 1,004쪽, 2권 1,232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임에도 생동감 넘치는 문장으로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가장 극단적이고 가장 충격적인 20세기 정치 현상 히틀러 신화와 히틀러 인격의 심층 해부학! 이언 커쇼의 히틀러 전기는 지금까지 나온 모든 히틀러 연구서 가운데 히틀러와 당시 독일인들의 심리를 가장 깊이 파고 들어간 책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나치 독일이 세계대전이라는 위험천만한 도박에 민족의 운명을 걸고 유대인 절멸이라는 극단으로 달려갔던 근본 원인을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 히틀러의 ‘카리스마 통치’와 나치 체제의 ‘역동성’에서 찾음으로써 최초로 나치 체제를 구조적으로 설명해냈다는 점에서 이 전기는 높이 평가받는다. 한마디로 이 책은 철저히 객관적이고 냉철한 학자의 눈으로 히틀러와 그의 시대에 대해 어떠한 역사적 면죄부도 부여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히틀러를 악마화하는 도덕적 수사에서 벗어나 균형 잡힌 시각으로 씌어진 최초의, 최고의 히틀러 전기이다.
지금 히틀러는 20세기의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로 기억된다. 역사는 현대 정치의 악을 온몸으로 드러낸 인물로 히틀러를 기록한다. 그것은 히틀러가 기대했던 자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악이라는 것은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이지 역사적 개념은 아니다. 히틀러는 악인으로 불러야 마땅하고 또 그래야만 속도 후련할 것이다. 그렇지만 악인으로 부르는 것은 설명이 아니다. …… 나는 역사적 인물에 드러난 악의 문제를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내가 하려는 것은 히틀러가 도대체 어떻게 한 사회를 휘어잡았기에 그 사회가 그렇게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도 히틀러를 지지했는가 하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 2권 머리말(7-8쪽)
1권은 1889년 히틀러의 출생부터 위대한 예술가를 꿈꾼 청년 시절,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총리에 오른 후 재무장을 선언하고 1936년 라인란트 점령을 계기로 팽창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까지를 다룬다. 저자는 젊은 히틀러에게 좌절과 분노를 안겨주었고 한편으로 히틀러를 정치의 중심으로 끌어올려준 1차 세계대전 전후의 혼란한 독일 사회를 완벽하게 재구성한다. 쇠락한 독일 민족의 구원자가 되겠다는 히틀러의 환상이 점점 더 많은 지지자를 끌어 모으는 과정을 통해, 저자는 왜 그토록 많은 평범한 독일 사람들이 히틀러를 숭배하거나 묵인하거나 그를 막는 데 무력할 수밖에 없었는지 규명한다.
2권은 이어진 외교적인 승리로 히틀러가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 지도자가 된 장면으로 시작하여 독일을 전쟁으로 몰고 가 결국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9년 뒤인 1945년 베를린의 어두운 지하 벙커에서 히틀러의 자살로 막을 내리기까지 나치 정권이 맞을 수밖에 없었던 파국의 과정을 세밀하게 조명한다.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 영토 밖으로 이민을 추진했던 정책이 어떻게 ‘최종 해법’ 즉 대량 학살로 급진화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히틀러의 역할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를 규명한다. 또한 저자는 히틀러가 세계대전이라는 위험천만한 도박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민족의 재생과 민족 구원의 완성이라는 이념적 목표, 국내 경제와 군수 산업을 모두 성장시킨다는 경제적 목표, 유럽의 불안한 국제 정세에 독일 군부가 보인 팽창주의적 야심이 한꺼번에 유기적으로 작용한 데서 찾는다.
열정과 광기, 전무후무한 히틀러 권력의 비밀 외곬, 확고부동, 모든 장애물을 단번에 쓸어버리는 무자비함, 영특한 냉소주의,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으로 큰 승부에 강한 도박사의 배포, 이런 요인 하나하나가 작용해서 히틀러의 권력을 빚어냈다. 히틀러는 단순히 선동가만도 아니었고 음모가만도 아니었고 조직가만도 아니었다. 그는 셋 다였다. 또한 그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독특한 세계관으로 무장한 이론가였다. 히틀러의 권력은 압도적인 것이었다. 히틀러는 그저 높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권력을 누린 것이 아니었다. 히틀러는 독일을 구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감에서 권력을 이끌어냈다. 히틀러의 권력은 제도에서 나온 권력이 아니라 ‘카리스마’에서 나온 권력이었다. “지도자의 카리스마에서 나오는 권력은 허깨비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실제로 굳게 믿는 것이다.” 히틀러가 행사한 철저히 개인화된 권력은 성직자, 지식인, 외교관처럼 날카롭고 똑똑한 사람들마저 히틀러한테서 감명을 받게 만들었다. 이 책은 히틀러에게 사로잡힌 독일 사회와 유럽인들의 모습을 통해 결코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히틀러 치하에서 벌어진 일은 현대 문명 자체의 소산이자 특성인가? 그런 참사의 가능성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는가? 히틀러와 그의 시대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이언 커쇼의 《히틀러》가 밝힌 히틀러와 나치 체제의 핵심 특징
1. 카리스마 통치와 지도자 신화 - 히틀러 절대 권력의 비밀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히틀러는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1980년대 초에 이루어진 한 통계 조사에 따르면, 그때까지 무려 12만 편의 연구 논문과 1,500권의 연구서가 나왔다. 그러나 그 어떤 연구도 사람들이 히틀러와 그의 통치에 대해 품어 온 의문을 시원히 해결해주지 못했다. 《히틀러》에서 커쇼는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의 원인을 히틀러 개인에게 돌리거나 역사의 예외적 사건으로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한다. 진실을 턱없이 단순화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히틀러를 단순히 역사에서 예외적으로 나타난 악마로 표현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도덕적 비난이지 설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커쇼는 히틀러와 그의 시대를 둘러싼 의문은 히틀러라는 개인만이 아니라 그를 떠받친 당시 독일 사회와 그가 휘두른 권력의 성격을 동시에 파악해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본 히틀러 권력의 핵심은 ‘카리스마적 지배’와 ‘지도자 신화’이다.
카리스마 통치 커쇼는 히틀러 권력의 비밀을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가 말한 ‘카리스마적 지배’에서 찾는다. 여기서 ‘카리스마’란 대중을 자발적으로 추종하게 만드는 천부적 자질 또는 능력을 말한다. 커쇼는 이 개념을 사람들이 숭배하는 대상(예컨대 히틀러)의 성격이 아니라, 카리스마를 지각하고 믿는 사람들을 통해, 다시 말해 사회에 주안점을 둔 설명으로 파악한다.
히틀러의 권력은 예외적인 것이었다. 히틀러는 그저 당 지도자라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높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권력을 누린 것이 아니었다. 히틀러는 독일을 구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감에서 권력을 이끌어냈다. 다시 말해 히틀러의 권력은 제도에서 나온 권력이 아니라 ‘카리스마’에서 나온 권력이었다. 그 카리스마가 제 구실을 하려면 다른 사람들이 히틀러 안에서 영웅적 특성을 볼 마음가짐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쩌면 히틀러가 그런 특성이 자기한테 있다고 확신하게 된 것보다 먼저 그런 특성을 히틀러한테서 보았다. - 1권 프롤로그(31쪽)
히틀러는 프리드리히 대제와 비스마르크 이후 오랫동안 민족의 영웅을 갈구해 온 독일인들에게 바로 그 영웅으로 제시되었고, 그 자신도 민족의 구원자로 자처했다. 즉 히틀러의 카리스마는 심리적 여건과 사회적 여건이 충분히 무르익은 상황에서 히틀러 개인이 지닌 능력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 커쇼는 히틀러가 휘두른 권력에서 히틀러 자신이 차지하는 몫을 결코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히틀러는 타고난 연설가이자 선동가, 조직가, 이론가였다. 히틀러는 “인류의 역사는 곧 인종 투쟁의 역사”라는 발상을 비롯해 독일 민족의 부활과 재생을 중심에 둔 내적 일관성이 있는 세계관을 처음부터 끝까지 밀어붙인 정치 지도자였다. 히틀러는 독일이 강요받은 폭군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합법적으로 독일 총리가 되었고 1933년부터 1940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국가 지도자로 활동했다. 히틀러는 별 볼 일 없는 환경에서 자라 최고 권력을 쥔 보기 드문 인물이었으며, 그가 지닌 비상한 기억력이나 정치적 수완, 연설가로서 능력은 당시 최고의 엘리트 지식인들을 사로잡을 정도였다. 만약 히틀러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히틀러가 정부 수반이 아니었더라도 나치 친위대의 살벌한 경찰국가가 과연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만약 히틀러가 아니라 다른 지도자가 이끌었다면 과연 독일이 유럽에서 전면전을 벌였을까? 다른 국가 수반 밑에서도 과연 유대인 차별 정책이 철저한 학살극으로 비화되었을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오”이다. 즉 외적 여건과 비개인적 요인이 제아무리 압도적인 힘을 발휘했다고 하더라도 히틀러는 나치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지도자 신화 커쇼는 히틀러보다도 먼저 히틀러에게서 ‘카리스마적 지배력’을 발견하고 그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은 측근들이 있었기에 히틀러의 권력이 가능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히틀러의 권력은 이미 패전의 기색이 짙어진 1944년까지도 굳건했다. 1944년 7월 20일에 일어난 히틀러 암살 시도(‘발퀴레 작전’)라든가 뮌헨 대학 학생들과 교수가 참여한 ‘백장미단’ 사건 같은 저항 운동이 있긴 했지만 히틀러의 임기 내내 저항 운동은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일반 국민들도 그렇고 나치 간부들 사이에서도 ‘지도자’의 권위는 패전 직전까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아무도 히틀러를 대신할 수 없었다. 이러한 압도적인 권위는 히틀러가 나치 운동의 기수로 떠오른 192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지도자 숭배 열풍을 통해 독일 사회에 강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그 시작은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독일 사회를 휩쓴 민족주의 바람과 ‘강한 지도자’에 대한 열망이었다.
초기 나치 운동에 공감한 사람 중에는 권위와 투쟁 정신을 갈구하는 사람이 많았다. 현실에 절망과 환멸을 느끼고 과거의 빛나는 신화에 집착하면서 영웅이 나타나기를 꿈꾸는 낭만주의자와 신보수주의자는 민족의 명예를 회복해줄 ‘위대한 지도자’의 출현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그들의 소박한 바람은 ‘권위’였고 국민의 단합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와 사회에 팽배한 분열상은 그런 소망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었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유럽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커지면서 ‘강한 지도자’를 희구하는 마음도 커졌다. - 1권 8장 지도자 원칙(433~434쪽)
히틀러를 독일의 구원자로 그리는 신화화 작업은 1922년 가을부터 히틀러 지지자들 사이에서 벌써 조짐이 나타났으며, 히틀러도 점차 자신을 독일 민족의 구원자로 보는 메시아주의에 빠져들었다. ‘지도자 신화’는 히틀러에게 선전의 최대 무기였다.
민족은 피라미드를 이루며 그 꼭대기에는 ‘위대한 천재’가 있다고 히틀러는 역설했다. …… 지도자는 ‘이념’의 ‘구심점’이며 ‘수호자’다. 따라서 지도자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히틀러는 거듭 강조했다. 이렇게 해서 지도자 숭배는 운동을 통합하는 장치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1926년 중반이면 히틀러의 입지는 완전히 굳었다. 히틀러는 독일의 투쟁과 부활에 ‘인격의 가치’와 ‘개인의 위대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틈만 나면 역설했다. 그렇지만 자기를 그런 영웅으로 언급하는 일은 삼갔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히틀러 숭배로 회심하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났고 주도면밀한 선전도 착착 이루어지고 있었다. 히틀러에게 지도자 신화는 선전의 무기이자 신념을 낳는 핵심 교리였다. - 1권 8장 지도자 원칙(425쪽)
지도자 숭배의 확립은 나치 운동이 발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히틀러 숭배가 없었더라면 당은 분파주의로 갈라졌을 것이다. 반자본주의, 반사회주의를 주장하며 타협 없는 과격한 ‘혁명’을 부르짖었던 당내 반대파들과의 갈등도 히틀러의 카리스마와 개인 숭배로 봉합할 수 있었다.
나치당은 전략, 파벌 싸움, 해묵은 개인 감정을 둘러싸고 서로 부딪칠 때가 많았다. 대개 이념의 차원보다는 사사로운 감정이나 전략의 차원에서 갈등과 적대감이 끝없이 불거졌다. …… 지도자 숭배가 모든 당사자에게 받아들여진 것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기 때문이다. 단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의든 타의든 히틀러에게 개개인이 충성을 바쳐야 했다. ― 1권 8장 지도자 원칙(435쪽)
2. 나치 체제의 역동성과 급진화 - ‘지도자의 뜻을 좇아 일하기’
나치 체제의 역동성 하지만 ‘지도자 신화’만으로 나치 체제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커쇼는 히틀러의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설명하는 데 히틀러의 성격만이 아니라 독일 사회의 기대와 욕구도 같이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히틀러라는 독재자가 저지른 일뿐 아니라 히틀러가 하지도 않았고 부추기지도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앞장서서 벌인 일들도 함께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다. 커쇼는 이러한 접근법을 통해 제3제국을 움직인 핵심 원동력을 찾아낸다. 그 실마리는 1934년 한 나치 간부가 말한 “지도자가 바라실 노선을 따라서 지도자 쪽으로 나아가며 일하는 것”이라는 구호에서 찾을 수 있었다. 커쇼는 “지도자의 뜻을 좇아 일하기(Working towards the F?hrer)”라는 개념을 통해 파멸로 치달을 때까지 계속 ‘급진화’될 수밖에 없었던 나치 체제의 구조적 특징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나치 체제에서 사람들은 히틀러가 느슨하게 짜놓은 이념 목표를 현실로 옮기면서 독재자의 야심찬 꿈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나서서 움직였다. 히틀러의 권위는 물론 결정적이었다. 그렇지만 히틀러가 승인한 그런 움직임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나올 때가 많았다.”
개인화된 통치와 체제의 급진화 나치 체제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커쇼는 먼저 베니토 무솔리니나 프란시스코 프랑코, 이오시프 스탈린 같은 20세기의 다른 독재자들과 판이하게 다른 히틀러의 통치 스타일에 주목한다. 무솔리니와 프랑코는 독재자로 군림하긴 했어도 모두 내각을 통해 국무를 처리했고, 스탈린 역시 정치국을 유지했다. 그러나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내각은 유명무실했다. 다른 독재자들이 중앙 통치 기구를 장악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행사하려 했다면, 현대 국가의 관료제를 혐오한 히틀러는 통치 기구를 무력화하고 모든 것을 자신에게 집중시킴으로써 대단히 비합리적인 통치 체제를 만들어냈다.
굉장히 현대화된 선진국인데 중앙에서 조율하는 구심점이 없었고 국가 수반이 통치 기구에 깊이 발을 들여놓지 않는 이상한 나라가 생겨났다. ……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워낙 싫어했기 때문에 각료 회의가 유명무실해졌다. 1935년에는 각료 회의가 겨우 12번밖에 열리지 않았고 1937년에 이르면 그 숫자는 6번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1938년 2월 5일 이후로는 각료 회의가 아예 열리지 않았다. 전시에 히틀러는 장관들이 이따금 모여서 맥주를 마시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여기다가 히틀러의 몸에 밴 비밀주의, 여러 사람보다는 일 대 일로 만나는 것을 선호하는 버릇(그래야 상대방을 휘어잡을 수 있으니까), 정부는 물론이고 당에서도 몇 사람만 총애하는 정실주의까지 보태져서 통치와 행정의 공식 틀은 더욱 흔들렸다. - 1권 13장 지도자 숭배(740~741쪽)
나치 체제의 가장 큰 특징인 ‘누적적 급진화(cumulative radicalization)’는 이렇게 개인화된 통치 스타일과 맞물려 나타났다. 저자는 “히틀러의 개인 통치가 뿌리를 내리면서 정부의 공식 기구가 와해되었고 이념이 급진화되었”는데 “공식 기구가 와해되고 이념이 급진화되니까 거꾸로 히틀러의 개인 지배도 모든 제도적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구가하면서 절대 권력으로 치달았다”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누적적 급진화는 명확하게 정리되고 세분화된 정책 지침이나 관료 기구가 없는 상황에서 체제의 공무원들과 당 간부들, 체제에 충성을 바쳤던 일반인들이 저마다 ‘지도자의 뜻을 좇아’ 역동적으로 움직이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히틀러는 단지 모호한 몇 마디 지시나 자신의 바람을 표현하는 것만으로 나라를 통치할 수 있었다.
히틀러의 개인화된 통치 방식은 밑에서부터 열렬한 호응을 받았고 히틀러가 설정한 목표와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 히틀러도 이런 호응을 뒷받침해주었다. 이렇게 되자 정부 부처들은 정부 부처들대로, 그 안에서 일하는 개인들은 개인들대로, 체제의 모든 수준에서 뜨거운 경쟁이 벌어졌다. 다윈주의의 적자생존 원리가 적용되는 제3제국이라는 정글에서 권력을 잡고 승진을 하려면 위에서 지시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도자의 의중’을 미리 헤아려서 히틀러가 추구하고 소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상책이었다. 당 간부와 논객, 친위대의 ‘권력 테크노크라트’는 오직 지도자의 뜻을 따른다는 일념으로 움직였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걷잡을 수 없는 급진화로 치닫는 데 일조한 셈이었다. ― 1권 13장 지도자 숭배(736~737쪽)
히틀러는 언제나 급진적인 방안을 선호했으며, 이것을 잘 알았던 측근들은 앞 다투어 남보다 더 급진적인 방안을 내놓으려 경쟁하면서 체제의 급진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러한 급진화가 부른 극단적인 결과 중 하나가 바로 ‘홀로코스트’였다.
급진화의 결과 - 유대인 ‘최종 해법’ 히틀러는 젊은 시절 반유대주의 분위기가 팽배했던 오스트리아의 빈에 머무는 동안 반유대주의적 정서를 흡수했다. 그러나 인종론에 바탕을 둔 반유대주의가 히틀러의 ‘세계관’이자 이념적 목표로 굳어진 것은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였다. 독일군으로 참전했다가 패전의 쓴맛을 본 히틀러는 당시 많은 독일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패전과 독일이 겪은 모든 수모의 책임을 유대인의 탓으로 돌렸다. 1919년 9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당)’의 전신인 ‘독일노동자당’에 입당할 무렵 히틀러는 반유대주의에 관한 한 전문가로 불렸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내내 나치당의 반유대주의는 자주 물리적 폭력으로 분출했다. 그러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한 뒤로 나치의 극렬한 반유대주의는 일회성 폭력에 그치지 않고 일관성 있는 정책의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나치가 패전, 혁명, 점증하는 정치 위기, 극심한 사회적 궁핍을 초래한 장본인으로 유대인을 지목하면서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자 유대인에 대한 편견은 깊어만 갔다. 유대인은 유난히 부자가 많고 경제를 장악하여 해악을 끼치고 문화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고정관념이 날이 갈수록 확산되었다. 한마디로 유대인은 (아무리 안 그런 척 발버둥을 쳐도) 종자가 다르며 독일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것은 유대인이라는 생각이 벌써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도 전에 널리 퍼졌다. 히틀러가 일단 정권을 잡은 후 나치의 반유대주의 구호는 그런 부정적 여론을 등에 업고 사회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고 줄기찬 선전으로 부풀려져서 온 계층으로 퍼져나갔다. 독일이 다시 일어서려면 민족을 순화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유대인을 독일에서 내몰아야 한다는 생각이 호응을 얻었다. - 2권 프롤로그(31쪽)
이렇게 해서 1919년부터 히틀러가 민족주의 정부가 추진해야 할 목표로 내세웠던 ‘유대인 제거’는 조금씩 실현 가능한 목표로 떠올랐다. ‘돌격대(SA)’를 비롯해 나치당 과격파들이 저지른 유대인 박해는 특히 1933년과 1935년, 1938년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로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수정의 밤(크리스탈 나흐트)’으로 불리는 1938년 11월 9일과 10일에 벌어진 유대교 회당 파괴와 유대인 살해, 유대 상점 습격은 반유대 폭력의 정점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러나 인종 학살을 통한 유대인 절멸이 처음부터 목표는 아니었다. 반유대주의 폭력이 확산되고 갈수록 과격해진 것이나, 전쟁 발발 후 나치의 유대인 정책이 독일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유대인을 이주시키는 영토 해법에서 1942년 1월 ‘반제 회의’를 거치며 대량 학살을 통한 절멸 해법으로 바뀐 것은 모두 전형적인 ‘급진화’의 사례였다. (반제: 베를린 서쪽의 호수 이름)
사실 히틀러가 별로 나서지 않았어도 반유대 운동은 저절로 번졌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운동을 이끌고 주도하고 밀어붙였다. 물론 거기에는 이것이 나치즘의 위대한 사명을 완수하는 길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지도자의 뜻을 좇아 일하는’ 전형적 사례였다. 물론 사람들은 대개는 실리를 따져서 그렇게 했지만 유대인을 ‘제거’할 목적으로 나온 조치는 히틀러의 장기적 목표를 이루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었으므로 당연히 히틀러의 승인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 반유대 차별의 급진화를 밀어붙인 조직이나 기관, 개인은 저마다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고 또 노리는 것이 있었다. 이것들을 모두 묶어내고 그럴듯한 명분을 주는 것이 인종 정화의 구상이었고 ‘유대인 없는’ 독일 건설의 목표였다. 그리고 그 구심점은 지도자였다. 그래서 때로는 영향이 간접적이었을지라도 히틀러의 역할은 중요했다. ― 2권 3장 ‘아리아 종족’의 나라(188~189쪽)
(1942년) 6월 초면 유대인을 서유럽에서 추방하는 사업의 틀이 갖춰졌다. 서유럽 유대인의 수송은 1942년 7월부터 이루어졌다. 대부분은 당시 가동되던 시설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절멸수용소가 있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이송되었다. ‘최종 해법’은 실행에 옮겨졌다. 이제 조직적 대량 학살이 거침없이 이루어졌다. 1942년 말까지 친위대 자체 집계에 따르면 이미 4백만 명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다. 히틀러는 반제 회의에 관여하지 않았다. 회의가 열리는 것은 알았을 테지만 그마저도 확실하지는 않다. 사실은 관여할 필요가 없었다. 독일이 또다시 세계대전에 휘말려 든 이상 유대인은 각오를 해야 할 것이라고 1941년 12월 명백히 입장을 밝혔던 것이다. 그때쯤이면 지역 차원에서는 위에서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유대인 살해에 앞장섰다. 하이드리히는 히틀러의 포괄적인 유대인 동부 추방령을 등에 업고 살인 활동을 범유럽 차원의 학살극으로 확대했다. - 2권 10장 최종 해법(605~606쪽)
히틀러는 어떻게 히틀러가 되었나?
1차 세계대전, 실패한 예술가를 구하다
1889년 오스트리아 브라우나우에서 세무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히틀러는 반항적이고 몽상적인 청년기를 보냈다. 실업학교를 중퇴한 히틀러는 화가가 되기를 꿈꾸며 빈 미술아카데미 시험에 응시하지만 탈락한다. 그후 사회의 밑바닥으로 추락한 히틀러는 부랑자 합숙소에서 지내면서 싸구려 엽서 그림을 그려 곤궁한 삶을 이어간다. 1913년 24살의 청년 히틀러는 5년간의 빈 시대를 끝내고 어린 시절부터 동경해 왔던 독일의 뮌헨으로 떠난다.
히틀러에게 바그너는 음악 이상이었다. 그것은 게르만 신화의 세계, 위대한 드라마와 경이로운 장관의 세계, 신과 영웅의 세계, 거대한 투쟁과 구원의 세계, 승리의 세계, 죽음의 세계였다. 그것은 영웅이 리엔치, 탄호이저, 슈톨칭, 지크프리트처럼 낡은 질서에 반기를 든 아웃사이더로 나오는 세계, 또는 로엔그린과 파르치팔처럼 순결한 구원자로 나오는 세계였다. 배신, 희생, 구원, 영웅적 죽음은 1945년 자신의 체제가 무너져 내리던 순간까지 히틀러를 사로잡은 바그너의 주제들이었다. 그것은 아웃사이더이자 혁명가였고 타협보다는 장렬한 패배를 선호하는 승부사였고 배척과 박해에 굴하지 않고 위대함에 이르는 온갖 난관을 이겨내면서 생존 논리에 급급한 부르주아 윤리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기존 질서에 맞서는 도전자였던 천재 예술가의 장엄한 꿈이 만들어낸 세계였다. 보잘것없고 별 볼 일 없는 낙오자였던 히틀러는 바그너의 영웅처럼 살고 싶었다. 그는 새로운 바그너가 되고 싶었다. 철인왕, 천재, 발군의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 2장 낙오자(94~95쪽)
뮌헨에 와서도 무위도식하며 지내던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독일군에 자원 입대한다. 히틀러는 연락병으로 복무하면서 몇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큰 공을 세워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히틀러에게 전쟁은 신이 내린 선물이었다. 히틀러에게 군대는 바로 집이었다. 그는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고 가장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히틀러를 살린 것은 1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쟁을 겪지 않았더라면, 패전의 굴욕과 혁명의 격변을 맛보지 않았더라면, 실패한 예술가, 사회 낙오자는 정치에 뛰어들어 선전가로서, 또 맥주홀에서 좌중을 휘어잡는 선동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찾아내 그것을 업으로 삼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전쟁과 패전, 혁명의 상처가 없었더라면, 이런 상처로 말미암아 독일 사회가 정치적으로 급진화되지 않았더라면, 선동가는 악에 받치고 증오에 찬 말을 들어줄 청중을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패전의 후유증으로 히틀러의 길과 독일 민족의 길이 만날 수 있는 조건이 무르익었다. 전쟁이 없었더라면 비스마르크가 앉았던 총리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 1권 3장 전선의 연락병(133쪽)
연설의 재능을 발견하다
1918년 패전과 혁명으로 독일은 카오스 상태에 빠지고 히틀러는 그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군대에 계속 머물며 정보원으로 활동하던 히틀러는 군대에서 정치 선전원 교육을 받다 자신에게 연설가의 능력이 감추어져 있음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무대로 정치 세계를 발견한다.
히틀러는 일에 온 정열을 쏟아 부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쳤다. 얼마 안 가서 히틀러는 청중의 마음을 울릴 수 있었다. 자기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병사들이 수동성과 냉소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을 히틀러는 느꼈다. 히틀러는 희열을 맛보았다. 태어나서 처음 자기가 굉장히 잘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한 것이다. 정말이지 우연찮게 자기의 어마어마한 재능을 알아차린 것이다. “나는 일을 시작하면서 열과 성을 모두 바쳤다. 많은 사람 앞에서 말을 할 기회가 갑자기 생긴 것이다. 잘은 몰라도 순전히 느낌만으로는 항상 그러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 이제는 사실로 판명되었다. 나도 ‘연설’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 1권 4장 정치의 발견(204쪽)
임무를 수행하러 독일노동자당 집회에 참여한 히틀러는 1919년 9월 독일노동자당에 입당하고 이후 대중 연설가로 정치 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한다. 대형 맥주홀에서 사람들을 열광시킨 히틀러 연설의 비밀은 대중의 감정을 정확하게 건드린 데 있었다. 히틀러는 자기 안에 깊숙이 박혀 있던 증오심을 퍼 올려 다른 사람들의 증오심을 부채질했다. 히틀러의 마음 속에 잠재해 있던 반유대주의는 이즈음부터 반볼셰비즘과 한데 결합하여 가장 중요한 이념으로 자리잡는다.
“나는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 집회에서 들어온 연설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의 연설은 아주 간단명료했다. 베르사유 조약처럼 당시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주제를 잡아서 온갖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이제 독일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현실의 참모습은 무엇인가? 유일한 활로는 무엇인가? 사이사이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두 시간 반을 내리 연설했지만 더 길게 해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구구절절 가슴에서 우러나온 말이라 우리의 심금을 울렸다. …… 그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 독일이 직면한 공포도, 고통도, 절망도 남김없이 드러냈다. 그뿐이 아니었다. 망가진 민족에게 유일하게 남은 활로가 무엇인지를 역사에서 찾아 보여주었다. 그것은 용기, 믿음, 행동력, 근면성, 위대하고 찬란한 공동의 목표에 헌신하는 자세를 통해서 가장 깊은 나락에서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새 출발의 다짐이었다. …… 그날 저녁 이후로, 비록 당원은 아니었지만, 나는 독일의 운명을 휘어잡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히틀러뿐이라고 확신했다.” - 1권 5장 맥주홀 선동가(239~240쪽), 한스 프랑크(나치 독일의 변호사, 2차 세계대전 개전 직후에는 독일군의폴란드 점령지에서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부임 직후 폴란드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의 게토강제 수용과 재산 몰수, 시민권 박탈 등의 공포 정책을 시행했다.)의 증언
쿠데타 실패가 선동가를 정치가로 만들다
1921년 무렵이 되면 히틀러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의 목소리였고 대변자였고 상징이었다. 수많은 추종자와 후원자도 생겼다. 히틀러는 당에 독재권을 요구하여 뜻을 이룬다. 1922년 이탈리아 파시스트당 지도자 무솔리니가 군사 쿠데타를 성공한 데 자극받아 히틀러는 1923년 11월 8일 뮌헨에서 맥주홀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쿠데타는 실패하고 히틀러는 체포되어 5년 형을 선고받고 란츠베르크 감옥에 수감되었다. 재판 과정을 통해서 거물급 정치인으로 부상한 히틀러는 자기를 지도자로 추앙하는 지지자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정치 이념과 사명을 생각했고, 자신을 지도자가 되어야 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란츠베르크는 나라에서 학비를 대준 대학”이었다고 히틀러는 한스 프랑크에게 말했다. 히틀러는 니체,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 랑케, 트라이치케, 마르크스, 비스마르크의《회상록》, 독일군과 연합군 군인과 정치인의 회고록 등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 란츠베르크 생활은 전환점이었다기보다는 히틀러가 1919년부터 발전시켜 왔고 쿠데타가 일어났던 해를 전후해서 약간 수정된 세계관을 내면에서 굳히고 다지는 기간이었다. 란츠베르크에서 히틀러는 권력 쟁취 방안을 약간 수정했다. 그 과정에서 자기를 보는 눈도 달라졌다. 히틀러는 이제 자기의 역할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보았다. 재판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히틀러는 1922년 말부터 추종자들도 조금씩 기대한 모습이었지만 자신을 독일의 구세주로 보기 시작했다. 쿠데타 실패로 히틀러의 자기 확신이 깨졌느냐 하면 천만의 말씀이었다. 히틀러의 자기 확신은 오히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자신이 독일을 구원할‘사명’을 숙명처럼 떠안고 걸어가는 사람이라는 신비적인 믿음은 그때부터 생겨났다. - 1권 7장 카리스마(362쪽)
히틀러는 감옥 안에서 《나의 투쟁》을 집필했다. 히틀러의 세계관이 분명하고 광범위하게 담긴 이 책은 1945년까지 독일 안에서만 1천만 권이 팔렸다. 《나의 투쟁》에는 히틀러의 정치적 신조, 세계관, 사명감, 전망, 장기적 목표가 모두 들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도자 신화의 토대가 거기서 만들어졌다. 히틀러는 이 책에서 자신을 도탄에 빠진 독일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불세출의 지도자로 그렸다.
《나의 투쟁》을 읽으면 히틀러가 1920년대 중반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간파할 수 있다. 그 무렵 히틀러는 역사와 세상의 모든 악을 완벽하게 규명하고 그 극복 방안까지 알려주는 철학을 개발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그것은 우월한 아리아인이 기생충 같은 열등한 유대인에게 시달리고 피해를 입는, 선과 악의 인종 투쟁으로 역사를 보았다. “인종 문제는 세계사는 물론 인간의 문화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고 히틀러는 주장했다. …… 나치 운동의 사명은 오직 하나, ‘유대 볼셰비즘’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단숨에 논리가 비약해서 그래야만 독일 민족이 지배자로 군림하는 데 필요한 생존 공간(lebensraum)을 확보할 수 있다면서 노골적인 제국주의 침탈을 정당화했다. 히틀러는 이 생각을 평생의 신조로 삼았다. 세월이 흘러도 바탕은 달라지지 않았다. 메시아를 방불케 하는 하나의 ‘이념’에 대한 비타협적 몰입, 단순하고 수미일관하고 포괄적이며 흔들리지 않는 신념 체계는 히틀러에게 의지력과 운명에 대한 주인 의식을 심어주었고 히틀러와 접한 사람들은 누구나 거기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히틀러는 넘치는 자기 확신을 강하게 표현할 줄 알았고 주변 사람들은 자연히 거기서 권위를 느꼈다. 모든 것은 흑백으로, 승리가 아니면 완전한 파멸로 그려졌다. 다른 길은 있을 수 없었다. - 1권 7장 카리스마(366쪽)
‘정치 배우’ 히틀러의 내면은 텅 비어 있었다
히틀러는 일급 배우였다. 청중이 빽빽이 들어찬 집회장에 일부러 늦게 나타나는 것이나 철저하게 계산된 연설, 다채로운 어휘 선택, 화려한 손짓과 몸짓까지 이 모두가 관객의 반응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갈고 닦은 연기력은 타고난 말솜씨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잠시 뜸을 들이면서 긴장을 고조시키다가, 낮은 소리로, 머뭇거리듯이 입을 열었다. 히틀러의 연설은 감미롭지는 않았지만 변화와 리듬이 있었고 생동감과 박진감이 넘쳤다. 문장을 스타카토처럼 딱 딱 끊다가는 적당한 대목에서 속도를 줄이면서 핵심을 강조했다. 연설이 점점 달아오르면 손동작도 활발해졌고 적에 대한 신랄한 야유도 터져 나왔다. 이 모두가 감동을 극대화하려고 고안한 연출이었다. 그러나 연기력은 다른 데서도 발휘되었다. 히틀러를 아주 가까이는 아니지만 그런 대로 자주 본 사람들은 히틀러가 하는 행동 대부분이 연기라고 굳게 믿었다. 히틀러는 어떤 연기도 거뜬히 해냈다. “정겨운 대화를 나누고 여자들의 손에 입을 맞추는가 하면, 아이들에게는 초콜릿을 나누어주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였고, 굳은 못이 박힌 농부와 노동자의 손을 부여잡고 악수를 할 줄도 아는 소탈한 서민이었다.” …… 히틀러가 전하는 메시지에 호감을 품고 모여든 사람들은 히틀러의 확고부동한 믿음과 사람을 압도하는 친화력을 보면서 더욱 강한 신념을 품게 되었다. - 1권 8장 지도자 원칙(412~414쪽)
히틀러에게는 ‘사생활’이 없었다. 물론 히틀러는 현실 도피의 차원에서 영화 관람을 즐겼고 매일같이 베르크호프 산장의 찻집이 베산책을 갔고 베를린의 공무에서 벗어나 전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고산 지대에서 망중한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속이 텅 빈 반복 행위였다. 정치 행위의 울타리 바깥이 베한 걸음 물러나 공인의 모습을 더 깊은 차원에서 규정 짓는 공간이 베잠수하는 법이 없었다. 히틀러의 ‘사생활’이 히틀러가 공인이 서 썼던 가면의 일부가 되었다는 소리가 아니행위의 반대였다. 히틀러의 사생활이 얼마나 철저하게 가려졌는지 모습을국민쁀생활쀳활’이 잿더미 베무너지고 나서야 에바 브라운의 존재를 알았다. 히틀러는 도리어 공밁잠수하는 ‘사유화’했다. ‘공’ 과 ‘사’는 혼연일체가 되어 하나로 녹아들었다.
히틀러가 하는 행동의 대부분은 어떤 효과를 노리고 연출한 쇼였다. 불같이 화를 내고 폭발하는 것도 실제로는 의도적인 것이었다. 히틀러는 기회가 생기면 평당원과 만나서 굳게 악수를 나누고 ‘남자답게’ 눈을 마주보았는데 초라한 평당원에게는 죽어도 잊지 못할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 행동은 개인 숭배 열풍을 강화해 운동의 기반을 다지고 지도자와 추종자 사이를 더욱 끈끈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연기일 뿐이었다. 앞장서서 히틀러를 따르던 사람도 1928년 히틀러가 “인간을 경멸한다”고 비판했다. ‘자애로운 아버지’라는 선전의 이미지가 내면의 공허를 감추었다. 그는 쓸모가 있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기울였다. - 1권 8장 지도자 원칙(415쪽)
대공황과 선전 선동술
감옥에서 나온(1924년 10월 6일 바이레른 대법원은 증거불충분으로 사면령을 내림) 히틀러는 나치당을 재건하고 당권을 굳건히 했지만 나치당은 집권 가능성이 거의 없는 작은 정당에 불과했다. 1928년 5월에 치러진 제국의회 선거에서도 나치당은 2.6퍼센트의 득표율로 참패했다. 하지만 대공황이라는 위기가 찾아왔다. 경제가 바닥으로 내려앉으면서 민주주의에 불만을 품은 국민들은 가장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나치당에 호감을 품게 되었다. 1930년 9월에 치러진 총선거에서 나치당은 18.3퍼센트라는 놀라운 득표율로 제2당으로 부상했다.
당시의 정치 체제를 뒤집어엎으려는 유권자의 의지도 작용했지만 무엇보다도 경제난에 대한 불만이 폭발했다는 점에서〈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이 “울분의 선거”라고 부르기도 한 그 선거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 어디까지나 들러리였고 정치 협상에서는 고려 대상도 아니었던 나치당이 어느새 태풍의 핵으로 떠올랐다. 선거 전에는 나치당 하면 대뜸 정신병원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았다고 블랑크는 씁쓸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 히틀러에 대해서 사람들은 중립적이거나 초연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히틀러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이제 히틀러는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는 고려해야 할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더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 1권 9장 권력 의지(485~486쪽)
나치는 선전 활동에 최대한의 역량을 쏟아 부었다. 1932년에는 다섯 번의 선거를 치렀는데, 그 중 첫 번째가 대통령 선거였다. 나치는 독일 전역에서 현란하고 화려하게 꾸민 집회, 행진, 대회를 동시다발적으로 열면서 파상 공세를 퍼부었다. 히틀러도 독일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면서 평소처럼 연설에 온 정열을 쏟아 부었다. 열하루 동안 모두 열두 곳 도시를 돌면서 수많은 군중 앞에서 연설을 했다.
나치는 새로운 선전술을 동원했다. 히틀러는 미국에서 하는 것처럼 비행기 한 대를 빌려서 ‘독일을 굽어 살피는 지도자’라는 구호를 매달고서 첫 번째 ‘독일 비행’에 나섰다. 부활절 동안에는 정쟁을 멈추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선거 운동을 할 수 있는 기간이 확 줄어들어 일 주일도 채 못 되었지만 도시와 도시를 비행기로 이동하면서 히틀러는 스무 군데도 넘는 곳에서 수많은 군중을 모아놓고 연설을 할 수 있었다. 히틀러의 연설을 들은 청중은100만 명에 육박했다. 돋보이는 선거 운동이 아닐 수 없었다. 독일에서 이제까지 그런 식으로 선거 운동을 한 후보는 없었다. 이번에는 나치 진영도 실망하지 않았다. 힌덴부르크가 53퍼센트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히틀러는 37퍼센트로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그저 낯 부끄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낸 것이다. 1차 선거보다 무려 2백만 명이나 많은 1천3백만 명이 히틀러를 찍었다. 나치가 선동을 통해 만들어낸 상품이라고 볼 수 있는 지도자 숭배는 한때는 소수 광신도의 전유물이었지만 이제는 독일 국민의 3분의 1에게 먹혀들었다. - 1권 9장 권력 의지(524~525)
“오늘 히틀러는 독일의 전부가 되었다” - 합법적 집권과 독재자의 탄생
1932년 7월 31일 총선에서 나치당 지지율은 37.4퍼센트로 상승해 230석을 얻어 의회 제1당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히틀러를 지지하는 유권자는 전체의 3분의 1 수준이었고 히틀러는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마르크스주의 계열 정당들과 끊임없이 경쟁해야 했다.
독일 국민의 3분의 2는 히틀러를 찍지 않았지만 나치당에 극도의 반감을 품은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으므로 대부분의 독일 국민은 앞으로 몇 달 뒤에는 갓 출범한 제3제국에서 호감을 품을 만한 점을 그럭저럭 찾아낼 수 있었다. 독일 국민의 5분의 4를 하나로 묶은 유일한 공통분모는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과 두려움이었다. 히틀러는 정권을 잡은 다음부터 국가사회주의냐, 공산주의냐를 강요하는 양자택일로 자꾸만 분위기를 몰아갔고 그런 선택을 강요받았을 때 대부분의 독일 중산층과 상류층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노동자 중에서도 상당수가 나치를 선택했다. - 1권 10장 제국총리(580~581쪽)
1932년 겨울이 시작되자 위기도 본격화되었다. 보수 엘리트 집단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대중 정당으로 성장한 나치당의 히틀러를 총리로 선택했다.(1933년 1월 30일. 히틀러, 총리직에 오름)) 그들은 히틀러 같은 풋내기는 얼마든지 길들일 수 있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히틀러의 정복욕과 권력욕을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선택이 계산 착오였음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932년 독일에서는 ‘계급 사이의 균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노동자계급은 대공황으로 위축되고 꺾였으며 노동자 조직은 허약하고 무력했다. 하지만 지배 세력은 자신의 상승세를 극대화하여 노동조합의 힘을 완전히 분쇄하기에 충분한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했다. 히틀러는 지배 세력이 그 일을 하라고 끌어들인 사람이었다. 히틀러가 어쩌면 그 이상의 일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예상을 보기 좋게 비웃듯 자기의 권력을 엄청나게 키워서 결국 지배 세력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들은 전혀 하지 못했거나 했더라도 실현 가능성이 지극히 희박하다고 보았다. 히틀러를 총리로 끌어올린 음모가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권력을 주무르는 사람들이 히틀러와 나치당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었다. - 1권 10장 제국총리(602쪽)
총리로 취임한 뒤 히틀러가 완전한 독재 권력을 확보하기까지 몇 단계를 더 거쳐야 했다. 먼저 1933년 2월 27일에 일어난 독일 의사당 방화 사건을 빌미로 삼아 2월 28일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비롯한 시민의 권리를 무기한 유예할 수 있는 ‘긴급령’을 통과시켰다. 뒤이어 1933년 3월 23일에 행정부에 법률을 제정할 권한을 부여하는 ‘수권법’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수권법 통과는 곧 히틀러가 의회에 의지하거나 대통령의 긴급령에 의존하지 않고 국정을 자의적으로 꾸려 나갈 수 있다는 의미였다. 동시에 마르크스주의 정당을 비롯한 모든 정당에 대한 공식, 비공식적 탄압과 위협이 거세졌다. 사회민주당은 금지 조치를 당했고 모든 정당들이 차례로 해산을 선언했다. 이제 독일에는 나치당만이 남았다. 곧이어 나치화를 가리키는 ‘일체화’가 모든 지역, 모든 조직, 심지어 일반인들의 동호회까지 파고들었다.
정치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은 밑바닥에서도 일어났다. 정치만이 아니라 사회 활동을 하는 온갖 조직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걸림돌이 되는 사람한테 내지르는 협박과 시류에 편승하려는 기회주의가 손을 잡고 유행처럼 번졌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도시와 마을에서 나치가 행정권을 거머쥐었다. 좌파 진영에 몸담았던 시장과 지방 의원들은 당연히 곧바로 색출되었다. 현직 시장이 강제로 쫓겨나는 경우도 많았지만 한때 부르주아 정당이나 가톨릭 정당에서 당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 사회에서 신망이 두터운 유지가 나치당원으로 옷을 갈아입고 자리를 지키는 경우도 그에 못지않게 많았다. 교사와 공무원은 특히 너도나도 나치당원이 되겠다고 달려들었다. 독일의 나치당원은 이제 250만 명을 헤아렸고 그중 160만 명은 히틀러가 총리에 오르고 나서 나치당에 가입한 사람들이었다. - 1권 11장 독재자 탄생(669~670쪽)
1934년 8월 2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마침내 히틀러는군 통수권자이자 정부 수반이자 국가 수반의 지위를 모두 지닌 절대 권력자가 된다.
“오늘로 히틀러는 독일의 전부가 되었다.” 8월 4일자 신문 머리기사 제목은 그렇게 나갔다. …… 8월 초에 히틀러가 일으킨 조용한 쿠데타는 8월 19일에 관례로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승인을 받았다. 공식 집계에 따르면 투표자의 89.9퍼센트가 히틀러에게 국가 수반, 정부 수반, 당 지도자, 군 통수권자로서 무제한에 가까운 권리를 헌법으로 보장하는 데 찬성했다. …… 룀 사건에서 힌덴부르크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몇 주 동안 히틀러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흔들 수 있는 모든 위협 요인을 남김없이 제거했다. 마침내 지도자국가가 확립되었다. 독일은 독재 권력을 만들어주고는 거기에 손발이 묶여버렸다. - 1권 12장 절대 권력(730쪽)
왜 평범한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에게 환호했나?
전쟁, 혁명, 민족적 수모, 볼셰비즘에 대한 공포는 워낙 광범위한 독일 국민을 뒤흔들었고 히틀러는 그런 상황을 발판으로 삼았다. 그는 상황을 기가 막히게 활용했다. 히틀러는 좌익 정당에도 흥미를 못 느끼고 그렇다고 해서 가톨릭 정당에도 끌리지 못하는 독일의 서민들이 느끼는 공포와 울분과 고정관념을 당대의 어느 정치인보다도 잘 대변했다. 더 나은 새로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어느 정치인보다도 잘 심어주었다. 더구나 그 사회는 ‘진정한’ 독일의 가치가 살아 있는, 독일 국민에게 더없이 편하게 다가오는 그런 사회였다. - 1권 10장 제국총리(603쪽)
이처럼 많은 대중이 총리 취임 전부터 히틀러가 약속한 독일 민족의 구원과 부활에서 희망을 보았다. 그 희망과 기대감은 1933년 히틀러가 총리로 취임한 뒤한 독난한 련의 사건들로 인해 더욱 커졌다. 독일에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물리고 군사적으로 족쇄를 채운 베르사유 조약을 깨고 1935년에 병력 증강과 재무장을 선언한 것, 나아가 1936년 3월 7일 라인란트를 재점령했다.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의 군사적 모험을 1차 세계대전 이후 느껴. 민족적 열패감에서 벗어 재점커졌로 여겼다. 거기에 1933년부터 경제가 대공황에서 탈출하는 듯 보이면서 취임 당시 독일 국민 3분의 1의 지지는 1936년 무렵이면 90퍼센트 이상의 전폭적 지지로 확대되었다. 1936년에 독일 국민은 민족의 자부심을 되찾아준 지도자에게 열광했다.
(라인란트 재점령 후 1936년 3월 29일에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98.9퍼센트가 히틀러를 지지했다. 아무리 숫자를 갖고 장난을 쳤다 하더라도, 아무리 선동과 강압에 기댔다 하더라도, 1936년 3월 독일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라인란트에서 독일의 주권을 되찾은 히틀러에게 박수를 보냈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가 없었다. 대내적으로도 대외적으로도 히틀러는 당당한 승리자였다. 히틀러 독재의 서막은 그렇게 당당히 올라갔다. …… 대중 운동의 기반이 워낙 막강한 데다가 국민투표에서도 압도적 지지를 받자 히틀러 열풍은 가라앉을 기미를 안 보였다. 히틀러는 정말로 독일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겉으로는 불만을 토로할지언정 대부분의 독일인은 1936년 여름이 되면 적어도 몇 가지 점에서는 히틀러를 지지하지 않고는 못 배겼다. 외교에서 잇따라 거둔 승리가 독일 국민이 히틀러에게 보낸 폭발적 지지의 원동력이었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지도자 숭배가 더 확산되었다. 생활 여건도 전에 비하면 기적처럼 좋아졌는데 이것도 다 히틀러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 2권 프롤로그(21, 26쪽)
엄격한 권위주의 체제, 인권 퇴보, 좌파에 대한 가혹한 탄압, 민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유대인 같은 소수 집단에 대한 차별은 민족이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치를 만한 가치 있는 희생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고 그것을 오히려 바람직하게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냉정하고 능숙한 외교 전문가
히틀러는 기억력이 비상했고 머리 쓰는 것이 아주 날카로웠다. 흔히 주변의 아첨꾼들한테만 히틀러의 말이 먹혀든 것처럼 생각하지만 냉정하고 비판적이고 노련한 정치인과 외교관도 사안을 신속하게 파악하는 히틀러의 비상한 두뇌에 혀를 내둘렀다. 1933년 총리 취임 후 국제 무대에서 히틀러가 거둔 몇 차례의 승리는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이 히틀러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그의 무기는 국내 정치에서와 마찬가지로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의 과감한 승부사 기질이었고, 나치당 선동가 시절부터 즐겨 써 온 공갈 협박도 잘 먹혀드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외교적 승리는 히틀러가 지닌 ‘무오류의 인간’이라는 자기 확신을 더욱 강화했으며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히틀러는 한층 더 무리수를 두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유럽에서 ‘외교 혁명’을 일으키는 쾌거를 이루어냈다면서 뿌듯해했다. 1935년 3월 징병제를 다시 도입하더니 1년 뒤에 라인란트 지방을 다시 점령했다. 이로써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명맥을 유지해 온 외교 질서가 무너지고 유럽의 질서는 하루아침에 뒤집혔다. 서유럽 열강들은 허약해지고 분열되었으며, 독일의 군사력 강화에 제동을 걸 수 있는 힘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국내에서 히틀러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신중하게 나아가기보다 과감한 행보를 보이면서 잇따라 승리를 쟁취하니까 그동안 자제와 신중한 행보를 중시했던 군부와 외무부의 참모들도 히틀러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결코 틀리는 법이 없다는 히틀러의 자기 확신도 더욱 단단해졌다. 히틀러가 이런 중요한 사건들에서 가장 크게 기여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승부사 기질, 특유의 엄포, 상대의 약점을 귀신처럼 읽어내는 후각이었다. - 1권 13장 지도자 숭배(753쪽)
무엇이 히틀러를 전쟁으로 이끌었나? - 독일 민족의 생존 공간 확보
1939년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독일을 세계대전으로 끌고 들어갔다. 특히 히틀러가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소련을 공격한 데는 오래된 이념적 목표가 있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히틀러의 정신을 확실히 지배했으며 히틀러를 전쟁으로 이끈 이념적 목표는 바로 독일 민족의 ‘생존 공간(Lebensraum)’ 확보였다. 인류사를 종족 투쟁의 역사로 본 히틀러는 동방에서 생존 공간을 확보해야만 독일의 생존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1920년대 후반에 히틀러 연설의 중심 화두는 단연 ‘생존 공간’이었다. 《나의 투쟁》 2권에서 이미 장기적으로 소련을 제물로 삼아 생존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밝혔다. 히틀러의 세계관을 이루는 두 성분, 그러니까 유대인을 소탕하는 것과 생존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하나가 되었다. 소련과 전쟁을 벌여서 ‘유대 볼셰비즘’을 박살내면 독일도 새로운 ‘생존 공간’을 얻어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26년과 1928년 사이에 ‘[생존] 공간 문제’와 ‘영토 정책’은 점점 히틀러의 머리를 지배했다. …… 독일 인구에 비해 공간이 모자란 문제는 오직 힘을 얻어야만 극복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중세의 ‘동방 식민화’를 예찬했다. 유일한 활로는 ‘칼을 통한’ 정복이었다. 소련이라고 노골적으로 못 박은 경우는 드물었지만 누구나 들으면 알아차릴 수 있었다. - 1권 8장 지도자 원칙(424쪽)
히틀러는 그 시대 많은 유럽인들처럼 볼셰비즘을 서구 문명의 생존을 위협하는 주적(主敵)으로 보았다. 그리고 볼셰비즘의 배후는 유대인이었다. 히틀러는 소련 지도부의 상당수가 유대인인 것이 바로 그 증거라고 주장했다. ‘유대 볼셰비즘’이 실체화한 소련이 지구상에 국가로 존재하는 한 독일은 언젠가 소련과 승부를 낼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히틀러는 보았다.
(1936년 9월에 구술한 비망록에서) “정치는 민족의 생존을 위한 역사적 투쟁의 실천이고 과정”이라고 히틀러는 서두를 열었다. “이 투쟁의 목표는 존재의 긍정이다.” 세계는 볼셰비즘을 축으로 하는 새로운 분쟁으로 치닫고 있으며 “볼셰비즘의 본질과 목적은 …… 지금까지 인류를 이끌어 온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전 세계 유대인을 들여앉히는 것”이었다. 독일은 볼셰비즘과의 불가피한 한판 승부의 구심점이 될 것이다. - 2권 1장 자기 확신(55~56쪽)
유대인을 제거하고 생존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히틀러의 확고부동한 이념 목표는 포괄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장기적 지향점이 되어서 나치 체제의 주춧돌 노릇을 하던 다양한 세력들의 엇갈리는 이해관계를 모두 끌어안을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유럽의 한복판에 있던 선진 공업국가의 기둥 노릇을 하던 관료, 경제인, 군부는 점점 히틀러의 카리스마적 권위에 빨려들었고 히틀러 한 사람의 포부와 권력으로 상징되던 유럽 정복의 꿈과 민족 구원의 정치 논리에 말려들었다.
최고사령관 히틀러는 왜 스탈린과의 맞대결에서 패했는가?
히틀러는 영국이나 미국에 패하지 않았다. 히틀러의 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다름 아닌 스탈린이었다. 1941년 여름부터 1945년 봄까지 벌어졌던 피비린내 나는 길고 혹독한 전쟁은 두 독재 체제 중 어느 하나가 사라져야 끝날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히틀러가 패배한 것은 현대 국가에 필수적인 통치와 군사 지휘의 체계적이고 안정된 구조를 심각하게 잠식한 개인 지배의 극단적 형태가 가져온 결과였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히틀러는 국가 수반으로서 군 통수권자였을 뿐 아니라 실질적인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관이었다. 전쟁 초반인 1940년에 프랑스에 승리를 거둔 뒤 히틀러는 측근들이 “불세출의 군사 천재”라고 아첨하며 추어올렸던 말을 그대로 믿었다. 서부 전선은 물론이고 동부 전선에서도 승승장구하면서 히틀러의 자기 확신은 더욱 굳어졌다. 히틀러는 사령관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객관적인 전황 보고를 무시하면서 자신의 직관대로 작전을 지시했다. 그에 비해 스탈린은 전쟁 초반에는 히틀러처럼 자신이 직접 전쟁을 이끌려 했으나 곧 독일군에게 크게 패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군사 전문가인 장성들에게 책임을 맡겼다. 히틀러는 시종일관 모든 것을 자신이 지도하려 했지만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같은 전쟁 지도자 어느 누구도 히틀러처럼 군사 문제를 일일이 챙기느라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고 권한을 독점하지도 않았다. 독일에서 통치 구조는 스탈린 독재 치하의 소련에서보다 더 심각하게 무너졌다. 권력의 고삐는 모두 히틀러가 틀어쥐었다. 히틀러는 아직도 권력 기반이 단단했다. 군부, 일부 유력 기업인, 상당수의 고위 공무원은 히틀러가 이끌고 가려는 길에 점점 불안감을 느꼈지만 지도자를 감히 넘어서려는 세력은 없었다. 군사 문제든 국내 문제든 중요한 조치는 모두 히틀러의 재가를 받아야 했다. 전체를 조율하는 기구가 없었다. 전시 내각도 없었고 정치국도 없었다. 히틀러는 전쟁을 꾸려 나가면서 방어하기에도 급급했으므로 생각도 행동도 거의 마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았다. - 2권 13장 벙커 속 지도자(753쪽)
히틀러가 1930년대에 외교 정책에서 승리를 거둔 데 이어 1941년까지 군사 지도자로서도 빛을 발한 것은 적의 약점과 분열을 이용하는 정확한 솜씨가 있었고 판돈을 크게 걸고 약한 상대를 몰아붙이는 도박사 본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주도권을 쥔 동안은 그런 공격 본능이 주효했다. 하지만 한번 도박에 실패하고 질질 끄는 장기전에서 자꾸만 열세에 몰리고 날이 갈수록 상황이 절망으로 흐르자 공격 본능도 효력을 잃었다. 재앙이 닥칠 가능성이 하루하루 높아지면서 히틀러가 지닌 성격의 개별 특징들은 이제 독재의 구조적 허약함으로 운명처럼 녹아들었다. 주변 사람들 특히 휘하 장성들을 점점 더 심하게 불신하는 것이 동전의 한 면이었다면, 동전의 또 다른 면은 히틀러의 제한 없는 자기 중심벽이었다. 그 자기 중심벽은 참극이 하나둘 쌓이면서 능력 있고 믿을 만한 인간은 하나도 없고 오직 자기만이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는 믿음에서 걸핏하면 화를 내는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독일 국민은 왜 저항하지 않았나? - 저항 세력의 무력화
1933년 총리에 취임했을 때부터 독재 권력을 굳히고 1939년 세계대전의 포화로 뛰어들기까지 독일 안에서 히틀러와 체제를 위협할 만한 저항은 없었다. 일반 국민의 히틀러 지지는 굳건했고,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같은 좌파 저항 세력은 일찌감치 철퇴를 맞고 무력해졌다. 체제를 떠받치는 군부, 당, 재계, 공무원 집단은 히틀러에게 충성을 바쳤다. 그러다 히틀러가 본격적으로 영토 확장을 위한 군사 행동에 나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군부에서 암살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독일을 전쟁에서 빼내어 몰락에서 구하려면 히틀러를 제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군 수뇌부는 전쟁 중에, 그것도 여전히 인기가 꽤 높은 국가 수반을 암살하는 데 따르는 윤리적 부담과 거사가 실패했을 때 맞게 될 끔찍한 결말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계속 머뭇거렸다. 마침내 1944년 7월 20일 계획을 실행에 옮겼을 때에는 이미 시기를 놓친 다음이었다.
서부 전선에서 연합군이 승세를 굳히고 동부 전선에서는 붉은군대가 독일 국경으로 접근하는 상황에서 마침내 공격이 이루어졌을 때는, 거사를 도모한 세력도 자기들의 행동으로 전쟁의 결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기회를 이미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히틀러 제거를 모의한 주역의 한사람인 헤닝 폰 트레스코프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거사의 목표는 이제 현실을 바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와 역사에 독일의 저항 운동이 죽음을 무릅쓰고 결정타를 먹이려고 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있다. 그것 말고는 달라질 것이 없다.” - 2권 14장 악마의 행운(805쪽)
‘발퀴레’라는 암호명이 붙은 히틀러 암살 작전은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동프로이센에 있는 지도자 사령부 ‘늑대굴’ 작전회의실에 폭탄을 설치해 히틀러를 제거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뒤 전쟁을 끝낸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폭탄은 터졌지만 히틀러는 가벼운 부상을 입는 데 그쳤다. 게다가 히틀러가 살아 있을 경우 쿠데타를 어떤 식으로 추진할 것인지에 대한 비상 계획은 구체적으로 마련된 것이 없었다. 결국 쿠데타 음모자들은 모두 체포되어 처형당했고 관련자들도 무자비한 보복을 당했다. 히틀러를 제거하려는 마지막 시도는 하루도 안 되어 막을 내렸다. 오히려 이 사건은 군부에 대한 히틀러의 불신과 자기만이 독일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운명의 인간이라는 그의 확신을 더욱 굳히는 결과만을 낳았다.
히틀러는 군부 지도자들은 역시 못 믿을 존재로 판명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왜 모든 전선에서 독일이 연패를 거듭했는지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희생양을 찾아낸 셈이었다. …… 실패한 폭살 음모는 잔인한 복수심만 깨운 것이 아니라 자신은 운명의 길을 걷고 있다는 히틀러의 확신을 더욱 굳혀주었다. 목숨을 건진 것은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라는 신의 ‘섭리’라고 히틀러는 생각했다. 그것은 메시아에 대한 맹신을 강화했다. “나를 없애려던 이 범죄자들은 독일 민족에게 닥칠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히틀러는 비서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독일을 없애려는 적의 계략을 모른다. 서유럽 열강이 독일 없이도 볼셰비즘을 막아낼 만큼 강하다고 그들이 믿는다면 그것은 자기 기만이다. 이 전쟁은 우리가 이겨야 한다. 안 그러면 유럽은 볼셰비즘에게 넘어간다. 누가 나를 누르고 없애도록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위험을 아는 사람도 나뿐이고 위험을 막을 수 있는 사람도 나뿐이다.” - 2권 15장 우상의 황혼(849~850쪽)
벙커 속의 히틀러는 무엇을 생각했나? - ‘네로 명령’과 몰락 의지
“지난날 위대한 독일인이 보여주었던 가르침에 조금도 뒤지지 않게 이 투쟁의 자랑스러운 가르침을 후세에 전하겠다는 의지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고 히틀러는 밝혔다. 이 투쟁에서 목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역사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암시했다. 바그너의 가 극처럼 웅장하고 ‘장렬한’ 투쟁이 머리에 담긴 히틀러의 사전에 1918년의 수치스러운 항복 따위는 있을 수가 없었다. 결사 항전은 용장의 ‘장렬한’ 자기 파멸과 함께 독일 민족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 2권 15장 우상의 황혼(901쪽)
1945년이 되자 독일의 패전은 이제 시간 문제였다. 베를린이 폭격을 당하면서 정부 청사 지구가 잿더미가 되었고 총리 관저도 크게 파괴되었다. 그때부터 1945년 4월 30일 자살하기까지 히틀러는 총리 관저 지하에 마련해 둔 지도자 벙커에서 시간을 보냈다. 국민들에게 결사 항전을 요구하면서 히틀러는 서방 연합국과의 강화를 권유하는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이때 히틀러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패배 없는 몰락이었다.
히틀러는 군사적으로 승리를 거두어 입장이 유리해졌을 때만 협상에 나설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그런 선택지가 히틀러 앞에 열릴 가능성은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히틀러는 지치지도 않고 역경을 이겨내는 의지만을 줄곧 이야기했고 항복을 거부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라고 요구했다. 그동안 독일은 불에 탔다. 장군들은 전술적 후퇴를 건의했고 점령한 지역을 포기하더라도 병력을 빼내 전선에서도 중요한 핵심 구역을 지원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건의했지만 히틀러는 여기서도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현실 파악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마치 자신과 독일이라는 나라, 독일 국민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싶다는 소망에 젖은 사람 같았다. - 2권 16장 몰락 의지(916~917쪽)
소련의 붉은군대가 대독일제국의 국경선을 넘어 밀려오는 상황에서 히틀러는 1945년 3월 19일 ‘제국 영토의 파괴 조치’(일명 ‘네로 명령’)라는 이름으로 독일 전역의 초토화 지시를 내린다. 알베르트 슈페어 군수장관을 비롯해 지시를 받은 여러 관구장들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아 불발에 그쳤지만 이 명령이야말로 히틀러의 몰락 의지를 가장 분명히 보여준 것이었다.
“우리 민족의 생존을 위해 싸우자면 적의 전투력과 추가 진격 역량을 약화시키기 위해 제국 영토 안에서도 부득이 모든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적의 공격력에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지속적 피해를 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이용해야 한다. 파괴되지 않았거나 잠시 가동력을 잃은 수송, 통신, 산업, 공급 시설이 영토를 되찾으면 다시 우리한테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적은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고 후퇴할 테니까 주민 사정은 아예 고려하지 않는 것이 좋다.” - 2권 16장 몰락 의지(9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