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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4장은 속죄제에 대해서, 5장은 속건제물에 대해서 쓰여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으로 죄얼을 입게 하였으면 그 범한 죄를 인하여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곧 그 수송아지를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 레4: 1-12”
레위기 4장은 제사장이 죄를 범했을 때, 다음에 회중이 죄를 범했을 때, 또 족장이 죄를 범했을 때, 그리고 마지막에 평민이 죄를 범했을 때 이런 순서로 되어 있다.
기독교 안에서 특별히 죄라는 문제가 아주 심각하고 복잡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다.’ 거기서 출발한 것이 기독교니까, 교회 가면 일차적으로 보이는 것이 ‘죄’ 문제이다.
그런데 레위기의 제물의 순서에 따르면 속죄제가 먼저가 아니고 번제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소제가 있고, 그 다음에 화목제가 있고, 그 다음에 속죄제가 있다. 기독교는 죄부터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니까, 맨 처음에 ‘죄부터 해결해야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생각하게 될 만큼 되어 있다.
그런데 왜 레위기의 순서는 그렇지 않는가? 이것이 참으로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번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만족을 드리고 그 다음에 소제로 이어져 내려와서 하나님과 제사장이 함께 먹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교통이 된다는 말이다. 번제가 있어야 교통이 된다. 교통이 되고 난 다음에 화목이 생겼다.
그런데 화목이 됐으면 그만인데 왜 속죄제가 또 있나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있는데 내가 그 사람과 아무 상관없을 때, 그 때는 그 사람에 대해서 내가 잘못하나 안 하나 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안된다. 그런데 내가 그 모르던 사람을 차차 알게 되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무엇을 잘못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전혀 모르는 사람한테는 잘못했다는 생각 자체도 없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람을 알고 보니까, 친한 사람이 되고 보니까 잘못한 것이 생각나고 미안한 것이다. 화목을 하니까 그 때 비로소 내가 죄가 생각난다는 뜻이다.
그래서 로마서의 순서에 따르면 죄가 먼저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런데 레위기에는 죄가 먼저 안 나오고 번제가 먼저 나왔다. 쉽게 말하면 화목이 먼저 나왔다. 죄가 회개되어야 화목이 될 것 같은데, 레위기에서는 화목이 된 다음에 죄 문제가 나왔다. 왜 그렇게 되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 생각 같으면 죄가 없어져야 하나님과 관계가 될 것 같고 화목이 될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 화목은 다른 방법으로 되고 화목이 된 후에 죄를 처리하는 문제가 나오더라는 것이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자기 죄 때문에 회개하기도 하고 통회하기도 하고 이런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너무나 죄가 중하니까 교회를 못 가겠다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자기 양심 안에서, 자기 생각 안에서 ‘아, 이것은 나쁜 것이다. 이것은 옳은 것이다.’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선악을 판단하는 지식 안에서 ‘내가 죄인이구나.’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하면, “그렇죠. 죄 안 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한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이라 했습니다.” 그 말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다 자기 양심에 자기는 온전하지 않다고 알고 있고, 깨끗하지 않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고 난 후의 문제인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빛이 들어오지 않은 깜깜한 방에서 자기 얼굴에 지금 때가 묻었다던가 검댕이기 묻었다던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과, 빛이 들어온 다음에 ‘아, 내 얼굴이 왜 이렇게 검은가.’ 그렇게 아는 것은 아주 다른 것이다. 우리는 깜깜한 방에서도 내 얼굴에 무엇이 묻어 있는가를 아는 줄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것은 자기 생각이고 내가 정말 내 얼굴에 무엇이 묻어 있는가를 알려면 빛이 먼저 들어와야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 1서에서는 우리의 죄를 먼저 얘기하지 않고 “하나님은 빛이시다.”라고 시작하였다. 요한 1서와 레위기는 딱 맞는 것이다. 요한 1서에서는 말씀으로 하고, 레위기에서는 그림으로 우리에게 보이고 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 안에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그러니까 그 안에 사귐이 있게 되면 그 안에서 비로소 죄 문제가 나오게 되어 있다.
요한 1서 1장 5절에 보면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하였다. 그러니까 이것은 빛이 오니까, 하나님은 빛이시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빛과의 사귐을 갖다 보니까 자기 안에 죄가 보인다는 뜻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순서이다.
내 양심에서 내가 죄가 있다 없다 하는 것은 이방인의 관념이고, 하나님의 백성의 관념은 그게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달아지는 그것이다. 이방인의 관념은 자기가 자기의 어떤 소원과 자기의 목표 때문에 인간은 불완전하다 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의 관념은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만나니까 나는 아무 것도 아니더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혀 다르다. 하나는 생각이고 하나는 실제적이다. 이방인은 허망한 생각이고 유대인은 실제적이다. 내가 누구를 만나니까 ‘내가 아무 것도 아니구나.’, 내가 깨끗한 자를 만나니까 ‘나는 더럽구나.’ 그렇게 안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적인 것이다. 그 사람 때문에 내가 더럽다는 것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다 더러운 사람들끼리 있다. 그러면 실제적으로 더럽다 하는 것을 느낄 수 없다. 그런데 깨끗한 사람을 만나니까 ‘내가 더럽구나,’ 그렇게 느끼게 된 것이다. 이것이 실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화목제가 있고 난 후에 속죄제가 나오게 되었다. 하나님과 화목한 결과가 오니까 그 때 죄가 문제가 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죄씻음’이란 것이 생기게 된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더욱 더 친해진다면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의무는 더 많아진다. 그 사람과 내가 친하지 않았을 때는 아무렇게 해도 상관이 없다. 모르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그 사람에 대한 더 많은 의무를 갖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행할 수 있는 일도 그 사람이 나에게 너무 잘한 사람일 때는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 큰 짐이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 나를 해칠 때 내가 한 마디 욕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 그 사람도 나를 해쳤으니까. 그런데 그가 내게 선을 행했는데 내가 욕을 했다. 그러면 똑같은 욕이지만 그 욕은 전혀 성질이 다르다. 저쪽 사람이 나에게 선을 베풀었는데 내가 악으로 갚았다 하는 것과, 그 사람이 나에게 악을 행했는데 악으로 갚았다 하는 것과는 성질이 아주 다르다.
내 돈을 떼어먹은 사람의 돈을 나도 떼어먹었다. 그러면 큰 문제가 안된다. 그런데 내게 돈을 빌려준 사람의 돈을 내가 떼어먹었다. 이러면 큰 문제가 된다. 액수는 똑같아도, 같은 만원이라 할지라도 성질은 전혀 다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목이 짙으면 우리 안에서 어둠도 조금도 용납이 안된다. 만일 정말로 친하다면, 정말로 화목이 있다면, 정말로 화목이 있는 속에는 조그마한 어둠도 용납이 되지 않는다. 먼 사이에서는 어지간한 것은 다 문제가 안된다. 자기도 그렇고 나도 그러니까 내 양심에 거리낌이 안된다. 그러나 저 사람과 나 사이가 전혀 흠이 있을 수가 없는 사이인데 내 쪽에서 흠이 좀 생겼다. 그러면 이것은 작은 것이라도 큰 문제가 된다. 그러니까 결국 화목이 있고 난 후에 죄 문제가 나오게 된 것이다. 이것이 요한 1서의 순서하고 일치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진정한 죄사함이라는 것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그냥 생전 처음 만난 사람한테 “나는 당신에게 잘못했습니다.” 한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가? 그렇지 않고,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를 지나야 비로소 완전한 속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속죄의 순서이기도 하다. 우리가 속죄를 받는 과정을 순서적으로 생각한다면 내가 먼저 번제가 되고, 번제가 된 결과로써 내가 그와 함께 음식을 나누고, 그런 다음에 내가 화목이 되면 그 때 그는 나의 죄를 용서하게 된다. 순서상으로 보면 그가 나와 화목이 되면 내 죄가 없어진다. 그러나 내가 화목이 안된 상태에서 내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죄를 먼저 회개할 것인가, 아니면 먼저 우리가 번제가 되어 화목할 것인가? 화목이 되어야 용서가 된다. 부모는 자식에 대해서 항상 정죄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언제라도 용서가 된다. 그렇지만 항상 정죄를 하고 있는 사람은 적은 죄라도 용서가 안된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 화목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상대방에 대해서 화목이 있어야 내가 용서가 된다. 그러므로 결국 이 원칙은 이 편으로 봐도 정상적인 원칙이며 저 편으로 봐도 정상적인 원칙이다.
속죄의 순서로 봐서도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 다음에 속죄제가 오는 것이 정상적이고, 또 속죄의 당위성을 봐서라도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가 있은 다음에 속죄제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가 죄를 깨닫는 것을 봐도 우리는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가 있은 다음에 우리 죄를 깨닫는 것이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종교인들은 자기 생각 속에 있는 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의 죄가 아니라 독자적으로 자기 스스로 자기를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죄를 가지고 일생동안 씨름을 하는 것이다.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나는 더럽다.” 하는 개념도 자기 생각이고, ‘나는 죄인이다.’ 하는 생각도 자기 생각이고, ‘나는 불완전하다.’ 하는 생각도 자기 생각이다. 왜냐하면 자기 목표에 비해서 불완전한 것이며, 자기 생각에 비해서 깨끗하지 않은 것이며, 자기 표준에 비해서 자기는 부정한 것이니까, 언제나 이것은 하나님하고 관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도 “당신은 죄인입니다.” 하면 부인하지 않는다. “당신은 정말 죄를 한 번도 안 짓습니까?” 그러면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00파 사람들이 보통 그런 말을 하고 있다. “죄를 안 짓습니까?” 그렇게 물으면 아무도 죄를 안 짓는다고 대답할 사람이 없다. 그 죄와 이 죄는 다르다. 그래서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레4:2)”라고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무 말씀도 안 했으면 나는 죄가 없는 것이다. 금령이 있었기 때문에, 즉 ‘하지 말아라. 해라.’ 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율법이 없었으면 죄도 없었을 것이다.(롬4:15)” 이 말은 “금령이 없었으면 죄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우리가 죄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있는 것이지,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면 죄 있는 것도 없고 죄 없는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보면 문화적인, 관념적인, 철학적인, 종교적인 여러 가지 배경 때문에 어떤 사람은 죄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있다. 어떤 사람은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전혀 부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걸 보면 사람들의 생각 속에 있는 죄는 이것이 전혀 하나님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느냐?(마15:2)” 유대인들은 그렇게 얘기했다. 그런데 인도나 그런 데서는 젓가락으로 먹는 게 아니고 꼭 손으로 먹는다. 더러운 손으로 그냥 먹는지, 아니면 씻고 먹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그렇다고 한다. 이런 것이 모두 관념 문제이다.
구체적으로 내가 아무하고도 살지 않고 나 혼자 산다. 그러면 죄고 뭐고 그런 것을 모르는 것이다. 내가 누구하고 관계가 있으니까, 그 사람에 대해서 내가 잘못했는가, 그 사람에 대해서 잘못하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내가 누구에게 잘못하지 않았다면 문제가 안된다. 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고, 그 사람을 괴롭게 하지 않고, 그 사람을 해롭게 하지 않았다면 아무 문제가 안된다. 내가 그 사람을 해롭게 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누를 끼쳤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아무도 없고 나 혼자 산 속에 산다면, 나는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이다. 자기 혼자 이렇게 생각하나 저렇게 생각하나 그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아무도 피해 받을 사람이 없으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속에서 ‘나는 더럽다. 나는 불완전하다. 나는 죄인이다.’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非성서적이다. 다시 말하면 非유대인적이다. 非 하나님 백성적이다. 하나님 백성은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 백성의 죄는 하나님이 있어서 깨닫는 죄를 말한다. ‘금령 중의 하나라도 범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을 내가 따라야 하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안 했다는 것이다.
군대에 가면 군법회의라는 것이 있다. 군법회의는 어떤 것인가? 군대의 명령이 있는데 그 명령을 어겼다. 그러면 그것은 군법회의에 회부된다. 군대에서 명령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군법회의에 회부될 수 없다. 그런데 명령이 있었는데 그 명령을 어겼을 때는 군법회의에 회부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은 군대와 같다. 우리는 나 혼자 스스로 살면서 ‘내가 깨끗해지느냐 더러워지느냐?’ 하는 사람이 아니고, 나를 지으시고 나를 부르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이 앞에서 ‘내가 잘못했느냐, 잘 했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기 전에 내가 ‘죄인, 죄인’ 하는 것은 자기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사람이 죄인이라고 느끼는 느낌과 미국 사람이 죄인이라고 느끼는 느낌은 아주 다르다. 그렇게 되면 성경을 여러 개 써야 안 되겠는가. 미국 사람 성경을 따로 쓰고 한국 사람 성경을 따로 쓰고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 한국 사람이 ‘죄’라고 생각하는 것과 미국 사람이 ‘죄’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 같은 것이 아니다.
이걸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서 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를 만남으로 말미암아서 그를 배신하였다(마26:69-75). 만일 예수를 안 만났더라면 배신할 리가 없다. 또 예수를 만났으니까 시인도 하였다. 예수를 안 만났더라면 시인할 것도 없다. 그는 자기 혼자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자기는 시인도 하고 부인도 하게 되었다. 결국 자기가 시인도 하고 부인도 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사람을 만난 것이다. 자기 자신이 시인하는 사람도 아니고 부인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 상대의 어떠함 때문에 나는 시인하기도 했던 사람이고 부인하기도 했던 사람이 된 것이다.
예를 들어 높은 산이 있다. 그 산을 우리가 등산을 한다면 산에 오를 사람도 있고 못 오를 사람도 있다. 힘이 없는 사람은 못 오를 것이고, 힘이 있는 사람은 오를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산이 아니라면, 오르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못 오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평지에 걸어간다면 여러분이나 나나 똑같다. 그런데 앞산에 올라간다면 여러분과 내가 달라질 것이다. 공자님을 만났을 때의 반응과, 석가모니를 만났을 때의 반응과, 예수를 만났을 때의 반응이 다 다르다. 상대가 다르니까 그렇다. 앞산에 올라갔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한라산에 올라갈 때는 문제가 생겼다던가, 한라산에 올라갈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백두산에 올라가니까 문제가 생겼다던가, 이런 문제는 사람 문제가 아니라 모두 산 문제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죄라고 말하는 이것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생겨진 죄를 말한다. 진정 우리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는 진실한 고백은 어떤 것이냐 하면 내가 예수를 만났을 때라는 것이다. 바울은 율법 안에서 자기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고 나니까 “주여, 뉘십니까?(행9:5)”라고 하였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행9:5)” 그 때 그 사람이 바울 앞에 와서 부딪쳤다. 그래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나오게 된 것이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이다. 주께서 “그물을 깊은 곳에 던져 봐라.(요21:6)” 하시니까, 베드로가 그물을 깊은 곳에 던지면서 “내가 밤이 맞도록 수고했어도 얻은 것이 없지만 선생님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던져 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고 난 다음에 그물에 가득 고기가 걸린 것을 보고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랬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실제적인 것이다.
내가 공연히 “나는 힘이 없는 사람이야.” 하는 것도 거짓말이고 망상이다. 내가 공연히 “힘이 있는 사람이야.” 하는 것도 망상이다. 내가 무엇을 들어보고 “나는 힘이 없는 사람이야.” 이래야 실제이다. 내가 무엇을 들어보고 “나는 힘이 있는 사람이야.” 이래야 이것이 실제이다. 그런데 문제 있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공연히 자기 혼자 좋았다가, 공연히 자기 혼자 나빴다가, 공연히 자기 혼자 자기는 자랑스럽다가, 공연히 자기 혼자 열등감에 빠졌가가 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무엇을 만났어야만 내가 반응이 일어날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실제다. 이런 사람은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생각으로 사는 사람은 막상 현실에 부딪치면 자기는 전혀 엉뚱한 반응이 일어나 버리고 만다.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할 때는 가서 엉뚱한 소리를 해 버리는 것이다. 딴 소리를 한다. 왜냐하면 생각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생각으로 살지 않는 사람은 실제에 부딪칠 때 비로소 자기가 정상적인 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사람을 만날 때 비로소 그 사람을 만나봐야 어떤 사람일지 아는 그런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만남으로써 일어난 ‘나’기 때문에 그것은 또 다른 사람을 만나면 안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서 화가 났다. 그러면 ‘나는 화를 내는 사람인가. 나는 화도 못 참는 사람이구나.’ 하고 슬럼프에 빠질 수가 있다. 그런데 생각으로 살지 않는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는 화가 안 날 수 있다. 그러니까 전혀 문제가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빛을 만난 것이고,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다. 밝은 데서 우리 얼굴을 보고 얼굴에 점이 있느니 때가 묻었느니 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캄캄한 데 앉아서 때가 있느니 점이 있느니 하는 것은 우스운 짓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울기도 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웃기도 한다. 그로 말미암아서 일어나는 반응, 그것만이 실제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부르셨다. 그 말은 결국 우리와 그 사이에는 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엘로힘’이라 했을 때는 우리와의 관계보다는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을 얘기할 때 ‘엘로힘’이라 한다. 그런데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을 얘기할 때는 ‘여호와’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단순한 능력 문제가 아니고 관계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들 때, 즉 우리가 어떤 사람을 어떤 사람이 되게 할 때, 그 때는 능력 문제가 아니라 관계 문제이다. 내가 그 사람을 선한 사람이 되게 할 수도 있고, 악한 사람이 되게 할 수도 있다. 그 사람을 내가 웃게 할 수도 있고, 슬프게 할 수도 있다. 그것은 관계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관계의 하나님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한다.
창세기 2장에서 사람을 만드셨을 때 그 하나님은 엘로힘이 아니라 여호와인 것이다. 우리와 관계를 가진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전체적으로 관계없이 독존하는 존재가 아니고, 존재 자체가 관계에서 시작된 것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관계라는 것이다. “내가 사람이다.” 할 때 왜 나는 사람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있으니까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여자다.” 할 때 나는 왜 여자인기? 남자가 있으니까 여자라는 것이다. 전부 여자밖에 없다면, 이것은 여자도 뭐도 아무 것도 아니다. 남자가 있으니까 상대적으로 여자이다. 여자가 있으니까 상대적으로 남자이다. 우리는 존재 자체가 관계적이다. 내가 독자적으로 존재할 때 나는 나를 무엇이라고 이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름이 없다. 관계에서 이름이 생긴다.
그래서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해서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고 생물들을 이끌어 오니까 아담이 이름한 바가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하였다. 그 말은 아담과 상대적인 관계에서 생물들의 이름이 생긴다는 것이다. 즉 아담과 상대적인 관계에서 개고, 상대적인 관계에서 소고, 상대적 관계에서 돼지이고 그렇다. 그러나 저들끼리 있을 때는 돼지가 아니다. 우리가 뭘 많이 먹으면, 먹는 것밖에 모르면 돼지라고 한다. 우리는 왜 그걸 보고 돼지라고 했느냐 하면 너무 먹을 것밖에 모르는 것으로 보이니까 ‘저렇게 먹을 것밖에 모르는 것은 돼지라고 하자.’ 해서 이름을 지어놓은 것이다. 왜 개라고 지었는가? ‘모르는 사람을 보면 짖는다. 그래서 저걸 개라고 하자.’ 해서 우리가 지어놓은 것이다. 결국 이것은 우리가 상대적으로 붙여준 이름이다. 그러니까 만일 사람이 아니라면 짐승은 짐승이 아니다. 사람이 있기 때문에 짐승이 된 것이다. 나는 왜 사람이 됐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은 ‘짐승이 있기 때문에 나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한다. 짐승하고 나하고 비교할 것밖에 없으니까 나는 짐승이 있어야 비로소 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도덕적인 관념에서는 그렇다. 그런데 우리가 도덕적인 관념이 아닌 생명의 관념에서는 하나님이 있어야 내가 사람이라는 것이다.
“내가 죄인이다.”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하나님이 있어야 내가 죄인이든지 말든지 하는 거지, 하나님이 없는 사람에게는 죄인이고 아니고가 없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보고 “당신은 죄인입니다.”라고 하는 것은 우스운 말이다. 하나님이 먼저 있어야 그 사람이 자기가 스스로 죄라는 걸 깨닫게 된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한테 “당신은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그 사람은 어디 가서 누구한테 거짓말 한 것이라든지 이런 것들만 생각나게 된다. 그래서 ‘아, 그런 것들도 죄인가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에게 “당신은 죄인입니다. 성경을 보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하였다 했습니다.”라고 하면 그 사람이 알아들을 때 뭐라고 알아듣겠는가? ‘아, 내가 그 전에 누구한테 거짓말했는데 그것보고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있어야 우리가 죄인이 되던가 의인이 되던가 한다. 하나님 없이 의인이라는 말도 헛말이고, 하나님 없이 죄인이라는 말도 헛말이다. 하나님 없이 완전하다는 말도 거짓말이고, 하나님 없이 불완전하다는 말도 역시 거짓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생각이라는 것이다. 불완전하기는 왜 불완전한가, 불완전하다는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 자기가 완전한 것에 대한 어떤 상상을 하고 있는데, 그 상상에 비해서 자기는 불완전하다 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불완전하다는 개념이 말은 똑같아도 사람마다 다 다르다. 자기가 무엇을 완전이라고 규정을 정해 놓았느냐에 따라서 자기가 불완전하다는 개념도 다 다르다. 그러니까 언어는 같지마는 그 내용은 다 다르니까, 사람들이 만나서 얘기하면 아무리 말을 해도 말이 안 통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100점 기준이고, 어떤 사람은 80점 기준이고, 전부 다르다. 어떤 사람은 흘러가는 물을 기준으로 해서 나는 불완전하다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소나무를 기준으로 해서 나는 불완전하다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날아가는 독수리를 기준으로 해서 나는 불완전하다는 사람이 있고, 불완전하다는 개념이 여러 가지이다. 그러니까 불완전하다는 개념을 가지고 아무리 얘기해도 얘기가 안 통하는 것이다. 각자 자기가 설정한 것에 의해서 내가 불완전한 것이니까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불완전하다 하면 그것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똑같이 온전한 자를 만나서 내가 불완전함을 느낀 것이니까, 이것은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도 다 똑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속죄 제물, 즉 죄 문제가 왜 네 번째로 등장하느냐 하는 문제는 빛이 있어야 내가 흠이 발견된다 하는 의미이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가 속죄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의 과정을 거쳐야 속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냥 속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속죄제는 번제와 비슷하다. 그러니까 근원적으로 우리가 정말로 번제가 되었다면, 사실은 죄가 없는 것이다. 고운 밀가루로 빻아졌다면, 사실은 죄가 없는 것이다. 화목제물도 역시 번제 위에 드려진 것이었다. 그러니까 만일 내가 번제 위에 불살라졌다면 죄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교리적일 때 번제가 있고 난 다음에 뭐가 있고 그 다음에 또 뭐가 있고 이렇게 되어 있지, 실제상으로 번제 안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소제 안에 모든 제물이 포함되어 있고, 화목 제물 안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 단번에 자기를 드리심으로써 다시는 송아지나 염소의 피로써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됐다.” 하는 예수님의 모범을 우리가 본다면 하나 속에 전부가 들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자기 자신을 단번에 드리니까 그 다음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더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여러 가지 항목을 얘기하고 있지만, 이 모든 항목들은 하나의 항목을 열거해 놓은 것이다. 한 가지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이다. 십자가가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된다. 그걸로 인해서 부활도 있고, 그걸로 인해서 승천도 있고, 재림도 있고, 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알 것이다.
그러므로 속죄제는 결국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한 결과라는 것이다. 화목이 된 결과로 속죄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 4장에서는 항상 “그것을 깨달으면”라고 하였다.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으로 죄얼을 입게 하였으면, 그 범한 죄로 인하여 흠없는 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 것이요.”라고 되어 있고, 또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를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그 때 회중은 수송아지를 드려라.”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족장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그 범한 죄의 깨우침을 받거든,”라고 되어 있고, 또 “만일 평민 중 하나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그 범한 죄의 깨우침을 받거든.“라고 되어 있다. 전부 ‘깨우침을 받거든’ 그렇게 되어 있다.
우리가 과연 죄를 스스로 깨우침 받을 수 있는가? 스스로 깨우침 받을 수 없다. 화목이 돼야 그 때 깨우침 받는다. 사람은 참 이상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전에 참 잘못한 것이 있었다. 그렇지만 둘이 서로 화가 났을 때는 전혀 잘못했다는 생각이 없다. 화가 막 나서 양쪽이 싸우는데 자기는 잘못했다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과 내가 화목이 되고 나면 그 때 “미안하다.” 고 말하는 것이다. 화가 막 치밀어 올랐을 때는 절대로 자기는 잘못했다는 생각이 안 든다. 그런데 내가 화목이 되고 나면 ‘아이구, 내가 안 그래도 되는데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상대방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화가 막 났을 때 “네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 안 해.”라고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먼저 화목을 이루고 난 다음에, 화목을 이루고 나면 저절로 “아이구, 미안하다.”라고 말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이 참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목 제물이 있고 난 다음에 속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느끼는 죄와 세상에서 느끼는 죄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고, 이방인이 느끼는 죄와 유대인이 느끼는 죄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방인이 느끼는 죄라는 말은 양심적인 것이고 도덕적인 것이며, 유대인이 느끼는 죄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한다.
“금령 중 하나라도 범했으면,”라고 하였다. 금령은 “무엇을 하지 말아라, 해라” 하는 말이니까 “하지 말아라, 해라.” 하는 것은 관계에서 나온 말이지, 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한테는 “해라, 하지 말아라.”가 없다.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담에게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을 것이다. 먹지 말아라.” 그랬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면 “먹으면 죽는다. 안 죽는다.” 할 필요가 없다. 관계가 있으니까 금령이라는 것이 생긴 것이다. 관계가 없으면 금령이 없다.
두 사람 사이에 친한 관계가 있다. 친한 관계가 있으니까 거기서 배신하면 안된다 하는 것이 있다. 친하지 않으면 배신이고 뭐고 할 것이 있겠는가. 뭔가 관계가 있으니까 제한이 생기게 된다. 관계가 없으면 제한이 안 생긴다.
결혼을 안 했다. 그러면 다 제 마음대로 사는 것이다. 결혼을 했다면 관계가 생겼다는 것이다. 관계가 생겼으니까 상호간에 제한이 생긴다. 그래서 나도 저 사람에게 제한을 받아야 되고, 이 사람도 나한테 제한을 받아야 된다. 관계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아무 제한도 안 받으려면 결혼도 안 해야 된다. 자기 혼자 멋대로 살려면 결혼을 안 해야 된다. 그런데 결혼은 관계이다. 부부 관계이다. 관계니까 금령이 있다. 이 관계를 위한 금령이 선포되어 있다. 그래서 이 금령을 어기면 죄가 되는 것이다. 그 전에는 죄가 안 됐던 것이 죄가 된다. 나 혼자 살 때는 죄가 안 됐던 것이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니까 죄가 될 수 있다. 관계가 생겼기 때문이다.
관계는 무슨 관계든지 금령이라는 것이 있다. ‘해서는 안된다’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을 어기면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가 있기 때문에, 관계된 백성이기 때문에 죄라는 것이 생기게 되었다.
“금령 중 하나라도 범하면,” 금령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관계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 관계가 어떤 관계냐에 따라서 금령도 어떤 금령이냐 하는 것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 관계의 성질과 금령의 성질은 일치한다.
예를 들어 사제간의 관계다. 그러면 거기에 사제간의 금령이 있는 것이다. 부부간의 관계다. 그러면 부부간의 금령이 있다. 친구간의 관계다. 그러면 친구간의 금령이 있다. 교회 형제간의 관계다. 그러면 교회 형제간의 금령이 있다. 반드시 있게 되어 있다. 무제한 금령이 없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율법으로 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는 다 금령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 생활을 할 때도 교회 생활 안에는 이것이 관계라는 것이다. 교회 생활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관계이다. 이 관계는 세상의 어떤 관계보다도 더 온전한 관계이고, 이 관계는 다른 관계와는 전혀 다른 관계이다.
세상의 모든 관계는 우리의 소유와 소유와의 관계이다. 그러나 교회 관계라는 것은 존재의 관계이다. 그래서 존재의 관계는 존재의 관계대로의 금령이 있다. 소유 관계는 소유 관계대로의 금령이 있다. 우리가 누구하고 상업을 한다. 그러면 그것은 거래 관계이다. 상업적 관계이다. 상업적 관계이기 때문에 신용이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신용이 없으면 상업적 관계가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을 안 해도 두 사람 사이에는 금령이 있다. 상업적 관계에서는 물건을 팔 때는 이익을 남기고 판다던가, 또 물건을 사 올 때는 이익을 붙여 주고 사 온다던가, 그런 조건이 붙어 있다. 그래서 내가 원가가 100원 짜리인 물건을 120원을 주고 사 오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이익을 붙여 주어야 되니까 그렇다. 그 사람은 내게 장사를 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그 사람에게 20%를 붙여 주어야 된다. 그것은 상업적인 계약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적인 생활을 할 때 우리는 모두 무언의 계약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계약을 파기하면 관계가 파기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교회 관계는 가장 숭고한 관계이고 가장 신성한 관계이다. 그러므로 이 관계 안에 있는 금령은 또 가장 신성한 것일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는 돈 문제니까 돈 떼어먹으면 돈 떼어먹은 문제만 생기게 된다. 문제가 돈 관계니까 그렇다. 그러면 돈만 갚아 주면 된다. 내가 지금 돈을 떼어먹었지만 다음에 언젠가 돈을 갚아 주면 끝나는 것이다. 돈 문제니까 아무 다른 문제가 없다. 그런데 교회 생활이라는 것은 번제의 생활이다. 이것은 존재 문제니까 다음에 미안하다 하면 된다는 이런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이것은 가장 신성한 문제이기 때문에 가장 신성한 계약이 필요하다. 율법적인 계약이 아니라 신성한 계약이 이 안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우리가 다른 교회 사람들과 다른 것이 그것이다. 다른 교회 사람들은 이 교회 다니다가 서울로 이사가면 딴 교회에 갈 수도 있고, 대구에서도 다른 교회에 갈 수도 있고 그렇다. 또 자기 종교 생활만 하면 되니까 평생 안 보고 살아도 된다. 그런데 우리 교회 생활은 그것과 다르다. 이것은 평생 같이 사는 사람들이다. 친척은 나하고 떨어져 살 수 있지만, 우리 교회 형제들은 평생 같이 살아야 된다. 그러면 이것은 가족이나 똑같다. 그러니까 다른 관계하고 이것은 전혀 다른 관계이다. 안 그렇겠는가! ‘내가 예수만 믿으면 되니까 어디 가서 믿어도 예수만 믿으면 안 되나.’ 하는 생활이 아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영원히 같이 살 사람이라는 것이다. 가능하면 공동묘지도 같이 만들어 놓고, 거기도 같이 갈 사람들이다. 지금 돈이 없어서 그렇지, 돈만 있으면 좋은 공원 묘지를 하나 만들어 놓고 죽는 순서대로 다 거기로 가야 된다. 일시적으로 만났다가 헤어질 사람이 아니다. 형제간이라도 우리의 교회생활처럼 영원할 수 없다. 형제간이라도 멀리 떨어져 살 수 있고, 또 비위가 틀어지면 말을 안 하고 살 수도 있고, 그럴 수가 얼마든지 있다. 세상에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든지 많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싫어도 같이 살아야 되고, 좋아도 같이 살아야 된다. 그래서 이것이 영원한 가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관념을 갖고, 그것을 우리가 알고 살아야 된다. 우리가 그냥 한 번 보고 말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같이 살 사람이니까 우리 안에서 지켜야 할 것은 다른 데서 지켜야 할 것보다 훨씬 더 귀중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 안에서 삼가해야 될 것은 다른 데서 삼가해야 할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보고 말아버릴 사람 같으면 괜찮다. 그러나 늙어 죽을 때까지 볼 건데, 보고 말 것이 아니지 않는가! 내가 만일 잘못 해 놓으면 늙어 죽을 때까지 그 잘못한 것을 짊어져야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하고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 그러면 나는 떠나버리면 그만이지.”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떠나지느냐 하면 안 떠나진다는 것이다. 아무리 떠나질 것 같지만 안된다. 세상에 아무리 돌아다녀도 또 안된다. 결국은 도로 같이 살아야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히 같이 살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 관계가 영원한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교회 생활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는 다른 금령이 또 우리한테 있을 수 있다. 우리가 만일 교회 생활을 안 한다면 그 금령이 없어도 될 것인데, 교회 생활을 하기 때문에 금령이 있을 수 있다. 내가 학생이기 때문에 학생의 금령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교회생활이기 때문에 교회생활로서의 금령이 또 역시 필요하다.
결국 죄는 관계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또 관계 안에서 해결되는 것이다. 이것은 관계에서 생긴 거니까 용서를 해야 없어지는 거지, 용서 안 하면 안 없어진다. 내 스스로 생각하는 것 같으면 내 생각만 없어지면 끝나는 거지만, 저 사람과 나의 관계에서 생긴 것이니까 그 사람이 나를 용서해야 내 죄가 없어지는 거지, 나 혼자 없어졌다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주 실제적인 것이다.
그래서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족장이나 누구든지 죄를 범했다가 그것이 죄라 하는 것이 깨달아지면 제물을 드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그리고 그 상대방에게 드리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내놓고 화목의 제물로, 속죄의 제물로 드리라는 것이다. 물론 깨닫지 못하면 자기가 모르는 것이니까, 즉 자기가 죄를 범하고 나서도 죄를 범했는지 어쨌는지 그걸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죽은 송장이 감기가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모르는 것처럼 전혀 모른다. 이걸 보고 양심에 화인 맞았다고 한다.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걸 모르면 자기는 죄책은 없다. 죄책이 없으니까 편하기는 편한데,이것은 사람이 산 것이 아니다. 관계가 살아있다면 알 건데, 관계가 죽어있으면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꼭 깨달으면, 그걸 깨우치게 되면 그렇게 하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는 ‘안 깨우치면 안 좋겠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안 깨우치면 어떻게 되나? 그것은 사실은 왜 못 깨우치냐 하면 관계가 확실하지 않으니까 못 깨우치는 것이다. 관계가 확실히 알아진다면 왜 그것을 못 깨우쳐지겠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에 내가 누군 지도 잘 모르는 사람에게서 돈을 빌려서 쓰고는 안 갚아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종친회에 가니까, 그 사람이 와 있었다. 그래서 촌수를 따져 보니까 별로 멀지 않는 친척이더라는 것이다. 그러면 오죽 미안하겠는가? ‘친척인 줄 알았다면 내가 안 그럴 텐데..’ 했을 것이다.
관계를 모르면 우리는 죄도 깨달을 수 없다. 관계 때문에 우리는 더 죄를 깨닫게 된다. 도리를 깨닫게 되고 합당하지 않은 것을 깨닫게 된다.
사회적인 죄, 법률적인 죄도 그 근원적인 개념은 관계적 개념이다. 사회가 없으면 범죄도 없고, 죄라는 개념도 없다. 교통사고를 일으키면 범죄다. 남에게 해를 주기 때문이다. 나 혼자 들이박는 거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남의 차를 들이박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고, 남의 차를 들이박은 것으로 인해서 개인과 국가와 사회에 누를 끼치게 되는 것이니까, 그래서 그것을 죄로 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라는 말은 순전히 우리 스스로 있는 관념이 전혀 아니다. 나 혼자 앉아서 스스로 ‘나는 더럽니 나쁘니, 내가 옳으니 그르니, 나는 의롭니, 나는 선하니 악하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내가 누구에 대해서 악한가, 내가 누구에 대해서 선한가, 내가 누구에 대해서 의로운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것이 실제적인 생활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교회 안에 오면, 우리는 존재적인 관계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미안할 수도 있고, 잘못일 수도 있고 하는 이유는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 때문에, 또 우리들의 관계 때문에, 그 하나인 관계 때문에 우리는 ‘아, 이런 건 안 해야 되겠구나.’ 하는 것이 생기게 되고, ‘이런 것은 남이 싫어하는구나.’ 하는 걸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관계가 전혀 다른 관계라면 전혀 싫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이러니 저러니 사사로운 삶에 대한 얘기들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바깥의 사람들이 와서 언뜻 들어보면 ‘아, 이 사람들은 밤낮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고 있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그렇다면 또 뭐하러 모여 있겠는가? 그렇게 말한 것을 외부에서 듣는다면 ‘네가 그렇다면 뭐하러 교회에 다니나? 다니지 말지, 안 다니면 안 그럴 걸 가지고 왜 다닐까?’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삶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 안에 있는 삶 때문에 나온 것이지, 결코 그걸로 인해서 살고 못 살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사회가 전혀 다르면 관념도 달라진다는 걸 알 수 있다. 또 관계가 달라지면 우리의 느낌도 서로 달라진다는 걸 알 수 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더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우리 자신의 위치가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아,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구나.’ 하는 것도 “내가 이것도 해보니까 못하겠고, 저것도 해보니까 못하겠더라. 그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구나.” 이 말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 앞에 서니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하는 뜻이다. 그런 사람을 자세히 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데 사실은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저 사람은 저렇게 잘하면서 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는가? 이해가 안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이해가 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내가 달리기를 해봐도 못하고, 뛰기를 해봐도 못하고, 줄넘기를 해봐도 못한다. 그것을 가지고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는 말과, 내가 하나님을 만나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람은 자기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언제든지 자기는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있다. 그 말은 내가 이 지구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내가 어떤 사람을 고칠 수 없다.” 이 말을 말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불만과 원성이 없다. 자기가 그렇게 할 사람이 못 되니까 그렇다. 그런데 자기 일을 하는 걸 보면 잘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관념이 전혀 다른 것이지 않는가! 내가 뜀뛰기도 못하고 달음질도 못하고 줄넘기도 못하고 전부 못한다. 이래서 못한다 하는 사람은 이상하게 자기는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이면서도 오만 사람을 다 간섭을 한다. 그러니까 참 이상한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아,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라고 아는 사람은 남을 간섭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일은 잘한다. 자기가 자기 일을 못해서 ‘나는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이다.’ 하는 사람은 자기는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이 오만 것을 간섭하고 다닌다. 그렇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만나서 “나는 죄인이다.” 하는 말하고, 내가 스스로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을 보면 다 “죄인입니다.”라고 한다. 그런데 막상 싸우는 데 가서 보면 어디가 죄인인가? 자기는 하나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자기가 어떻게 죄인이 되겠는가. 하나님 앞에서만 죄인이라 하지, 남 앞에서는 하나도 잘못한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전혀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말로 자기가 하나님을 만나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했으면 다른 사람하고 싸울 일도 없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죄인입니다.” 하는 말은 ‘나는 누구를 정죄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라는 뜻이다. 이것은 전혀 다르다. 그러니까 이것은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빛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 안에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하고 어둠 가운데 거하면 거짓말하는 자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사귄다는 것은 빛 안에 있다는 말이다. 빛 가운데 있다. 내가 어둠 가운데 있어서 내가 뭘 깨달았다는 말이 아니고, 빛 가운데 있다, 내가 스스로 빛 안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했을 때, 그 때는 다 하나님의 빛 때문에 그랬다.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갔을 때 “내 입술은 부정한 자 가운데 있습니다. 내 입술을 지져 주십시오.(사6:5)” 할 때도 여호와의 거룩을 봤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이고, 부인한 후에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마지막에 그는 아무 할 말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주께서 “네가 나를 다른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는 “내가 주를 필레오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21:15)”라고 하였다. 그는 자기가 사랑했다고 하는 그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자기가 사랑한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다.’ 하는 걸 알게 되었다. 왜 그렇게 알았겠는가? 다른 사랑을 봤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자기는 정말로 예수를 사랑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까 자기 사랑은 어디로 가버리고 없고,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았던 그 사랑은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 나는 사랑이 없는 사람이구나. 나는 사랑했던 것이 아니었구나.’라고 알았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깨진다는 것은 그래서 깨지는 것이다. 내가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이래서 깨졌다는 말이 아니다. 빛을 만나니까, 사랑을 만나니까 내 사랑이 깨진 것이고, 의를 만나니까 내 의가 깨진 것이고, 참 선을 만나니까 내 선이 깨진 것이다. 부셔져서 ‘아무 것도 아니구나. 내가 자랑하던 것은 아무 것도 아니구나.’라고 알게 됐다는 것이다. 그렇게 알게 될 때, 우리는 거기서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이 생긴다. 내가 내 의를 주장할 때 문제가 생겼고, 내 사랑을 생각할 때 그것이 고상하다고 생각할 때 문제가 생겼지,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구나. 더 온전한 것이 있구나.’ 하는 걸 알았으면 아무 문제가 안 생긴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문제는 다 사라져 버리고 만다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자기를 이긴 사람을 만났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다. 그가 환도뼈가 부러졌을 때, 그 때야 비로소 옷을 잡고 “나를 축복해 주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가 놓지 않겠나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아, 세상에 나보다 큰 자도 있구나.’ 이것을 처음 알았다는 것이다. 야곱은 세상에 나가서 처음으로 자기를 이긴 자를 만나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모두 다 자기한테 졌다. 자기 아버지도 자기한테 속았고, 자기 형도 속았고, 자기 외삼촌도 속았고, 다 자기한테 속았다. 자기를 이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얍복강에서 밤에 찾아온 어떤 이가 자기를 결국 이겼다. 그래서 처음으로 그는 나를 이긴 사람을 만났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다. 이 경험 안에서 자기 잔꾀가 이제 무용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안 그렇겠는가. 지금까지 그 잔꾀가 어디든지 다 통했었다. 그런데 이 힘을 만나고 나서 보니까 ‘자기가 너무나 잔꾀를 부렸구나.’ 하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정정당당하게 이긴 사람을 만났으니까 안 그렇겠는가! 자기는 지금까지 권모술수로 이겨 왔다. 그런데 얍복강에서 결국 자기를 정당하게 이긴 자를 만났다. 그러니까 자기 권모술수가 얼마나 부끄러웠겠는가.
그래도 야곱은 그 권모술수를 버리지 못하고, 에서를 만났을 때 또 술책을 썼던 것이다. 그런데 결국은 사라지고 말았다. “형의 얼굴을 뵈온즉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온 것 같습니다.” 하고 잔꾀를 부렸던 것이다. 그리고 “형은 지금 바로 올라가십시오. 내가 바로 형의 뒤를 따라서 올라가겠습니다.” 또 그렇게 잔꾀를 부렸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안 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숙곳에 가서 다시 그는 올라가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자기의 잔꾀를 다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게 되는 그런 사람이 된 것이다.(창25:23-35장)
결국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가 변화한다는 말이 그 말이다. 더 큰 것을 만나니까, 내 작은 것이 깨져 버리고 말더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