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선생 의문사 진상규명은 역사의 명령이다
1. 유신시절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 반독재‧민주화 운동을 펴다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된 장준하 선생이 정치적으로 타살됐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가 나왔다. 장준하 선생 37주기를 맞이하여, 16일 장준하기념사업회는 지난 1일 장 선생의 유골을 파주시 통일동산에 조성중인 ‘장준하공원’으로 이장하면서 진행한 유골 검시결과와 사진을 발표했다. 유골검사를 진행한 서울대 의대 법의학 교수는 “머리뼈와 오른쪽 볼기뼈의 골절이 둔체에 의한 손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두개골 부위가 망치 같은 것으로 맞아 동그랗게 함몰돼 실족 등 자연적인 사고로는 발생할 수 없는, 인위적으로 만든 상처라는 점이 밝혀진 것이다.
2. 장준하 선생에 대한 타살 의혹은 장 선생이 주검으로 발견될 당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1975년 8월 장준하 선생 사망 당시 사인으로 지목된 ‘오른쪽 귀 뒤의 두개골 파열’은 단순 추락이 아니라 흉기에 찍힌 상처라는 의혹 등이 제기되었지만 사인을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검시는 진행되지 않은 채 ‘실족에 의한 단순 추락사’로 결론이 내려졌고, 주검은 서둘러 매장됐다.
3. 장준하 선생이 당시 대통령 박정희와 끊임없이 대립했다는 점도 ‘정치적’ 타살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장 선생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대위로 독립운동을 한 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제 만주군 중위로 장준하 선생과는 대척점에 있었다. 이후 장 선생은 월간 <사상계>를 창간하고 3선 개헌에 반대하는 데 앞장서는 등 37번의 체포와 9번의 투옥을 무릅쓰며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 싸웠다. 장준하 선생은 당시 대통령 박정희에게는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4. 2004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는 이 사건에 대해 ‘진상규명 불능’이란 판정을 내렸으나 당시 변사사건 수사가 형식적으로 진행돼 초동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변사기록마저 폐기된 점을 지적하며 중앙정보부가 사건 조사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을 내린 바 있다.
5. 서거한 지 37년 만에 장 선생 죽음의 진실이 드러나고 있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고인에 죽음에 대한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 정부는 이번에 드러난 단서를 중심으로 즉시 장준하 선생의 사망사건에 대한 전면 재조사와 진상규명에 착수해야 한다. 또한 중앙정보부 등 박정희 유신정권의 개입을 밝혀내는 등 국가차원의 재조사 작업이 필요하다.
6. 유신치하에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경선후보도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는 5년 전 경선 당시인 2007년 7월 11일 선생의 미망인 김희숙 여사를 방문해 “장준하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는지를 생각하니 진심으로 위로 드린다”라고 말한 바 있다. 당시의 위로가 진심이라면, 오늘(17일) 발언처럼 “진상조사위원회 현장의 목격자로 해서 조사가 그동안 이뤄지지 않았냐”며,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기정사실화해서는 안 된다. 박 후보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장 선생의 죽음을 계속 외면한다면 곧 다가올 선거 국면에서 국민의 엄중한 심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7. 장준하 선생은 일제시대에는 학도병에서 탈출해 6천리 대장정 끝에 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을 만난 후 광복군활동을 한 독립운동가이며, 해방 후에는 박정희 독재정권에 치열하게 맞서 싸운 민주인사이다. 고 장준하 선생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일은 역사의 명령이며, 오늘을 사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최소한의 몫이다.
2012년 8월 17일
친일·독재미화와 교과서개악을 저지하는 역사정의실천연대
상임대표: 한상권(학술단체협의회 상임대표)
공동대표: 김영훈(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신태섭(민주언론시민연합 대표)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장)
장석웅(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
정동익(사월혁명회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