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의 역사 - 상류귀족이 즐겼던 빌리아드의 비밀
-빌리아드 발상지는 프랑스인가 영국인가-
빌리아드의 기원에 관해서는 설이 구구하여 확실한 정설은 없다. 그것은 기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게임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뜻이며, 실제 고대희랍이나 로마시대에 막대기로 공을 때리거나 치는 게임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지적되고 있다.
그 당시까지의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14세기 중엽에는 빌리아드의 선조라고 부를 수 있는 게임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귀족계급 사이에 유행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빌리아드라는 게임 본체의 기원을 더듬어 보기 전에 먼저 「말(언어)」이 있었을 것이므로 billiards라는 언어·단어의 발생을 알아 보기로 하자.
프랑스 사람이나 미국 사람 사이에는 프랑스어로 「막대기」를 뜻하는 billette의 옛 형태 billart에서 왔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리고 「공(球)」을 뜻하는 말은 pila(라틴어)→billa(중세라틴어)→bille(프랑스어)로 변화되어 왔고, 여기에서 빌리아드라는 말이 발생하였다고도 한다. 큐에 대해서도 프랑스어로 「꼬리」를 뜻하는 queue에서 왔다고 말한다. 이것이 이른바 「프랑스 기원설(起源說)」이다.
한편 이에 대항하여 「영국 기원설」도 제창되고 있다.
1560년 무렵 런던의 전당포 경영인에 윌리엄 큐(William Kew)라는 사나이가 있었다. 그 무렵 런던의 전당포는 영업허가증 대신에 3개의 공을 받아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가게의 카운터 위에서 그 공을 야드막대기(1야드의 자)로 치면서 놀았다. <빌이 야드막대기로 놀고 있다> 거기서 그 놀이를 bill-yard→billiard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큐(Cue)는 물론 빌의 이름 Kew에서 왔다.
「영국 기원설」에서는 그 밖에도 특수한 빌리아드 용어를 해설해서 제시한다.
빌리아드에서는 득점을 기입하는 사람을 일컬어 마커(marker)라 한다. 그러나 본래 mark에는 표시를 단다라는 뜻은 있어도 득점을 기입한다는 뜻은 없었다. 이것은 득점기입자가 시시한 놀이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남편들에게 화가 난 부인들이 달려오는 것을 지켜보는 역할을 맡기고 있었던 사실에 유래한다고 말한다. “Mark her”(그녀에게 주의하라)가 짧게 줄여져 marker가 된 것 같다.
아무래도 이 설은 억지춘향이 같은 느낌이 들지만, 수구를 2개의 적구(的球)에 맞히는 것을 캐논(cannon)이라 하는데, 이것은 세트포울 대성당의 성직자들이 숨어서 이 게임에 열중했던 사실에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스펠링은 좀 다르지만 발음이 같은 단어에 canon이 있으며, 이것은 성서정전(聖書正典)이라든가 전례성가(典禮聖歌), 성도명부(聖徒名簿) 등 기독교에 중대한 관계를 가지는 말이기도 하다.
이렇듯 영국 기원설파는 의기양양한 바가 있으나 과연 진실은 어떠한 것일까.
-빌리아드의 원조는 게이트볼-
그러면 말의 유래는 이런 정도로 해두고 실제의 게임에 대한 흐름을 좇아 보기로 하자.
처음에 고대로마에 대해서도 약간 언급하였지만, 공과 막대기를 사용한 게임이라는 의미에서는 그 선조는 상당히 오랜 시대에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시대, 지역, 기후, 민족 등 여러 가지 영향 아래 발전해 왔던 것이다. 공과 막대기를 핵심용어로 해서 빌리아드의 원천을 찾아보면 하키, 골프, 야구, 크리켓, 크로케, 게이트볼 그리고 라켓이 막대기의 변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테니스, 핑퐁 등도 같은 류에 들어갈 것 같다.
그 중에서 빌리아드에 가장 관계가 깊은 것이라고 하면 크로케(croguet)를 들 수 있다. 이것은 게이트볼의 원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잔디 위에서 쇠로 된 작은 문(hoops) 사이로 나무공을 나무망치(mallet)로 때려 그 스피드를 겨루는 구희(球 )의 한 종류」라고 사전에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왕 루이14세(재위 1643∼1715)가 귀족들과 빌리아드를 즐기고 있는 석판화가 남아있는데, 이것을 보면 체이블 위에는 ‘쇠로 된 작은 문’같은 아치가 있고, 손에는 큐의 원형인 메이스(mace, 철퇴 : 두부에 갈고랑이못이 달린 곤봉 모양의 중세 무기)를 갖추고 있다. 이 메이스도 중세 무기 그대로가 아니라 빌리아드용으로 그 형상을 개량한 것일 것이다. 큐와 분명히 다른 것은 공을 치는 앞끝이 둥글 납작하게 뒤로 젖혀져 있는 점일 것이다. 귀이개의 머리 부분과 같은 느낌이다.
이야기가 옆길로 흐르는 것 같지만, 17세기 후반의 프랑스 상류 귀족계급 사이에서는 테니스를 축소하여 테이블에 올림으로써 핑퐁을 만들어낸 것처럼 크로케를 테이블에 올린 것 같은 실내경기가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왕 루이11세(재위 1461∼1483)는 이미 빌리아드 테이블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 무렵은 아직 옥외에서 즐기는 크로케와 같은 그라운드 빌리아드와 실내의 테이블 빌리어드의 공존시대라고 생각되어진다. 그 후 실내유희 테이블 빌리아드는 프랑스와 영국의 귀족사이에서 우행해 나갔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암살 음모에 연좌되어 처형당한 비극의 전 스코틀랜드 여왕 메어리 스튜워트(1542∼1587)의 유체를 쌌던 것은 그녀가 애용한 빌리아드 테이블의 크로스(천)였다고 하는 에피소드도 전해지고 있다. 또한 영국의 귀족 노포크 공작은 16세기 후반에 녹색의 크로스를 깐 빌리아드 테이블과 3개의 빌리아드 스틱, 11개의 공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의 제1급의 문학자이자 시인인 에드문드 스펜서(1522∼1592), 극작가 윌리엄 세익스피어(1564∼1616)들도 빌리아드에 관해 기록하고 있을 정도이며, 같은 무렵 파리에서는 빌리아드와 테니스를 즐기는 장소가 57개소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초의 풀바는 250년 전의 파리 카페-
17세기 중엽이 지나자 메이스를 거꾸로 잡고 사용하게 되었다. 지금까지처럼 공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 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지금의 큐와 같은 모양이 되고, 이로써 그때까지는 없었던 테크닉이 사용됨으로써 빌리아드의 재미는 배로 증가하게 되었다.
18세기 초의 파리에서는 대부분의 카페에서 빌리아드를 즐겼다고 하므로, 풀바는 250년 이상이나 전부터 있었던 셈이다. 또한 영국에서도 귀족뿐만 아니라 신흥 신사계급의 사람들도 빌리아드를 즐기게 되었고 여관이나 커피 하우스, 공공의 게임장 등에서도 큐를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18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프랑스, 영국은 물론 미국, 그리고 영국 식민지에 사는 상류계급에 빌리아드가 보급되어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서 큐가 메이스에서 변화해 간 것처럼 빌리아드의 용구에도 여러 가지 개량이 가해졌다. 테이블에 크로스가 깔리고 쿠션이 붙여졌다. 공도 목제에서 상아로 바뀌었다. 당초 이러한 용구는 가구집이나 목수의 틈틈이 하는 일이었으나 마침내 빌리아드 용품 전문직인(職人)이 태어나, 18세기 말에는 「존 사스톤」과 같은 전문회사까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영국은 포켓, 프랑스는 캐롬-
크로케처럼 테이블 위에 아치가 있고 킹이라 불리는 핀이 서 있는 초기의 빌리아드 테이블에서의 경기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상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근대 빌리아드의 형태가 이루어져 가고 있던 18세기 후반의 게임을 보면 어느 정도 그 무렵의 경기규칙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1770년경의 영국에서의 빌리아드에서는 2개의 흰공을 사용해서 경기를 했는데 먼저 12점을 얻는 쪽이 승리를 했다. 12점이라는 것이 정녕 12진법의 나라다운 점이었다.
2개의 공은 수구(手球)와 적구(的球)라기보다 흰공과 적구(敵球)라는 편이 이해하기가 쉽다. 흰공을 적구에 맞춰 적구를 포켓인시키면 2점, 단 맞추고도 포켓인시키지 못하면 상대에게 1점을 주게 된다. 만약 적구에 맞아 흰공이 포켓인되어 버리면 상대에게 2점을 준다. 적구에 맞지 않고 흰공이 포켓인해 버리면 상대에게 3점을 준다.
이 규칙의 경기는 아주 최근까지 행해지고 있었을 정도로 일반적인 것이었다. 이것이 「위닝 게임」이라 불리는 것이며, 점수 매기는 방법을 정반대로 한 「루징 게임」도 널리 행해졌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2개의 흰공에 빨간공 하나를 더한 형태의 경기가 생겼다. 이 경기에서는 자기 공을 나머지 2개의 공에 차례차례 맞추는 것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성행되는 4구식과 아주 흡사하다. 공이 약간 작다는 것밖에 없다. 최초에는 캐롬볼이라 불렸으나 나중에 캐롬 또는 캐논이라 불리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캐롬이 유행했던 프랑스에서는 필연적으로 테이블에서 포켓을 없애 버리게 되었다. 이 테이블은 미국에도 건너가 널리 사용되었다. 그런데 영국의 스누커의 영향으로 15개의 공을 피라밋 모양으로 한 프포르게임이 태어나 포켓이 달리도록 변형되었다. 그것이 1860년대의 일이며, 제1회의 아메리칸 포켓 빌리아드 토너먼트가 시작된 것은 1878년이었다.
-혁명적인 다프와 초크의 발명-
빌리아드가 널리 일반대중에까지 퍼지게 되자 경기 내용도 한 단계 높아지고 테크닉도 연마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때에 일어나는 것이 용구에 대한 불만이다.
메이스에서 큐로 바뀌자, 아래를 쳐서 백스핀을 걸고, 위를 쳐서 폴로스루하는 2대 테크닉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의 큐에는 아직 팁(다프)은 붙어 있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스큐를 두려워하여 중심치기밖에 하지 않았다.
큐 끝에 가죽으로 된 다프를 붙이는 것을 고안한 것은 프랑스의 군인 캡틴 미뇨이다. 그는 교도소 안에서 빌리아드를 연구, 큐에 팁을 붙임으로써 진정 혁명적인 드로샷, 폴로샷의 테크닉을 발견하여 당시의 당구 애호가들을 경악시켰다. 1807년의 일이었다.
드로샷, 폴로샷에 이르면 다음의 테크닉은 사이드 스핀, 비틀림을 가하는 것이다. 영어로는 이것을 트위스트(twist)라고 하는데, 이 테크닉도 다프의 발명 전부터 있기는 했다. 물론 다프가 큐 끝에 붙여짐으로써 그때까지보다도 스핀을 가하는 것이 쉬워진 것이 확실하나 이것은 최고급의 테크닉으로서 아마추어로서는 좀처럼 잘 되지 않았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존 카라는 사나이로, 그는 큐 끝의 다프에 조금만 묻혔을 뿐인데 믿기 어려울 정도로 스핀이 먹어들어가는 마법의 가루분을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백묵의 가루분, 정말 그냥의 초크였다. 물론 지금도 모두가 사용하고 있는 저 초크였다.
그리고 마세라고 하는 예의 고등기술에 대해 보면, 이 테크닉은 앞서 말한 캡틴 미뇨가 개발한 것으로 명칭은 큐의 전신인 메이스에서 왔다. 즉 mace→masse인 것이다.
-근대 빌리아드는 19세기에 완성되었다-
큐의 진화와 테크닉의 고등화에 따라 테이블에도 이전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자세한 주문이 따르게 되었다. 완전히 수평을 유지하는 테이블이 아니면 아무리 스핀을 가해도 생각대로 공을 조종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쿠션에도 개량이 가하여졌다. 펠트, 머리카락, 직물의 가장자리, 러시안다크, 백조가죽 그 밖에 여러 가지 재료의 것이 사용되었고, 고무가 등장한 것은 1835년의 일이었다. 온도의 문제 등 여러 가지 곤란도 있었으나, 1845년에 앞서 말한 존 사스톤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최근의 고무 쿠션을 사용한 테이블을 헌상하고 있다.
또한 값비싼 상아공도 고민거리였다. 1870년 뉴욕의 존 웨즐리와 아이작의 하이아트 형제는 셀루로이드를 발명하고, 이 최초의 플라스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재료로 당구공과 피아노의 키, 의치(義齒) 등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이 셀루로이드 공은 세게 치면 깨어지고 말아 상품으로서 성공했다고는 말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구의 중첩이 현재의 플라스틱 공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렇게 해서 19세기에는 빌리아드는 그 용구와 규칙, 테크닉 등도 가다듬어져 근대적인 실내경기·스포츠로서 발전해 나가는 기초를 굳혀 나갔다.
출처 : 월간당구 1988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