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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번 <로마제국쇠망사> 5권-50장.
아라비아와 그 주민/ 마호메트의 탄생, 품성 및 교의/ 메카에서의 설교/ 메디나로의 피신/ 무력에 의한 선교/ 아랍인들의 자발적 또는 마지못한 복종/ 마호메트의 죽음과 후계자들/ 알리와 그 후손들의 권리와 운명/ 마호메트의 성공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도시가 형성된 기원전 660년 그리스시대에는 비잔티움(Byzantium)이라고 불렀으며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불렀다. 1453년 술탄 메메드 2세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오스만제국의 중심적인 도시가 되었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남쪽 입구에 있으며,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다. 1923년까지 1,600년 동안 수도였던 이스탄불에는 그리스·로마시대부터 오스만 제국시대에 이르는 다수의 유적들이 분포해 있다.
*비잔티움제국: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사망 이후 동·서로 분열된 중세 로마제국 중 동로마 제국(330~1453)
비잔틴 제국, 혹은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는 역사학자들에 의해 붙여진 명칭으로,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고대 지명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고, 그리스어로 로마 제국을 의미하는 ‘바실레이아 톤 로마니온(Basileia tōn Rōmaiōn)’ 혹은 ‘임페리움 로마노룸(Imperium Romanorum)’이라고 불렸다.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1557년 독일인 역사학자 울프(Hieronymus Wolf)가 자신의 역사서에서 '비잔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부터였으며, 후에 몽테스키외(Montesquieu) 등의 학자들의 저작물을 통해 일반화되었다.
1. 아라비아 반도, 토양과 기후(175-178쪽) : 남고북저지형, 경풍요(해안) 중빈곤(사막), 남동몬순/중심과 북서사막
남서부는 예로부터 ‘행복한 아라비아’라고 불리던 곳으로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몬순의 영향으로 비가 많다. 오만 지방도 이에 버금간다. 지중해의 습기는 봄 ·가을 두 계절에 북부에도 영향을 미쳐 약간의 비를 몰고와 곳곳에 오아시스를 만든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은 극도로 건조하여 고대부터 ‘사막의 아라비아’라고 불렸다. 여름은 혹독한 더위로, 이따금 50 ℃가 넘는 곳도 있다. 사구(砂丘)의 광야도 있고 돌덩어리가 넓게 펼쳐진 들이 있는 등 전체 사막이 똑같지는 않으며, 서부의 산맥에는 사화산(死火山)이 여러 개 있고, 헤자즈 지방에는 분출된 용암의 황야가 적지 않다.
남서부나 오만 지방에는 연중 물이 흐르는 하천이 있으나 반도 전체를 통하는 대하천이나 호수는 없고 강우 때만 일시적으로 물이 흐르는 와디(wadi)가 적지 않다. 대삼림은 전혀 볼 수 없으나 오아시스에는 대추야자가 많다. 열매는 주민의 주식이며 잎이나 나무껍질은 여러 가지 생활용구로 이용된다. 곡물은 보리 ·밀 ·조 등이 주종이며, 그 밖에 목화 ·쌀 ·잎담배 등도 다소 산출된다. 예멘 지방은 커피와 잎에 약간의 마취성이 있는 카트라는 식물이 산출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남부 인도 양안의 유향(乳香)은 고대부터 유명하였다. 또 남빛 물감의 원료가 되는 쪽이나 황색염료인 와루스, 적색염료의 헤너 등도 산출된다. 과실류로는 포도 ·석류 ·무화과 ·복숭아 ·바나나 그 밖에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를 즐기는 것은 정주민뿐이며 유목민은 우유나 대추야자 등을 상식(常食)으로 한다. 동물 중에서 가장 긴요하게 쓰이는 것은 낙타이며 양과 산양은 그 다음으로 꼽는다. 유명한 아라비아말은 아주 소수만 보존되어 있다.
*유향(乳香, 177쪽) : 유향나무는 아라비아와 소말리아 원산의 열대산 나무로서 상처를 내면 수지(樹脂)가 나오며, 나무에 매달려 떨어지는 모습이 유두(乳頭)와 같아서 유향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또한 땅에 떨어진 것을 탑향(塌香)이라고도 한다. 유향은 동서양에서 오랫동안 상용되던 약재로서 동방박사가 아기예수에게 준 세 가지 선물 중의 하나였으며 로마의 네로황제가 포파에아 왕비의 장례식 때 도시 전체가 1년 동안 쓸 양의 유향을 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권력과 부를 상징하기도 했다.
이 약은 방향성의 냄새가 있고 점액성이며 맛은 맵고 쓰며, 성질은 따듯하다.[辛苦溫]
유향은 혈행개선, 어혈제거, 무월경, 생리통, 복부통증 등을 개선시키고 마비동통, 관절염, 타박동통, 어혈동통, 종기, 피부궤양 등에 쓰인다. 약리작용은 진통작용이 보고되었다.
생김새는 고르지 않은 알맹이로 주로 덩어리가 원형에 가깝다. 바깥면은 엷은 황색이나 황백색이며 과립모양이며 겉에는 백색의 고운 가루가 묻어 있다. 부서진 면은 황납 모양의 광택을 나타내며 수피의 검은 조각들이 섞여 있는 것도 있다. 질은 단단하나 부서지기 쉽다.
다른 이름으로 熏陸香(훈육향), 乳頭香(유두향), 西香(서향), 馬尾香(마미향), 명향(明香), 천택향(天澤香), 마륵향(摩勒香), 다가라향(多伽羅香), 탑향((塌香), 두로향(杜嚕香)이 있다.
2. 베두인족/ 말/ 낙타(178-180쪽)
1) 베두인족: 시리아 ·이란 ·아라비아 ·아프리카 북부의 건조지대에 약 300만이 생활하고 있다. 수평이동으로 유목을 하여 비가 많은 계절에는 사막에, 건조기에는 물이 풍부한 지역으로 이동한다. 사막에 가장 가까이 살며 (1) 낙타를 사육하여 승용(乘用)과 식육(食肉) ·유제품(乳製品)에 이용하는 종족이 가장 존경을 받는다. (2) 다음은 주변지역에서 소 ·양 ·산양을 방목하는 종족이며, (3) 최하위는 유목을 하지 않고 농경에 종사하는 종족이다. 가장 존경받는 특수계급은 시리아 ·아라비아 ·사하라 사막에 거주하는 투아레그족이며, 중위 ·최하위 계급은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에 거주한다. 아족(亞族)인 서(西)이란과 모로코 부족은 여름에는 높은 지대, 겨울에는 낮은 지대로 정기적으로 이동한다. 소를 사육하는 부족은 남(南)아라비아 ·수단에 사는데, 밧가라라고 한다.
유목민에서는 부계(父系) 출생을 엄격하게 지키며 확대가족과 씨족을 사회생활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흑염소의 털로 만든 텐트 ·가축 ·가재(家財)는 가족전체의 소유물이다. 하나의 텐트에는 아흘 알 바이트가 한 사람 있어 주부의 일을 한다. 우물은 씨족에게 소속되고 이동 ·숙영(宿營)도 씨족 전원이 협력하여 한다. 몇 개의 씨족이 모여 부족을 형성하고, 부족 ·지족(支族)의 수장은 세습제로 일정한 가계에서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낙타는 부족의 공유물이고, 부족 전원이 힘을 합하여 적과 싸운다. 보통 일부다처제이며, 6종의 카스트가 있다. 귀족 ·평민은 아랍의 유목민이고, 정착하여 농경을 하는 아랍 제족과 베르베르 제족은 종속민이며, 사하라 남부나 수단에는 흑인의 농노(農奴)가 있고, 노예 ·천민(賤民)이 있다. 노예는 남(南)유럽에서 데려온 백인도 있었으나, 나중에는 수단의 흑인에만 국한되었다. 이들은 아랍의 노예 사냥에서 붙잡힌 사람들인데 그들의 자손은 혼인 등에서 차별화된다.
카스트제 사회는 정복에서 생긴 것으로, 같은 카스트의 남녀 이외에는 결혼이 허락되지 않는다. 기마(騎馬)에도 능숙하여, 창을 사용하고 마치 중세 기사와 같은 우월감을 가지며, 고귀한 존재라고 자부한다. 이교도인 베르베르 ·흑인을 이슬람화시킨 것도 그들인데, 베두인 제족은 농경의 종속민과 오아시스 통상로의 상인으로부터 약탈 ·보호의 대가로 공납금을 취하여 세력을 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중앙정부의 세력 증대로 약탈 ·공납에 의한 수입이 감퇴하였으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국경을 넘나드는 유목이 곤란하게 되어 목축을 포기하고 농경을 생활수단으로 하는 베두인족도 증가하였다(네이버백과).
2) 말: 천막 아래에서 가족처럼 길러짐. 구보와 질주 훈련. 우수한 종마(스페인, 영국의 말은 아라비아 말과 교배하여 우수 종 탄생시킴).
쌍봉낙타(서식지: 스텝의 초원. 몽골의 고비사막과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분포)
-운송수단, 낙타 젖, 살코기, 오줌에서 소금 추출, 털(옷․ 가구․ 천막 소재), 똥(연료)
3. 아랍의 도시들(180-183쪽)
1) 베두인 종족은 유목생활을 하면서도 마을에 모이는 일을 즐겨했다. (교제, 물품교역, 상호교육과 학습 등)
메카는 고대부터 인도양과 지중해 연안 및 메소포타미아와 홍해 연안으로 통하는 통상로로 발달. 특히 6세기 무렵부터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 사산조 간의 오랜 전쟁으로 말미암아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왕래하던 대상들은 다른 지역보다 안전한 아라비아 반도를 통해로로 선호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환경에서 메카는 무역 중계지로 번창했다. 당시 아랍 부족 중 쿠라이시족(族)이 5세기 후반부터 메카의 상권을 장악하였으며, 570년경에 그 지파(支派)인 하심가(家)에서 무함마드가 태어나 신의 계시를 받아 이슬람을 창시하였다. 여러 우상들이 모셔져 있던 카바 신전은 630년 예언자 무함마드가 무슬림군을 이끌고 메카를 정복한 뒤 유일신 알라의 신전으로 바꾸었으며, 그때부터 메카는 이슬람 세계의 으뜸가는 성지가 되었다.
메카를 중심으로 지름 약 100km의 지역이 하람(성역)이며, 13억이 넘는 전세계의 무슬림들이 북위 21도 25분 24초, 동위 49도 24분에 위치한 메카의 카바 신전을 향해 예배를 드리며, 이 기도의 방향을 '끼블라(qiblah)'라고 한다. 메카를 비롯하여 이슬람의 성지를 방문하는 순례 '핫지(Hajj)'는 무슬림으로서 지켜야 할 5가지 의무 중 하나이며, 해마다 순례의 달인 '두 알 힛자(Dhu al-Hijja, 이슬람력 12월)에는 약 250만 명의 순례자가 모여든다. 순례자들은 메카의 중심인 카바 신전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7번 도는 의식을 치르며, 가능하다면 신전의 중앙에 위치한 높이 12m의 흑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성묘에 입을 맞추거나 손으로 만지곤 한다.
3) 예멘왕국: 육로 정벌의 어려움, 해군으로 정복. 고원지대까지 완전정복의 어려움.
4) 사라센: 사라센 또는 사라센족(인)은 대체로 중세의 유럽인이 서아시아의 이슬람 제국의 사람들을 말하는 용어이다. 원래 로마 제국 말기에 시나이 반도에 사는 유목민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리스어 Σαρακηνός에서 유래 했는데 이 말은 아랍어의 '동쪽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의 شرقيين (사라킨)이라는 단어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아라비아 지역에 기독교가 자리잡은 이후에는 아라비아에 사는 민족을 통칭하는 말로 쓰이다가 7세기 이슬람교가 성립한 뒤부터는 사실상 이슬람교도와 동일한 의미로 쓰였다. 특히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 반도의 이슬람교도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중세 초기 비잔티움 제국에서 사용하는 단어였는데 십자군을 거치면서 서유럽에 전파되었다.
4. 아랍인들의 자유와 성격(184-188)
1) 자유분방한 기질, 여권 강력, 필요에 따라 여러 부족이 뭉치면 군대가 됨.
용기, 인내, 절제의 덕목 강조. 느리고 간결한 어투.
공개토론과 변론 활발, 누구나 회중을 설득하고 교화할 수 있는 기회가짐
2) 예멘 상황: 군주가 있었지만, 귀족과 관리들이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 체제
3) 압바스 왕조: 우마이야조의 뒤를 이어 750∼1258년에 동방 이슬람 세계를 지배한 칼리프조.
우마이야조를 이어 아바스조는 13세기 중엽까지 명맥을 유지했으나, 종교와 정치 양면에서 최고의 지도자·권력자로서 군림한 것은 945년까지이고, 그 이후는 정치상의 실권이 거의 없었다.
우마이야조 말기에 이르러 통치집단 내부의 분열이 일어났으며, 1년 동안 칼리프가 4번이나 바뀌는 등 혼란이 거듭되었다. 이에 더해 부족 간의 분쟁이 더욱 격심해졌고, 마침내 중앙정부의 권위가 도전받게 되었다. 우마이야조의 마지막 칼리프 마르완 2세(744~749 재위)때에 이르러 우마이야조는 자칭 하쉬미야(Hashimiyya)당파에서 시작한 반란으로 멸망하게 되었다. 하쉬미야 당파는 진정한 칼리프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계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하쉬미야 가문의 일원인 아바스 가문 출신의 이브라힘(Ibrahim)은 745년부터 후라산을 중심으로 반란을 시작했다.
이브라힘은 747년 마침내 후라산에서 무장봉기하였고, 반란 세력은 분쟁 중이던 우마이야 지지 아랍 부족을 제압하고 이 지역을 석권하게 되었다. 그후 이들은 서쪽으로 진격을 시작했고 잡(Zab) 강에서 우마이야조의 마지막 저항을 물리친 뒤, 749년에 사파흐가 쿠파에서 칼리프임을 선언, 이듬해 우마이야조 최후의 칼리프를 살해함으로써 아바스조를 정식으로 성립했다.
우마이야조 체제의 본질은 소수의 지배자인 아랍인이 피정복자인 이민족 위에 군림한다는 것이었으나, 아바스조 하에서는 종래 아랍의 특권적인 지위가 상실되고 인종과 민족을 초월한 이슬람 제국으로 발전했다. 정복민으로서의 아랍민족 우월주의는 퇴색하고 지배층에 페르시아인을 비롯한 비아랍계 무슬림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면서 자연히 무슬림 평등 원칙이 확립되었다. 또한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제국의 수도를 옮기므로서 정치, 군사, 문화, 경제의 중심지가 동쪽으로 이동되었으며, 페르시아의 왕정제, 관료제 및 행정제도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새로 건설된 바그다드는 세계 동서무역과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상업활동에 종사함으로서, 신학자나 법학자 등 이슬람의 성직자층과 나란히 관리·상인·지주가 지배계급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11세기 전반에 이르자 파티마조, 부와이흐조는 모두 쇠퇴했으며, 셀주크투르크가 1055년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부와이흐로부터 아바스조의 통치권을 넘겨받았다. 셀주크투르크(1038~1194)는 칼리프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대신 세속통치의 절대권력을 의미하는 술탄의 칭호를 사용했으며, 실질적으로 칼리프는 허수아비 같은 존재였다. 이후 셀주크투르크조가 붕괴하고 몽골의 침입이 있기 전인 13세기 초의 한 시기를 제외하고 칼리프는 종교상의 권위만을 유지하는 데 그쳤으며, 1258년 바그다드가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Hulagu: 1256-1265 재위)에게 점령당하면서 칼리프제(制)는 완전히 몰락하였다.
아바스조는 경제적으로도 번영한 시대였다. 이라크를 중심으로 농업이 크게 개발되는 한편, 섬유산업이 발달하여 그 제품은 세계 각지로 수출되었다. 문화면에서는 이슬람과 아랍어를 기조로 하고 헬레니즘문화를 섭취·융합하여 다채로운 이슬람문화를 이룩하였다. 특히 《코란》연구와 법학·철학·수학 등의 여러 학문을 발달시켰고, 또 아라베스크라고 불리는 유명한 장식무늬를 낳았다.
4) 내란/사적 복수/ 정기적 휴전
- 약탈의 정당화(“옷을 벗어라, 네 숙모(내 아내)가 입을 것이 없다”)
- 피해와 명예 실추-부족/종족의 복수...대물림 현상
- 1년에 2~4개월동안의 축제기간에는 휴전
- 기번은 이에 대한 아랍인의 잔인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척박한 환경에서의 생존법으로 완화될 수 있다. 고대의 지중해의 해상활동은 ‘해적’활동이 오늘날처럼 비난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 트로이전쟁도 궁극은 약탈전쟁이었다.
5. 아랍인들의 사회적 자질과 미덕(188-190)
1) 언어: 부족의 고유 방언 사용, 그 다음은 메카의 말 선호. 어휘의 풍부함(꿀 80가지, 뱀 200가지, 사자 500가지, 칼 1000가지), 알파벳의 기원이 되는 쿠파문자가 유크라테스강 기슭에서 고안됨
2) 달변은 명예. 아랍인의 통찰력 강함, 상상력 뛰어남, 기지는 강력하고 풍부. 문장의 정교함과 사람들을 사로잡음
3) 시를 즐기고 시인을 존중한 사회: 시인을 위한 연회, 이웃부족도 초대. 아라비아 시인들은 당대의 역사가요 도덕가. 시에는 관대함과 용맹이 자주 노래되었음.
4) 관대함의 예: 압달라(칼 빼고 가진 것을 모두 순례자에게 주어버림), 카이스(종이 황금을 주자, 잠이 깨어 더 주지 못했음을 한탄), 아라바(장님. 길 안내하던 노예까지 주어버림), 하템(낙타 40마리 요리, 적의 탄원에 포로와 전리품을 모두 되돌려줌)
-이에 대해 기번은 ‘순간적인 충동’이라며 비아냥
6. 고대의 우상숭배(191-194)
1) 태양, 달, 항성 숭배, 낙타를 무덤에 남김
2) 메카의 카아바 신전과 순례의식
-본래 메카는 이슬람 이전에는 다신교의 본산이었음. 그때는 이슬람의 알라도 여러 신 중의 하나.
-카바는 아랍어로 정방형(cube)를 뜻함. 메카 중심에 있는 카바 신전은 이슬람 이전 시대에는 다신
교도의 총본산으로 매년 수많은 순례자들이 모여들었다(이를 기번은 우상 숭배의 전통을 이슬람이 이어간 것으로 진술). 지금의 카바 신전은 무함마드가 메카를 정벌한 후, 전 세계 이슬람교도들의 중심이 됨.
-쿠라이스 부족이 카바 관리
-신관직은 4대 직계 자손의 승계를 거쳐 마호메트(무함마드) 조부(하심(家)에게 이어짐
-카바 주위를 반시계 방향으로 돌기(4번은 빠른 속도, 3번은 천천히: 하갈이 이스마엘에게 물을 구해주기 위해 7번 왔다 갔다 했다는 데서 연유)
-미나 계곡에 가서 악마를 상징하는 세 개의 돌 기둥(Jamratul-Aqabah)에 7개의 강낭콩만한 크기의 조약돌을 던져 사탄을 죽이는 의식을 행함(2600년 전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사탄에게 돌을 던졌다는 신화를 아랍인들이 지어내어 반복하는 것)
-순례행사의 마지막은 양과 낙타의 희생제. 오늘날 순례자들은 순례 마지막에 제공된 전체가 구워진 어린 낙타 고기를 먹음.
3) 희생 제의와 의식
-공공의 안녕을 위한 인신공양(페니키아, 이집트, 3세기 투마티아족, 사라센 군주의 포로 살육, 아버지가 아들을 제단에 끌고감: 아브라함)
-마호메트의 부친도 인신공양이 될뻔하다 낙타 100마리를 주고 풀려남
-의식: 돼지고기 먹지 않기, 할례
7. 다양한 종교(194-196)
1) 사비교: 일곱 행성=일곱 신(천사) 숭배, 천문학과 아시리아인들의 무력으로 보급됨
2) 마기교: 조로아스터교(페르시아)
3) 유대교: 마호메트 사망 700년 전에 아라비아에 정착. 도시에 회당 건립, 황무지에 성쌓음
4) 그리스도교: 적극적 선교. 예면,히라, 가산은 야고보파와 네스토리우스파의 주교들에게 교의를 전수받음
-야고보파(시리아 정교회): 예수의 본성을 단성(單性)으로 규정. 육화(肉化)이전에는 신성+인성, 육화후에는 인성이 신성에 병합, 신성만 남는다는 주장
-네스토리우스파: 이도 시리아 정교회와 연결됨. 그리스도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독립성을 강조하고, 양자의 결합을 실체적이 아니라 도덕적으로만 생각함. 인도 및 중국까지 포교. 7세기 전반에 중국에 전해진 네스토리우스파를 경교라 함.
-부족 혹은 개인의 종교 선택의 자유 있음. 우상숭배의 잔재를 떨치지 못함-습관 때문.
-성경 속에 이스마엘, 아브라함 등 아랍인의 조상을 발견하고 기뻐함.
-성서의 예언과 유대 랍비들의 꿈과 전통을 믿고 수용함.
8. 마호메트의 출생과 교육(196-200)
1) 하심가문 출신-메카 군주, 카바관리직책 수행한 가문
(조부) 압둘 무탈리브-교역으로 부를 획득, 인심좋음
-예멘왕국 아브라하가 메카 침략. 압둘 무탈리브는 신전보호를 요청하지 않고 가축보호를 요청한 압둘 무탈리브(신전은 신들의 소유이므로 신들이 지킬 것이다!)
-110살 장수
-자녀(6녀 13남)
(부친) 압달라 (모친) 아미나 - 마호메트(무함마드) 외아들
2) 무함마드 -어려서 조부, 부모 모두 잃음
-숙부 아부 탈리브가 보호양육자가 됨
-25세에 미망인 하디자의 일꾼되었다가 결혼함
-40세에 신의 부름을 받음 (하디자는 첫번 개종자)
3) 무함마드의 자질 -외모 출중, 당당한 체구, 우아한 미소
-부유한 권력층에 공손한 배려, 빈민층에 대한 겸손과 친절함
-솔직 담백, 예의바른 행동
-기억력 좋고, 상상력 뛰어남, 명확한 판단력, 단호함, 용기있는 행동
-고매한 종족의 교육, 순수한 아라비어어로 교육받음
-유창한 언변, 신중 적절한 침묵
-문맹
-두 차례 시리아 여행을 했으나, 시리아 말을 몰랐다.
-명상을 즐김.
9. 이슬람 세계(200-204)
1) 유일신 : 마호메트는 솟아오르는 것은 모두 가라앉고 태어나는 것은 모두 죽으며 썩는 것은 소멸한다는 합리적인 원리에서 우상과 사람, 별과 행성의 숭배를 거부했다.
-철학적 무신론자는 이러한 신관에 대해 동의해줄 지 모른다.
-이슬람교도들은 이러한 유일신관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를 두고 고군분투했다.
2) 신의 사도, 마지막 예언자 마호메트 :
-예언자 12만 4천명, 특별 사명을 받은 313명
-아담-노아-아브라함-모세-그리스도-마호메트 (이중 모세, 그리스도, 마호메트가 살아남아 군림한다.)
3) 모세: 구약성서
4) 그리스도: 신약성서. 예수는 인간.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변질됐다고 마호메트는 진단
5) 마호메트: 모세, 그리스도가 장차 나타날 더 걸출한 예언자로 지목한 인물이 마호메트
10. 코란(204-206)
-마호메트는 코란(읽으라!)의 편집자적 역할, 코란은 창조물이 아니다. 가브리엘의 전달을 마호메트가 계시로 받은 것
-코란의 단편적인 이야기들은 마호메트가 재량으로 만든 것
-코란은 마호메트 사후, (1) 아내 중 한 명이 순서도 연관성도 없이 궤에 보관한 것
(2) 다음 계승자 아부 바크르가 책으로 출간
(3) 칼리프 오스만이 해지라 30년에 수정판을 발간
(4) 코란의 다양한 판본은 모두 불후의 원본으로 간주
(5) 논리성, 문학성은 현저히 떨어짐
-Sonna: 마호메트 사후 200년 뒤 알 부카리가 노력하여 구전(口傳)율법 Sonna 확정
-알 부카리는 그외에도 30만건의 기록물 중 7275편의 참된 전승을 구별함
-코(꾸란)의 번역은 (원칙적으로) 신성모독 행위
11. 기적(206-208)
-마호메트는 기적 표시를 거부했다. 그러나 마호메트 신봉자들은 기적을 확신했다.
-꿈 속 여행(7층의 천국 여행, 창조주를 만난 여행), 달의 복종 등의 전승이 전해짐
12. 마호메트의 계율-기도(살라), 금식(사움), 자선(자카) (208-209)
1) 기도, 금식, 자선이 이슬람교도의 종교적 의무 (※이슬람=복종, 순종)
2) 기도: 신에 이르는 길의 1/2에 이르게 함
-50회→5회: 이슬람교의 합리성을 엿보게 함. ①해뜰 무렵, ②정오, ③오후, ④저녁, ⑤잠자기 전
-기도의 핵심은 청결(물 또는 모래)
-케블라(한 곳 응시, 생각 집중): 지평선, 예루살렘, 메카(카바 신전)
-장소 불문한 기도
-매주 금요일 모스크에서 집단 예배
3) 금식: 신이 계신 궁전 문까지 이르게 함
-수도사 불인정 [※ 수피족(9세기경. 수피-나홀로 수도자) 출현(수행자 집단 ‘카나까’), 대규모 평신도회(11세기경), 여성을 위한 수행의 집도 생김]
-라마단(매년 30일 금식기간): 모든 쾌락 자제
-금주령
4) 자선: 신이 계신 궁전 안으로 들어가게 함
-동물에까지 자선(cf, 홍익인간)
-궁핍한 자의 구제는 필수 의무
-십일조(착취나 부당이득 오일조)
-자비의 정의의 기반
13. 부활, 천국과 지옥(210-214)
1) 부활교리: 이집트가 시초(미이라, 피라미드 등)
마호메트: 창조주의 전지전능함 인정(흙에 생기를 불어넣음-인간)
2)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마기교도적 그림의 설명(적수들은 최악의 이교 전파라고 공격)
3) 천국: 신에 대한 믿음(+마호메트에 대한 믿음) + 선행으로 감
-마호테트는 천국의 삶을 감각적이고 지적인 향락과 결합시킴
-72명의 ‘후르 아인(검은 눈에 백색피부의 여인들)을 소유
-이를 누릴 수 있는 지적 능력 부여
4) 지옥: 믿음을 거부한 정보, 저지른 잘못의 정도를 따라 지옥 수준이 달라짐
-보상방법: 가해자는 피해자를 위해 그 정도에 상응하는 선행을 할 것
-속죄기간: 900년~7000년(신앙정도, 기도정도에 따라 달라짐)
* “인간의 상상력은 미래의 삶이 주는 축복보다는 불행을 훨씬 더 생생하게 그려본다.”(213쪽)
14. 마호메트의 메카 설교(214-216)
1) 첫번 개종자: 아내(하디자), 시종, 제자, 벗들(알리, 아부 바크르): (마호메트의 인간적 약점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므로 개종이 가장 어렵다.)
2) 4명을 개종시키는 데 3년 걸림
3) 7년째에 남자 83명, 여자 18명 개종. 개종자들의 에디오피아를 향한 피신(숙부 하므자, 맹렬한 우마르도 합세)
4) 쿠라이시족, 메카 부근을 넘어선 전도
15. 마호메트 vs 쿠라이시족(216-218)
1) 쿠라이시족: 전통 종교와 관습 지지, 마호메트 배격. 무력투쟁 예고
2) 아부 탈리브의 보호-폭력사태 방지
3) 아부 탈리브 죽음, 하디자 죽음: 우마이야족의 아부 수피안이 마호메트 처형 결의 (talion법을 적용받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 talion法: 범죄자에게 피해자가 입은 대로 앙갚음 하는 법)
→ 마호메트의 메카 탈출
4) 헤지라
-알리의 위장, 마호테트와 아부 바크르의 탈출
-메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토르 동굴에 3일간 숨어지냄(거미줄과 비둘기 둥지)
-622년 7월 16일(16일 만에 도착, 이슬람력 원년으로 삼음)
16. 메디나의 군주 마호메트(219-221)
1) 하즈라지족 vs 아우스족의 대결 상황인 야스리브(메디나의 옛이름). 게다가 유대인 성직자 무리들이 두 종족과 관련되어 있어, 메디나는 이미 ‘성경의 도시’가 되어 있었음
2) 신분높은 시민 2명이 카바 순례를 하면서, 마호메트의 설교를 듣고 개종하였다.
-메카 외곽 동산에서 비밀 회합을 하고 동맹을 승인함(하즈라지족 10명, 아우스족 2aid의 신앙 결속)
3) 두번째 회합: 메디나 남자 73명, 여자 2명. 마호메트가 메카에서 추방당해도 동맹의 이름으로 마호메트를 맞아들이고, 지도자로 섬기며, 최후까지 보호할 것을 맹세 “메디나 헌장”
“당신을 섬기다 죽으면 어떤 보상을 받게 됩니까?”
“천국입니다.”
4) 마호메트가 헤지라에 성공하자, 500명의 시민들이 환영
5) 마호메트의 논공행상
-무하지른: 마호메트를 따라 메카를 떠난 이들을 칭함
-안사르: 메디나의 조력자들을 칭함
-주요 추종자들에게 형재의 권리와 의무로 짝(운명공동체)을 지음
-알리는 마호메트가 친히 짝이 됨
17. 마호메트의 위엄(221-222)
1) 제왕과 사제의 업무 시작
2) 두 고아의 유산을 증여 또는 매매하여 집과 모스크 세움
3) ‘사도’라는 도장 사용. 연설할 때는 종려나무에 기댐
4) 6년 뒤에 1500명의 무장한 이슬람교도들의 충성 맹세가 이루어짐
5) 마호메트의 침, 머리카락, 목욕하고 남은 물까지 은혜의 선물로 간주되기에 이름
18. 이교도와 전쟁(222-224)
1) 우호, 복종, 전쟁 중에서 선택하라!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면 육체적, 영적 혜택이 주어짐, 또 성전(聖戰)에 참가할 의무 주어짐
-항복한 적은 짓밟지 않음
-조공을 바치면 타종교의 신봉을 묵인함
2) 마호메트는 9번 전투 참가, 총 50회 전투 치름
3) 전리품의 배분: 1/5(예언자의 몫: 종교적, 자선적 용도)
4/5(군인들의 몫)
“싸우며 보낸 하룻밤은 2달의 금식이나 기도보다 훨씬 효과가 있다. 누구든 전투에 참가하는 자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다.”
19. 쿠라이시족과의 전쟁(225-228)
1) 나클라 기습(623년)-베데르 전투
-쿠라이시족 아부 수피안의 교역물을 노림
-쿠라이시족 950명 vs 이슬람 313명의 전투(이슬람 승리)
2) 오후드 전투(623년)
-아부 수피안 3000명 무장 병력 vs 이슬람 950명
-전리품에 눈먼 이슬람의 전열이 무너져, 패배. 마호메트 부상
3) 참호(또는 제 민족) 전투(625년)
-1만명 연합군 vs 3천명 이슬람
-알리의 1:1싸움 승리
-20일간 격전(제 민족 연합군 와해)
20. 아라비아의 유대인 정복(228-230)
1) 유대인들의 완고함이 화를 자초(처음에 마호메트는 관대한 조처를 취함)
2) 카이노카 부족(15일 전투 끝에 항복)
나디르 부족(마호메트 암살 기도, 실패)
코라이다 부족(25일 전투 끝에 항복)
3) 도시 카이바르 함락. 카이바르의 유대인들은 우마르 치세때 시리아로 이송됨.
21. 메카의 항복(230-232)
1) 메카로 진군, 쿠라이시족 대응
2) 정치적 묘수를 부린 마호메트: 다음 해에 친구로서 메카에 들어가 순례의식을 3일간 거행하겠다고 약속. 휴전.
3) 마호메트의 순례 의식은 메카 내 제 부족의 분열을 가져옴. 아라비아 부족들은 마호메트에 굴복, 마호메트의 세력이 더욱 강해짐
4) 아부 수피안 항복
5) 마호메트, 화목정책으로 분열과 반목을 봉합함.
“그대들(반이슬람 세력)이 부당하게 대한 자에게 어떤 자비를 기대하는가?”
“친족의 너그러움을 믿을 따름입니다.”
“그 믿음은 헛되지 않다. 사라져라! 그대들은 안전하고 자유이다.”
6) 메카를 떠난 지 7년 만에 왕으로 귀환한 마호메트
22. 아라비아 정복(232-235) : 후나인(우상) 전쟁
1) 마호메트는 우상파괴 요구, 타예프 동맹은 우상 수호 주장. 전쟁 벌어짐
2) 후나인 계속에 갇힌 이슬람군. 마호메트의 절규에 분기한 이슬람군
3) 타예프 요새 포위 공격
-20일간 포위공격 실패, 후퇴 결행
-타예프의 회개와 안전을 위해 기도하는 척하며 틈을 노려 승리를 이끌어 냄. 많은 전리품 획득
4) 타예프 정복, 우상 파괴
-아라비아 민족 전체가 마호메트의 신과 권좌에 복종
-자발적이거나 마지못해 내는 기부금, 십일조 봉헌금을 이슬람 예배에 사용
-11만 4천명의 이슬람교도가 사도의 마지막 순례 행렬에 동참
23. 로마제국과 1차 전쟁(235-238)
1) 헤라클리우스에게 사절 파견, 사절이 살해됨.
2) 무타 전투
-이슬람 3천 병력 진군
-자이드, 지파르, 압달라의 죽음
-할리드가 남은 사라센군을 이끔
3) 마호메트의 대 로마 전쟁 선포
-기병 1만, 보병 2만 파견. 사막을 건너는 어려움
-타부크 풀숲과 샘 근처에서 행군 단념
-할리드의 활약: 유프라테스~아일라에 걸친 정복
24. 마호메트의 죽음(238-240)
1) 카이바르에서 음독했다는 설
2) 14일간의 열병 끝에 사망
3) 후계자로 아부 바크르 지목
4 임종 가까운 시간에 구술자룔르 책으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함(무함마드는 ‘문맹자’로 알려져 있음)
5) 우마르 “사도는 죽지 않았다” (광신)
아부 바크르 “너희들이 경배하는 것이 마호메트냐 마호메트의 신이냐? 마호메트의 신은 영원히 살지만 사도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25. 마호메트에 대한 이모저모(240-246)
1) 열렬한 종교인, 또는 사기꾼. 말년에는 야망에 집중
2) 겉은 합리적이고 냉정하지만, 사생활은 남자 욕구에 충실하고 예언자로서의 권리를 남용했음
3) 하디자 외 11(10)명 아내가 있음. 이 중 아예사만 처녀이고 나머지는 과부
하디자에 대한 신뢰가 무척 강함. 아예사의 물음에 대해,
“(그 여인보다) 더 나은 사람은 있을 수 없다. 그 여인은 사람들이 나를 경멸할 때 믿어주었고, 내가 세상에서 가는하고 핍박받을 때 그 궁핍함을 덜어 주었다.”
4) 많은 부인이 있었으나, 후계자로 삼을 자식을 두지 못함
5) 파티마(딸)은 알리(마호메트의 사촌)와 결혼
26. 알리(246-247)
1) 마호메트 사후, 혈족 관계로 보면 후계자로서 1순위였으나, 자기의 권리나 이익을 보호하지 않음
2) 마호메트 임종시 아내 ‘교활한’ 아예사가 자리를 지킴 - 아부 바크르가 다음 사도가 됨
27. 아부 바크르(248-249)
1) 우마르가 신하가 되었다고 선언하여, 아부 바크르에게 힘이 실림
2) 하심 가문만 충성 맹세 거부
3) 우마르에게 칼리프직 이양
28. 우마르 (249)
1) 알리의 지원이 있어 정통성 확보
2) 후임을 교우 6명에게 부탁, 알리는 이때도 자기 권리를 주장치 않음
3) 오스만이 다음 칼리프로 결정됨
29. 오스만(249-251)
1) 마호메트의 서기였음. 아부 탈리브의 아들.
2) 시아파(분리파)는 알리를 지지
수니파(순니파)는 정통파로서 아부 바크르, 우마르, 오스만, 알리를 모두 인정(알리는 제4순위임)
3) 오스만은 기질이 허약하고 고령이어서 정복과 제국의 무게를 감당치 못함
-무관심과 적대적 세력이 증가 → 불화 증폭
-쿠파, 바소라, 이집트, 사막 여러 부족의 무장봉기
-불성실한 서기의 문서 위조: 오스만의 평판에 심각한 타격
-끝내 습격당해 죽음
4) 중요 치적: 현재 통용되는 꾸란의 편집자. ‘말씀의 길이’를 기준으로 말씀의 순서를 정함
30. 알리시대(251-255)
1) 알리의 오스만 후위 계승을 수락함
2) 텔하, 주베이르, 아예사가 도전했다. ‘낙타의 날’에 패퇴
3) 무아위야의 도전
-시핀 평야 전투: 알리의 무훈
-무아위야는 선봉대 창끝에 꾸란을 매달아 내세움. 알리군은 심리적 동요를 일으킴
4) 하즈라지족의 열성파 신도들이 3인 암살자를 보냄
-알리는 죽임 당함 (63세, 그의 주검을 안치한 쿠파는 시아파들의 성지가 됨)
-무아위야는 부상입음
-이집트 총독 암르의 암살 기도는 실태
31. 무아위야 통치(655, 또는 661-680년) (255-256)
1) 아부 수피안과 헨다(잔인)의 아들
2) 아주 젊은 시기에 예언자의 서기 역할을 함
3) 시리아 총독만 40년
4) 오스만 사후, 그의 죽음을 이용하여 시리아인 6만명의 충성맹세를 얻음, 이집트의 암르도 지지
5) 알리 후임인 하산의 퇴위를 이끌어냄
6) 세습제로 칼리프를 선출: 아들 야지스가 칼리프가 되었으나 나약하고 방탕했음.
32. 후세인(256-259)
1) 알리의 아들, 하삼의 동생
2) 야지스에 맞서 전투하다 사망함
33. 마호메트와 알리의 후손들(259-261)
1) 12명의 이맘(이맘: ‘앞장선 사람’이란 뜻, 모스크에서 예배드릴 때 기도를 이끈다) 배출
2) 교활한 사기꾼들은 자신들이 신성가족의 일가라고 주장(스페인∙ 아프리카의 알 무아히드 왕조, 이집트와 시리아의 파티마 왕조, 예멘의 술탄들, 페르시아의 사파위 왕조 등)
34. 마호메트의 성공 비결(261-263)
1) 전략: 무력과 설득, 열렬한 신앙과 공포
2) 자유와 승리, 무력과 약탈, 현세와 내세에서 스스로의 열정을 향유하라고 함
3) 그의 종교는 영속성이 강함(현재까지도 그 영속성이 지속되고 있음)
4) 우상을 버림
35. 공공(公共)에 끼친 마호메트의 공과(功過) (264-264)
1) 공-우상타파
-인신공양을 기도, 금식, 자선으로 전환함
-자비와 우호의 정신, 사회적 덕목을 실천하려는 분위기를 만듦
-법과 교리로 복수심을 달래고, 고아와 과부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높임
-여러 부족을 통합하게 함
2) 과-빠른 정부, 광활함으로 인해 통치력 상실
-산발적인 동∙서방 식민지
-혼혈 다(多)
-왕권이 이동하면서 불경한 전쟁이 됨
※ 이슬람에 대한 보충 자료
1. 용어
무함마드-제일로 칭송받는 자
알라-신
슈하다-순교, 신앙증거자들→ 자살특공대(가마 이슬라미야 GI(이집트 무장단체), GIA(극단적 수니파), 알카에다)
2. 이슬람 종파
시아파 |
10% |
알리와 그 후손들 숭배, 신성시 |
이란, 이라크 남부 | |
카와지리파 |
1%미만 |
시아파에서 탈퇴한 자들 |
알제리의 므자브, 오만왕국 | |
수니파 |
90% |
미신파타, 성자와 순교자 숭배 반대 |
||
하나피 |
‘아부 하니파’에서 기원. 제의는 덜 까다롭다. 맹목적 모방을 강조하여 파키스탄에서는 교조주의화됨 |
터키권, 인동, 파키스탄, 중국 | ||
말리키 |
‘말리크 이븐 아나스’ 창설. 전통과 풍습 중시 |
上이집트, 마그레브(아틀라스 산맥 주변-모로코 등 북부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남의 블랙 아프리카 일부 | ||
샤피이 |
‘샤페이 이맘’. 법의 원천으로 순나(Sonna)를 높이 평가 |
下이집트, 동아프리카, 인도, 말레이시아, 필리핀, 타이, 인도네시아 | ||
한발리 |
‘아흐마드 이븐 한발’. 엄격주의, 경전주의 |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
※ 수피즘: 신과 인간 사이가 좀더 정의적인 대중적 이슬람
1) 9세기 경 수피 출현. 수피는 나홀로 수도하는 사람
2) 이후 수행자 집단 ‘카나까’ 출현
3) 11세기 경 대규모 평신도회와 스승을 모신 수도원이 출현함
4) 초기에는 수니파, 시아파 모두로부터 단죄되었으나 점차 이슬람 지역 전체에 확산되었다. 이후 여성을 위한 수행의 집도 생겼다.
3. 칼리프, 왕조들
(동방) 칼리프(후계자) |
메디나가 본거지 | |
우마이야 왕조 |
661-750 |
다마스쿠스에 정착 |
후(後) 우마이야 왕조 |
923-1103 |
이베리아 반도 코르도바 |
아바스 왕조 |
750-1258 |
바그다드 |
시아파 파티마 왕조 |
909-1171 |
카이로 |
투르크계 맘루크 왕조 |
1261-1571 |
이집트, 시리아 |
오스만 제국 |
1517-1924 |
이스탄불 |
4. 서구 유럽의 이슬람 적대시 배경
1) 칼리프 오마르(634-644)의 정복 전쟁
2)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700념간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하면서 ‘적대적인 전사 이슬람’의 이미지를 굳힘
3) 몽고의 티무르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그런데 정복지의 주민들을 처형하면서 해골탑을 쌓기도 했는데, 이러한 몽골식 이슬람 강요는 유럽인들에게 ‘이슬람인=아랍인=몽골인’으로 생각하게 했다.
4) 레콩키스타(reconquista, 카톨릭계 에스파냐 국왕들의 국토회복운동)를 통해 무시무시한 종교재판 진행됨. 이때 이슬람교도와 유대인들은 마그레브(Magreb)지역(모로코 등)과 오스만 제국에 피난함(1492~1500)
5) 19세기~20세기 중반에 거쳐, 마그레브 지역과 근동지역의 식민화 정책이 진행되면서 이슬람을 헐뜯는 고정관념이 더욱 부채질 됨
6) 2001. 9. 11. 뉴욕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의 미국방부 테러 당함(알카에다 소행으로 알려짐)
5. 파키스탄 탄생 배경
1928년 정교분리 지지자인 네루(인도)에 맞서, 무함마다 알리 진나(1876~1948)가 ‘두 국가 이론’을 옹호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1947년 인도의 이슬람교도들이 떨어져 나와 파키스탄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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