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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충만인 교회
4. 교회의 책임과 생활
(3) 아내로써 복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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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5:22~33절>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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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아내로 비유하는 것은 에베소서라고도 할 수 있다. 오늘은 문맥 상 ‘교회의 책임과 생활’의 항목에서 이 말씀을 드리겠다. 새 사람을 입고 생활한다는 것을 지난번에 말씀 드렸다. 오늘은 아내로써 복종하는 것이 교회의 삶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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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남편과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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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아내는 가정의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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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가정에서의 중심이다. 남편이 중심이 아니고, 아내가 중심이다. 남편은 머리이기는 하지만 실제적인 중심은 아내이다. 왜냐하면 생산과 양육이 전부 아내에게 달려있다. 고대사회는 대부분 모계사회다. 가정하면 아내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꼭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로 경륜의 중심이다. 그리스도가 머리이지만 하나님의 경륜은 교회에서 시행되기 때문에 교회가 하나님 경륜의 중심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아내와 교회는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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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아내는 교회의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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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교회의 형상이다. 하와를 지은 것을 보고 이것은 교회의 예표라고 보는 것이다. 아내는 교회의 형상이다. 새 예루살렘의 형상은 아내의 형상이다. 계시록을 보니까 내가 어린양의 아내를 너희에게 보이겠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새 예루살렘도 역시 마찬가지로 아내의 형상이다. 아내로 예표되는 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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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아내는 머리에게 복종함으로써 가정의 중심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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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아내는 머리에게 복종함으로써 가정의 중심이 된다. 혼자 중심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내가 먼저 있어서 머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머리가 있어서 아내가 있기 때문에 중심은 중심인데 어떻게 해야 중심이 될 수 있는가? 복종해야 중심이 될 수 있다. 이것을 생리적으로 말하면 한 씨만 받아야 된다. 여기서 아내인 자매들에게는 복종하라고 한다고 너무 가혹하다. 요즘 세상에 누가 복종하는가? 자기나 나나 매 한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여러분은 일차적으로 복종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한 씨만 받았기 때문에 복종한 사람들이다. 복종하지 않고는 씨를 받을 수가 없다. 여자 입장에서는 완전히 복종해야 씨를 낳는다.
그런데 하와는 어떻게 했는가? 자의로 행동했다. 그래서 사탄에게 유린되었다. 한 씨를 받아야 할 것인데 한 씨를 받지 않고 자의로 행동했기 때문에 유린되었다. 이 의미가 아주 의미심장하다. 그래서 복종하라는 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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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교회도 자의를 행동하면 사탄에게 유린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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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도 마찬가지로 자의로 행동하면 하나님 경륜의 중심이기는 하지만 자의로 행동하면 사탄에게 유린된다는 뜻이다. 교회주의, 교회지상주의가 있는데 거기에 와서 모두 변질되었다. 그리스도가 변질된 것이 아니고, 교회가 변질된 것이다. 초대교회를 지나오면서 교회는 여러 가지 과정을 지나온다. 마침내 무엇이 변질되었는가? 교회가 변질되고 말았다. 결국 사탄에게 유린된 하와처럼 또 세상에 유린된 교회가 되었다. 그래서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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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기독교는 동양은 그렇게 크지 않지만 서구사회는 기독교 영향이다. 기독교는 서구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준 종교이다. 기독교를 빼놓고는 서구사회를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러면 서구사회가 무엇인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인가? 그렇지 않다. 결국 도로 세상인데, 기독교는 그런 세상을 도와주는 형편이 되었다. 결국 유린된 것이다. 이용된 것과 마찬가지다. 서로 이용하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세상을 위한 것이 되고 말았다. 세상은 기독교를 이용하고, 기독교는 세상을 이용하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이 남았는가? 교회가 남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가 남은 것이 아니고 세상 나라가 남아버렸다. 그러니까 지금은 서구사회에서는 교회가 점점 필요 없어져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을 위해 자기 할 일을 거의 다 해버렸다. 지금은 필요가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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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다시 산 그리스도만 받았어야 할 것인데, 거기에 다른 것을 받아들였다. 완전하게 복종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한다고 했는데, 완전하게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의 씨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래서 교회는 결국 변질되고 말았다. 지금 현재의 교회를 보고 초대 교회를 보기는 아주 어렵다. 그래서 모두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는데, 그 구호 뒤를 보면 열심을 내자는 뜻이다. 좀 열심을 내고 순수해지자는 의미로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씨의 문제이지 열심이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다.
하와가 마치 씨를 잘못 받은 것처럼 교회도 씨를 잘못 받았다. 혼돈된 씨를 받아버렸다. 그러니까 교회가 회복되려면 그 씨를 다시 회복해야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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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아내는 생산과 양육의 중심으로서 사탄의 표적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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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생산과 양육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사탄에게도 똑같이 필요하다. 농부는 어느 농부이든지 흙을 찾는다. 가라지를 심을 농부도 흙을 찾고, 밀을 심을 농부도 역시 흙을 찾는다. 흙이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여자는 흙의 위치이다. 그러니까 표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은 더 연약한 지체를 찾았다. 예수님 비유에서도 밀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밀을 뿌려놓았는데, 누가 와서 가라지를 뿌려놓고 갔다. 그것은 바로 마귀다. 사탄이라고 말했다. 하나님도 농부이고, 사탄도 일종의 농부이다. 다 자기의 씨를 퍼뜨리려고 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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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그런 곳에 노출되어 있다. 하나님의 씨를 받을 수도 있고, 사탄의 씨를 섞어 받을 수도 있다. 세상은 완전히 사탄의 씨만 받지만 교회는 섞어 받는다. 그래서 그 교회가 크고 커서 무엇이 되는가? 큰 음녀가 되게 된다. 그것이 바벨론이 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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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그러므로 아내는 복종함으로서 보호를 받고 본분인 생산과 양육의 일을 수행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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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아내는 복종해야만 절대적인 복종을 해야 보호를 받고 그 본분인 순전한 씨를 생산하고 양육하는 일을 수행할 수 있다. 농부는 자기 씨를 뿌려놓았기 때문에 그 밭을 보호하고 경작한다. 자기 씨를 뿌리지 않은 밭은 그냥 놔둔다. 그러면 황무지가 되고 만다. 그런데 농부가 자기 씨를 뿌려놓았기 때문에 열심히 가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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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그리스도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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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치가 그리스도와 교회와 같은 이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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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교회는 하나님 경륜의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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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하나님 경륜의 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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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 -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 경륜의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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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어디로 가는가? 새 예루살렘으로 간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경륜의 중심이다. 모든 성경은 이 경륜의 중심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도 이것을 위해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이것을 위해 있는 것이다. 전부 다 이 중심 가운데 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로서 예표된 것이 창세기 2장에 있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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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생명)이지만 땅 위에서의 실제적 중심은 교회임(생산, 양육,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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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다. 그러니까 생명이다. 그렇지만 땅위에서 실제적인 중심은 교회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이지만 생산과 양육과 지배는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교회가 실제적인 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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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교회는 그리스도의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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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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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와는 교회의 예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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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는 교회의 예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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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회는 그리스도의 형상(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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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한다. 이 형상이라는 말은 실제화라는 말도 된다. 그리스도가 오늘 현재적으로 어떻게 살고, 어떻게 활동하는가? 교회로 살고, 교회로 활동한다. 지금 그리스도를 볼 수가 없다. 교회로밖에 볼 수가 없다. 그러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실제화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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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교회는 그리스도께 복종함으로써 하나님 경륜의 중심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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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그리스도께 완전하게 복종함으로써 하나님 경륜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조금만 덜 복종하면 다른 씨가 들어온다. 절대적이지 않으면 그리스도가 없으면 세상에 말려들어간다. 언제 들어오는지 모르게 들어와 버리고 만다. 세상과 교회는 어떤 접경지대에 놓여있다. 접경지대는 항상 위험하다. 지금도 휴전선이 있는데, 휴전선은 항상 위험하다. 국경지대는 항상 수비대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접해있기 때문에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 6.25전쟁 때도 금방 내려와 버린다. 수도를 대전으로 옮기느니 등 여러 가지 말이 있었다. 휴전선과 너무 가깝다는 것이다. 탱크를 밀고 들어오니까 며칠 내로 서울까지 밀고 들어온 것이다. 서울시민들이 난리가 났다. 오도 가도 못하고 갇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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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접경지대에 있다. 접경지대에 있는 군인은 군부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된다. 후방에 있는 군인은 조금 농땡이를 쳐도 되는데 최전방에 있는 군인은 절대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뚫어져 버린다. 교회는 절대적으로 그리스도께 복종할 때만 하나님 경륜의 중심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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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와가 자의로 행했음으로 사탄에게 유린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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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가 자의로 행했기 때문에 사탄에게 유린되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교회도 교회를 위해서 해버리면 안 된다. 교회가 중심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역사에서 보면 교회 발전을 위해서라고 했는데 그것이 사탄에게 유린되고 말았다. 핍박을 받고 있던 교회가 황제가 인정하기 시작하니까 얼마나 좋겠는가! 이 황제를 잘 이용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황제가 이용당하겠는가? 오히려 황제가 교회를 이용해버렸다. 그래서 사탄의 경륜을 수행하는 바벨론이 되었다. 창세기 3장 이후로 가는 길은 전부 바벨론으로 가는 길이다. 선악과는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옳고 그른 것, 좋고 나쁜 것이 무엇이 나쁜가? 좋은데 뭐가 나쁜가? 나쁜 것이 하나도 없다. 좋은데 그 마지막을 보면 바벨탑으로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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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가 씨를 잘 모르면 결과를 봐야 된다.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씨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배추씨와 무씨를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모른다. 배추씨는 잘고 무씨는 굵은데,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알지만 농사를 짓지 않은 사람은 그것도 모른다. 아주 흡사한 씨도 많다. 구별하기 어려운 씨도 많다. 농사짓는 사람만 그것을 안다. 씨를 모르면 마지막 결과를 예측해야 된다. 이것이 어디로 가는 것인가?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는 뭔지 모른다. 그런데 마지막 11장에 가면 바벨탑이 된다. 바벨탑은 무엇인가? 분열이다. 좋은 것인데, 마지막에 가면 분열이 나온다. 나는 좋았는데 제 1대에서는 좋았는데 2대 3대로 가니 분열이 나와 버린다. 농사를 지어보지 않은 사람은 몇 대까지 지어보는 것이다. 짓다보면 마지막에 가면 분열이 나오는 것이다. 지어본 사람은 아예 초반부터 이것은 분열이 될 것으로 안다. 그래서 경험이 있는 농부를 필요로 하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간에 마지막에 가서 연합이 되는가, 분열이 되는가? 이 문제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경륜의 목표가 연합체다. 새 예루살렘은 연합체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체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체다. 연합으로 가는 길이다. 바벨론은 무엇인가? 분열로 가는 길이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창세기 11장에서는 바벨탑이 무너졌다고 되어있는데, 요한계시록에서는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되어있다. 둘 다 여자다. 요한계시록에 가니까 그 바벨론은 여자라고 말한다. 여자는 교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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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회가 자의로 행동하면 사탄에게 유린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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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자의로 행동하면 사탄에게 유린된다. 그것은 큰 성 바벨론으로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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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교회는 땅위에 있고 거듭난 사람이지만 육신 안에 있기 때문에 세상과 접하여 있고 사탄의 표적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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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땅위에 있고 거듭난 사람들이다. 교회에 온 사람들은 다 거듭난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육신 안에 있다. 그리고 세상에 접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탄의 표적이 되는 것이다. 하늘나라라는 것이 따로 있어서 완전히 묵인지대가 있다면 상관이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육신이고 우리는 여전히 세상 안에 있다. 아무리 해도 육신을 벗어버릴 수가 없다. 세상을 떠날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저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악에서 보존하기 위해서 기도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어차피 세상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거기서 보존되어야지 어디로 떼 매고 가면 안 된다. 갈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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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분명히 알아야 된다. 우리가 아무리 거듭나고 아무리 새 사람이 되었어도 역시 우리는 육신이다. 그리고 세상 안에 살고 있다. 온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되기까지는 아직은 세상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하나님 아들로 태어났으니까 다라고 할 수가 없다. 구원파가 우리 한국을 휩쓸었을 때가 있는데, 처음 구원을 받았으면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번 구원 받았다. 한번 죄 용서를 받았다. 그러면 죄를 짓지 않느냐, 죄를 짓지 않게 되었느냐고 물으면 말을 못한다. 왜? 아직 육신이기 때문에. 아직 세상 안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한번 용서 받은 사람은 영원히 용서 받는 것이고, 죄를 짓는다고 하더라도 이미 용서해놓았다고 말했는데, 말에 어폐가 있다. 왜 그런가? 아무리 거듭났어도 아무리 용서받았어도 아직 육신에 있다. 그리고 세상에 접해 있다. 그래서 표적이 되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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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이외의 것에 둘러 쌓여있다. 교회라고 해서 아주 다른 것이 아니다. 물질적인 공간 같으면 완전히 소독을 하여 균이 없게 만들 수가 있다. 그러나 교회는 물질적인 공간이 아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세상을 접하고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거기에 둘러 쌓여있다. 교회가 뭐 이래? 이렇게 할 수가 없다. 교회도 그럴 수가 있다. 우리는 아직 육신에 있고, 아직 세상에 접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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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께 복종함으로써 보호받고 그 본분을 이행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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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께 완전하게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있다. 그래야 거기서 그분에게 보호를 받고 그 본분을 이행할 수 있다. 아내가 되면 자유가 제한된다. 혼자 처녀일 때는 자유가 있지만 아내가 되면 자유가 제한된다. 왜 제한된 속에 사는가? 이 제한을 받기 싫어하는 사람은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 보봐리 부인은 자유를 제한받기 싫으니까 1년씩 계약해서 살자고 계약직 아내로 살았다. 계약 해놓은 것이니까 뭐라고 할 수가 없다. 그 기간이 지나면 해약이 되기 때문에 의무가 없다. 의무가 없으니까 책임도 없다. 책임이 없으니까 제한을 받을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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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교회는 아내인가? 바로 거기서 거역이 처리 받아야 되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 거듭났으면 거듭난 생명 자체는 온전하지만 우리는 아직 육신에 있기 때문에 거역이 아주 없는 것이 아니다. 거역의 본성도 같이 있다. 이것이 교회 생활을 통해서 처리되어야 된다. 아내 생활을 통해서 처리되어야 된다. 아내라는 생활이 없으면 처리가 안 된다. 이것이 처리되어야 완전한 복종이 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처리가 안 되면 완전한 복종이 불가능하다. 내가 복종하고 싶어도 안 되고, 하나님이 복종시키고 싶어도 안 된다. 사나운 개는 스스로 복종하려고 하는지 안 하는지는 모르지만 주인이 그렇게 복종시키려고 해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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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사람도 아내의 생활을 통해서 비로소 거역이 처리된다. 성경에는 하와가 먼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아내는 처리 받아야 된다는 개념이 또 있다. 먼저 유혹이 되었으니까 다시는 먼저 유혹되지 않으려면 처리 받아야 된다는 것이다. 또 유혹이 되면 안 되니까. 아내의 위치는 자유를 제한받고, 거기서 거역을 처리해야 완전한 복종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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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복종! 왜 이것이 필요할까? 복종하지 않아도 될 것인데 왜 필요할까? 이런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이 사람을 거듭나게 했으면 됐지 왜 또 복종을 해야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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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기 위한 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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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배필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혼자 자신의 일을 다 할 수가 없다. 어차피 배필을 통해서 자기 일을 하신다. 배필을 통해서 자기 일을 하셔야 되기 때문에 복종이 필요하다. 배필인 우리는 하나님과 똑같지 않다. 똑같지 않으니까 복종해야 된다. 마음이 똑같으면 복종할 필요가 없다. 틀린 것이 있으니까 복종해야 된다. 주인과 종도 종이 주인과 똑같은 마음이 있다면 복종할 필요가 없다. 일을 시킬 필요가 없다. 그런데 똑같은 마음이 아니다. 뭔가 다른 마음이 있기 때문에 복종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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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배필이어야 된다. 우리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기 위한 배필이다. 그래서 복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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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하나님은 영이심으로 땅을 지배하기 위해서 육신을 가진 배필이 필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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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땅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육신을 가진 배필이 필요하다. 육신을 가진 배필이 필요하니까 사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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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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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성경은 말하기를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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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담(사람)의 갈빗대로 하와를 지으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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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지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의 죽음으로 교회를 세웠다고 말할 수 있다. 갈빗대니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교회를 세운 것이니까 사람의 생명으로 결국은 교회를 세운다.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지은 것처럼 사람의 생명으로 교회를 짓는다. 사람의 생명이 어떤 생명이냐에 따라서 교회의 재료가 달라진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이 필요하다. 거듭난 사람은 교회의 재료다. 그 자체가 교회가 아니고, 그것은 교회를 구성하는 건축하는 재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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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교회를 샀음(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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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샀다. 이것은 모두 배필을 구한다는 뜻이다. 사람을 배필로 지었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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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아들은 생명의 유전에 관계되고 배필은 경륜의 수행과 목표에 관계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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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들이라는 개념이 있고, 또 배필이라는 개념도 있다. 아들은 무엇인가? 생명의 유전에 관계된다. 내가 육신적으로 낳은 것은 내 아들이다. 하나님에서 나온 것이 하나님 아들이다. 이것은 생명의 유전과 관계된다.
그러면 배필은 무엇과 관계되는가? 경륜과 관계된다.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는 것과 관계된다. 하나님 경륜을 수행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것은 결국 배필이다. 아들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고, 배필로 도달한다. 이것이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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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조자와 피조물(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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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우리에게서 변화된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을 창조자라고 부른다는 것은 내가 피조물로 인식되었다는 뜻이다. 내가 피조물로 인식될 때 하나님은 창조자라고 말한다. 내가 처음에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을 안 것이 아니다. 여전히 모른다. 몇 년 동안 하나님을 알려고 했지만 하나님을 몰랐다. 마지막에 내가 하나님을 알아서가 아니고, 내가 피조물이라는 것이 알아지고 느껴졌다. 그때 나는 창조자를 인정하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하나님을 모른다. 단지 나를 지으신 자가 있구나. 나는 창조자를 인정하는 것뿐이다. 나는 하나님을 본 일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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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우리의 거듭난 인생은 시작된다. 창조라는 말은 시작이라는 뜻이다. 창세기라고 하는데, 창세기라는 말은 시작하는 글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절대적으로 무엇이 있는가? 능력이 있다. 나는 피조물이고, 그는 창조자라고 할 때는 절대적인 능력 관계이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드는데 이런 그릇을 만들 수도 있고 저런 그릇을 만들 수도 있다. 절대적인 권리를 갖고 있다. 그런데 그릇이 나는 뚝배기가 되고 싶다거나 나는 밥그릇이 되고 싶다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절대적 관계이니까 거기서는 절대적 능력 앞에 사람이 굴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에 있는 말씀은 엘로힘이다. 엘로힘이라는 말은 그냥 하나님이라는 말이 아니고, 전능한 능력이라는 뜻이다. 전능한 능력이 창조했다. 전능한 능력이 시작했다는 말이다. 이것을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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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한 능력! 창조자는 그냥 능력이다. 우리가 맨 처음 창조자를 인정할 때는 능력밖에 모른다. 그때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안 것이 아니다. 산이 있구나. 바다가 있구나. 우주가 있구나. 뿐만 아니라 내가 있구나. 나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모른다. 나는 모르는데 내가 절대적인 능력 앞에 서는 것이다. 내가 항거할 수도 없고 연구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능력 앞에 서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자를 만나는 경험이다. 내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왜 이렇습니까, 왜 저렇습니까라고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서는 것이 창조자 앞에 서는 것이다. 왜 이것은 뚝배기입니까? 왜 이것은 접시입니까? 이렇게 할 때는 창조자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뚝배기든지 창조자든지 어쩔 수 없는 것, 나는 말할 수 없는 것, 나는 키가 작든지 크든지 말할 수 없고 내가 100살을 살고 싶은지 10살을 살고 싶은지 말할 수 없고 내가 검든지 희든지 그것도 말할 수가 없고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나를 발견할 때 그때 내가 피조물로 발견된다. 그때 무엇을 느끼는가? 엘로힘을 느낀다. 절대적인 전능한 능력을 느낀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다. 내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사람이구나. 나는 아무 자격이 없구나. 진짜로 능력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할 말이 없게 된다. 우리끼리는 주먹 갖고 싸우고 누가 더 잘하네 못하네를 하지만 알리 같은 사람을 만나면 아무 할 말이 없다. 주먹이 작냐 크냐, 연단을 덜 했냐 더 했냐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 사람을 만나버리면 우리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죽는다. 그 주먹이 얼마나 센지 황소도 떼려 눕힌다고 한다. 요즘은 그런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옛날 사람이라 알리밖에 모른다. 그런 사람 앞에 가면 힘쓴다는 사람도 아무 할 말이 없다. 지식도 너무 많이 아는 사람 앞에 가면 아무 할 말이 없다. 어중간할 때는 내가 아느냐 네가 아느냐고 하지만 너무 많이 아는데 가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야지 안다고 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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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다. 그러니까 엘로힘이다. 전능한 능력을 하나님이라고 했다. 우리 한국 사람말로는 하나님, 미국사람말로는 God, 희랍사람말로는 데오스라고 이름을 붙여놓은 것이다. 사실은 그 이름이 진짜 이름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냥 ‘능한 자’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얼마만큼의 능력이 있는 줄도 모른다. 우리가 우주가 얼마나 큰지 모르는 것처럼. 아무리 봐도 우주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지금 과학으로도 모르는 것 같다. 측량할 수가 없다. 측량할 거리가 있어야 측량을 하지 끝이 없는데 어떻게 측량을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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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능력이 시작을 했다. 이것은 경이로운 고백이었다. 이런 세계가 있구나. 누가 산을 만들겠는가? 바다를 만들겠는가? 누가 하늘을 만들겠는가? 누가 별과 별 사이를 낳게 했겠는가? 그것을 생각할 때 입이 딱 벌어져서 나온 말이 ‘엘로힘’이다. 자기 인생도 거기서 만나져야 내가 별 것이 아니구나. 좀 아는 줄 알았더니 아는 것도 아니고 힘 좀 있는 줄 알았더니 힘도 아니고 뭐 좀 되는 줄 알았더니 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구나.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인 줄 알 때부터 하라는 대로 되는 것이다. 그 전에는 하라는 대로 도저히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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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어려서는 몰랐지만 크면서는 하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의심이 생기는데 아무리 해결하려고 해도 해결이 안 된다. 물어봐도 누가 확실한 대답을 해주는 사람도 없고, 책을 봐도 확실한 대답이 없다. 교회에 들어온 지 6개월이 되면 학습을 받고 세례를 받는다. 세례는 그 교회에 들어온다는 장로교의 입교 의식이다. 그런데 내가 세례를 받지 않았다. 첫째로 확신이 없고, 세례를 받으면 뭐하나 하는 생각에 받고 싶은 마음이 없어 늘 사양했다. 작은 교회니까 당회장이 1년에 한 번씩 순회를 하면서 세례를 하는데 나는 늘 거부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렇게 믿음이 좋으면서 세례를 받지 않으려고 한다고 너무 겸손하다고 말했다. 나는 겸손한 것이 아니라 속에 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무릎을 꿇은 후에 세례의 의미를 확실히 모르면서도, 교회에서 하라는 것이고 교회가 정해놓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원해서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원해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교회가 필요한 일이라면 교회가 하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고 싶었다. 이유가 없었다. 그전에는 이의가 있었는데 이의가 싹 없어졌다. 하라면 그냥 하게 되고 하는 것이 즐거웠다. 참 이상하다. 그때 내가 변한 것 같다. 열심히 하다보니까 나에게 서리집사를 하라고 하여 했다. 주일학교도 열심히 했다. 옛날에는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는데,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되었다. 그때는 내 인생 자체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더라도 교회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되었다. 모든 것이 다 옳은 것 같고, 따지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버렸다. 그때 나는 피조물의 자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내 인생은 뭔가? 나는 왜 이러고 있는가? 내 길은 왜 이렇게 막혀 터지지 않는가? 이런 문제가 남아있었다. 교회의 요청에 대해서는 일체의 이의가 없어졌는데 내 인생이 풀리지 않으니까 나는 왜 이러고 있어야 되는가 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세상에 내놓았습니까? 무엇하러 내놓았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데 내가 지금 세상에 살아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이런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나를 불렀다. 그렇게 되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기 전에 불러놓으면 잔소리가 많았을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자기 의견이 많고 자기 생각이 많으니까 부르지 않고 있다가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내가 이의가 없어지니까 부르신 것 같다. 하나님은 정말 지혜로우신 분이다. 그 친구가 나를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친구는 미리 신학을 하여 먼 시골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을 때다. 옛날에는 방학 때면 만났지만 목회하면서는 만나지 못했다. 어떻게 그때를 맞추어서 편지를 보냈는지 모르겠다. 요즘 어떻게 살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 친구는 편지를 길게 쓰지 않는다. 큰 종이에 다섯줄도 안 되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어떻게 살고 있느냐고 하여, 내가 아무 희망이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대번에 편지가 석줄 정도 왔는데, 넌 하나님이 죽을 자리에서 살려주었으니까 이제 하나님을 위해 일할 생각이 없느냐? 있으면 주선해 주겠다는 것뿐이었다. 다른 말은 없었다. 그 편지가 나를 불러내었다. 편지를 길게 쓴다고 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한두줄만 써도 꼭 필요한 사람에게는 그 말이 적중하고, 아무리 많이 써도 필요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는 것 같다. 나도 누구에게 편지를 쓰면 짧게 써볼까 하는데 그래도 쓰다보면 길어진다. 속으로는 길게 쓴다고 될 일이 아닌데 싶어도 자꾸 길게 써진다. 길게 쓸 필요 없이 간단하게 쓰면 된다.
창조자와 피조물! 창조자와 피조물에서는 내가 인정을 느낄 수가 없다. 차디차다. 토기장이와 질그릇은 차디차다. 대화가 없으니까. 절대적이니까. 나와의 거래가 전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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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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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차차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피조물에서 아들로의 인식이 생긴다. 어떻게 아들이라는 인식이 생길까? 그것은 믿음이다. 갈라디아서 3장을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으니”라고 한다. “믿음으로”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아들이 되는 것은 부모에게서 태어나서 아들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믿음으로” 됐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창조자로 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로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이 아들이라는 인식이 생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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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있는 아버지라는 말은 우리가 말하는 육신의 아버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개념이 아주 크다. 조상, 시조, 창시자, 혹은 대표자, 스승에게도 아버지라는 말을 썼다. 선지자에게도 왕에게도 썼다. 캐톨릭에서는 신부를 God Father라고 하는데 이것은 존경의 표현이다. 아버지라는 말이 단순히 육신의 아버지만 아버지라고 한 것이 아니고, 절대적인 어떤 권위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할 때 아버지라는 말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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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개념, 양육하고 훈계하고 소유자가 되고 가장이 되는 경우는 특별한 개념이다. 일반적 개념은 꼭 그것이 아니라도 아버지라고 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아버지 하나님’의 개념이 생겨났다. 이스라엘은 초기부터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했다고 한다. 이름들이 그런 이름들인데 ‘엘리압’이나 ‘요압’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 다음에 ‘아비야’, ‘아비엘’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이것은 ‘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예수님 시대에도 ‘아비야’ 반열에 스가랴라는 제사장이 있었다고 한다. 아비야 족속이다. 이씨, 김씨 하는 식으로 아비야라는 말은 하나님은 내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이 있었다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느끼고 있었다는 뜻이다. 창조주에서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이사야서에 오면 “주는 우리 아버지시다”라는 말이 나온다. 아브라함이 모르고 이스라엘이 우리를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그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온다.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사64:8)이라고 했다. 이것은 자기들이 받아들인 인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동안 자기들을 양육하고 훈계했던 경험이 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창조자라는 개념에서 아버지라는 개념으로 이전되어 왔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양육하고 훈계하는 것이니까. 하나님은 아버지 같은 분이구나가 되었다. 원래 부모가 낳은 사내아이를 아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조상이 같은 민족 전체를 말할 때도 아들이라고 한다. 한 족속을 가리켜도 아들이라고 한다. 신분이나 성격을 나타낼 때도 마찬가지다. 성경에 보면 패역의 아들, 힘의 아들, 선의 아들, 고난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다. 요즘 말로 하면 어둠의 자식들이다.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역사하는 영이다. 불순종의 아들들이라고 할 때는 성격이나 신분을 이야기한다. 멸망의 아들들, 빛의 아들들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아들이라는 개념이 이렇게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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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구체적으로는 계약 관계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나의 아들들이라는 입장에서 계약하셨다는 말이다. 아버지가 아들과 갖는 관계에서 계약을 했다. 솔로몬에게 하는 말로,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지을 것이고 나는 그 나라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말했다. 왕에게 한 말이지만 친근한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것은 육신으로 난 것과는 다른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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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예수님에게 와서 결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구약성경에서는 이미 예수님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나오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나누고 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 아들! 또 왕을 가리켜서 아들이라고 했다. 알렉산더를 보고 암몬의 아들, 제우스의 아들이라고 했다. 아들이라는 개념이 그런 개념이다. 비범한 사람, 걸출한 사람을 보고도 아버지라고 한다. 신이나 철인이나 군대 지도자나 선각자나 기적을 행하는 사람을 보고 아버지라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성경 안에도 아버지라는 개념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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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위임을 받는 사람, 신적인 위임을 받는 사람, 그 임무에 순종하는 사람을 아들이라고 한다. 예수님에게 자연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가 그것이다. 왜냐하면 신적인 위임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임무에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보아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의로운 유태인에게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메시아적인 사용에서도 이것을 아들이라고 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사람들이 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던 이유가 신비로운 의미가 아니고 귀신스러운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개념의 변화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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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나시고, 성결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라고 한다. 희랍사람들이 알렉산더를 보고 암몬의 아들, 제우스의 아들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예수를 만난 사도들이 그를 볼 때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졌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결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고 한다. 우리 믿는 이들을 보면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말하기 때문에 아들이라고 말한다. 아까 말한 대로 믿음을 통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아들들이 되었으니”이다. 하나님과 우리 관계에서 믿음이라는 관계를 통해서 특별한 관계가 이루어졌다. 이 특별한 관계 때문에 우리를 아들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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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떻게 아들들이 되었는가? 자세히 잘 살펴보면 언제 어떻게 아들이 되었는지 잘 모른다. 사람이 바꾸어졌다는 것도 알겠고, 내 생각이 바꾸어졌다는 것도 알겠고, 내가 변화되었다는 것도 알겠는데, 하나님 아들이 언제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언제 되었는지도 잘 모르게 우리는 아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친밀한 관계 때문이다. 어떻게?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그에게 자꾸 신뢰가 쌓이고, 그가 우리에게 믿음을 주고, 그것이 결국 예수 안에 와서 우리가 하나님 아들들이 되게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그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생명이다. 하나님 생명을 받았으니까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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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들이 아들로! 이것은 믿음을 통해서다. 이 아들 세계는 참 좋은 세계다. 왜냐하면 너무 친밀한 관계이니까. 요한복음 14장에 가면 제자들이 불안해진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꾸 위협에 처하고 있으니까 불안해지고, 자기 스스로도 자꾸 죽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는 이야기를 한다. 제자들이 불안해진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에서 내가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래도 부족하니까 15장에 와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비유를 하셨다. 가지와 나무를 생각하면 아버지와 아들이다. 가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열매를 맺는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으면 저절로 과일을 맺는다. 가지 생활은 정말 즐거운 생활이다.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열매를 맺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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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따라온 우리 형제들은 이 말씀을 많이 들었다. 그때는 하나님 아들에 대한 계시가 나에게 있어서 그것이 너무너무 평안하고 좋았다. 우리가 주암산 집회를 맨 처음 했는데 그때 요한복음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말씀을 했다. CCC에서 두 번 정도 공중 앞에서 말할 기회가 있어서 했는데, 그때도 똑같은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를 했다. 포도나무와 가지 이야기를 했다. 이 말씀 때문에 초창기 형제들이 나를 따라 왔다. 너무 좋으니까. 만판이었다. 누구 집에 가서 며칠 씩 드러누워서 먹기도 했다. 그때 춘천 형제들은 그 말씀이 좋아서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녔다. 아버지가 인도하는 대로 이 집에 가서 5일 있고 싶으면 5일을 있고 또 떠나라고 하면 떠났는데, 어떻게 그렇게 한 것이 제천에 있는 우리 집을 찾아낸 것이다. 내가 춘천에 갔을 때는 집을 자세히 가르쳐 준 것도 아니고 다시 만나자고 생각한 것도 아니다. 한 번 초청 받아가서 말씀 전하고 온 것뿐이다. 그런데 그때 형제들이 완전히 해방을 받은 것 같다. 그래서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에 강원도 원주를 가야 되니까 제천역에 왔다. 제천에 오니까 내가 제천에 산다는 말이 생각났고, 양장점을 한다는 말이 생각났다는 것이다. 무조건 택시를 타고 양장점으로 가자고 했는데 그 택시 기사가 어떻게 하필 우리 양장점 앞에 데려다 준 것이다. 그 골목이 양장점 골목이 아니다. 번화가가 아니다. 한쪽 귀퉁이에 있는 양장점인데, 어떻게 거기에 내려주었는지 정말로 성령이 인도하던 시대였다. 돈도 무일푼으로 돌아다녔는데 먹을 것이 다 생기더라는 것이다. 여비도 생기고 돌아다니니까 저절로 되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집에 찾아온 것이다. 마침 그날은 집에 있었던 시간인데 깜짝 놀랐는데, 사연을 들어보니까 아들이 온 것이다. 너무 좋았다. 가지에 붙어있기만 하면 저절로 열매를 맺는다. 잠을 자든지 돌아다니든지 저절로 열매를 맺는다. 얼마나 좋은가! 이렇게 하나님을 친근하게 느낀다는 것이 축복이다. 우리 아버지인데 뭔들 해주지 않으시겠는가? 아버지가 뭐라 하겠는가? 내가 좀 잘못한다고 해서 아버지가 쫓아내겠는가? 아버지가 내 밥을 굶기겠는가? 아버지가 여비를 주지 않겠는가? 그때 한두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 왔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예수님도 15장에서 포도나무와 가지를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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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후 17장에 가면 본격적으로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를 한다.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를 포도나무와 가지 이야기로 하다가 17장에 가면 본격적으로 ‘아버지여!’하고 부르기 시작하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저들이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했다. 사실은 마지막 가는 길이었다. 죽음이 앞에 놓여있는 자리에서 하신 말씀인데 이것을 기도로 한 말씀인데 사도 요한이 어떻게 그것을 다 받아 썼을지가 의문이 생긴다. 사도 요한이 혼자 기도하신 것을 언제 들었겠는가? 그런데 사도 요한이 자기가 다 들은 것처럼 써놓았다. 자기 안에 그것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요한복음 17장을 읽으면 사도 요한이 썼다고 생각되지 않고 예수님이 한 말로 생각된다. 사실은 사도 요한이 쓴 것이다. 예수님이 쓴 것이 아니다. 거기서 아버지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제자들의 인식인데, 불안하다. 그래서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 보혜사를 보내겠다. 그 다음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그래도 시원치 않으니까 노골적으로 아버지다. 아들이다. 이렇게 했다고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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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떻게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점점 하나님과 자기의 관계를 확인해가고 있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지금 앞에 급박한 문제가 놓여져있다. 죽는 문제가 놓여있다. 이 죽음 앞에 딱 섰을 때 하나님과 나는 누구냐는 것이다. 그것을 자기 자신도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어떤 관계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마침내 겟세마네 동산에 가는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아버지여 내 마음이 민망하여 심히 죽게 되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시옵소서.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확인하는 자리이다. 만일 그때 아버지가 없다면 예수님은 설 자리가 없다. 이 우주 안에 아무도 자기를 지지할 사람이 없다. 제자들이 저러고 있지만 다 초자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오합지졸이다.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고 하늘인지 땅인지도 모르고 따라 다니면서 ‘하나는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라고 하고 다니는 제자들이다. 세상에 여우도 굴이 있고 궁중에 나는 새도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도대체 아무도 예수님 가는 길을 모른다. 그러니까 자기는 아버지를 확인해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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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자리에서 아버지를 확인하고 있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거기까지 왔다. 제자들은 그때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 혼자 그렇게 하고 있다. 마지막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골고다로 갔을 때는 아버지라는 말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시편 22편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그렇게 하고 있다. 이것을 볼 때 내 생각에는 예수님께서도 아버지를 확인하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를 인식하고 그 인식된 아버지를 확인하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반대로 하면 제자들이 그런 과정들을 통과해 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 자리에 가면 아버지라는 말이 없어진다.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온다. 아들이 무지무지하게 좋은 것인데, 어느 순간에 가면 아들도 소용없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17장을 읽어보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조금도 틈이 없는 사이다. 한 가지 말을 계속 되풀이 하고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가 시원치 않으면 같은 말을 한다. 똑같다. 뭔가 답이 탁 나와 버리면 되는데, 답이 확실히 나오지 않으면 그 말을 계속 한다. 한 가지 말을 계속 하는 사람은 아주 확실히 입력이 안 되기 때문에 입력될 때까지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 생각인데, 예수님도 절박한 운명 앞에 섰을 때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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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결국 마지막에는 예수님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마지막에 가니까 아버지라고 느꼈던 친밀함, 아버지로 알았던 그 친밀한 인식이 무력화되고 창조자와 피조물로 남게 된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그러면 어째서 돌아가실 때 아버지여, 나를 왜 버리셨습니까? 그랬으면 대답이 된다. 아버지여, 나를 왜 버리셨습니까? 그랬으면 아버지가 할 말이 없다. 지금 우리 아들들이 나를 낳지 말지 아버지가 나를 낳아놓고 왜 그러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하나님에게도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왜 버리셨습니까?’라고 했으면 하나님이 정말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그렇게 사랑한다고 해놓고,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놓을 수가 있는가? 아버지가 되어서 나를 십자가에 내놓을 수가 있느냐고 하면 뭐라고 말하겠는가? 아니야. 내가 계획이 있어서 그래...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그 말을 못하고,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했다. 하나님에게는 어쩔 수가 없다. 피조물이니까. 질그릇이 토기장이에게 왜 나를 질그릇으로 만들었냐고 할 수가 없다. 아버지에게는 할 수 있는데, 하나님에게는 할 수가 없다. 아버지에게는 떼를 쓸 수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떼를 쓸 수가 없다. 왜? 나는 피조물이니까. 엘로힘을 만나게 되니까 나는 떼를 쓸 수가 없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이래도 할 수 없고 저래도 할 수 없다. 시작하신 이도 당신이시고, 가져가신 이도 당신이시다. 나는 만물의 찌꺼기이고 흙이라는 것밖에 남지 않는다. 아들 같으면 아버지에 대해 어느 정도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나를 낳았으니까. 아버지에게 책임지라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그렇게 잘해주어도 마지막 자기가 어려운 자리에 이르게 되면 아버지에게 책임지라고 한다. 낳았으니까 책임지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누가 낳으라고 해서 낳았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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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나님은 할 말이 있다. 왜? 내가 귀히 쓰일 그릇도 만들고 천하게 쓰일 그릇을 만드는 것은 내 마음이다. 하나님은 할 말이 있다. 네가 이러든지 저러든지 나는 내 계획대로 하는 것이라고 하면 하나님은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하는 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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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째서 하나님은 그렇게까지 매정하게 그 좋은 사이를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로 돌려버렸을까? 창조자와 피조물이 너무 매정하니까 아버지와 아들까지 인식시켜 내려왔는데 왜 다시 창조자와 피조물로 돌아가게 만들어버렸는가? 아까 말한 대로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는데 이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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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아내(최종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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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출생이라는 개념이기 때문에 나무와 가지의 개념이지만 아내는 연합의 개념이다. 연합이니까 함께 죽고 함께 살아야 된다. 겟세마네에서는 아들이었다. 겟세마네까지 아들이었다. 그런데 골고다에서는 피조물이 되어버렸다. 아들이 이제 무엇으로 바꾸어져야 되는가?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기 위해서 배필로 바꾸어져야 된다. 아들로만 있으면 배필이 안 된다. 우리가 아들로 있으면 좋기는 좋다. 우리 편에서는 좋기는 좋다. 우리는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돈 한 푼 없이도 강원도를 돌아다닐 수도 있고, 돌아다니면 성령이 도와주신다. 아들을 위해 성령이 있는가보다. 그런데 아내가 되려면 그것 갖고는 안 된다. 하나님은 아들로 인해 자신의 경륜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고, 배필로 인해서 수행한다. 배필이 있어야 수행이 되지 아들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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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참 좋기는 좋지만 이런 문제가 있다. 금붕어가 새끼를 낳는 것을 보면 암놈이 알을 까고 가면 수놈이 위에 씨를 뿌리고 나면 금붕어가 나온다. 금붕어가 나오면 자기 아버지가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잘 산다. 우리 집 연못에 4대가 살고 있는데 엄마 아빠 찾아다니는 놈은 한 놈도 없다. 다 자기대로 잘 산다. 왜? 생명으로 붕어로 까놓았기 때문이다. 금붕어로 까놓으면 금붕어, 잉어로 까놓으면 잉어로 산다. 생명으로 까놓았으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다.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니고 도와주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자기가 알아서 그렇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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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가장 왕성한 세계를 보면 아버지와 아들의 궁극적인 자리가 어디인가를 알 수 있다. 생명이 가장 왕성한 것은 식물이다. 식물은 크면 씨가 열린다. 씨가 땅에 떨어지기도 하고 바람에 날라 가기도 한다. 그러면 어디에 떨어져도 자기 엄마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산다. 엄마에게 왜 나를 낳았느냐는 말을 할 필요도 없고, 내가 널 사랑했다는 말을 할 필요도 없다. 각자 잘 산다. 너무나 편리하고 좋다. 문제 있을 것이 하나도 없다. 부자간 문제가 있겠는가? 고부간 문제가 있겠는가? 아무 문제가 없다. 가장 왕성한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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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덜 왕성한 것이 물고기다. 창세기에 보니까 식물이 나고 물고기가 나고 공중에 새가 나고 그 다음에 땅에 기는 동물들이 나고 사람들이 났다. 생명으로 본다면 식물이 제일 왕성하고, 그 다음이 물고기다. 그렇게 물고기를 잡아먹어도 물고기가 있는 것을 보면 정말 엄청나다. 옛날에는 조기를 잡으려면 연평도까지 가야 되는데, 지금은 제주 먼 바다에서 다 잡아먹어버린다. 연평도가기는커녕 남해안도 가기 전에 다 잡아먹어버린다. 그물로 긁어버리는데 그래도 살아남는다. 어떻게 어떻게 연평도까지 가는 놈이 있어 또 알을 까고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해마다 조기가 나온다. 옛날에는 바닷가에 가면 물고기가 우글우글했다. 파도만 쳐도 멸치가 밀려왔다. 지금은 배 타고 쫓아다니기 때문에 밀려올 놈은 없고 어군탐지기까지 동원하여 쫓아가서 그물로 긁어버리면 하나도 없어져버린다. 그렇게 잡아먹는데도 고기가 있다. 생명이 무지무지 왕성한 것이다. 식물은 아무리 불태워도 나고 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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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생명은 조금 어떻게 하면 죽어버리는데 동식물은 정말 왕성하다. 이런 세계는 하나님의 경륜에 쓸 수가 없다. 이상하다. 왕성하다는 것만 쓰는 것이지 하나님과 연합하여 쓸 수가 없다. 왜? 이것은 연합이 안 된다. 왜냐하면 까놓기만 하면 저절로 살기 때문에 연합할 수가 없다. 까놓기만 하면 혼자 잘 사는데 왜 연합을 하겠는가? 뭔가 아쉬운 것이 있어야 연합한다. 아쉽고 부족해야 연합이 된다. 물고기처럼 까놓으면 사는데 무엇하러 연합을 하겠는가?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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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가 아내가 되기 위해서는 아내로 발전하기 위해서 아들에서 아내로 발전하고 변신하기 위해서는 골고다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는 처녀들이 시집가는 것이 죽음이다. 여자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에야 그렇지 않다. 옛날에는 내 일생을 맡기는 것이다. 죽어도 너는 그 집 귀신이 되는 것이다. 그 집 귀신이 되러 가는 것이니까 그 집으로 죽으러 가는 것이다. 친정에서도 못 살고 오면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내쫓는다. 너는 그 집 귀신이니까 아무리 고통을 당하더라도 그 집에 가서 죽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집갈 때 울고 갔다. 요즘은 웃고 간다. 옛날에는 죽으러 가는 길이니까 울고 갔다. 친정이 늘 그립고 친정에 가고 싶어도 못 간다. 친정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다. 받아주지도 않고 못 오게 한다. 죽으러 가는 길이다. 그 집 귀신이 되기 위해 가는 길이다. 자기 이름은 없어져버리고 그 집 가문만 남는다. 이씨 집으로 시집가면 여자는 없어져버리고 이씨 집안만 남는다. 죽으러 가는 길이다. 안 갈 수만 있다면 안 가고 싶은데, 안 가면 이상한 귀신이 되어버리니까 가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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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서 아내로 가는 길에 그냥 가면 좋은데, 십자가가 딱 놓여있으니까 갈 것이냐 말 것이냐?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아들이 아내로 가는 길, 끌려서 죽음으로 가는 길, 그러니까 아들의 자리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친정집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나무와 가지를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겟세마네에서 골고다로, 골고다에서 겟세마네로 왔다갔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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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여기에 있다. 우리 교회에서 가끔 문제가 한 번씩 생긴다. 다른 교회에는 이런 문제가 없다. 우리 교회만 있는 문제다. 꼭 아들의 난이 생긴다. 묘한 일이다. 춘천 대란이라고 하기도 하고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아들이 너무 좋은데 아들에서 배필이 되려면 시집을 가야 된다. 시집을 가려면 내가 죽고 연합을 해야 된다. 좋든지 싫든지 간에 집을 지어야 되기 때문이다. 아들은 산에 심어진 나무라고 할 수 있다. 잘 자랄 수 있고 편하게 자랄 수 있고 시절을 쫓아 열매를 맺고 가을이 돌아오면 낙엽이 지고 봄이 돌아오면 다시 새싹이 난다. 가을에 낙엽이 지지 않으면 곤란하다. 그 잎들이 다 서리 맞아서 문드러진다. 그래서 미리 빨갛게 색깔이 물들어 낙엽이 되어 아름답게 떨어진다. 그러고 나면 서리가 오니까 잎들은 서리에 문들어지지 않고 그냥 낙엽으로 아름답게 뒹굴고 있는 것이다. 그냥 놔두어 서리를 맞으면 뜨거운 물에 데친 것처럼 돼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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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자라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낭만적이고 생명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고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 시절을 쫓아 비 올 때는 비가 와주고 햇빛이 올 때는 햇빛이 와주고 너무너무 좋다. 그런데 집을 지으려면 나무를 잘라야 된다. 재료는 분명히 그 재료를 써야 되는데 산에 놔두고는 쓸 수가 없다. 자유지대에 놔두고는 쓸 수가 없다. 너무 아까운 나무는 벨 수가 없다. 집을 지으려고 하는데 너무 아까워서 베지 못하면 영원히 건축에 못 들어온다. 할 수 없이 베어야 건축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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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마음을 아시지 않겠는가? 어쩔 수 없이 베야 된다. 겟세마네만 계속 있으면 하나님도 할 말이 없다. 골고다로 오니까 하나님이 할 말이 생겼다. 나는 지금 집을 지으려고 한다. 집을 지으려니까 할 수 없다. 너는 집 속에서 영원히 살라. 너는 영원히 집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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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남편과 아내는 연합체(한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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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경륜의 최종적인 목적지는 연합체이다. 새 예루살렘이다. 아들은 과정이다. 그 연합체가 이루어지기 위한 과정이다. 나무를 키우는 사연은 집을 짓기 위해서다. 옛날에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키운다는 말이 있다.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어 20년이 되면 재목이 된다. 그것을 베어서 농을 만들어서 보낸다. 요즘은 백화점에 가서 농을 사오면 되지만 그때는 농이 없는 때였다. 오동나무 농이 최고 좋은 농이다. 왜냐하면 벌레가 생기지 않고 가볍다. 오동나무를 심는 사연은 농을 만들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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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우리를 하나님 아들로 태어나게 한 것은 연합체가 되게 하기 위해서다.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해서다. 지금은 교회, 장래는 새 예루살렘이라는 연합된 한 인격체가 되게 하기 위해서 최종 목표점에 가게 하기 위해서 그는 먼저 십자가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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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아들은 죽음의 순종으로 남편이 되었음(연합의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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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죽음의 순종으로 남편이 되었다. 죽음의 순종으로 하나님께는 아내가 되었고, 우리에게는 남편이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는 남편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아내다. 죽음의 순종으로! 아들이시라도 받으실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라고 한다. 아들이면 끝인데 왜 십자가가 필요한가? 아내가 되기 위해서다. 아내가 되어야 남편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남편이 되는 것이다. 연합체의 생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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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아담은 깊이 잠들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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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되었는가? 아담은 하와의 남편이 되기 위해서 깊이 잠들었다. 거의 죽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갈빗대를 뺐다. 이세종 형제가 있지만 깊이 잠들게 하여 죽이려면 간단하다. 마취제로 거의 다 죽은 상태로 만들 수가 있다. 조금만 더하면 죽는다. 그러면 또 살려놓는다. 수술하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서 맥박도 체크하고 뭣도 체크하면서 죽을만하면 살려놓고 죽을만하면 살려놓는다. 이발관의 면도사만 무서운 것이 아니고, 병원의 마취의사는 더 무섭다. 생사가 달려있다.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에 갈빗대를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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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어떻게 깊이 잠들었는가? 십자가에서 깊이 잠들었다. 아주 잠들었다. 사흘 만에 깨어나도록 깊이 잠들었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 아내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해서. 거기서 예수와 하나님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그랬으니까 예수의 생명과 우리는 또 하나가 된 것이다. 이 원리는 똑같다. 대대로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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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예수는 죽음을 통해 포함의 세계를 열었음(죽음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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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죽음을 통해서 무엇을 만들어내었는가? 포함의 세계를 만들어내었다. 포함의 세계 안에 있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똑같다는 말이다. 죽음 공동체를 만들어놓았다. 죽음 안에 오면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다. 죽음 안에 포함된 인류! 이 사람이 부활 안에 포함된 인류가 된다. “죽으심을 본 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부활을 본 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5)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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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이제 아내를 얻은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세계에서 남편과 아내의 세계로 세계가 바꾸어진다. 여기서 빠져나가버리면 아들로 끝난다. 우리 교회에서 빠져나간 사람들이 지금 아들로 돌아다닌다. 아들로는 지금도 확실하다. 어떤 형제는 20여년만의 오랜만에 만났는데, ‘목사님이 내 아버지입니다. 그것은 변함이 없습니다.’고 한다. 왜 안 오냐고 했더니 자신이 더 해보려고 한다는 아들이 하나 있다. 분명히 아들이다. 신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사방에 돌아다니면서 설교도 한다. 또 한 사람은 동해안 쪽에서 아들로서 둥지를 틀어보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다. 계속 아들만 퍼뜨리고 다닌다. 정말 편하고 좋다. 그런데 집이 지어지지 않는다. 아직도 집을 지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말을 들어보면 아주 옳은 말만 한다. 왜? 아버지와 아들이니까 옳은 말 아니겠는가? 하나도 틀린 말이 없다. 도사 같기도 하고 아들 같기도 하고 아버지 같기도 하다. 또 한 사람은 아들에다가 다른 것을 많이 얻어 완전히 도사가 되었다. 정말 모든 것을 갖추어 놓았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 집이 안 된다. 그것도 아들이다. 분명히 빛을 보았다. 처음에 며칠 몇날을 울었다고 한다. 무엇이 들어가도 그것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아들은 분명히 아들이다. 나도 육신으로서가 아니라 영적으로 다 내 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배필은 안 된다. 시집은 안 온다. 잘 차려입고 다니는데 결혼을 하자고 하면 안 한다. 결혼만 하자고 하면 달아나버린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도 아들이다. 교회도 다니지 않고 도사 노릇하러 다니지도 않고 씨 뿌리러 다니지도 않는다. 직장 생활을 잘한다. 왜냐하면 여기 와서 인생사는 것을 배웠다. 여러분이 말씀만 잘 들어도 직장 생활을 잘 할 수 있다. 직장 생활이 어렵다거나 안 된다거나 들락날락하는 것은 말씀을 확실히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지엽적인 것만 들을지라도 직장 생활하는 것에 그렇게 어려움이 없다. 그 사람도 분명히 아들이다. 세상에서는 잘 사는데 그 아들도 역시 결혼하자고 하면 안 한다. 옛날에 결혼하기 전에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는데, 결혼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 그런가? 내가 하도 볼 모양이 없으니까. 아마 그 아들들도 아버지로서는 좋은데, 남편으로는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버지는 좀 가난해도 되고, 좀 못나도 되고 상관이 없다. 그런데 남편은 내세울만하고 그럴 듯해야 된다. 그러니까 결혼하기 싫어한다. 그래서 연합이 안 되고, 연합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다. 절대로 떠나지는 않는다. 나와 깊은 관계가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니까 깊은 관계이다. 지금도 그 생명을 갖고 살고 있다. 단지 연합만 되지 않는다. 어쩌면 여러분보다 더 확실하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내는 안 된다. 지난번에는 청주에 있는 어떤 형제가 전화가 왔는데 그 형제도 역시 아들이다. 그동안 자기가 좋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일부러 전화가 왔는데, 시집은 안 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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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경계선인 것 같다. 아들까지는 믿음으로 왔는데, 아내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 여기서 하나님의 경륜 안에 들어올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이 결정된다. 하나님은 참 이상한 분이다. 에베소서를 쓸 때 순서상으로 보면 아버지와 아들부터 말하고 그 다음에 남편과 아내를 말해야 될 것 같다. 그런데 아내와 남편을 먼저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아버지와 아들을 이야기한다.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 같으면 아버지와 아들이 먼저이고, 닭이 먼저 같으면 아내와 남편이 먼저일 텐데, 이 에베소서는 교회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아내와 남편부터 이야기한다. “아내들이여!”, 그 다음에 “자녀들이여!”라고 말한다. 이것은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이 앞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 경륜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아들은 과정이라는 것이다. 목표가 아니다. 생명은 생명인데,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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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났다는 사람도 많고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사람도 많고 천당은 확실히 간다는 사람도 많다. 많은데, 아내가 안 된다. 우리 동네 천주교에 다니는 어떤 할머니가 계시는데 특별히 조카와 싸우시고 동네사람들과 욕하고 싸운다. 지난 여름에 내가 옆에 앉아서 할머니에게 얼마나 사신다고 아웅다웅 싸우실 필요가 있겠느냐, 대강 사시라고 했더니 그 할머니 대답하시는 말씀이 걸작이다. ‘나는 천당에는 확실히 갑니다.’라고 한다. 캐톨릭에 입적해놓았다. 천당 시민으로 등록해놓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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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아버지와 아들은 많다. 그런데 남편과 아내가 없다. 남편과 아내 사이는 죽음이 필요하다. 아버지와 아들은 생명만 있으면 되지만 믿음만 있으면 되지만 남편과 아내는 죽음이 필요하다. 사랑하기 때문에 죽는 것이 필요하다. 사랑은 죽음 보다 강하다. 남편과 아내는 죽음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는 죽음이 필요하다. 경륜 밖에서는 죽음이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다 하셨다.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부모가 자식을 낳을 때 자식이 한 일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부모가 낳았다. 자기가 낳았으니까 키웠다. 부모가 다 한다. 아들은 아무 책임도 없고, 안 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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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내와 남편은 그것이 아니다. 이것은 죽음의 복종이 아니면 안 된다. 그래서 여기가 좀 어려운 모양이다. 사실은 우리 교회는 힘든 것이 없다. 내가 힘들게 뭘 하라고 한 것이 없다. 왜 아무것도 시키지 않느냐는 사람이 오히려 많다. 그런데 또 오래 있는 사람들 중에는 아무것도 시키는 것이 없어 좋다고 처음에는 생각했는데, 뒤로 가면 뭔가 짐이 생겨 어렵다고 한다. 어려울 것이 없는데, 뭔가가 어렵다고 생각하다가 아들의 소리가 들리면 귀가 번쩍 열리는 것이다. 나도 뭐가 어려운지 확실히 모른다. 하여간 어렵다고 하다가 보면 아들의 소리가 들린다.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이때라. 아들의 음성을 들으면 살아나리라. 생명보다 왕성한 것은 없다. 주암산 집회 때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다. 30~40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래서 초창기에 우리를 안 사람들은 생명파라고 했다. 지금도 그때 본 사람들은 우리를 생명파라고 생각한다. 왜? 생명, 생명 했으니까. 생명이면 다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으면 된다. 뭐가 더 필요한가? 그러니까 사람들이 생명파라고 했다. 어떤 교회는 새 생명 교회가 있다. 생명파 교회도 있다. 우리도 생명파 교회가 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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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기에 놔두지 않고 아내로 불렀다. 이것이 힘든 일이다. 아들로만 있으면 편하고 좋은데, 아내가 되려면 불편한 일이 생긴다. 왜냐하면 겟세마네까지는 그래도 내가 기도할 수 있다. 아버지여! 민망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좀 살려주십시오. 때가 이르렀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할 말이 있다. 그런데 골고다에 가면 아무 할 말도 없다. 진짜로 아무 할 말도 없다. 말해보았자 들어 줄 사람도 없다. 소리 질러보았자 알아 줄 사람도 없다.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거기는 가기가 싫다. 나 같으면 안 갈 것 같다. 예수님도 혼자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채찍으로 쫓으니까 할 수 없이 갔을 것이다. 총칼로 밀어내니까 할 수 없이 갔을 것이다. 예수님이 좋다고 하고 골고다로 가겠는가?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 얼마나 그것이 무서운 길인데, 죽음 앞에 서는 길인데 얼마나 무섭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배짱 큰 무사도 아니다. 무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평생 그렇게 살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일본 무사(사무라이)들은 배를 쫙 가르고 죽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사가 아니기 때문에 굉장히 두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 발로 가겠는가? 쫓아내니까 갔을 것이다. 끌고 가니까 할 수 없이 갔을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갔다. 힘이 없어 기운이 없어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넘어져서 떨어뜨려 옆에 있는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불러다가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게 했다고 한다. 힘이 없기 때문에도 넘어졌겠지만 정말로 기뻐서 가는 길이라면 밀고 가더라도 갔을 것이다. 여러분 같으면 로또복권이 몇 억이 당첨되었다면 들고 못가면 갈아 마시고라도 갈 것이다. 이것은 아주 인간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때 보니까 예수님은 아주 인간적이다. 그 전에는 인간적이지 않은 것 같다. 여기는 100% 인간적이므로 그렇게 생각해도 큰 잘못은 아니다. 굉장히 좋은 것이 앞에 있다면 남에게 지고 가라고 하겠는가? 아무리 힘이 없어도 나 같은 사람이라도 쌀 한 말도 들지 못하지만 한 가마니를 먹고 가더라도 곧 배가 터져 죽더라도 갈 것이다. 그것이 안 되니까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치고 모든 것이 다 절망이고 끝이니까 결국 십자가를 떨어뜨리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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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아내는 연합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바로 연합체에 있다. 여기서 완성되니까 아들이 아닌 연합체로서 우리는 최종 완성을 향해서 가야 된다. 아들로 머무르면 물고기 새끼처럼 된다. 왕성하게 바다를 헤매고 다닌다. 연어는 동해안부터 북대서양까지 갔다 온다. 얼마나 먼 거리인가? 그 거리를 왔다갔다 한다. 왔다갔다 하지만 연합체가 안 된다. 우리도 잘못하면 왕성한 생명을 가지고 살 수가 있다. 세상을 이기고 살 수가 있다. 아들이라는 것만 확실히 잡으면 누구라도 감당하고 무엇이라도 감당하고 살 수가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것만 흔들리지 않으면 정말 초인적인 삶을 살 수가 있다.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 다 그런 사람들이다. 믿음으로 성공한 사람, 믿음으로 역사를 바꾼 사람들이 다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기독교 역사에서 믿음으로 세상을 바꾼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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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내가 안 되면 물고기 수준이다. 새끼를 까놓았으니까 그냥 사는 것이다. 금붕어로 태어났으니까 금붕어로 사는 것밖에 없다. 처음에 나도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다. 금붕어로 태어나서 금붕어로 살면 되는 것이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마지막을 보니까 연합체가 나타난다. 이 연합체 안에서 죽음이 필요하다. 아담은 깊이 잠들었고, 예수는 깊이 죽었다. 거기서 우리는 죽음 안에 포함되고 삶 안에 포함된 사람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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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 받았으나 그것을 지키고 확장하여 땅을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끌고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여 부활에 이르렀음(배필을 얻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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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 받는다. 금붕어는 금붕어 어미의 모든 것을 상속 받는다. 생명으로 상속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을 지키고 확장해서 땅에 충만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죽음의 관문으로 이끌고 가야 된다. 그래야 연합이 된다. 아들로는 연합이 안 된다. 아내로서만 연합이 되지 아들로서는 연합이 안 된다. 큰 다음에는 아들도 마지막에 어려움이 오면 다 도망가 버린다. 누구만 남는가? 아내만 남는다. 남편과 아내만 남는다. 아들도 크면 자기대로 살 수 있다. 부모 없어도 잘산다. 어렸을 때는 절대적으로 부모가 필요하지만 크면 클수록 부모 없이도 잘산다. 그러니까 자식은 부모를 떠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육체가 될지니라.” 원칙이 그렇다. 나는 화평이에게 너는 이제부터 아버지를 떠나 문선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고 했다. 아버지 때문에 만일 문선이와 연합하는 것이 방해가 되면 안 된다. 시어머니 때문에 엄마 때문에 할 수 없이 이혼한 아들들은 정말 비극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육체가 될지니라.”는 것을 몰라서다. 아들은 떠나게 되어있다. 아들만 키워놓으면 장가 가느라고 다른 곳으로 다 떠나버린다. 아버지만 남는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정말 지혜로우신 분이다. 아들만 놔두면 다 뿔뿔이 헤어져버리니까 그래서 남편이 되신 것 같다. 시집을 오게 해야 올가미에 끼어서 꼼짝을 못하는 것이다. 운명이 거기에 있으니까 가지도 못한다. 고스톱을 쳐도 두 사람이 한 패다. 화투를 쳐도 누가 따겠는가? 아내가 따도 마찬가지고 남편이 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아들과는 다르다. 아들과 아버지가 고스톱을 치면 아들 것은 아들 것이고, 아버지 것은 아버지 것이다. 살림살이가 다르다. 아들도 성장하여 장가를 가면 자신의 가정을 이룬다. 처자식이 있으면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된다. 지금 집에 밥거리가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아버지와 고스톱을 쳐서 땄다면 주겠는가? 안 준다. 자기 집 식구가 더 중요하다. 그러니까 아들에게 너무 기대하면 안 된다. 자기 마누라와 자식이 굶게 생겼는데 아버지에게 돈 주고 가겠는가? 안 된다. 여유가 있어야 주지 안 준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육체가 될지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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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떠나게 되어있다. 지금 떠나 있는 아들들은 똑똑한 아들들이다. 보통 아들들이 아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겠지만 그 사람들은 똑똑한 사람들이다. 여러분은 말로 당하지 못한다. 자기들 안에 그만한 충만도 있다. 그런데 너무 똑똑하다 보니 나가 버린다. 자기 집을 지으려고 나가 버린다. 마누라로 끌려 온 사람은 어쩔 수가 없다. 우리 집사람도 나에게 끌려와서 어쩔 수가 없다. 처음에는 속상한 것도 많고 복잡한 것도 많고 자기 개념에 없는 것도 많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살아야 된다. 아내가 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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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된 것은 그런 것이다. 그런 것이 싫은 것이다. 아들이 더 좋다. 아들은 나가서 창업도 할 수 있다. 아들은 나가도 뭐도 할 수 있고, 다 할 수 있다. 내가 내 가정을 이룰 수 있다. 내 살림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내는 내 살림을 할 수 없다. 자기 주머니를 따로 찰 수도 없다. 어쩔 수가 없는 것이 아내다. 죽으나 사나 같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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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받지만 그것이 아내와 남편이 없다고 생각하면 이 세상이 없어지고 만다. 아내와 남편이 있으니까 이 세상이 존속하고 있다. 땅을 충만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려면 아내와 남편이 되어야 된다. 하나님은 그 길을 예비해놓았다. 기독교가 지금까지 이 길이 없어서 교회가 안 되고 사분오열되고 다 갈라지는 것이다. 다 잘나면 다 갈라져버린다. 뭔가 이론적으로든지 생명으로든지 잘나면 갈라져버린다. 아내에 대한 계시가 없기 때문에 기독교가 이 모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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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복종으로써 자격을 얻게 된다. 아내는 복종으로 자격이 얻어진다. 복종해야 아내가 된다. 자격을 얻기 위해서 복종해야 된다. 적을 정복하기 위해서 복종해야 된다. 우리가 지키기 위해서는 자격이 필요하다. 아들의 명분은 지키는데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유전을 위해 필요하다. 그런데 지키려면 자격이 필요하다. 운전면허를 따는 것은 자격시험이다. 그런데 그것만 따서는 운전을 잘 못한다. 운전을 잘하는 것은 자격이고 면허다. 면허는 받아도 운전을 못할 수도 있다. 위험을 무릎 쓰고 길에 나와 생명을 걸고 운전 연습을 해야 된다. 운전을 잘하는 분들은 지금은 그런 생각을 잊어버렸겠지만 사실은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이다. 누가 받으면 죽는다. 아침에 안녕하고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생명을 걸고 가는 것이다. 지키기 위해서는 자격을 얻어야 된다.
c. 예수는 배필(하나님의 배필)을 얻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육체가 되심) 십자가에 죽임 당하셨고(포함의 주가 되심) 부활하여 승천하시고(새 생명의 주가 되심) 생명주는 영이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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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배필을 얻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이 왜 오셨는가? 우리에게 영생을 얻기 위해서 왔다. 어떤 사람은 천당에 보내주기 위해서 왔다고 한다. 그의 영원한 목적은 무엇인가? 배필을 얻기 위해서 왔다. 왜 십자가에서 죽었는가? 배필을 얻기 위해서 죽었다. 아담이 잠든 것처럼 예수는 십자가에서 잠들어서 배필을 얻었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심으로서 포함의 주가 되었다. 부활하여 승천하심으로서 생명주는 영이 되었다. 최종적으로 결국 우리의 남편이 된 것이다. 그는 먼저 하나님에게 아내가 되었다. 처음에는 독생자였다. 아들이었다. 다음에는 아내가 되고, 그래서 우리에게는 남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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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배필은 복종함으로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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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필은 복종함으로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할 수 있다. 죽음을 거쳐 남편이 되신 그리스도께 우리가 복종한다는 말은 우리는 그와 동일시되어야 되기 때문에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분의 죽음 안에서 동일시되어야 된다. 이것은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유쾌한 일이 아니다. 내가 끝나는 일이다. 그렇지만 배필이 되어야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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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필 안에 있는 영광! 배필로서의 영광! 이것이 새 예루살렘의 영광이다. 하늘로부터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데, 신부가 신랑을 위해 단장한 것과 같더라. 아름답다는 말이다. 지난 수요일 저녁에 아름다운 소리가 있었다. 우리 교회에 아내와 남편이 많은데 그렇게 아름다운 아내와 남편이 없었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윤일이가 나와서 환수를 또박또박 증거하는데 아름다운 신부였다. 나도 감정이 둔한 사람인데 정말 아름다웠다. 그렇게 아름다워져야 된다. 똑똑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워져야 된다. 능력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 중요하다. 왜? 우리는 신부의 위치니까. 완전히 남편에게 흡수되어서 남편을 보는 것이 즐거운, 남편을 증거하는데 행복한 그런 아내가 되더라. 윤일 자매는 연약한 여자다. 특별한 능력도 없고 요즘은 살이 쪄서 볼만하지만 처음에 왔을 때는 빼빼하고 얼굴도 시커맸는데 지금은 굉장히 예뻐졌다. 왜 그렇게 예뻐졌는가 했더니 속이 아름다워져서 예뻐진 것이다. 아주 아름다운 밤이었다. 우리는 그것이 필요하다. 내가 주님을 증거할 때 그렇게 증거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주님을 말할 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주님을 그렇게 즐거워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보니까 뜨끔했다. 대단하다. 신랑이 모든 것을 걸고 주님을 따라 간다. 오로지 주님 밖에 없다. 그것이 아내에게는 처음에는 많이 불편했다. 나에게 와서 불평도 많이 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아무것도 손에 쥔 것이 없는 생활이다. 통장에 뭔가가 있어 내가 계산해서 쓰고 싶은데 아무것도 없는 생활이다. 남편은 매일 괜찮다고 하고 잘된다고 하는 사람이다. 지금 그것이 다 알아져서 아름다운 간증을 했다. 남편에 대한 하나의 증거였다. 우리 남편이 이런 남편이라고 자랑하는데 입이 딱 벌어졌다. 부러웠다. 완전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형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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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를 배필로 부르시고 있다. 아들을 아들로 만들어서 배필로 쓰려고. 나무를 키워서 재목으로 쓰려고. 꼭 같은 이치다. 하와는 분명히 이 우주 안에서 하나님 경륜의 중심이지만 그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복종이 있어야 된다. 그래야 그 중심이 된다. 새 예루살렘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아들들의 나라가 아니라 신부의 나라다. 요한복음 17장은 아들의 세계다. 그러나 계시록 21장 22장은 신부의 세계다. 성경 맨 처음에도 신부이고, 맨 마지막에도 신부이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그것은 뭔지 모르지만 성경 안에 보면 맨 처음에도 아내와 남편, 맨 마지막에도 남편과 아내다. 하나님의 경륜의 선이 남편과 아내에서 남편과 아내로 이어진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육신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육신적으로 다 그렇게 못하니까 기죽지 마시고 기죽을 일도 아니다. 바울이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를 말한다고 했다. 이것은 용환수라는 신랑과 윤일이라는 아내를 말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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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가 아들 수준에서, 아들로 태어나야 되지만, 아들 수준에서 아내로 가야 된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아내로 부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아내를 구하러 온 신랑이다. 만일 우리가 아들에서 계속 머물러버리면 북치고 장구치고 좋다고 아들에서 머물러버리면 신랑은 아무것도 아니다. 드라마를 보니까 천신만고 끝에 임신을 했다고 속여서까지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식장에서 신랑 입장하여 들어갔는데 신부가 드레스까지 입고 있다가 그만 줄행랑을 쳐서 도망쳤다. 왜? 두렵다는 것이다. 시집가는 것이 너무 두려워서 도망쳐버렸다. 그래서 파혼이 되었는데 그 신부가 그 신랑에게 와서 또 찝쩍거린다. 그 전에도 그 신부가 신랑에게 찝쩍거려서 결혼하게끔 된 것이다. 신랑은 처음에는 별 마음이 없었는데 워낙 적극적으로 나오니까 결혼하게 되었는데, 결혼식장에서 줄행랑을 치니까 신랑은 완전히 정이 떨어져서 또 무슨 수작을 하느냐고 하는데도 도망간 신부는 쫓아오는 것이다. 이 신부 마음을 생각해보니까 결혼을 하자니 두렵고, 안 하자니 외로운 모양이다. 여자들은 이런 경험을 해보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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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 안에만 있는 특수한 문제이다. 우리의 성장통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까닭 없이 아프다. 병원에 가면 아무 이상이 없다는데 열도 나고 아픈 경우가 있다. 그렇게 하고 아이가 큰다. 우리 교회도 늘 그렇게 해서 발전하는 것 같다. 그때는 젊을 때니까 춘천에 가서는 내가 새벽 4시까지 이야기했다. 지금은 혈압도 높고 저녁이면 도저히 이야기를 못하겠다. 오늘말로 끝내고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새벽 4시까지 이야기할 힘이 없으니 잘 새겨들어서 자기와 잘 비교하여 내가 지금 어디에 와있는가를 보기를 바란다. 시집가기가 두렵고 시집가기가 싫은 분들도 계실 것이다. 다들 시집가겠다고 나섰으면 진즉 문제가 크게 벌어졌을 것이다. 시집가겠다고 다 나서지를 못하니까 아직도 이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있다. 친정이 너무 좋다. 친정이 너무 좋은 사람은 시집을 못 간다. 친정이 괴로워야 빨리 시집을 간다. 친정에 들어가기 싫은 사람은 어지간한 신랑만 만나면 쫓아가는 것이다. 만판 좋고 만사 OK인데 신랑 집을 보니까 자기 집만 못하고 시집 갈만한 데가 없을 수가 있다. 우리 집은 수세식인데 그 집은 재래식인데 재래식 변소를 어떻게 가겠느냐고 생각하면 결혼하기 어렵다. 며느리는 가난한 집에서 데려오라는 말이 있다. 가난한 집에서 오면 감사하고 좋고 신기하다. 그런데 부잣집 딸을 데리고 오면 아무리 잘해주어도 안 된다. 왜냐하면 자기 집에서 너무 좋았으니까 가난한 집에서 잘해주어 보았자 얼마나 잘해주겠는가? 피차가 힘들다. 시집 온 사람도 힘들고 시부모도 힘들다. 아예 며느리는 가난한 집에서 데리고 오면 좋으니까 감지덕지할 것이다. 자기 집은 재래식 변소였는데 수세식 변소이니까 팔자가 만판 늘어졌다. 친정집에 연연하면 시집을 못 간다. 친정집이 너무 가까우면 이혼하기 쉽다. 옛날 속담에 친정과 측간(변소)은 멀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왜 그런가? 측간은 멀리 있어야 냄새가 안 나고 파리가 많이 안 올 것이다. 멀리 있어야 가는 길에 배가 움직여서 대변이 잘 나올 것이다. 측간은 멀수록 좋고, 친정도 멀수록 좋다. 시집가서 친정에 자주 들락거리는 사람은 이혼하기가 쉽다. 왜냐하면 작은 불평을 하면 친정어머니, 동생들이 다 입방아를 한 번씩 찍어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면 집에 돌아가면 시집 잘못왔다는 생각이 든다. 친정 가까이 늘 다가가는 사람은 이혼하기가 쉽다. 요즘은 그렇지 않겠지만 옛날에는 그랬다. 그리고 언니가 이혼하면 밑에 동생이 이혼한다. 세 자매가 줄줄이 이혼한 경우를 보았다. 그것은 가정에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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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친정에서 나서 친정에서 자라서 너무너무 좋은 곳이지만 친정을 너무 아끼고 좋아하면 안 된다. 빨리 시집을 가는 것이 장땡이다. 빨리 시집갈 수 있는 형편이 되면 참 좋다. 친정을 빨리 떠날 수 있는 형편이 되면 더 좋다. 그러면 시집살이를 잘할 수 있다. 친정이 너무 좋으면 오래 걸린다. 나도 내 살던 곳이 좋았으면 그렇게 편지 석 줄을 보고 가겠는가? 궁지에 몰려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니까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들리니까 갔다. 분명히 그때 나는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갔기 때문에 한 번도 고민도 해본 적이 없고 어려워본 적도 없고 후회해 본 적도 없다. 40년 만에 고향에 다시 가서 보니까 그때 나를 하나님이 끄집어 낸 것은 독수리 날개로 확 집어다가 공수해 간 것이구나.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내가 나올 수 없는 곳이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곳이었다.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이 도저히 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 그 백성을 인도한 여호와는 독수리 날개로 인도해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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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된다고 해서 아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들은 여전히 아들이다. 생명이다. 피조물이 없어지는가?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다고 해서 피조물이 아닌가? 그리스도 신부인데 피조물 신부이다. 그리스도 안에 아들 안이다. 없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세상과 다르다. 이것이 피조물이 기초가 되어 아들로 성장하여 아내가 되는 것이다. 신기한 비밀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말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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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목적지가 어디인가를 확실히 알면 내가 과정을 어떻게 지날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목적지가 거기니까 나는 이것이 과정이구나. 지나가는 길이구나. 최종 목적지에 가서 결판을 내야 되는 것이다.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새 예루살렘, 신부에서 더 이상 갈 데는 없다. 성경이 더 이상은 없다. 거기 가서는 내가 목숨을 걸어야 된다. 끝나는 데니까. 완성되는 데니까. 그러나 과정은 지나가야 된다. 우리 교회도 이 과정을 지나가서 목적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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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아들의 과정 안에 가고 있다. 피조물의 과정을 지나서 아들의 과정을 가고 있다. 그렇다고 피조물이 없어진 것이 아니고 여전히 피조물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였지만 여전히 피조물이다. 부활하셔서 생명주는 영이 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독생자다. 변한 것이 아니다. 없어진 것이 아니다. 그 위에 된 것이다. 항상 피조물은 밑에 깔려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난리칠 정도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뚜껑을 열어보니까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한다. 요즘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피조물이라고 하면 큰일난다.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왜 피조물이냐?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인데 피조물이다. 피조물인 하나님이다. 창조자인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인 하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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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창조자 앞에 가니까 피조물이 드러난다. 아버지 앞에 가면 아들이 드러날 것이고, 창조자 앞에 가면 피조물이 드러날 것이고, 남편 앞에 가면 아내로 드러나야 된다. 그런데 남편 앞에 가서도 아내로 드러나지 않으면 남편 앞에 갔는데도 드레스까지 다 입고 도망치면 안 된다. 오죽 두려웠으면 드레스까지 다 입고 도망을 쳤겠는가? 그 심정은 이해하지만 매번 반복할 것이다. 간신히 새벽 기도하여 또 결혼하게 되어도 막상 나서려고 하면 또 두렵다. 그러면 또 도망칠 것이다.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기가 참 쉽다. 이것은 육신적으로는 그런 사람이 별로 없겠지만 영적으로는 그런 사람이 많다. 아들에서 아내로! 아내에서 아들로! 아들에서 아내로! 아내에서 아들로! 아들, 아내, 아들, 아내... 계속 그러다 보면 세월이 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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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를 아내로 부르고 있다. 아내들이여 남편들에게 복종하라. 이 말을 깊이 인식하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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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진토에서 이끌어내신 하나님! 우리에게 아들의 명분을 허락해 주시고 아들로서 아버지를 대하도록 친근하게 우리를 양육해주시고 우리를 길러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고 우리를 당신의 배필이 되게 하기 위해서 예수 안에서 우리를 십자가로 부르신 것을 또한 감사합니다. 우리가 쓸모없는 인생으로 그렇게 우리가 버려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 당신이 우리를 배필로 사용하셔서 당신과 하나가 되는 한 연합체가 되도록 단체적인 연합체가 되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께서 역사해주셔서 우리 교회 안에서 아들이 모두 아내가 되게 해주시고 아들은 더 좋은 아내가 되게 해주시고 더 좋은 아들은 더 좋은 아내가 되게 해주셔서 아름다움을 세상이 보이도록 우리가 하나인 것을 보이도록 한 실체인 것을 보이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우리 안에서 한 영이 역사하셔서 하나되게 하시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 안에서 우리가 하나로 드러날 수 있게 되기를 원하옵니다. 세상이 모두 다 바벨론으로 갈지라도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원하고 세상이 모두 다 그 높은 자리를 앙망하고 갈지라도 우리는 십자가로 가기를 원하고 당신이 우리에게 그려주신 이 그림대로 당신이 부르신 곳을 향해서 우리가 가는 사람들이 되게 해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