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04-01
이스라엘
지구에 있는 각 종족들은 속성들이 다르다.
사실 지구 자기장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자기장이 강한 곳은 붙어있기 때문에 변화를 잘 안 한다. 지구 자기장 강한 곳에서 변화를 힘들어한다. 예를 들면 중앙 아시아 같은 곳은 잘 안 바뀐다. 사실 그래서 선교가 힘들다. 이슬람 문화 잘 안 바뀐다. 이런 곳은 선두주자의 부르심은 아니다.
지구 자기장이 약한 곳에는 변화를 잘 받아 들인다. 우리 나라는 자기장이 약한 곳이다. 우리나라는 잘 바뀌고 쉽게 바뀐다. 오히려 안 바뀌면 힘들어 한다.
둘 다 장단점이 있고 이것에는 부르심이 있다. 유 패러다임은 이런 민족이 쓰임 받는다. 한민족, 우리나라는 선두주자의 부르심이 있다.
한 민족 가운데도 다르다. 한 곳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 아파트 5층 이상에서 살며 자주 이사하는 사람들. 지자기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사람들이 선두주자의 부르심이 있을 수 있다.
지금 주님이 자기장 전체를 손 보고 있는다. 마지막 때는 다 주님의 새 일 가운데 들어간다. 이제 변화가 급격해 지고 있다. 그래서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다. 영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은 같이 간다.
절기와 말씀
현재 고난주간, 무교절 기간이다.
성서력으로는 Nisan월(아빕월) 14일 저녁부터 15일 저녁까지가 유월절. 음력이므로 매해 변하는데 올해는 3월 29일이다.
7일 동안 무교절. 무교병 먹는 주간이다. 무교병을 히브리어로 “마짜”라고 한다. 무교병은 히브리어로 “레헴 오니 !j,l ynI[”이다. ‘고난의 떡’이다. 이것을 7일간 먹는다. 유교병은 맛있는데 무교병은 딱딱해서 주식으로 하기는 힘들다.
(신 16:3) 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함께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전세계적으로 절기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Messianic Jewish들이 Teacher로 오고 있다. 이런 일들은 이미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로 예언되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고 전세계적으로 강력한 Teacher들이 될 것이다. 성경 교사의 매우 중요한 그룹이 Messianic Jewish들이다. 성경은 유대인들에게 배워야 진수를 배울 수 있다. 성경은 히브리어로 되어 있고 유대적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쓰여져 있다. 이런 것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배울 수 없다.
한국에 많이 알려진 분으로는 ‘키스 인트레이터’ 목사님 ‘매튜’ 목사님 등이 있다. 특히 ‘매튜’목사님은 유대인 랍비 출신의 개신교 목사. 성경을 푸는 것이 다르다. 특히 절기에 대해서
마지막 때는 말씀. 특히 “토라”의 부활로 이끄실 것이다. 부활이라는 것은 영원히 서게 하는 어떤 힘이다. 토라의 부활이라는 것은 “토라”가 영원히 서는 횃불로 등장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메시아닉 유대인들이 크게 쓰임 받는다. 이들이 토라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고 사랑한다. 토라를 부활시키는데 핵심적인 그룹이 메시아닉 유대인과 메시아닉 이방인들이다. 메시아닉 이방인들이란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이스라엘을 축복함으로 하나님께 축복받는 이스라엘과 모든 기업을 다 같이 하는 원래 하나님의 계획대로 모든 유산을 받는 이방인들이다.
기독교의 역사적 배경
크리스천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다. 그리스도는 인격이 아니라 직책이다. 히브리어로 메시아. 기름부음 받은 자. 메 시야의 기름 부으심을 받고 그에 따라서 메시아의 사역을 위임 받은 자들을 크리스천이라고 한다. 유대인 중에서 메시아 사역을 위임 받은 사람들, 이방인 중에서 메시아 사역을 위임 받은 사람들. 그래서 원래 크리스천은 메시아닉 유대인과 메시아닉 이방인으로 나뉘어진다.
AD 4c 교회사에 가장 중요한 인물인 ‘콘스탄티누스’가 AD 313년에 등장한다. 이 전에는 교회에 큰 환난과 핍박이 있었다. 교회를 죽이려고 할 때였고 가장 크게 교회가 번져가던 때이기도 했다. 중요한 전쟁 중에 태양신에게 기도하던 중 십자가 환상을 보게 되면서 태양신과 기독교를 혼동한다. AD 313년 왕이 되면서 종교를 통일하려고 한다. 종교는 제국의 통일에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공인했지만 제국을 통일하기 위함이었다. 이 때부터 모든 이교도적인 것들이 다 들어온다. 제국을 통일시켜야 하기 때문에 자기 제국만의 독특한 로마의 기독교를 만든다.
그런데 로마인이 가장 경멸했던 것이 유대인이었다. 왜냐면 로마의 전쟁 중 가장 로마를 수치스럽게 한 것이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AD 70년에 로마의 타이토스(디도)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시리아에서부터 150만 명을 학살하며 예루살렘에 진격한다. 그리고 3년 만에 완전히 정벌한다. 그리고 로마로 개선했지만 역사가들이 가장 치욕스러운 전쟁으로 꼽는다. 개미 잡는데 군대가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너무 작은 나라를 이겨서 사실상 패배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후에도 이스라엘은 반란을 일으킨다. 로마에게 이스라엘은 눈에 가시. 반란의 민족이다. 이스라엘은 토라를 빼앗기면 반란을 일으킨다. 토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엄청난 힘을 낸다.
콘스탄티누스에게 기독교의 핵심은 유대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을 니케아, 칼데아 종교 회의에서 정한다. ‘유대적인 것을 교회에서 행하지 말아라.’라는 명령이 나왔다.
이 전까지는 교회가 안식일을 지켰다. 예수님도, 예수님 주변의 여자들도, 제자들(사도들)도 다 지켰다. 사도바울은 절기를 잘 지켰다. 안식일마다 회당에 가고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간 기록이 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안식일을 지키고 주일날 예배를 드렸다. 주일은 부활하신 첫째 날. 예배를 드리면서 복음이 전파되었다. 공식적으로 주일 예배가 없었을 수도 있다. 첫째 날이 기름 부으심이 강한 날이다. 일주일의 첫날. 주일은 쉬는 날이 아니다. 주일은 부활의 능력으로 하루 종일 예배 드리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선교하는 날이다.
안식일이 주일로 대치되었다는 오해가 있다.
‘안식 영성’ ‘미르마든’ ‘아브라함 허셀’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안식 속에 있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일요일은 쉬고 싶어한다. 주일 봉사하기 싫어한다.
예배는 사실 6일 내내 드리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유대적인 것들 금지하면서 안식일이 금지되고 Sunday로 대치된다. 주일이 태양일로 바뀌면서 태양신 숭배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렇게 안식일이 없어지고 그리고 절기가 없어진다. 절기가 유대적이지 않은 것들로 바뀐다. 유월절이 고난주간으로 대치된다. 성경에는 고난주간이라는 말이 없다.
암흑시대인 중세시대
이런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카톨릭은 교회를 믿으라고 한다. 카톨릭은 ‘대동’ ‘큰 하나’라는 뜻이다. 사도신경에서 ‘교회를 믿사오며’ 카톨릭 입장에서는 카톨릭 교회는 하나다. 우리는 이단이다. 교회 밖에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없는 것을 도입하면서 교회를 믿으라고 한다. 고난주간은 교회에서 지키라고 하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대로 말씀에 따라서 지켜야 한다.
이와 같은 일이 북 이스라엘에서 있었다. 여로보암 시대에 사람들이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남유다로 가는 것을 위험시 여겨 절기를 다 바꾼다. 7월 15일을 8월 15일로 바꾸고 그리고 장소를 예루살렘에서 벧엘로 바꾸고 제사장도 마음대로 임명한다. 이것이 북 이스라엘 멸망의 가장 핵심적인 이유이다. 이 일로 하나님의 대단한 진노를 산다.
(왕상 12:25)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왕상 12:26) 그의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왕상 12:27)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왕상 12: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왕상 12: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왕상 12: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경배함이더라
(왕상 12:31) 그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왕상 12:32) 여덟째 달 곧 그 달 열다섯째 날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제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가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가 지은 산당의 제사장을 벧엘에서 세웠더라
(왕상 12:33) 그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여덟째 달 열다섯째 날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제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왕상 13:1) 보라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제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왕상 13:2)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왕상 13:3) 그 날에 그가 징조를 들어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징조라 제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왕상 13:4)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제단에서 손을 펴며 그를 잡으라 하더라 그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왕상 13:5)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징조대로 제단이 갈라지며 재가 제단에서 쏟아진지라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 유월절을 못 지키게 하고 Nissan월 보름달이 뜬(15일) 후 다가오는 첫날을 부활절이라고 한다. 원래 부활절은 유월절의 3일 후이다.
유대적 절기를 자르고 나니 교회법이 최고가 된다. 교회의 말을 믿게 된다. 성경에 있기 때문에 이 때 이후 교회가 가장 중심을 둔 것이 AD 8c까지 유대의 안식일, 절기 없애기 위해 애썼다. 그만큼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암흑시대가 도래한다. 말씀이 다 가리워 진다. 말씀을 못 읽게 하므로 교회가 이야기하는 대로 따라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진행된다. 중세의 암흑시대 AD 4c부터 1500년간 지속된다.
이 시기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접붙여졌던 이방 교회가 이 시대에 완전히 말라 비틀어지게 된다. 성경은 물론, 성경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뜻, 계획이 다 안 보이게 된다. 유대적 뿌리를 자르니 성경 해석의 방법이 없어졌다. 그리고 다시 오실 메시아를 교황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메시아가 다스리는 천년왕국은 교황이 다스리는 왕국이 되었다. 교황은 메시아가 된다. 천년왕국이 완벽하므로 교황이 다스리는 나라가 완벽하면서 모든 세상 모든 왕들은 교황 앞에 엎드려야 한다. 지금도 정치 종교 모든 권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17, 18c 종교 개혁자들은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확신했다. 그래서 화형 당하면서도 장렬히 죽었다. 교황은 오류가 없다라고 하는 ‘교황 무오 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적그리스도는 카톨릭 중에서 나올 것이라는 설이 있다.
교황이 다스리는 지금이 천년왕국이다. 그래서 천년왕국은 없다. 이것이 ‘무천년설’의 백그라운드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필요를 못 느낀다. 초대교회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갈망으로 기다렸다. 주님이 와야 주님의 왕국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필요 없다고 느낀다. 오시면 심판하실 것 외에는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결혼하는 것.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상황 때문에 주님 다시 오심을 별로 갈망하지 않는다. 나의 필요 때문에 주님의 다시 오심, 천년왕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 공부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정통이라고 생각한다. 역사가 지워지면 미혹 당하기 쉽다. 역사가 없을 때 알고 있는 것으로 큰 소리치기 쉽다. 역사라는 것이 핵심적이다.
이러한 과정으로 이스라엘이 잘려지게 된다. 그러면서 다 말라 비틀어지게 된다. 중세에 많은 글들이 나왔지만 계몽주의, 합리주의가 이런 사상이 나온다. 기름 부음이 없어지고 망가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대체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없다. 유대인들만이 어떤 사상에도 어떤 흩어짐에도 유지되고 있다.
오직 말씀으로
종교개혁을 통해 “오직 말씀으로(Sola Scripture)”가 회복된다. 우리의 뿌리이다. 우리의 뿌리는 ‘오직 말씀으로’이다. 그런데 이것이 매우 힘들다. 워낙 왜곡되어졌기 때문에. 아직도 성령님은 이 작업을 하고 계신다. 삶은 말씀에서 나온다. 아직도 우리 속에 이교도적인 것들이 너무나 많다. 카톨릭의 영향력에 삶이 통째로 들어가 있어서 나오기가 쉽지 않다.
‘칭의’ 하나 다루는 것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절기의 문제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침례, 세례 문제에도 많이 죽었다. 유아세례 문제. 유아세례는 성경에 없다. 침례는 자기의 의지로 하는 것이다. 천년왕국의 개념에는 정치와 종교가 통합된다. 신정통치. 교회인 즉 백성이고 백성인 즉 교인이다. 정치 권력 종교 권력 다 가지려면 백성이면서 교인이 아닌 것이 있을 수 없다. 교황에게는 태어나는 즉시 백성이 되어야 하고 교인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유아세례가 생긴 것이다. 태어나면서 교인이 되고 백성이 된다. 유아세례가 틀리면 교황이 틀렸다가 된다. 교황의 신적 권위에 대항하는 것이 된다.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파가 재침례파(Anabaptists)이다. 이들도 많이 죽었다. 침례를 좋아한다는 명목으로 무거운 돌을 매달고 물 속에 들어가야 했다. 그렇게 죽인 이유는 ‘교황 무오 설’, 교황이 다스리는 나라가 천년왕국이 아니라는 결론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침례를 지켜냈다.
사단은 침례를 싫어한다. 오늘날도 이슬람 권에서 기독교인이 침례 받으면 죽인다. 침례는 자기 의지로 십자가에 들어가는 것이고 사단의 왕국에서 나오는 것이 때문이다.
침례 하나만으로도 정말 많은 사람이 죽고 오래 걸렸다. ‘오직 말씀으로’ 돌아가는데 많은 코스트가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강력하고 체계적이고 시스템적으로 이교도적인 것들이 들어왔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대가 없이 얻은 것이 절대 아니다.
‘오직 말씀으로’ 그들의 헌신과 수고를 이어 받아서 계속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토라”이 부활되어야 한다. 오직 “토라”에 따라 사는 자들로 바뀌어야 한다.
믿음의 선배들도 계시가 완전했던 것은 아니다. 이 때도 절기를 다루는 문제는 어려웠다. ‘칭의’를 다룬 루터도 처음에는 유대인을 축복했지만 나중에는 유대인들을 저주했다. 그러나 자기의 부르심을 철저히 수행해 나갔다. ‘오직 말씀으로’ 그 터 위에 우리가 세워진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오직 말씀으로 돌아왔고 성령이 회복되었다.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
성령에 대해서는 유대적 백그라운드가 없으면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 성경에 대해서는 혼란이 있다. 하나님이 계속 유대인들에게 다뤘던 것이 이방 신과 이방종교이다. 모든 이방종교에는 어떤 영적 힘이 있다. 이스라엘은 영적인 것을 구분하는데 프로가 되었다. 영이신 하나님만을 지키고 섬기는데 프로이다. 이스라엘 자르면 영적인 것을 구분하는 능력이 사라진다. 유대적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었을 때는 어떤 영적인 것들이 들어오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잘려진 이후에 이교세력 다 들어오고 구분하기 힘들게 되었다.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우리는 이스라엘에게 접붙여졌기 때문에 우리도 이스라엘이다. 대체신학의 문제는 이스라엘을 잘랐다는 것에 있다. 이 말씀은 1차적으로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지으셨다. 특별히 이스라엘을 지은 이유, 야곱이라고 하면서 이스라엘을 지으신 것에는 이유가 있다. 이스라엘을 ‘나라’이다. ‘나라’를 하나님께서 지으셨다. 개인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지은 ‘나라’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의 핵심은 이 ‘나라’는 하나님을 알아 본다. 하나님은 나라를 통해서 알게 된다. 하나님은 왕이시기 때문에 나라가 있어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조물주다 이런 것은 나라가 없어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왕이라는 것은 나라가 있을 때만이 알 수 있다.
우리에게는 조물주로서가 강하게 어필한다. 바라는 것이 있을 때 간절히 나아가는 것. 조물주로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을 왕으로 섬기는 것에는 무지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조물주로서가 아니라 왕으로서 자신을 계시하길 바라셨다. 이스라엘이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했을 때 하나님은 좋아하지 않으셨다. 저들이 나의 왕 됨을 버렸다고 하신다. 그래서 사무엘은 크게 속상해 했다.
(삼상 8: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삼상 8: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삼상 8: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삼상 8: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하나님은 왕으로 자신을 계시하고 싶어하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조물주로서만 관심 있다. 비 주시고 복 주시는 지켜주시는 신이기만 하면 되는 모습이 있다.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세우신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하나님께서 왕으로 드러나신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인간이기 때문에 자꾸 조물주에게 가려고 한다. 그럴 때 여호와의 영만이 참된 하나님이고 참된 왕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과의 끊임없는 싸움이었다. 그 싸움 내용이 이스라엘 역사이다. 그 분은 왕이시기 때문에 나라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를 지으셨다. 영적 전쟁의 핵심은 ‘지피지기는 백전백승’. 그래서 사단도 이스라엘을 연구한다. 미혹하려면 다른 영을 집어 넣어야 하므로 나라로 지어진 이스라엘은 이 영역에 뛰어나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을 알아보는 목적으로 지었다.
(사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스라엘을 매주 중요하게 지었다. 이스라엘은 실제 2000년간 물 가운데로, 불 가운데로 지나게 된다. 이스라엘을 필살의 무기로 만드셨다. 특공대의 무기가 된다. 절대로 안 없어진다. 이미 역사가 그것을 증명했다.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다시 돌아오기 시작한다.
(사 43: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증인이다. 증인은 하나님을 알아보는 자이다. 여호와의 증인이 이단인 이유는 땅 이야기를 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계시록에 ‘사탄의 회당’이란 표현이 나온다. 그래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한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증인으로 택하셨다.
(사 43:12) 내가 알려 주었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이 왕으로 자신을 드러낸 나라는 이스라엘 밖에 없다.
(사 43:15)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창조자, 이스라엘의 왕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없어지면 안 된다. ‘거룩한 이’는 “메시아”를 가리킨다. 여호와가 “메시아”이다.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백성, 즉 ‘나라’의 개념이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보게 된다.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이스라엘은 선교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을 특별히 사랑한다고 해서 다른 지역은 선교하지 못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마음을 풀고 계신다. 이스라엘을 보면 놀라운 축복이 있다. 마지막 때 ‘말씀’을 회복시키는 힘을 받게 된다. 성경이 열린다. 이스라엘을 보지 않으면 “토라”가 부활되지 않는다. 청교도들 때 ‘말씀’이 일어나게 되는데 ‘스펄전’ 이런 사람들은 다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믿음과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스가랴서로 기도 합주회 하다가 마지막 때 가장 축복 가운데 있을 민족은 유대민족이라고 이야기 했다.
이스라엘을 통한 회복, ‘말씀’과 ‘성령’의 회복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 말씀, “토라”가부활 된다. 그리고 성령님에 대한부분들이 회복된다. 성령님도 반드시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식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방법을 바꾸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주신 것처럼 앞으로도 주실 것이다. 오순절 사건도 이스라엘에서 일어났다. 이스라엘에서 성령이 오실 때 제자들은 바로 요엘서를 해석했다. 계속되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 어떤 프로세스 가운데 과정으로 받아 들인다. 우리는 성령으로 주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 살아계심을 전제로 한다.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체험하려고 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없다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고 말한다.
(시 53:1)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마할랏에 맞춘 노래]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이스라엘에게 성령이 주어져서 하나님 나라가 건설된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에게 성령이 부어진다. 오순절 사건, 성령의 부어짐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되어서 성전에서 이루어졌다. 즉 오순절을 지키던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사람들이었다. 오천 명, 삼천 명이 돌아왔는데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 믿던 사람들이 아니다. 원래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이 “메시야”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령님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싶은 것.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고 싶은 것은 이방적인 것이다. 어리석은 것이다. 하나님이 없다 하는 것이므로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다. 토라를, 토라에 있는 진리를 가르치는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영적인 체험도 이교도적인 체험으로 여긴다. 성령님은 영이시므로 영적 에너지로 어떤 현상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것을 위해 오시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주하시는 성령’이다. 성령님은 깊은 것을 통달하시면서 탄식으로 간구하시며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오신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다 생각나게 하신다. 즉, 우리 혼에게 다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 생각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회복이다. 우리의 문제는 쓸데 없는 생각이 너무 많다. 이것이 재앙이다.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유대인들 하나님 앞에 열심 있고 많이 신실하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율법적이고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체험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을 체험하려고 하면 범신론, 뉴에이지로 가게 된다.
유대인들은 단지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은 체험하는 분이 아니다. 체험하는 것은 범신론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어있다. 하나님과 같이 삶을 살게 되어 있다. 이것이 체험이다.
성령 사역, 말씀 사역은 그 중심에 이스라엘에 있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들에게 힘든 것은 중심에 있는 것이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나온다. 이 분께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시다.
‘거룩하신 이’는 ‘메시야’이시다. 그리고 ‘메시야’가 ‘예수아’이시다. 오히려 ‘예슈아’가 이스라엘을 대치하면 안 된다. ‘예슈아’는 총 주관자이시다. 이스라엘이 중요한 것은 ‘예슈아’가 일하시는데 이스라엘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중요하다.
One New Man(한 새 사람)
마지막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중요하게 된다. 구약의 여호와는 신약의 예슈아이다. 신 구약이 합쳐진다.
유대인은 구약에서 살았다. 이방인은 신약에서 살았다. 그런데 이제 그 둘이 합쳐지는 것이다. 유대인은 예수님을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이신데 그 왕을 모른다. 이방인은 예수님께서 왕이신 것은 아는데 어느 나라 왕이신지를 모른다. 한 새 사람이 되면 파워 풀 해 진다.
Q & A
영의 세계란?
영의 세계라는 것은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세계가 영의 세계다. 즉, 하나님의 나라라고도 볼 수 있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창세 전의 영의 세계는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 이 말씀으로 시작한다. 그 이전 것을 알려고 하면 멸망한다. 땅, 지구를 창조하셨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땅은 히브리어로 “$r,a, (에레츠)”이다. 땅은 국가의 3대 요소이다. 하나님을 나라를 위해 땅을 만드신 것이다. 그리고 “에레츠”는 이스라엘 나라와도 동의어이다. “하 에레쯔(The land)”는 이스라엘을 뜻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땅을 없애시면 나라건설에 실패했다 와 같은 말이다. 땅은 영원하다.
그리고 하늘들을 만드셨다.
첫째 하늘(sky), 둘째 하늘(universe), 셋째 하늘(heaven). 이 셋째 하늘 삼층천에 하나님이 계신다. 살과 몸이 있는 부활체를 가지고 있으시다. 이곳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이 보좌가 이 땅에 내려오는 것이다.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2: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이 전체가 다 영의 세계이다. 우리는 다른 차원을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영의 세계가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영의 세계로 생각하려고 한다. 이것이 ‘기독교 플라톤주의’이다. 그러나 눈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들이 영의 것이다.
(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말씀, 곧 영이 만물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비만, 살째기가 사단적일 수 있다. 끝이 없고 실패하면 살, 몸을 원수로 여기기 때문이다. 몸을 원수로 여기면 존재가 파괴 되어진다. 영, 혼, 몸이 같이 있어야 사람이다. 몸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영이나 혼이나 몸을 싫어하면 망가진다. 영, 혼, 몸은 다 이 세계에 다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이렇게 보는 눈을 상실한다.
천국과 천년왕국
삼층천은 천당이다. 천국과 동의어가 아니다. 천국은 영, heaven의 기운이 다스리는 곳이므로 전체가 다 천국이다. 지금은 지구에 천국이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지금은 하늘이 땅을 다스리는 때이다. 하늘은 땅에 응답한다. 왕도 혼자 있는 것이다. 왕도 다스릴 백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땅과 하늘을 구분하면 안 된다. 천국은 하늘이 땅을 다스리는 나라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은 하늘의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땅을 다스리는 것이다.
영은 실제를 있게 하는 것이다. 영은 실제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영적인 사람은 반드시 실제가 나타난다. 영적으로 높아지면 주변의 실제가 변한다. 친구들이 변하고 가족이 변하고 사역이 변한다. 영적인 것은 다 실제를 변하게 한다.
마태복음에서의 천국은 천년왕국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늘과 땅이 통일되는 때가 천년왕국이다. 그래서 하나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못 들어간다고 한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믿음으로 천국 간다는 교리와 어긋나 보인다. 천당은 믿음으로 가는 것이다. 지금 죽으면 천당 간다. 그러나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문제는 다르다. 천년왕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천년왕국에서 통치자의 자리에 앉는다는 것이다. 통치자는 하나님 뜻을 알고 하나님 뜻대로 산 자들에게 주어진다.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다 받으신 것은 아버지의 명령을 다 지켰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순종함을 배우셨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히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 5: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죽은 뒤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있다. 심판대는 안 믿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에게 면류관을 줄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불 가운데서 구원을 얻은 것처럼 수치스러운 구원도 있다.
(고전 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전 3: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고전 3: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고전 3: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전 3: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불이 나와서 우리의 공력, work를 시험한다. 마태복음의 천국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자들을 천년왕국 때 면류관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 기뻐하라는 것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 때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고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는 것이다.
천년왕국도 끝은 아니다. 그 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 천년왕국 때는 전 우주를 다 정결하게 하는 때이다. 천년왕국 때는 부활체가 아닌 사람들도 산다. 하늘과 땅이 통일된 기간이고 이 통일을 완전하게 하는 기간이다. 완전하게 되면 베드로 후서에서처럼 불로 녹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넘어간다.
(벧후 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벧후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