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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로티노스의 이중 경향과 이중 계열 :
- 하향(신화) 대상향(변증법):
- 길이(수학, 물체)와 논리(추리, 언어) 대 생명(흐름)과 영혼(함께 의식, co-science)
- 세분화에 따른 연속성의 확보
[이항대립에서 다양체로 무료 줌강의 넷째. 2022 08 20 토요일 오후 4시(오타 3시), 철학아카데미 4층 세미나실에서]
01. 플로티노스(Plotin, Πλωτῖνος; lat.. Plotinus 205-270) 년표
[175 암모니오스 사카스(Ammonios Sakkas, 175경-242)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신(新)플라톤주의를 제창한 플로티노스의 스승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가르쳤다.]
204 플로티노스(Plotin, Πλωτῖνος; lat.. Plotinus 204-270) 탄생. 이집트 리코폴리스(Lycopolis, 나일강 삼각주)에서 태어났다. 알렉산드리아 학파. 엔네아데스(Les Ennéades, Ἐννεάδες, 254-270). 그는 세계에 대한 이해로서 세 가지 기저(trois « hypostases »)를 깨닫게 되었다. 일자(L'Un, ἐν), 지성(L'Intelligence, l'Intellect, νουϛ), 영혼 (L'Âme, ψυχη) [이 말로 보면 상층의 일자, 중간에 점으로서 지성, 심층의 영혼이다. / 학설상 일자에서 누스로 그리고 영혼으로 연결되면 누스는 자연자체가 된다.]
231(스물여덟) 28살에 철학에 헌신하였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암몬니오스(Ammonios, Ammmonius Sakkas 약175-242)에게 11년간 배웠다[서른여덟]. [암몬니오스는 인도의 사키야족과 연관 설이 있다고 한다.]
이 당시의 철학은 영혼을 형성하기로, 또는 성숙한 인간에게 새로운 삶을 부여하기로, 운명 지워진 정신적(영혼적) 삶의 입문이었다. 그는 이 스승가까이에 11년 있었다. [굴파기, 노마드의 기간이 11년이었다. (54WMB)]
243[서른아홉] 그는 고르디아누스 3세(Gordien III, Marcus Antonius Gordianus Pius, 225-244)를 따라 페르샤 원정에 참여했다. [이 로마 황제는 페르샤와 전투에서 부상이 병이 되어 죽었다고 한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이 황제의 암살로, 플로티누스는 안티오크(Antioche)로 달아나야 했고, 다음에 로마로 가서, 거기서 학교를 세웠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245(마흔하나) 그는 로마에 안착했다. 학교를 세웠다.
246(마흔둘) 아멜리우스(Amélius, Amelius Gentilianus 216/226-290/300)를 246년에 제자로 받아들이다. 그는 20년 이상 배우고 나서 시리아 암파메(Apamée, en Syrie)에 정착.
트레보니아누스(Trébonien Galle (Caius Vibius Trebonianus Gallus), 206경-253), 로마 황제(251-253). 황제의 부인이 될 게미나(Gémina)를 가르쳤다고 한다.
253(마흔아홉)까지 글을 쓰지 않았다. 그 후로 많은 글을 썼다. 포르피리오스가 정리했다.
그는 황제 갈리에누스(fr. Gallien, Publius Licinius Egnatius Gallienus 218-268) (재위260-268)를 자기 학설로 개종시켰다.
황제 갈리에누스(fr. Gallien, Gallienus 218-268)(260-268, 재위 8년)의 허락으로 캄파니에 플라톤폴리스를 세웠다.
260(쉰여섯) 갈리에누스 황제 암살(?). 플로티노스는 로마를 떠났다.
263(쉰아홉) 포르피리오스(Porphyre, Πορφύριος, 232?-305?)가 플로티노스 제자가 되었다. 그는 5년 후 268년 울증(dépression)으로 고생하여, 시실리에 정착했다(스승이 휴양을 보냈다). 거기서 Contre les chrétiens를 썼으나 448년에 불탈 것이다(Valentinien III et Théodose II 황제들에 의해). 그리고 268년 경에 논리학 저작인 Isagogè를 쓴다.
268(예순넷)년에 민투르네스(Minturnes) 가까이에 있는 캄파니에서 세상을 떴다.
270 그는 로마에서 – 아마도 결핵으로 – 사망했다. [어느 것이 맞는지?]
02* 중요 관련들 ***
46 플루타르코스(Plutarque, Πλούταρχος/Ploútarkhos 46-125) 케로네(Chéronée en Béotie)태생, 그리스 출신 로마 역사가 사상가. 중기 플라톤 주의 영향을 받았다. 위인 전기(Βίοι Παράλληλοι),
50 노예출신 에픽테토스(Epictète, Epictetos, 50-125/130) 제자인 아리아노스[Flavius Arrien]가 그의 글 두 개를 남겼다. 개요(Enchiridion, fr. Manuel) 대화록(Entretiens)
51-57 바울(Παῦλος, Paulus, 5년경- 67년경) 전도
66 유태인 폭동(베스파시아누스 군대의 유대(진압) 전쟁: -70) 디아스포라
68 네로(Lucius Domitius Claudius Nero, 37-68, 재위 54-68) 자살.
121 아우렐리우스(Marc Aurele, Marcus Aurelius Antoninus, 121-180)탄생, 황제 철학자.
123 아쀨레(Apulée, (en latin, Afulay en Berbère, Apuleius, 123/125-vers 170) 북아프피카(현알제리)출신 여성철학자. 플라톤주의자(les médio-platoniciens)
129 갈레노스, 갈레누스(Claude Galien, Κλαύδιος Γαληνός / Klaúdios Galīnós, en lat. Claudius Galenus, 129경-201) 고대 의사. 약학의 아버지. 중세 의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32-135 예루살렘, 유태인 대폭동, 그리고 유태인 디아스포라(Dispersion, gr. Diaspora).
138- 안토니우스 왕조 시대(Dynastie des Antonins)
140 파피니아누스(Aemilius Papinianus, 140?-212) 간결한 문체, 현실에 대한 이해력과 독창력으로 로마법학의 완성도를 높인 로마의 법학자. 정치적으로도 최고관직에 올랐으나, 황제 카라카라의 자리 독점을 정의(正義)의 입장에서 반대하다가 살해당하였다. 주요저서 《질의록Quaestiones》 《해답록 Responsa》
150경 대승불교 발흥 : 제4회 불전 집성
150 나가르주나/용수(龍樹: 150년경 ~ 250년경?), 중관(中觀·Madhyamaka)을 주창한 인도의 불교 승려.
150 아프로디지에우스(Alexandre d’Aphrodise, Ἀλέξανδρος ὁ Ἀφροδισιεύς, 150경-250경), 카이로 출신, 소요학파,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 Du destin (Περὶ εἱμαρμένης, De fato)(μοίρα에서 나왔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오리게네스나 클레멘스보다 크리스트교의 논리를 구축하는데 아프로디지에우스의 역할이 더 컸을 것이다. - 즉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의 그리스어 역은 알렉산드리아의 스토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합작품일 것이다.]
150 클레멘스(Clément d'Alexandrie, Alexandrinus Clemens, Titus Flavius Clemens, 150 ?-215 ?) 알렉산드리아파 그리스도교 신학자. 최초로 고대철학과 그리스도교를 종합적으로 전개한 신학자. 그 계보는 제자 오리게네스로부터 4세기의 그리스 교부 및 아우구스티누스에까지 이어진다. (150-220?)
155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en, 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155경-240경), 베르베르 가정출신, 기독교의 교부, 카르타고의 신학자. Ad martyras (197 ou 202-203) De l'âme. De anima (208-211) De la chair du Christ (entre 253 et 259),
160경 불교: 간다라 미술 융성
175 암모니오스 사카스(Ammonios Sakkas, 175 ?~242)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신(新)플라톤주의를 제창한 플로티노스의 스승이다.
184 황건적의 난: 조조(曹操)가 황건적을 격파하고 장각(長角)을 죽임
185 오리게네스(Origène, Ὠριγένης / Ôrigénês 185경-253경) 초기 교부, 신학자. 알렉산드리아츨신 /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대표적 신학자. 성서, 체계적 신학, 그리스도의 변증적 저술 등의 내용의 저서를 많이 남겼다. 그리스도교 최초의 체계적 사색가로서 이후의 신학사상 발전에 공헌하였다.
2??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ène Laërce Διογένης Λαέρτιος / Diogenês Laertios, Diogenes Laertius, 3세기경) 역사가, 철학자 시인 학설사가.
204 플로티누스(Plotin, gr. Plotinus 204-270)탄생. 이집트 리코폴리스에서 알렉산드리아 학파. 엔네아데스
2?? 섹스투스 엠피리쿠스(gr. gr. Sextos o Empeirikos, lat. Sextus Empiricus ?-?) 3세기 초 그리스의 철학자, 의사. 피론의 유파에 속하는 회의론자이다. 저서에 피론 사상 개설 Esquisses pyrrhoniennes (Πυῤῥώνειοι ὑποτύπωσεις ou Pyrrhōneioi hypotypōseis)(3 Livres)이 있다.
232 포르피리오스(Porphyre, Πορφύριος Porphyrios, 232?-305?)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역사가. 262년 로마에 가서 플로티누스에게 신플라톤파 철학을 배웠다.
242 쟝블리코스(Jamblique, Ἰάμβλιχος, Iamblicos, lat. Iamblichus 242년경-325)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피타고라스의 생애(Vie de Pythagore, βίος πυθαγορικός)(en trad. latine: De vita Pythagorica)
03. 연구자들
그 많은 연구자들 중에서 벩송이 인용한 학자들 중에 그 연원을 알 수 없는 학자들도 있다. 특히 아래 세사람의 인용을 하는데 연원을 알 수 없다.
1846년 바쉬로(Étienne Vacherot, 1809-1897)의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비판적 역사(Histoire critique de l'École d'Alexandrie (1846-1854), 약간 모호하다 할지라도 주목할 만한 적업이다. 게다가 플로티노스의 사상들 중에 동방의 기원과 필론의 기원에 관한 선입견이 들어있는 생각이 있다.
1854년 키르히너(Kirchner, s.d.)의 플로티노스의 철학(Die Philosophie des Plotinos, 1854) 완전한 작업이다. 그런데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선천적(a priori)으로 이루어졌고, 헤겔의 재구축의 방법을 따랐다.
1864-1867, 리히터(Richter, s.d.), Neoplationische Studien, Halle, 분석이 성실한 작업이다.
1875년 폰 클라이스트(Von Kleist, s.d.), 플로티노스에 의한 유물론의 비판(La critique du matérialisme par Plotin, 1875. - 동일 저자, Plotinische studien, Heidelberg, 1883.
왜 벩송은 기존의 많은 그리스 문헌 전공자들 보다 알려지지 않은 자들의 논문을 주목했을까? 여기서 추적할 수 없지만, 나의 추정으로 앙소프와 메시아에 대한 견해에서 벩송이 생명에 관한 한 인도주의자(humanitaire)라는 점과 자유에 관한 한 인성자유주의자(libertaire)라는 점이며, 신의 모습을 생각하기보다 자연의 자기에 의한 자기 창조를 사유하였기에 참조한 학자들에 대한 견해가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벩송이 플로티노스에 대한 견해에서 독특한 점은, 많은 학자들이 신체를 다루지 않는데 비해, 신체를 통한 영혼의 상향과 신체에 이르는 하향을 설명하였다고 보는 점이다. 이 점은 불교에서 “념처경”이래로 신체(또는 중생)를 함께 불국정토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과 유사성을 가질 것이다. 벩송 사유의 장점은, 플로티노스의 누스가 신체에 내속해 있으면서, 영혼이 신체와 더불어 스스로를 생장하며 발전하는 의식의 차원으로 전개되고, 또한 끊어지지 않은 지속으로 자기 변화, 변질, 변형을 이루면서도 누스와의 일체성과 같은 정체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하면서 산다는 점이다. 이런 수행과정의 노력의 결실이 보리살타, 보살이며, 이 완성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연속성의 극한으로서 불연속의 장면이 열반이다. 이 불연속에서는 새로운 연속은 없다. 보살을 이루려 노력하는 권능 또는 생명력(엘랑비딸)은 모든 생명체 속에 지속하면서 이어지는 점에서 연속성이며, 그 연속성은 누스처럼 끊어지지 않고 물체에까지 이르는 힘과 같다. (55SLF)
1.1 고대 서양 철학사에서 세상을 논한 세 부류
서양 철학사에서 이오니아학파의 질료론(자연론)과 엘레아학파의 존재론(관념론)이 대립을 이루다가, 아테네가 동방의 황제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에게 해의 중심이 되면서 많은 지식인들이 아테네로 모이게 된다. 아마도 이런 지식인의 모임, 즉 아테네 도시의 세계화가 철학의 발전과 새로운 사유의 태동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을 철학사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왜 아테네에서 특히 민주주의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다. 물론 니체가 말하듯이 인간의 삶에서 비극이 있다는 것을 느낀 아테네 비극시인들에 의해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탐색을 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오니아와 엘레아의 차이를 분명하게 느낀 것은 아테네학자들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연의 운동과 불멸의 존재의 부동이라는 생각이, 각각의 사유 방식에 깊이를 더하는 만큼이나, 서로 간에 차이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남을 느끼는 것도 이 시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학설들이 체계를 가지고 구전 전승을 넘어서, 문자로 체계화가 되는 것이 인류사에서 이 아테네 시기부터라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전승의 이야기들 속에는 검증할 수 없지만 심정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는 원인과 귀결의 연결성이 있다. 이런 연결성이 있다고 해서, 삶에서 또는 사유에서 필연적으로 또는 계속적으로 동일하게등장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아테네 시대 이런 설명과 설득, 또는 논쟁과 논증을 통한 상대에게 논리적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는 논쟁술의 발달이 있었다는 것이다. 소피스트들이라고 하지만, 판단과 판단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고, 논리적 귀결에서 불합리와 모순을 찾아내어 상대를 논박하는 기술이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움직이는 세상으로부터 삶을 전개할 것인가 또는 움직이지 않는 우주로부터 논리를 전개할 것인가, 이것은 막연하게 땅(지구)의 삶과 하늘(우주)의 불변 사이의 문제로서 파악해야할 문제를 넘어선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하늘과 땅의 대비를 어떻게 풀어야할 것인지는 고대의 신화 또는 종교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대철학의 이원성, 르네상스의 이원론(평행론), 현대의 심층론과 상층론 대비 등으로 이어져 오고 있고, 20세기와 21세기에 와서는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잡고서 논리를 전개하여 끝(극한)까지 전개하면 불합리가 나오면 나오지, 정합성이 없다는 것을 점점 더 잘 느끼고 있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라는 통일성을 만들었던 것이 무슨 악몽(un cauchemar, 두통거리)과 같은 것은 아닐까?>
그리스철학이라 부르는 아테네 철학이 운동과 정지라는 논리적 양극을 놓고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이 어쩌면 철학의 체계를 세우는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하늘과 땅의 조화는 너무나 큰 범위이고 이 둘 사이의 조화 또는 정합적 체계는 단지 머리속에서 1 대 1로 생각할 수 있지, 구체적 대비로서 하늘과 땅은 대비가 안 된다는 것을 공통감각으로 당연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동서양은 대우주와 소우주의 비유처럼, 즉 어른이 오관을 가지고 있듯이 태어나는 작은 얘기도 오관을 가지고 있으며, 크고 작은 차이일 뿐 있을 것은 다 있다고 여기듯이, 대우주와 소우주를 유비로서 연관 있음을 설명하거나 체계를 세우려고 했었다. 벩송이 말하듯이 하늘과 땅 사이에 연대(solidaire)가 있다고 해서, 이항 관계 또는 대립이라고 할 수도 없으며, 그 이항이 이원론이나 평행론이라고 할 수 있는 실증적인 자료도 없다는 것은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검증될 것이다.
두 상반된 견해가 각각의 관점에서는 어느 정도 타당성 또는 논리성이 있다는 것을, 서로 따로 떼어놓고 이야기할 때는 부정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둘을 마주하여 논리를 전개하면 둘 사이의 어느 쪽이 옳고 그르냐가 판별날 것이다. 그러면 이 둘이 무엇이냐가 문제가 될 것이다. 특히 추상적으로. 아테네는 두 검증을 데려오기 전에, 사유로서 둘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한 부류에서는 하나는 존재이고 다른 하나는 비존재라고 할 것이고, 다른 쪽에서는 하나는 원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공허라고 할 것이다. 전자에서는 운동을 부정하고 후자에서는 운동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둘을 데려다가, 둘의 견해[사유]를 동시에 놓아보자.
동시에 놓아보자, 아마도 아테네의 사유의 고민은 ‘동시에’라는 데 있었을 것이다. 현실에서 이 세상 어떠한 물체도 같은 장소에 두 가지 사물이 동시에 놓일 수 없다. 즉 단순한 공통감각을 통한 사실이다. 그런데 동시에 놓고 생각해보자라니. 그러면 놓을 장소가 무엇인가? 공간인가? 그리고 시간의 지속에서 사물은 그 자리에서도 동일하게(동시에) 있을 수 있는가? 모든 사물은 시간 지속에서 변질하고 부서지고 소멸한다. 그러면 장소, 시간, 사물을 논의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동시에 같은 장소에서 변하지 않고 동일하게 있는 것이 있어야 논의를 또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무슨 소리인가. 제우스는 그리스인들 속의 이야기 속에 항상 동일하게 위치와 형식을 취한다. 그런데 그 위치와 형식이 자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 또는 뇌피셜이라는 머리 속에 그려져 있는 것이지, 현실의 지구상에 없다는 것을 알았고, 아테네인들은 또한 여러 제국들과 전쟁을 통해서 그런 이야기의 속의 인물들이 각각의 나라에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그 제우스는 현존하는 대상이 아니지만, 아테네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판단의 기준의 역할을 하는 어떤 명제와 판단으로 아테네인들 모두의 머리 속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 머릿속에는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이 실재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이오니아인들이 말하듯이 제우스 같은 것은 없고 벼락이 있고, 벼락이 치는 떡갈나무가 있다. 그럼에도 벼락과 떡갈나무의 인관관계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머릿속의 제우스를 이야기나 논쟁판에 끌어내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고들 한다. 그 대상과 연관된 여러 이야기들이 추론상 타당성을 통해, 주신으로서 제우스의 판단을 믿는다. 그러나 벼락과 떡갈나무는 논쟁판에 불러내기가 쉽지 않으니, 사물들의 조각들을 가지고 설명하기에 이르러 지수화풍이니 아톰들이니 하는 요소들을 통해 땅의 현존들을 설명하는 것인데, 머리 속의 대상과 달리 조각(요소들)조립이라는 조합의 설명이, 현실을 사는 사람들이 다루는 도구의 설명과 제작에 훨씬 더 흥미있고 유리하다고 여긴다.
도구를 만들고 물체를 제작하면서도 동일한 것을 계속적으로 만드는 것이 유리함을 안다. 그 유리함에 형태를 그리는 도안을 가지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다. 머리 속에 도식을 설계도처럼 갖는다면 다른 사람들도 유사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도안(형식)의 우선은 물체의 조립능력보다 우월하게 보인다. 원자론자보다 존재론자의 우월성이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보다 존재론이 원자론보다 우월성을 보인 것은 논리적 측면이다. 원자론이 요소들을 결합하게 하는 운동이라는 원인 있다고 여긴데 대해, 엘레아학파는 그런 원인이 가짜라고 하며 논리적으로 전개한 것이 제논의 운동 부정의 논증들이다.현실적으로 불합리하지만 그 당시에도 오랜 기간 동안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어렵다는 것도 안다. (55SLG)
이오니아 전통의 우주의 흐름, 그리고 사물들의 변화를 설명하는 원자론자들, 운동을 부정하는 엘레아학파의 견해가 아테네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각각은 타당성이 있으나, 각각을 동시에 놓고서 대결시켜보아야 할 것이다.
1.2 동방과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아테네는 동방의 황제세력을 차단하였다. 시민이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시민들이 자치적 정치활동이 활발해졌다. 이런 과정에서 참주의 배척처럼 그리스 신화의 기능적 신들의 역할을 배제하고, 인간이 스스로 능력을 발휘하는 길을 찾을 것이다. 이 능력의 발휘에는 시대의 철기 주물의 발달로, 동일한 사물을 반복적으로 만들 수 있는 거푸집의 제작이 한 몫을 했을 것이라. 플라톤의 이데아는 거푸집의 변형된 사고와 닮았으며, 여러 종류 거푸집들이 있다는 가정에서는 원자론의 설명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거푸집은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가? 재료와 과정이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사유하는 방식은 또 다른 것을 제기하였다. 물체들이야, 동일한 물체의 생산이 거푸집에 의해 쉽게 설명이 된다. 그런데 인간들 각각도 거푸집의 생산과 같은 것일까? 왜 아테네에서 인간이란 주제가 떠올랐던가? 여기에 대해 철학사는 소피스트들의 등장이라고 한다. 이보다 소통과 교환의 발달이다. 교환과 소통에는 대응하는 사실들에 상응하는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이 수학과 언어이었을 것이다. - <두 학문의 기본 골격이 기원전 4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겉보기에는 논변과 논쟁의 발달에서 언어가 추론을 중심으로 사실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그 증거와 추론의 확실성은 수학적 체계와 계산에서 분명하게 될 것이다. 수학적 논의의 깊이에서는, 이런 확실성과 합리성의 근거가 인간 삶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신화와 전승을 벗어나 구체적인 하늘의 운행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러면 지상의 확실은 하늘에서 온 것인가? 하늘과 땅,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양자 사이의 간격을 메꿀 수 있는 사유를 찾는 기나긴 사상사적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 전5세기 이후로 체계화하는 문법에 의해, 구전의 전승에서 문자의 문헌으로 옮겨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전승의 이야기가 배경이 되었을 것에서 사물의 증거를 제시하는 시기로, 그리고 증거가 남아서 전거(典據)로 대체될 수 있는 시기이다. 소통과 교환의 확실한 증거로서 문자의 독해방식은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이 시기에 전승의 설화들이 논리적 구성과 역사적 조건에 맞는 원인과 귀결을 연결하는 정합성을 맞추어 성립하기에 이른다.
소크라테스가 이러한 확실성의 기준을 찾기 위해 ‘이뭣꼬’를 물었다. 우선 대상에 대해 그리고 안다는 활동 능력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그 ‘안다’는 대상이 원래 있다고 여겼던 것들이 추론상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당연하게 여겼던, ‘안다는 능력’이 있기는 한가? 하늘과 땅의 관계가 아니라 기준의 문제에서 ‘안다’는 “능력”에 영혼이라는 또는 의식이라는 차원을 생각하면서, 하늘과 땅의 이원적 간격 사이를 영혼과 대상의 이원적 관계로 바뀌어 생각하는 방식이 도래 한다. 이 영혼이 사용하는 언어, 그리스어가 어떤 기준을 만들어 줄 것인가? 말로서 설명하는 것으로 완전성에 도달하기 어렵다. 그것은 퀴니코스학파가 플라톤주의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 언어는 사물의 실재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실재성이라는 가장 확실한 대상(표현)은 무엇인가? 움직이지 않고 완전한 도형과 같은 수학적 상징기호, 즉 이데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로서 이데아가 아닌 것은 현상으로서 변화하는 것이기에 논의의 가치가 없다고 배제하기에 이른다.
우주와 지구 사이에 물체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영혼도 그러한 변화 속에 있기에 배제되어야 할까? 영혼의 배제, 그것은 인간의 삶을 배제하고 머리 속에서 또는 천상에 있다는 이데아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철학이 현실적 구체성이 없이 추상의 이데아, 논리의 에이도스, 즉 누스의 우주와 로고스의 세계라는 것에 머문다면, 신체를 가진 의식은 또는 신체와 더불어 활동하는 영혼은 무엇이 되겠는가? 신체를 배제하자고... 여기서 서양철학사의 심각한 문제거리를 낳았다. 질료, 아페이론, 필연, 물질이라고 불리는 이 변화무쌍한 부분을 버리고 나서, 다시 이 부분(신체) 없이는 삶이 없다고 다시 끌어안으려는 데서 생긴 문제이다. 완전이 먼저 있고 불완전을 버렸다가, 다시 불완전을 완전으로 만들어보려는 노력은 서양철학사 2500년 동안 허무주의의 극복이라는 이름으로, 또한 종교적으로 원죄에서 벗어남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고, 게다가 20세기에 복지라는 이름으로 하부의 인푸라를 깔려는 경제구도의 성립에서나, 허구의 대속이라는 이름처럼 아픔과 어려움을 대신하는 모조인간의 가설들로 등장하는 것도, 우리가 보기에, 잘못 심어 논 허무주의(회의주의) 극복이라는 구호아래 있다.
신체의 현실적 인정, 또는 신체로부터 삶의 방향의 설정이 서양 철학사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 철학사의 시초부터 휠레의 문제로부터 죽 있어왔고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잘못된 사고가 물질에 대한 허무주의라는 비하의식에서 시작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전쟁의 승리시기에 시민의식의 발달과 더불어, 개인의 중요성이 제기되었고 그와 더불어 대상으로서 인간이 중심이며 또한 기준이라는 생각이 과도하게 융성하여, 제국주의 아테네가 이데아와 에이도스의 세계관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아테네는 마케도니아로부터 곧 바로 멸망했다. 그 아테네의 향수는 서양철학사를 지금도 자극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변화하는(지속하는) 자아로서 영혼(의식)의 문제가 남아있었다.
알렉산드리아 프톨레마이오스 참주는 조화로운 통치를 원했을 것이다. 설에 의해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스토아주의자, 그리고 이집트 전통의 책력과 신관을 전승하고 있는 사제들의 협력으로, 삼자의 융합으로 통치를 하였다고 한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신체를 지니고 사는 것이지, 신체 없이 산다는 것은 천상에서 산다는 것이 되거나, 또는 시민이 폴리스 없이 사는 것과 비유가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조국이라는 나라가 없음에도 언어와 관습을 지니고 사는 유랑민족들의 경우이다. 알렉산드리아 제국의 300여년 동안에 이집트 고문화와 고언어를 사라지게 하였다. 그럼에도 그 터전과 풍토에서 현자들은 자연의 혜택으로 여전히 남아있었고, 삼자 중에서 1/3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면 겉보기에 나머지 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와 스토아주의자들의 대결에서 중동을 포함하는 알렉산드리아의 학문적 지위를 어떻게 전승되었을까?
사상은 세계적 교류를 지속한다. 그 교류에 많은 사람이 움직일 필요가 없다. 역사적으로 숙련된 한 학자의 움직임이 동서간의 교류를 활발히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상상을 보태어 이 알렉산드리아에 학문적 용광로와 같은 역할을 했을 것으로 가정해 볼 수 있다. 용광로를 거쳐서 기원후 200년대는 새로운 학문적 풍토가 전개될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래로 여러 학파들이 사유의 틀들을 나름대로 만들었던 것을 우리는 4분위로 도표를 삼은 적이 있다. 그 도표는 인류의 사유의 역사에서 지속적인 효과를 지니고 있다고, 나로서는 생각한다.
1.3 새로운 사유와 접합 : 상향의 길과 하향의 길의 연속성
그리스 철학은 완전성을 기준으로 불변과 부동을 먼저 설정하였기에, 그 사고는 언제나 불연속 속에 있다. 이 불연속을 연속으로 사유하기 위한 노력은 탈레스와 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래로 죽 있어왔다. 이 연속적 사유의 직관을 버릴 수 없는 것은 세계 또는 사유전체가 하나라는 것을 정합적으로 설명하는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완전을 기준으로 현실에서 변화에서 오는 불연속에 대처하는 방식에서는 상층의 잣대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고 또한 설득력이 있어보였다.
사변적 설명의 편리와 정합에 비하여, 삶에서 행동과 과정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지만 사변에 주눅이 들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변화하는 과정에서 모든 행위에는 정합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요즘말로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이 없다. 단지 이 현상의 예외로서 과정 밖에 있는 권력자와 권위자 또는 순수 사유자만이 털어도 먼지 안나는 것이 아니라, 예외로서 털지 않는 조건에 있기 때문에 먼지가 안나는 것으로 착각한다. 털면 그 어떤 현존의 인간도(권력, 권위, 과학)[제국도]도 털리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배체제는 불연속 원리를 상층에 두어야 성립한다. 산다는 점에서 지배의 불연속이 불합리라는 것을 아는 대중은 저항하고 항거할 것이다. 명령과 지배의 힘은 강하다. 따라서 대중은 찍소리하지 못하고 따르는 척한다. 균열이 보이는 곳에 분출구를 마련하는 대중의 사유는 심층에서 죽 연속적이다. 그 연속성이 상향하는 과정에서도 연속성을 유지하기가 힘들고 어렵다. 왜냐하면 심층의 다양체가 통합하는 하나의 의식을, 합의와 교감의 의식을, 지속하여 유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논리적 방식에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에서 교감과 공감을 통한 정체성은 가능한가?
플로티노스는 이런 설명을 다양하게 했다고 벩송이 전한다. 벩송의 시간관념의 역사(Histoire de l’idée de temps), 제12강 1903년 2월 27일 회기[플로티노스: 의식 이론에서 영혼],]에서, “플로티노스가 사용한 용어들은 세 가지가 있다. 파라콜루테시스(παρακολουθησις), 신아이스테시스(συναίσθησις),안티렙시스(ἀντίληψις). 이 세 용어에 의해 플로티노스는 꼭 같이 의식(la conscience)을 지칭한다. (198)”
철학 개론은 플로티노스의 사상을 일자, 누스, 개별영혼으로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벩송은 연속성의 문제를 천착하면서 플로티노스의 프로호도스 진행과정과 에스트로프의 귀환 과정이 상반된 두 운동이라는 것을 넘어서, 의식의 차원에서 다시 설명하고 있다. 벩송에 따르면 이런 두 방향의 설명을 전자의 경우에 플라톤에서 후자의 경우에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관점을 새롭게 하여 설명하였다. 두 길은 다른(차히) 길이며, 현실의 적용에서도 달라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플라톤 | 아리스 | 플로티노스 | 불교 | 주역 | 중용 | 대학 | ||
이데아들 | Ideas | 목적인 | 일자(빛, 샘) | 법(法) | 태양 | 명(命) | 평천하(平天下) 정심(正心) | |
수학적 대상들 | Objets mathe. | 형상인 | 누스 | 로고스 | 심(心) | 소양 | 성(性) | 치국(治國) 성의(誠意) |
사물들 | Etres vivants | 효과인 | 신아이스테시스 | 로기조마이 | 수(受) | 소음 | 도(道) | 제가(濟家) 치지(致知) |
그림자들 | Images Ombre | 질료인 | 신체 | 물체 | 신(身) | 태음 | 교(敎) | 수신(修身) : 격물(格物) |
필연(어둠) |
프로호도스(πρόοδος) 진행과정[유출설]은 이기적이라 개인의 신체에 한정된 해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이는 플라톤에서 신화의 해결방식과 닮았다. 에피스트로프(ἐπιστροφή) 귀환은 일반화와 추상화의 길을 가면서 타인과 공통성을 찾는 것 같지만 신체를 배제하고 정신적 사고의 길을 가면서 순수 사유의 실재성에 함몰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 이 두 방식에서 필연이라는 어둠에서 빛이라는 일자로 향하는 방식을 어떻게 연속적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인가?, 내가 보기에, 벩송은 두 길을 갈라놓고서, 누스의 능력과 로고스의 기능으로 구별하여, 하나는 내재성의 운동으로(스토아쪽), 다른 하나는 외재화의 기능(에피쿠로스쪽)으로 보아 두 길의 마주치는 점에서 인간의 현존이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그 현존이 ‘현재’를 드러내는 것은 의식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벩송은 일반적으로 플로티노스를 설명하는 세 가지 기저에 국한되어 삶을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언제나 삶에는 신체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 신체와 더불어 어떤 활동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로서는 아마도 알렉산드리아에 불교의 연속적 사유, 즉 대승적 사유가 스며들었을 것이라고 본다. 신체의 아픔과 개인적 삶의 고독을 해결하는 것은 사유의 문제가 아니라 우주와 합일하려는 삶의 충력과 같은 권능의 활동이 보태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벩송은 그의 강의록에서 플로티노스에서 영혼의 활동으로 향하는 “의식”의 차원을 강조하였다.
2.1 플로티노스를 재해명하는 벩송의 입장
왜 벩송은 플로티노스의 세 가지 기저보다 “의식”의 차원을 강조하면서 의식의 활동과 더불어 영혼의 능력을 보아야 한다고 했을까? 물론 벩송 자신도 플로티노스가 꼭 꼬집어서 이런 논의 방식을 전개하는 원문을 찾기 어렵다고 한다. 그럼에도 흩어져 있는 용어를 들을 벩송 나름으로 모아서 재정립하는 개념이 세 가지 있다. 앞에서 언급한 파라콜루테시스(παρακολουθησις), 신아이스테시스(συναίσθησις), 안티렙시스(ἀντίληψις)이다.
이 세 개념작업은 아래 도표에서(천야의 그림이다)도 적확하지 않지만 그래도 현존의 인간의 지위를 나타낼 수 있다고 본다.
우주(흐름, 우주 영혼) | 거울효과 | 플라톤 | 플로티노스 | 하 향 | | ↓ | |||
일자 | 우주 | 생성자체 권능 | |||||
영혼계 | 누스 | 예지성 | 순수관념 | 상징 (선의 이데아) | 노에인 | ||
개별영혼 | 생명영혼 | 시간 공간 운동(수) 현존 | 시뮬라크르↓ | 로기조마이 | |||
개인 영혼 | 현존자들 | 디아노이아 파라콜루테시스 | |||||
물질계 | 생명체 | 의식 | 기억 지각 추억들 | ↑ | | 상 향 | |||
혼합 | 시뮬라크르↑ | 신아이스테시스 | |||||
물체 | 영혼 마비 방황 원인 | 불안 고통, | 생성 | 안티렙시스 | |||
물질 아페이론 | [노예]이방인 | 흐름 | 코스모폴리탄 |
파라콜루테시스(παρακολουθησις), 신아이스테시스(συναίσθησις), 안티렙시스(ἀντίληψις), 이 세 가지가 감각작용의 종합에 행사하는 방식들이다. 간단히 말하면 안이비설신의 종합은 논리적(로기조마이)으로 일반화와 추상화의 길을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의 종합이 내적 지각과 같은데, 교감과 공감을 통해서만 통일성을 유지하려한다는 것이다. 벩송은 이 교감과 공감의 인식이 직관이라 한다. 그 직관은 우주영혼과 개별영혼에 이어져 있는 개인영혼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즉 개인 영혼은 우주의 부분으로서 신체와 결합에서 완전한 통합은 아니지만, 통합의 내재성을 이어갈(지속) 권능을 내속(담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벩송에 따르면 플로티노스의 사유 방식에서 상향은 질료의 흐름에서 우주의 권능에까지 내재적으로 이어져 있고,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영혼의 능력 쪽이 아닌 기능의 측면에서는 사물을 조작하고 일반화하는 로기조마이(λογίζομαι)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기능은 의식의 상태 또는 영혼의 활동을 분할하거나 절단하여 사물을 개체화하는 방식으로 활동(l’action)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도표에서 로기조마이 아래 디아노이아(διάνοια)와 연결을, 파라콜루테스 아래에 신아이스테시스를 놓은 것은, 영혼을 지닌 신체의 능력과 활동은, 즉 의식 상태는 이런 이중성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방편이다.
벩송이 “의식”을 따로 설정한 것은 현대 심리학을 동원한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게 보인다. 그럼에도 플로티노스에서 신체를 포함하여 사유해야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벩송 사유의 장점일 것이다. 그런데 벩송이 이런 방향을 잡은 것은 그리스트교의 성립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벩송은 아프로디지에우스와 플로티노스를 따로 강의했지만, 전자에서 신의 왕국을 후자에서 인민의 동반을 생각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게다가 이런 사유가, 우리가 보기에, 나가르주나에서도 있었던 것으로 연관지어서 생각할 기회를 누군가 갖기를 바란다.
2.2 플로티노스와 아프로디지에우스의 연관
알렉산드리아에 와서야 상층론이 심층론과 연결방식을 거울이론처럼, 또는 단순한 연대(solidaire)처럼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상식의 힘은 굳세다, 르네상스 이후에도 연대를 시계의 동일성처럼 평행을 생각하기까지 한 것을 보아도 말이다.
심층론에서는 변화와 운동을 느끼고 행동하는 다른 생명동을 상정할 필요가 있다. 벩송은 의식(con-science, 함께 알다)을 도입했다고 불 수 있다. 연대가 아니라 것은, 상층론과 심층론 사이에 간격이 너무나 크다는 것이다. 일화로서 벩송의 고등사범진학에서 수학과 철학 사이에서 철학을 선택하면서, 수학은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할 수 있다고 했다. 벩송은 순수공간의 사고는 혼자서 할 수 있다고 여겼지만(소승, 논리, 위계), 삶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혼자가 아니라 경험의 총체로부터 검토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이 점을 주목했었는데 풀 수 있는 증거가 없었다. 샤를 페기가 남긴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 속기록(3권)에는 이런 설명을 소상하게 쓰고 있다.
벩송은 알렉산드리아 시대에 상층론과 심층론 사이에서 두 관점의 차이를 분명하게 구별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같다. 우리가 추측했던 아프로디지에우스와 플로티노스의 차이이다. 벩송은 1900-1901년에 원인관념의 강의를 하면서 원인은 대상도 신적 인식 주체로서도 파악할 수 없는 어떤 무엇이 있음을 설명하고(현대의 기억이론), 그 설명의 방식으로 심리학적 방법으로 가야하다고만 하였지만, 이 강의에서 플로티노스를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미 벩송은 플로티노스에 대한 긴 강의를 에콜노르말에서 행했다(1898-1899). 그리고 1900-1901년 토요일 강의에서는 아프로디지에우스를 다루었다. 우리가 추정했던 대비구도는 분명하게 있어고, 20세기에도 로만카톨릭이 벩송을 비판했던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플로티노스에서 심층론의 “의식이론”을 구출해 놓고서야, 아프로디지에우스의 “신의 운명론(섭리론)”을 다루었다. 후자의 강의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우리는 두 이론 사이의 논쟁거리를 추론해 볼 수 있다.
플로티노스는 삶의 터전에서부터 일자로 이행의 길이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이에 비해 아프로디지에우스는 신을 통해서 물질세계를 해석해 내려고 했을 것이다. 이 두 관점의 차이는 유대교의 랍비들이 사유방식이 달라지는 계기일 것이고, 크리스트교가 성립하는 기원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전자에서는 신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후자에서는 신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은 디아스포라의 유대인에게 중요한 계기이지만, 크리스트교의 성립은 후자에 합류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계가 세파라드 기원의 우주관에서 앙 소프(en-sof)와 메시아 신앙에도 연결되어 있다. 세파라드는 노력하여 새로운 세상을 어디서든지 만들 수 있다고 여긴데 비해(humanitaire), 아세키나제는 신의 왕국이 실재한다는 근거를 가져야 새로운 나라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경향으로 나갔을 것이라는 것이다(humaniste).
상층론과 심층론의 논의는 형이상학의 역사에 깊이에 흐르고 있었고, 벩송은 의식이라는 차원에서 영혼을 다루고자 하였다면, 현상학자들은 상층론의 입장에서 의식을 포괄하는 정신이 본질로서 실재한다고 여기고 있다. 벩송은 인성자유주의자인데 비해, 현상학자들은 교환(상품)자유주의자이다.
인도의 불교가 이론적 틀로서 자리 잡은 것은 나가르주나의 중론에서 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전의 불교는 여러 경전이 중심이었고 그 경전이 너무나 많아서 주장자들에 따라 다를 수 있었다. 외부 공격자와 내부 비판자들과 경전중심주의 사이의 논쟁이 있어왔지만, 체계적인 정리할 수 있는 학승(그리스 철학자같은)이 나오지 못했다. 나가르주나가 플로티노스와 유사한 시기에 아페이론과 같은 “공” 사상을 전개하면서 의식의 자기 발전의 길(중론)을 가는 논의를 전개했다. 그 논의는 플로티노스에 비해서 매우 적은 양이고 논의의 전개도 시적으로 표현하였기에 비약이 많다. 그럼에도 그가 실행한 두 가지 파사현정(破邪顯正)의 방식은 그리스철학의 누스와 로고스 사이를 논쟁과 체계에 대해 새로운 길을 모색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그는 별종(anomalie)인 셈이다, 그런데 벩송이 플로티노스를 별종으로 읽었고, 자신도 별종이란 단어를 1902년에 사용한다. 이 두 학자 사이에, 벩송의 견해로 비추어보면, 영혼이라는 흐름이 신체와 더불어 의식을 형성하고, 그 상태에서도 의식을 통해서도 자기의 길을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며, 그 능력은 신체라는 부분에서 수동성을 넘어서 자발성을 발현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부분이 전체라는 우주의식과 일치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부분의 의식이 처음부터 우주의식의 일부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덧붙여서 중국사상에서 음양과 4상을 수학적 분류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기호의 변환으로서 사물에 대응하는 관계로 설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 사이의 상호연관은 달리 생각해야 한다. 상호연관에는 인식의 문제와 재인식의 문제가 들어간다고 느낀다. 송대에 와서 유학이 불교의 관점과 도가의 관점을 빌어서 태극으로부터 연속성을 설명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인식은 의식의 활동 중에서 삶의 터전에 연관이 있기에 사단과 칠정의 논의로 바뀔 수 있다고 본다. 중국에서는 의식의 능력과 인식의 기능 사이에 구별없이 순환 또는 전환이 마치 음양의 교대처럼, 여남의 상보처럼 여기며, 사회관계(공동체)로 환원하여 평천하에 목적을 두면서 왕조변화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3. 다양체: 의식과 영혼의 연속성으로서 자연(본성)의 권능 실현.
의식이 영혼의 작동(l’acte)이라 보는 입장과 정신의 활동(l’action)이라 보는 입장의 차이가 분명히 다르다. 우리가 심층론과 상층론으로 구별하기 이전에, 서양 철학사의 흐름은 이 두 연관 사이의 대결 또는 이항 대립의 역사처럼 읽히고 있었다. 그런데 벩송은 그런 대립적 구조(도식)는 상식을 기반으로 하는 사고에서 상층 우월론이 지배하는 쪽에서 해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식의 시대에는 양자의 입장이 대등한 것 같이 여겨, 이원론을 내세우면서도 데카르트는 여전히 정신우위를 인정하였고, 전체와 부분으로 상정했던 라이프니츠는 단자 자체에게 에너지 효과를 인정하였음에도 자발적 생명성에 이르지 못했다. 벩송이 말하는 고등양식에 이르러서야 심층에서 상층으로 이행에 자발성을 부여하고, 생명의 생성과 발전은 여러 가지치기와 같은 세분화의 길을 간다고 설명한다. 이 세분화의 길의 각각은 각 극한에서 드물지만 이데아의 실현, 보살의 실현을 이를 수 있으며, 이를 그는 신비가의 길이라 했다. 현자의 길이라.
다른 하나의 대비로서 아프로디지에우스와 플로티노스 사이의 관점의 차이이다. 우리가 단정 지을 수 없지만, 전자에서는 신의 형상의 실재성과 새로운 재생(부활) 그리고 구현화 등을 상층론에서 하향을 설명한다면, 후자에서는 신체를 지닌 의식이 자기 발전의 길에서 우주영혼과 합일에 이를 수 있으며, 신의 실재성도 구현화도 먼저 있었던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져 가는 과정 또는 경향으로서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는 크리스트(메시아)를 대상으로 삼느냐 또는 나가갈 경향성으로 삼느냐는 차히와 같으며, 나가루주나 이래로 싯달다를 보살로서 만들어져 있다가 온 것이 아니라, 규정 없는 경향의 방향을 실현하는 쪽으로 최상의 길을 갔던 각자(覺者, 부다)라는 논리를 전개하면서, 공도 색도 아닌(불이 不二)로서 도피안에 이르는 열반에 드는 것이라 한다.
삶에서 고통이나 잘못(악)은 먼저 규정되어 있는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삶의 과정에서 행위를 경계 짓는 방식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건강에 비유하여 과도하게 열을 내도 안되고 열이 너무 없어도 안되는 것과 같은 경향성을 유지하면서 타인과 함께하는 공동체를 만들고자 서로 도우며 만들어가는 노력에서 즐거움, 선행, 아름다움 등이 있다는 것이다. 비진리, 비존재에 관한 논의도 경계(페라스)를 정하고 갈라놓고 난 뒤에, 존재와 진리가 먼저 있고, 그 쪽에 서 있다는 가정에서 경계 밖을 규정하는 것이 악순환(부당주연)의 오류라는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그런 선전제도 경계도 없는 공(空)과 같은 실재성에서 원인(인연 因緣)을 찾아야 한다는 하는 점도 플로티노스의 상향의 연속성과 닮았고, 벩송이 제논의 비판을 비판하는 점과도 닮았다.
벩송은 상식(공통감관)을 시원으로 해야 함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 감관에 서서 기준을 만들거나 대상을 만들려고 하는 쪽이 선결문제 미해결의 오류를 범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오류를 벗어나는 것은 상층론도 이원론도 아닌, 자연의 자발성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러한 발상의 문헌적 증거와 사유의 전개를 고전 그리스철학에서 찾았던 플로티노스를 통해서 증거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 사유에 그 내용을 길어 올릴 것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암묵적으로 형이상학의 실재성과 종교의 최고원리의 대상화 등은 공통감관의 시대에 인류가 통일성의 절대자를 바랐던 욕망의 투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고, 르네상스와 계몽기를 거치면서 19세기 후반의 새로운 실증과학과 더불어 고등양식을 통해 다음측정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플로티노스로부터 찾았다는 것이다. 그 시발점이 신체를 지닌 의식(생명성)이 영혼과 같은 권능의 길로 갈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 길을 가는 노력에 의해 자연의 권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권능의 발현, 창안, 창조가 자유이다. (13:34, 55SLH)
3.1 회의주의와 허무주의 극복, 새로운 공동체
서양철학사가 19세기 중엽 열역학과 생물학의 발달로, 서양사상의 두 가지 큰 난제를 해소하는 길(파사 破邪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하나는 지식론(인식론)의 통일성 확보에 대한 길로서 회의주의의 극복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삶에서 허무주의 극복으로 새로운 자아(아제인간)을 논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 철학은 회의주의의 극복이라고 할 때,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에서 초대 학당장 스페우시우스(플라톤의 조카)로부터 10대학당장 카르네아데스에 이르러 이데아의 현실적용의 어려움으로 회의주의로 흐르게 되었다. 이런 회의주의 극복이 지식론(인식론)의 발달사에 기여할 것이다. 정확성과 증거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벩송이 보기에 회의주의의 극복에 대한 다른 길이 있었는데 고르기아스 회의론에서 소크라테스의 다이모니아로 이어지며, 이 주제가 영혼론일 것이라는 것이다. 이 영혼론은 도덕론과 연결되어 근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전자의 회의론이 정확성을 확보하는 주체와 범주를 구축해앤 칸트를 거쳐서 주체의 인식틀이 먼저 있음으로써 해결되었다고 라고 한다면, 후자에서 희의론은 영혼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오랜 삶에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아, 신체를 통한 재인식(기억)을 수용하면서 의식(con-science)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쪽으로 가는 방향을 벩송이 정립할 것이다.
벩송에 이르면, 영혼이 외부에 왔다거나, 주체로서 정신이 먼저(선전제)로서 실재했다고 하는 견해가 무너진다. 나가르주나는 부처의 성립에서 이 둘을 먼저 주장하는 자들을 깨는 파사(破邪)의 길을 갖다. 벩송은 불합리에 빠디 착각을 벗어나라고 한다. 그런데, 영혼이란 무엇인가? 영혼도 생명의 발달과정 또는 진화과정에서 자기를 만들어가는(se faisant) 중에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영혼의 형성도 대상화도 먼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벩송은 과거의 영혼을 섭렵하였지만 상층론의 해석이 신화적이고 종교적임을 알아채고, 지구의 변화과정과 생명체의 변화과정에서 생성(창조) 생장하는 영혼의 성립과정을 찾으려 한다. 아메바를 생각하면 영혼이라는 대상이 먼저 있었다는 것이 부정되고, 두뇌가 작용하여 지식을 확보하는 서술도 또한 지식(인식)을 다루는 능력이 먼저 있었다고 여기는데, 생명의 생장과 발전에서 그런 일이 먼저 있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영혼이란는 용어대신 만들어지는 과정의 덩어리를, 즉 의식 상태를 벩송이 연구과 탐험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 도덕론인데, 도덕론의 토대 또는 심층에는 종교가 자리잡고 있다. 신들이 동시에 세상의 온갖 것을 만들었다는 창조설은 논리상(logos) 동시성 또는 동일율의 성립에한 후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정합론이 아니라도 다 안다. 탈레스 이래로 소크라테스가 전승의 신들과 동방의 신들의 개입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 속에서 행동의 기준 또는 도덕적 규범을 찾으려 했을 때, 내재적 의식(다이모니아) 또는 영혼의 욕망(생성하여 완수의 길)을 이루고자 노력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양 사상사에서 종교가 개입하여 선(善)과 성(聖)이 먼저 있기 때문에, 이것을 향해 노력하고 있는 것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먼저 있다’는 어떤 것이 인간의 도덕성과 종교성을 이끌어간다는 추론을 내세웠다. 영혼(의식, 자의식)의 성장에 대해, 선, 성, 미(美)가 먼저 있었고 완전하고 매력적이라, 여기에 매혹되어 나간다고 했을 것이다. 이런 논리가 아리스토텔레스 ‘사유의 사유’, 즉 ‘신’의 논리와 결합하여 신의 힘이 생명에도 물질에도 내재해 있어서, 모자라고 결함있는 인간이 완전으로 향하도록 한다는 추론을 전개했었다. 그러나 현자들은 선전제로서 신의 인정이란 결정론을 따르는 것으로 보았고, 이들은 스스로 행함에서 임의자유 또는 자유를 확보할 노력을 하면서, 현자의 철학은 지식론(로고스론)과 다른 길을 갈 것이다.
철학사는 제반과학의 미발달로, 스스로 개척하면서 길을 열고 가기에 역부족이었다. 고대를 거쳐 중세 1600여년을 신의 뜻을 따름에서 완성의 길로 또는 자유의 길로 갈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신의 입김에 의한 세계의 완전성, 힘(가능성)의 통일성을 먼저 있다고, 또는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한에서는 인간은 무기력하며(허무에 빠지면), 신에 의존(포로)가 될 수 밖에 없었고, 다른 한편 스스로 지식을 만든다 것도 불가능하다고 여겼다(회의–불가지). 인간 또는 세상은 진실로 부족한 존재자(현존), 잘못하는 존재자, 무(허무)의 존재자, 악의 존재자, 무식한 존재들의 것일까? 이런 허무에서 벗어나는 길을 무엇일까? 스피노자는 자연이 필연성을 가는 것으로 여겼다. 그 길은 인간에게 매우 어렵고, 당대의 인식적 능력으로 설명, 표현하기에도 어렵고, 그 길을 가는 이도 드물다고 한다. 19세기 중반에 새로운 학문들이 등장하였고, 니체는 허무주의의 극복을 크리스트교의 가면(假面), 악몽(un cauchemar, 두통거리)의 벗어나는 길로서 아제인간(다음인간)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형이상학을 무너뜨리는데 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형이심학은 재인식과 기억이론을 실증적으로 다룰 수 있어야 등장할 것이다.
벩송은 상층론의 주장의 두 가지를, 나가르주나가 파사현정(破邪顯正)하려고 파사(破邪)하듯이, 두 가지인, 무(허무) 없음, 정지의 없음, 제시하였다. 무가 없으니 허무주의의 극복을 말할 필요가 없고, 정지가 없으니 상층의 실재론, 천국이니 부동의 신이니 하는 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벩송은 새로운 전개를 어떻게 했는가? 회의주의와 허무주의가 현존의 질서 없음, 무질서 인데 비해서 상층에는 질서가 있고 체계가 있다고 하면서 무의 극복이니, 논리적 지식 탐구니 하는 헛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벩송은 무질서도 없고 두 질서가 있으며 상향질서와 하향질서가 있다고 하면서 이는 지식론에서 성립한다는 것이다.
벩송이 사실상 EC 4장에서 세 가지를 파사(破邪)하였다. 무의 부정에서 현존, 무질서의 부정에서 두질서, 정지의 부정에서 현존에서 세 가지 변화(형태변화, 성질의 변질, 행동의 운동)를 전개한다. 이 세 가지를 파사(破邪)하고 새로운 현정(顯正)이 그의 “지속” 용어이다. 지속이 실재하며, 지속이 아르케이고 지속이 아이티아이다. 이는 무(형태도), 색(성질)도 아니도, 언어로 표현해도 고정(명사, 형용사, 동사)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세 가지가 다 지속하는 운동성이라는 것이다. 그 현정은 성질이라 해도 안 되고 형태가 있다고 해도 안 되고, 우리 앞에 상상이든 공상이든 고정된 모습이 있다고 해도 안 된다. 보살(부처)의 본래 모습은 없다. 그럼으로 흐름에서 연속적으로 사유하고 노력하면서 살아야 한다. 나로서는, 이렇게 유비적으로 벩송의 사유를 나가르주나와 견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새로운 공동체 신화의 신이든 종교의 신이든 상층에서 내려온다는 가설 또는 요청을 결과로서 삼고서, 레고(원자)들를 조작하는 경우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점에서 하나는 파사(破邪)하는 것, 즉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둘째로 현실의 삶이 무질서하게 보이는 것이라고 간주하고 갈라서, 한쪽은 옳고 다른 쪽은 그르며, 한쪽 다른 쪽을 빨갱이라고 하는 자들의 오만과 이기심을 버려 한다는 것이다. 양 질서에서 상향과 하향의 운직임 속에서 양자의 접선처럼 만나는 거기에 현존이 있다. 먼저 있다는 그 탐만치(貪瞋癡)를 버려라, 그리고 현실의 상태와 더불어, 인민과 더불어 풀어갈 때는 언어는 고정이 아니라 그 내면과 함께하는 것으로 교감과 공명으로 재인식해야 한다. 이런 직관을 통해서 인민이 소통한다. 소통하고 상부상조(품앗이)하면서 현존계를 산다. 그것을 즐겁고, 유쾌하게 살려고 노력하자는 것이다. 물이선소이불위(勿以善小而不爲)하자, 새로운 공동체는 위마니떼르와 리베르테르가 만들 것이다. - 평화통일영세 중립코리아. (15:23, 55SLI)(15:35, 55S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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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들에 대해 다시 하고 싶은 이야기 ...
옛 어른들은 무언가 잊어버린 것이 있으면, 신체가 움직인 장소를 되 찾아가지 말고 머리속에서 잘 그려 생각해보라 그러면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비해 몸이 건강해야 생각도 건전하다고 한다. 신체와 사고 사이에, 벩송의 표현으로, 어떤 연결이 있을 수 있지만 인과적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사유가 발달하지 못한 고대시절에는 관계보다 연결이 있다고 서술을 했다는 점에서, 고대철학은 공통감관이 사고의 틀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고 보고, 벩송이 둘 사이에 연결이라는 점에서 연대가 있다는 하였다. 이 연대를 일반적으로 거울효과라고 부른다.
근대에 와서 둘 사이 연대가 아니라 둘 사이에 연대보다 더욱 밀접한 (법칙화 할 수 있는)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수학적으로 두 관계를 점으로 생각하여 두 점이 고유성이 있다. 이 말은 놀라운 말이다. 물체는 정신의 조종을 받는데, 물체도 또한 고유성이 있다고 하였다. - 물체가 신의 손아귀에서 떠나 실체가 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신체는 영혼과 별개로 자기 작동성이 있을 수 있다고 하면, 1600년을 지배해온 상층이 심층의 지배권을 상실하는 것이다 - 르네상스에서는 그 물체와 정신 각각을 점으로 생각하여 두 관계를 법칙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시계가 각각이 따로 있어도 동시적으로 같은 시각을 가르치듯이 신체와 정신 사이에 이원성이지만 같은 기능을 실행한다고 생각하였다, 두 관계가 고대철학의 상식이 아니라, 근대철학의 양식으로 보아 둘 사이에 연대성을 넘어서 동일성을 수학적으로 법칙화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두 실체론을 주장하고, 두 실체가 형상과 성질과는 관계없는 대수학의 점들(정해지지않은 기호들)과 같은 관계로 설명하면서, 고대철학이 원리라고 표현 했던 것을, 근대철학에서 법칙이라는 용어 바꾸어 놓았다.
벩송이 원리라고 서술한 것은 상식(공통관관)이 오관을 공통으로 하는 인식을 통해서 그럴듯하게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다. 대수학의 발달로 부정형의 x, y를 좌표상으로 바꾸면서 둘 사이의 연대가 아니라 관계식으로 바꾸어 설명하면서, 천문의 수를 지상의 수로 대입시켜도 두 관계가 불변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정대수에서 물체의 내부의 변화와 운동을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벩송이 새로운 과학으로써 전자기장과 생명생장을 설명하면서, 상식 연대과 양식의 관계와 전혀 다른 연관을 제시한다, 운동과 시간은 연대(거울 효과)도 아니고 법칙(두 시계의 효과)도 아니며, 서로 다른 양태에서, 수학적 논리의 양태가 논리를 확장하는 것과 달리, 물질의 양태로서 생성하고 발전하며 새로운 창발을 한다는 것이다.
이 후자의 질서를 아는 재인식은 고등양식이라고 한다. 고등양식은 과거를 보태는 재인식인데, 그 현실태가 기억이다. 기억의 실재적 증거로서는 생명의 확장(진화), 새로운 종의 창조에 있다는 것이다. 기억 그것은 노력의 지속적 과정이며, 엉키고 부풀려지고 확장되는 작동이다. 이 기억의 실재적 모습(엉소마티즈, 신체의 육화)는 생명역사에서 동일한 적도 없고, 80억 인구에도 동일 엉소마티즈가 없다. 이것을 존재, 본질이라고 말하면서 신이 만들었다고 하는 착각을 깨뜨리는 것, 벩송은 그 사고를 파사(破邪)하면서 형상형이상학의 세 가지를 착각이라 부른다. 무, 무질서, 정지(언어적으로 세 가지, 명사, 형용사, 동사)를 말하는 순간에, 즉 진리라고 하는 여기는 찰라에, 사고는 착각에 빠진다고 한다. 벩송의 전 저작은 이런 착각을 파사(破邪)하는 것이다.
파사(破邪)한 다음에, 벩송은 현정(顯正)을 말하지 않았다. 파사하고 스스로 자기 삶과 모습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스피노자가 말하듯이 그런 인간은 드물고, 게다가 그런 노력은 어렵다고 하듯이. 벩송도 그런 노력을 하는 이가 드물지만, 자연은 그런 권능을 끊임없이 발현하고 있고, 그 자연의 권능에 맞는 노력을 하는 이가 드물고 그 노력이 어렵지만 스스로 만들어 가는 노력을 하는 인간을 신비가(보살)라 표현하였다. 나가르주나가 부처는 없다(파사, 破邪), 그것을 대상화하는 것도 없다(부처 부재), 이로서 두 부재, 두 부정을 설했다(불이). 그렇다고 보살로 가는 길이 없는 것은 아니기에 공(空)이라고 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부정되었던 ‘공’이라는 실재성을 묵언수련과 같은 절차탁마(切磋琢磨)로 노력하면 보살로 이를 수 있으며, 열반에 들기까지 보살이라고 규정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라는 것이다. 삶이 그렇다. 규정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비규정에서 출발한다는 의미에 원인은 비규성이며, 이 비규정성이 이데아나 에이도스도 아니고, 본질이나 실체도 아니듯이, 부처도 보살도 먼저 잇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원인) 그 자체가 자기에 의한 자기 생성으로서 나아가는 실재성이며, 이 실재성이 무엇을 양태로서 보여줄지 아직은 모른다는 의미에서 자연은 다양체라는 것이다.
파사현정(破邪顯正), 상식과 양식의 시대에는 인간의 의식이 영혼에서 왔다는 외부적 원인으로 생각하는데서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었다. 이런 선결문제 미해결을 오류를 불교도 알았고, 고대 그리철학에서 회의주의 허무주의 극복의 노력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인식의 부조리를 알았다(아이러니 또는 파라독스라고). 그러나 공통감관과 상식으로 파사현정을 하고 싶어도 잘 안 되는 것은 신체의 내부의 의식(con-science)을 증거로서 또한 정확성으로서 제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벩송은 그의 강의록에서 생물학과 생리학의 등장으로 문제제기를 올바로 할 수 있으며, 유전과 의식 상태의 지속으로 검증 자료를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인식이 아니라 재인식이다. 주의에서 여러 가지가 있다. 수학을 풀기 위한 주의가 아니라, 내재적 의식의 덩어리를 재인식하는 주의는 전혀 별개의 주의라는 것이다. 게다가 유전은 내재성의 지속(시간)을 해명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기억과 유전은 지속이며, 35억년의 과정을 지니고 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아이스테시스라고 즉 선험적 감성이라고 하는 칸트는 데카르트 양식을 주체의 기능(학문적으로 권력)을 인정(인식)하였는데 비해, 35억년의 역사의 지속은 과정의 우여곡절로서 신아이스테시스, 즉 공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런 과거의 총체적 재인식을 기억이라 한다. 그 기억이 생명체에서 유전하며, 사고의 기능적 도구 제작으로 신체를 편안하게 하는 쪽이 아니라, 신체의 아픔과 혼자의 어려움을 알게 하는 지속의 면역 활동에 있다.
서양의 고대와 근대가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알았지만, 상식과 양식을 통해 실증적으로 넘어가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무, 비존재, 정지, 악, 추 등에게 자발적 능력을 인정않으면서도, 이를 극복하는 노력에서 과학이 발달했다고 한다. 불교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알았지만, 돈수(頓修) 돈수를 강조하듯이 그 많은 경전의 설법처럼 착하게 살아서 작은 선업이라도 쌓게 되면, 신체의 아픔은 그 선업(업보)이 해결해 줄 것으로 설교한다. 중국에서는 고통과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물이선소이불위(勿以善小而不爲)하라고 하고 자신의 불이익(사적이익을 버리고)을 감수하더라도 평천하(平天下)로 가야 함이 인민의 고통을 해소한다 현자의 길에 대해 상식을 넘어서 양식에 호소했다. 불교와 유학이 각각의 경전들을 참조하건데, 사물의 변화를 등한시 한 것이 아니라, 상식과 양식을 통하여 고통과 난제의 해결하는데 있어서, 사회적(도덕적 종교적) 함의로서 평화에 있다는 강조하다가 보니, 19세기 말까지 사회적 평천하에서 현자가 투쟁보다 승리보다 자신의 한 수를 접어 조화에 동의한다. 그 조화가 인간관계에서 이타심에 호소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평천하를 위하여 물체의 난제를 뒷전으로 미루었을 것이다. (17:36, 55S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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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 강의 수강자는 필히 파일을 다운 받아서 강의에 참석 바랍니다.
수강자들의 질문에 대한 단상이 포함된 파일
벩송이 플로티노스 강의록(에콜로르말 강의, 초역 완역)과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에서 플로티노스부분(부분역)
파일
플로티노스 강의 관련 인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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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석자들과 질문자들을 위하여,
첨가된 파일 속에는
즉, [정담2022SLJ철납50플로티노NN] 에는
3.1 회의주의와 허무주의 극복, 새로운 공동체
# 질문자들에 대해 다시 하고 싶은 이야기 ...
두 단락이 길게 전개되어 있습니다.